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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14장 알파고 제로와 알파제로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인공지능의 아버지
14 알파고 제로와 알파제로
김경란, 김경진
기보 없이 스스로 학습한 알파고 제로 백지 상태에서 3일 만에 알파고를 100대 0으 로 제압 2017년 런던 킹스크로스에 위치한 딥마인드 본사, 데이비드 실버의 모니터에 는 기이한 정 적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불과 1년 전, 서울에서 이세돌 9단과 세기의 대 결을 펼쳤던 알파고 리(AlphaGo Lee)는 수십만 장의 인간 기보를 먹어 치우며 자라 난 거대한 지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실버와 허사비스가 바라보고 있는 새로운 버전, '알파고 제로'의 시작점 은 철 저한 '무(無)'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인간의 도움이 필요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 려 인간의 지식이 인공지능의 한계를 규정짓는 불순물이 될 수 있다는 과감한 가설을 세웠습니다. 허사비스는 이 프로젝트를 승인하며 연구팀에게 단 하나의 데이터도 입력하지 말 것을 지 시했습니다.
알파고 제로에게 주어진 것은 바둑판의 크기와 승리 조건이라는 가장 기초적 인 규칙뿐이었습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바둑을 본 적 없는 어린 아이 가 바둑판 앞에 앉 은 것과 같았습니다. 첫 번째 바둑돌이 놓였습니다.
제멋대로였습니다. 의미 없는 곳에 돌을 놓았고, 스스로 집을 짓다가 허물기도했습니다. 초기 단 계의 알파고 제로는 바둑 초보 자보다도 못한 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무작위로 돌을 놓으며 승패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이 엉성한 신경망이 과연 인류 최강의 기사를 꺾은 선배 모델을 넘어설 수 있을지 의구심 이 들 법도했습니다. 학습이 시작된 지 3시간이 지나자 놀라운 변화가 감지되었습니다. 무작위로 돌을 놓던 시 스템이 점차 돌을 연결하는 법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 수천 년에 걸 쳐 정립한 정 석의 기초를 스스로 발견해낸 것입니다. 36시간이 지났을 때,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알파고 제로가 이세돌 9단을 4대 1로 꺾었던 그 버전의 실력을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식을 전혀 배우 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기 자신과의 싸움만으로 인간계의 정점을 돌파해버린 것입니다. 가장 충격적인 결과는 학습 시작 72시간, 즉 3일 뒤에 나왔습니다. 딥마인드 연구진 은 3일 간 학습한 알파고 제로와 이세돌 버전을 맞붙였습니다.
결과는 참혹할 정도로 일방적이었습니다. 100대 0. 단 한 판도 내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알파고 제로는 이세돌 9단과의 대국을 위해 수개월간 학습하고 튜닝되었던 구버전보다 훨씬 적은 컴퓨팅 파워를 사용했습니다.
구버전이 48개의 TPU를 사용해 분산 처리를 했던 반면, 알파고 제로는 단 4개의 TPU만으로 돌아갔습니다. 더 적은 자원으로, 더 짧은 시간에, 인간의 데이터를 하나도 쓰지 않고도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지능의 독립 선언'과도 같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인공지능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데이터의 패턴을 모방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챗GPT와 같은 언어 모델도 결국 인터넷상의 텍스트를 학습합니다. 하지만 알파고 제로는 인간의 경험 세계 밖으로 나갔습니다.
허사비스는 이를 두고 "우리는 인간 지식의 한계에 갇혀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인간의 기보를 학습시킨다는 것은 곧 인간이 저지르는 실수와 편견까지도 학습시 킨다는 뜻이었습니다. 인간의 데이터를 버림으로써, 알파고 제로는 인간이 도달하지 못한 진리, 혹은 '바둑의 신'이 두는 수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3일이라는 시간은 상징적이었습니다. 인류가 바둑이라는 게임을 발명하고 3천 년 동안 쌓 아 올린 지혜의 탑을, 실리콘 칩 속의 알고리즘은 단 72시간 만에 재건하고 초 월해버렸습니다. 이는 허사비스가 꿈꾸던 AGI로 가는 길에 중요한 이정표가되었습니다.
인간의 데이터가 부족하거나 아예 없는 영역, 예를 들어 새로운 소재를 발견하 거나 난치병의 단백질 구조를 파악하는 영역에서도 AI가 스스로 해법을 찾을 수 있다 는 가능성을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100대 0이라는 스코어보드는, 지능의 패러다임이 '모방'에서 '발견'으로 전환되었 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자기 대국(Self-play)만으로 초인적 수준 달성의 의미 알파고 제로의 성취를 설명 하는 핵심 키워드는 '자기 대국(Self-play)'입니다.
외로운 수행자 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과 끊임없이 검을 맞추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머신 러닝 방식인
지도 학습(Supervised Learning)은 선생님이 학생에게 정답을 알려주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는 여기에 두는 것이 좋아"라고 인간 고수의 기보가 가르쳐주는 셈입니다. 하지만 자기 대국은 다릅니다. 선생님도 없고 교과서도 없습니다.
오직 승리라는 목 표만 존재할 뿐입니다. 강화학습(Reinforcement Learning)의 정수를 보여준 이 과정은 잔혹하리만큼 단순합니다. A 알파고가 검은 돌을 쥐고, 복제된 B 알파고가 흰 돌을 쥡니다. 둘은 치열하 게 싸웁니다. 승패가 결정되면 이긴 쪽의 전략은 강화되고, 진 쪽의 전략은 수정됩니다.
조금 더 똑똑해 진 알파고는 다시 자신과 대국을 벌입니다. 이 과정이 수백만 번, 수천만 번 반 복됩니다. 어 제의 나를 이긴 오늘의 나, 그리고 그 나를 이길 내일의 나가 끊임없이 경쟁하며 나선형으 로 실력을 끌어올립니다. 이 방식이 갖는 철학적 의미는 심장합니다.
허사비스는 이를 "타불라 라사(Tabula Rasa)", 즉 빈 서판에서의 학습이라고 불렀습니다. 존 로크가 인간의 마음은 태어날 때 백지와 같 다고 주장했듯, 알파고 제로도 백지 상태에서 출발했습니다. 이는 AI가 인간의 관습이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독창적인 전략을 수립할 수 있게했습니다.
알파고 제로는 학습 과정에서 인간이 정석이라고 믿었던 수들을 발견하기도 했지 만, 일정 수준을 넘어서자 그 정석들을 폐기하고 전혀 새로운 수들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 수 천 년간 "그건 악수(惡手)야"라고 규정했던 수들이 사실은 더 높은 차원 의 묘수였음을 증 명해 낸 것입니다. 기술적으로 볼 때, 알파고 제로는 두 개의 신경망을 하나로 합치는 혁신을 이루었습니다.
이전 버전은 다음 수를 예측하는 '정책망(Policy Network)'과 현재 판세를 읽는 '가치망 (Value Network)'을 따로 훈련시켰습니다. 하지만 알파고 제로는 이 둘을 하나의 거대한 신경망으로 통합했습니다. 이는 마치 직관 과 수읽기가 분리되지 않고 동시에 일어나는 인간 고수의 뇌 작동 방식과 유사했습니다.
한 번의 사고 과정으로 어디에 둘지와 내가 얼마나 유리한지를 동시에 판단함 으로써 효율 성을 극대화했습니다.
몬테카를로 트리 탐색(MCTS)이라는 탐색 알고리즘도 신경망과 더 긴밀하게 결합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무작위 시뮬레이션을 많이 돌려보는 것이 중요했다면, 알파고 제로는 신경 망의 직관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굳이 끝까지 두어보지 않아도 승패를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인간 기사가 "딱 보니 여기가 급소네"라고 느끼는 감각을 수학적으로 구현한 것 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자기 대국을 통한 초인적 수준의 달성은 단순히 바둑을 잘 두는 기계가 나왔다는 것 이상 의 충격을 과학계에 던졌습니다. 그것은 '데이터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빅데이터 시대에 데이터는 원유와 같다고했습니다.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기업들이 데 이터를 독점하는 것이 권력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알파고 제로는 데이터가 없는 곳에서 도 지능이 폭발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규칙만 명확하다면, AI는 스스로 데이터를 생성하고 그 데이터로 자신을 학습시켜 인간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과학 문제들, 예를 들어 신약 개발이나 핵융합 제어와 같은 분야에 희망적인 메시지였습니다. 이런 분야는 양질의 데이터가 부족하거나 실 험 비용이 매우 비쌉니다. AI가 가상 환경에서 자기 시뮬레이션만으로 최적의 분자 구 조나 플라즈마 제어법을 찾을 수 있다면, 과학의 발전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알파고 제로의 자기 대국은 바둑판 위에서 벌어진 일이었지 만, 그 울림은 실험실과 연구소를 넘어 인류 지성의 확장 가능성을 타진하는 거대한 실험이었습니다.
알파제로 하나의 시스템으로 여러 영역을 마스터 2017년 말, 딥마인드 연구실의 분위기는 또다시 고요한 흥분으로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알 파고 제로가 바둑을 정복 한 직후, 허사비스와 데이비드 실버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 "이 알고리즘이 바둑 에만 특화된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건 진정한 의미의 지 능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지능은 범용성(Generality)을 가져야합니다. 하나의 원리로 여 러 문제를 해 결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들은 알파고 제로의 알고리즘에서 '바둑'이라는 특 수성을 걷어내기 시작했습니다.
바둑판의 회전 대칭성이나 바둑 특유의 규칙들을 코드에서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빈자리에 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학습 구조를 채워 넣었습 니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알파제로(AlphaZero)'였습니다.
이번 도전 과제는 보드게임의 삼대장이라 불리는 바둑, 체스, 그리고 일본 장기인 쇼기였습니다. 이 세 게임은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바둑은 돌을 놓는 게임이고, 체 스와 쇼기는 기물을 움직이는 게임입니다. 쇼기는 잡은 말을 다시 사용할 수 있어 경 우의 수가 체스보 다 복잡합니다.
과거의 AI들은 각 게임에 맞는 별도의 튜닝과 알고리즘이 필요했습니다. 체스 엔진 에는 체 스 특화 지식이, 바둑 프로그램에는 바둑의 집 계산법이 들어가야했습니다. 하지만 알파제로는 단 하나의 알고리즘, 단 하나의 신경망 구조로 이 세 가지를 모두 공략하겠다고 선 언했습니다.
실험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과는 경이로움을 넘어 공포스럽기까지했습니다. 알파제 로는 백지 상태에서 학습을 시작한 지 단 4시간 만에, 당시 세계 최고의 체스 엔진이 었던 '스톡피 시(Stock sh)'를 넘어섰습니다.
스톡피시는 수십 년간 인간 개발자들이 체스의 모든 지식을 코드로 정교하게 다듬어 만든, 말 그대로 '체스 기계'였습니다. 초당 7천만 개의 수를 계산하는 스톡피시를 상대로, 알파제로는 초당 8만 개의 수 밖에 계 산하지 않았음에도 승리했습니다. 무식한 계산력(Brute-force)이 아니라, 직 관과 전략적 판 단력으로 압도한 것입니다.
쇼기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계 챔피 언 프로그램 '엘모 (Elmo)'를 2시간 만에 제압했습니다. 바둑에서는 전작인 알파고 제 로를 8시간 만에 추월했습니다.
24시간도 채 되지 않아, 인류가 만든 가장 복잡한 보드게임 세 가지가 하나의 알고리즘에 의해 정복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공지능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로 기 록될 만했습니다. 특정 문제에 맞춰 인간이 수작업으로 특징을 설계(Feature Engineering)해주지 않 아도, AI가 범용적인 학습 능력만으로 해당 도메인의 최고수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허 사비스는 이를 두고 "하나의 알고리즘으로 서로 다른 우주를 여행하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바둑이라는 우주, 체스라는 우주, 쇼기라는 우주에서 알 파제로는 각각의 물리 법칙을 스스로 깨닫고 그 세계의 지배자가되었습니다. 전설적인 체스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는 알파제로의 기보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 했습니 "우리는 기계가 두는 체스는 계산적이고 딱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 파제로 는 마치 외계인이 두는 것처럼 창의적이고, 때로는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알
파제로는 기 물의 점수를 중시하는 기존 엔진들과 달리, 장기적인 위치적 우위를 위해 기물을 과감히 희생하는 플레이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인간의 직관과 기계의 정밀 함이 결합된, 혹은 그 둘을 모두 초월한 새로운 형태의 지능이었습니다. 알파제로는 단순히 게임을 이긴 것이 아 니라, 게임을 하는 '방법'을 새로 썼습니다.
AGI를 위한 검증대(Test-bed)였다. 세상은 알파고와 알파제로의 승리에 환호했지 만, 데미스 허사비스의 시선은 바둑판 너머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언론 인터뷰나 강 연에서 그는 지겨울 정도로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게임을 잘하는 AI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게임은 단지 검증대 (Test-bed) 일 뿐입니다." 이 말은 딥마인드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문장입니다. 왜 하필 게임이 었을까요? 허사비스에게 게임은 현실 세계의 축소판이자, 가장 안 전하고 효율적인 실험실이었습니다.
현실 세계는 너무나 복잡하고 노이즈가 많습니다. 결과를 측정하기 어렵고, 실험을 무한정 반복할 수도 없습니다. 로봇을 학습시키기 위해 현실에서 넘어지게 하면 로봇 이 부서집니 기후 모델을 테스트하기 위해 지구를 망가뜨릴 수는 없습니다.
게임은 규칙이 명확하고, 승패라는 목표가 뚜렷하며, 무엇보다 가상 공간에서 무한 히 빠르 게 시뮬레이션할 수 있습니다. 허사비스는 어린 시절 체스 챔피언이자 비디오 게임 개발자 였던 자신의 경험을 통해, 게임이 지능을 측정하고 훈련하기에 최적의 도 구임을 본능적으 로 알고 있었습니다. 알파제로는 이 '검증대' 이론을 완벽하게 입증했습니다.
바둑, 체스, 쇼기는 서로 다 른 규칙을 가진 복잡한 시스템입니다. 만약 하나의 알고리즘이 이 상이한 시스템들을 모두 해석하 고 최적의 해법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알고리즘은 게임이 아닌 다른 복잡 한 시스템에도 적 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AGI로 가는 핵심 열쇠입니다.
허사비스는 알파제로가 보여 준 '범용 학습 능력'이 단백질 접힘(Protein Folding)이나 신 소재 발견과 같은 과학적 난제에 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알파제로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후, 딥마인드의 핵심 인력들은 대거 과 학 프로 젝트로 이동했습니다.
바둑판의 패턴을 읽던 신경망은 이제 아미노산의 서열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체스 말의 움 직임을 예측하던 탐색 알고리즘은 단백질이 3차원 공간에서 어떻게 접힐지를 시뮬레이션 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알파고와 알파제로가 없었다면, 노벨상을 안겨준 '알파폴드'의 탄생은 불가능했을 것입니 게임에서 축적된 강화학습과 몬테카를로 트리 탐색 기술, 그리고 무엇보다 "인 간의 지 식 없이도 가능하다"는 자신감이 과학 분야로 전이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파고를 '바둑 두는 기계'로 기억할 때, 허사비스는 그것을 '범용 문 제 해결 기계'의 프로토타입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딥마인드의 미션을 "지능을 푼다 (Solve Intelligence)"라고 정의했고, 알파제로는 그 미션의 첫 번째 단계인 '범용 알고리즘'이 가능 하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증명해 보였습니다. 게임은 끝났습니다.
하지 만 그 게임을 통해 단련된 지능은 이제 현실 세계의 진짜 문제들과 싸우기 위해 실험실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뮤제로(MuZero): 규칙조차 스스로 학습하는 AI 환경 모델을 스스로 구축하는 계 획 기반 학습 알파고 제로와 알파제로는 놀라운 성취를 이루었지만, 여전히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습니 바로 '규칙을 알고 있다'는 전제였습니다. 바둑, 체스, 쇼기는 게임의 룰이 완벽하게 정 의되어 있습니다.
돌을 어디에 놓을 수 있고, 말은 어떻게 움직이는 지 AI에게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이를 '완전 정보 게임(Perfect Information Game)'이라고합니다. 하지만 허사비스가 바라보는 현실 세계는 다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규칙 설 명서를 받지 못합니다.
주식 시장의 변동, 날씨의 변화, 인간관계의 역학 등은 명확한 룰북이 없습니다. 룰을 모르는 상태에서도 학습하고 계획을 세울 수 있어야 진정한 AGI입니다. 2019년, 딥마인드는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뮤제로(MuZero)'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뮤 제로의 가장 큰 특징은 게임의 규칙조차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 둑판을 보여주지 만, 돌을 어떻게 놓아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이기는지, 심지어 이게 바둑인지 체스인지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뮤제로는 스크린에 비치는 픽셀(Pixel) 정보 만을 보고 스스로 세상의 작동 원리를 깨우쳐야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뮤제로가 '모델 기반 강화학습(Model-Based Reinforcement Learning)'의 새 지평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AI는 눈앞의 화면을 보고 바로 행동을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뮤제로는 인간처럼 '상상'을합니다.
인간 이 낯선 곳에 갔을 때, 모든 물리 법칙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대신 "내가 이쪽으로 가 면 길이 나오겠지?", "비가 오면 땅 이 미끄럽겠지?"라고 머릿속으로 간소화된 모델을 돌려봅니다. 뮤제로도 마찬가지입니 환경의 모든 복잡한 정보를 다 처리하는 대신, 의 사결정에 필요한 핵심 요소만을 추상 화하여 자신만의 '내부 모델(Internal Model)'을 만듭니다. 이 내부 모델 안에서 뮤제로는 세 가지를 스스로 묻고 답합니다.
첫째, "현재 상태는 어떠한가?"(State). 둘째, "내가 어떤 행동을 하면 상태가 어떻게 변할까?"(Dynamics). 셋째, "그 상태는 나에게 얼마나 좋은가?"(Value). 놀라운 점은 뮤제로가 학습한 이 내부 모델이 실제 게임의 규칙과 정확히 일치할 필 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타리(Atari) 게임을 할 때 배경의 구름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는 점수와 상관이 없습니다. 뮤제로는 점수를 얻는 데 중요한 '캐릭터의 위치'나 '장애물' 같은 정보에만 집중하 고 나머 지는 무시합니다.
인간이 세상을 인지할 때 불필요한 정보를 걸러내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규칙을 학습한 뮤제로는 바둑, 체스, 쇼기뿐만 아니라 57종의 아타리 비디 오 게임에서도 초인적인 성능을 발휘했습니다. 특히 전략적 계획이 필요한 보 드게임과 시 각적 반응이 중요한 비디오 게임을 하나의 알고리즘으로 모두 정복했다 는 것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계획(Planning)'을 잘하는 알고리즘(알파고 계열)과 '반응(Reacting)'을 잘하는 알고리즘(DQN 계열)이 나뉘어 있었는데, 뮤제로는 이 둘을 통합해낸 것입니다. 규칙을 모 르는 혼돈 속에서도 질서를 찾아내고 미래를 시뮬레이션하는 능력, 이 것이야말로 야생의 환경에서 생존해야 하는 지능의 본질에 가장 근접한 형태였습니다.
Nature 논문 발표와 범용 학습의 새 지평 2020년 12월, 세계적인 과학 저널 《네이 처(Nature)》에 뮤제로에 관한 논문이 게재되었습니다. 제목은 《모델 없는 계획의 학습을 통한 범용적 알고리즘(Mastering Atari, Go, Chess and Shogi by Planning with a Learned Model)》. 이 논문은 인공지능 연구자들 사이에서 "강 화학습의 성배 (Holy Grail)를 찾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논문이 갖는 의미는 AI가 '현실 세계(Real World)'에 적용될 수 있는 가장 강력 한 도구가되었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허사비스는 항상 "현실은 게임보다 훨씬 지저분 하다(messy)" 고 말해왔습니다. 유튜브 비디오의 압축 알고리즘을 최적화하는 문제 나, 자율주행차가 복 잡한 교차로를 통과하는 문제는 바둑처럼 명확한 규칙이 없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환경 속에서 규칙을 유추하고, 그 안에서 최선의 경로를 계획해 야합니다.
뮤제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구글은 뮤제로의 알고리즘을 유튜브 의 비디 오 전송 시스템에 적용했습니다. 네트워크 상황이 불안정한 현실 인터넷 환경 에서, 뮤제로 는 룰을 배우지 않고도 스스로 트래픽을 최적화하여 비디오 화질을 개선 하고 버퍼링을 줄 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게임을 위해 개발된 AI가 실제 산업 현장의 불확실성을 통제하는 데 쓰인 첫 번째 메이저 사례 중 하나였습니다. 뮤제로는 '표현 학습(Representation Learning)'의 진화를 보여주었습니다. 인간이 사과를 볼 때 사과의 분자 구조를 보지 않고 '빨갛고 둥근 과일'이라는 개념으로 인식 하듯이, 뮤제로 도 입력된 데이터(픽셀)를 그대로 쓰지 않고 의사결정에 유용한 '잠재 상태(Hidden State)'로 변환해 저장했습니다.
이는 AI가 인간처럼 추상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허사비스에게 뮤제로는 알파고 시리즈의 완결판이자,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알파고가 ' 직관'을 보여줬고, 알파고 제로가 '독창성'을 보여줬고, 알파제로는 '범용성'을 보 여줬다면, 뮤제로는 '적응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떤 낯선 환경에 던져놔도 스스로 규 칙을 학습하고 살아남아 목표를 달성하는 AI. 이것은 딥마인드가 추구해 온 "지능을 푼다"는 미션에서 '지 능의 핵심 메커니즘'을 규명해 낸 순간이었습니다. 뮤제로의 성공은 딥마인드의 행보에 큰 자신감을 불어넣었습니다. 이제 단백질 구 조 예측, 기후 변화 예측, 핵융합 제어, 그리고 수학적 난제 해결까지. 규칙을 알 수 없
는 미지의 영 역, 즉 '자연(Nature)'이라는 거대한 게임판으로 나아갈 준비를 마친 것입니다. 뮤제로는 게임 오버(Game Over)가 아니라, 사이언스 스타트(Science Start)를 알리 는 신호 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2024년 노벨상이라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AI와 체스, 알파제로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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