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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17장 아시아의 긴축
2026년 미국 이란 전쟁과 전 세계의 에너지 위기
17장 아시아의 긴축
김경진
제17장 아시아의 긴축
17.1 태국 —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라, 에어컨은 27도, 반팔 셔츠를 입어라
2026년 3월 6일, 태국 관보(Royal Thai Government Gazette)에 총리령 제2/2026호가 실렸습니다. 아누틴 찬위라쿤(Anutin Charnvirakul) 총리가 서명한 이 문서는 휘발유, 가소홀(Gasohol, 에탄올 혼합 휘발유), 경유, 항공유, 그리고 액화석유가스(LPG)의 수출을 즉시 전면 금지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라오스와 미얀마 방면의 소량 반출만 예외로 허용되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엿새 만이었습니다.
이 총리령의 법적 근거는 1973년에 제정된 연료 비상대책 칙령(Fuel Emergency Decree)이었습니다. 53년 전 제1차 오일쇼크 때 만들어진 법입니다. 이 칙령 아래서 총리는 모든 종류의 연료에 대해 생산, 판매, 수송, 비축, 수출입을 직접 통제할 수 있습니다. 전기와 에너지 소비 활동 전반도 규제 범위 안에 들어갑니다. 공장 가동 시간을 제한하고, 극장과 유흥시설의 영업 시간을 줄이고, 차량 운행을 제한하고, 건물의 전력 사용과 광고 조명까지 통제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반세기 넘게 잠자던 법이 다시 먼지를 털고 나온 것입니다.
태국이 이토록 빠르게 움직인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 나라의 에너지 구조는 아시아에서 가장 취약한 축에 속합니다. 원유의 90%를 수입하고, 그 가운데 절반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합니다. 전체 전력 생산의 55% 이상이 천연가스 발전인데, 자국 에라완(Erawan) 가스전의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부족분을 수입 LNG(액화천연가스)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S&P 글로벌의 데이터에 따르면, 2025년 태국은 중동에서 하루 약 49만 1,500배럴의 원유와 콘덴세이트(Condensate, 초경질 원유)를 수입했습니다. 2026년 3월 2일 기준으로 중동이 태국 원유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1%를 넘었습니다.
태국 에너지부가 파악한 3월 1일 기준 국내 석유 비축량은 48억 7,700만 리터, 약 38일 치였습니다. 이미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운송 중인 물량 16억 6,600만 리터와 다른 경로의 물량 11억 1,700만 리터를 합치면 22일 치를 더 보탤 수 있었습니다. 합산 60일 치. 일본의 254일, 한국의 208일에 비하면 숨이 막히는 숫자였습니다.
정부는 수출 금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에너지 절감 조치가 곧바로 뒤따랐습니다. 공무원과 공공기관 직원에게 재택근무를 지시하고, 공무 출장을 금지했습니다. 에너지부는 관공서와 대형 상업시설의 에어컨 온도를 26~27도 이상으로 올리라는 지침을 내렸습니다. 연중 섭씨 35도를 오르내리는 열대 국가에서, 에어컨 온도를 4도 올리는 것은 수치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방콕의 마천루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하루 여덟 시간을 땀에 젖은 채 보내라는 뜻이었습니다.
복장 규제 완화도 이어졌습니다. 공무원은 물론 민간 기업 직원들에게도 넥타이와 정장 재킷 착용을 자제하고 반팔 셔츠와 가벼운 차림을 권고했습니다. 3층 이하는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라는 지침도 하달되었습니다. 전력 소비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권고였지, 법적 강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에너지부 장관 앗타폰 렉키프라쿤(Auttapol Rerkpiboon)이 직접 에너지 비상상황 모니터링 센터의 가동을 명령하고, 모든 유관 기관에 시장 영향과 비축 수준과 가격 동향을 실시간으로 평가하라고 지시한 상황에서, 권고와 명령의 경계는 희미했습니다.
그 사이 태국 석유기금(Oil Fuel Fund)은 빠르게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이 기금은 역대 태국 정부가 국제 유가가 오를 때마다 국내 소매가를 인위적으로 누르는 데 써온 완충 장치입니다. 3월 22일 기준 기금 적자는 281억 900만 바트(약 1조 원)에 달했습니다. 3월 24일 기준 고속 경유에 대한 보조금은 리터당 26.99바트. 전날보다 2.9바트가 오른 수치였습니다. 하루에 25억 9,000만 바트, 우리 돈으로 약 920억 원이 기금에서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3월 15일과 16일, 에너지부가 전국 약 1,500개 주유소를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결과는 예상보다 심각했습니다. 10%가 연료 부족으로 영업을 중단한 상태였고, 70% 가까이가 특정 유종이 바닥나거나 재고가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동북부의 교통 중심지 코랏(Korat, 나콘라차시마)에서는 주유소마다 긴 줄이 늘어섰습니다. 서부 딱(Tak) 주의 매솟(Mae Sot) 지역에서는 3킬로미터 대기 행렬이 보고되었습니다. 수판부리(Suphan Buri), 나콘사완(Nakhon Sawan) 같은 지방 도시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이어졌습니다.
3월 26일, 특별 각의가 열렸습니다. 태국 정부는 7개 긴급 조치를 승인했습니다. 소비세 인하 검토, 취약 계층 복지카드 한도 상향(월 300바트에서 400바트로), 운수업 지원, 농민 비료 보조 확대가 포함되었습니다. 같은 날 정부는 리터당 6바트의 연료 가격 인상을 단행했습니다. 주유소에 "600바트 이하"라고 쓴 안내문이 붙었습니다. 부총리 겸 재무장관 에크닛 니티탄프라파(Ekniti Nitithanprapas)는 "연료 가격이 실제 원가를 반영해야 한다"고 못박았습니다. 가격을 왜곡하면 경제 전체에 비효율을 만들고 공적 자원을 낭비한다는 논리였습니다.
태국의 상징적인 쇼핑몰들, 아이콘시암(ICONSIAM)과 센트럴월드 같은 곳에서 조명이 절반으로 줄어들고 에스컬레이터 가동이 최소화되었습니다. 관광업이 GDP의 20% 가까이를 차지하는 나라에서, 어둡고 더운 쇼핑몰은 그 자체로 경제적 타격이었습니다. 치앙마이에서는 주유소들이 하루 경유 입고량 1만 리터도 확보하지 못해 몇 시간 만에 재고가 바닥났습니다. 남부 송클라(Songkhla) 주의 한 주유소에는 "경유 소진"과 "일시 급유 중단"이라는 안내문이 나란히 걸렸습니다.
태국 석유화학 기업 라용올레핀(Rayong Olefins)은 시암시멘트그룹(SCG)의 자회사입니다. 3월 중순 이 회사는 공장 가동을 중단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나프타와 프로판 같은 핵심 원료를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불가항력(Force Majeure) 선언이었습니다. 계약 이행이 불가능하다는 공식 통보. 이 한 장의 문서가 태국 석유화학 산업의 연쇄 마비를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카세사트대학교(Kasetsart University)가 주최한 온라인 포럼 "중동 분쟁 속 태국의 생존 전략"에서 재무부 재정정책실 소속 거시경제 전문가 위파랏 판피엠랏(Wiparat Panpiemras)은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중동 위기가 에너지 가격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금속, 농산물, 축산물, 비료, 플라스틱 같은 석유 정제 부산물의 가격까지 끌어올리고 있다고. 글로벌 금융시장의 환율, 주식, 채권에 변동을 일으키고, 생산 요소 부족으로 글로벌 공급망 자체에 교란을 만들고 있다고.
태국이라는 나라의 구조가 한눈에 드러나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부총리 겸 에너지장관 피팟 랏차킷프라칸(Phiphat Ratchakitprakarn)이 텔레비전 생방송 인터뷰에서 시인한 사실입니다. 태국의 석유 운송 트럭에는 GPS 장치가 달려 있습니다. 정부는 이것을 공급망 관리의 증거로 내세워 왔습니다. 그런데 그 GPS가 측정한 것은 트럭의 주행 속도뿐이었습니다. 트럭이 어디로 가는지, 어떤 경로를 타는지, 최종 하역 지점이 어디인지는 추적한 적이 없었습니다. 목적지 모니터링을 시작한 것은 부총리 인터뷰 하루 전, 위기가 시작된 지 몇 주가 지난 뒤였습니다. 석유 거래상들에 대한 재고와 이동 경로의 일일 보고 의무도 같은 시점에야 도입되었습니다.
정부가 공급망의 마지막 구간을 추적하지 못한다면, 수요 급증이 실제 소비 때문인지, 최종 사용자의 사재기 때문인지, 중간 유통업자의 조직적 전용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태국의 6개 정유소는 위기 내내 완전 가동 중이었습니다. 석유 공급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압력이 가장 높은 지점에서 정확히 사각지대를 가지고 있는 제도적 구조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각지대를 장관 본인이 생방송에서 확인해준 것입니다.
태국은 이미 "아시아의 환자(Sick Man of Asia)"라는 별명을 떨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2026년 경제 성장률 전망은 겨우 2%. 중국발 수요 둔화, 글로벌 무역 긴장, 극단적 수준의 가계 부채, 불평등, 정치적 불안정 위에 에너지 위기가 덮쳤습니다. 수출이 GDP의 70%에 달하고, 무역 총액(수출+수입)이 GDP의 120%를 넘는 나라. 관광업이 GDP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나라. 연료 가격 상승과 글로벌 불안정에 가장 먼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3월 말, 이란이 태국 선적에 대해 호르무즈 해협 통과를 허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중국, 러시아, 인도, 파키스탄, 말레이시아와 함께 통과 허용 목록에 이름을 올린 것입니다. 그러나 해협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과 유가가 내려간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3월 24일 브렌트유가 배럴당 98.28달러로 5% 이상 하락한 날이 있었습니다. 미국이 이란에 종전안을 보냈다는 보도가 나온 직후였습니다. 분석가들은 낙관을 경계했습니다. 중동의 갈등이 진정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공급 위험은 시장 위에 계속 드리워질 것이라고.
17.2 한국 — 샤워를 짧게, 낮에 충전하라, 나프타 수출 금지
2026년 3월 3일 월요일, 한국 증시가 열렸습니다. 코스피(KOSPI)가 하루 만에 12% 폭락했습니다. 역대 최악의 낙폭이었습니다. 서킷브레이커(Circuit Breaker, 주가 급변 시 거래를 일시 중단하는 장치)가 발동되었습니다. 같은 주 목요일에 10% 반등한 뒤, 금요일과 월요일에 다시 하락했습니다. 4거래일 동안 선물 시장에서 여러 차례 거래 제한 장치가 작동했고, 서킷브레이커가 두 번 발동되었습니다. 원-달러 환율은 3월 3일 장중 1,506.37원을 찍었습니다. 2009년 이후 가장 약한 수준이었습니다.
숫자들이 한국의 취약성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 약 94%. 원유 수입의 70%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합니다. LNG 수입의 25%가 같은 경로입니다. 한국경제연구원(KEI)의 분석에 따르면, 석유는 한국의 총 에너지 수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그 용도는 대부분 "비에너지용(Non-energy Use)"입니다. 반도체 같은 첨단 제품 제조에 쓰이는 원료로서의 석유. 교통 연료는 그다음입니다. 에너지 비용 상승과 첨단 기술 제품의 산업 투입물 변동이 결합되면, 갈등이 지속되는 한 한국과 세계 경제에 파급 효과를 만들 잠재력이 있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긴급 경제 점검 회의를 열었습니다. 3월 9일 대국민 브리핑에서 대통령은 중동 위기가 무역과 에너지 수입에 크게 의존하는 한국 경제에 "상당한 부담"을 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금융 및 외환 시장의 변동성 확대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연료 가격 상한제를 "신속히 도입"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30년 만에 처음이었습니다.
한국석유공사(KNOC) 데이터와 S&P 글로벌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은 정부 관리 비축유 1억 100만 배럴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쿠웨이트 원유 400만 배럴, 아부다비국영석유회사(ADNOC) 원유 400만 배럴 등 합동 비축분 약 1,000만 배럴이 더해집니다. 3월 11일, 국제에너지기구(IEA)의 4억 배럴 방출 결정에 동참하여 한국은 2,246만 배럴을 방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입니다. 방출 후에도 정부 비축유 7,764만 배럴이 남는 계산이었습니다.
비축유는 시간을 벌어줍니다. 그러나 비축유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나프타(Naphtha)입니다.
나프타는 원유를 정제할 때 나오는 경질 유분(輕質油分)으로, 석유화학 산업의 기초 원료입니다. 울산, 여수, 대산의 나프타 분해시설(NCC, Naphtha Cracking Center)이 이것을 열분해해서 에틸렌, 프로필렌, 부타디엔 같은 기초 화학물질을 만들고, 이것이 다시 플라스틱, 합성섬유, 합성고무, 비닐, 합성수지가 됩니다. 쓰레기봉투부터 라면 포장지, 세탁기 부품, 반도체 세정제까지. 한국은 나프타 수요의 약 45%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 수입분의 77%가 중동에서 왔습니다.
호르무즈 해협이 닫히자 물류가 끊겼습니다. 통상 한국의 NCC들은 1월 이후 재고를 보충하기 시작하는데, 지정학적 긴장이 확대되면서 선적 자체가 중단되었습니다. 대부분의 NCC가 기존 재고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은 약 한 달 반이었습니다. 한 대형 한국 석유화학 업체 관계자의 말이 업계 매체에 실렸습니다. "조업을 축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블룸버그 통신은 "석유 위기가 한국의 쓰레기봉투와 라면 공급을 위협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한국 1위 석유화학 기업 LG화학이 3개 NCC 중 하나의 가동을 일시 중단한다고 발표한 직후였습니다. 여천NCC(Yeochun NCC)는 불가항력을 선언했습니다. 중동 긴장 고조로 원료 확보가 어려워져 모든 시설을 최소 가동률로 운전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국민을 향한 에너지 절약 캠페인도 동시에 시작되었습니다. CNN이 보도한 내용입니다. 한국 정부는 국민에게 "샤워를 짧게 하라"고 권고하고, "낮 시간에 휴대전화를 충전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전력 피크 시간을 피해 태양광 발전량이 최대치에 달하는 시간대에 전기 기기를 충전하면, 가스와 석탄 발전소의 부하를 줄일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공공 부문 차량 5부제(번호판 끝자리에 따라 5일 중 하루 운행 제한)도 시행되었습니다. 석탄화력발전소의 환경 규제 한도가 완화되어 최대 출력으로 가동되기 시작했습니다.
3월 27일,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정부서울청사에서 합동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정부는 경제 전시 상황에 준하는 엄중한 인식 아래, 최악의 시나리오에도 대비하며 비상 대응에 총력을 기울이겠습니다." 그가 발표한 조치는 이랬습니다. 나프타 수출 통제를 금요일부터 시행합니다. 요소(Urea)와 요소수(Urea Solution, 디젤 차량의 배출가스 저감에 필수적인 액체)의 사재기를 같은 날부터 금지합니다. 불법 부당행위 단속을 강화하고 수입을 확대합니다.
산업통상자원부 산업정책관 박동일은 기업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프타 수출은 정부 차원에서 금지되었으며, 석유화학 제품에 대해서도 매우 심각하게 검토 중입니다." 정유사들이 생산한 나프타를 수출 대신 국내 시장으로 돌리도록 강제하고, 나프타의 생산과 배분에 대해 정부가 지시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한 것입니다. 에너지부 데이터에 따르면 한국은 국내 생산 나프타의 약 11%를 수출하고 있었고, 이 물량이 국내 사용자에게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금지 기간은 5개월. 의료, 핵심 산업, 필수 소비재에 우선 공급이 보장되었습니다.
구 부총리는 2단계 대응도 예고했습니다. 4월에 약 25조 원 규모의 "전쟁 추가경정예산(War Supplementary Budget)"을 초과 세수를 재원으로 신속히 편성하겠다고. 3단계에서는 상황이 5월 넘어 장기화될 경우 추가 경제 안정화 대책을 선제적으로 준비하여 즉시 시행하겠다고. 재정, 세제, 금융 규제 조치를 포함한 모든 정책 수단을 총동원하고, 시나리오별 대응 계획에 따라 3단계로 나누어 가장 효과적인 정책 조합을 구사하겠다고.
같은 날 이재명 대통령은 충남 서산의 한국석유공사 비축기지를 방문하여 LG화학, 롯데케미칼, 한화토탈에너지스, 현대케미칼 대표들과 현장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LG화학 CEO는 러시아산 나프타 구매와 결제를 지원해준 정부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한국은 2022년 이후 러시아산 석유 거래를 중단했었습니다. 위기 앞에서 그 원칙이 수정되고 있었습니다.
KEI의 분석은 이 위기의 파급 범위를 냉정하게 정리했습니다. 유가 급등과 공급망 부족의 회복에는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립니다. 에너지 너머의 영향은 다방면에 걸칩니다. 유가 급등과 공급망 부족에서 오는 경제적 충격, 원화와 코스피에 대한 단기 압력, 중동에 투입된 수십억 달러 규모의 한국 건설 투자 지연 위험, 그리고 한미 동맹에 대한 불필요한 압박. 2026년 성장률은 기존 2%에서 1.9%로 소폭 하향 조정되었습니다. 숫자로는 0.1%포인트에 불과했지만, 그 뒤에 숨은 산업 현장의 마비는 숫자가 담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17.3 일본 — 역대 최대 비축유 방출, 화장지 사재기 자제 당부
3월 11일, 다카이치 사나에(Sanae Takaichi) 일본 총리가 발표했습니다. 전략비축유 8,000만 배럴을 방출하겠다고. 1978년 비축유 제도가 만들어진 이래 최대 규모였습니다. IEA의 공조 결정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독자적으로 먼저 움직였습니다. 3월 16일, 실제 방출이 시작되었습니다. 민간 의무 비축분에서 15일 치, 국가 비축분에서 30일 치. 합산 45일 치의 국내 석유 수요에 해당하는 물량이었습니다.
일본이 이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하나의 숫자가 있었습니다. 95.1%. 2026년 1월 기준 일본 원유 수입에서 중동이 차지하는 비율입니다. 경제산업성(METI)의 공식 데이터입니다. 호르무즈 해협을 경유하는 비율은 약 73.7%. 러시아 원유 수입을 줄이면서 중동 의존도는 오히려 96%까지 올라갔습니다. 이 경로가 차단되면 일본의 에너지 생명선이 끊기는 것입니다.
일본의 비축유 규모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CSIS(전략국제문제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약 4억 7,000만 배럴. 국가 비축 146일 치, 민간 의무 비축 101일 치, 중동 산유국과의 합동 비축 7일 치. 합산 254일 치. LNG 재고도 약 400만 톤, 총 소비량의 약 3주 치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든든한 방패였습니다.
그러나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이 3월 14~15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90%가 이 갈등이 일본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다소" 또는 "크게" 불안하다고 답했습니다. 방패가 있어도 공포는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공포가 만들어낸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화장지 진열대였습니다. 1973년 제1차 오일쇼크 때 일본에서는 석유 부족으로 화장지 생산이 중단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전국적인 사재기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마트 앞에 줄을 서서 화장지를 사재기하는 사진은 일본인들의 집단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2026년 3월, 그 기억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습니다. SNS에서 화장지와 생필품 부족 가능성에 대한 추측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제조업 단체들이 즉각 진화에 나섰습니다. 일본의 화장지는 거의 전량 국내에서 생산되며 중동 공급망 교란에 취약하지 않다고. 정부도 같은 메시지를 반복했습니다. "필요에 따라 구매하시고, 공포에 따라 구매하지 마십시오." 팬데믹 때 진열대를 텅 비게 만들었던 그 종류의 패닉 구매를 막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위기가 일본에 던진 구조적 질문은 LNG에서 갈라졌습니다. 원유와 달리 일본의 LNG 수입은 호르무즈 해협 의존도가 약 6.3%에 불과했습니다. 최대 수입원은 호주(39.7%), 말레이시아(14.8%), 러시아(8.9%)로, 이들 국가의 LNG는 호르무즈를 통과하지 않습니다. 비대칭 구조였습니다. 전력은 상대적으로 안전하지만, 원유가 치명적 취약점. 석유 제품이 일본 1차 에너지 공급의 약 35%를 차지하므로, 원유 경로가 차단되면 휘발유, 등유, 플라스틱, 운송비에 직격탄이 옵니다. 가계와 산업에 대한 영향은 전기료보다 훨씬 빠르고 가혹하게 나타납니다.
노무라종합연구소(NRI)의 추정에 따르면, 원유가 배럴당 120~130달러를 유지하면 일본의 2026년 GDP가 0.6% 하락합니다. 봉쇄가 1년 지속되면 휘발유 가격이 리터당 328엔을 넘어서고, 가계 부담은 연간 약 3만 6,000엔(약 33만 원) 증가합니다. 정부 보조금으로 휘발유 소매가를 리터당 161~165엔 수준으로 억누르고 있었지만, 보조금 없이는 185~200엔까지 치솟을 것이라는 추산이었습니다.
다카이치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호르무즈 해역 해군 파견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헌법상 제약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대신 중동 주변국과의 외교적 관여를 약속했습니다. 지역의 평화가 일본과 국제사회 모두에 필수적이라고 했습니다. 군사적 기여 없이 경제적 위기를 감당해야 하는 일본의 위치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었습니다.
CSIS는 이 위기가 촉발할 구조적 변화를 짚었습니다. 2011년 후쿠시마 이후 논란이 되어온 원자력 발전의 확대에 탄력이 붙을 것이라고. 2025년에 발표된 제7차 에너지기본계획에서 일본 정부는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와 전기화 추세에 대응하기 위해 원자력 이용을 극대화한다는 방침을 세운 바 있습니다. 2026년 3월 기준 가동 중인 원자로 15기, 재가동 준비 중인 3기. 이번 에너지 위기가 원자로 재가동과 신규 건설을 위한 에너지 안보 논거를 한층 강화할 것이라는 판단이었습니다.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때, 호르무즈 해협 자체는 막히지 않았습니다. 석유를 물리적으로 실어 나올 수는 있었습니다. 비축유 방출과 비중동 산유국에서의 대체 조달로 넘겼습니다. 2026년은 구조적으로 다른 상황입니다. 석유는 있고, 산유국은 수출하고 싶어하지만, 물리적으로 이동시킬 수 없습니다. 방출된 비축유의 보충은 봉쇄가 지속되는 한 불가능합니다. 재고는 줄어갈 뿐입니다. 8,000만 배럴은 45일을 벌어주었습니다. 봉쇄가 3개월을 넘기면, 비축유의 대규모 소진과 장기 가격 급등은 피할 수 없게 됩니다.
17.4 베트남과 미얀마 — 재택근무 권고와 격일 운전제
미얀마의 국방안보위원회(NDSC)가 전국적 연료 배급제를 발표한 날은 3월 3일이었습니다. 시행일은 3월 7일. 민간 차량의 도로 이용을 번호판 첫 자리 숫자로 제한하는 홀짝제(Odd-Even Driving Rule)였습니다. 홀수 날에는 번호판이 홀수(1, 3, 5, 7, 9)로 시작하는 차만 달릴 수 있고, 짝수 날에는 짝수(2, 4, 6, 8, 0)만 허용됩니다. 전기차는 예외. 공공 버스, 택시, 유조차, 화물차, 건설 차량, 구급차와 쓰레기 수거차 같은 긴급 서비스 차량은 매일 운행이 가능했습니다.
3월 22일, 군사정부는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모든 정부 기관의 공무원과 직원에게 매주 수요일 재택근무를 지시했습니다. 3월 25일부터 시행. "이 조치는 연료 절약을 목적으로 합니다. 공무원과 정부 기관 직원은 해당 일에 공무 외의 이동이나 차량 사용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관영 일간지 미러(The Mirror)에 실린 성명의 문구입니다. 민간 기업에도 같은 조치를 가능한 한 도입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수도 네피도(Naypyidaw)의 한 공무원이 미지마(Mizzima) 통신에 솔직한 소감을 남겼습니다. "재택근무 시스템에 의구심이 있습니다. 우리 정부 업무는 대부분 여전히 종이 기반이고 디지털화가 안 되어 있어요. 수요일을 재택근무일로 정했지만, 아마 여전히 출근해야 할 겁니다."
블룸버그가 보도한 다음 단계는 더 촘촘했습니다. 바코드와 QR코드 기반의 연료 배급 시스템입니다. 차량 엔진 크기에 따라 일주일에 한 번 또는 두 번만 주유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것입니다. 에너지부는 50일 치의 연료 비축분을 확보하고 있으며 기존 경로에 더해 대체 경로를 통한 추가 수입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양곤(Yangon)과 만달레이(Mandalay)의 주유소에서는 3월 4일부터 이미 긴 줄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등록 민간 차량 60만 대 이상의 나라에서, 연료가 없다는 공포는 빠르게 퍼졌습니다.
미얀마의 상황이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질적으로 달랐던 것은, 이 나라가 이미 군사 쿠데타 이후 만성적인 외환 위기와 내전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제 제재와 고립 속에서 외화 확보가 어려운 군사정부에게, 달러로 결제해야 하는 석유 수입은 이중의 부담이었습니다. 병원과 통신 기지국을 돌리는 디젤 발전기의 연료가 바닥나면, 국가의 기본적 기능이 멈추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일부 국내 항공사는 운항을 중단했고, 연료 가격 상승은 항공 요금의 급등으로 이어졌습니다.
베트남은 구조적으로 다른 종류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하며 삼성, 애플 협력업체, 나이키 등 글로벌 기업의 생산 기지를 빨아들이고 있던 이 나라는 에너지 공급망이 마비되자 성장 엔진이 강제로 멈춰야 했습니다. 알자지라 보도에 따르면, 베트남은 비중동 국가에서 약 400만 배럴의 원유를 확보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미국 에너지경제금융분석연구소(IEEFA)의 샘 레이놀즈(Sam Reynolds) 연구원은 이 물량이 베트남 소비의 약 6일 치에 불과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국영 매체 보도에 따른 비축량 20일 치를 감안하면, 추가 원유 유입 없이는 "연료 부족 위험이 매우 높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베트남 정부는 기업에 재택근무를 권고하고, 시민에게 대중교통과 자전거, 카풀(Carpool, 승용차 함께 타기) 이용을 독려했습니다. 연료가격안정기금(Fuel Price Stabilisation Fund)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석탄 운송에 "우선 통행권(Priority Pass)"을 부여하여 LNG 소비를 줄이고 석탄 발전으로 대체하려 했습니다. 베트남 민간항공청(CAAV)은 중국과 태국의 수출 제한으로 4월 이후 항공유 부족이 올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베트남은 항공유의 3분의 2 이상을 수입하는데, 그 가운데 약 60%가 중국과 태국에서 옵니다.
라오스의 상황은 메콩 유역 전체에서 가장 급박했습니다. 전국 2,538개 주유소 가운데 40% 이상이 지난 한 주 동안 영업을 중단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나머지 주유소에서도 긴 줄과 제한된 공급이 이어졌습니다. 대학에는 대면 수업을 주 3일로 줄이라는 지침이 내려왔습니다. 학생들에게 자전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공무원에게도 재택근무를 권고했습니다. 참파삭(Champasak) 지방 당국은 팍송(Paksong) 지역 주유소 3곳에 정부 규제가를 초과해 판매한 혐의로 과태료를 부과했습니다.
캄보디아에서는 지난주 휘발유 부족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주요 석유 및 LPG 수입업체인 소키멕스(Sokimex)는 운송 차질로 인해 4월부터 LPG 공급을 일시 중단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캄보디아는 자체 정유 시설이 없습니다. 2024년 기준 석유 수입의 60% 이상을 태국과 베트남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두 나라 모두 수출을 제한하자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로 공급선을 급히 돌려야 했습니다. 에너지부 장관 깨오 롯따낙(Keo Rottanak)은 이들 나라로부터의 수입이 늘고 있으며, 토탈(Total)과 셰브런(Chevron) 같은 글로벌 공급업체와의 파트너십이 즉각적 위험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에너지 위기는 불편함이 아니었습니다. 이동의 자유가 박탈되고, 공장이 멈추고, 학교가 문을 줄이고, 병원 발전기의 연료가 떨어지는 것. 그것은 국가의 기본 기능이 하나씩 꺼지는 과정이었습니다.
17.5 중국, 태국의 석유 수출 금지 — 자국 우선의 연쇄 반응
가장 먼저 빗장을 걸어 잠근 것은 태국이었습니다. 3월 6일. 그다음은 중국이었습니다.
블룸버그는 3월 5일 자로 보도했습니다. 중국 정부가 최대 정유사들에게 경유와 휘발유 수출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고. 전쟁이 시작된 지 6일 만이었습니다. 3월 11일에는 모든 정제 연료의 수출 금지로 확대되었습니다. 대상은 휘발유, 경유, 항공유. 세관을 통과하지 않은 모든 화물에 즉시 적용되었습니다. 홍콩, 마카오 방면 공급과 국제선 항공기 급유용 보세 연료는 예외였지만, 그 외의 모든 문이 닫혔습니다.
중국은 한국, 싱가포르에 이어 아시아 3위의 연료 수출국입니다. 2025년 약 4,100만 톤의 정제 석유 제품을 수출했습니다. 220억 달러 규모. 주요 수출 대상은 싱가포르, 한국, 일본, 그리고 베트남, 필리핀 같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었습니다. 이 물량이 시장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중국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상대적으로 차분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더 디플로맷(The Diplomat)의 분석이 이것을 정리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중국은 전략 비축유와 상업 재고를 합쳐 약 12억~13억 배럴의 석유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2025년 소비 기준 약 100일 치. 2026년 1~2월에도 원유 비축을 추가로 늘렸습니다. 하루 수입 1,199만 배럴에 국내 생산 442만 배럴을 더하면, 합산 1,641만 배럴이 정유 시설에 공급되고 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의 사실상 봉쇄에도 불구하고 중국 향 원유 통과를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일부 서방 정부가 이에 주목했을 만큼, 이것은 중국만이 가진 특권이었습니다. 중동 외에도 호주, 중앙아시아, 러시아, 남미, 아프리카에서 원유를 들여오는 다원화된 수입 구조. 일본과 한국의 천연가스 수입이 거의 전량 해상 LNG인 반면, 중국은 가스 수입의 절반 이상을 러시아에서 오는 시베리아의 힘(Power of Siberia) 1호 같은 육상 파이프라인으로 충당합니다. 하나의 해협이 막혀도 다른 경로가 살아 있는 구조.
그러나 중국의 자국 우선 결정이 아시아의 나머지 국가들에 미친 영향은 가혹했습니다. 모던 디플로머시(Modern Diplomacy)의 분석에 따르면, 중국의 수출 금지로 아시아 디젤 파생상품 가격은 3월 17일 기준 배럴당 150달러, 항공유는 163달러, 휘발유는 139.80달러로 치솟았습니다. 전쟁 전 79~92달러 수준에서 폭등한 것입니다. 호주, 방글라데시, 필리핀이 중국산 연료 공급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고, 이들 나라가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중국만이 아니었습니다. 태국은 대부분의 정제 연료 수출을 금지했고(라오스와 미얀마 예외), 한국은 수출량을 전년도 수준으로 제한한 뒤 추가 제한을 검토 중이었습니다. 인도와 일본의 정유사들도 해외 판매를 꺼리고 국내 수요 충족이나 높아진 지역 가격의 혜택을 누리는 쪽을 택했습니다. 한국의 정유 회사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유소는 석유 제품이 부족할 때 국내 시장에 먼저 공급해야 합니다." 분석가들은 이런 조치들이 합산되면 아시아 전역에서 하루 최대 600만 배럴의 정제 가동 축소를 강제할 수 있다고 추산했습니다.
연쇄 반응은 가장 약한 고리를 먼저 끊어냈습니다. 캄보디아. 정유 시설도, 의미 있는 비축유도 없는 이 나라는 평소 태국과 베트남, 중국에서 정제유를 들여다 썼습니다. 세 나라 모두 수출을 제한하거나 금지하자, 캄보디아는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로 배를 보내 웃돈을 주고 연료를 사와야 했습니다. 라오스에서는 주유소의 40%가 문을 닫았고, 운전자들이 몇 시간씩 줄을 섰습니다. ASEAN 경제장관들은 공급 차질이 "운임, 보험, 물류 비용을 높이고 에너지, 식품 및 기타 필수재에 인플레이션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갈등이 장기화되면 "역내 수백만 명의 생계에 영향을 미치고 ASEAN의 경제적 진전을 저해할 수 있다"고.
3월 31일, 로이터가 보도했습니다. 중국이 정제유 수출 금지를 4월까지 연장할 태세라고. 다만 역내 국가들의 요청에 따라 소량의 예외가 적용될 수 있다고. 4월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향한 디젤, 항공유, 휘발유의 제한적 수출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허용 물량은 15만~30만 톤 수준. 현물 수출은 계속 불허. 이 숫자가 위기를 완화할 수 있는 규모인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습니다.
말레이시아의 비료 제조업체들은 공급망 교란과 원료 가격 폭등으로 신규 주문을 중단했습니다. 이것은 팜유 생산 비용 상승으로 이어지고, 다시 글로벌 식품 공급망을 타고 파급될 수 있는 연쇄였습니다. 말레이시아의 반도체 업체들은 헬륨 공급 차질을 우려했습니다. 아직 실제 조업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위기가 길어지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싱가포르의 아스터 케미칼스 앤드 에너지(Aster Chemicals and Energy), 인도네시아의 PT 찬드라 아스리 퍼시픽(PT Chandra Asri Pacific) 같은 석유화학 기업들이 불가항력을 선언했습니다. 계약 의무를 이행할 수 없다는 통보.
이것이 아시아의 에너지 긴축이 만들어낸 풍경이었습니다. 평화로운 시절, 비교우위와 자유무역에 입각해 촘촘하게 짜여 있던 아시아의 통합된 에너지 공급망이 몇 주 만에 해체되었습니다. 각국은 이웃 나라의 공장이 멈추고 주유소 줄이 끝없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도, 자기 기름통을 먼저 지키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를 찾지 못했습니다. 에너지가 부족해지면 공급망은 이음새부터 찢어집니다. 그리고 그 이음새는 언제나 가장 가난한 나라, 가장 작은 경제, 비축유가 없고 정유 시설이 없는 곳에 있었습니다.
호르무즈 해협에서 시작된 봉쇄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방콕의 주유소, 프놈펜의 LPG 공급업체, 비엔티안의 대학 강의실, 양곤의 디젤 발전기까지 도달했습니다. 중동의 전쟁이 아시아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상의 파괴는 아직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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