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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12장 경제산업 부대신 — 청소년과 인터넷, 그리고 야당의 3년
유리 천장을 넘어서
제3부 성장 — 각료에서 당의 중심으로
12장 경제산업 부대신 — 청소년과 인터넷, 그리고 야당의 3년
김경진
2007년 9월, 제1차 아베 내각이 붕괴했습니다. 다카이치의 첫 각료직도 함께 끝났습니다. 이후 자민당은 총리를 계속 갈아치웠습니다.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그리고 아소 다로(麻生太郎). 단임으로 끝난 총리들의 행렬. 정권의 무게중심이 흔들렸습니다.
그 흔들림 속에서 다카이치는 두 번째 부름을 받았습니다.
2008년 8월. 후쿠다 야스오 총리가 내각을 개조했습니다. 그 개조 내각에서 다카이치에게 주어진 자리는 경제산업 부대신(経済産業副大臣)이었습니다. 각료가 아니라 부대신. 직급은 한 단계 낮아졌습니다. 그러나 경제산업성은 일본 산업 정책의 심장이었습니다. 에너지, 통상, 중소기업. 다카이치가 의원 시절부터 관심을 가져온 분야들이 집약된 부처였습니다.
후쿠다 내각의 임기는 짧았습니다. 2008년 9월, 후쿠다 총리가 갑작스럽게 사임했습니다. 리먼 브라더스 파산이 전 세계를 흔들던 달이었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파가 일본 경제에도 밀려오던 시점에 후쿠다는 자리에서 내려왔습니다. 이유는 복합적이었습니다. 지지율 하락, 여야 대치, 본인의 피로감.
그러나 다카이치의 부대신 자리는 유지됐습니다. 뒤를 이은 아소 다로 내각에서도 그녀는 경제산업 부대신을 계속 맡았습니다. 후쿠다 개조내각에서 시작해 아소 내각까지. 2008년 8월부터 2009년 9월까지 약 1년 1개월. 경제산업 부대신으로서 경제산업성의 행정 현장을 경험했습니다.
부대신의 일은 장관의 일과 다릅니다. 장관이 정책의 방향을 정하고 국회에서 책임을 지는 자리라면, 부대신은 그 방향을 행정으로 실현하는 자리입니다. 구체적인 법안의 내용을 관료들과 함께 만들고, 관련 업계와 협의하고, 다른 부처와 조율하는 실무가 부대신의 몫입니다. 다카이치는 그 실무를 배웠습니다.
이 시기에 그녀가 주도한 작업 중 하나가 청소년의 인터넷 환경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경제산업성의 주관 업무만은 아니었습니다. 다카이치는 자민당 내에서도 청소년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부대신 직무와 당내 역할이 겹치면서, 그녀는 이 문제에 두 방향에서 동시에 접근했습니다.
인터넷이 일본 사회에 폭발적으로 보급된 것은 200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2007년 일본의 인터넷 이용자 수는 8,700만 명을 넘었습니다. 인구의 3분의 2가 넘는 숫자였습니다. 그와 함께 문제가 생겼습니다. 청소년들이 인터넷에서 유해 정보에 무방비로 노출됐습니다. 성인 콘텐츠, 폭력적 영상, 자살 관련 게시물, 왕따와 연결된 익명 게시판. 학교 현장과 보호자들이 우려를 제기했습니다. 어디선가 대응책이 나와야 했습니다.
문제는 피해 사례로도 드러났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조직된 집단 자살 사건들이 잇달았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이 인터넷 게시판에서 만나, 아파트 방에 모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온라인 왕따가 오프라인 폭력보다 더 잔혹하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실명도 얼굴도 없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언어 폭력. 피해자는 도망갈 곳이 없었습니다.
다카이치는 그 문제를 입법으로 풀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자민당 청소년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법안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내각부와 교육부, 총무성, 경제산업성이 관련된 복잡한 횡단 과제였습니다. 부처 이기주의와 업계의 저항이 교차하는 영역이었습니다.
업계의 저항은 예상된 것이었습니다. 필터링 서비스를 의무화하면 서비스 개발 비용이 늘고, 이용자에게 불편을 줄 수 있다는 반발이 나왔습니다. 일부에서는 표현의 자유 침해 우려도 제기됐습니다. 유해 정보의 기준을 누가 정하느냐는 질문도 있었습니다. 정부가 인터넷 콘텐츠에 개입하는 것 자체에 대한 원칙적 반대도 있었습니다.
다카이치는 이 반발들을 하나씩 대면했습니다.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18세 미만 청소년에게 성인용 콘텐츠가 무방비로 흘러드는 것을 업계 자율에만 맡겨두는 것은 부모로서, 어른으로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규제가 아닌 보호라는 논리였습니다.
2008년 6월 6일. 중의원 청소년문제특별위원회에서 법안이 위원장 제안으로 전원 일치 가결됐습니다. 6월 11일, 참의원 본회의에서 찬성 233표, 반대 1표. 청소년이 안전하고 안심하고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의 정비 등에 관한 법률, 통칭 청소년 인터넷 환경 정비법(青少年インターネット環境整備法)이 성립했습니다.
법의 핵심은 필터링이었습니다. 이동통신 사업자는 18세 미만의 이용자에게 원칙적으로 유해 정보 차단 필터링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를 지게 됐습니다. 보호자가 해제를 원할 경우에는 신청할 수 있지만, 기본 설정은 필터링 적용. 2009년 4월 1일 시행.
이 법은 논란이 없지 않았습니다. 표현의 자유와 충돌한다는 비판, 유해 정보의 판단 기준이 모호하다는 지적, 업계의 자율 규제로 충분하다는 주장. 찬반이 교차했습니다. 그러나 다카이치는 입법의 필요성을 밀어붙였습니다. 기술이 바뀌어도 어른이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그녀의 신념이었습니다.
청소년 인터넷 환경 정비법은 다카이치 입법 경력의 초기 성과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정보통신 분야에서 그녀의 전문성이 처음으로 입법 실적으로 나타난 사례였습니다. 이후 그녀가 총무대신으로서 방송·통신 정책을 이끌게 되는 경력의 출발점이기도 했습니다.
2009년 여름. 일본 정치의 판이 뒤집혔습니다.
8월 30일, 제45회 중의원 총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자민당은 역사적인 대패를 당했습니다. 119석. 민주당이 308석을 가져갔습니다. 1955년 이후 처음으로, 자민당은 진정한 의미에서 야당이 됐습니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내각이 탄생했습니다.
투표함을 열기 전부터 분위기는 명확했습니다. 리먼 쇼크로 일본 경제가 흔들렸고, 자민당은 후쿠다에 이어 아소까지 단임으로 끝내며 국민의 신뢰를 잃었습니다. 어떻게든 바꿔야 한다는 민심. 그 민심이 투표장에서 행동이 됐습니다.
다카이치의 나라 제2구에서도 바람이 불었습니다. 상대는 다키 미노루(滝実)였습니다. 2005년 다카이치가 자객 후보로 투입돼 물리쳤던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4년 만의 재대결. 이번에는 다키가 이겼습니다. 정권교체의 바람이 선거구를 휩쓸었고, 2005년의 고이즈미 후광은 사라진 지 오래였습니다.
소선거구에서 낙선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의원직 상실은 아니었습니다. 비례 긴키 블록으로 부활 당선됐습니다. 5선째. 의원증은 유지됐지만, 소선거구 낙선이라는 사실은 그 자리에 남았습니다.
야당의 자리는 불편합니다. 예산을 편성하지 못하고, 행정을 지휘하지 못하고, 정책을 집행하지 못합니다. 의원들은 질의하고 반대하고 대안을 제시하지만, 그것이 실제 정책이 되려면 정권을 잡아야 합니다. 자민당이 야당으로 있었던 3년. 다카이치는 그 시간을 여러 방향에서 썼습니다.
입법 시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2009년 11월, 아동 매춘과 아동 포르노 금지법 일부 개정안을 제출했습니다. 핵심 내용은 아동 포르노의 단순 소지 금지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선진국 중 드물게 아동 포르노 단순 소지에 형사 처벌 규정이 없었습니다. 법안은 즉시 성립하지 않았습니다. 여야 대치, 내용 조정, 논의 반복. 그러나 다카이치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동일한 취지의 개정안을 회기마다 다시 제출했습니다. 그 끈질긴 추진이 결실을 보는 것은 5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민주당 정권의 정책에 대해서는 정면에서 반대했습니다. 특히 하토야마 내각과 간 나오토(菅直人) 내각이 추진한 선택적 부부별성(夫婦別姓) 도입안에 강하게 맞섰습니다. 결혼 후에도 혼인 전 성씨를 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자는 제도 개혁이었습니다. 다카이치는 이 개혁에 반대했습니다. 가족이 같은 성을 공유하는 것은 유대의 상징이라는 것이 그녀의 논거였습니다. 그 대신 직장에서의 구성(旧姓) 사용 편의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해결하자는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이 입장은 보수 유권자들 사이에서 확실한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젠더 평등을 요구하는 측에서는 비판의 대상이 됐습니다. 다카이치는 그 비판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자신의 가족관이 있었고, 그것이 정책으로 연결됐습니다.
야당 시절, 일본은 거대한 재난을 맞았습니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규모 9.0.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지진이었습니다. 거대한 쓰나미가 도호쿠 해안을 덮쳤습니다. 후쿠시마 제1 원자력발전소의 냉각 시스템이 작동을 멈췄습니다. 노심 용융. 원전 폭발 영상이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이 재난 앞에서 민주당 정권은 갈팡질팡했습니다. 정보 공개의 지연, 초기 대응의 혼선, 관료 조직과의 마찰. 간 나오토 총리는 비판의 중심에 섰습니다. 자민당은 이 시기에 직접적인 정치 공세를 자제했습니다. 재난 상황에서 정쟁을 벌이는 것은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원과 협력의 형식 안에서도, 민주당 정권의 실패가 축적되고 있다는 사실은 자민당에게 불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카이치는 이 시기에 자신의 선거구인 나라를 지역구 의원으로서 챙겼습니다. 나라는 직접적인 피해 지역은 아니었지만, 전국적인 위기 상황에서 지역 주민들의 불안을 관리하고, 국회에서 피해 지역 지원 법안에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야당 의원으로서의 역할이었습니다.
야당 3년 중 가장 조용하게, 그러나 가장 큰 의미를 갖는 결정이 2011년에 이루어졌습니다.
다카이치는 세이와정책연구회(清和政策研究会)를 탈퇴했습니다. 자민당 내에서 아베 신조가 속한 파벌이자, 모리 요시로(森喜朗)와 마치무라 노부카즈(町村信孝)가 이끌어온 최대 파벌이었습니다. 일본 정치에서 파벌은 단순한 모임이 아닙니다. 선거 자금, 당내 인사, 정보 공유. 파벌에 속해야 흐름을 탈 수 있습니다. 파벌을 나온다는 것은 그 네트워크에서 이탈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다가오는 자민당 총재 선거. 파벌 회장인 마치무라가 총재 후보로 나설 경우, 파벌원으로서는 마치무라를 지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카이치가 지지하고 싶은 사람은 아베였습니다.
선택은 명확했습니다. 파벌을 나왔습니다. 조직의 논리보다 자신의 판단을 앞세운 결정. 이것이 다카이치라는 정치인의 반복되는 패턴이었습니다. 1993년 신당 사키가케의 압력을 거부하고 코노 요헤이에게 투표했을 때, 2007년 야스쿠니를 혼자 참배했을 때. 집단의 이익보다 자신의 원칙을 선택하는 행동 양식.
무파벌 선언. 자민당 안에서 파벌 없이 존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이후 그녀의 정치적 위치를 규정하는 하나의 좌표가 됩니다.
2012년 가을, 자민당 총재 선거가 벌어졌습니다. 아베 신조가 다시 출마했습니다. 2007년 총리직을 사임하고 5년 만에 당권 도전. 비주류라는 시선을 받았습니다. 건강 문제가 재임 때 약점이었다는 기억이 당내에 남아 있었습니다.
다카이치는 아베의 추천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투표 결과는 극적이었습니다. 1차 투표에서 아베는 이시바 시게루(石破茂)에게 뒤졌습니다. 당원 투표까지 포함한 1차 결과는 이시바 199표, 아베 141표. 누구도 과반을 얻지 못해 국회의원만이 투표하는 결선으로 넘어갔습니다. 결선: 아베 108표, 이시바 89표. 역전. 아베 신조가 자민당 총재로 복귀했습니다.
2012년 12월, 중의원 총선거. 자민당이 294석을 가져가며 압승했습니다. 다카이치는 나라 제2구 소선거구에서 6선 당선을 이루었습니다. 2009년에 자신을 꺾었던 다키 미노루를 이번에는 다시 꺾었습니다. 한 선거구에서 서로 번갈아 이기는 패턴. 그것이 나라 제2구의 역사였습니다.
아베가 총리가 됐습니다. 제96대 내각총리대신. 제2차 아베 내각이 출범했습니다.
그리고 다카이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이번에 주어진 자리는 첫 입각 때와 달랐습니다. 자민당 광보본부장(広報本部長). 집권 직후 당의 메시지를 관리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녀는 총선 슬로건 일본을 되찾겠다는 문구가 담긴 포스터를 기획했습니다. 아베와 이시바가 나란히 담긴 자민당의 얼굴. 그것이 거리 곳곳에 붙었습니다.
광보본부장은 예비 단계였습니다. 곧이어 진짜 자리가 주어졌습니다.
자민당 정무조사회장(政務調査会長). 당의 정책을 총괄하는 직책. 자민당 역사상 여성 최초.
야당의 3년이 끝났습니다. 그 3년 동안 그녀가 한 것은 입법 시도와 반대 활동과 파벌 탈퇴였습니다. 화려한 실적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3년이 끝날 때 그녀의 위치는 입각 전보다 높았습니다. 아베의 신뢰를 얻었고, 파벌의 속박을 떨쳤고, 다음 역할을 위한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경제산업 부대신으로 시작한 이 장은 야당 3년으로 이어졌습니다. 권력의 바깥에서 보낸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에서 야당 시절의 의미는, 집권 후에야 온전히 평가됩니다. 그 3년이 없었다면 다음이 없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