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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제9장. 인도의 한류
짜이왈라에서 총리까지
제9장. 인도의 한류
김경진
9.1 한류의 시작: 북동부 점화에서 전국 확산, OTT 시청률 370% 폭증
2000년 9월, 인도 북동부 마니푸르(Manipur)주 임팔(Imphal) 시내 극장가에 기묘한 적막이 내려앉았습니다. 인도에서 오래된 분리주의 무장단체 중 하나인 혁명인민전선(Revolutionary People's Front, RPF)이 힌디어 영화와 힌디어 위성 채널의 시청을 전면 금지한 것입니다. 극장 문이 닫히고, TV에서 샤루칸의 얼굴이 사라졌습니다. RPF의 논리는 간단했습니다. 볼리우드는 '인도화(Indianisation)'의 도구이며, 힌디어 심장부의 봉건적 가치관을 마니푸르에 이식하는 문화 제국주의라는 것이었습니다. 반군은 6,000~8,000개의 힌디 영화 비디오 카세트와 CD를 압수해 불태웠습니다.
문화적 공백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미얀마와 국경을 맞댄 모레(Moreh) 국경무역 시장을 통해 중국, 태국, 한국산 전자제품이 유입되고 있었고, 그 사이에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담긴 불법 복제 CD와 DVD가 섞여 들어왔습니다. 한 장에 10~30루피, 한국 돈으로 200~500원 남짓한 이 해적판 디스크들이 마니푸르 문화 지형을 송두리째 바꿀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왜 하필 한국이었을까요. 마니푸르를 비롯한 북동부 7개 주, 이른바 '일곱 자매(Seven Sisters)'는 인도 본토와는 인종·언어·문화가 뚜렷이 다른 지역입니다. 몽골계 외모를 가진 이 지역 사람들은 델리나 뭄바이의 대도시에서 인종 차별을 일상적으로 경험했고, 볼리우드 스크린에 자신과 닮은 얼굴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한국 배우들의 얼굴은 달랐습니다. 그들의 눈과 코, 피부색은 북동부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았습니다. 한국 드라마 속 가족을 중시하는 정서, 어른을 공경하는 태도, 절제된 로맨스는 마니푸르의 전통적 가치관과 묘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마니푸르 사회학자 오토짓 크쉐트리마윰(Otojit Kshetrimayum)은 이 현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종적 유사성과 씨족 공동체 문화의 공통점이 한국 콘텐츠에 대한 거부감을 사실상 제로로 만들었습니다."
2008년, 아리랑 TV가 마니푸르 케이블 네트워크에 송출되기 시작하면서 한류는 해적판 DVD의 단계를 넘어 정규 미디어로 진입했습니다. 가족 드라마, 로맨스 영화, 여행 프로그램, 요리 쇼가 쏟아져 들어왔고, 마니푸르의 청년들은 TV 앞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임팔의 시장에서는 한국 가수의 얼굴이 붙은 포스터가 볼리우드 배우를 밀어냈습니다. 미용실에서는 송혜교와 배수지의 사진이 안내 사진으로 걸렸습니다. 이웃한 나가랜드(Nagaland)주 정부는 2008년 코히마에서 인도-한국 음악 페스티벌을 공식 개최했고, 수천 명의 청년이 한국 뮤지션의 공연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도의 주류 사회는 이 현상을 알지 못했습니다. 델리와 뭄바이의 언론에서 북동부의 한국 열풍은 '그들만의 하위문화' 정도로 치부되었습니다. 14억 인도 중 고작 수천만 명이 사는 변방의 유행이 인도 전체를 뒤흔들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전환점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모디 정부의 '디지털 인디아(Digital India)' 정책이었고, 다른 하나는 코로나19 팬데믹이었습니다.
2016년, 릴라이언스 그룹의 무케시 암바니(Mukesh Ambani)가 통신사 '지오(Jio)'를 출범시키며 4G 데이터 가격을 사실상 무료에 가까운 수준으로 끌어내렸습니다(제4장 4.3 참조). 이 혁명적 가격 파괴의 배경에는 모디 정부가 전국 단위로 추진한 광케이블 인프라 투자가 있었습니다. 1GB 데이터 가격이 세계 최저 수준인 10루피(한화 약 170원)까지 떨어지자, 14억 인도인의 손에 유튜브와 넷플릭스가 쥐어졌습니다. 모디 총리가 "데이터는 새로운 석유"라고 역설한 그 데이터 고속도로 위에서, 북동부의 찻잔 속 태풍이었던 한류가 인도 전역으로 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 기폭제는 2020년의 코로나19였습니다. 모디 정부가 내린 전국적 봉쇄(Lockdown)는 세계에서 길고 엄격한 것 중 하나였습니다. 집에 갇힌 14억 인구가 스마트폰과 OTT 플랫폼으로 대거 몰려들었습니다. 넷플릭스, 아마존 프라임, MX플레이어 같은 플랫폼들은 영미권 콘텐츠가 바닥나자, 신선하고 정서적으로 공감하기 쉬운 K-드라마를 공격적으로 전면에 배치했습니다. <사랑의 불시착>, <사이코지만 괜찮아>, <이태원 클라쓰>가 인도 중산층의 안방을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2021년, <오징어 게임>이 터졌습니다.
이 시기 넷플릭스 인도에서 K-드라마의 시청률은 전년 대비 370% 이상 폭증했습니다. 볼리우드 특유의 과장된 연출과 3시간짜리 상영 시간, 필수적인 군무와 노래에 피로감을 느끼던 인도 시청자들에게, 16부작의 정교한 구성과 절제된 감정선, 세련된 영상미를 갖춘 한국 드라마는 완전히 새로운 문법이었습니다. OTT 플랫폼들은 힌디어, 타밀어, 텔루구어 더빙 서비스를 시작했고, 이는 영어를 구사하는 도시 엘리트에 국한되었던 한류 소비층을 소도시와 농촌의 대중으로 확장했습니다. MX플레이어는 'K-Drama' 카테고리를 별도로 신설했습니다. 한국 드라마는 더 이상 '특이한 취향'이 아니었습니다. 볼리우드, 할리우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3의 축이 된 것입니다.
북동부의 반군이 볼리우드를 금지했을 때 그들이 만든 것은 문화적 진공이었습니다. 한국 콘텐츠가 그 진공을 메웠고, 모디 정부의 디지털 혁명이 그것을 전국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금지에서 시작된 대안이 주류가 되기까지, 20년이 걸렸습니다.
9.2 BTS·블랙핑크와 Z세대: 1,500만 소비자, 커버댄스·팬아트 창작
뭄바이의 한 대학교 축제 무대 위에서 열일곱 살 소녀 다섯 명이 블랙핑크의 안무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습니다. 관중석의 함성은 K-팝 콘서트 현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무대 뒤 대기실에서 한 참가자가 말합니다. "우리는 유튜브로 안무를 배웠어요. 한국어 가사도 거의 외웠어요. 선생님이 왜 한국어를 배우느냐고 물으면 대답하죠. '제 꿈은 서울에 가는 거예요.'"
이 풍경은 인도 전역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인도는 평균 연령 28세, 35세 미만 인구가 전체의 65%를 차지하는 세계에서 젊은 나라입니다. 페이스북 분석 데이터에 따르면 인도 내 K-팝과 K-드라마의 적극적 소비자는 약 1,500만 명에 달합니다. 웬만한 국가의 전체 인구에 맞먹는 숫자입니다. 전 세계 K-팝 팬덤 규모에서 인도는 이미 6위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BTS는 인도 Z세대에게 음악 그룹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그들이 전달하는 'Love Yourself' 메시지는 인도 사회의 특수한 맥락에서 예기치 않은 울림을 만들어냈습니다. 인도의 청소년들은 세계에서 극심한 학업 경쟁 속에 놓여 있습니다. IIT(인도공과대학) 입시의 합격률은 1~2%에 불과하고, 시험에 실패한 학생의 자살이 사회 문제가 될 정도입니다. 카스트 제도의 그림자, 가부장적 가족 구조, 동성애 혐오가 여전히 일상 속에 존재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BTS의 메시지는 이 억압적 환경에서 살아가는 인도 청소년들에게 심리적 해방구가 되었습니다. 한 인도 팬의 말을 빌리면, "BTS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내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블랙핑크는 여성 팬층에 다른 종류의 충격을 안겼습니다. 인도 사회에서 여성의 자기표현은 여전히 많은 제약을 받습니다. 블랙핑크가 무대에서 보여주는 당당함, 자신감, 스타일의 자율성은 인도 소녀들에게 '자기 결정권'의 시각적 모델이 되었습니다. 블랙핑크의 패션과 메이크업은 모방의 대상을 넘어, 보수적 사회에서 "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는 선언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인도 팬들이 수동적 소비자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적극적인 '프로슈머(Prosumer)', 즉 생산하는 소비자입니다. 주인도 한국문화원(KCCI)이 매년 개최하는 '전인도 K-팝 콘테스트(All India K-Pop Contest)'에는 수천 팀이 참가합니다. 예선전은 인도 전역의 도시에서 열리고, 본선에 오르는 팀만 1,200개가 넘습니다. 이 대회에서 우승한 팀은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 대회에 인도 대표로 참가합니다.
커버 댄스에 그치지 않습니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는 인도 팬들이 직접 그린 BTS 팬아트, 창작 팬픽(Fan Fiction), 한국 아이돌의 뮤직비디오에 대한 리액션 영상이 쏟아집니다. 텔레그램과 디스코드에서는 조직적인 팬클럽이 스트리밍 캠페인을 기획하고, 아이돌 생일에 맞춰 자선 활동을 벌입니다. 2022년 BTS 멤버 정국이 인도 영화 'RRR'의 주제곡 '나투나투(Naatu Naatu)'를 흥얼거리는 영상이 공개되었을 때, 인도 아미(ARMY)들은 소셜 미디어를 도배하며 열광했습니다. 한국의 팝스타가 인도의 문화를 소비하고, 인도의 팬이 다시 한국 스타에 열광하는 쌍방향 문화 순환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열풍은 언어의 장벽마저 허물었습니다. 글로벌 언어 학습 앱 듀오링고(Duolingo)에서 한국어는 인도 내에서 성장 속도가 빠른 외국어 중 하나로 꼽힙니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 가사를 이해하고, 라이브 방송을 자막 없이 보겠다는 열망이 수십만 명의 인도 청소년을 한국어 교실로 이끌었습니다. 인도 내 한국어 학습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으며, 듀오링고 데이터에 따르면 한국어는 인도에서 수요가 급증하는 외국어 순위 상위권에 올라 있습니다. 2020년, 모디 정부가 발표한 국가교육정책(NEP 2020)은 한국어를 인도 학교의 제2외국어 권장 과목으로 채택했습니다. 한국어가 프랑스어, 독일어와 같은 반열에 오른 것입니다. 이 결정의 배경에는 한국문화원과 주한 인도대사관의 공동 건의가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아래로부터의 폭발적 수요였습니다(제7장 7.1 참조).
K-팝은 인도 사회에서 예기치 않은 역할도 수행하고 있습니다. 카스트, 종교, 지역, 언어로 끊임없이 분절되는 인도 사회에서, K-팝 팬덤은 이 모든 경계를 무시하는 '중립적 문화 공간'이 되었습니다. 브라만(최상위 카스트) 소녀와 달리트(불가촉천민) 소년이 같은 커버 댄스 팀에서 춤을 추고, 힌두교도와 무슬림이 같은 팬클럽에서 활동합니다. K-팝이라는 공통 분모 앞에서 인도의 고질적인 사회적 장벽은 잠시 녹아내립니다. 한 인도 문화 연구자의 표현을 빌리면, "K-팝은 인도 청년들에게 계급과 상관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평등한 취향'의 상징"입니다.
1,500만이라는 숫자는 시작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인도의 인터넷 사용자는 8억 명을 넘어섰고, 스마트폰 보급률은 매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아직 K-팝을 접하지 못한 수억 명의 인도 청소년이 잠재적 소비자로 대기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가 갤럭시 스마트폰 마케팅에 K-팝 이미지를 활용하고, 한국 기업들이 Z세대 타깃 마케팅에 집중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9.3 K-뷰티·K-푸드·K-패션: 라이프스타일 전반 확산
드라마와 음악으로 시작된 동경은 스크린을 넘어 인도인들의 화장대, 식탁, 옷장으로 파고들고 있습니다. 한국 문화에 대한 호감이 라이프스타일 전반의 소비 패턴을 바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K-뷰티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인도 화장품 시장에서 한국 브랜드의 약진은 '유리알 피부(Glass Skin)'라는 세 글자로 요약됩니다. 전통적으로 인도 뷰티 시장은 짙은 색조 화장, 강한 아이라인, 밝은 피부톤을 강조하는 서구 브랜드가 장악해 왔습니다. K-드라마 속 배우들의 투명하고 촉촉한 피부는 이 공식을 뒤집었습니다. "색조로 덮는 것이 아니라, 피부 자체를 건강하게 만든다"는 한국식 스킨케어 철학이 인도 여성들의 뷰티 관념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수치가 이를 증명합니다. 인도 K-뷰티 시장은 2024년 약 4억 달러에서 2030년까지 15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연평균 성장률 25.9%로, 인도 전체 뷰티 시장 성장률(12%)의 두 배가 넘습니다. K-뷰티 구매자 수도 2024년 약 1,190만 명에서 2030년 2,70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측됩니다. 인도 최대 뷰티 플랫폼 나이카(Nykaa)에서 한국 브랜드는 플랫폼 평균의 2.5배에 달하는 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코스알엑스(COSRX), 토니모리(TONYMOLY), 더페이스샵(The Face Shop), 라네즈(LANEIGE) 같은 브랜드가 인도 여성들의 스킨케어 루틴에 자리 잡았습니다.
한국 화장품이 인도에서 통한 이유 중 하나는 의외의 접점에 있습니다. 인도의 전통 의학 아유르베다(Ayurveda)에 익숙한 소비자들에게 인삼, 녹차, 달팽이 점액, 시카(Cica) 같은 천연 성분을 강조하는 한국 화장품은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습니다. "화학 성분보다 자연 유래 성분"이라는 K-뷰티의 철학이 아유르베다의 자연주의 전통과 맞닿는 지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10단계 스킨케어 루틴, 시트 마스크, 에센스, 토너 패드 같은 제품군은 유튜브 뷰티 인플루언서들의 소개를 거쳐 빠르게 대중화되었습니다.
K-푸드의 확산은 더 극적입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양은 냄비에 라면을 끓여 먹는 장면, 소주잔을 부딪치는 장면은 인도 시청자들의 식욕과 호기심을 동시에 자극했습니다. 한국 라면이 인도에서 성공한 배경에는 인도인들의 매운맛 선호가 있습니다. 마살라와 칠리에 단련된 인도인의 미각에게 한국 라면의 매운맛은 낯선 도전이 아니라 익숙한 쾌감이었습니다.
삼양식품의 불닭볶음면은 이 연결의 상징입니다. 유튜브에서 시작된 '불닭볶음면 챌린지(Fire Noodle Challenge)'는 인도 전역의 유튜버와 인플루언서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처럼 번졌습니다. 삼양식품의 2024년 해외 매출은 전년 대비 65% 증가한 1조 3,400억 원을 기록했습니다. 불닭볶음면은 전 세계 100개국에서 연간 10억 개 이상 판매되는 글로벌 히트 상품이 되었고, 인도는 이 성장의 핵심 시장 중 하나입니다.
과거에는 대형 마트 수입 코너에서만 볼 수 있었던 한국 라면이 이제는 블링킷(Blinkit), 제프토(Zepto) 같은 퀵커머스 앱을 거쳐 10분 안에 배달됩니다. 떡볶이, 김밥, 김치찌개는 델리와 뭄바이의 레스토랑 메뉴판에 올랐습니다. 인도의 특수한 식문화를 고려한 현지화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인구의 상당수가 채식주의자인 점을 고려해 젓갈을 뺀 비건 김치, 고기 성분을 제거한 채식 라면이 출시되었고, 소고기를 먹지 않는 힌두교도를 위해 닭고기와 양고기 베이스의 한식 메뉴가 개발되고 있습니다. 한국 음식을 먹는 것은 미각의 체험을 넘어, "드라마 속 주인공이 먹던 그 음식을 나도 먹는다"는 문화적 만족감을 줍니다.
K-패션의 확산 속도도 무섭습니다. <이태원 클라쓰>의 박서준 스타일, <오징어 게임>의 트레이닝복, 블랙핑크의 무대 의상은 인도의 온라인 패션 시장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형 패션 이커머스 민트라(Myntra)와 아지오(Ajio)에는 'K-Drama Style', 'K-Pop Fashion'이라는 카테고리가 생겼습니다. 오버사이즈 티셔츠, 버킷햇, 파스텔 톤 의류, 카고 바지가 인도 대학가의 유니폼이 되었습니다. 화려하고 원색적인 인도 전통 의상과 대조되는 한국 패션의 단정하고 미니멀한 미학은 도시 청년들에게 '세련된 현대성'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라이프스타일 확산의 밑바닥에는 삼성, LG, 현대차 같은 한국 대기업들이 30년간 쌓아온 브랜드 신뢰가 깔려 있습니다(제8장 8.1, 8.3 참조). 인도 가정의 거실에는 삼성 TV가, 주방에는 LG 냉장고가, 차고에는 현대차가 있는 풍경은 '메이드 바이 코리아(Made by Korea)'에 대한 거부감을 사실상 제로로 만들었습니다. 이 신뢰가 화장품, 식품, 패션이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간 것입니다. 한국을 '좋은 제품을 만드는 나라'로 인식하던 인도 소비자들이 이제는 '닮고 싶은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나라'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9.4 역사적 유대와 심리적 거리의 축소
한국과 인도의 문화적 친밀감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서기 48년 허왕후(許黃后) 전설로 거슬러 올라가는 2,000년의 인연, 1929년 타고르가 한국에 보낸 시, 그리고 2018년 아요디아 디포츠사브 축제에서 김정숙 영부인이 주빈으로 초대받은 일까지, 양국을 잇는 실타래는 여러 겹으로 엮여 있습니다(제7장 7.1에서 자세히 다룹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역사적 토대가 현대의 한류에 미치는 실질적 영향입니다.
문화 수용에는 '심리적 거리'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아무리 매력적인 콘텐츠라도, 그것이 완전히 낯선 문화에서 온 것이라면 수용에 저항이 생깁니다. 허왕후 전설과 타고르의 시, 그리고 양국 정상 간의 우호적 교류는 한국을 인도인들에게 '완전한 타국'이 아닌 '먼 친척' 같은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었습니다. K-드라마가 인도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깊은 기저에는 이 심리적 거리의 축소가 있습니다.
정서적 공통분모도 작용합니다. 한국의 '정(情)' 문화와 유교적 가치관은 대가족 중심의 인도 사회 정서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할리우드 콘텐츠가 개인주의와 자유분방함을 다룬다면, 한국 콘텐츠는 가족 간의 갈등과 화해, 순수한 사랑, 권선징악 같은 가치를 현대적 세련미로 포장하여 전달합니다. 인도인들이 한국 드라마에서 자신들이 중시하는 가치를 발견하고 깊이 공감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남인도의 타밀어(Tamil)와 한국어 사이에 '엄마', '아빠' 같은 유사 단어가 수백 개 존재한다는 학설은 이 친밀감에 학문적 근거를 더합니다. 두 언어 사이의 음운적·문법적 유사성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고대에 해양 무역로를 거친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과학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이 학설 자체가 양국 국민 사이에 '우리는 생각보다 가깝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음식은 이 문화적 융합이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장소입니다. 매운맛을 즐기는 인도의 식습관과 한국의 음식 문화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공통 분모가 있습니다. 인도의 로티(roti)나 난(naan) 옆에 김치가 놓이고, 한국의 양념치킨 소스가 인도의 파니르(paneer) 요리에 접목됩니다. 일방적인 문화 전파가 아니라, 상호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융합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2018년 11월,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 아요디아. 힌두교의 성스러운 도시 중 하나인 이곳에서 열린 디포츠사브(Deepotsav) 축제에 김정숙 영부인이 주빈으로 참석했습니다. 수만 개의 기름등잔이 사라유(Sarayu) 강변을 밝히는 이 축제에서, 힌두 민족주의의 성지에 한국의 영부인을 초대한 것은 파격이었습니다. 모디 총리는 이 자리를 통해, 한국과 인도가 2,000년 전부터 피로 엮인 가족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허왕후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아요디아와 한국의 김해를 잇는 이 서사는, 외교적 수사를 넘어 인도인들이 한국 문화를 받아들이는 심리적 통로가 되고 있습니다.
9.5 경제적 파급: 호감도 84.5%(세계 2위), 제품 구매의향 70% 이상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2024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이 26개국 25,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해외 한류 실태조사 결과, 인도의 한국 문화 콘텐츠 호감도는 84.5%를 기록했습니다. 인도네시아(86.3%)에 이어 세계 2위입니다. 인도인 10명 중 8명 이상이 한국 문화에 대해 긍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한국 문화를 경험한 후 한국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했다고 답한 비율은 85.3%로, 이 항목에서는 UAE(85.9%)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했습니다. 일본(38.8%)이나 이탈리아(48.7%)와 비교하면 압도적인 수치입니다.
이 호감도는 곧장 지갑을 엽니다. 같은 조사에서 한류 경험자의 한국 제품·서비스 구매 의향은 인도가 70.7%로, 이집트(75.6%), 사우디아라비아(73.0%), UAE(72.9%), 베트남(72.1%)에 이어 세계 5위권에 들었습니다. 구매하고 싶은 한국 제품은 음식(64.7%), 한국 여행(61.8%), 한국 식당 방문(61.4%), 화장품(54.0%), 의류(52.8%) 순이었습니다. 문화 콘텐츠 소비가 관련 산업의 구매로 이어진다고 답한 비율은 57.9%에 달했습니다.
이 수치가 의미하는 바를 한국 기업의 현실에 대입해 보겠습니다.
삼성전자는 인도 스마트폰 시장에서 프리미엄 브랜드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현대·기아차는 인도 자동차 시장 점유율 2위를 차지하며 SUV 시장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LG전자는 인도 백색가전 시장의 선두 그룹입니다. 이들 기업이 30년간 쌓아온 기술력과 현지화 전략의 성과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한류가 이 기업들에게 안겨준 보이지 않는 자산이 있습니다. 그것은 '코리아 프리미엄(Korea Premium)'입니다.
1990년대 후반, LG와 삼성이 처음 인도에 진출했을 때 한국은 '가성비 좋은 가전을 만드는 나라' 정도의 이미지였습니다. 중국이나 일본 제품과의 차별화는 쉽지 않았습니다. 한류가 이 인식을 바꿨습니다. 한국은 이제 '세련되고 힙(hip)하고 닮고 싶은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선진국'입니다. 삼성 갤럭시 스마트폰을 쓰고, 현대차를 몰고, LG 가전을 쓰는 것은 '합리적 선택'을 넘어 '트렌디한 선택'이 되었습니다. 중국 제품이 저가 공세를 펼치고, 2020년 이후 인도-중국 국경 갈등으로 중국 제품에 대한 거부감이 커진 상황에서, 한국 제품은 매력적인 대안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모디 정부의 제도적 뒷받침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인도 정부는 한국 기업 전담 원스톱 서비스인 '코리아 플러스(Korea Plus)'를 설치하고, 투자 애로사항을 신속히 해결하는 체계를 갖추었습니다. 2018년 삼성전자의 세계 최대 스마트폰 공장 준공식에 모디 총리가 직접 참석하여 "이것이 메이크 인 인디아의 성공 모델"이라고 치켜세운 것은 한국 제품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인증이었습니다. 양국은 2030년까지 교역액 500억 달러 달성을 목표로 설정했습니다(제7장 7.2 참조).
한류의 경제적 파급은 대기업에 그치지 않습니다. 크래프톤의 모바일 게임 '배틀그라운드 모바일 인도(BGMI)'는 인도의 국민 게임으로 등극했습니다. 오리온의 초코파이는 인도의 국민 간식이 되었습니다. K-뷰티 시장은 2030년까지 15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며, K-푸드는 인도의 거대한 가공식품 시장에서 프리미엄 세그먼트를 빠르게 잠식하고 있습니다. 에듀테크, 웹툰, 게임 같은 서비스 산업으로 한국 기업의 진출 기회도 넓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밋빛 수치 뒤에도 그림자는 있습니다. 같은 KOFICE 조사에서 한류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동의하는 비율이 인도에서 52.7%로, 전체 26개 조사 대상국 중 1위로 나타났습니다. "지나치게 자극적·선정적(24.9%)", "단조롭고 진부하다(22.0%)", "지나치게 상업적(21.1%)"이라는 반응이 주요 부정 요인이었습니다. 한류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반작용도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84.5%라는 호감도와 52.7%라는 부정 인식이 공존하는 이 역설은, 한류가 인도에서 성숙기에 접어들었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초기의 신선함이 퇴색하면서 '콘텐츠의 질'과 '문화적 감수성'이라는 다음 단계의 과제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인도의 거대한 엔터테인먼트 산업, 볼리우드와의 경쟁도 여전히 치열합니다. TV와 라디오의 프라임 타임은 여전히 인도 영화 음악이 장악하고 있으며, K-팝이 인도의 주류 음악 시장을 대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84.5%라는 호감도와 70%가 넘는 구매 의향은 분명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14억 인구의 마음에 닿은 한류는 유행이 아니라, 한국과 인도의 경제 지도를 새롭게 그리는 구조적 동력이 되었습니다. 인도인 10명 중 8명 이상이 한국을 좋아한다는 것. 그 숫자가 어떤 정치적 선언이나 외교적 수사보다 두 나라의 미래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