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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25장 한일 관계 — 가장 가까운 나라, 가장 어려운 관계
유리 천장을 넘어서
제5부 권력 —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
25장 한일 관계 — 가장 가까운 나라, 가장 어려운 관계
김경진
2025년 10월 30일 저녁, 경북 경주.
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도시였습니다. 신라의 고도. 천 년의 역사가 담긴 돌들이 가을빛 속에 서 있었습니다. 그 도시에서 한국 대통령과 일본 총리가 마주 앉았습니다.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 다카이치가 총리에 취임한 지 9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을 처음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회담은 오후 6시 2분에 시작됐습니다. 41분이 지나 끝났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먼저 말했습니다. "격변하는 국제 정세와 통상 환경 속에서 한국과 일본은 이웃 나라이자 공통점이 참으로 많은 나라입니다. 한일 양국이 그 어느 때보다 미래 지향적인 협력을 강화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다카이치가 답했습니다. "일본과 한국은 서로에게 중요한 이웃 나라입니다. 지금의 전략 환경 아래 한일 관계, 한일미 간 공조의 중요성은 더욱 증대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외교 의례에 맞게 준비된 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단어 하나하나에는 무게가 있었습니다. "중요한 이웃 나라." 단순해 보이지만, 이 말을 다카이치가 한다는 것이 의미를 가졌습니다.
다카이치 사나에라는 이름은 한국에서 어떻게 들릴까요.
2015년, 아베 정권이 강행한 안보 법제 개정. 그 찬성파의 핵심에 다카이치가 있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선택적 부부별성 반대. 역사 인식에서 한국과 충돌하는 발언들. 총리가 되기 전 다카이치에 대한 한국 언론의 보도는 대체로 우려 섞인 것이었습니다.
"강경 우파." "역사 수정주의자." "한국에 가장 우호적이지 않은 자민당 정치인 중 한 명." 이런 표현들이 한국 기사에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2025년 10월, 그 다카이치가 총리가 됐습니다. 한국 정부와 언론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놀랍게도, 협력의 준비를 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다카이치 당선 직후 축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외교의 현실이었습니다. 상대방이 누구인지보다, 지금 당장 협력해야 하는 이웃 나라라는 사실이 중요했습니다.
다카이치도 신호를 보냈습니다. 총리 취임 전 인터뷰에서 그녀는 의외의 말을 했습니다. "한국 김을 좋아합니다. 한국 드라마도 봅니다. 한국 화장품도 씁니다." 정치인이 이웃 나라 문화에 대한 친근감을 표현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입니다. 다카이치는 가장 일상적인 방식을 택했습니다. 음식, 엔터테인먼트, 뷰티. 할머니들이 밥상에서 나누는 이야기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소신 표명 연설에서 다카이치는 외교 파트로 넘어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은 중요한 이웃 나라입니다. 한일 관계를 미래 지향적이고 안정적으로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이 표현이 외교 채널을 통해 서울에 전달됐을 때, 한국 외교부는 안도했다고 합니다.
경주 정상회담이 끝나고 두 달 반이 지난 2026년 1월 13일. 이번에는 이재명 대통령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장소는 나라(奈良)였습니다. 고대 일본의 수도. 그리고 고대 한반도와의 교류가 깊었던 도시. 다카이치의 선거구이기도 했습니다. 다카이치가 손님을 자신의 고향으로 초대한 것이었습니다.
회담은 약 100분 동안 이어졌습니다. 단독 소규모 회담과 확대 회담으로 나뉘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는 두 정상이 함께 호류지(法隆寺)를 방문했습니다. 1,5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절. 한반도의 기술과 문화가 일본으로 건너와 만들어진 건축물. 두 나라의 깊고 오랜 관계를 상징하는 선택이었습니다.
회담의 성과는 실질적이었습니다. 희토류 공동 비축과 공급망 조기경보체계 구축. 반도체와 핵심 광물의 안정적 수급을 위한 공급망 협력 프레임워크. 과학기술 분야 포괄 협력. CPTPP(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동반자협정) 추진 의사 재확인.
이것들은 낭만적인 결과물이 아니었습니다.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한국과 일본이 살아남기 위한 공급망 협력이었습니다. 중국이 희토류 수출을 무기화하고 반도체 분야에서 패권을 노리는 상황에서, 한일 양국이 함께 대응하는 구조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AP통신은 나라 정상회담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다카이치가 중국과의 악화되는 분쟁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한국과의 안정적인 관계를 확보하려 한다." 냉정한 평가였습니다. 다카이치에게 한국은 순수한 우정의 상대가 아니라, 중국 압박 속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전략적 파트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야스쿠니 문제는 어떻게 됐을까요.
다카이치는 총리 재임 중 야스쿠니 신사 직접 참배를 자제했습니다. 다마쿠시료(玉串料, 헌납금)는 냈지만 방문은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 정부는 이것을 평가했습니다. 완전한 해결이라고 보지는 않았지만, 최소한의 외교적 배려로 받아들였습니다.
일부 한국 언론은 비판했습니다. "야스쿠니 참배를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역사관은 변하지 않는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다카이치가 개인적으로 야스쿠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신사 참배는 외교적 계산으로 미뤘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 외교에서 행동이 신념보다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참배를 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 사실이 한일 관계에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한일 관계를 다루려면 두 개의 트랙을 동시에 봐야 합니다.
하나는 역사 트랙입니다. 강제 징용 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독도 영유권. 야스쿠니 참배. 이것들은 해결됐다고 선언할 수 없는 문제들입니다. 다카이치가 총리로 있는 동안, 이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역사 인식에서 한국과 일본이 완전히 같아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다른 하나는 실용 협력 트랙입니다. 반도체, 희토류, 방산, 사이버 보안, 기후 변화, 북한. 이 분야에서 한국과 일본이 협력해야 할 이유는 갈수록 커집니다. 미중 경쟁 속에서 중간 국가들의 자체 협력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윤석열 정부 때 시작된 한일 관계 회복의 흐름이 이재명 정부에서도 이어진 것이 이 시기 가장 눈에 띄는 변화였습니다. 보수 대통령과 보수 총리가 만들어놓은 프레임을, 진보 대통령이 이어받아 확대했습니다. 정치 이념보다 국가 이익이 앞선 사례였습니다.
다카이치 쪽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역사 인식에서 한국과 거리가 있는 정치인이, 실용 외교의 이름으로 한국과의 관계를 챙겼습니다.
이 두 트랙이 충돌하지 않고 병행할 수 있을까요. 역사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의 협력을 이어가는 것. 이것이 한일 관계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글로벌이코노믹의 한 칼럼니스트는 경주 정상회담 이후 이렇게 썼습니다. "협력은 선언됐지만, 질서는 공유되지 않은 한일 정상회담." 날카로운 평가였습니다. 두 나라가 협력하기로 했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근본 인식은 아직 달랐습니다. 그 간극을 어떻게 좁힐 것인가. 이것이 경주와 나라 이후에도 남은 질문이었습니다.
한국 독자들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다카이치 사나에는 한국이 원하는 역사 인식을 가진 일본 지도자가 아닙니다. 그녀는 아베 노선의 계승자입니다. 식민 지배와 침략 전쟁에 대한 명확한 사과를 거부하는 흐름 속에 서 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그녀의 마음이 변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동시에, 다카이치는 한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망가뜨리는 것이 일본에게 이익이 아님을 아는 현실주의자입니다. 중국과의 긴장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한국은 더욱 중요한 이웃입니다. 미국이 트럼프 시대를 겪으면서 동아시아 중견국들의 자체 협력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일 관계의 현실입니다. 좋아서 가까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해서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에서 시작된 관계가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변할지는, 양국 국민 모두에게 달려 있습니다.
한국의 김, 드라마, 화장품을 좋아한다고 말한 다카이치. 그 말이 진심인지 외교적 수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이 나왔다는 사실, 그리고 그 말이 경주와 나라에서의 만남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입니다.
호류지의 돌담 앞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총리가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 남았습니다. 1,500년 전 한반도의 장인들이 쌓은 돌 앞에서, 21세기 두 나라의 지도자가 서 있었습니다. 역사는 그렇게 계속됩니다. 상처를 안고, 이익을 계산하고, 그러면서도 함께 걸어가면서.
가장 가까운 나라, 가장 어려운 관계. 그 관계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참고 자료
- 이재명 대통령·다카이치 총리 첫 정상회담, 경주 APEC (머니S): https://www.moneys.co.kr/article/2025103018581054916 - 한일 정상회담 및 주요 성과 (외교부): https://www.mofa.go.kr/www/brd/m_29514/view.do?seq=15 - 2026년 1월 한일정상회담 (나무위키): https://namu.wiki/w/2026%EB%85%84%201%EC%9B%94%20%ED%95%9C%EC%9D%BC%EC%A0%95%EC%83%81%ED%9A%8C%EB%8B%B4 - 다카이치 "한국 화장품·김·드라마 좋아해" 발언 (다음): https://v.daum.net/v/20251022002312744 - 일한 정상회담 2026년 1월 13일 (주한일본대사관): https://www.kr.emb-japan.go.jp/itpr_ko/news_20260114.html
한일 관계의 미래를 생각할 때, 다카이치의 접근 방식은 "역사 문제와 현안 협력의 분리"라는 틀에 기반합니다. 이 틀이 실제로 작동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 역사 트랙에서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야 합니다. 야스쿠니 직접 참배 자제가 그 신호였습니다. 둘째, 실용 협력 트랙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합니다. 나라 회담의 희토류·공급망 합의가 그 성과였습니다.
한국 독자의 입장에서 이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다카이치 사나에는 한국의 진보 진영이 환영할 수 있는 종류의 일본 총리가 아닙니다. 역사 인식에서 그녀의 입장은 한국의 기대와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 정치는 우리가 원하는 상대와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권력을 쥔 상대와 대화하는 것입니다.
경제 안보, 반도체 공급망, 북한 문제, 미국과의 삼각 협력 — 이 영역에서 한국과 일본의 이해관계는 일치합니다. 그 일치하는 부분에서 협력을 쌓아가는 것이 현실적인 한일 외교입니다. 다카이치 총리가 "한국 김을 좋아한다"고 말한 것은 외교적 제스처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제스처가 쌓여 실질이 되는 과정, 그것이 한일 관계의 역사가 진행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