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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 아랍 형제국을 미사일로 때린 이유 (페르시아 vs 아랍, 1400년 전쟁) 

작성자
김 경진
작성일
2026-03-05 22:12
조회
265

2026년 2월 28일 새벽, 테헤란의 하늘이 갈라졌습니다. 아자디 타워 서쪽 하늘에서 첫 번째 폭발이 일어났을 때, 그 소리는 단순한 폭격음이 아니었습니다. 40년 가까이 이란을 통치해온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가 숨진 그날 밤, 이 나라의 역사 전체가 한꺼번에 뒤흔들렸습니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소셜미디어에 짧은 메시지를 올렸습니다. "이란 국민이여, 나라를 되찾을 기회는 지금뿐이다." 이란 국영TV는 몇 시간 동안 침묵했습니다. 이란 혁명수비대(IRGC) 대변인이 마침내 마이크 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복수한다. 중동 전체가 우리의 전장이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 바레인에서 폭발이 일어났고, 쿠웨이트에서 세 명이 숨졌으며,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와 동부 주(州)에 이란의 미사일이 떨어졌습니다. UAE에서는 파키스탄, 네팔, 방글라데시 국적의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카타르 총리는 전화기를 들고 이란 외무장관에게 항의했고, 이란은 "우리가 노린 것은 미군 기지이지 카타르 자체가 아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란 혁명수비대는 중동 27개의 미군 기지를 공격했다고 발표했고, 미국 중부사령부(CENTCOM)는 토요일 이후 이란 전역에서 2천 개 가까운 목표물을 타격했다고 밝혔습니다. 국제적십자위원회 위원장은 "통제할 수 없는 연쇄반응이 시작됐다"고 경고했습니다.

이 전쟁이 세계를 충격에 빠트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란의 공격 대상 목록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해 탄도미사일이 날아간 것은 예상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이란은 바레인을 때리고, 쿠웨이트를 때리고, UAE를 때렸습니다. 오만은 불과 며칠 전까지 미국과 이란 사이에서 평화 협상을 중재하던 나라였는데, 오만 무스카트 항구 인근에서도 드론 공격이 발생했습니다. 이 나라들은 모두 아랍 국가들입니다. 무슬림 형제들입니다. 이란이 수십 년간 "이슬람의 단결"을 외쳐온 나라들입니다. 그런데도 이란의 미사일은 방향을 가리지 않고 날아갔습니다.

왜였을까요. 이 질문의 답은 오늘의 뉴스 속에만 있지 않습니다. 천사백 년 전 아라비아 사막에서, 이천오백 년 전 페르시아 제국의 쐐기문자 속에서, 그리고 1979년 테헤란 거리의 군중 함성 속에서 동시에 들려옵니다.


이란은 아랍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데서 모든 분석이 시작됩니다. 현재 이란이 겪고 있는 전쟁을 "이슬람 세계 대 서방"의 구도로만 읽는 시각은 절반만 맞습니다. 오히려 이 전쟁에는 훨씬 더 오래된 층위가 깔려 있습니다. 민족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이슬람을 믿는 방식도 다릅니다. 그리고 그 차이 하나하나에 수천 년의 자존심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이란인들은 아리안족의 후예입니다. '이란(Iran)'이라는 국명 자체가 '아리안족의 땅'을 뜻합니다. 인도-유럽어족의 갈래인 이들은 생김새가 남유럽인들과 비슷하고, 스스로를 아랍과 구별되는 문명권으로 인식합니다. 반면 아랍인들은 셈족과 햄족의 혈통을 잇습니다. 이란인들이 정착 농경 문화를 발전시키며 왕조를 세우고 궁전 문화를 꽃피울 때, 아라비아반도의 아랍인들은 사막과 초원을 오가는 유목민으로 살았습니다. 이 두 가지 삶의 방식은 서로 다른 세계관을 만들어냅니다. 정착 문명은 위계와 기록과 행정을 발달시키고, 유목 문화는 유연성과 연대와 즉흥성을 키웁니다. 같은 신을 믿고 같은 방향을 향해 절을 하더라도, 그들이 기도 후 일어나 살아가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터키 또한 중동에 속하지만 아랍과 다른 튀르크족입니다. 중동은 결코 단일한 정체성을 가진 공간이 아닙니다. 페르시아인, 아랍인, 튀르크인, 쿠르드족, 베르베르족—이 민족들은 같은 사막과 산악 지대를 수천 년간 공유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들만의 역사를 주장해왔습니다.

언어는 그 차이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란인들은 파르시어(페르시아어)를 씁니다. 문자는 아랍의 영향을 받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형태를 취하고 있어 겉보기에 아랍어와 비슷해 보이지만, 알파벳 개수가 다르고 문법 구조는 완전히 다릅니다. 파르시어는 영어와 마찬가지로 주어-서술어-목적어의 순서를 따르며, 아랍어에 비해 발음이 부드럽고 음악적입니다. 아랍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파르시어를 들으면 단어 몇 개는 알아들을 수 있을지 몰라도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파르시어는 이란을 넘어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까지 뻗어 있는 문화권의 언어입니다. 루미의 시가 파르시어로 쓰였고, 하피즈의 가젤이 파르시어로 불렸습니다. 이란인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지켜온 것은 단순한 언어 보존이 아니라 정체성의 사수였습니다.

아랍의 지배 아래에서도 이란은 자국어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7세기 이슬람 제국이 팽창하면서 이란(사산조 페르시아)을 정복했을 때,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등 많은 지역은 점차 아랍어를 모국어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란은 달랐습니다. 이슬람을 수용하면서도 파르시어를 계속 썼고, 오히려 이 언어로 위대한 이슬람 문학을 창조해냈습니다. 이것이 이란인들의 자부심이 어디서 오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들은 정복당했지만 녹아들지 않은 민족입니다.


종교의 균열: 시아파와 수니파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가 632년 세상을 떠났을 때, 후계자를 누구로 할 것인가를 놓고 움마(이슬람 공동체) 안에서 분열이 생겼습니다. 다수파는 무함마드의 장인이자 가장 가까운 동료인 아부 바크르를 초대 칼리프로 추대했습니다. 이들이 수니파의 뿌리입니다. 소수파는 무함마드의 사위이자 조카인 알리가 진정한 후계자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이 시아파(시아트 알리, 즉 '알리의 추종자들')의 시작입니다.

알리는 결국 암살당했고, 그의 아들 후세인은 680년 카르발라 전투에서 수니파 우마이야 왕조 군대에 의해 살해됩니다. 이 사건이 시아파에게는 종교적 트라우마이자 저항의 원형이 됩니다. 매년 아슈라 축일이 되면 시아파 신자들은 후세인의 순교를 기리며 검은 옷을 입고 가슴을 칩니다. 이란의 시아파 신자들에게 이 의식은 단순한 종교 행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억압에 맞서 싸운 순교자들의 후예"라는 정체성 확인의 순간입니다.

이란은 전 세계 이슬람 인구의 15%를 차지하는 시아파의 종주국입니다. 수니파가 다수인 아랍 세계와의 종교적 긴장은 여기서 나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 성지 메카와 메디나를 관장하는 수니파의 수호자를 자처합니다. 이란은 시아파 세계의 정신적 수도입니다. 두 나라가 같은 알라를 믿고 같은 코란을 읽지만, 이슬람을 해석하는 방식과 누가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가를 두고 1,400년째 다투고 있습니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의 시아파 신정(神政)체제는 이 분열에 더 강한 이념적 색채를 입혔습니다.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이슬람 혁명은 이란만의 것이 아니라 전체 이슬람 세계의 혁명"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는 곧 사우디아라비아와 요르단, 이집트 같은 수니파 아랍 왕정을 향한 도전이었습니다. 이란 혁명이 수출될 경우 자국 내 시아파 소수 집단이 들고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걸프 아랍 왕정들은 이란 혁명의 확산을 가장 큰 위협으로 봤습니다.

혁명 이전의 이란은 달랐습니다. 팔라비 왕조 치하의 1960~70년대 테헤란에서는 여성들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거리를 걸었습니다. 대학 캠퍼스에서는 남녀가 함께 수업을 들었고, 나이트클럽에서는 음악이 울려 퍼졌습니다. 왕비 파라 디바는 파리 패션을 즐겼고, 샤(국왕)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서방과의 우호 관계를 바탕으로 현대화를 추진했습니다. 이 나라가 불과 몇 년 만에 베일 착용이 법으로 강제되는 이슬람 공화국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이란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복잡한 내부 모순을 안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모순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2022년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이 촉발한 '히잡 반대 시위'에서 이란 여성들이 두건을 태우며 거리로 나왔을 때, 세계는 그 모순의 폭발력을 다시 목격했습니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기억

기원전 550년경 키루스 대왕이 세운 아케메네스 왕조로 거슬러 올라가는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는, 이란인들의 집단 기억 속에 살아있는 신화입니다. 이 제국은 오늘날의 이란을 넘어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 터키, 그리고 인더스강 유역까지 뻗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에서는 세계 각지의 사절단이 조공을 바치러 왔고, 궁전 벽면에는 스물세 개 민족의 행렬이 부조(浮彫)로 새겨졌습니다.

이 영광의 계승자를 자처한 것이 3세기부터 7세기까지 존속한 사산조 페르시아입니다. 사산 왕조는 로마 제국과 맞먹는 강대국으로, 비잔티움과 수백 년간 전쟁을 치르며 유럽의 역사를 좌우했습니다. 그러나 7세기에 아라비아에서 발원한 이슬람 세력이 급속도로 팽창하면서, 사산 왕조는 651년 무너집니다. 이것이 이란-아랍 갈등의 역사적 원점입니다.

이란인들의 눈에서 보면, 아랍인들은 정착 농경 문명을 갖지 못했던 사막의 유목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종교가 아랍인들을 하나로 묶자, 그들은 거대한 물결이 되어 사산 왕조의 군대를 무너뜨렸습니다. 카디시야 전투(636년)와 나하반드 전투(642년)에서의 패배는 이란인들에게 치욕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랍인들은 이 전투를 이슬람 확산의 성전으로 기념하고, 이란인들은 고유 문명의 패배로 기억합니다. 이라크와의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년) 당시 사담 후세인이 전쟁 이름을 굳이 '카디시야트 사담'이라고 불렀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1,300년 전 아랍이 페르시아를 꺾은 그 전투를 소환한 것이었습니다. 이란은 그 이름에서 모욕을 읽었고, 8년간의 전쟁을 치르면서 피의 대가를 치렀습니다.

이란은 페르시아 제국의 부활을 꿈꾸고, 아랍 세계는 이슬람 칼리프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려 합니다. 같은 신을 섬기는 두 문명이 2,500년 역사의 서로 다른 황금기를 동시에 꿈꾸고 있습니다. 그 꿈들은 필연적으로 충돌합니다.


1979년과 그 이후

혁명 이후의 이란은 이 역사적 자존심을 이슬람 이념으로 포장했습니다.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 수출' 프로젝트는 실질적으로 페르시아 제국의 지정학적 영향권을 이슬람의 이름으로 재구축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이란은 이라크의 시아파 민병대를 훈련시켰고, 레바논에서는 헤즈볼라를 창설해 지원했으며, 예멘에서는 후티 반군에 무기와 기술을 제공했습니다. 시리아 내전에서는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떠받쳤습니다. 이른바 '시아 초승달(Shia Crescent)'—이란,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으로 이어지는 시아파 영향권의 지정학적 벨트—이 이란 외교정책의 핵심이었습니다.

이 전략은 수니파 아랍 왕정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와 UAE에게 실존적 위협으로 인식됐습니다. 이란이 지원하는 예멘 후티 반군의 로켓이 리야드 공항에 날아들었고, 이라크의 시아파 민병대는 이란의 지령을 받으며 움직였습니다.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할 경우 중동의 권력 균형이 이란 쪽으로 완전히 기울 것이라는 두려움이 아랍 왕정들을 짓눌렀습니다.

그래서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모로코, 수단은 2020년 이스라엘과 '아브라함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이 협정은 표면적으로 이스라엘-아랍 관계 정상화이지만, 그 심층에는 "공동의 적 이란에 맞서 이스라엘, 미국, 걸프 아랍 국가들이 손을 잡는다"는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도 이 흐름에 합류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이 맥락에서 보면, 이란이 이번 공격에서 바레인과 UAE, 사우디를 향해 미사일을 쐈을 때 그것은 "미군 기지를 노렸을 뿐"이라는 변명과 무관하게, 아브라함 협정의 아랍 서명국들을 응징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설득력을 얻습니다.


2025년의 전조: 1차 핵시설 공격과 '저항의 축' 붕괴

2026년 2월의 전면전은 갑자기 온 것이 아닙니다. 2024년 이스라엘은 이란의 대리 세력들을 하나씩 무력화했습니다. 가자전쟁에서 하마스 지도부를 제거했고, 레바논에서는 헤즈볼라 사령부를 공습해 나스랄라 사무총장을 포함한 지도부를 괴멸시켰습니다. 시리아에서는 이란의 핵심 동맹이었던 아사드 정권이 반군에 의해 허망하게 무너졌습니다. 이란이 수십 년간 공들여 구축한 '저항의 축'이 불과 1년 만에 와해됐습니다.

2025년 6월에는 이스라엘이 이란 본토의 핵시설과 군사기지를 직접 공습했습니다. 미국이 가세해 이란이 독자적으로 제거하기 어려운 요새화된 지하 핵시설들을 타격했고, 12일간의 전쟁은 이란의 항공방어 시스템에 심각한 손상을 입힌 채 휴전으로 마무리됐습니다. 이란의 군사적 자신감은 크게 위축됐습니다.

2025년 말부터 이란 국내 상황도 급격히 악화됐습니다. 경제 제재에 따른 물가 폭등, 히잡 강제 착용법 강화에 반발한 시위가 전국으로 번졌습니다. 정부의 폭력 진압으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6년 1월 "이란 시위대를 돕겠다"고 선언했고, "잠겨 있고 장전돼 있다(lock and loaded)"는 표현으로 군사 개입 가능성을 열어뒀습니다. AP통신은 "일부 이란 국민들이 외국의 공격을 내심 바라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정권에 대한 민심이 그토록 돌아섰다는 뜻이었습니다.


오만의 실패한 중재: 전쟁 직전까지 이어진 외교

아이러니한 것은, 전쟁이 터지기 불과 하루 전까지 외교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만의 외무장관 바드르 알부사이디는 2026년 2월 27일, 미국과 이란이 핵 협상에서 "돌파구에 도달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란이 농축 우라늄 비축을 중단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전면 사찰을 수용하는 데 동의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평화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고 알부사이디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중동 특사 스티브 위트코프의 설명은 달랐습니다. 이란이 협상장에서 우라늄 농축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주장하며 미국의 완전한 농축 중단 요구를 거부했고, 심지어 460킬로그램의 60% 농축 우라늄 보유량이 핵폭탄 11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이라고 자랑했다는 것입니다. 협상 테이블 아래에서는 양측 모두 군사적 준비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란은 석유 수출을 평소의 세 배로 늘리고 비축량을 줄였습니다. 미국은 1월부터 항공모함 USS 에이브러햄 링컨과 유도미사일 구축함들을 중동으로 이동시켰고, 2월에는 두 번째 항공모함 USS 제럴드 R. 포드까지 파견했습니다. 이는 2003년 이라크 침공 이후 중동 최대 규모의 미군 전력 집결이었습니다.

2월 28일 새벽, 공격이 시작됐습니다. 오만의 중재는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가 됐습니다. 알부사이디는 "진지하고 적극적인 협상이 훼손됐다"며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Operation Roaring Lion과 Operation Epic Fury

이스라엘이 '포효하는 사자 작전(Operation Roaring Lion)', 미국이 '서사시적 분노 작전(Operation Epic Fury)'이라고 명명한 이 합동 공격은, 처음부터 단순한 군사 타격이 아닌 정권 교체(regime change)를 목표로 설계됐습니다. 테헤란, 이스파한, 콤, 카라즈, 케르만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습이 시작됐고, 최고지도자 하메네이의 관저가 파괴되면서 그가 숨졌습니다. 이란 국가안보최고위원회 전 수장 알리 샴하니를 비롯한 고위 군사 지도자들이 차례로 제거됐습니다.

미국 중부사령부는 이란 해군 함정, 잠수함, 대함 미사일 기지, 지휘통제 센터를 포함해 1,700개 이상의 목표물을 타격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란의 최고지도자 선출을 담당하는 전문가회의 건물도 파괴됐습니다. 쿠드스군 레바논 군단 대행 사령관 다우드 알리자데도 테헤란에서 사망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대규모 전투 작전"이 "이란 정권으로부터의 위협 제거"를 목표로 하며, 이란의 핵 프로그램, 미사일 산업 파괴, 해군 제거와 함께 지도부 교체를 추구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이란 국민에게 직접 "이 나라는 당신들의 것"이라고 말하며 봉기를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작전이 개시된 직후, 국제원자력기구는 "이란에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유엔과 여러 나라들이 공격의 불법성을 지적하며 비판 성명을 냈습니다. 유럽 의회는 미국이 법적 근거 없이 이란의 주권을 침해했다고 규탄했습니다.


이란의 반격: 왜 아랍을 쳤는가

이란 혁명수비대는 "중동에 있는 미군 기지 27곳을 공격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논리에 따르면 바레인, 쿠웨이트, 카타르, UAE,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공격은 그 나라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그 나라들의 영토에 주둔하는 미군을 겨냥한 것입니다. 이란 외무장관 아라그치는 카타르 총리와의 전화에서 "우리 공격은 미국의 이익을 향한 것이지 카타르 자체를 겨냥한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지나치게 깔끔합니다. 이란 혁명수비대는 중동 전역에서 미군이 주둔하는 최소 27개 기지를 공격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와 주요 석유 인프라 및 킹 압둘아지즈 공군기지가 있는 동부 주를 타격했습니다. 사우디 동부 주는 사우디의 석유 심장부입니다. 이 지역을 타격한 것은 군사적 메시지를 넘어 경제적 메시지를 동시에 보낸 것입니다. "우리를 공격하면 세계 석유 공급망을 흔들 수 있다"는 위협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공동 작전에서 이스라엘은 바레인, 쿠웨이트, 카타르, UAE 등 걸프 아랍 국가들과 공동의 적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이 아랍 걸프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전략적으로 손을 잡아온 것, 미국의 중동 군사 작전을 위한 기지를 제공해온 것은 이란이 모를 리 없었습니다. 이란의 관점에서 이 국가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적 파트너였습니다. 그들의 영토는 이란을 겨냥하는 전진 기지였습니다. 이란 외무부는 "중동 내 모든 미국과 이스라엘의 자산과 이익이 합법적 공격 대상이 됐다"고 선언하며 "이번 침략 이후엔 레드라인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여기서 1,400년의 역사가 다시 등장합니다. 이란이 걸프 아랍 왕정들을 공격하는 데는 군사 전술 이상의 감정이 깔려 있습니다. 사우디가 이스라엘과 협력하고 미국을 등에 업은 채 이란의 지역 영향력을 억제해온 것은, 이란의 눈에는 고대부터 이어진 아랍-페르시아 대결의 21세기 버전입니다. 이란은 핵협상 테이블에서도, 전장에서도, "아랍이 외세와 손잡아 페르시아를 옥죄고 있다"는 서사를 내부적으로 강화해왔습니다.

이란의 공격이 무차별적으로 보이는 또 다른 이유는, 대리 세력(proxy)들이 무력화됐기 때문입니다. 하마스는 가자전쟁에서 지도부를 잃었고, 헤즈볼라는 나스랄라 사망 이후 전력이 반토막 났으며,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은 이미 붕괴됐습니다. 대신 싸울 수 있는 '손'을 잃어버린 이란이 이번에는 직접 포격을 선택했습니다. 전략적으로 취약해진 순간, 이란은 오히려 가장 넓은 범위로 공격을 전개했습니다. 이것은 공세적 자신감이 아니라 수세적 절박함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헤즈볼라와 후티

레바논의 헤즈볼라는 하메네이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 하이파 인근 군사 기지를 향해 로켓과 드론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는 2024년 레바논 휴전 협정 이후 처음으로 재개된 공격이었습니다. 레바논 정부는 이란의 공격을 비난하고 헤즈볼라의 무장 해제를 추진하는 입장이었지만, 전선이 다시 불붙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후티 통제 지역인 예멘도 걸프 아덴과 홍해에서 위협을 재개했습니다. 2025년 11월 가자 평화안 이후 중단됐던 상선 공격이 다시 시작됐고, 덴마크 선박회사 머스크는 수에즈 운하 대신 아프리카 희망봉을 우회하는 경로로 항로를 다시 변경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라크에서는 이슬람 저항군이 에르빌 폭발에 대한 책임을 주장했습니다. 이란의 군사행동 반경이 이스라엘에서 아라비아반도, 홍해, 이라크 북부까지 한꺼번에 활성화됐습니다.


국제사회의 반응: 유럽의 비판, 아랍의 분노, 중국과 러시아의 침묵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과 유럽이사회 의장 안토니우 코스타는 이 충돌을 "매우 우려스럽다"고 표현하며 모든 당사자들에게 "최대한의 자제와 민간인 보호, 국제법 준수"를 촉구했습니다.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이 분쟁의 합법성에 대한 논쟁이 시작됐습니다. 일부 국제법 학자들은 미국의 공격이 유엔 헌장을 위반한다고 지적했고, 또 다른 학자들은 이란의 핵 프로그램과 테러 지원이 자위권 행사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반론했습니다.

러시아와 중국은 공개적 비판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면서도 미국의 군사행동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이란이 2020년대 이후 러시아-중국과 급속히 가까워진 것을 생각하면 이는 예상된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묶여 있고 중국이 대만 해협을 둘러싼 긴장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란에 대한 실질적 군사 지원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제한적이었습니다.


하메네이 이후: 이란의 미래

하메네이의 사망은 이란 정치 체제에 공백을 만들었습니다. 이란 헌법상 최고지도자는 전문가회의가 선출합니다. 그런데 전문가회의 건물이 이번 공격으로 파괴됐습니다. 후보군 가운데 누가 살아남았는지조차 불분명한 상황에서 이란 정치 내부의 권력 투쟁이 가속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일부 분석가들은 이 위기가 1979년 혁명 이후 처음으로 이란 정치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봅니다. 국민들의 정권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외부의 군사적 타격까지 겹쳤으니, 혁명수비대가 내부 단결을 유지할 수 있을지가 관건입니다. 반면 외부의 공격이 오히려 내부 결집을 강화하는 '랠리 어라운드 더 플래그(rally around the flag)' 효과를 낼 수 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이란의 역사에서 외국의 침략은 종종 국내 모순보다 더 강한 민족적 결속의 계기가 돼왔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전쟁이 "일주일, 또는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외세가 공습만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데 성공한 사례가 얼마나 되는지를 역사는 냉담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동 지정학의 재편: 이란의 공격이 만들어낸 새로운 균열

이번 사태에서 가장 역설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는 이란의 미사일이 아랍 걸프 국가들을 타격하면서 동시에 그 국가들과 이스라엘, 미국의 연대를 더욱 강화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수십 년간 "이스라엘을 죽여라"를 외쳐온 이란 정권에 대한 새로운 시대가 열릴 수도 있다는 기대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미 이란을 "중동 최대의 위협"으로 규정하고 있었고, 이번 공격은 그 인식을 확인시켜줬습니다. 이란이 리야드를 때린 것은 아브라함 협정의 잠재적 참여국이었던 사우디를 완전히 이스라엘-미국 편으로 밀어붙이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카타르는 자국 영토 내 미군 기지를 두고 있으면서 동시에 이란과 외교 채널을 유지해온 나라입니다. 이번 공격으로 카타르는 그 아슬아슬한 중립적 포지션을 유지하기 더 어려워졌습니다. 오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만 무스카트 항구 근처에서 드론 공격이 발생하면서, 미국과 이란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해온 오만의 공간이 크게 좁아졌습니다. 후티 반군의 홍해 공격 재개는 세계 경제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머스크가 다시 희망봉 우회 경로를 택했다는 것은 수에즈 운하를 통한 해상 물류가 다시 차질을 빚는다는 의미입니다. 국제 유가는 출렁이고 있으며, 중동 리스크를 반영한 원유 프리미엄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 충돌을 만들었는가

테헤란의 폐허 속에서, 리야드에 떨어진 미사일의 파편 속에서, 홍해를 우회하는 컨테이너선의 뱃머리에서, 우리는 다시 그 오래된 질문과 마주합니다. 이란은 왜 싸우는가. 아랍은 왜 이란을 두려워하는가. 이 싸움은 언제 끝나는가. 민족이 다릅니다. 언어가 다릅니다. 이슬람을 믿는 방식이 다릅니다. 2,500년 역사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정복하고 지배하고 빼앗긴 기억을 안고 있습니다. 페르시아는 아랍에 무너졌고, 아랍은 다시 페르시아의 문화에 흡수됐으며, 이슬람이라는 이름 아래 두 문명은 불편한 동거를 이어왔습니다. 현대의 국경선은 그 복잡성 위에 그어진 얄팍한 선일 뿐입니다.

2026년 2월 28일의 공격은 그 선을 지워버렸습니다. 아자디 타워 옆 하늘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오늘만의 사건이 아닙니다. 기원전 550년 키루스 대왕의 원정에서, 636년 카디시야 전투에서, 1979년 테헤란의 군중 함성에서 축적된 모든 긴장이 한꺼번에 불을 붙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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