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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제7장. 한국과 인도: 특별 전략적 동반자
짜이왈라에서 총리까지
제7장. 한국과 인도: 특별 전략적 동반자
김경진
7.1 역사적 기초: 타고르 '동방의 등불', 허왕후 전설, 1973년 수교
2019년 2월 22일, 서울 그랜드 인터컨티넨탈호텔. 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 총리가 서울평화상 수상 연단에 섰습니다. 그는 상금 20만 달러 전액을 갠지스강 정화사업 기금에 기부하겠다고 선언한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상은 제 개인이 아니라 13억 인도 국민의 것입니다." 그리고 자리에 앉기 전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인도는 한반도의 평화에 기여해 온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자부심의 뿌리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요. 답을 찾으려면 2,000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기이한 이야기 하나가 전해집니다. 서기 48년, 인도의 아유타국(Ayuta) 공주 수리라트나(Suriratna)가 부모의 꿈에 나타난 신의 계시를 따라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왔습니다. 도착한 곳은 가락국. 그녀는 김수로왕과 혼인하여 허황옥(Heo Hwang-ok), 즉 허왕후가 됩니다. 오늘날 한국의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이 전설 속 부부를 시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어디까지 사실로 볼 수 있느냐는 논쟁이 있습니다. '아유타'가 인도 북부의 아요디아(Ayodhya)를 가리키는 것인지, 동남아시아의 다른 지역인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인도 측의 동시대 기록이 없고, 후대의 민족주의적 재해석이 개입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증거가 부족하다고 해서 이 이야기의 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외교에서 좋은 이야기는 때로 조약보다 오래갑니다. 사람의 마음에 붙는 서사가 한번 생기면, 그 위에 정상회담과 투자 협정과 방산 계약 같은 차가운 숫자들이 안정적으로 쌓이기 때문입니다.
모디 총리는 이 전설의 외교적 가치를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는 2015년 방한 시, 2019년 서울평화상 수상 시, 한국 교민 간담회에서 반복적으로 "한국과 인도는 사돈의 나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 전설은 그의 정치적 기반인 힌두 민족주의와도 절묘하게 맞물립니다. 아요디아는 힌두교의 주신 라마(Ram)의 탄생지로, 모디와 집권당 BJP가 힌두 부흥 운동의 핵심 성지로 삼는 곳입니다. 고대 신화의 땅에서 한국으로 이어지는 혈연의 서사. 모디에게 이것은 종교적 상징성과 외교적 실리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완벽한 소재였습니다.
실제로 행동이 뒤따랐습니다. 2018년 11월, 모디 총리의 초청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가 인도를 단독 방문했습니다. 한국 영부인으로서는 16년 만의 단독 해외 방문이었습니다. 모디는 김 여사를 아요디아의 디왈리(Diwali) 축제에 주빈으로 초청했고, 두 사람은 허왕후 기념공원 착공식에 함께 참석했습니다. 딱딱한 외교 의전이 아니라 축제의 불빛 아래에서 나누는 감성 외교. 이 장면은 인도 국민들에게 한국이라는 나라를 '먼 나라'에서 '친척의 나라'로 바꾸는 효과를 만들었습니다. 이 문화적 연결고리가 오늘날 어떻게 K-팝, K-드라마와 만나 새로운 한류 외교로 이어지는지는 제9장 9.4에서 다루겠습니다.
허왕후 전설보다 시간적으로는 가깝지만, 정서적 울림에서는 그에 못지않은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인도의 시성(詩聖)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가 남긴 네 줄의 시입니다.
1929년, 타고르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한국 기자가 한국 방문을 요청했으나 일정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타고르는 미안함과 연대의 마음을 담아 짧은 시를 기고했습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네 줄짜리 시. 그러나 이 시가 식민지 조선에 미친 영향은 네 줄의 분량을 훨씬 넘어섰습니다. 아시아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같은 제국주의의 아픔을 겪는 나라를 향해 "너는 잊혀진 약소국이 아니라 빛나던 등불이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위로이자 예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적중했습니다. 한국은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되었고, 타고르의 시는 오늘날까지 한국 교과서에 실려 인도를 '정신적 형제의 나라'로 기억하게 합니다.
모디 총리는 이 시의 가치 역시 놓치지 않았습니다. 2015년 서울에서 열린 한국 교민 간담회에서 그는 타고르의 시를 직접 인용하며 말했습니다. "타고르가 예언한 대로 한국은 동방의 등불이 되어 그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문학적 유산을 현재의 외교적 자산으로 전환하는 솜씨. 이것이 모디식 '스토리텔링 외교'의 핵심입니다.
전설과 시 사이에, 총알과 메스로 맺어진 인연이 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갓 독립한 인도는 중립을 택했습니다. 전투 부대 대신 의료 부대를 보냈습니다. 제60공수야전병원(60th Parachute Field Ambulance), 346명의 의료 인력으로 이루어진 부대였습니다. 지휘관은 A.G. 랑가라즈(Rangaraj) 중령. 이들은 1950년 11월 부산에 도착한 직후 전선에 배치되었습니다.
총 대신 메스를 들었지만, 이들이 겪은 전쟁은 전투병 못지않게 가혹했습니다. 중국군이 유엔군 방어선을 뚫고 밀고 내려오던 1950년 겨울, 제60부대는 후퇴 명령을 받았으나 의료 장비를 버리지 않으려 했습니다. 수송 차량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낡은 증기 기관차 한 대를 찾아내 장비를 싣고 빠져나왔습니다. 1951년 3월에는 미군 제187공수연대와 함께 한국전쟁 두 번째 규모의 공수 작전인 '톰호크 작전'에 참가했습니다. 랑가라즈 중령을 포함한 12명의 인도 장교가 낙하산을 메고 적진 상공으로 뛰어내렸습니다. 의료 장교가 공수 작전에 자원한 것입니다. 이들은 3년여간 2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치료했고, 미군과 한국군 양쪽에서 부대 표창을 받았습니다. '적갈색 베레모의 천사들(Maroon Angels)'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정전 협정 과정에서 인도의 역할은 더욱 결정적이었습니다. 인도는 중립국송환위원회 의장국을 맡아, 남한도 북한도 중국도 거부하는 포로 2만 2,000여 명의 송환 문제를 중재했습니다. K.S. 티마이야(Thimayya) 장군 지휘 아래 인도군 약 5,000명이 비무장지대에 투입되었습니다. 이 병력은 전투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포로들을 관리하고, 송환 의사를 확인하고, 본국 귀환 절차를 집행하는 임무였습니다.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으면서 양쪽 모두의 신뢰를 얻어야 하는,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극도로 까다로운 과업이었습니다. 티마이야 장군은 이 임무를 완수한 공로로 인도 군부 내에서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고, 훗날 인도 육군참모총장에 올랐습니다.
의료진 346명이 피를 닦고, 5,000명의 병사가 포로를 중재한 이 경험. 인도가 한반도에서 보여준 것은 '중립'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적극적 관여였습니다. 총을 쏘지 않았기에 한국의 전쟁 기억에서 이 나라의 이름은 자주 빠지지만, 인도 없이 정전 협정의 마지막 조각이 맞춰졌을지는 의문입니다.
이런 역사가 있었기에, 1973년 12월의 공식 수교는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라기보다 오래된 인연의 제도적 확인이었습니다. 다만 수교 후에도 양국은 한동안 '예의 바른 이웃'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냉전 구도 아래 인도는 비동맹의 맹주였고, 한국은 확고한 반공 국가였습니다. 인도의 사회주의식 폐쇄 경제와 한국의 수출 주도 경제는 서로 다른 궤도를 달렸습니다.
흐름이 바뀐 것은 1991년 인도의 경제 개방 이후입니다. 인도가 문을 열자 한국 기업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LG전자(1997년), 현대자동차(1996년), 삼성전자(1995년). 이들은 당시 대부분의 다국적 기업이 망설이던 인도 시장에 과감하게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 많은 외국 기업이 인도에서 철수하는 와중에도 한국 기업들은 남았습니다. 이 선택이 신뢰가 되었고, 신뢰는 시장 점유율이 되었습니다.
허왕후의 배에서 타고르의 시로, 적갈색 베레모의 천사들에서 1973년 수교로, 그리고 1990년대 한국 기업들의 진출로. 한국과 인도의 관계는 하나의 사건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2,000년에 걸쳐 층층이 쌓인 이야기들이 있고, 그 이야기들 위에 오늘의 외교와 경제와 안보 협력이 서 있습니다. 나렌드라 모디는 이 이야기의 가치를 아는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는 과거의 전설을 현재의 외교 자산으로, 시인의 예언을 총리의 연설로, 전쟁터의 우정을 전략적 신뢰로 전환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7.2 특별 전략적 동반자 격상: 2015년 모디 방한, 역대 정부 협력 심화
2018년 7월, 뉴델리 인근 노이다(Noida). 삼성전자의 세계 최대 스마트폰 공장 준공식장에 두 나라의 정상이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나렌드라 모디 총리. 두 사람은 의전 차량 대신 지하철을 타고 공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양복을 입은 두 정상이 승객들 사이에서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 사진이 인도 전역에 퍼졌습니다. 정치적 계산이 깔린 퍼포먼스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 장의 사진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한국과 인도는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 장면이 가능해진 배경에는 2015년 5월의 결정이 있었습니다.
모디 총리가 취임 이듬해에 한국을 국빈 방문했을 때, 양국은 기존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특별(Special)'이라는 수식어를 하나 붙였습니다. 외교적 수사에서 단어 하나의 추가는 사소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도가 '특별 전략적 동반자 관계(Special Strategic Partnership)'라는 격식을 부여한 나라는 극소수입니다. 일본, 러시아 등 전통적 강대국과 나란히 한국이 이 목록에 올랐다는 것은 모디가 한국을 어떤 위치에 놓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관계의 '격상'이 중요한 이유는 개별 사업을 다루는 방식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격상 이전에는 무역이든 투자든 사안이 생길 때마다 임기응변으로 처리합니다. 격상 이후에는 정상급 합의 아래에서 외교, 경제, 안보의 여러 트랙이 동시에 돌아갑니다. 한 분야가 흔들려도 다른 분야가 버텨주는 구조가 생깁니다. 이것이 '특별 전략적'이라는 틀의 실제 작동 방식입니다.
2015년 공동성명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있습니다. 모디는 '메이크 인 인디아(Make in India)' 정책에서 한국을 "특권적 파트너"로 호명했습니다(메이크 인 인디아 정책의 전체 구상과 전략에 대해서는 제4장 4.2 참조). 그리고 한국 기업 전용 투자 해결 창구인 '코리아 플러스(Korea Plus)'를 인도 상공부 내에 설치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특정 국가의 기업들을 위해 정부 부처 안에 전담 창구를 만드는 것은 이례적인 조치입니다. 한국으로 치면, 외교부 안에 '인도 투자 원스톱 센터'를 별도로 차린 것과 비슷합니다.
이 격상이 한 번의 정상회담으로 끝났다면, 외교적 수사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인도 중시 기조는 흔들리기는커녕 오히려 강화되었습니다. 이것은 한-인도 관계의 독특한 특징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관계를 격상시켰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이를 실질적인 내용으로 채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아세안과 인도를 미·중·일·러 수준의 핵심 협력 대상으로 격상시키는 '신남방 정책(New Southern Policy)'을 천명했고, 인도는 이 정책의 핵심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모디 총리의 '동방행동정책(Act East Policy)'과 한국의 '신남방 정책'은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었습니다. 한국은 아세안과 인도로 외교의 폭을 넓히려 했고, 인도는 동아시아로 진출하여 경제와 안보를 강화하려 했습니다. 방향이 일치했습니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의 인도 국빈 방문은 이 시너지가 구체화된 순간이었습니다. 모디 총리는 이례적으로 뉴델리 공항까지 직접 마중을 나왔습니다. 외교 의전에서 총리의 공항 영접은 최고 수준의 예우입니다. 두 정상은 삼성전자 노이다 공장 준공식에서 이재용 부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생산 라인을 둘러보았습니다. 한국의 기술이 인도 땅에서 인도 노동자들의 손으로 세계 시장을 향한 제품을 만들어내는 현장. 모디에게 이 공장은 '메이크 인 인디아'의 성공을 증명하는 쇼케이스였고,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신남방 정책'의 결실이었습니다.
같은 해 11월, 모디 총리의 초청으로 김정숙 여사가 인도를 단독 방문했습니다. 허왕후 기념공원 착공식과 디왈리 축제 참석. 정상이 아닌 영부인의 방문이었지만, 파급력은 정상 방문 못지않았습니다. 인도 언론은 "한국 퍼스트레이디가 축제의 불빛 아래에서 인도 국민과 함께했다"고 대서특필했습니다. 딱딱한 외교가 아닌, 마음이 오가는 감성 외교. 이것이 인도 국민들 사이에서 한국에 대한 친밀감을 급격히 끌어올린 계기가 되었습니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도 흐름은 이어졌습니다. 2023년은 한-인도 수교 5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G7 히로시마 정상회의와 G20 뉴델리 정상회의에서 윤 대통령과 모디 총리는 두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방산 협력 확대, 공급망 안정화, 핵심 기술 협력. 양국 관세당국 간 원산지 증명서 전자교환 시스템(EODES)이 가동되면서, 한-인도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A) 활용의 실질적 걸림돌이 하나 해소되었습니다. 윤석열 정부는 '인도-태평양 전략'이라는 틀 안에서 인도와의 협력을 한 단계 끌어올리려 했고, 이 기조 아래 2026년 2월에는 제6차 외교·안보 대화(Foreign Affairs-Security Dialogue)가 서울에서 열렸습니다. 차관급 대화 채널이 정례화된 것은 양국 관계가 정상 간 개인적 케미를 넘어 관료적 습관의 영역에 들어섰음을 보여줍니다.
숫자로 보면, 양국 교역은 아직 목표에 미치지 못합니다. 2024~25 회계연도 기준 한-인도 교역액은 약 269억 달러. 2030년까지 500억 달러라는 목표까지는 거의 두 배를 더 키워야 합니다. CEPA가 2010년 발효된 이후에도 한국의 대(對)인도 수출은 기대만큼 폭발적으로 늘지 않았습니다. 인도의 복잡한 주(州)별 규제, 낮은 물류 인프라 수준, CEPA 자체의 낮은 개방도가 병목으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CEPA 개선 협상은 현재 진행 중이며, 양측은 상품 관세 인하 범위 확대와 서비스·투자 분야의 추가 자유화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양국이 이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구조적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게 인도는 중국 의존도를 줄일 수 있는 대안 시장이자 생산 기지입니다. 인도에게 한국은 첨단 기술과 제조 노하우를 가진 멘토이자 투자자입니다. 이 상호 보완성은 어느 한쪽의 정권이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2015년의 '특별 전략적 동반자' 격상은, 그래서 외교적 수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양국 관계를 개인적 인연이나 일시적 필요가 아닌 제도적 틀 위에 올려놓은 행위였습니다. 정상이 바뀌어도, 경기가 흔들려도, 안보 환경이 변해도 유지되는 구조를 만든 것. 외교에서 이보다 어려운 일은 드뭅니다.
7.3 경제 모델로서의 한국: "구자라트를 한국처럼" 발언
2018년 10월 7일, 인도 북부 데라둔(Dehradun). 우타라칸드(Uttarakhand) 투자 정상회의를 개막하는 자리에서 모디 총리가 과거를 회고했습니다.
"2001년 10월 7일, 내가 처음으로 구자라트 주총리(Chief Minister)가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나는 정부가 뭔지도 몰랐습니다. 경험이 전무했습니다. 완전히 새내기였습니다.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구자라트 개발의 롤모델이 누구냐'고. 보통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받으면 '미국처럼', '영국처럼'이라고 답합니다. 나는 다르게 답했습니다. '구자라트를 한국처럼 만들고 싶다'고."
기자가 어리둥절했다고 합니다. 모디는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구자라트의 인구와 한국의 인구가 비슷합니다. 나는 그 점을 아주 정밀하게 연구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우리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이 발언은 2018년 데라둔 연설에서 처음 공개된 것이지만, 모디가 한국 모델에 집착한 시간은 그보다 훨씬 앞섭니다. 2001년 구자라트 주총리 취임 직후부터, 2015년 서울 방한 시 "한국의 발전 경험을 인도에 이식하고 싶다"고 말한 순간까지, 그는 반복적으로 한국을 언급했습니다. 이것은 외교적 립서비스가 아니라 실용주의자의 분석이었습니다.
모디가 한국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왜 수많은 나라 가운데 한국이었을까요.
네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규모의 유사성입니다. 구자라트의 인구는 약 6,000만 명. 한국은 약 5,000만 명. 미국이나 중국을 모델로 삼으면 규모 차이가 너무 커서 현실적 벤치마크가 되지 못합니다. 한국은 구자라트와 비교할 수 있는 크기였습니다.
둘째, 국가 주도 산업화입니다. 한국은 정부가 밑그림을 그리고, 관료 기구가 자원을 배분하고, 민간 기업이 실행하는 구조로 산업화에 성공했습니다. 인도처럼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강한 국가의 역할을 관철시킨 사례. 권위주의 산업화(중국식)와 순수 시장주의(미국식) 사이에서, 한국은 모디가 취할 수 있는 중간 경로를 보여주었습니다.
셋째, 수출 주도 성장입니다. 내수 시장이 작았던 한국은 처음부터 세계 시장을 겨냥했습니다. 구자라트 역시 인도 내에서 해양 무역의 거점이었고, 모디는 이 전통을 현대 수출 산업으로 전환하고 싶어 했습니다.
넷째, 재벌 시스템입니다. 한국 정부가 현대, 삼성, 포스코 같은 소수의 대기업을 '국가 챔피언'으로 육성하여 글로벌 경쟁력을 만든 방식. 모디는 릴라이언스(Reliance), 아다니(Adani), 타타(Tata) 같은 인도 대기업에 유사한 역할을 부여하려 했습니다. 박정희 시대의 정부-재벌 협력 구조가 구자라트의 정부-기업 관계 설정에 참조점이 된 것입니다.
모디는 이 구조를 구자라트에서 실험했습니다. 바이브런트 구자라트(Vibrant Gujarat) 투자유치 서밋을 만들어 전 세계 기업인들에게 레드카펫을 깔았습니다(바이브런트 구자라트의 시작과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제3장 참조). 공장에 필요한 전력과 용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원스톱 행정 서비스를 구축했습니다. 타타(Tata) 자동차가 서벵골 주에서 정치적 갈등으로 나노(Nano) 공장 부지를 포기했을 때, 모디는 불과 며칠 만에 구자라트로 유치하는 결단을 보여주었습니다. "관료주의 레드 테이프(Red Tape) 대신 레드 카펫을 깔아주겠다"는 그의 말은 한국 정부가 1960~70년대에 보여주었던 '빨리빨리' 행정의 인도판이었습니다.
구자라트에는 한국과의 접점이 물리적으로 존재했습니다. 한국의 포스코(POSCO)가 구자라트에 냉연 강판 공장을 운영했고,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L&T가 협력하여 K-9 바지라 자주포를 조립하는 하지라(Hazira) 공장이 구자라트에 있습니다. 모디에게 한국 기업은 슬로건이 아니라 자기 관할 구역 안에서 일자리를 만들고 기술을 전수하는 실체였습니다.
총리가 된 후, 모디는 구자라트의 실험을 인도 전체로 확장했습니다. '메이크 인 인디아(Make in India)' 정책의 핵심 논리는 한국 모델에서 빌려온 것이었습니다. 서비스업(IT 아웃소싱) 중심의 기형적 성장 구조를 가진 인도에, 고용 창출 효과가 큰 제조업을 심어야 한다는 판단. 그리고 그 제조업의 모범 답안으로 한국 기업들이 인도에 세운 공장들을 가리켰습니다.
삼성전자 노이다 공장은 이 전략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2018년 준공된 이 공장은 세계 최대 규모의 스마트폰 생산 시설입니다. 모디 총리가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준공 테이프를 끊으며 전 세계에 보낸 메시지는 간단했습니다. "인도도 할 수 있다." 현대자동차의 첸나이 공장은 인도 내수 2위이자 최대 수출 기업의 기반이 되었고, LG전자는 인도 가전 시장을 석권했습니다. 각 기업의 인도 사업 이야기는 제8장에서 자세히 다룹니다.
모디는 한국 기업의 성공을 자신의 정책적 성과로 적극 홍보했습니다. 동시에, 한국의 재벌 시스템이 국가 경제의 기틀을 닦은 방식을 인도에도 적용했습니다. 릴라이언스, 아다니, 타타 같은 인도 대기업을 '국가 챔피언'으로 육성하며 정책적으로 지원한 것입니다. 한국의 박정희 시대에 정부가 현대, 삼성, 포스코를 키웠던 것과 구조 면에서 닮은 방식입니다.
물론 이 비교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한국은 인구 5,000만의 단일 국가입니다. 인도는 14억 인구에 28개 주가 각각 다른 규제와 세금 체계를 가진 연방 국가입니다. 한국 모델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디가 '구자라트'라는 주(州) 단위를 한국과 비교한 것 자체가 이 현실을 반영합니다. 인도라는 대륙을 통째로 한국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구자라트라는 한 조각은 가능하다는 계산이었습니다.
최근에는 이 협력이 소비재를 넘어 반도체, 전기차, AI 같은 첨단 분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인도는 '반도체 자립'을 국가 과제로 삼고 메모리 반도체 강국인 한국 기업들에 파격적인 인센티브(생산연계장려금, PLI)를 제공하며 투자를 유치하고 있습니다. 모디에게 한국은 '따라 배우고 싶은 선배'인 동시에, 인도의 잠재력을 현실로 만들어줄 '현실적인 파트너'입니다.
"구자라트를 한국처럼." 2001년의 이 발언은 24년이 지난 지금, 인도 전체를 무대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다만 그 과정이 한국만큼 빠르고 매끄러울 수 있을지는 아직 열린 질문입니다.
7.4 방산·안보 협력: K-9 바지라, 군사정보 공유, NSG 지지
2019년 1월, 구자라트주 하지라(Hazira). L&T의 방산 공장에서 모디 총리가 K-9 바지라(Vajra) 자주포 위에 올라섰습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그의 사진이 인도 전역에 퍼졌습니다. 총리가 직접 무기 위에 올라타는 장면은 인도 정치에서도 흔치 않습니다. 그가 보여주려 한 것은 명확했습니다. 이 무기는 외국에서 사온 것이 아니라, 인도 땅에서 인도 노동자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는 사실.
K-9 바지라는 한-인도 방산 협력에서 눈에 보이는 첫 번째 성과로 꼽힙니다. '바지라'는 힌두 신화에서 인드라(Indra) 신이 사용하는 번개의 무기를 뜻합니다. 이 이름 자체가 한국의 기술과 인도의 정체성이 결합된 산물입니다.
사업의 시작은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인도 국방부는 노후화된 포병 전력을 교체하기 위해 155mm 52구경 자주포의 국제 입찰을 실시했습니다. 한국의 한화에어로스페이스(당시 한화테크윈)가 러시아의 2S19 므스타(Msta)-S를 꺾고 선정되었습니다. 결정적 요인은 두 가지였습니다. 성능과 현지 생산.
모디 정부의 '메이크 인 인디아' 원칙에 따라, 첫 10문은 한국에서 제작하고 나머지 90문은 인도의 L&T가 구자라트 하지라 공장에서 조립 생산하는 구조가 설계되었습니다. 2017년 4월 정식 계약이 체결되었고, 100문 전량이 2020년까지 납품 완료되었습니다. 한국이 완제품을 파는 대신 기술을 이전하고, 인도가 스스로 만드는 구조. 이것이 모디가 원하던 방식이었고,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응한 방식이었습니다.
K-9 바지라가 진정한 시험대를 만난 것은 2020년이었습니다. 그해 6월, 인도와 중국은 히말라야 고원의 갈완(Galwan) 계곡에서 유혈 충돌을 빚었습니다. 45년 만의 사상자 발생이었습니다(갈완 충돌의 전체 경과와 인도-중국 관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제6장 6.3 참조). 인도군은 K-9 바지라를 라다크(Ladakh) 고원에 긴급 배치했습니다. 해발 4,000미터 이상, 영하 30도의 극한 환경. 공기가 희박해 일반 엔진의 출력이 떨어지고, 사막용으로 설계된 장비의 한계가 드러나기 쉬운 조건입니다. K-9 바지라는 이 악조건에서 기동성과 타격 능력을 입증했습니다. 인도 군 수뇌부는 만족했습니다.
만족은 추가 주문으로 이어졌습니다. 2024년 12월, 인도 국방안보위원회(CCS)가 K-9 바지라 2차 사업, 즉 100문 추가 도입을 공식 승인했고, 같은 달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2025년 4월,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주한 인도대사관에서 약 2억 5,300만 달러 규모의 부품 공급 계약 서명식을 가졌습니다. 1차 사업에서 50%였던 인도 현지 생산 비율은 2차 사업에서 60%로 높아집니다. 현지화 비율의 상승은 한국 측의 기술 이전이 더 깊어진다는 뜻이고, 인도 방산 산업의 자체 역량이 한 단계 올라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보도에 따르면 200문 추가 도입 논의도 진행 중이며, 고해발 운용에 최적화된 엔진 업그레이드가 포함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화되면 K-9 바지라는 인도 육군 포병 전력의 중추가 됩니다.
방산에서 추가 주문은 첫 주문보다 어렵습니다. 첫 주문은 기대와 약속으로 성사됩니다. 추가 주문은 실제 운용 결과, 정비 체계의 안정성, 부품 공급의 신뢰성, 다양한 환경에서의 성능을 확인해야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K-9 바지라가 추가 주문을 받았다는 것은, 한국 무기 체계에 대한 인도의 신뢰가 종이 위의 약속을 넘어 실전에서 확인된 신뢰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무기 거래만이 아닙니다. 양국은 안보 대화의 제도화도 진행했습니다. 외교·국방 차관급 2+2 대화 채널이 신설되었고, 해군 간 연합 훈련과 상호 항구 기항이 확대되었습니다. 군사 정보 보호 협정을 통해 인도양과 태평양의 해상 안보 정보를 공유하는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체계를 이룹니다. 방산 협력은 하드웨어, 정보 공유는 소프트웨어, 2+2 대화는 운영 체제. 세 가지가 결합될 때 비로소 안보 파트너십이라는 시스템이 작동합니다.
국제 무대에서의 상호 지지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한국은 핵공급국그룹(NSG)을 포함한 4대 수출통제체제에 대한 인도의 조기 가입을 지지합니다. 이것은 외교 의례가 아닙니다. NSG의 핵심 회원국인 한국이 인도를 '책임 있는 핵 보유국'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이며,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도 편에 서겠다는 선언입니다. 인도는 이 지지를 높이 평가합니다.
반대 방향의 지지도 있습니다. 인도는 북한의 핵 도발에 대해 한국의 입장을 일관되게 지지하고,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이행에 동참해 왔습니다. 서로의 핵심 안보 이슈에서 등을 지켜주는 관계. 경제 협력은 경기 변동에 흔들릴 수 있지만, 규범에 기반한 이런 상호 지지는 장기 신뢰를 쌓는 방식입니다.
K-9 바지라의 포구가 히말라야 고원을 향해 있을 때, 그 안에는 한국의 기술과 인도의 필요, 그리고 두 나라 사이의 전략적 신뢰가 함께 장전되어 있습니다.
7.5 인도-태평양 전략 파트너: 미-중 사이 유사 딜레마
한국의 외교관에게 "제일 곤란한 질문이 뭐냐"고 물으면, 아마 이런 답이 나올 것입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디에 서겠느냐는 질문." 인도의 외교관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비슷한 답이 돌아옵니다. 용어만 약간 다릅니다. 한국은 이것을 '전략적 모호성'이라 부르고, 인도는 '전략적 자율성(Strategic Autonomy)'이라 부릅니다. 말은 다르지만, 밤잠을 설치게 하는 고민의 구조는 같습니다.
한국의 상황을 봅니다. 안보의 핵심은 한미 동맹입니다. 주한미군 2만 8,500명이 한반도에 주둔하고, 핵우산이 북한의 위협을 억제합니다. 그런데 최대 교역국은 중국입니다. 중국은 한국 수출의 약 20%를 흡수하는 시장입니다. 2016년 사드(THAAD) 배치 때 중국이 한국에 가한 경제 보복은 이 딜레마가 얼마나 현실적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인도의 상황을 봅니다. 인도는 쿼드(Quad)와 러시아 전통 우호 관계, 중국과의 3,000km 국경 대치를 동시에 관리합니다. 모디의 '다중 제휴(Multi-alignment)' 전략, 즉 어느 한쪽 진영에 완전히 귀속되지 않고 사안별로 유연하게 연대하는 접근법은 이 복합 방정식에서 나온 것입니다(인도의 다중 제휴 전략과 쿼드·BRICS 참여의 구체적 양상은 제6장 6.1 참조, 인도-태평양 전략의 전체 구도는 제6장 6.3 참조).
구조를 비교하면 유사성이 드러납니다. 두 나라 모두 안보 면에서는 미국과 긴밀하고, 경제 면에서는 중국과 얽혀 있으며, 지리적으로 중국과 인접해 있어 직접적인 위협을 느낍니다. 한국에게는 북한이라는 실존적 위협이 있고 그 뒤에 중국이 버티고 있습니다. 인도에게는 파키스탄이라는 오랜 적국이 있고, 역시 중국이 그들을 지원합니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지정학적 구조의 유사성입니다.
이 유사한 딜레마가 양국을 자연스러운 파트너로 만듭니다. 미·중 어느 한쪽을 완전히 택할 수 없는 나라들끼리 손을 잡으면, 개별 국가로서는 불가능한 협상력이 생깁니다. 이것이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한-인도 협력이 가지는 핵심 논리입니다.
2024년 10월, 인도와 중국은 실질통제선(LAC) 일대의 병력 분리에 합의했습니다. 2020년 갈완 충돌 이후 4년 넘게 지속된 군사 대치의 부분적 해소였습니다. 이 합의로 인도의 전략 환경이 다소 완화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2025년 4월 파할감(Pahalgam) 사태가 터지면서 인도는 다시 파키스탄과의 긴장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파할감 위기의 전개와 인도-파키스탄 관계에 대해서는 제4장 4.5 및 제9장 참조). 한쪽 전선이 잠잠해지면 다른 쪽에서 불이 붙는 패턴. 인도의 안보 환경은 한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비슷한 강도로 복합적입니다.
이 공통된 딜레마가 구체적인 협력으로 이어지는 공간이 있습니다. 공급망 재편입니다. 미·중 갈등이 무역 전쟁을 넘어 기술 패권 전쟁으로 번지면서, '차이나 플러스 원(China Plus One)'은 양국 모두에게 생존 과제가 되었습니다. 한국 기업들은 중국에 집중된 생산 시설을 분산시켜야 합니다. 인도는 이 분산의 수혜자가 되려 합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IPEF(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에 한국과 인도 모두 창립 멤버로 참여한 것은 이 논리의 제도화입니다.
반도체, 배터리, 희토류 같은 핵심 소재의 공급망에서 중국 의존도를 낮추는 것은 양국 공통의 이해관계입니다. 한국은 반도체 설계와 생산 기술을, 인도는 거대한 시장과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비즈니스가 아니라 경제 안보의 문제입니다.
더 넓은 그림이 있습니다. 인도는 개발도상국과 저개발국을 대변하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맹주를 자임합니다. 한국은 선진국과 개도국을 잇는 '글로벌 중추 국가(Global Pivotal State)'를 지향합니다. 서방 G7과 나머지 세계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가교 역할을 양국이 함께 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2023년 인도가 G20 의장국을 수행할 때 한국이 적극 협력한 것은 이 가능성의 예고편이었습니다.
2025년 4월, 서울에서 두 가지 일이 벌어졌습니다. 주한 인도대사관에서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L&T의 K-9 바지라 부품 공급 계약 서명이 이루어졌습니다. 같은 달, 서울에서는 한국-인도-미국 1.5트랙 대화가 열려 삼국 간 협력의 비전과 시너지를 논의했습니다. 방산 계약과 전략 대화가 같은 달에 이루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경제와 안보가 하나의 패키지로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한-인도-미 삼각 대화의 등장은 양자 관계가 삼자 관계로 확장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한국과 인도는 서로에게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미·중 사이에서 완벽한 선택을 할 수 없는 나라들이기에, 오히려 "완벽한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 협력"을 발전시킬 여지가 큽니다. 규범에 기반한 해양 질서, 공급망의 탄력성, 방산 공동 생산, 첨단 기술 협력. 이런 의제들은 '편 가르기'의 언어가 아니라 '능력 구축'의 언어로 움직입니다.
능력 구축은 외교적 수사보다 오래갑니다. 그리고 오래가는 것만이 전략이라 불릴 자격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