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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24장 제재의 자기 파괴
2026년 미국 이란 전쟁과 전 세계의 에너지 위기
24장 제재의 자기 파괴
김경진
전쟁과 에너지 제24장 제재의 자기 파괴
24.1 러시아 제재를 풀면서 러시아 수입이 늘어나는 구조
2026년 3월 5일 밤, 미국 재무부 장관 스콧 베센트는 성명 하나를 발표했습니다. 인도에 대해 30일간 러시아산 원유 구매를 허용하는 면제 조치(General License)를 내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적용 대상은 3월 5일 이전에 이미 유조선에 실려 바다 위에 떠 있는 물량으로 한정했습니다. 베센트는 이 조치가 "좁은 범위의 단기적 조치"이며 "러시아 정부에 상당한 재정적 이익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일주일 뒤인 3월 12일, 재무부는 이 면제의 범위를 넓혔습니다. 인도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3월 12일 이전에 선적된 러시아산 원유를 살 수 있게 했습니다. 유효 기간은 4월 11일까지. 이번에도 "이미 바다 위에 있는 물량"이라는 단서가 붙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날 밤 기사 제목을 이렇게 뽑았습니다. "트럼프 행정부, 이란 전쟁의 경제적 여파를 막기 위해 러시아 석유 제재를 한시적으로 해제."
이 결정이 나오기까지의 경위를 따라가면, 미국이 빠져든 모순의 구조가 드러납니다.
2026년 초까지 러시아 경제는 서방 제재의 압박 아래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1월과 2월 두 달간 러시아의 석유가스 세수는 전년 동기 대비 11.6% 감소했고, 연방 예산 적자는 3조 5,000억 루블(약 430억 달러)로 불어났습니다. 러시아 우랄(Urals)유는 서방의 유가 상한제(Price Cap, G7이 러시아산 원유의 해상 운송 가격을 배럴당 60달러로 제한한 조치)에 묶여 아시아 시장에서 브렌트유 대비 배럴당 10~13달러 할인된 가격에 팔리고 있었습니다. 크렘린 내부에서는 여름이 오기 전에 재정 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경고가 돌았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소식통을 인용해 푸틴 측근들이 "3~4개월 안에 위기가 올 수 있다"고 보고했다고 전했습니다. 비(非)안보 부문 예산의 10% 삭감 계획이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있었습니다.
2월 28일, 에픽 퓨리 작전이 시작되고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사실상 봉쇄하면서 이 모든 상황이 뒤집혔습니다.
유가 폭등이 먼저 왔습니다. 전쟁 전날인 2월 27일 배럴당 57달러였던 러시아 우랄유 가격은 3월 중순 98.93달러까지 치솟았습니다. 70% 상승. 블룸버그는 아르거스(Argus) 데이터를 인용해 이것이 2022년 러시아가 인도 시장에 대량 수출을 시작한 이래 최고가라고 보도했습니다. 브렌트유와의 할인 폭은 4.80달러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10~13달러였던 것이 거의 소멸한 셈입니다. 카네기 러시아 유라시아 센터의 세르게이 바쿨렌코 선임연구원은 CNBC에 출연해 "우랄유가 현재 배럴당 115달러"라고 말했습니다. 전쟁 직전의 두 배.
제재 면제가 이 흐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면제 조치가 발표되자 바다 위에 떠 있던 약 1억 3,000만 배럴의 러시아산 원유가 갑자기 합법적인 상품이 되었습니다. 이전까지 제재 위반 부담 때문에 러시아 원유 구매를 꺼리던 인도 정유사들이 일제히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Kpler의 분석가 무유 쉬(Muyu Xu)는 "인도 정유사들이 지난 주말부터 러시아산 즉각 인도 물량을 적극적으로 찾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전에는 중국으로 향하던 유조선들이 항로를 바꿔 인도 항구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Kpler와 Vortexa의 선박 추적 데이터는 약 140만 배럴을 실은 유조선 두 척이 동아시아에서 인도로 목적지를 변경한 사실을 포착했습니다.
돈의 흐름을 봅니다. 헬싱키에 본부를 둔 에너지·청정대기연구센터(CREA)의 데이터에 따르면, 러시아는 3월 1일부터 15일까지 15일간 화석 연료 수출로 77억 유로(약 83억 달러)를 벌어들였습니다. 하루 평균 약 5억 1,300만 유로. 2월 일평균(4억 7,200만 유로)보다 14% 증가한 수치입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유가 급등으로 러시아가 하루에 약 1억 5,000만 달러의 추가 수입을 올리고 있다고 계산했습니다. 블룸버그는 3월 넷째 주 러시아의 원유 수출 수입이 주간 기준 24억 8,000만 달러에 달했다고 보도했습니다. 2022년 4월 이후 최고치. 2월 하순 대비 120% 증가.
키예프경제대학(KSE) 산하 연구소의 추산은 이 횡재의 규모를 시나리오별로 보여줍니다. 전쟁이 6주 안에 끝나고 공급이 빠르게 회복되는 낙관적 시나리오에서도 러시아는 추가 수출 수입 840억 달러, 추가 세수 450억 달러를 거둡니다. 전쟁이 가을까지 이어지는 최악의 시나리오에서는 유가가 배럴당 150~200달러를 유지하고, 러시아의 총 석유가스 수입은 3,866억 달러, 추가 세수는 2,125억 달러에 이릅니다.
이 숫자들 앞에 하나의 사실을 놓으면 모순의 윤곽이 선명해집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2년 넘게 정교하게 짜올린 제재망으로 러시아의 전쟁 자금줄을 조르고 있었습니다. 그 압박이 효과를 보기 시작한 바로 그 시점에, 미국이 스스로 시작한 이란 전쟁이 유가를 끌어올리고, 유가를 잡기 위해 제재를 풀어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3월 13일 파리에서 마크롱과 함께 한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제재 완화만으로도 러시아에게 약 100억 달러의 전쟁 자금을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는 덧붙였습니다. "제재를 풀어서 더 많은 드론이 우리를 향해 날아오게 만드는 것은 올바른 결정이 아닙니다."
독일 총리 프리드리히 메르츠는 같은 날 노르웨이에서 말했습니다. "G7 중 6개국이 이것은 잘못된 신호라고 아주 분명하게 의견을 표명했습니다. 현재는 가격 문제이지 공급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미국 정부가 이 결정을 내리게 된 추가적인 동기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마크롱은 호르무즈 위기가 "어떤 식으로든 러시아 제재 완화를 정당화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내부의 논리는 달랐습니다. 유가가 매일 올랐습니다. 미국 내 휘발유 가격이 갤런당 4달러를 향해 치달았습니다. 브렌트유는 3월 13일 배럴당 100달러를 넘겼고 그 주에만 약 9% 올랐습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에너지 가격 폭등이 중간선거에 미칠 영향을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백악관 대변인 쿠시 데사이는 이메일 성명에서 이 조치를 "이란의 위협이 무력화될 때까지 전 세계 공급을 보강하기 위한 여러 수단 중 하나"라고 설명했습니다.
액시오스의 에밀리 펙 기자는 이 상황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습니다. "이란과의 '열전(Hot war)'에 대처하면서 동시에 러시아에 대한 '냉전(Cold war)'을 유지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오바마 행정부에서 러시아·유럽 제재를 담당했던 에디 피시먼은 말했습니다. "이것은 2014년 크림반도 침공 이후 우리가 구축한 제재 체제에 대한 첫 번째 주요 완화입니다. 이 체제를 해체할 위험이 있습니다."
브루킹스 연구소의 카리 히어먼도 같은 구조적 딜레마를 지적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위기를 관리해야 하고 우선순위를 정해야 합니다. 지금 동시에 놓인 우선순위가 세 가지입니다. 낮은 유가, 이란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 종결을 위한 러시아 압박."
세 가지를 동시에 달성할 수는 없었습니다. 유가를 잡으려면 공급을 늘려야 했고, 공급을 늘리려면 러시아 제재를 풀어야 했고, 러시아 제재를 풀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에게 돈을 쥐여주는 꼴이 되었습니다. 이란을 치기 위해 시작한 전쟁이, 러시아를 조이기 위해 쌓아올린 제재를 미국 자신의 손으로 허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카네기 센터의 바쿨렌코는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푸틴이 전쟁에 쓸 돈 때문에 나라를 저당 잡히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블룸버그는 3월 27일 러시아 경제부가 2026년 GDP 성장률 전망치를 당초 계획대로 1.3%로 유지하기로 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0.7%로 하향 조정하는 논의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10% 예산 삭감 계획도 철회되었습니다. 유가 횡재가 국부 펀드를 다시 채우고, 국방비 12조 9,000억 루블(약 1,574억 달러)을 감당할 여력을 만들어주고 있었습니다.
지정학 모니터(Geopolitical Monitor)의 앨리스 존슨은 이 상황의 구조적 의미를 이렇게 짚었습니다. "다른 전쟁이 석유 시장을 교란할 때마다 느슨해질 수 있는 제재 시스템은, 원칙이 아니라 응급처치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미국 상원의원 팀 케인과 루벤 갈레고가 트럼프 행정부에 보낸 서한은 이 모순을 공식적으로 기록했습니다. "공개 출처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는 분쟁 첫날부터 이란 군부에 미군 위치와 이동에 관한 민감한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의 이란에 대한 직접적 군사 지원만으로도 귀하의 제재 완화 결정은 충격적입니다. 그런데 러시아는 이미 치솟는 유가로 최대 49억 달러를 벌어들일 것으로 예상되며, 귀하의 제재 면제는 의심의 여지 없이 그 액수를 키울 것입니다."
제재라는 도구의 구조적 한계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제재는 대상국이 고립되어 있을 때, 그리고 제재를 부과하는 쪽이 다른 전선에서 동시에 싸우지 않을 때 효과를 발휘합니다. 두 조건이 동시에 무너진 2026년 3월, 미국이 2014년부터 12년간 쌓아올린 대러 제재 체제는 미국 자신이 연 전쟁의 불길 속에서 녹아내리기 시작했습니다.
24.2 인도와 중국의 러시아산 원유 의존 심화
인도 석유부 관계자는 3월 초 CNN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재 약 1억 배럴의 원유에 접근 가능하며 이는 약 45일분의 수요를 충당할 수 있습니다."
이 한 문장 뒤에 숨겨진 숫자를 풀어보면, 인도가 처한 상황이 보입니다. 세계 3위 석유 수입국인 인도는 전체 원유의 80% 이상을 해외에서 들여옵니다. Kpler 데이터에 따르면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매일 250만~270만 배럴의 인도향 원유가 지나갑니다.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UAE에서 오는 물량입니다. 이 수로가 막히면 인도의 일일 원유 수입 절반 이상이 차단됩니다.
2025년 하반기부터 인도는 미국의 압박에 따라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줄이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8월 미국은 러시아 석유 구매에 대한 보복으로 인도 수출품에 25%의 징벌적 관세를 부과했습니다. 인도는 이에 굴복해 러시아산 구매를 줄이고 중동산으로 대체했습니다. 2026년 1월 인도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 비중은 전체의 21.2%까지 떨어졌습니다. 하루 약 110만 배럴. 2022년 말 이래 최저치.
그러나 2월 28일 전쟁이 시작되고 호르무즈가 막히자, 인도가 미국 요구에 맞춰 대체해 놓은 중동산 원유가 정확히 그 해협 안에 갇혀버렸습니다.
인도 석유부는 즉각 외교부에 미국으로부터 러시아산 원유 수입 면제를 얻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블룸버그는 소식통을 인용해 "인도의 현재 상업·전략 비축유가 2주분 소비량에 불과할 수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3월 5일 미국의 면제 조치가 나오자마자 인도 정유사들이 움직였습니다.
속도가 놀라웠습니다. 전쟁 전인 2월, 인도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은 하루 약 104만 배럴이었습니다. 3월 첫 주에 150만 배럴로 뛰었습니다. 50% 증가. CREA 데이터에 따르면 3월 첫 3주간 인도의 러시아산 원유 일평균 수입량은 2월 대비 82% 급증했습니다. Kpler의 수밋 리톨리아 분석가는 3월 수입량이 하루 200만~220만 배럴에 이를 수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3월 25일 블룸버그가 보도한 숫자는 이 흐름의 결정판이었습니다. 인도 정유사들이 4월 인도분 러시아산 원유를 6,000만 배럴 계약했다는 것입니다. 2월 물량의 두 배를 넘습니다. 가격은 브렌트유 대비 배럴당 5~15달러의 프리미엄. 할인이 아니라 웃돈입니다.
이 숫자의 의미를 잠시 멈춰서 봐야 합니다. 2023년에서 2025년까지 인도가 러시아산 원유를 산 이유는 싼 가격이었습니다. 브렌트 대비 10~13달러 할인. 그것이 인도 정유사들의 마진을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2026년 3월, 인도는 웃돈을 주고 러시아산 원유를 삽니다.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스가 매입한 600만 배럴은 브렌트유 거의 같은 가격이었습니다. "인도의 세계"라는 분석 사이트는 이 변화를 한 문장으로 정리했습니다. "과거에는 가격 최적화였다면, 지금은 지정학적 스트레스 아래에서의 공급 안보입니다."
Kpler의 한 분석가가 핵심을 짚었습니다. "지금은 분자(Molecules, 원유 자체)의 확보가 문제이지, 가격이 문제가 아닙니다."
중국의 움직임은 인도와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인도가 미국의 면제를 받아 러시아산 원유를 구매했다면, 중국은 그런 절차 자체를 밟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중국은 이미 자체적인 결제 시스템과 운송망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 첫 15일 동안 이란 항구에서 중국 정유소로 향한 원유가 1,170만 배럴에 달했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이 물량은 일반 국제 해운 시스템이 아니라 그림자 선단(Shadow Fleet, 보험과 서방 해운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운항하는 유조선 집단)을 통해 운반되었고, 결제는 모두 달러 바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중국은 이란산 원유와 함께 러시아산 원유도 쓸어 담았습니다. 동시베리아-태평양(ESPO) 파이프라인을 통해 들어오는 러시아산 원유는 호르무즈 해협과 무관하게 안정적으로 공급됩니다. 바다를 건너지 않습니다. 미 해군이 개입할 수 없습니다. 중국은 이 육상 경로를 더 넓히기 위해 파워 오브 시베리아 2(Power of Siberia 2)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의 조기 착공을 2026년 3월 채택된 제15차 5개년 계획에 명시했습니다.
이 파이프라인이 완공되면 시베리아에서 몽골을 경유해 중국 북부로 연간 500억 입방미터의 천연가스가 흐르게 됩니다. 호르무즈를 통과하는 카타르산 LNG에 대한 의존을 줄이는 영구적인 대안입니다.
인도와 중국을 합치면 세계 인구의 약 36%, 글로벌 석유 수입의 약 3분의 1에 해당합니다. 이 두 나라가 동시에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를 끌어올린 것은 단기적 위기 대응이 아니라 구조적 전환입니다.
그 구조를 한 가지 사실이 설명합니다. 인도 정유사들은 한때 러시아산 원유를 사면 미국의 징벌적 관세를 맞았습니다. 지금은 미국이 직접 면제를 내려서 사라고 합니다. 미국의 전쟁이 미국의 제재를 무효화했고, 그 무효화가 러시아와 아시아 거대 경제국들 사이의 에너지 연결을 되돌릴 수 없는 수준으로 깊게 만들었습니다.
인도 정부 공보처(PIB)는 성명에서 말했습니다. "미국의 면제 조치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인도는 2026년 2월에도 러시아산 원유를 구매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허락이 있든 없든 인도는 살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한번 깔린 인프라, 한번 맺어진 장기 계약, 한번 전환된 공급망은 위기가 끝난 뒤에도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러시아산 원유를 실어 나르기 위해 인도와 중국의 항구 시설이 확장되고, 결제 경로가 다져지고, 정유소의 처리 설비가 러시아산 유종에 맞춰 재조정되면, 그것은 영구적인 공급망이 됩니다. 미국이 전쟁을 끝내고 제재를 다시 강화하더라도, 이미 자리 잡은 유라시아 에너지 회랑을 떼어내기는 훨씬 어려워집니다.
24.3 이란이 위안화로 돈을 벌고, 러시아가 제재 해제로 숨을 쉬는 전쟁
CNN은 3월 14일 이란 고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습니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유조선에 대해 제한적 통행을 허용하되, 화물이 중국 위안화로 거래되는 경우에 한한다는 조건을 검토하고 있다고.
이 한 문장이 담고 있는 의미의 무게를 이해하려면 1974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1971년 닉슨이 달러의 금 태환을 중단한 뒤, 미국은 새로운 닻이 필요했습니다. 1974년 닉슨 행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살 국왕과 합의를 맺었습니다. 사우디는 모든 석유를 달러로만 판매하고, 석유 수출 대금으로 번 달러(오일머니)를 미국 국채에 투자한다. 미국은 사우디의 안보를 보장한다. 이 합의는 곧 OPEC 전체로 확산되었고, 페트로달러(Petrodollar) 체제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 체제의 작동 원리는 자기강화적 순환입니다. 석유가 달러로만 거래되므로, 석유를 수입하는 모든 나라는 달러를 보유해야 합니다. 달러에 대한 구조적 수요가 생깁니다. 이 수요 덕분에 미국은 막대한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를 내면서도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습니다. 프랑스 전 재무장관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1960년대에 명명한 "과도한 특권(Exorbitant Privilege)"입니다.
이란의 위안화 조건은 이 52년 된 순환 고리에 쐐기를 박는 시도였습니다.
이란 혁명수비대(IRGC)가 운영하는 호르무즈 해협의 새 질서는 이렇게 작동했습니다. 해협을 통과하려는 유조선은 이란 영해 내 지정된 항로를 따라야 합니다. 통과 허가를 받으려면 척당 최대 200만 달러에 달하는 통행료를 내야 합니다. 결제 수단은 위안화. 결제 경로는 SWIFT가 아닌 중국의 국경간은행간결제시스템(CIPS, Cross-Border Interbank Payment System).
CIPS는 중국 인민은행이 2015년부터 운영해 온 독자적인 국제 결제 시스템입니다. SWIFT가 미국의 감시와 통제 아래 있는 것과 달리, CIPS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래는 미국 뉴욕의 환거래은행을 거치지 않습니다.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은 이 거래를 추적할 수도, 동결할 수도 없습니다. 2025년 한 해 동안 CIPS를 통해 처리된 위안화 표시 거래 규모는 245조 달러 상당. 전년 대비 43% 증가.
이 인프라 위에서 이란-중국-러시아 사이의 금융 루프가 돌아갔습니다.
중국은 이란산 원유를 위안화로 결제합니다. 이란 혁명수비대 산하 쿤룬은행(Bank of Kunlun)이 주요 결제 허브 역할을 합니다. 중국은 러시아로부터도 에너지를 수입하고 위안화로 결제합니다. 위안화를 확보한 이란과 러시아는 그 돈으로 중국산 무기 부품, 산업 기계, 소비재를 구매합니다. 위안화가 중국으로 되돌아갑니다. 이 순환 안에서 달러가 개입할 지점이 없습니다.
인도마저 이 흐름에 합류하는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블룸버그는 3월 하순 인도 정유사들이 러시아산 원유 대금 일부를 위안화와 UAE 디르함으로 결제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달러를 완전히 배제한 것입니다.
미국이 이란을 군사적으로 치는 동안, 이란은 미국이 건드릴 수 없는 금융 시스템 안에서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이란은 전쟁 개시 후 3주 동안 그림자 선단을 통한 원유 수출과 위안화 통행료로 상당한 규모의 수입을 챙겼습니다. 하루에 유조선 30척이 통과하고 척당 200만 달러를 받으면, 연간 200억 달러가 넘는 수입입니다. 미 공군이 이란의 미사일 공장을 폭격하는 동안,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이라는 지리적 자산으로 전쟁 비용을 자체 조달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이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 않고도 이익을 챙겼습니다. 유가 급등으로 수출 수입이 늘었고, 미국의 제재 면제로 아시아 시장 접근이 쉬워졌고, 서방의 군사적 관심이 중동으로 분산되면서 우크라이나 전선의 압박도 줄었습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이 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전쟁사 저술가 리처드 셔리프는 지적했습니다. "미국은 전쟁 첫 4일 동안 4년간 우크라이나에 공급한 것보다 4배 많은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이란을 향해 발사된 미사일 한 발은 우크라이나로 가지 못한 미사일 한 발이었습니다.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PIIE)는 이 구조를 정면으로 분석한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러시아와 중국이 이란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는 제목. 보고서는 러시아가 이란 군부에 위성 영상과 미군 이동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 이란의 드론 공격 패턴이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가 사용한 전술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보고서의 핵심 결론은 이것입니다. "미국은 이란의 핵 능력을 제거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지만, 그 과정에서 미국의 제재 체제가 국내 에너지 가격이 오를 때마다 양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해 버렸습니다."
24.4 미국이 시작한 전쟁이 미국의 금융 패권을 약화시키는 역설
2026년 3월 19일, 브렌트유가 배럴당 119달러를 찍은 날. 같은 날 미국 국채 시장에서는 다른 종류의 경보가 울렸습니다. 포춘(Fortune)은 "미국 부채가 이란 전쟁 속에서 약해진 수요에 직면하다"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올해 만기가 도래하는 미국 국채가 10조 달러에 달하는데, 매수세가 약해지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숫자를 나란히 놓으면 페트로달러 체제의 균열이 보입니다.
체제의 첫 번째 기둥, "모든 석유는 달러로만 거래된다"는 원칙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이란은 호르무즈 통행료와 원유 대금을 위안화로 받고 있었습니다. 인도 정유사들은 러시아산 원유 대금 일부를 위안화와 디르함으로 결제하기 시작했습니다. 2024년 6월 사우디아라비아는 1974년의 합의를 갱신하지 않았고, 위안화, 유로, 디지털 화폐로도 석유를 팔 수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2023년에는 전 세계 석유 거래의 약 5분의 1이 달러가 아닌 통화로 결제되었습니다. 2026년 그 비율은 더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기둥, "미국이 중동의 안보를 보장한다"는 약속의 신뢰가 무너졌습니다. 3월 5일 세계 해상 물동량의 90%에 대한 책임보험을 제공하는 국제P&I클럽(International Group of P&I Clubs) 소속 12개 보험사가 호르무즈 해협 통과 선박에 대한 보험 인수를 철회했습니다. 미 해군의 제5함대가 바레인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보험사들을 안심시킬 수 없었습니다. 로이즈 리스트 인텔리전스(Lloyd's List Intelligence) 데이터에 따르면 3월 상반월에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선박은 77척에 불과했습니다. 평시 같은 기간이면 수백 척이 오갔을 수로입니다.
세 번째 기둥, "산유국의 오일머니가 미국 국채로 환류한다"는 순환도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달러 표시 거래가 줄면 산유국이 보유하는 달러도 줄고, 미국 국채에 투자할 돈도 줍니다.
이 세 기둥이 동시에 흔들리는 것은 39조 달러의 국가 부채를 안고 있는 미국에게 실존적 문제입니다.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제롬 파월은 미국의 부채가 "지속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도 "그 궤적이 좋은 결말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외국 중앙은행과 산유국이 미국 국채를 예전처럼 사주지 않으면, 미국 정부의 연간 이자 비용은 1조 달러를 넘어갑니다.
이 모든 과정의 기저에 '제재의 역설(Sanctions Paradox)'이라 불리는 구조가 있습니다.
미국은 불량 국가를 굴복시키기 위해 달러 결제망에서 퇴출(SWIFT 차단)과 해외 자산 동결이라는 수단을 반복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러시아, 이란, 베네수엘라, 북한, 아프가니스탄. 미국 재무부의 제재 리스트에 오른 나라가 지구 전체 국가의 3분의 1, 저소득 국가의 60%에 달합니다.
제재를 당한 나라들은 살아남기 위해 달러 바깥의 대안을 찾았습니다. CIPS가 커졌습니다. mBridge(다자간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 플랫폼)가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은 40개 이상의 중앙은행과 위안화 스왑 라인을 맺었습니다. 2018년 상하이 국제에너지거래소가 위안화 표시 원유 선물 계약을 출시했습니다. 이 모든 인프라는 2026년 2월 28일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깔려 있었습니다.
전쟁은 이 인프라가 실전에서 작동하는지를 시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작동했습니다. 이란은 CIPS를 통해 위안화로 통행료를 받았습니다. 그림자 선단은 서방 보험과 서방 해운 서비스 없이 이란산 원유를 중국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인도는 러시아산 원유를 달러 아닌 통화로 결제했습니다. 아시아 타임스의 카시프 하산 칸 교수는 이렇게 썼습니다. "이란의 호르무즈 위안화 정책은 글로벌 금융의 새 방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방향을 가속시키는 것입니다."
달러가 하루아침에 기축통화 지위를 잃지는 않습니다. 아시아 타임스가 지적하듯 "위안화는 아직 글로벌 준비통화의 짐을 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중국은 여전히 자본 통제를 유지하고 있고, 금융 시장의 개방성과 신뢰도가 미국에 미치지 못합니다." IMF 데이터에 따르면 달러는 여전히 전 세계 외환 보유고에서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영국 파운드가 세계 기축통화 자리에서 물러나는 데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약 30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추세가 있습니다. 그리고 2026년 이란 전쟁은 그 추세를 가속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유럽비즈니스매거진은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이전의 탈달러화 논의는 이론적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초크포인트가 있고, 그림자 선단이 있고, 작동하는 위안화 결제 시스템이 있고,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지정학적 위기가 있습니다."
미국이 직면한 역설의 구조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미국은 달러의 힘을 지키기 위해 제재를 사용했습니다. 제재를 남용하자 적대국들이 달러를 우회하는 인프라를 만들었습니다. 인프라가 갖춰진 상태에서 미국이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전쟁이 만든 에너지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제재를 풀어야 했습니다. 제재를 풀자 적대국들에게 돈이 흘러들어갔습니다. 적대국들은 그 돈을 달러가 아닌 통화로 벌고, 달러가 아닌 통화로 썼습니다.
케인 상원의원과 갈레고 상원의원은 행정부에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적국들에 대한 제재를 풀면서 동시에 활발한 분쟁을 치르는 것은 일관성 없고 무질서한 정책의 또 하나의 사례입니다. 미국인들에 대한 경제적 구제는 선택한 전쟁의 지속이 아니라 중단에서 시작됩니다."
폭탄으로 적의 결제 시스템을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B-2 폭격기가 CIPS 서버를 타격할 수는 없습니다. 토마호크 미사일이 위안화 스왑 라인을 끊을 수는 없습니다. 2026년 이란 전쟁이 드러낸 것은, 21세기 패권 경쟁에서 군사력의 한계입니다. 미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강력한 군대를 이란에 투사했지만, 그 투사가 만들어낸 경제적 충격파는 되돌아와서 미국 자신의 금융 패권을 깎아먹고 있었습니다.
호르무즈 해협을 물리적으로 열 수 있는 군사력은 미국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해협을 통과하는 배가 어떤 통화로 결제하는지는 군사력으로 강제할 수 없습니다. 상인에게 특정 장부를 쓰라고 강요할 수 있는 힘은 항공모함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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