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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4장 "경영의 신"이 내린 예언
유리 천장을 넘어서
제1부 뿌리 — 나라에서 워싱턴까지
4장 "경영의 신"이 내린 예언
김경진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치가사키시(茅ヶ崎市). 도쿄에서 신칸센으로 30분, 요코하마에서는 기차로 20분이면 닿는 이 해안 도시에는 쇼난(湘南) 바다가 가깝습니다. 여름이면 젊은이들이 서핑 보드를 들고 해변으로 나가는 그 도시의 한 구석에, 정문부터 심상치 않은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2만 평방미터의 부지에 세워진 본관, 연수동, 기숙사, 다실, 체육관. 조용하고 단정합니다. 관광지가 아니고, 기업체도 아닙니다. 마쓰시타 정경숙(松下政経塾). 일본이 정치 지도자를 키우는 방식을 바꾸려 했던 한 노인의 마지막 꿈이 이 땅에 묻혀 있습니다.
학교를 세운 사람은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였습니다. 1894년 오사카 근방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소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9살에 자전거 포에서 일을 시작한 소년. 그 소년이 훗날 '파나소닉'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질 기업을 세우고, 일본 경제사에 이름을 남깁니다. 전기 다리미, 세탁기, 냉장고, 텔레비전. 전후 일본 가정의 풍경을 바꾼 제품들이 줄줄이 그의 공장에서 나왔습니다. 1960년대, 일본 언론은 그를 부르는 말을 찾다가 이 표현에 도달했습니다. 경영의 신(経営の神様). 그 표현이 마쓰시타 고노스케를 따라다닌 호칭이 됩니다.
그러나 84세가 된 마쓰시타는 자신이 쌓은 부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일본 정치. 파벌과 인맥이 지배하는 자민당, 이념 투쟁에 묻힌 야당, 국민보다 정당을 앞세우는 의원들. 그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일본의 정치가 이래서는 나라가 망한다." 그리고 망하지 않으려면 정치가를 제대로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1979년, 그는 사재 70억 엔을 털어 치가사키에 학교를 세웠습니다. 마쓰시타 정경숙의 개숙(開塾)은 이듬해 1980년 4월이었습니다.
입학 경쟁은 처음부터 치열했습니다. 매년 200명 안팎이 지원해서 5명에서 6명이 선발됐습니다. 논술 시험, 집단 토론, 다단계 면접. 지식보다는 의욕, 이력보다는 가능성을 봤습니다. 선발된 학생들은 등록금도 수업료도 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연간 수백만 엔의 연구비를 받으며 공부했습니다. 마쓰시타의 철학은 단순했습니다. 나라를 위한 인재를 키우는 일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그것이 진짜 투자다.
교육 방식은 독특했습니다. 강의실에 앉아 교수의 말을 받아 적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평생 실천해온 철학이 교육 방식에 그대로 담겼습니다. "자수자득(自修自得)".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얻는다. 선생이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배운다. 농촌을 방문하고, 어촌을 돌아보고, 지역 행정을 들여다보고, 기업 현장을 걸어다녔습니다. 이른 아침 3킬로미터 조깅은 기본이었습니다. 100킬로미터 강행군 대회, 자위대 체험 입대, 다도와 서예와 참선. 강한 몸과 고요한 마음과 넓은 시야. 그것이 마쓰시타가 원하는 지도자의 형상이었습니다.
다카이치 사나에가 제5기생으로 입학한 것은 1984년 봄이었습니다. 고베대학 경영학부를 졸업하고 바로였습니다. 기업 취직도, 대학원 진학도 아닌 정경숙. 주변에서 의아하게 봤을 법한 선택이었습니다. 당시 마쓰시타 정경숙은 알려져 있었지만, 졸업 후 진로가 보장되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정치가를 목표로 한다"고는 하지만, 일본 정계는 세습과 인맥이 지배하는 세계였습니다. 조직도 없고, 지역 기반도 없고, 유명한 정치가 아버지도 없는 여성이 마쓰시타 정경숙을 졸업했다고 해서 의원이 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선택했습니다. 그 결심의 정확한 이유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고베대학에서 경영수학을 전공하면서 동시에 헤비메탈 밴드에서 드럼을 쳤던 그 대학생이, 정치가를 키우는 학교에 자원했다는 사실에는 일관된 성격이 있습니다. 틀에 박힌 경로를 따르지 않는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나중에 그녀의 정치 인생 전체를 관통하게 될 그 성격이, 이미 스물두 살의 진로 선택에서 드러납니다.
정경숙 안에서의 생활은 예상보다 훨씬 강도가 높았습니다. 치가사키의 기숙사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아침 달리기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구술 발표, 논문 작성, 지역 현장 방문.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연구 주제를 정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하는 방식. 누군가 정답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현장에 가서 직접 보고, 사람을 만나 직접 묻고, 그 위에서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 방식이 훗날 다카이치의 정책 접근법에 배어들게 됩니다. 데이터를 직접 보고, 현장 의견을 직접 듣고, 그 위에서 자신의 결론을 내리는 방식.
같은 시기 정경숙에는 훗날 정치인이 되는 인물들이 함께 수학하고 있었습니다. 제1기생으로는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가 있었습니다. 훗날 민주당 정권 시절 총리가 되는 인물. 흥미로운 인연이 있습니다. 정경숙의 교육 방침 중에는 선배 정치인의 선거 운동을 직접 도우며 배우는 실습이 있었습니다. 다카이치가 5기생으로 재학 중이던 1987년, 노다 요시히코가 지바현 의회 선거에 처음 출마했습니다. 그 선거 운동에 다카이치가 운동원으로 참여해 노다의 집에 기거하며 포스터 붙이는 일을 도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훗날 두 사람은 일본 정치의 정반대 편에 서게 됩니다만, 그 출발점에서는 같은 학교의 선후배로 한솥밥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직접 했다는 강연이 있습니다. 1985년, 마쓰시타는 학생들 앞에서 일본 경제의 미래를 이야기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가 한 말은, 당시 일본의 분위기와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1985년의 일본은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닛케이 주가 지수는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고, 무역 흑자는 사상 최대를 기록하고 있었으며, 미국의 록펠러 센터를 일본 기업이 사들이고 할리우드 영화사가 일본 자본에 넘어가는 시대였습니다. "재팬 머니"라는 말이 세계 경제 뉴스를 장식했습니다.
마쓰시타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990년이 되면, 일본은 긴 불황에 들어갈 것이다." 지금의 호황은 거품이며, 그것이 꺼지면 일본 경제는 오랜 침체를 겪게 될 것이라고. 학생들이 어떤 표정으로 그 말을 들었는지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아마도 반신반의했을 것입니다. 눈앞의 현실은 그 예언과 너무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 예언을 들은 다카이치는, 훗날 이 순간을 기억했습니다.
1990년 1월. 닛케이 지수가 정점에서 하락하기 시작했습니다. 3만 8,000포인트에서 시작된 하락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1992년에는 1만 5,000포인트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부동산 가격도 함께 무너졌습니다. 도쿄, 오사카, 나고야의 땅값이 5년 만에 절반 이하로 내려갔습니다. 은행들이 부실 채권을 끌어안고 비틀거렸습니다.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시작했습니다.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됐습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1985년 치가사키의 강의실에서 했던 그 말이, 다섯 해 뒤 그대로 현실이 됐습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1989년 4월, 향년 94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예언이 적중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예언을 들은 학생들 중 한 명이 있었습니다. 정경숙 제5기생, 다카이치 사나에. 그 예언이 그녀에게 무엇을 심었는지는, 30년 뒤 그녀가 총리가 된 뒤의 경제 정책에서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다카이치가 평생 일관되게 주장한 것이 있습니다. "적극 재정." 디플레이션과의 싸움. 재정 긴축이 경제를 더 죽인다는 입장. 이 주장의 뿌리에는, 버블이 꺼진 뒤 일본이 잘못된 처방을 받았다는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1990년대 일본 정부가 재정 긴축을 선택한 것이 불황을 더 길게 만들었다는 것. 마쓰시타의 예언을 직접 귀로 들은 사람이, 그 불황의 원인을 따지고, 그 교훈을 정책으로 옮기려 합니다. 치가사키 강의실의 기억이 그렇게 총리 관저까지 이어집니다.
정경숙에서의 수학 기간은 공식적으로는 5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5년 사이에 결정적인 경험이 삽입됩니다. 1987년, 정경숙은 그녀를 워싱턴으로 보냈습니다. 미국 연방의회에 파견 연수생으로. 그 이야기는 다음 장입니다.
한 가지만 더 짚고 가겠습니다. 마쓰시타 정경숙은 개숙 이후 45년 동안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기업인, 언론인. 그 중에서 일본 총리가 된 사람이 두 명 나왔습니다. 제1기생 노다 요시히코(2011년), 제5기생 다카이치 사나에(2025년). 같은 학교, 다른 이념, 정반대의 정치적 입장을 가진 두 사람. 2025년 10월 21일 중의원 수상 지명 투표에서, 두 사람은 역사의 갈림길에서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노다가 149표, 다카이치가 237표.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세운 학교의 졸업생들이 일본 권력의 정점에서 겨뤄, 5기생이 1기생을 이겼습니다.
"경영의 신"은 살아서 이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치가사키에 심은 씨앗이 어떻게 자랐는지, 결과는 분명합니다. 70억 엔의 투자가,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를 낳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