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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인공지능으로 과학을 바꾼 사람들 - 제5장. 알란 아스푸루-구직 (Alán Aspuru-Guzik): 자율 주행 연구실
인공지능으로 과학을 바꾼 사람들
제5장. 알란 아스푸루-구직 (Alán Aspuru-Guzik): 자율 주행 연구실
김경진 변호사
기후 위기라는 동기
2000년대 초, 하버드 대학교의 한 강연장 앞자리에 젊은 화학과 조교수가 앉아 있었습니다. 화면에는 지구 표면 온도와 해수면 그래프가 떠 있었습니다. 강연자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수석 과학 자문관을 지낸 기후학자 데이비드 킹 경이었습니다. 킹 경은 지금 속도로 이산화탄소가 쌓이면 수십 년 안에 영국 해안 절반이 물에 잠기고, 미국 플로리다주가 지도에서 사라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프의 선은 완만하게 시작해서 끝으로 갈수록 가파르게 꺾였습니다. 앞자리에 앉은 조교수의 이름은 알란 아스푸루-구직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손안의 휴대전화 배터리 효율을 0.1퍼센트 개선하겠다고 논문을 쓰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습니다. 강연장을 나서면서도 그 꺾인 그래프는 그의 눈앞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스푸루-구직은 멕시코에서 자랐습니다. 어릴 때 백과사전을 통째로 두 번 읽을 만큼 호기심이 많은 소년이었습니다. 고등학생 때는 멕시코 대표로 노르웨이에서 열린 국제화학올림피아드에 나갔습니다. 그곳에서 전 세계 또래들을 만났고, 화학이 자연의 규칙을 수식으로 풀어낸다는 사실에 끌렸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 하나하나가 방정식 안에서 정직하게 움직인다는 점이 좋았다고 합니다.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에서 화학을 공부한 뒤 미국 UC버클리 대학원에 진학해 계산화학자 마틴 헤드고든 교수 밑에서 양자화학을 배웠습니다. 2004년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어진 연구에서 양자컴퓨터로 분자를 시뮬레이션하는 알고리즘을 세계 최초로 고안해 《사이언스》지에 발표했습니다. 물 분자와 리튬수소화물 분자의 바닥상태 에너지를 양자컴퓨터 모의실험으로 계산해 낸 논문이었습니다. 그 성과로 그는 20대 나이에 하버드대학교 화학과 조교수로 임용됐습니다. 이론 화학의 세계에서는 이미 촉망받는 신예였습니다.
킹 경의 강연을 듣고 난 뒤, 아스푸루-구직은 연구 방향을 바꿨습니다. 2006년, 그는 하버드 청정에너지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 자원봉사자 수백만 명이 컴퓨터 화면보호기를 돌리는 동안 남는 연산력을 빌려, 태양전지에 쓸 유기 분자를 찾는 계산을 대신 시켰습니다. 사람들이 잠든 밤 사이, 수백만 대의 컴퓨터가 조용히 분자 하나하나의 전자 구조를 계산했습니다. 3년 동안 이 그리드는 300만 개가 넘는 유기 분자의 물성을 계산해 냈습니다. 컴퓨터 안에서는 눈부신 성공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벽은 실험실에서 나타났습니다. 컴퓨터가 골라낸 유망 분자 설계도를 화학자들에게 넘기면, 화학자 한 사람이 분자 하나를 실제로 합성하고 물성을 재는 데 평균 두세 주가 걸렸습니다. 실패도 잦았습니다. 유리병 속 시약이 예상과 다르게 반응하거나, 결정이 아예 만들어지지 않는 날도 있었습니다. 300만 개 후보 가운데 실제 소자까지 만들어진 물질은 겨우 세 개였습니다. 컴퓨터는 그 분자가 실험실에서 실제로 만들어질 수 있는지 몰랐던 것입니다. 아스푸루-구직은 이 경험을 성공한 실패라고 불렀습니다. 계산은 완벽했지만 합성은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산과 합성 사이에 놓인 넓은 강을 두 눈으로 확인한 셈이었습니다.
같은 시기, 그는 동료 마이클 아지스, 로이 고든 교수와 함께 흐름 전지도 연구했습니다. 흐름 전지는 커다란 탱크에 담긴 액체 전해질을 펌프로 순환시켜 전기를 저장하는 장치입니다. 태양광이나 풍력처럼 날씨에 따라 들쭉날쭉한 전력을 밤낮없이 저장하는 데 알맞은 방식입니다. 기존 바나듐 흐름 전지는 성능이 좋았지만, 바나듐이 지구에 워낙 적어서 전 세계 전력망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연구팀은 바나듐 대신 원유 찌꺼기나 나무에서도 뽑아낼 수 있는 유기 퀴논 분자로 전해질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그러나 쓸 만한 퀴논 하나를 찾기까지 후보 물질 150여 개를 사람 손으로 일일이 합성해야 했고, 5년과 500만 달러가 들었습니다. 새로운 배터리 소재 하나를 시장에 내놓는 데 10년, 20년이 걸린다면, 지구는 그 전에 기후 재앙을 맞이할 것이라고 그는 판단했습니다.
2016년 가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됐습니다. 새 행정부는 파리기후협약에서 탈퇴했고, 아스푸루-구직이 자문하던 국제 청정에너지 연구 동맹 미션 이노베이션의 연방 예산도 삭감했습니다. 기후 위기와 싸우겠다고 다짐했던 그에게 이 결정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는 하버드 정교수라는 안정된 자리를 내려놓고 2018년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로 옮겼습니다. 멕시코 소년이 미국을 거쳐 캐나다에 정착하기까지, 그를 이끈 것은 국적이 아니라 기후 시계였던 셈입니다. 토론토 대학교 교수이자 벡터 연구소 연구원이 된 그는 곧이어 캐나다 정부와 대학이 함께 조성한 2억 캐나다달러, 한화로 약 2000억 원 규모의 가속화 컨소시엄을 이끌게 됐습니다. 계산과 합성 사이의 강을 로봇과 인공지능으로 메우겠다는, 하버드 시절부터 품어 온 구상을 실현할 무대가 마침내 마련된 것입니다.
가속화 컨소시엄이 내건 목표는 명확했습니다. 새로운 소재 하나를 찾는 데 보통 천만 달러 넘는 비용과 십 년 넘는 시간이 들었다면, 그 값을 백만 달러와 일 년으로 줄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비용은 십분의 일로, 시간도 십분의 일로 압축하겠다는 뜻입니다. 로봇 팔이 실험을 하고, 인공지능이 다음 실험을 설계하고, 그 결과가 다시 인공지능에게 돌아가는 순환 고리를 만들면 가능하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하버드에서 겪은 성공한 실패가 그에게 남긴 숙제였습니다.
코드 한 줄을 잘못 짜면 프로그램이 즉시 멈추고 오류를 알려 줍니다. 그런데 화학은 다릅니다. 분자 하나가 왜 합성되지 않는지, 컴퓨터는 몇 주가 지나도록 알려 주지 못합니다. 아스푸루-구직이 20년 가까이 씨름한 것은 바로 이 침묵이었습니다. 그는 침묵하는 실험실에 눈과 손을 달아 주려고 대서양을 건너고 국경을 넘었습니다. 한 사람의 절박함이 대륙을 넘나드는 협력망으로 자라나기까지, 그 시작은 강연장 앞자리에 앉아 있던 20대의 젊은 조교수였습니다.
이론에서 로봇으로
앞 소절에서 본 성공한 실패는 그의 이력과 정반대의 결과였습니다. 이론에서는 누구보다 앞서 있던 그가, 계산이 골라낸 분자를 실물로 만드는 단계에서는 번번이 시간에 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머릿속의 답과 손으로 만든 결과 사이에는 언제나 다른 시간이 흐릅니다. 그는 이 시간을 줄이는 길을 이론이 아니라 로봇에서 찾기로 했습니다.
2018년 토론토 대학교로 옮긴 그는 계산과 합성 사이의 틈을 메우는 도구를 하나씩 쌓아 올렸습니다. 첫 번째 도구는 분자를 글자로 표현하는 방법 자체를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기존의 스마일스(SMILES) 표기법은 원자의 연결을 그냥 문자열로 나열하는 방식이라 인공지능이 글자를 하나만 잘못 배열해도 열 개 중 아홉 개가 존재할 수 없는 분자로 깨졌습니다. 박사후연구원 마리오 크렌은 탄소는 결합선 4개, 산소는 2개, 수소는 1개까지만 연결된다는 화학 규칙 자체를 문법으로 심어 셀파이즈(SELFIES)라는 새 표기법을 만들었습니다. 종이접기에 비유하면, 아무렇게나 접어도 항상 학 모양이 나오도록 종이 자체에 접는 선을 미리 그어 둔 셈입니다. 그 결과 인공지능이 무작위로 글자를 흔들어도 나오는 분자는 100퍼센트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두 번째 도구는 그의 제자 플로리안 헤제가 만든 그리핀과 키메라 알고리즘입니다. 전도도는 높이고 값은 낮추고 안정성은 지키는 일처럼 서로 부딪히는 목표 여러 개를 한꺼번에 풀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용매 열 가지, 촉매 다섯 가지처럼 딱 떨어지지 않는 재료 조합을 실험자가 손으로 하나씩 시도했다면 조합의 수만큼 세월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핀은 이런 재료들 사이의 숨은 유사성을 찾아 다음에 시도할 조합을 통계로 골라 주고, 키메라는 전도도와 내구성과 원가처럼 서로 부딪히는 목표들 사이에서 균형이 무너지지 않는 지점을 계산해 실험 순서를 정합니다. 로봇 팔은 이 계산이 지목한 극소수의 조합만 실제로 시도하면 됩니다. 세 번째 도구는 로봇의 눈입니다. 투명한 유리 비커는 빛을 튕겨 내서 카메라가 위치를 제대로 잡지 못했습니다. 그는 애니메쉬 가르그, 플로리안 슈쿠르티 교수와 함께 인스타그램과 트위터에 올라온 실제 실험실 사진을 모아 트랜스페어런트넷이라는 인식 신경망을 학습시켰습니다. 이제 로봇 팔은 어질러진 벤치 위에서도 유리 기구를 놓치지 않고 집습니다.
이 세 도구가 결합하자 숫자가 바뀌었습니다. 국방고등연구계획국의 유기 레이저 탐색 과제에서는 17만 개의 분자 후보를 훑어, 몇 주 만에 아다치 치하야 교수의 기존 최고
물질보다 여기 임계값이 50퍼센트 낮고 이득이 2배 높은 분자를 찾아냈습니다. 2024년에는 폴란드, 캐나다, 미국, 일본 네 나라의 실험실을 하나의 무선 연결망으로 묶은 협업을 마쳤습니다. 폴란드 바르샤바 연구소가 후보 분자를 예측하면 캐나다 토론토의 로봇이 소량을 분주하고, 미국 일리노이 대학의 마티 버크 교수 팀이 연속 합성 장치로 이어 붙이고, 그 결과물을 페덱스로 일본 규슈 대학교로 보내 아다치 치하야 교수의 진공 증착 장비로 소자까지 완성했습니다. 물류와 시차를 조율한 소프트웨어의 이름은 '오거나이즈잇'이었습니다. 인간 연구자 100명이 매달려도 못 할 500종 넘는 유기 반도체 분말을 이 방식으로 3개월 만에 합성해 냈습니다. 이론으로 시작한 사람이 결국 로봇 팔과 카메라를 손수 조립하는 자리까지 걸어온 셈입니다.
이 성과는 캐나다 정부가 가속화 컨소시엄에 힘을 싣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2026년 3월, 토론토 대학교는 라시 밀러관을 넓혀 컨소시엄이 쓸 새 연구동을 짓는 첫 삽을 캠퍼스 한복판에서 떴습니다. 1만 개의 반응로가 동시에 돌아가는 건물이 2026년 안에 뼈대를 세울 예정입니다. 같은 해 6월에는 싱가포르에서 그의 컨소시엄과 싱가포르국립대학이 함께 여는 국제 학회가 열려, 자율 실험실이라는 발상이 토론토를 넘어 아시아 대학들의 실험대 위로 옮겨 가고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가 동료 유지니아 쿠마체바 교수와 함께 나노 입자를 합성하는 별도의 자율 실험실을 논문으로 공개한 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입니다. 20대에 슈뢰딩거 방정식을 풀던 이론가가, 이제는 콘크리트 반죽이 굳는 공사 현장 사진을 자신의 연구 성과처럼 공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계산과 합성 사이에서 20년을 잃던 시대는, 그가 쌓아 올린 도구들 위에서 조금씩 저물고 있습니다.
자율 주행 실험실
도입부에서 본 하버드 청정 에너지 프로젝트의 낙차는 아스푸루-구직 교수에게 뚜렷한 결론을 남겼습니다. 컴퓨터 안에서는 우주를 다 훑고도 남을 힘이 실험대 앞에서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했으니, 실험 자체의 속도를 바꾸지 않으면 계산이 아무리 정교해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퀴논 흐름 전지 연구에서 겪은 5년의 수작업도 같은 결론을 굳혔습니다. 그 세월을 겪으며 그는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과학을 계속할 시간이 없다(There is no time for science as usual)"는 말을 남겼습니다. 새 배터리가 조립되어 나오기도 전에 기후 위기가 먼저 닥친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결론을 실행에 옮긴 무대가 토론토의 가속화 컨소시엄이었습니다. 캐나다 연방정부가 내준 기금은 CFREF에서 나왔고, 한 사람의 이주가 한 나라의 연구 지형을 바꾼 셈입니다.
컨소시엄이 실험실 안에 심으려 한 구조는 하나였습니다. 인공지능이 분자를 설계하고, 로봇이 그 설계를 직접 합성하고, 기계가 그 결과를 측정해 다시 인공지능에 돌려주는 순환 구조를 실험실 안에 통째로 심는 일이었습니다. 사람이 다리 역할을 하며 몇 주씩 잡아먹던 구간을 로봇 팔과 센서로 대체하면, 컴퓨터가 분자를 그려 내는 속도와 실험실이 그 분자를 실제로 만들어 내는 속도가 비로소 같아질 수 있다는 셈법이었습니다. 이렇게 계산과 합성과 측정이 사람 손을 거치지 않고 한 바퀴 도는 실험실을 '자율 주행 실험실(Self-Driving Laboratory)'이라 부르고, 이런 실험실 여럿이 모여 이룬 무인 연구 기반을 '재료 가속화 플랫폼(Materials Acceleration Platforms, MAPs)'이라고 부릅니다. 자동차가 운전자 없이 스스로 길을 찾아가듯, 실험실도 화학자 없이 스스로 가설을 세우고 검증까지 마친다는 뜻입니다. 토론토대학교 마터랩(MATER Lab)에서 첫 장비가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 아스푸루-구직 교수가 2006년 컴퓨터 화면 앞에서 느낀 낙담은 비로소 기계의 손끝으로 옮겨졌습니다.
가속화 컨소시엄이 세워지고 처음 몇 해 동안, 아스푸루-구직 교수는 이 실험실을 그저 로봇 팔이 달린 자동화 설비로만 부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가 정립하려 한 것은 기계 팔 하나가 아니라, 가설을 세우고 실험하고 결과를 되짚어 다음 가설을 고치는 과학 그 자체의 순서였습니다. 사람이 몇 달에 걸쳐 논문을 뒤지고 실험을 설계하던 자리에, 인공지능과 로봇이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순환을 도는 구조를 놓은 셈입니다. 이 정립이 진짜 시험대에 오른 것은 실험실이 문을 연 뒤였습니다. 정부가 내준 기금은 로봇을 사는 돈이 아니라, 사람이 감당하지 못하던 반복 노동을 기계에 넘기고 화학자는 판단하는 자리로 옮기는 데
쓰인 돈이었습니다.
이 순환의 성적표는 2024년 5월 학술지 사이언스에 실렸습니다. 토론토와 밴쿠버, 글래스고, 일리노이, 후쿠오카의 실험실 다섯 곳이 하나의 폐쇄 루프로 묶여, 유기 고체 레이저에 쓸 이득 물질 1천 종 이상을 합성하고 시험했습니다. 통계 모델이 아직 합성하지 않은 물질의 성능을 미리 점치고, 성공 확률은 높지만 사람 화학자가 손대 보지 않은 후보를 골라 다섯 도시의 로봇에 나눠 맡기는 방식이었습니다. 사람 연구팀이라면 여러 해가 걸렸을 탐색이 몇 달 만에 끝났고, 상위 후보 21종이 추려졌습니다.
이 실험실은 지금도 자라고 있습니다. 국제학술지 네이처는 2026년 3월 특집 기사에서 아스푸루-구직 교수의 연구진이 여러 대학과 연구소에 걸쳐 로봇 50대를 동시에 운용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컴퓨터 한 대와 화학자 몇 명이 감당하던 탐색을, 지금은 로봇 50대가 밤낮없이 실험대를 돌며 메우고 있는 셈입니다. 미국화학회의 화학·공학 뉴스도 2026년 6월 기사에서 자율 주행 실험실이 화학자가 일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다고 짚었습니다. 20년 전 하버드의 컴퓨터 앞에서 시작된 낙담 하나가, 이제 토론토 캠퍼스에 세워질 건물 한 채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습니다. '실험실'이라는 낱말은 이제 벽과 창문으로 둘러싸인 방 하나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사람 없이도 밤새 스스로 돌아가는 순환 하나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닫힌 고리
토론토 마터 랩의 밤은 조용하지 않습니다. 로봇 팔이 접시 위로 방울을 튕겨 보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리고, 화면 속 그래프는 새벽에도 스스로 갱신합니다. 십 년 전 하버드 화학과 실험실은 이런 밤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앞서 본 퀴논 흐름 전지 연구에서는 학생들이 후보 물질을 피펫으로 하나씩 가열하고 식히고 세정했습니다. 손끝으로 화학을 밀어붙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청정 에너지 프로젝트의 결말이 보여 주었듯, 컴퓨터는 분자의 성질을 정확히 예측했지만 그 분자를 시약으로 실제로 조립할 수 있는지는 계산에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비트와 원자 사이에 다리가 없었던 셈입니다. 컴퓨터가 아무리 정확히 맛을 상상해도, 그 요리를 실제로 만들 부엌이 없으면 밥상에 올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습니다. 토론토에 자리 잡은 그는 컴퓨터 속 예측과 실험실의 실제 합성을 하나의 회로로 잇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가속화 컨소시엄이 만든 자율 주행 실험실은 네 단계로 돕니다. 첫 단계에서는 앞서 본 셀파이즈 표기법으로 분자를 설계합니다. 둘째 단계에서는 양자역학 계산으로 분자의 성질을 미리 살핍니다. 밀도범함수이론으로 분자 하나를 계산하면 13시간이 걸리지만, 준경험적 타이트 바인딩 기법을 쓰면 15분이면 끝납니다. 셋째 단계는 합성입니다. 연구팀이 만든 화학 전용 운영체제 캠오에스가 자연어로 적은 실험 절차를 로봇 팔이 알아듣는 명령어로 바꾸고, 스위스제 켐스피드 로봇과 자체 개발한 메두사 로봇이 이 명령을 받아 실제로 시약을 섞습니다. 넷째 단계는 분석입니다. 초음파로 2.5나노리터 크기 방울을 정확히 쏘아 보내고, 액체 크로마토그래피와 질량분석기로 물질의 정체를 확인합니다. 자외선과 형광, 순환전압전류법으로 측정한 값은 그리핀, 피닉스, 키메라라는 세 개의 베이지안 학습 모델로 들어가 다음 실험의 방향을 다시 정합니다. 예측과 실측이 어긋나면 기계가 스스로 가설을 고칩니다.
이 순환은 실제 성과로 이어졌습니다. 앞서 본 유기 레이저 국제 협업의 결과는 2024년 사이언스에 실렸습니다. 여섯 개 연구팀이 세 대륙에서 협력해 21개의 새로운 레이저 소재를 찾아냈습니다. 사람이 수십 년 걸려 열 개 남짓 찾던 분야에서 나온 성과였습니다. 제자 안드레스는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3D 프린터로 만든 로봇 팔과 100달러 아두이노 펌프, 웹캠으로 300달러짜리 자율 실험실을 세웠습니다. 아스푸루-구직 교수는 소프트웨어 전체를 깃허브에 무료로 풀어 놓았습니다. 부유한 대학만 자율 실험실을 가지라는 법은 없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가 그리는 그림은 명문대 실험실 담장 안에 갇히지 않습니다.
인터넷만 이어지면 남미 시골 대학생도, 아프리카 대학원 연구원도 오염된 우물물을 정화할 여과 소재를 스스로 설계하고 로봇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과학의 역사를 놓고 보면 이 흐름은 또 하나의 물결입니다. 사람이 눈으로 자연을 관찰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뉴턴처럼 수식으로 법칙을 세우던 시대가 뒤를 이었습니다. 그다음은 슈퍼컴퓨터로 현상을 모사하던 시대였고, 이어서 방대한 데이터에서 상관관계를 찾던 시대가 왔습니다. 아스푸루-구직 교수는 기계가 스스로 가설을 세우고 로봇으로 실험까지 마치는 지금의 흐름을 다섯 번째 물결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공동으로 창업한 자파타 컴퓨팅을 비롯한 회사들이 오류를 스스로 고치는 양자 컴퓨터를 완성하면, 지금 슈퍼컴퓨터로는 힘든 복잡한 분자의 거동까지 오차 없이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내다봅니다. 앞으로 10년에서 15년 사이에 벌어질 일입니다.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이 바뀌면 물리 세계 자체는 그대로여도 과학자가 사는 세계는 완전히 달라진다고 썼습니다. 퀴논 후보를 손으로 끓이던 세계와, 기계가 밤새 스스로 가설을 고치는 지금의 토론토 실험실은 같은 화학이지만 서로 다른 세계에 가깝습니다.
2026년 6월, 가속화 컨소시엄은 구조유전체학 컨소시엄과 손을 잡았습니다. 두 기관은 신약 후보 물질을 설계하고 합성하고 시험하는 전 과정에 자율 주행 실험실 방식을 넣기로 했습니다. 제약업계에서 걷힌 자금만 5000만 달러에 이릅니다. 재료 하나를 찾던 폐쇄 루프가 이제 사람의 병을 고칠 약 후보로 걸음을 넓히고 있습니다. 하버드 실험실에서 밤새 퀴논을 끓이던 학생들의 피로가 로봇 팔의 규칙적인 핑 소리로 바뀌기까지 십 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소재 탐색의 가속
흄 후드 아래에서 대학원생이 피펫을 쥐고 끓는 유기 용액을 지키던 풍경은, 앞서 본 퀴논 수작업 시절의 초상입니다. 컴퓨터가 분자 수백만 개의 에너지를 몇 시간 안에 계산해 내는 시대에, 사람 손은 그 계산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아스푸루-구직 교수는 박사후연구원 시절 고안한 양자 시뮬레이션 알고리즘을 양자 기계 학습(Quantum Machine Learning, QML)과 결합해 분자 시뮬레이션에 이식하는 일을 20년 가까이 이어 갔습니다.
하버드 시절의 흐름 전지 연구는 한 차례 결실도 보았습니다. 2014년, 그의 연구팀은 안트라퀴논-2,7-디술폰산(AQDS)을 이용한 무금속 수용성 흐름 전지를 《네이처》에 발표해 학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이 전해질의 수명을 늘리려면 후보 분자를 하나씩 손으로 합성해 시험해야 했습니다.
토론토로 옮긴 뒤 그가 겨눈 표적은 이온 상태로 전해액 안을 오가는 유기 분자, 아놀라이트(Anolyte)였습니다. 여기서 계산 화학은 다시 벽에 부딪혔습니다. 물 분자와 짝 이온이 만드는 전기적 간섭까지 계산에 넣으면, 밀도범함수이론 계산은 슈퍼컴퓨터로도 감당하기 힘든 비용을 요구했습니다. 아스푸루-구직 교수는 이 벽을 넘기 위해 자신이 공동 창업한 양자 기업 자파타 컴퓨팅(Zapata Computing)과 함께 생성형 양자 고유값 풀이기(Generative Quantum Eigensolver, GQE)를 설계했습니다. 기존 양자 알고리즘 VQE(Variational Quantum Eigensolver)가 분자 하나의 바닥 상태 에너지만 계산했다면, GQE는 전자구름 전체의 확률 분포를 통째로 예측합니다.
이 계산 엔진을 실제 로봇 팔과 묶는 일도 필요했습니다. 먼저 유전 알고리즘 야누스(Janus)가 딥러닝과 진화 탐색을 섞어 후보 분자 구조를 스스로 그려 냅니다. 여기에 앞서 본 그리핀과 키메라가 실제로 합성할 후보를 전체의 6에서 10퍼센트로 추려 냅니다. 마지막으로 로봇 팔이 극미량 단위로 액체를 분주하고, 16채널 전기화학 측정 장비가 순환전압전류법으로 결과를 잰 뒤 그 값을 다시 양자 계산기로 돌려보냅니다. 사람은 처음 목표만 정하고, 그 뒤로는 기계가 하루 24시간 이 순환을 돌립니다.
이 측정 장비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시중의 전압전류측정기는 수천만 원을 호가하고 채널도 둘뿐입니다. 아스푸루-구직 연구팀은 100달러짜리 부품만으로 16채널을
동시에 재는 회로 기판 포켓 파워업(Pocket PowerUp)을 직접 설계해 도면을 통째로 공개했습니다. 값싼 장비 하나가 실험실의 처리 속도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아스푸루-구직 교수는 이 변화를 천문학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예전 천문학자는 밤마다 산 위에 올라가 망원경에 눈을 대고 별의 위치를 손으로 적었습니다. 지금 천문학자는 사무실 책상에 앉아, 우주망원경이 보내온 자료를 코드로 분석해 블랙홀과 초신성을 찾아냅니다. 화학자도 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흄 후드 앞에서 촉매 가루를 저울질하던 손이, 이제 로봇 팔에게 넘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체계가 낸 결과는 숫자로 뚜렷합니다. 자율 실험실은 새로 설계한 이온성 유기 분자 150종을 단 한 건의 실패 없이 실제로 합성해 냈습니다. 양자 계산이 예측한 전위와 실측값의 평균 오차는 0.15볼트 이하였습니다. 그중 챔피언 물질은 표준수소전극 기준 영하 0.85볼트라는, 기존 AQDS 계열을 뛰어넘는 낮은 전위를 기록했습니다. 같은 물질을 물속에서 100번 충방전을 반복해도 용량은 99.9퍼센트 그대로 남았습니다. 야누스가 사흘 만에 찾아낸 분자 구조는 사람 박사과정 연구자들이 5년간 시행착오로 얻은 답과 같았습니다. 기계가 사람의 직관을 흉내 낸 것이 아니라, 같은 답에 훨씬 빨리 도착한 셈입니다.
2026년 8월에도 이 흐름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스푸루-구직 교수가 공동 창업한 자파타 퀀텀(Zapata Quantum)은 8월 12일, 중성원자 양자 컴퓨터 기업 퀘라(QuEra)와 손잡고 2028년 상용화를 목표로 한 결함 허용 양자 컴퓨터 응용 개발에 나섰습니다. 소재 설계와 화학 계산이 이 협력의 핵심 목표로 꼽혔습니다. 같은 해, 캐나다 기술 매체 베타킷은 2026년 인물 명단 '모스트 앰비셔스(Most Ambitious 2026)'에 아스푸루-구직 교수를 올리며 그가 로봇과 인공지능으로 실험 자체를 자동화하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흄 후드 아래 서서 5년을 보내던 대학원생의 자리를, 이제 양자 계산기와 로봇 팔이 대신 지키고 있는 셈입니다.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
자율 실험실이 내놓은 결과는 외부 검증에서 다시 시험대에 오르곤 합니다. 2023년 미국 로런스버클리국립연구소의 에이랩(A-Lab) 연구진이 며칠 만에 수십 종의 새 무기 화합물을 자동으로 합성했다고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하자, 곧바로 학계의 재검토가 뒤따랐습니다.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의 결정학자 로버트 팔그레이브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논문에 실린 엑스선 회절 자료를 다시 분석해, 새 물질이라고 보고된 사례 상당수가 이미 알려진 물질이거나 여러 상이 섞인 혼합물로 보인다고 지적했습니다. 기계가 합성에 성공했다고 판정한 것과 그 물질이 실제로 새로운 결정 구조인지를 사람이 확인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반론이었습니다. 자동화가 실험의 속도를 끌어올릴수록, 그 결과를 사람이 되짚어 검증하는 절차가 오히려 더 무거워진다는 목소리입니다.
두 번째 물음은 기계가 뒤지는 화학 공간이 결국 사람이 미리 그어 둔 틀 안에 갇혀 있다는 점입니다. 셀파이즈 문법, 후보 목록, 최적화 목표 함수는 모두 연구자가 설계한 울타리입니다. 로봇은 그 울타리 안을 사람보다 빠르게 훑을 뿐, 울타리 바깥에 있을지 모를 뜻밖의 발견까지 스스로 넘어가지는 못한다는 지적이 자율 실험실을 다룬 여러 총설 논문에서 나옵니다. 예상 밖의 우연한 발견이야말로 과학사를 바꿔 온 힘이었는데, 목표를 좁게 정한 폐쇄 루프가 그런 우연을 오히려 걸러 낼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세 번째 물음은 로봇이 쏟아 내는 데이터의 재현성과 품질입니다. 실험 장비의 미세한 오차나 시약의 상태, 측정 조건의 흔들림은 사람이 지키는 실험실에서도 늘 문제였는데, 사람이 자리를 비운 밤사이 순환이 계속 돌아가면 이런 오차가 조용히 쌓일 수 있습니다. 데이터의 양이 늘어난다고 품질이 저절로 따라오지는 않으며, 자동으로 측정한 값에도 사람의 검증과 표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당부입니다. 자율 실험실이 신뢰를 얻으려면 결과의 개수보다 그 결과가 다른 실험실에서 다시 나오는지를 먼저 보여 주어야 한다는 요구가 함께 커지고 있습니다.
이 장의 서술은 2026년 8월까지 공개된 자료를 기준으로 합니다.
저자 노트. 사람의 역할은 어디로 옮겨 갔는가
2부의 두 사람은 기계에게 설계를 맡겼습니다. 베이커는 자연에 없던 단백질을, 아스푸루-구직은 자연이 만들지 않은 소재를 기계가 그려내게 했습니다. 예측이 이미 있는 것의 정체를 맞히는 일이라면, 설계는 원하는 성질을 먼저 정하고 그것을 가진 물질을 거꾸로 빚어내는 일입니다. 방향이 반대로 뒤집힌 셈입니다.
이 뒤집힘이 사람의 자리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기계가 무엇이든 설계할 수 있게 되자, 무엇을 설계하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이 앞으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어떤 병을 겨눌지, 어떤 소재를 먼저 찾을지, 그 판단에는 기계가 내놓은 계산이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가 담깁니다. 설계의 성적표가 참과 거짓이 아니라 작동 여부인 만큼, 무엇을 작동시킬 가치가 있다고 볼지는 사람의 몫으로 남습니다.
변호사로서 덧붙이자면, 설계하는 기계는 축복인 동시에 위험입니다. 병을 고치는 단백질을 그리는 손은 해를 끼치는 물질도 그릴 수 있습니다. 무엇을 설계하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는 무엇을 설계하지 못하게 막을 것인가라는 물음이 늘 따라붙습니다. 이 경계를 정하는 일 역시 기계가 아니라 사람에게 남은 자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