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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11장 첫 입각, 오키나와에서 이노베이션까지
유리 천장을 넘어서
제3부 성장 — 각료에서 당의 중심으로
11장 첫 입각, 오키나와에서 이노베이션까지
김경진
2006년 9월 26일 오전, 황궁(皇居).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제90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는 인증식이 열렸습니다. 1954년생인 아베는 당시 52세였습니다. 전후 일본에서 가장 젊은 총리였습니다. 전후에 태어난 세대 최초의 총리이기도 했습니다.
그날 오후, 새 내각의 각료 명단이 발표됐습니다. 다카이치 사나에의 이름이 들어 있었습니다.
내각부 특명담당대신(内閣府特命担当大臣). 담당 분야는 다섯이었습니다. 오키나와 및 북방대책(沖縄及び北方対策), 과학기술 정책(科学技術政策), 저출산 및 남녀공동참획(少子化・男女共同参画), 식품 안전(食品安全), 이노베이션(イノベーション).
입각이었습니다. 첫 입각.
1993년 무소속으로 처음 국회에 들어온 이후 13년이 걸렸습니다. 두 번의 낙선, 세 번의 정당 이동, 한 번의 교수직. 그 굴곡 많은 경로의 끝에서 처음으로 장관 배지를 달았습니다.
각료 발령 문서를 손에 든 다카이치의 모습을 당시 언론이 포착했습니다. 표정은 담담했습니다. 감격이라기보다는 결의에 가까운 표정.
아베 내각은 '전후 레짐으로부터의 탈각(戦後レジームからの脱却)'을 슬로건으로 내걸었습니다. 전후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것. 헌법 개정, 교육 재건, 안보 정책 강화. 보수 이념을 전면에 내세운 내각이었습니다. 다카이치는 그 이념과 맞았습니다.
담당 분야 다섯 가지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키나와 및 북방대책. 이것은 일본 정치에서 가장 민감하고 복잡한 파일 중 하나입니다.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와 다른 역사를 가졌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전장이 됐습니다. 전후에는 미국의 신탁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1972년에야 일본에 반환됐습니다. 그러나 반환 이후에도 미군 기지가 집중됐습니다. 일본 국토 면적의 0.6%에 불과한 오키나와에, 미군 전용 시설 면적의 약 70%가 몰려 있었습니다.
기지 소음, 범죄, 환경 오염. 오키나와 주민들의 불만은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1995년 미군 관련 성폭행 사건이 터지면서 기지 이전 요구가 폭발했습니다. 이후 '후텐마 기지(普天間基地) 이전' 문제가 일본 정치의 만성적 과제가 됐습니다. 어떤 내각도 이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북방대책은 러시아와의 영토 문제입니다. 에토로후(択捉島), 구나시리(国後島), 시코탄(色丹島), 하보마이(歯舞諸島). 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이 점령한 이 섬들을, 일본은 '북방 영토'라고 부르며 반환을 요구합니다. 60년 이상 해결되지 않은 외교 현안이었습니다.
과학기술 정책과 이노베이션. 이 분야는 다카이치의 강점이었습니다. 마쓰시타 전기에서 일했던 경험, 미국 의회에서 연구했던 경험, 산업 정책론을 강의했던 경험. 기술 개발과 산업 경쟁력 문제에 대해 그녀는 이론과 실무 양쪽에서 생각해왔습니다.
저출산 및 남녀공동참획. 일본의 합계출산율이 2005년에 1.25라는 역대 최저를 기록했습니다. 저출산이 일본의 장기 과제로 본격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시점이었습니다. 남녀공동참획은 여성의 사회 참여를 촉진하는 정책입니다. 다카이치 자신이 여성 정치인으로서, 이 분야에 대한 나름의 관점이 있었습니다.
식품 안전은 당시 일본에서 긴박한 과제였습니다. 2000년대 초반 광우병(BSE) 문제, 잔류 농약 문제, 원산지 허위 표시 문제 등이 잇따랐습니다. 식품 안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진 상황이었습니다.
다섯 분야가 왜 한 명의 장관 밑에 묶였는가. 솔직히 말하면, 이것은 인사의 묘기입니다. 정치적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은 분야들을 한 명에게 묶어 처리하는 방식. 신임 각료에게 주어지는 '연습용' 포트폴리오라는 성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실제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오키나와를 방문했습니다. 지역 요청을 들었습니다. 진흥 예산을 논의했습니다. 기지 문제에 대해 현지 주민들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오키나와는 '방문하면 현실을 느끼는' 곳입니다. 나하(那覇) 공항에 내려 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금방 군용지 표지판이 보입니다. 군사 시설이 민간 주거지와 뒤섞인 풍경. 그 현실을 안에서 보는 것과 밖에서 보는 것은 다릅니다.
2007년 8월 15일이 왔습니다.
종전기념일. 1945년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을 선언한 날. 매년 이 날이 되면, 야스쿠니 신사(靖国神社)에 참배하느냐 마느냐가 일본 정치의 초미의 관심사가 됩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메이지 유신 이후의 전쟁에서 전사한 약 246만 명을 합사한 신사입니다. 그 중에는 1978년 합사된 14명의 A급 전범이 포함됩니다. 도조 히데키(東条英機)를 비롯한 전쟁 지도자들. 한국과 중국은 이들이 합사된 신사에 일본 각료가 참배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전쟁 미화"라는 것입니다.
2007년 8월 15일, 아베 내각의 각료들은 대부분 야스쿠니 참배를 하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아베 총리 자신도 그랬습니다. 한중 외교 관계를 고려한 자제였습니다.
그러나 다카이치 사나에는 갔습니다.
당일 16명의 각료 중 야스쿠니를 참배한 것은 그녀 하나였습니다.
왜 갔는가. 다카이치는 이후 일관된 입장을 유지했습니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역사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전몰자 추도의 문제입니다." 종교 시설에 대한 개인의 참배를 외교 문제와 분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 행동은 국내외에서 엇갈린 반응을 낳았습니다. 한국과 중국은 비판했습니다. 일본 내 진보 언론도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보수층에서는 지지를 받았습니다. "각료가 혼자서라도 갔다"는 것. 그 선택이 다카이치를 일본 보수 정치인의 상징적 인물로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습니다.
야스쿠니 참배는 다카이치의 정치 캐릭터를 정의하는 행위 중 하나가 됐습니다. 이후 그녀는 총재 선거에 세 번 도전하면서도, 야스쿠니에 대한 입장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총리가 된 2025년에는 야스쿠니 참배 문제가 한일 외교의 핵심 변수가 됐습니다.
2007년 9월, 아베 신조가 갑작스럽게 사임했습니다. 참의원 선거 대패, 각료 연이은 스캔들, 본인의 궤양성 대장염 악화. 임기 1년도 채우지 못한 퇴진이었습니다. 다카이치의 첫 입각도 함께 끝났습니다.
기간은 약 11개월이었습니다. 2006년 9월 26일부터 2007년 8월 27일까지.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이 남긴 것이 있었습니다.
첫째, 행정의 감각. 의원은 법안을 만들고 질의합니다. 장관은 그 법안을 집행하는 기관을 이끕니다. 예산을 배분하고, 관료들과 조율하고, 다른 성청과 협상합니다. 국회에서 야당의 질문에 답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의원 시절과는 다른 종류의 일입니다. 다카이치는 그 경험을 처음 해봤습니다.
둘째, 아베와의 유대. 아베 신조는 일시 퇴진했지만 정치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2012년 자민당 총재로 돌아와 총선에서 압승했습니다. 제96대 총리가 됐습니다. 그 두 번째 아베 내각에서 다카이치는 다시 불렸습니다. 이번에는 총무대신이라는 큰 자리로. 아베와 다카이치의 인연은 2006년 첫 입각으로 시작됐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셋째, 국민적 인지도.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은 화려한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각료가 되는 것 자체가 언론 노출을 높입니다. 더구나 종전기념일 야스쿠니 참배라는 행동은 전국 뉴스가 됐습니다. 다카이치의 이름이 일본 전역에 알려졌습니다.
첫 번째 각료직은 짧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음 각료직의 기초가 됐습니다. 두 번째 입각이 훨씬 길고 무거운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총재 도전, 네 번째 총재 도전이 있었고, 마침내 2025년 총리 취임이 있었습니다.
1993년 나라현 투표소에서 개표 결과를 기다리던 무소속 32살의 여성 정치인. 그로부터 13년이 흘러 처음 장관 배지를 달았습니다. 그리고 19년이 더 흘러 총리 관저에 들어갔습니다. 그 사이의 모든 경험 — 낙선, 교수직, 자객 후보, 야스쿠니 혼자 참배 — 이 모든 것이 합쳐져 다카이치 사나에라는 정치인을 만들었습니다.
다섯 가지 담당 분야 중에서도 이노베이션과 과학기술 정책은 다카이치가 가장 열성을 쏟은 영역이었습니다. 아베 내각은 '이노베이션 25'라는 장기 비전을 준비했습니다. 25년 후인 2025년을 향해 일본이 어떤 기술 혁신을 이루어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전략 문서였습니다. 다카이치는 이 문서의 작성을 주도했습니다. 로봇 공학, 바이오 기술, 정보통신 기술. 일본이 강점을 가진 분야와 미래에 집중해야 할 분야를 정리했습니다.
그러나 이 내각이 출발에서부터 흔들렸습니다. 아베 내각의 각료 스캔들이 연이어 터졌습니다. 마쓰오카 도시카쓰(松岡利勝) 농림수산대신이 정치 자금 문제로 의원회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아카기 노리히코(赤城徳彦) 농림수산대신은 정치 자금 처리 문제로 물러났습니다. 아베 총리 자신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역대 최악의 패배를 당한 직후부터 리더십에 의문이 제기됐습니다.
각료들이 사임하고 교체되는 혼란 속에서 다카이치는 자리를 지켰습니다. 임명된 후 한 번도 교체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아베 총리에게 신임받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전체 내각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한 명의 장관이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저출산·남녀공동참획 담당 대신으로서, 다카이치는 아이러니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본인이 자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언론이 여러 차례 지적했습니다. "자녀가 없는 정치인이 저출산 대책을 담당하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질문. 다카이치는 이 질문에 당당하게 답했습니다. "저출산 문제는 자녀를 가진 사람만 다룰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회 전체의 구조와 제도의 문제입니다. 저는 그 구조를 바꾸기 위해 일합니다."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정책과 동일시하지 않는 태도였습니다. 그 답변이 오히려 성숙한 정치인의 면모로 읽히기도 했습니다.
아베 내각이 끝난 것은 2007년 9월이었습니다. 아베 총리 자신이 건강 문제와 국정 운영의 어려움을 이유로 돌연 사임을 발표했습니다. 2007년 9월 12일. 임시국회 개회 첫날이었습니다. 야당과의 대결을 앞두고 전격 사임. 정치부 기자들조차 예상하지 못한 발표였습니다.
다카이치의 첫 입각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2006년 9월 26일부터 2007년 8월 27일까지. 임기는 11개월. 짧았지만 밀도가 있었습니다. 다섯 가지 정책 영역에서 동시에 일했습니다. 오키나와의 현실을 발로 배웠습니다. 야스쿠니를 혼자 참배함으로써 보수 정치인으로서의 입장을 전국에 알렸습니다. 과학기술 이노베이션 전략의 입안을 경험했습니다. 저출산 대책의 구조를 이해했습니다.
행정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의원 시절과는 다른 각도에서 봤습니다. 관료 조직의 논리, 부처 간 이해 조정, 예산 배분의 협상. 법안은 의원회관 회의실에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청의 좁은 복도를 오가며, 수십 번의 협의를 거쳐, 마지막에 대신의 결재를 받아 형태를 갖춥니다. 그 과정을 입각하기 전에는 외부에서만 봤습니다. 입각하고 나서야 안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참고 자료
- 高市早苗 Wikipedia(日本語): https://ja.wikipedia.org/wiki/%E9%AB%98%E5%B8%82%E6%97%A9%E8%8B%97 - 首相官邸 — 第1次安倍内閣 閣僚等名簿: https://www.kantei.go.jp/jp/singi/ - 時事ドットコム 女性大臣の系譜 第1次安倍内閣: https://www.jiji.com/jc/d4?p=jwm149-24takaichi-jpp04742232&d=d4_mm - Sanae Takaichi Wikipedia (English): https://en.wikipedia.org/wiki/Sanae_Takaichi - Controversies surrounding Yasukuni Shrine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Controversies_surrounding_Yasukuni_Shrine - 靖国神社参拝で残念に思ったこと — 高市早苗公式サイト: https://www.sanae.gr.jp/column_detail21.html
과학기술 정책과 이노베이션 담당 대신으로서의 역할도 중요했습니다. 2006년은 일본이 인터넷 보급률이 빠르게 증가하고, 디지털 경제의 기반이 형성되던 시기였습니다. 다카이치는 이 분야에서 정부가 어떻게 민간 혁신을 지원할 수 있는지를 고민했습니다. 마쓰시타 전기 근무 경험과 미국 의회 조사관 시절의 시각이 이 역할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11개월이라는 짧은 입각 기간이었지만, 다카이치는 그 시간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부처 관료들과의 관계 구축, 국회 답변 준비, 미디어 대응. 이 모든 것이 다음 입각 — 2014년 총무대신 취임 — 을 위한 준비 과정이었습니다. 정치란 단기간의 성과만으로 평가되지 않습니다. 긴 시간 동안 쌓인 경험과 네트워크, 그리고 신뢰가 결국 더 큰 자리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