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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6장 귀국, 교단에 서다
유리 천장을 넘어서
제1부 뿌리 — 나라에서 워싱턴까지
6장 귀국, 교단에 서다
김경진
1989년 봄. 나리타 공항. 비행기 트랩을 내려 일본 땅을 밟은 순간, 다카이치 사나에는 워싱턴과 도쿄 사이의 간극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두 해 가까이 미국 연방의회의 복도를 걸었던 사람이 돌아온 나라는, 표면상으로는 눈부셨습니다. 닛케이 주가 지수는 여전히 높은 고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도쿄 긴자의 땅값이 세계에서 가장 비쌌습니다. 뉴욕 록펠러 센터와 하와이 리조트를 일본 기업이 사들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디서나 공사 소음이 들렸고, 젊은 직장인들은 버블 경제가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소비했습니다.
그러나 그해 1월 7일, 쇼와(昭和) 천황이 87세로 붕어했습니다. 쇼와. 1926년에 시작해 1989년에 끝난 원호. 전쟁과 패전과 경제 기적과 고도 성장이 모두 그 이름 아래에 있었습니다. 천황이 세상을 떠나자 이튿날 새 원호가 선포됐습니다. 헤이세이(平成). 새 시대. 그러나 쇼와의 무게가 그렇게 쉽게 걷히지는 않을 터였습니다. 역사의 마디가 바뀌는 순간에 귀국한 것이었습니다.
귀국한 다카이치가 처음 맞닥뜨린 현실은 일자리였습니다. 마쓰시타 정경숙 제5기생으로서의 수학 기간은 사실상 끝났습니다. 정경숙은 졸업생의 취업을 알선해주지 않습니다. "자수자득"의 원칙은 졸업 이후에도 적용됩니다.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합니다. 다카이치는 일본경제단기대학(日本経済短期大学)에 조수(助手) 자리를 얻었습니다. 스물여덟 살의 교원. 담당 과목은 미국 정치와 국제 관계였습니다. 워싱턴에서 보고 배운 것들을 강의실에서 풀어놓는 일이었습니다. 전임 교원으로서의 정식 발령이 이루어진 것은 1989년 4월이었습니다.
교단은 낯설지 않았습니다. 말하는 일에 익숙했습니다. 마쓰시타 정경숙에서 수도 없이 했던 구술 발표와 토론이 훈련이 됐습니다. 학생들 앞에서 강의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정경숙에서 5년을 보내고, 워싱턴에서 2년을 보낸 이유가 교수가 되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목표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슈로더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힌 그것. 일본의 총리.
강의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TV 아사히(テレビ朝日)였습니다.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프로그램 이름은 《코다와리 TV PRE★STAGE》. 생활 정보와 시사를 다루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미국 정치를 직접 체험한 전문가라는 이력이 눈에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다카이치는 수락했습니다. 1989년 4월부터였습니다.
그 프로그램에 같이 출연한 사람들 중에 훗날 정치인이 되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렌호(蓮舫). 대만 출신 부모를 둔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이후 민주당 국회의원이 됐고, 당 대표까지 지냈습니다. 다카이치와는 정치 노선이 정반대 편이 됩니다. 그러나 1989년, 두 사람은 같은 스튜디오에서 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텔레비전이 정치인 지망생들의 얼굴을 알리는 무대였던 시절이었습니다.
방송은 다카이치에게 두 가지 능력을 훈련시켰습니다. 첫째는 전달의 기술이었습니다. 복잡한 정치 이슈를 짧은 시간 안에 시청자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는 것. 전문 용어를 쓰지 않고 핵심을 전하는 것.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강의는 청중이 집중해서 듣습니다. 텔레비전은 시청자가 채널을 돌릴 수 있습니다. 말이 명쾌하지 않으면 다음 채널로 이동합니다. 그 긴장감이 표현력을 날카롭게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그녀가 국회 본회의에서 야당 의원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즉석으로 답변할 때, 방송에서 단련된 반사 신경이 작동했습니다.
둘째는 시사 현안에 대한 즉각적 판단력이었습니다. 생방송 프로그램에서는 예상치 못한 주제가 나옵니다. 방금 터진 사건에 대해 바로 의견을 말해야 합니다. 틀릴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실시간으로 판단을 내리는 훈련. 이것도 정치인에게 필요한 능력입니다. 국회 본회의에서 야당의 날카로운 질문에 즉석으로 답변해야 할 때, 방송에서 단련된 반사 신경이 작동합니다.
1990년 10월, 더 큰 기회가 왔습니다. 후지 텔레비전(フジテレビ) 계열의 아침 프로그램 《아침이다! 어떻게 되나》(朝だ!どうなる)의 메인 캐스터를 맡게 됐습니다. 아침 방송. 매일 시청자들이 하루를 시작하면서 보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뉴스를 정리하고, 날씨를 전하고, 사회 이슈를 다루고, 게스트와 대화를 나눕니다. 전국 방송이었습니다.
이 자리는 단순한 방송 출연이 아니었습니다. 전국의 시청자에게 매일 아침 얼굴을 비추는 일이었습니다. 출마를 준비하는 정치인 지망생에게 이보다 효과적인 이름 알리기 방법은 없었습니다. 물론 캐스터가 정치인 지망생이라는 사실을 시청자들이 알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냥 매일 아침 화면에 나타나는 젊고 명쾌한 여성으로 인식되면 충분했습니다. "아, 저 사람이 선거에 나왔군" 하는 순간, 낯선 얼굴이 아닌 셈이 됩니다.
방송인과 교원 두 직함을 동시에 지닌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오전에는 강의실에 서고, 오후에는 방송국으로 향했습니다. 어느 쪽도 가볍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 앞에서 미국 정치를 설명할 때는 워싱턴에서 실제로 본 것들을 이야기했습니다. 방송에서 시사 해설을 할 때는 학자로서의 논리를 갖추었습니다. 두 역할이 서로를 강화했습니다.
일본 정치의 현실도 빠르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1988년부터 1989년에 걸쳐 리크루트 스캔들(Recruit Scandal)이 터졌습니다. 리크루트 코스모스 회사가 미공개 주식을 유력 정치인들에게 뇌물성으로 분배한 사건이었습니다. 전직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전 총리, 그 외 수십 명의 정치인과 관료들의 이름이 올랐습니다. 다케시타 총리가 사임했습니다. 뒤를 이은 우노 소스케(宇野宗佑) 총리는 여성 스캔들로 단명했습니다. 자민당은 1989년 참의원 선거에서 사상 초유의 패배를 맛봤습니다.
유권자들의 불만은 쌓이고 있었습니다. 정치 부패에 대한 분노, "자민당 38년 지배"가 썩어가고 있다는 감각. 그 분노가 어디를 향할지, 아직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정당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자민당을 탈당한 의원들이 뭉치고 있었습니다. "정치 개혁"이라는 말이 모든 정치인의 입에 올랐습니다.
다카이치는 이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습니다. 아침 방송을 하면서, 강의를 하면서,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그리고 1992년, 그 흐름이 자신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해 책 두 권을 출판했습니다. 하나는 『アメリカ大統領の権力のすべて』(미국 대통령의 권력 모두). 워싱턴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 대통령제의 작동 방식을 분석한 책이었습니다. 실제로 의회에서 일해본 사람이 쓴 책이라는 점에서 당시 일본 시장에서 드문 것이었습니다. 대통령이 어떻게 의회를 설득하고, 예산 협상을 벌이고, 행정 명령으로 정책을 실행하는지를, 복도 저편에서 지켜본 눈으로 기록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アメリカの「女性大国」神話を斥ける』(미국의 '여성 대국' 신화를 배격한다). 워싱턴에서 동양인 여성으로서 경험한 편견과 구조적 차별을 분석한 책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미국이 여성의 권리가 매우 앞선 나라라는 인식이 퍼져 있었습니다. 다카이치는 그 신화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의회 인턴 시절, 그녀는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노골적인 차별을 경험했습니다. 미국의 표면적 다양성 담론 뒤에 실제로 존재하는 유리 천장과 인종적 편견을 직접 목격한 사람의 기록이었습니다.
이 두 책은 단순한 저작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학자로서의 신뢰도를 높이는 동시에, 정치인 지망생으로서의 입장을 뚜렷하게 만들었습니다. 미국식 여성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입하는 것에 경계감을 갖는 보수적 여성 정치인. 그 이미지가 이 시기에 형성됐습니다.
두 권의 책이 나온 같은 해, 그녀는 자민당 나라현 연합회에 공천 신청을 냈습니다. 그리고 거절당했습니다. 이유는 복합적이었습니다. 지역 기반이 없었습니다. 지역 자민당 조직과의 연이 없었습니다. 세습 기반도 없었습니다. 당의 입장에서 당선 가능성이 낮아 보이는 후보에게 공천장을 쓰는 것은 자원 낭비였습니다.
거절을 받고 나서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포기하거나, 무소속으로 나가거나. 다카이치는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1993년 중의원 총선거에 나라현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조직도 없이, 당의 지원도 없이, 혼자서.
선거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선거 사무소를 열었습니다. 선거 운동원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자원하는 사람이 처음에는 많지 않았습니다. 무소속 신인 여성의 선거 운동에 자기 시간을 내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핵심 운동원 몇 명으로 시작했습니다.
강의가 있는 날은 강의하고, 방송 녹화가 있는 날은 녹화하고, 나머지 시간은 지역구를 돌았습니다. 나라현의 마을회관, 시장, 유권자의 집. 악수하고, 눈 맞추고, 이름을 기억했습니다. 아버지가 편지에 적어준 조언, "악수와 목례를 잊지 마라"를 문자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기계 회사 영업소장이 딸에게 가르쳐준 영업의 기본이, 정치 선거 운동의 기본이 됐습니다.
방송인으로서의 이름이 도움이 됐습니다. 아침 프로그램에서 매일 얼굴을 내밀었던 그 시간이 축적됐습니다. "아, 저 분이 나왔군" 하는 유권자들의 인식. 완전한 무명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조직 선거와 비교하면 격차는 컸습니다. 자민당 현직 의원들은 후원회(後援会)라는 촘촘한 지역 조직을 갖고 있었습니다. 상공회의소, 농협, 의사회, 각종 단체. 그 조직들이 선거 때마다 조직적으로 표를 몰아줬습니다. 그 메커니즘 없이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1993년의 일본은 그 메커니즘이 흔들리던 시기였습니다. 부패 스캔들로 자민당에 대한 실망이 컸습니다. 조직이 시키는 대로 표를 던지는 것에 회의를 느끼는 유권자들이 늘고 있었습니다. 변화를 원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 분위기 안에서, 당의 논리와 무관한 무소속 신인이 오히려 "새로운 정치"의 상징처럼 보일 수 있었습니다.
자민당의 장기 지배 체제 자체도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1955년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당으로 탄생한 자민당은 그해 이래 38년간 끊임없이 집권해왔습니다. 그 체제를 학자들은 "55년 체제"라고 불렀습니다. 자민당과 사회당이 오른쪽과 왼쪽에서 일본 정치를 양분하는 구도. 그러나 버블 경제가 꺼지면서 그 구도도 삐걱거렸습니다.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자민당 내에서도 나왔습니다. 1992년에는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가 이끄는 그룹이 자민당 내에서 정치 개혁 법안을 놓고 집행부와 충돌했습니다.
방송과 교단을 오가면서, 다카이치는 이 변화의 흐름을 매일 취재하고 분석했습니다. 시사 캐스터라는 직함이 그녀를 정치 현장의 바로 옆에 앉혀두었습니다. 정치인들과 만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이야기하고, 무엇을 걱정하고, 어디서 흔들리는지를 관찰했습니다. 그 관찰이 정치인으로서의 준비가 됐습니다.
귀국한 지 4년이 지난 1993년 여름, 다카이치 사나에는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나라현 선거판에 내걸었습니다. 마쓰시타의 가르침, 워싱턴의 경험, 방송의 얼굴, 강의실의 언어. 조직 없는 선거에서 그것이 얼마나 통할 것인지,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선거 결과는 다음 장에서 밝혀집니다. 그러나 이 귀국 이후 4년의 의미를 짚어두겠습니다. 강의하고, 방송하고, 집필하고, 선거를 준비한 그 시간은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었습니다. 세습 기반도, 조직도, 자금도 없는 정치인 지망생이 자신의 경쟁력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전문 지식과 대중 소통 능력. 마쓰시타와 워싱턴에서 얻은 내용을 TV와 강의실에서 다듬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언어로 유권자에게 말을 거는 것. 그것이 조직 없는 선거에서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습니다.
일본 정치사에서 기록에 남는 방송인 출신 정치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방송의 유명세를 발판으로 정당의 공천을 받는 경로를 밟았습니다. 다카이치는 달랐습니다. 공천을 거절당하고도 나갔습니다. 그 점에서 그녀의 정치 입문은 처음부터 남다른 자취를 남겼습니다. 외부에서 밀어주는 힘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힘으로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지는 그녀 정치 스타일의 원형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