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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21장 야스쿠니와 역사의 무게
유리 천장을 넘어서
제5부 권력 —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
21장 야스쿠니와 역사의 무게
김경진
도쿄 한복판, 황궁에서 북쪽으로 걸어서 이십 분 거리에 야스쿠니 신사가 있다.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이곳은, 일본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이자, 일본이 아직 해결하지 못한 가장 어두운 역사가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관광객들은 웅장한 도리이 문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이 문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에게, 야스쿠니는 단순한 신사가 아니다. 그것은 일본이 지난 150년 동안 스스로에게 던져온 질문의 결정체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그 싸움은 옳았는가. 그리고 죽은 자들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야스쿠니 신사는 1869년, 메이지 천황이 세운 신사다. 원래 이름은 도쿄 초혼사(招魂社)였다. 창건의 목적은 뚜렷했다.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 중심의 새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이듬해인 1879년, 이름이 야스쿠니로 바뀌었다. 야스(靖)는 평화롭게 한다는 뜻이고, 쿠니(国)는 나라를 뜻한다. 나라를 평화롭게 하는 신사. 이름은 평화를 말하지만, 이곳에 모셔진 역사는 결코 평화롭지 않다.
현재 야스쿠니에는 246만 6천여 명의 영령이 합사되어 있다. 메이지 유신의 내전에서 숨진 병사들부터,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그리고 태평양전쟁에서 전사한 이들까지. 그들 중에는 조선인과 대만인도 포함되어 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절, 징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본인이나 가족의 동의도 없이 이곳에 합사된 것이다. 그것 자체가 이미 복잡한 역사적 상처이다. 그러나 야스쿠니를 둘러싼 국제 논쟁의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
1978년 10월 17일. 그날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조용하지만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해 7월에 취임한 마쓰다이라 나가요시 새 궁사(宮司)가, 도쿄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판결받은 14명의 위패를 비밀리에 신사에 합사한 것이다. 처형된 도조 히데키, 히로타 고키, 마쓰이 이와네 등 7명과, 옥중에서 병사하거나 재판 중 사망한 히라누마 기이치로 등 7명이었다. 마쓰다이라는 도쿄재판 자체를 전면 부정하는 역사관의 소유자였다. 승자가 패자를 일방적으로 재판한 것이었을 뿐이라는 논리였다. 합사는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이듬해 봄 아사히신문의 보도를 통해서였다.
파문은 즉각적이었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반응은 일본의 쇼와 천황에게서 나왔다. 1945년부터 1975년까지 매년 야스쿠니를 참배해온 쇼와 천황은, A급 전범 합사 이후 단 한 번도 신사를 찾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천황의 사후인 2006년, 당시 궁내청 장관이었던 도미타 도모히코의 메모가 공개되면서 밝혀졌다. 메모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A급 전범이 합사되었기 때문에 참배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내 마음이다." 일본의 천황 스스로가, 합사된 A급 전범의 존재를 이유로 참배를 거부한 것이었다. 아키히토 천황과 현재의 나루히토 천황도 야스쿠니를 참배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일본의 역대 총리들은 달랐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1985년 8월 15일, 종전 기념일에 공식 참배를 강행했다. 중국의 강력한 항의로 이후에는 자제하는 기조가 이어졌지만,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여섯 차례나 야스쿠니를 참배했다. 참배 때마다 한국과 중국은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리고 고이즈미 이후, 어떤 현직 총리도 8월 15일 종전 기념일에 야스쿠니를 참배하지 않았다. 아베 신조가 2013년 12월 26일에 총리로서 참배했지만, 그것은 종전 기념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19년이 흘렀다.
다카이치 사나에는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을 통틀어 야스쿠니에 대해 가장 일관된 태도를 보여온 정치인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춘계 예대제와 추계 예대제, 그리고 8월 15일 종전 기념일이면 거의 빠짐없이 야스쿠니를 찾았다. 2006년 제1차 아베 내각에서 처음으로 각료에 오른 뒤에도 그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각료 신분으로 야스쿠니를 참배하는 것은 외교적 민감성을 한층 높이는 행위였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2007년 8월 15일, 아베 내각 각료 자격으로 야스쿠니를 참배한 각료는 그녀 혼자였다. 아베 총리 자신도 그날은 참배하지 않았다.
총재 선거 과정에서 야스쿠니 참배에 대한 질문이 반복됐다. 총리가 되어도 계속 참배하겠느냐는 물음에, 그녀의 답은 항상 같았다. "국가를 위해 싸운 분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총리가 된 후에도 적절한 시기에 참배하겠습니다." 물러서지 않는 대답이었다.
2025년 10월 총리가 된 이후, 야스쿠니 참배를 둘러싼 외부의 압박은 더욱 강해졌다. 그해 10월의 추계 예대제에서 다카이치는 참배 대신 다마구시(玉串料), 즉 제물 봉납만을 하고 직접 참배는 하지 않았다. 총리가 된 이상, 외교적 파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가 중요했고, 미국도 조용히 자제를 당부해왔다. 관저와 외무성의 조언이 작용했다. 그러나 마음속에 품은 결심까지 접은 것은 아니었다.
2025년 8월 15일. 종전 80주년이었다. 그날,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 참배했다. 현직 총리가 8월 15일에 야스쿠니를 참배한 것은 고이즈미 총리 이후 19년 만이었다. 오전, 그녀는 차분한 표정으로 본전 앞에서 두 번 절하고, 두 번 박수를 치고, 다시 한 번 절했다. 기자들의 카메라 셔터 소리가 잦아든 뒤, 그녀는 짧게 말했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두 번 다시 전쟁의 참화가 반복되지 않도록 마음을 다해 기도드렸습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중국 외교부는 강력한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왕이 외교부장은 "레드라인을 넘었다"며 경고했다. 관영 매체들은 이 참배를 "아시아 국민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행위"로 규정했다. 한국 외교부도 같은 날 주한 일본 대사를 불러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과거 식민 지배와 침략에 대한 진정한 반성의 노력에 역행하는 것으로, 매우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
다카이치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A급 전범 문제가 "국내의 법 절차상 종결된 문제"이며, "외국이 특정 신사에 참배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내정 간섭"이라는 입장을 반복했다. 도쿄재판에서 결정된 전범 지위는 국제법상의 판결이지만,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수락하고 독립을 회복한 1952년, 일본 정부는 이미 A급 전범을 국내법상 전쟁 범죄자로 보지 않는다는 입장을 정리했다. 그녀는 이 논리 위에 서 있다. 전쟁터에서 싸운 것은 당시 국가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추모하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독자들에게 야스쿠니는 그보다 훨씬 복잡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이곳에 합사된 A급 전범들은 한국에게는 침략 전쟁을 주도한 전쟁 범죄자들이다. 도조 히데키는 태평양전쟁을 결정한 전시 수상이었으며, 그의 명령 아래 조선인들은 전쟁터와 군수공장으로 끌려갔다. 그들을 위인으로 기리는 공간에 일본의 총리가 참배하는 것은, 한국과 중국에게는 그 침략을 정당화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더욱이, 야스쿠니에는 본인이나 가족의 동의 없이 합사된 조선인과 대만인 희생자들이 있다. 한국 정부와 유족들은 수십 년째 그들의 위패를 야스쿠니에서 분리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지만, 야스쿠니 측은 "신도(神道)의 논리상 한번 합사된 신령은 분리할 수 없다"며 거부하고 있다. 조선인 청년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선택할 수 없었다.
다카이치의 논리를 이해하려면, 일본 보수파의 역사관을 이해해야 한다. 그들에게 야스쿠니 참배는 산 자가 죽은 자에게 드리는 마지막 예의이다. 죽은 자를 추모하는 것이 어떻게 잘못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전쟁의 책임은 살아남은 지도자들이 졌어야 하며, 명령에 따라 싸우다 죽은 병사들은 그 전쟁의 옳고 그름과 무관하게 추모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논리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전쟁에서 죽은 군인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추모받는다. 한국에도 국립현충원이 있고, 미국에도 알링턴 국립묘지가 있다.
그러나 야스쿠니가 다른 나라의 국립묘지들과 다른 이유가 있다. 야스쿠니 신사 부지 안에 있는 전쟁박물관인 유슈칸(遊就館)에는, 태평양전쟁을 일본의 정당한 자위전쟁으로 묘사하는 전시물들이 있다. 아시아 국가들의 식민지 해방을 위한 성전이었다는 서술도 있다. 이 박물관은 야스쿠니 신사와 분리할 수 없다. 총리가 야스쿠니를 참배할 때, 그는 이 역사관이 담긴 공간에 국가의 이름으로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그것이 한국과 중국이 분노하는 구조적 이유이다.
A급 전범의 분사(分祀)를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일본 내에서 꾸준히 제기된다. A급 전범만 다른 곳으로 옮기면 참배 문제가 해결된다는 논리이다. 자민당 내 일부 온건파도 이를 지지한다. 그러나 야스쿠니 측은 이를 거부한다. 신도의 교리상 합사된 영령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야스쿠니의 입장이다. 결국 정치인이 결단을 내려야 할 문제인데, 다카이치는 그 결단을 내릴 의향이 없다.
다카이치 사나에는 그 무게를 알고 있을까. 아마도 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무게를 다르게 읽는다. 그녀에게 야스쿠니 참배는 외교적 배려가 아니라 국가와 개인 사이의 약속이다. 국가의 명령에 따라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 국가가 마지막으로 지켜야 할 예의. 그 예의를 외국의 눈치 때문에 포기하는 것은, 국가가 자국민을 배신하는 일이라고 그녀는 믿는다.
이해한다는 것이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녀의 논리는 일관성이 있다. 30년 이상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일관성이 낳는 결과는 한국과 중국에서는 매번 깊은 상처로 이어진다. 야스쿠니 앞에서 일본 정치의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역사의 해석을 둘러싼 충돌이 반복된다. 벚꽃은 해마다 피고 진다. 그러나 역사의 무게는 그토록 쉽게 지지 않는다.
천황조차 참배를 거부한 신사에, 총리가 참배한다. 그 모순이 야스쿠니라는 공간의 본질이다. 다카이치 사나에는 그 모순 속에 뛰어들기로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일본과 이웃 나라들 사이에 다시 한번 보이지 않는 담을 쌓았다.
참고 자료
- A급 전범 합사 문제 (Wikipedia): https://ja.wikipedia.org/wiki/A%E7%B4%9A%E6%88%A6%E7%8A%AF%E5%90%88%E7%A5%80%E5%95%8F%E9%A1%8C - 야스쿠니 신사 문제 (Wikipedia): https://ja.wikipedia.org/wiki/%E9%9D%96%E5%9B%BD%E7%A5%9E%E7%A4%BE%E5%95%8F%E9%A1%8C - 쇼와 천황의 참배 거부 이유 (일본경제신문): https://www.nikkei.com/article/DGXLASDG08H0S_Y4A900C1CR8000/ - 야스쿠니와 전범 합사에 이르는 길 (nippon.com): https://www.nippon.com/ja/in-depth/a02404/ - 중국 반응 보도 (레코드차이나): https://www.recordchina.co.jp/b967039-s12-c80-d0189.html - 다카이치 수상 야스쿠니 참배 환경 정비 언급 (일본경제신문): https://www.nikkei.com/article/DGXZQOUA0841J0Y6A200C2000000/ - 도쿄신문 야스쿠니 분사 논의: https://www.tokyo-np.co.jp/article/4399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