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서재
책으로 읽는 AI서재
한 권을 고르고, 목차에서 차례대로 읽을 수 있게 정리했습니다.
PDF 다운로드 책
다국어로 읽는 대학생 교양 인공지능
한국어 원문과 외국어 번역을 함께 실은 유학생용 교재입니다. 각 책 소개 페이지에서 PDF를 받을 수 있습니다.
[AI서재] 프롤로그 — 2025년 10월 21일, 도쿄
유리 천장을 넘어서
프롤로그 — 2025년 10월 21일, 도쿄
김경진
오전 열 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각, 도쿄 나가타초(永田町)의 국회의사당은 평소와 다른 공기에 싸여 있었습니다. 가을 햇살이 청회색 돔 지붕 위에 비스듬히 내려앉았고, 의사당 앞 광장에는 새벽부터 자리를 잡은 방송사 중계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CNN, BBC, NHK, TBS. 카메라 렌즈들이 정문을 향해 일제히 겨냥해 있었습니다. 경비원들은 평소보다 두 배 더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날 이 건물 안에서 벌어질 일을 모르는 일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침 뉴스는 다섯 시부터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습니다. 지상파 채널마다 앵커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역사적인 하루"를 예고했습니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뉴스 알림이 쉼 없이 올라왔습니다. 도쿄 도심의 카페에서는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는 손님들이 커피를 손에 든 채로 말을 잊었습니다.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는 오전 열 시 조금 전에 의사당 정문을 통과했습니다. 검은 정장. 흰 블라우스의 깃이 재킷 밖으로 가지런히 나와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뒤로 묶여 있었습니다. 수행원들이 좌우에 따라붙었지만 그녀는 혼자 걷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의원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이었습니다. 국회의원 배지가 가슴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 배지는 1993년, 처음 중의원에 당선된 이후 32년 동안 함께한 것이었습니다.
중의원 본회의장은 이미 가득 찼습니다. 465개의 의석. 자유민주당과 일본유신의 회 의원들이 왼쪽을 채웠고, 입헌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야당이 오른쪽에 앉았습니다. 방청석은 외교관, 언론인, 시민 단체 대표자들로 빈자리가 없었습니다. 외국 대사관에서 온 외교관들이 이층 방청석에 줄지어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도 이날은 보통 날이 아니었습니다. G7 국가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여성 총리를 갖지 못했던 나라. 그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습니다.
투표용지가 배포됐을 때 의장석에서 마이크 테스트 소리가 한 번 울렸습니다. 그 외에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습니다. 465명의 의원이 각자 펜을 들었습니다. 일본 헌정 130년의 역사 속에서 한 번도 이 자리에 오른 적 없는 이름을 쓰기 위해. 高市早苗. 다카이치 사나에.
의원들이 한 명씩 단상으로 나와 투표함에 종이를 넣었습니다. 그 행렬이 진행되는 동안 방청석은 숨을 죽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두 손을 꼭 쥐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메모를 적었습니다. 나이 든 여성 방청객 하나가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날의 역사를 몸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개표 결과는 명확했습니다. 다카이치 사나에 237표.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149표. 헌법 제67조가 정한 과반수(233표)를 4표 초과한 숫자였습니다. 의장이 결과를 선언하는 순간, 방청석 어딘가에서 짧은 탄성이 새어 나왔습니다. 기자석에서는 이어폰을 고쳐 끼우는 손들이 움직였습니다. 외신 카메라들이 일제히 연단을 향해 돌아섰습니다.
오후에는 참의원에서 두 번째 수상 지명 투표가 진행됐습니다. 1차 투표에서 다카이치는 123표를 얻어 과반(124표)에 단 한 표가 모자랐습니다. 결선 투표가 불가피했습니다. 그 한 표의 차이가 빚어낸 긴장감은 회의장 밖까지 전달됐습니다. 결선에서 125표 대 46표. 그것으로 마무리됐습니다.
2025년 10월 21일 오후, 다카이치 사나에는 일본 제104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됐습니다.
일본 헌정 사상 처음이었습니다. 여성이 이 자리에 오른 것은. 의회 민주주의를 도입한 지 130년이 넘은 나라에서, G7 국가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그 문을 잠가두었던 나라에서, 이날 비로소 자물쇠가 열렸습니다. 저녁 뉴스의 앵커들은 목소리가 약간 떨렸습니다. 국제 방송들은 속보를 내보냈습니다. 소셜 미디어에는 "おめでとう(축하합니다)"와 함께 "#最初の女性総理"(최초의 여성 총리) 해시태그가 폭발적으로 쏟아졌습니다. 찬성하는 사람들과 비판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일본 정치에서 다카이치 사나에는 언제나 그런 존재였습니다. 열렬한 지지와 강렬한 반대가 공존하는.
황궁에서의 임명 의식이 끝난 뒤, 관저로 돌아온 총리는 취임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조명이 강하게 내리쬐는 회견장. 수십 개의 마이크가 연단을 향해 솟아 있었습니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결단과 전진의 내각을 만들겠습니다."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경제 재건, 방위력 강화, 대만 해협의 안정, 저출산 문제, 에너지 안보. 과제들을 열거하는 방식이 빠르고 구체적이었습니다. 숫자를 직접 인용했습니다. 프리터를 읽는 것이 아니라 외운 것들을 말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기자 한 명이 손을 들었습니다.
"처음으로 여성 총리가 탄생한 것에 대해 소감을 말씀해주십시오."
짧은 침묵이 있었습니다. 1초 남짓. 그것이 어색함인지 신중함인지 결의인지는 각자가 판단해야 했습니다.
"저는 여성 총리로서 선출된 것이 아닙니다. 일본의 총리로서 선출됐습니다."
그 대답은 이후 몇 주 동안 일본 언론에서 분석의 대상이 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말을 여성성을 거부하는 태도로 읽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말을 젠더 정치에 포획되기를 거부하는 선언으로 해석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진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다고. 자신을 특정 범주로 규정하려는 시도에 저항하는 사람.
내각 지지율이 공개된 것은 취임 일주일 뒤였습니다. 닛케이 신문 조사에서 74퍼센트. 전후 일본 역대 총리 취임 초반 지지율 중 다섯 번째로 높은 수치였습니다. 18세에서 39세 사이에서는 80퍼센트를 넘었습니다. TBS 텔레비전 조사에서는 11월 초 기준 82퍼센트. 2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였습니다.
그러나 그 숫자들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그날 국회의사당 방청석에 있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각자의 기억 속에 새긴 장면이었습니다. 투표용지를 넣는 의원들의 행렬. 개표 결과가 발표되던 순간의 정적. 그리고 기자 회견장에서 "여성 총리가 아니라 일본의 총리"라고 말하던 한 사람의 목소리.
이 책은 그 목소리가 만들어지기까지의 64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1961년 3월 7일, 나라현(奈良県)의 작은 도시. 기계 회사 영업직 아버지와 나라현 경찰관 어머니가 사는 평범한 공무원 가정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오게 됐는지를 이해하려면, 일본 정치의 지형도를 이해해야 하고, 전후 일본 사회의 변화를 이해해야 하며, 무엇보다 그 사람 자체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것이 이 책이 하려는 일입니다.
이 책은 1961년 나라현에서 시작합니다. 기계 회사 영업사원의 딸이자 경찰관의 딸로 태어난 한 아이가 어떻게 일본 정치의 정점에 도달했는지를 추적합니다. 단순한 성공 스토리가 아닙니다. 일본 정치가 무엇인지, 일본 사회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리고 이웃 나라 한국이 이 변화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하려는 시도입니다.
64년이라는 삶. 32년이라는 정치 경력. 세 번의 총재 선거 도전. 수많은 낙선과 재기. 아베 신조라는 거인과의 동행. 그리고 마침내 혼자 서게 된 순간.
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숫자들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이날 저녁 일본 전역에서 일어난 반응이었습니다. 도쿄의 한 가정집에서는 70대 여성이 혼자 TV 앞에 앉아 눈물을 닦았습니다. 그녀의 어머니 세대는 선거권도 없었습니다. 오사카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여학생들이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확인하며 서로 화면을 보여줬습니다. 나라현 가시하라시의 주민들은 이 도시 출신 총리의 이름이 뉴스에 가득 찬 것을 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자부심과 의아함과 기대와 우려가 섞인.
다카이치 사나에의 총리 취임이 어떤 의미인지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혔습니다. 어떤 이들은 유리 천장이 깨졌다고 환호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깨진 것은 천장이 아니라 자신들이 기대했던 여성 지도자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진보 진영은 여성 총리가 진보적 의제를 추진하지 않는다는 불편함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보수 진영은 자신들의 지도자가 역사를 만들었다는 자부심에 들떴습니다.
그 모든 목소리들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모두가 동의하지 않아도, 결과는 하나입니다. 2025년 10월 21일, 일본의 총리는 다카이치 사나에입니다.
이 책이 하려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해하는 것.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의 재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독자의 몫입니다.
2025년 10월 21일. 이 날짜는 일본 역사 교과서에 실릴 것입니다. 아마도 다음과 같은 한 줄로. "일본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가 취임하다."
그러나 교과서의 한 줄은 그 날의 긴장감을, 방청석의 숨소리를, 개표 결과가 발표되던 순간의 고요함을 담지 못합니다. 그것을 담으려는 것이 이 책입니다.
1993년 처음 국회에 발을 들였을 때 그녀는 32살이었습니다. 2025년 총리가 됐을 때 그녀는 64살이었습니다. 32년. 일본에서 한 세대가 바뀌는 시간입니다. 그 세월을 국회에서 보냈습니다. 낙선하고, 재기하고, 또 낙선하고, 또 재기했습니다. 그 반복이 지금의 다카이치 사나에를 만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책을 쓴 이유는 하나입니다. 다카이치 사나에라는 사람을 통해 지금의 일본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 일본을 이웃으로 가진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것. 쉬운 답이 없는 질문들입니다. 그러나 그 질문들을 피하는 것은 더 어려운 길입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일본과 한국과 아시아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각자 생각을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참고 자료
- 首相官邸 공식 사이트: https://www.kantei.go.jp/ - 衆議院 공식 사이트 — 衆議院規則第18条に基づく首相指名選挙: https://www.shugiin.go.jp/ - 高市早苗 公式ホームページ: https://www.sanae.gr.jp/ - Sanae Takaichi — Wikipedia (English): https://en.wikipedia.org/wiki/Sanae_Takaichi - NHK特集「初めての女性総理 — 高市早苗の64年」: https://www3.nhk.or.jp/new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