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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제6장. 글로벌 리더십
짜이왈라에서 총리까지
제6장. 글로벌 리더십
김경진
6.1 다중 제휴 전략: 미국(쿼드)·러시아(BRICS) 균형
2024년 7월 8일 저녁, 모스크바 외곽의 노보오가료보(Novo-Ogaryovo) 대통령 관저. 3연임에 성공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나렌드라 모디가 전용기에서 내렸습니다. 마중 나온 사람은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이었습니다. 두 정상은 악수 대신 양팔을 벌렸고, 전 세계 카메라 앞에서 격정적인 포옹을 나눴습니다. 서방 언론은 이를 '곰 포옹(Bear Hug)'이라 불렀습니다.
타이밍이 문제였습니다. 바로 그날 러시아 미사일이 키이우의 오흐마딧(Okhmatdyt) 어린이 병원을 강타해 민간인 수십 명이 숨졌습니다. 다음 날이면 워싱턴에서 나토(NATO) 창립 75주년 정상회의가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Volodymyr Zelensky) 대통령은 소셜미디어에 병원 잔해 사진을 올리며 이렇게 썼습니다. "세계 최대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가 세계에서 피비린내 나는 범죄자를 포옹하는 모습은 거대한 실망이자 평화에 대한 파괴적 타격이다."
하지만 모디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푸틴과 테라스에서 짜이(Chai)를 마시고, 골프 카트를 타고 관저의 마구간을 구경하며 네 시간 넘게 대화를 나눴습니다. 인도 총리가 취임 후 첫 해외 방문지로 전통적인 남아시아 이웃 국가 대신 모스크바를 택한 것은 관례를 깬 일이었습니다. 서방의 시각에서 이 장면은 배신에 가까웠지만, 모디에게 이것은 철저히 계산된 권력의 문법이었습니다.
왜 그는 하필 이 시점에, 하필 이 장소를 택했을까요?
답을 찾으려면 모디가 설계한 '다중 제휴(Multi-alignment)'라는 외교 전략의 궤적을 추적해야 합니다.
과거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 시절 인도의 외교 원칙은 '비동맹(Non-alignment)'이었습니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겠다"는 소극적 중립이었습니다. 냉전이 끝나고 세계가 미국 중심의 단극 체제로 재편될 때도 인도는 한동안 이 원칙을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모디의 전략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는 "모두의 편에 서서, 오직 인도의 이익만 취하겠다"는 공세적 실리주의를 택했습니다. 한국식으로 풀어 말하면, 동네의 모든 유력자와 친하게 지내면서 각자에게 필요한 것만 챙기는 영리한 처세술입니다. 다만 그 동네가 지구 전체이고, 유력자들이 핵무기를 가진 강대국이라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이 전략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숫자로 드러납니다. 먼저 러시아 쪽을 보겠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기 전인 2021년, 인도의 전체 원유 수입에서 러시아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2%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서방의 제재로 러시아산 원유 가격이 국제 시세보다 배럴당 15~20달러 폭락하자, 모디 정부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2024~25 회계연도에 이르면 러시아는 인도 원유 수입의 약 40%를 차지하는 최대 공급국이 되었습니다. 인도는 중국을 제치고 러시아 원유의 세계 최대 수입국 자리를 굳혔습니다. 전쟁 전과 비교하면 50배 가까운 폭증입니다. 인도의 정유사들은 이 싼 원유를 정제하여 디젤과 항공유로 만든 뒤 유럽에 되팔아 막대한 이윤을 챙겼습니다.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스(Reliance Industries)는 2024년 12월, 러시아 국영 석유기업 로스네프트(Rosneft)와 하루 50만 배럴 규모의 10년짜리 장기 공급 계약까지 체결했습니다.
인도의 외무장관 수브라마냠 자이샨카르(Subrahmanyam Jaishankar)는 서방의 비판에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유럽이 하루 오후에 사들이는 러시아산 가스가 인도가 한 달간 수입하는 원유보다 많다." 그의 발언은 인도 국내에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미국의 위성 국가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는 14억 인도인의 민족주의적 자부심을 자극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 모디는 미국으로부터도 최고 수준의 대접을 받고 있었습니다. 2023년 6월 워싱턴 국빈 방문에서 조 바이든(Joe Biden) 대통령은 백악관 만찬에 모디를 초대했습니다.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 연설이라는 드문 영예도 안겨주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모디는 두 번째 합동 연설을 한 인도 총리로 기록되었습니다. 선물 보따리도 화려했습니다. 미국의 최첨단 전투기 엔진(GE F414) 공동 생산 기술 이전, 고고도 무인기(MQ-9B) 도입 합의,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Micron)의 인도 투자 등이 잇달아 발표되었습니다.
미국은 왜 러시아와 밀착하는 모디의 행보를 묵인했을까요? 이유는 명확합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변수 때문입니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14억 인구의 인도는 중국을 견제할 유일한 대항마입니다. 모디는 이 지점을 정확히 파고들었습니다. 미국 주도의 4자 안보 대화인 쿼드(Quad: 미국·일본·호주·인도)에 적극 참여하면서도, 그것이 나토(NATO) 같은 군사동맹으로 변질되는 것은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인도 입장에서 쿼드가 '반중국 봉쇄 전선의 전초기지'로 비치면 중국과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기 때문입니다. 대신 모디는 쿼드를 해양 안보, 핵심 광물 공급망, 기술 표준, 인프라 협력 같은 실용적인 기능별 묶음으로 활용했습니다. 군사적 부담은 최소화하면서 실익은 극대화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동시에 모디는 러시아·중국이 주도하는 브릭스(BRICS)와 상하이협력기구(SCO)에서도 핵심 멤버로 활동했습니다. 2024년 브릭스가 이집트, 에티오피아, 이란, UAE 등을 받아들이며 확장되었을 때, 인도는 이 플랫폼을 달러 중심 금융 구조의 개혁과 글로벌 사우스의 대표성 확대를 요구하는 지렛대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브릭스가 중국 주도의 반서방 블록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경계했습니다. "중국과 같은 테이블에 앉되, 중국의 테이블로 만들지는 않겠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2023년 하반기부터, 이 정교한 줄타기에 예상치 못한 파열음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2023년 9월, 캐나다 총리 저스틴 트뤼도(Justin Trudeau)가 의회에서 폭탄 발언을 했습니다. 같은 해 6월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서 살해된 시크교 분리주의 운동가 하르딥 싱 니자르(Hardeep Singh Nijjar)의 죽음에 인도 정부가 개입했다는 "신빙성 있는 주장"이 존재한다고 밝힌 것입니다. 인도는 즉각 부인했습니다. 양국은 외교관을 서로 추방했고, 인도-캐나다 관계는 수십 년 만에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파문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2024년 11월, 미국 법무부(DOJ)는 인도 정부 요원으로 지목된 니킬 굽타(Nikhil Gupta)를 미국 땅에서 시크교 분리주의 활동가 구르파트완트 싱 판눈(Gurpatwant Singh Pannun)의 암살을 모의한 혐의로 기소했습니다. 미국의 동맹국이자 민주주의 파트너인 인도가 미국 시민권자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다는 혐의는 양국 관계의 근저를 흔드는 사안이었습니다. 인도 정부는 자체 조사위원회를 꾸렸다고 밝혔지만, 서방의 시선은 냉랭해졌습니다. 모디가 국제 무대에서 쌓아온 '책임 있는 민주주의 국가'의 이미지에 깊은 흠집이 생긴 것입니다 (제3장 3.4 참조).
설상가상으로, 2025년 1월 출범한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인도에 새로운 시험대를 안겨주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인도를 "무역의 큰 악당"이라 부르며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문제 삼았습니다. 인도산 제품에 대한 관세 압박이 시작되었고, 미국은 농산물 시장 개방과 무역 불균형 해소를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바이든 시기에 쌓아 올린 인도-미국 관계의 밀월이 재조정(recalibration) 국면에 들어선 것입니다.
모디 정부는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필요하다면 중국과의 관계 개선 카드를 꺼내 미국을 역으로 압박하는 대담함을 보였습니다. 인도의 외교적 유연성은, 어느 한 축이 흔들릴 때 다른 축으로 무게를 옮기는 시소의 역학에 가까웠습니다.
모디의 이런 행보는 한국의 외교적 딜레마와 겹치는 지점이 많습니다. 한국 역시 한미 동맹이라는 안보의 기둥과 한중 경제 관계라는 현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합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이 강대국의 눈치를 살피며 '전략적 모호성'을 고민할 때, 모디는 14억 인구와 거대 시장이라는 무기를 들고 '전략적 선명성'을 주장합니다. "인도는 평화의 편이며, 인도의 국익이 최우선이다." 이 문장에는 모호함이 없습니다.
권력은 드러내지 않을 때 강력하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모디는 그 법칙을 뒤집었습니다. 그는 권력을 세계 무대에서 화려하게 전시했습니다. 푸틴과의 포옹도, 바이든과의 악수도, 시진핑과의 회담도 모두 14억 인도의 생존과 부상을 위한 연극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모디에게 외교는 명분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한 비즈니스이며, 다중 제휴는 인도가 강대국 반열에 오르기 위한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습니다.
강대국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는 법. 모디는 지금 전 세계에 그만의 해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캐나다·미국과의 외교 위기, 트럼프 2기의 관세 압박은 이 해법의 내구성을 시험하는 첫 번째 균열입니다. 그 균열이 금으로 번질지, 아니면 봉합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6.2 G20 의장국: 글로벌 사우스 맹주
2023년 9월 9일 오전, 뉴델리 중심가의 프라가티 마이단(Pragati Maidan) 단지 안에 새로 지어진 복합 컨벤션 센터 '바라트 만다팜(Bharat Mandapam)'.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의장석에서 황금빛 의사봉을 내려쳤습니다. "우리는 아프리카 연합을 G20의 정식 회원으로 맞이합니다." 55개국을 대표하는 아프리카 연합(AU) 의장이 연단으로 걸어 나오자, 모디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뜨겁게 껴안았습니다. 회의장에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G20 창설 이래 극적인 확장의 순간이었습니다. 유럽연합(EU)에 이어 두 번째 지역 기구가 정식 회원이 된 것입니다. 13억 인구의 아프리카 대륙이 세계 경제 거버넌스의 테이블에 공식적으로 자리를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역사적 장면을 연출한 사람은 모디였습니다.
누군가는 물을 수 있습니다. G20 의장국을 한 번 맡은 것이 뭐 그리 대단한가,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모디에게 2023년의 G20은 국제 행사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것은 "인도가 이제 세계의 중심"이라는 서사를 14억 국민의 가슴에 새기는 정치적 대관식이었습니다. 2024년 총선을 앞둔 시점이라는 것도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모디가 이 무대를 어떻게 설계했는지 추적해보면, 권력이 이미지를 먹고 자라는 메커니즘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먼저 모디는 G20을 뉴델리라는 한 도시에 가두지 않았습니다. 인도 전역 60개 도시에서 200회 이상의 관련 회의를 열어 전 국토를 G20 전시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잔 바기다리(Jan Bhagidari)', 즉 '국민 참여'라는 이름 아래 시골 마을 학생들까지 G20 퀴즈 대회에 참가시켰습니다. 인도 정부 발표에 따르면 7,000만 명 이상이 이 참여 활동에 동원되었습니다. "G20은 관료들의 잔치가 아니라 국민 모두의 것"이라는 모디의 선언은 사실상 "이 성공은 나의 성공이고, 곧 여러분의 성공"이라는 정치적 메시지였습니다.
한국에서 1988년 서울 올림픽이 국민에게 "우리도 해냈다"는 자부심을 심어준 것과 비슷한 효과를 모디는 G20에서 추구했습니다. 다만 올림픽은 스포츠 행사이고, G20은 외교 무대라는 점이 달랐을 뿐입니다.
모디가 G20에서 보여준 주목할 리더십은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대변자를 자임한 것이었습니다. G20 본회의가 열리기 훨씬 전인 2023년 1월, 모디는 전 세계 125개 이상의 개발도상국 정상을 화상으로 불러 모아 '글로벌 사우스의 목소리 정상회의(Voice of Global South Summit)'를 개최했습니다. "여러분의 우선순위가 곧 인도의 우선순위입니다." 이 한 문장은 강대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 지쳐 있던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국가들에게 강한 울림을 주었습니다. 2024년 11월에는 화상 형식의 G20 정상회의를 한 차례 더 성공적으로 주관함으로써, 의장국으로서의 리더십이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글로벌 사우스. 이 용어가 한국 독자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선진국 클럽인 G7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세계, 주로 아시아·아프리카·남미의 개발도상국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인구로 따지면 세계의 압도적 다수이지만, 국제 질서를 설계하는 테이블에서는 오랫동안 소외되어 온 국가들입니다. 모디는 이 거대한 다수의 목소리를 자신이 대변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 대표적 성과가 아프리카 연합의 G20 가입이었습니다. 2023년 6월, 모디는 G20 회원국 정상들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 AU의 정식 가입을 제안했습니다. 아프리카의 55개국을 하나의 목소리로 묶어 세계 경제 논의에 참여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인도 입장에서 이 제안은 여러 이익이 겹치는 수였습니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지지를 확보하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필요한 표를 모을 수 있고, 중국의 일대일로(BRI)에 맞서 아프리카에서 인도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발판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G20 정상회의 자체의 운영도 모디의 외교적 수완이 빛나는 장면이었습니다. 당시 G20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서방과 러시아·중국 간의 극심한 대립으로 공동선언문 채택이 불투명한 상황이었습니다. 그해 예비 회의에서 이미 여러 차례 합의가 무산된 상태였습니다. 시진핑은 불참했고, 푸틴도 오지 않았습니다. 회의가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가 점쳐지는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모디는 물밑에서 처절한 문구 조정을 벌였습니다. 서방이 요구하는 '러시아의 침공'이라는 표현 대신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이라는 모호한 문구를 삽입하고, 전쟁으로 인한 인간적 고통과 영토 보전의 원칙을 강조하는 절충안을 제시했습니다. 결과적으로 83개 조항 전체가 만장일치로 채택된 '뉴델리 정상선언(New Delhi Leaders' Declaration)'이 나왔습니다. 성장, 기후, 에너지, 디지털 전환, 개발 금융, 중소기업 지원 등 광범위한 의제를 담은 이 선언은 "중재자 인도"의 역량을 증명하는 외교적 승리였습니다.
모디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G20을 말잔치가 아닌 실물 성과의 플랫폼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바이오 연료 동맹(Global Biofuel Alliance)을 출범시켜 에너지 전환의 의제를 선점했고, 인도-중동-유럽 경제 회랑(IMEC)의 양해각서(MOU)를 성사시켰습니다. IMEC는 인도에서 UAE와 사우디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으로 이어지는 철도·항만·에너지·데이터 연결 구상으로, 중국의 일대일로에 대한 서방의 대안으로 주목받았습니다. 미국, 사우디, UAE, EU,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서명에 참여했고, 바이든 대통령은 이를 "역사적 합의"라고 평가했습니다. 다만 2023년 10월 이후 격화된 가자 분쟁이 중동의 역학을 뒤흔들면서, IMEC의 실질적 진전은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양해각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현실이 발목을 잡은 셈입니다.
인도가 자국의 디지털 공공 인프라(DPI)를 글로벌 사우스에 전파하겠다고 제안한 것도 주목할 대목입니다. 전 국민 생체 인식 신분증 '아다르(Aadhaar)'와 통합 결제 시스템 'UPI'를 다른 개발도상국에 무료로 전수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제4장 4.2~4.3 참조). "우리의 기술이 여러분의 성장을 도울 것"이라는 메시지는, 인도를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솔루션을 제공하는 나라로 격상시키려는 포석이었습니다. 한국이 원조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한 경험과 겹치는 지점입니다. 다만 인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국이 만든 기술 모델 자체를 세계 표준으로 확산시키려는 야심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이 화려한 축제의 이면에는 권력의 그림자도 짙었습니다. 정상들이 이동하는 길목의 슬럼가는 대형 가림막으로 철저히 가려졌습니다. 수천 명의 노점상이 거리에서 쫓겨났습니다. '빛나는 인도'를 보여주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잠시 지워져야 했습니다. 회의장 곳곳에는 '인디아(India)' 대신 고대 산스크리트어 국명 '바라트(Bharat)'가 적힌 명패가 놓였는데, 이는 영국 식민 유산을 지우고 힌두 문명 국가의 정체성을 내세우려는 모디의 민족주의적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제3장 3.2 참조). 인권 단체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는 "G20 회원국들이 인도의 시민·정치적 권리 후퇴를 직시해야 한다"고 촉구했지만, 그 목소리는 축제의 소음에 묻혔습니다.
공동선언문의 우크라이나 관련 문구를 둘러싼 타협도 논란이 되었습니다. 서방 일부에서는 "원칙을 저버렸다"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모디에게 중요한 것은 도덕적 심판이 아니었습니다. 합의를 이끌어낸 의장국의 역량을 전 세계에 과시하는 것, 그것이 그의 목표였습니다. 모디는 이 무대에서 도덕적 심판자가 아닌 철저한 실리 추구자로 서 있었습니다.
G20의 성공은 곧바로 국내 정치 자산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인도 거리 곳곳에 모디의 얼굴과 G20 로고가 담긴 포스터가 도배되었고, 집권당 BJP는 "인도가 비슈와 구루(Vishwa Guru, 세계의 스승)로 복귀했다"고 선전했습니다. 2024년 총선에서 3연임에 성공한 모디의 강력한 정치적 자산 중 하나가 바로 이 G20이었습니다.
"글로벌 사우스의 리더"라는 타이틀은 구호만으로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개발도상국의 요구, 부채 부담, 기후 재원, 식량 가격, 디지털 격차 같은 절박한 문제들을 국제회의의 문서와 제도로 번역하고, 그 과정에서 선진국을 설득하거나 압박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옵니다. 모디는 G20 의장국을 맡으며 바로 그 능력을 과시했습니다.
물론 한계도 있습니다. 인도 자신이 거대한 신흥국이자 시장 국가이기에 "대변자"이면서 "당사자"라는 이중 정체성을 피할 수 없습니다. 글로벌 사우스 내부에도 이해충돌은 존재합니다. 부채국과 채권국, 산유국과 비산유국, 중국과의 거리를 두려는 나라와 가까이하려는 나라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일은 선언문 한 장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바라트 만다팜의 화려한 조명이 꺼진 뒤, 한 가지는 분명해졌습니다. 인도는 더 이상 서구의 명령을 기다리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디는 G20이라는 무대를 통해 인도를 '회의장 운영자'에서 '의제 설계자'로 올려놓았습니다. 목소리가 없던 자들의 목소리가 되는 것, 그것이 21세기 권력이 작동하는 세련된 방식임을 그는 증명하려 했습니다. 그 증명이 완성되려면 아직 갈 길이 멉니다. 하지만 첫 발은 분명히 내디뎠습니다.
6.3 인도-태평양 전략: 액트 이스트(Act East), 중국 견제
2014년 11월, 미얀마 네피도(Nay Pyi Taw). 동남아시아 정상회의장에 선 나렌드라 모디는 한 문장을 던졌습니다. "인도의 '룩 이스트(Look East)' 정책은 이제 '액트 이스트(Act East)' 정책이 됩니다." '보다'를 '행하다'로 바꾼 것뿐인데, 회의장의 공기가 달라졌습니다. 20년 넘게 인도는 동남아시아를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이제 그 시선을 거둬들이고 직접 뛰어들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왜 모디는 취임 반년 만에 이토록 서둘러 외교 정책의 이름표를 바꿨을까요?
그 답을 알려면, 먼저 인도의 앞바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중국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시진핑이 내건 일대일로(Belt and Road Initiative, BRI)라는 거대한 그물망이 인도를 서서히 옥죄어 오고 있었습니다. 스리랑카의 함반토타 항구, 파키스탄의 과다르 항구, 미얀마의 차우크퓨 항구, 그리고 지부티의 해군 기지. 지도를 놓고 보면 이 점들은 인도를 병풍처럼 둘러싸는 형태를 이룹니다. 전략가들은 이를 '진주 목걸이(String of Pearls)'라 불렀습니다. 아름다운 이름이지만, 인도 입장에서 그것은 목을 조여 오는 올가미에 가까웠습니다. 모디는 '보고만 있으면 질식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액트 이스트의 본질은 동남아시아와 더 친해지자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도가 남아시아의 울타리를 넘어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광활한 해양 공간에서 자기 자리를 찾겠다는 지정학적 도약이었습니다. 모디는 즉각 행동에 나섰습니다. 2018년 공화국 선포일 행사에 아세안(ASEAN) 10개국 정상을 모두 초청하는 파격을 보였습니다. 인도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뉴델리의 라지파트(Rajpath) 대로를 동남아 정상들이 나란히 걸었다는 사실 자체가 "인도는 이제 남아시아에만 머물지 않겠다"는 시각적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디의 동쪽 행보에 결정적인 변곡점을 만든 것은 회의장이 아니라 전장이었습니다. 2020년 6월, 히말라야의 갈완 계곡(Galwan Valley)에서 인도군과 중국군이 충돌했습니다 (제4장 4.5 참조). 1975년 이후 처음으로 양측에서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총기 사용이 금지된 접경 지대의 관례에 따라 양측 군인들은 쇠파이프와 못 박힌 곤봉, 돌멩이로 싸웠습니다. 인도군 20명이 전사했습니다. 해발 4,000미터가 넘는 차갑고 어두운 협곡에서 벌어진 이 원시적 전투는, 인도에게 하나의 환상을 깨뜨렸습니다. "중국과 경제 협력을 하면 국경의 평화도 따라올 것이다"라는 믿음 말입니다.
갈완 이후 모디 정부의 대중국 전략은 '관리'에서 '견제'로 급선회했습니다. 틱톡(TikTok)을 비롯한 중국산 앱 수백 개가 하룻밤 사이에 인도 시장에서 사라졌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카카오톡과 네이버를 동시에 차단한 것과 비슷한 충격이었습니다. 중국 기업의 인도 내 투자에는 정부 사전 승인이 필수가 되었고,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의 가입도 막판에 철회되었습니다. 관세 장벽 없이 밀려들 중국 제조품이 '메이크 인 인디아'를 박살낼 것이라는 판단이었습니다. 모디는 대외적으로 "국경의 평화 없이 정상적인 관계도 없다"는 원칙을 세우고, 대내적으로는 '자립 인도(Atmanirbhar Bharat)'를 외쳤습니다 (제4장 4.1 참조). 중국과의 디커플링(Decoupling)이 장기적 국가 과제로 설정된 순간이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모디가 꺼내든 외교적 카드가 쿼드(Quad)였습니다. 미국, 일본, 호주와 함께하는 4자 안보 대화 체제입니다. 과거 인도는 비동맹의 전통에 따라 쿼드에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갈완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모디는 입장을 바꿨습니다. 쿼드 정상회의에 적극 참여하며 백신 파트너십, 신기술 공급망, 해양 감시(MDA) 등 실질적인 협력을 주도했습니다. 말라바르(Malabar) 해상 훈련에서는 4개국 해군이 대잠전과 방공 작전을 함께 수행하며 실전 수준의 상호운용성을 쌓아갔습니다.
그럼에도 모디는 절묘한 선을 그었습니다. 쿼드가 나토(NATO)처럼 군사 동맹으로 발전하는 것에는 분명한 거부감을 보였습니다. 인도의 국방 무기 상당수가 여전히 러시아제였고,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에도 인도는 러시아산 원유를 할인된 가격에 대량 수입했습니다. 서방이 "도대체 누구 편이냐"고 물을 때, 모디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우리는 평화의 편입니다." 이것이 인도가 말하는 '전략적 자율성(Strategic Autonomy)'의 실체입니다. 쿼드에서는 중국을 견제하고, 브릭스(BRICS)에서는 비서방 진영과 손을 잡으며, 러시아에서는 싼 원유를 사고, 미국에서는 제트 엔진 기술을 이전받습니다. 모든 테이블에 앉되 어느 한쪽에 완전히 묶이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한편 2024년 10월, 예상치 못한 해빙의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인도와 중국은 실제지배선(LAC)에서의 군사 이격(disengagement) 합의를 도출했습니다. 4년 넘게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히말라야 국경의 긴장이 한 단계 낮아진 것입니다. 같은 달, 러시아 카잔에서 열린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모디와 시진핑(Xi Jinping)은 5년 만에 공식 양자 회담을 가졌습니다. 두 정상은 국경 안정의 중요성을 확인했고, 외교·안보 분야의 소통 채널을 복원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갈완의 피로 점철된 관계에 봉합의 실이 꿰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안보 위기가 인도의 서쪽 국경에서 터졌습니다. 2025년 4월, 카슈미르 파할감(Pahalgam)에서 무장 세력의 테러 공격이 발생했습니다. 인도 정부는 파키스탄 기반 테러 조직의 소행이라 규정했고, 양국 관계는 급속히 경색되었습니다. 중국과의 긴장이 완화되는 순간에 파키스탄과의 위기가 고조된 것은, 모디의 다중 전선 외교가 가진 구조적 불안정성을 드러냈습니다. 한 전선을 봉합하면 다른 전선이 열리는 지정학적 딜레마입니다.
한국의 입장에서 모디의 인도-태평양 전략에는 직접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습니다. 모디는 한국을 중국 제조업을 대체할 기술과 노하우를 가진 핵심 파트너로 보았습니다. 삼성전자가 노이다에 세계 최대 스마트폰 공장을 짓고, 현대차가 인도 내수 시장 2위에 올라선 것은 모디의 '차이나 플러스 원(China Plus One)' 전략, 즉 중국을 대체할 공급망의 한 축에 한국을 배치하겠다는 국가 설계의 일부입니다 (제7장 7.3에서 자세히 다룹니다). 한국의 K-9 자주포가 '바지라(Vajra, 벼락)'라는 이름으로 히말라야 국경에 배치된 것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중국군과 대치하는 인도 육군에게 한국의 기술력은 전략적 자산이었습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습니다. 모디는 한국 기업들에게 "레드 테이프(관료주의)를 없애고 레드 카펫을 깔아주겠다"고 약속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인도는 미국 주도의 경제 프레임워크인 IPEF(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에 참여하면서도 무역 분야 협상에는 불참했습니다. 자국 시장 보호를 위해 높은 관세 장벽을 유지하겠다는 뜻입니다. 시장을 열어주겠다며 유혹하면서도 문턱은 낮추지 않는 인도의 모순, 이것이 한국 기업이 마주한 현실입니다.
결과적으로 모디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인도를 미-중 패권 경쟁의 '스윙 스테이트(Swing State)'로 만들었습니다. 어느 쪽으로도 완전히 기울지 않으면서, 양쪽 모두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 중국과는 이격 합의로 긴장을 관리하면서도, 쿼드와 아르테미스 협정을 통해 미국과의 전략적 유대는 더욱 강화하는 것. 그것이 모디가 설계한 21세기 인도의 생존법입니다. 그 전략이 빨라질수록, 한반도와 인도 대륙을 잇는 보이지 않는 줄은 더욱 팽팽해질 것입니다.
6.4 우주 강국: 찬드라얀 3호 달 착륙
2023년 8월 23일 오후 6시 4분(인도 표준시), 벵갈루루의 ISRO 관제센터. 수백 명의 과학자가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인도의 달 탐사선 '찬드라얀 3호(Chandrayaan-3)'가 달 표면을 향해 마지막 하강을 시작한 것입니다. 업계에서 '공포의 15분'이라 부르는 시간이었습니다. 엔진을 역분사하며 속도를 줄이고, 센서가 지형을 읽고, 소프트웨어가 실시간으로 착륙 지점을 수정합니다. 지구에서 신호가 도달하는 데만 1.3초가 걸리니, 이 순간만큼은 기계가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며칠 전, 러시아의 루나 25호가 바로 이 단계에서 제어를 잃고 달 표면에 충돌했습니다. 우주 강국 러시아도 실패한 그 관문을, 인도가 통과할 수 있을까요?
착륙선 비크람(Vikram)의 고도 수치가 줄어들었습니다. 100미터, 50미터, 10미터. 그리고 0. 화면에 "India is on the Moon"이라는 문구가 떴을 때, 관제센터는 환호로 뒤집어졌습니다. 사리를 입고 이마에 빈디를 찍은 여성 과학자들이 서로 얼싸안았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브릭스 정상회의에 참석 중이던 모디 총리는 화상 화면 앞에서 인도 국기를 흔들었습니다. "이것은 인도의 승리이자, 인류 전체의 승리입니다."
인도는 미국, 소련, 중국에 이어 네 번째로 달 착륙에 성공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아무도 내려본 적 없는 달의 남극(South Pole) 부근에 첫 발을 디딘 것은 인도였습니다.
이 성공이 더욱 극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4년 전의 실패입니다. 2019년 찬드라얀 2호는 착륙 직전 통신이 끊기며 달 표면에 추락했습니다. 당시 ISRO 위원장 K. 시반(K. Sivan)이 실의에 빠져 눈물을 흘리자, 모디 총리가 그를 안아주며 "삶에는 기복이 있습니다"라고 위로한 장면이 생중계되었습니다. 인도 전역이 그 포옹에 함께 울었습니다. 찬드라얀 3호의 성공은 그 눈물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ISRO는 2호의 실패 데이터를 한 줄 한 줄 분석했습니다. 착륙선의 다리를 보강하고, 연료를 늘리고, 착륙 알고리즘을 완전히 새로 짰습니다. 모든 실패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하는 '실패 기반 설계(Failure-based Design)'를 적용했습니다. 실패가 성공의 설계도가 된 것입니다.
전 세계가 주목한 것은 착륙 자체만이 아니었습니다. 비용이었습니다. 찬드라얀 3호에 투입된 예산은 약 7,500만 달러, 한화로 약 1,000억 원입니다. 할리우드 영화 '인터스텔라'의 제작비(1억 6,500만 달러)보다 적은 돈으로 달에 간 셈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인도에는 '주가드(Jugaad)'라는 말이 있습니다. 없는 살림에서 있는 것을 최대한 활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임기응변의 지혜를 뜻합니다. 한국어로 옮기면 '없으면 없는 대로 굴린다' 정도가 될 것입니다. 찬드라얀 3호에도 이 정신이 녹아 있었습니다. 나사(NASA)처럼 고출력 로켓으로 달까지 직선으로 날아가는 대신, 인도는 지구 궤도를 빙빙 돌며 중력의 힘을 빌려 속도를 높이는 '슬링샷(Slingshot)' 방식을 택했습니다. 덕분에 연료를 획기적으로 아꼈지만, 달까지 40일이 넘게 걸렸습니다. 느리지만 싸고, 싸지만 정확한 길. 짜이를 팔며 한 푼 한 푼 아끼는 법을 체득한 소년의 생존 감각이 국가의 우주 공학에까지 스며든 것처럼 보입니다 (제1장 1.1 참조).
사실 인도의 우주 이야기는 찬드라얀보다 훨씬 앞에서 시작됩니다. 1960년대, 인도는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는 나라였습니다. "밥도 못 먹는데 무슨 우주냐"는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인도 우주 개발의 아버지' 비크람 사라바이(Vikram Sarabhai) 박사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넓은 영토에 흩어진 수억 인구에게 날씨 정보를 전하고, 재난을 예보하고, 오지의 학교에 교육 방송을 보내려면 인공위성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우주 기술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의 도구였습니다. 초기 ISRO의 과학자들은 로켓 부품을 자전거 짐칸에 싣고 발사장으로 날랐고, 소달구지로 위성 코를 운반했습니다. 성당 건물을 빌려 관제소로 쓰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의 '헝그리 정신'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ISRO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습니다.
모디 총리는 이 유산 위에 새로운 층을 쌓았습니다. 그는 국가가 독점하던 우주 산업의 문을 민간에 열었습니다. 2020년 민간 우주 진흥 기구인 'IN-SPACe'를 설립하여 스타트업들이 ISRO의 시설과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게 했습니다. 스카이루트(Skyroot)는 인도 최초의 민간 로켓을 쏘아 올렸고, 아그니쿨(Agnikul)은 3D 프린팅으로 로켓 엔진을 제조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디는 "우주 분야의 족쇄를 풀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가 꿈꾸는 것은 인도판 스페이스X(SpaceX)의 탄생이었습니다.
달 남극을 목표로 삼은 것 자체가 전략적 계산이었습니다. 달 남극에는 영구 음영 지역이 많아 얼음 형태의 물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은 식수가 될 뿐 아니라, 전기 분해하면 산소와 수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수소는 로켓 연료입니다. 미래에 달 기지를 건설하고 그곳에서 화성으로 나아가려면, 달 남극은 '우주판 주유소'가 될 수 있는 곳입니다. 미국의 아르테미스(Artemis) 계획과 중국의 창어(嫦娥) 계획이 모두 달 남극을 겨냥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인도가 그곳에 먼저 도달함으로써,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닌 달 남극의 자원 경쟁에서 독자적인 지분을 확보했습니다.
2023년 6월, 인도는 미국이 주도하는 아르테미스 협정(Artemis Accords)에 서명했습니다. 27번째 서명국이 된 것입니다. 이 협정은 달과 화성 등 우주 탐사의 원칙을 규정하는 다자 프레임워크로, 사실상 미국의 우주 질서에 편입하겠다는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가 별도의 국제달연구기지(ILRS)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상황에서, 인도가 아르테미스 쪽에 깃발을 꽂은 것은 우주에서도 '다중 제휴'의 한 축을 명확히 한 것이었습니다. 쿼드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논리입니다. 미국과 기술을 공유하되, 독자적 역량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양면 전략입니다.
모디는 착륙 지점에 '시브 샤크티(Shiv Shakti)'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힌두교의 창조와 파괴의 신 시바(Shiva)와 우주적 에너지를 뜻하는 샤크티(Shakti)의 결합입니다. 2019년 추락한 찬드라얀 2호의 충돌 지점은 '티랑가(Tiranga, 인도 삼색기)'로 명명했습니다. 실패의 현장에 국기의 이름을, 성공의 현장에 신의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과학 위에 문명을 얹고, 기술 위에 정체성을 덧씌우는 모디의 서사 전략이 우주에서도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제3장 3.2 참조).
찬드라얀 3호의 뒤를 이어 쏟아진 성과도 주목해야 합니다. 2023년 9월 발사된 태양 관측 위성 아디티야-L1(Aditya-L1)은 2024년 1월 라그랑주 L1 지점에 성공적으로 안착했습니다. 지구에서 약 150만 킬로미터 떨어진 이 지점은 태양과 지구 사이의 중력 균형점으로, 위성이 최소한의 연료로 태양을 끊임없이 관측할 수 있는 위치입니다. 인도는 달 남극에 이어 태양 관측의 프런티어에도 발을 디뎠습니다.
다음 목표는 인도인 우주비행사를 자체 우주선으로 쏘아 올리는 유인 프로젝트 '가간얀(Gaganyaan, 하늘의 탈것)'입니다. 2024년 2월, 무인 시험비행(TV-D1)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승무원 탈출 시스템과 우주선 모듈이 정상 작동하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유인 비행 목표 시점은 2026년으로 재설정되었습니다. 성공한다면 인도는 미국, 러시아, 중국에 이어 독자적으로 우주비행사를 궤도에 올린 네 번째 나라가 됩니다. 2035년까지 독자 우주 정거장을 건설하고, 2040년에는 인도인을 달에 보내겠다는 장기 로드맵도 발표되었습니다.
한국 독자에게 이 이야기는 묘한 울림을 줍니다. 한국 역시 누리호를 쏘아 올리며 독자적 우주 발사 능력을 증명한 나라입니다. 인도의 저비용 고효율 발사 기술과 한국의 정교한 전자·통신 기술이 결합한다면 어떤 가능성이 열릴까요? 실제로 양국은 달 탐사 데이터 공유와 우주 협력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두 나라 모두 아르테미스 협정의 서명국이라는 사실은, 미래의 달 탐사에서 협력의 제도적 기반이 이미 마련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소달구지로 위성을 나르던 나라가, 달의 어둡고 차가운 곳에 인류 최초의 발자국을 남기고, 태양을 향한 관측소를 띄우고, 유인 우주선의 시험비행까지 마쳤습니다. 그 여정은 모디 개인의 업적이 아닙니다. 60년 전 자전거에 로켓 부품을 싣고 달리던 과학자들의 꿈이, 수만 명의 엔지니어 손끝을 거쳐, 38만 킬로미터 밖 달 남극의 먼지 위에 내려앉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궤적은 달 너머를 향해 뻗어가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답은 아직 쓰이지 않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