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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1장 런던의 어린 시절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인공지능의 아버지
제1부 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아이
1 런던의 어린 시절
김경란, 김경진
1976년 7월 27일 런던 출생 1976년 7월 27일, 런던 북부의 한 병원에서 사내아이 가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데미스. 그리스계 키프로스인 아버지 코스타스 허사비스 (Costas Hassabis)와 중국계 싱가포르인 어머니 앤젤라(Angela)의 첫 아이였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피가 한 몸에 섞인 이 아기는 3남매의 맏이로, 뒤이어 남동생 한 명과 여동생 한 명이 태어났습니다.
훗날 남동생은 프로 포커 플레이어가 되고, 여동생은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의 길을 걷게됩니다. 세 남매 중 수학과 과학에 빠져든 사람은 데미스뿐이었습니다. 허사비스는 자신의 부모를 "보헤미안(Bohemian)"이라고 묘사합니다.
정해진 궤도를 따르기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쫓으며 사는 자유로운 영혼들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부모 밑에서 태어난 장남은 어울리지 않을 만큼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아이였습니다. 여동생과 남동생은 부모의 예술적 기질을 물려받아 음악과 글쓰기의 세계로 향했지만, 데미스는 어 릴 때부터 규칙과 패턴, 숫자와 구조에 끌렸습니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부모님은 기술을 싫어합니다. 컴퓨터라면 질색이에요. 여동생 과 남동생도 전부 예술 쪽으로 갔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디서 온 건지,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장남으로서의 역할은 일찍 시작되었습니다. 부모님이 바쁜 날이 많 았기에, 데미스는 동생들의 놀이 상대이자 보호자가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장난감 가게에서 팔 수 없게 된 장난감들을 가져오면 분해하고 재조합해서 새로운 놀이를 발명 했고, 여덟 살 때는 체스 대회 상금으로 산 ZX 스펙트럼 컴퓨터로 오셀로 AI를 만들 어 다섯 살 남동생과 대국시켰습니다. 컴퓨터가 이겼습니다.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이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사실 앞에서 소년은 멈춰 섰습니다.
네 살에 체스를 시작한 데미스는 배움의 속도부터 남달랐습니다. 아버지와 삼촌이 체스를 두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규칙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고, 불과 2주 만에 두 어른을 모두 이겼습니다. 다섯 살에 전국 대회에 출전했으며 여섯 살에 런던 8세 이하 챔 피언십에서 우승했습니다.
열세 살에는 엘로(Elo) 레이팅 2300의 체스 마스터 등급 에 올랐고, 세계 14세 이하 랭킹 2위를 기록했습니다. 이 무렵 그는 잉글랜드 주니어
대표팀의 주장을 맡았습니다. 11 세 이하 국가대표팀을 이끌며 전략을 짜고 동료들을 독려한 경험은, 훗날 2,000명이 넘는 딥마인드 연구진을 이끄는 리더십의 원형이되었습니다. 딥마인드의 공동창업자 무스타파 술레이만(Mustafa Suleyman)은 데미스의 남동 생 친구였습니다.
형제와의 유대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공지능 연구소의 창업 팀까지 이어진셈이죠. 예술가 기질의 동생들과 과학자 기질의 자신이 한 지붕 아 래 공존한 환경은, 훗날 서로 다른 배경의 인재들을 한데 모으는 그의 조직 운영 감각으로 이어집니다. 코스타스 허사비스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인물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싱 어송 라이터로 활동했습니다.
그의 영웅은 밥 딜런(Bob Dylan)이었고, 기타를 메고 노래를 만드 는 일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은퇴한 지금도 그는 오페라를 쓰고 있습니다. 데미스는 2025 년 싱가포르 인터뷰에서 아버지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아버지는 밥 딜런처럼 되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지금 은퇴하신 뒤에도 오페라를 작곡 중이신 데,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그것만 봐도 아실겁니다.” 코스타스는 음악가 시절이 지나 자 장난감 가게를 열었습니다. 아내 앤젤라와 함께 운영한 이 가게는 어린 데미스에게 매혹적인 실험실이었습니다.
진열대에는 온갖 보드게임과 퍼 즐이 놓여 있었고, 팔 수 없게 된 장난감들은 집으로 따라왔습니다. 데미스는 그것들을 해체하고 재조합하며 새로운 놀이를 발명했습니다. 장난감 가게는 게임의 구조를 분석하고, 왜 어떤 게임은 재미있고 어떤 게임은 지루한지를 탐구하는 어린 게임 디자이너의 첫 작업 실이었습니다.
장난감 가게가 문을 닫은 뒤, 코스타스는 교사가되었습니다. 앤젤라도 교사로 일했 습니 앤젤라는 1970년대 초 싱가포르에서 영국으로 건너와 특수교육 간호사로 훈련 받았고, 이후 존 루이스(John Lewis) 백화점에서 매니저로 근무하기도했습니다. 코 스타스의 교사 생활 역시 남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야간 수업을 자신만의 소규모 회사처럼 운영했습니 데미스의 표현을 빌리면, 아버지는 "정해진 9시~5시 직장을 가진 적 이 한 번도 없는" 사 람이었습니다. 장난감 가게도, 음악도, 교습도 전부 자기 방식대 로 꾸려나갔습니다. 이 끊임없는 변신은 아들에게 결정적인 교훈을 남겼습니다.
세상에 미리 깔린 길 (Pre-set path)은 없으며, 원하는 삶은 스스로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데미스
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부모님은 저희에게 열정을 쫓으라고, 그 열정 속으로 깊이 들 어가라고, 관습을 걱 정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결국에는 다 잘 될 거야'라는 게 부모님의 태도였어요.
제 경력은 분명 매우 비관습적이었는데, 부모님께서 그 점을 아 주 많이 격려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삶의 방식은 데미스에게 "무에서 유를 만드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장난감 가게를 열고, 음악을 만들고, 강좌를 열고, 그 모든 시도 가 자기만의 소규모 사업이었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코스타스는 거대한 부를 축적하 지는 못했지만, 아이디어를 행동으로 옮기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 태도는 데미스의 혈관 속에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열일 곱 살에 피터 몰리뉴(Peter Molyneux)와 함께 '테마파크(Theme Park)'라는 게임을 공동 설계 하고 리드 프로그 래머로 일한 것, 스물두 살에 독립 게임 스튜디오 엘릭서(Elixir Studios)를 창업한 것, 서른네 살에 딥마인드를 세운 것, 이 모든 도전의 밑바닥에는 아버지의 DNA가 흐르 고 있었습니다.
데미스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만큼이나 아버지에게서 반면교사를 삼은 것도 있었습니다. 코스타스는 다방면에 재능이 있었지만 하나의 목표에 오래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음 악에서 장난감 가게로, 장난감 가게에서 교직으로 옮겨 다니는 동안 깊 이보다는 폭이 넓어졌습니다.
데미스는 이 패턴을 지켜보며 다짐했습니다. 아버지처 럼 창의적이고 대담하게 살되, 자신은 하나의 큰 질문에 평생을 걸겠다고. 그 질문이 바로 "지능이란 무엇인가(What is intelligence?)"였습니다. 아버지의 자유분방한 도전 정신과 아들의 지독한 집중력이 결합 된 결과가 딥마인드입니다.
코스타스가 아들에게 남긴 유산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네가 원하는 길은 네 손으로 만들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음악, 장난감 가게, 교실을 오가며 살았던 아버지의 삶 은 아들에게 창의성과 대중 소통과 사업적 감각이라는 세 가지 재료를 남겼습니다.
데미스 허사비스는 스스로를 "노동 계급(Working-class)" 출신이라고 말힙니다. 2025년 인 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모님은 이민자였고, 우리는 런던에서 꽤 가난한 동 네에서 자랐습니다." 집안 형편은 빠듯했습니다.
아버지가 장난감 가게를 운영하고, 노래를 만들고, 교사로 일하는 동안에도 경제적 안정은 쉽게 찾아오 지 않았습니다. 체스는 이 소년에게 지적 유희인 동시에 현실적 수단이었습니다. 주말이면 아버지 코스타 스가 낡은 캠퍼밴(Camper van)을 몰고 영국 곳곳의 체스 토너먼트에 데미스를 데려갔습니 호텔에 묵을 여유는 없었습니다.
부자(父子)는 캠퍼밴 안에서 잠을 자 거나, 가장 싼 숙 소의 이층 침대를 잡았습니다. 아버지는 늘 아래층을 쓰고, 데미스는 위층에 올라가 다음 날 대국을 준비했습니다. 어린 소년의 어깨에는 명확한 압박이 실 려 있었습니다.
우승 상 금을 타야 기름값과 숙박비를 겨우 충당할 수 있었기 때문입 니다. 데미스는 이 시절을 이 렇게 회고합니다. "대회에 가면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항상 있었습니다. 경비가 비쌌고, 우리에게는 돈이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덧붙입니다. "어릴 때 압박감을 견뎌내면, 나중에 더 강해집니다.” 절박함은 역설적으로 데미스에게 승부의 칼날 위에서 집중하는 능력을 길러주었습니다.
체스판 위에서의 한 수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가계에 실질적 보탬이 되는 경제적 행위였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심리적 압박과 최악의 조건에서 이기는 법을 배웁니 훗날 딥마인드가 자금난에 허덕이며 거대 IT 기업들의 인수 제안을 놓고 저울질할 때, 허사비스가 보여 준 냉철한 협상력과 흔들리지 않는 집중력은 캠퍼밴에서 다져진 것이었습니다. 물질적 결핍이 지적 결핍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허사비스의 집에는 비싼 물건 대신 끊임없는 대화와 호기심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아이 들이 무엇에 관심을 두든 자유롭게 탐구하도록 격려했습니다.
물질적 보상보다 질문 에 진지하게 답해 주는 시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데미스는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들 어 자기 논리를 펼치는 아이였고, 부모님은 그것을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체스 대회 원정 비용을 아끼기 위해 홈스쿨링을 받기도 했고, 퀸 엘리자베스 스쿨과 크라이스트 칼리지 핀클리를 거치며 열여섯 살에 A-레벨 시험을 2년 일찍 마쳤습니다.
사교육이나 특별한 입시 준비 없이, 공공 도서관과 체스판, 컴퓨터 한 대가 그의 교실이었습니다. 허사비스의 어머니 앤젤라는 싱가포르 출신입니다. 데미스가 열 살이 될 때까지 매 년 여 름 두세 달씩 싱가포르를 방문하여 외가 친척들과 시간을 보냈습니다.
창이 해 변에서 수영 하고, 싱가포르 친척들과 어울리던 기억은 그의 유년기에 동남아시아의 따뜻한 색채를 더했습니다. 그리스의 열정과 싱가포르의 근면함이 한 아이의 내면에서 섞이고 발효되는 과 정은, 사물을 한쪽 관점으로만 보지 않는 유연한 사고력의 토 대가되었습니다. 딥마인드 초창기, 거대 기업들의 자금력 앞에서도 소수 정예로 혁신을 만들어낸 그 의 방식은 이 어린 시절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집안에 돈은 부족했지만 생각할
거리는 넘쳤습니다. 캠퍼밴의 좁은 침대 위에서 다음 날 체스 전략을 구상하던 소년에 게 지능은 풀고 싶은 수수께끼였고, 부족한 환경이 그 수수께끼를 향한 출발점이었습니다. 퀸 엘리자베스 스쿨(Queen Elizabeth's School, Barnet) 1988년 9월, 런던 북부 바 넷(Barnet). 4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퀸 엘리자베스 스쿨의 정문 앞 에 남색 블레이저 차림의 소년들이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1573년 엘리자베스 1세의 칙령으로 설립된 이 학교는 영국 전역에서 가장 뛰어난 학업 성취도를 자랑하는 남자 공립 그 래머 스 쿨이었습니다. 입학 자체가 관문이었습니다. 열한 살짜리 소년들은 '일레븐 플러스 (11+)'라 불리는 선발시험을 치러야 했고, 그 관문을 통과한 아이들만이 이 교정에 발을 디 딜 수 있었습니다.
열두 살의 데미스 허사비스는 그 줄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체구는 작 았지만, 눈빛은 또래와 달랐습니다. 허사비스에게 퀸 엘리자베스 스쿨은 두 번째 체스판이었습니다.
학교의 모든 것이 규칙과 순위로 돌아갔습니다. 매 학기 성적표가 나올 때마다 학생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위계 가 만들어졌고, 교사들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진학률이라는 숫자 앞에서 긴장했습니 1980년대 후반 영국 교육계는 대대적인 개혁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마거릿 대처 정 부가 도입한 국가 공통 교육과정(National Curriculum)은 학교 간 성 과를 공개 비교하도록 만들었고, 그래머스쿨은 이 경쟁의 최전선에 놓여 있었습니다.
수학과 과학에서 월등한 성 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은 교실 안 공기를 팽팽하게 만들었습니다. 허사비스는 기묘한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평일에는 교복을 차려입은 모범생이었습니다.
수학 시간에 공식을 풀고, 과학 실험실에서 비커를 다루었습니다. 그러 나 방과 후 와 주말, 그의 세계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아버지 코스타스가 운전하는 낡은 캠퍼밴을 타고 영국 전역의 체스 토너먼트장을 돌아다녔습니다.
때로는 학교를 며칠씩 빠지고 유럽 각지의 국제 대회에 출전했습니다. 크리스마스 방학도, 여름 방학 도 체스 대회 일정으로 채워졌습니다. 허사비스는 훗날 이 시절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학교를 쉬고 전 세계를 돌 며 체스를 뒀습니다. 상당히 빡센 일정이었습니다." 이중생활의 성적표는 이랬습니다.
학교에서는 또래를 앞서 월반했고, 체스판 위에 서는 13세에 마스터 등급(Elo 2300)에 도달했습니다. 세계 14세 이하 랭킹 2위. 1위 는 당시 이미 전설이 되어가던 헝가리의 유디트 폴가(Judit Polgár)였습니다. 허사비
스는 잉글랜드 주니어 대표팀의 주장을 맡아 국제 무대에서 나라를 대표했습니다. 교 실에서는 조용한 수재였 지만, 체스판 앞에 앉는 순간 프로 기사들을 상대하는 냉철한 승부사로 변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학교가 훗날 또 한 명의 AI 선구자를 배출했다는 사실입니다.
허 사비스보다 몇 년 뒤인 1995년부터 2002년까지 같은 교정을 밟은 무스타파 술레이 만(Mustafa Suleyman)은 2010년 허사비스와 함께 딥마인드를 공동 창업하게됩니다. 런던 북부의 한 그래머스쿨이 인공지능 역사의 두 주역을 길러낸 셈입니다. 허사비스에게 학교는 충족되지 않는 갈증의 공간이기도했습니다.
그는 훗날 한 인 터뷰에서 "내 기억에 우리 학교에서 옥스브리지에 간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회상합 니다. 당시 학 교 환경이 그에게 충분한 지적 자극을 주지 못했음을 암시합니다. 수학 시간에 교사가 칠 판에 적는 공식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고, 정해진 교과서의 진도 는 답답할 만큼 느렸습니다. 체스판 위에서 10의 120승에 달하는 경우의 수와 씨름 하던 소년에게, 교실의 정답 맞 히기는 단순한 게임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허사비스의 인생을 뒤흔든 사건이 일어납니다. 리히텐슈타인에서 열린 국제 체 스 대회. 열두 살의 소년은 덴마크의 성인 챔피언과 마주 앉았습니다. 대국은 10시간이 넘 도록 이어졌습니다. 국면은 이미 무승부가 확실했지만, 상대는 집요하게 승리를 노리며 물 고 늘어졌습니다.
결국 탈진한 허사비스가 기권을 선언하자, 상대는 의기양양하게 무승부 로 이끌 수 있었던 수순을 늘어놓으며 훈수를 두었습니다. 소년은 대회장을 둘러보았습니다. 수백 명의 명석한 두뇌들이 오직 64칸 위의 승패 에 모 든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 두뇌 들을 더 중 요한 곳에 쓸 수 있다면?" 이 질문은 소년의 내면에서 조용한 지각변동을 일으켰습니다.
세계 챔피언이 되겠 다는 꿈 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체스에 인생을 걸면 오프닝 이론과 엔드게임 기법이라는 닫 힌 세계에 갇히게됩니다. 허사비스가 체스에서 배운 것은 특정한 수가 아니라 메타 스킬 (meta-skill)이었습니다.
문제 해결 능력, 패턴 인식, 전략적 사고, 상상력. 이것들은 체스에 만 쓰기에는 너무 아까운 능력이었습니다. 훗날 이렇게 정리합니다. "체스를 두면서 실제 로 갈고닦는 것은 그런 메타 스킬들입니다.
그걸 과학이 나 사업 같은 다른 모든 분야에 적 용할 수 있다는 걸 꽤 어릴 때부터 깨달았습니다."
1990년, 허사비스는 퀸 엘리자베스 스쿨을 떠납니다. 2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 만, 이 학 교는 그에게 두 가지를 선물했습니다. 하나는 경쟁 속에서 단련된 집중력과 자기 규율. 다 른 하나는 그 경쟁의 틀 자체를 의심하는 눈. 그래머스쿨의 엄격한 교육 은 그에게 탄탄한 기초를 쌓아주었지만, 동시에 기존 시스템의 한계를 체감하게 만든 인큐베이터였습니다. 소년은 더 넓은 세계로, 더 깊은 질문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퀸 엘리자베스 스쿨을 떠난 뒤, 허사비스의 일상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매일 아침 교복을 차려입고 교문을 통과하는 의식이 사라졌습니다. 대신 그는 집에서 눈을 뜨 고, 자기만 의 시간표에 따라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부모가 주도한 홈스쿨링 기간이 시작된 것입니 창밖으로는 같은 또래 아이들이 등교하는 발소리가 들렸지만, 허사비 스의 눈앞에는 교 과서 대신 컴퓨터 모니터가 놓여 있었습니다. 1990년대 초 영국에서 자녀를 명문 그래머스쿨에서 빼내 집에서 가르치겠다는 것 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코스타스와 앤젤라는 BBC 라디오 인터뷰에서 "사회적 규범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말할 만큼 자유로운 부모였지만, 현실적 이유도 있었습니다.
세계 랭킹 2위의 주니어 체스 선수가 정규 수업의 리듬에 맞추기란 불가능에 가 까웠으니까요. 홈스쿨링 기간 동안 허사비스의 하루는 두 축으로 나뉘었습니다. 오전에는 체스였습니다. 세계 그랜드마스터들의 기보를 분석하고, 오프닝 이론을 연구하고, 자신의 대 국을 복기했습니다.
오후에는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이 시간이야말로 훗날 딥마인 드의 씨앗이 뿌려 진 토양이었습니다. 1984년, 여덟 살의 소년은 체스 대회에서 받은 상금으로 인생 최초의 결정적 투자를 합니 싱클레어 ZX 스펙트럼 48K(Sinclair ZX Spectrum 48K). 당시 가격으로 200~300파운드 에 불과한 이 작은 기계가 허사비스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1980년대 영국은 가정용 컴퓨터의 황금기였습니다. ZX 스펙트럼, BBC 마이크로, 커모도 어 64 같은 기계들이 수십만 가정에 보급되면서 '베드룸 코더(bedroom coder)'라 불리는 독 학 프로그래머 세대가 탄생하고 있었습니다. 허사비스도 그 물결 에 올라탔습니다.
다만 다 른 아이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게임을 '하기 위해' 컴 퓨터를 켰지만, 허사비스는 게임이 '어떻게 작동하는 지' 알기 위해 컴퓨터를 켰습니다.
당시 ZX 스펙트럼의 전원을 켜면 화면에는 윈도우 같은 운영체제 대신 깜빡이는 커서 하 나만 나타났습니다. 사용자가 직접 명령어를 입력해야만 무언가가 일어나는 세계. 허사비 스는 서점에서 프로그래밍 교재를 사서 베이직(BASIC) 언어를 한 줄 한 줄 입력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는 기술에 문외한이었기에 도움을 줄 수 없었습니다.
오롯이 혼자의 힘으 로 변수, 반복문, 조건문이라는 프로그래밍의 기초 문법을 익혀갔습니다. 훗날 이 경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컴퓨터란 마음의 힘을 확장해주는 일종의 마법 적 장 치라고 늘 느꼈습니다.
AI는 그 끝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장에는 여덟 살 소년의 원체 험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그는 잠들기 전에 컴퓨터에게 복잡한 계산이나 시뮬레이션을 맡 겨놓고 이불 속에 들어갔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면 기계는 밤새 문제를 풀어놓고 있었습니다. 내가 자는 동안에도 나의 지적 능력을 대신 확장해주는 존재. 이 경험이 주는 전 율은 소년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ZX 스펙트럼에서 기초를 다진 뒤, 허사비스는보다 강력한 기계로 눈을 돌렸습니다.
커모 도어 아미가(Commodore Amiga). 당시로서는 뛰어난 그래픽과 사운드를 갖춘 16비트 컴퓨터였습니다. 베이직을 넘어 기계어(machine code)까지 독학한 소 년은 이 기계 위에서 자신 의 첫 번째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작성합니다. 열한두 살 무 렵의 일이었습니다.
소년 시절 컴퓨터 여정에서 가장 백미는 보드게임 오셀로(Othello)였습니다. 체스보다 규칙 이 단순하지만, 컴퓨터에게 '제대로 된' 수를 두게 하려면 알고리즘이 필요했습니다. 허사비스는 체스 프로그래밍에서 사용되는 알파-베타 가지치기(alphabeta pruning)와 탐색 트 리(search tree)의 개념을 책에서 찾아 독학했고, 이를 자신 의 오셀로 프로그램에 적용했습니다.
시험 상대는 다섯 살 남동생이었습니다. 결과는 허사비스의 승리, 정확히 말하면 허사비스가 만든 프로그램의 승리였습니다. 중요 한 것은 자신이 작성한 코드 덩어리가 스스로 판세를 읽고, 전략을 세우고, 독자적으로 돌을 놓아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 살아 있지 않은 기계가, 살아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광경. 이것은 소년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이 작은 성공은 허사비스의 머릿속에 하나의 질문을 심었습니다. "지능이란 대체 무 엇인 가? 코드 몇 줄로 흉내 낼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무엇인가?" 이 물음 은 호기심을 넘어 그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탐구 과제가됩니다.
30년 뒤 그는 딥마인드라는 회사를 세우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수백 명의 박사급 연구원들을 모을 것입니다. 홈스쿨링 기간은 허사비스에게 제도권 교육이 주지 못하는 것을 선물했습니다. 시 간을 자 율적으로 운용하는 법. 자신의 호기심을 스스로 충족시키는 법. 실패한 코드 앞에서 좌절 하지 않고 디버깅(debugging)을 반복하는 끈기. 48킬로바이트라는 극히 제한된 메모리 안 에 복잡한 논리를 집어넣어야 하는 환경은 효율에 대한 강박에 가까 운 감각을 심어주었습니다.
이 감각은 훗날 거대한 AI 모델을 설계할 때도 그를 따라 다닙니다. 홈스쿨링이 끝난 뒤, 허사비스는 이스트 핀클리(East Finchley)에 위치한 크라이스 츠 칼리 지(Christ's College, Finchley)로 진학합니다. 그래머스쿨이 아닌 종합학교 (comprehensive school)였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열여섯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A레 벨(A-level) 시험을 마칩 니다. 보통 18세에 치르는 시험을 2년이나 앞당긴 것입니다.
케임브리지 대학은 그에게 입 학을 허가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1년을 기다리라고 권고합니다. 예상치 못 한 공백이 생긴 것입니다. 이 공백이 또 하나의 운명적 전환점이됩니다.
허사비스는 컴퓨터 잡지 '아미가 파 워 (Amiga Power)'에서 "불프로그 프로덕션에서 일할 기회를 잡아라(Win-a-job- at-Bullfrog)"라 는 공모전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우승합니다. A레벨 시험이 끝난 다 음 날, 열일곱 살의 소 년은 불프로그 프로덕션의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갔습니다.
정 식 고용을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려서 급여는 현금으로 받아야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전설적인 게임 디자이너 피 터 몰리뉴(Peter Molyneux)를 만나고, '테마파크 (Theme Park)'의 공동 설계자이자 리드 프로그래머가됩니다. 1994년 출시된 이 게 임은 수백만 장이 팔리며 시뮬레이션 샌드박스 장르 의 고전이되었습니다.
허사비스는 훗날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가 어릴 때 폭넓 게 탐 험하도록 격려하세요. 깊이와 전문성을 장려하되, 다른 모든 것을 희생시키지 마세요.
인 생은 풍요로우니까요. 중요한 것은, 특정한 과목이나 주제를 배우는 것 보 다도, 배우는 법을 배우는 그 자체 능력입니다." 그 시절 거실의 희미한 모니터 불빛 아래서, 허사비스는 체스판 너머의 세계를 발견 했습니 64칸의 격자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코드의 세계로 확장되었고, 그 코드의 세
계는 다 시 지능 그 자체를 향한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홈스쿨링이라는 우회로는 사 실 가장 빠 른 지름길이었습니다. 1970년대 런던 북부의 거리 풍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