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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32장 탈탄소의 역설
2026년 미국 이란 전쟁과 전 세계의 에너지 위기
32장 탈탄소의 역설
김경진
제32장을 저술하기 전에 최신 관련 자료를 검색하겠습니다.자료 검색이 충분합니다. 이제 제32장을 저술하겠습니다.
제32장 탈탄소의 역설
32.1 재생에너지 시대가 석유 한 방에 흔들리는 이유
2026년 3월, 브렌트유가 배럴당 126달러를 넘어서던 날 베를린에서 기이한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독일 연방의회 앞 광장에서는 재생에너지 확대를 촉구하는 기후 활동가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었고, 불과 몇 블록 떨어진 경제부 청사에서는 장관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이미 폐쇄된 석탄 화력 발전소의 재가동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같은 날, 같은 도시, 서로 얼굴을 마주칠 수도 있는 거리에서 벌어진 두 장면이 2026년 탈탄소 정책의 가장 솔직한 자화상이었습니다.
독일은 지난 20년간 에너지전환(Energiewende)이라는 이름 아래 세계에서 가장 과감한 탈탄소 실험을 해온 나라입니다. 총 5,700억 유로 이상을 태양광과 풍력에 쏟아부으며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전체 전력의 절반 이상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정치인들은 이 숫자를 들어 석유와 천연가스에서 해방된 에너지 독립의 새 시대가 열렸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호르무즈 해협이 막힌 2026년 봄, 그 선언의 껍데기가 벗겨졌습니다.
문제의 근원은 생각보다 단순한 수치 하나에 있습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의 데이터를 보면, 전 세계 최종 에너지 소비(Final Energy Consumption)에서 전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현재 약 20%입니다. 나머지 80%는 전기가 아닙니다. 산업용 보일러에 직접 연소되는 천연가스, 트럭과 선박을 움직이는 디젤, 비행기를 띄우는 항공유, 비료 공장을 돌리는 메탄. 아무리 태양광 패널을 많이 깔고 풍력 터빈을 많이 세워도, 전기가 닿지 않는 이 80%의 세계는 여전히 화석연료의 물리적 연소 없이는 단 하루도 돌아가지 않습니다. 기후 운동가들이 환호하며 인용하는 재생에너지의 약진은, 엄밀히 말하면 에너지 소비 전체의 5분의 1 안에서 벌어지는 변화입니다.
이 20대 80의 비율이 왜 쉽게 바뀌지 않는지를 이해하려면 전기라는 에너지 형태의 물리적 특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전기는 저장하기 어렵습니다. 액체 화석연료처럼 탱크에 담아 전 세계 어디로든 실어 나를 수 없습니다. 배터리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리튬이온 배터리의 에너지 밀도는 휘발유의 40분의 1에서 50분의 1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 물리학의 벽 앞에서 대형 컨테이너선과 대형 항공기의 전기화는, 2026년 현재 기술 수준으로는 실현 가능한 선택지가 아닙니다. 세계 무역량의 80%를 실어 나르는 해운업은 여전히 벙커C유를 태워 움직이고, 하루 수백만 명을 하늘로 날려 보내는 민간 항공은 항공유 없이 한 발짝도 떠오르지 못합니다.
더 근본적인 취약성은 재생에너지의 간헐성(Intermittency)이 만들어내는 구조적 의존에 있습니다. 바람이 멎고 구름이 낀 날, 재생에너지는 전력을 만들지 못합니다. 이 공백을 채우기 위해 현대 전력망은 언제든 즉각적으로 켜고 끌 수 있는 예비 전력을 반드시 확보해야 합니다. 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탄소 배출이 많다는 이유로 석탄 발전소를 폐쇄하고 이념적 반감에서 원자력 발전소마저 문을 닫으면서, 이 공백을 천연가스로 메우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겉모양은 태양광과 풍력 중심의 친환경 전력망이지만, 그 전력망의 마지막 안전망은 카타르나 미국에서 배에 실려 오는 액화천연가스(LNG)였습니다.
카타르는 세계 LNG 수출량의 약 4분의 1을 책임지는 나라입니다. 라스 라판(Ras Laffan) 단지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단일 LNG 생산 기지로, 그 화물의 대부분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해 유럽과 아시아로 향합니다. 2026년 이란 전쟁으로 해협이 막히고 라스 라판의 가동 리스크가 현실이 되자, 유럽의 천연가스 현물가격은 며칠 사이에 30%를 웃돌며 폭등했습니다. 에너지전환의 기수를 자처하던 독일과 프랑스의 공장들이 가동 중단을 고민해야 했던 이유입니다. 태양광과 풍력이 지붕과 해안을 뒤덮고 있었지만, 바람이 멎은 밤, 그 전력망을 지탱하던 것은 페르시아만의 천연가스였습니다.
이 역설의 뿌리를 캐보면 에너지 정책이 물리학이 아닌 정치의 언어로 설계되었다는 사실과 만납니다. 2050년 넷제로(Net-Zero), 2030년 재생에너지 비중 45%. 이 숫자들은 기후과학이 제시한 최소한의 요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선거 공약과 국제 협약의 무대에서 탄생한 정치적 수치이기도 합니다. 어떤 총리도 자국 유권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에너지 전환에는 수십 년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전기요금이 오르고 산업 경쟁력이 일시적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대신 정치인들은 재생에너지의 극적인 성장 곡선만을 조명하고, 전체 에너지 소비에서 전기가 차지하는 20%라는 현실의 숫자는 조용히 묻어두었습니다.
바츨라프 스밀(Vaclav Smil) 교수는 이 현실에 대해 오래전부터 경고해 왔습니다. 에너지 전환의 역사를 보면, 나무에서 석탄으로, 석탄에서 석유로, 지배적인 에너지원이 교체되는 데는 언제나 50년에서 100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새로운 에너지가 기존 에너지를 밀어내는 방식도 아니었습니다. 인류는 석유를 쓰는 지금도 산업혁명 절정기보다 훨씬 많은 석탄을 태우고 있습니다. 에너지는 대체가 아니라 추가로 쌓입니다. 그런데 2050년까지 화석연료를 전체 에너지 공급의 수십 퍼센트 수준으로 줄이겠다는 선언은, 역사가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속도로 에너지 인프라 전체를 갈아치우겠다는 의미입니다.
2026년 IEA의 분석을 보면, 현재 추세대로라면 2030년까지 화석연료의 세계 에너지 공급 비중은 80%에서 73% 수준으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됩니다. 7퍼센트포인트. 20여 년의 노력과 수십 조 달러의 투자가 만들어낸 변화입니다. 그 7퍼센트포인트 사이에서,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 세계 경제는 여전히 심각한 충격을 받습니다. 재생에너지가 전력망의 37%를 공급하는 세계에서도, 화석연료 공급망 하나가 흔들리면 나머지 시스템 전체가 연쇄 반응을 일으킵니다. 재생에너지의 성장이 화석연료의 취약성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오히려 성급하게 화석연료 인프라에 대한 투자를 억제한 결과, 공급망 내 완충 여력(Spare Capacity)이 줄어들어 작은 충격에도 가격 변동이 더욱 급격해지는 역설이 만들어졌습니다.
2026년 봄, 브렌트유가 배럴당 126달러를 돌파한 이후에도 전 세계 재생에너지 발전기는 멈추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덴마크 북해의 풍력 터빈은 그날도 바람을 맞아 돌아갔고, 캘리포니아의 태양광 단지는 오후 햇볕을 전기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도쿄의 화학 공장은 나프타(Naphtha, 석유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탄화수소로 플라스틱과 합성섬유의 원료)를 구하지 못해 라인을 멈췄습니다. 방콕의 비료 공장은 암모니아 원료가 떨어져 출하를 중단했습니다. 뭄바이의 항공사는 항공유 값이 두 배로 뛰자 노선을 축소했습니다. 이것이 재생에너지 시대가 석유 한 방에 흔들리는 이유의 실체입니다. 전기 생산 방식을 바꾸는 것과, 현대 문명이 기대는 물질적 토대 전체를 바꾸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과제입니다.
32.2 그래도 석유가 필요한 곳들
2026년 3월 5일 아침, 서울 여의도의 한 증권사 리서치 팀은 긴급 보고서를 돌렸습니다. 제목은 "호르무즈 봉쇄와 석유화학 산업의 연쇄 위기"였습니다. 보고서의 첫 문장은 이랬습니다. "현대 전기차에 들어가는 리튬이온 배터리 한 개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황산의 절반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합니다." 그날 롯데케미칼과 LG화학의 주가가 동반 급락한 이유입니다.
이 문장이 왜 중요한지를 이해하려면 전기차 한 대를 만드는 물질의 세계를 한번 따라가 보아야 합니다. 전기차의 배터리 핵심 소재인 코발트와 니켈은 대부분 콩고민주공화국과 인도네시아의 광산에서 캐냅니다. 이 광석을 배터리용 순수 금속으로 정제하는 공정에 황산(Sulfuric Acid)이 대량으로 필요합니다. 황산은 황(Sulfur)을 태워 만드는데, 그 황의 절반 이상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 등 중동 산유국의 원유와 가스 정제 과정에서 부산물로 생산되어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아시아로 실려 옵니다. 해협이 막히면 황 공급이 끊기고, 황 공급이 끊기면 황산 가격이 뛰고, 황산 가격이 뛰면 배터리 광물 정제 비용이 올라가고, 결국 전기차 가격이 오릅니다. 탈탄소의 상징인 전기차가 탈탄소의 반대편에 있다고 여겨지는 화석연료 공급망과 이토록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츨라프 스밀(Vaclav Smil) 교수가 지목한 현대 문명의 네 기둥, 즉 암모니아, 플라스틱, 강철, 시멘트는 각각의 방식으로 이 역설을 증명합니다.
먼저 암모니아입니다. 지구상 80억 인구가 먹는 식량의 절반 이상은 질소 비료 덕분에 생산됩니다. 질소 비료의 원료인 암모니아는 공기 중 질소와 수소를 고온 고압에서 결합시키는 하버-보슈(Haber-Bosch) 공법으로 만들며, 이 수소의 거의 전부를 천연가스에서 추출합니다. 세계 암모니아 생산량의 상당 부분이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오만에서 나옵니다. 이들 나라의 천연가스가 막히면 비료 가격이 오르고, 비료 가격이 오르면 농부들은 사용량을 줄이고, 사용량이 줄면 수확량이 떨어집니다. 2026년 봄 호르무즈 봉쇄 이후 글로벌 비료 가격이 40%를 넘게 뛴 것은 이 연쇄 때문이었습니다.
플라스틱은 더 직접적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모든 플라스틱 제품의 기반은 나프타(Naphtha)와 에틸렌(Ethylene)입니다. 이 물질들은 원유 정제 과정에서 나옵니다. 에틸렌은 석유화학산업 전체의 출발점으로, 비닐봉투, 페트병, 포장재, 의약용품, 자동차 부품, 전자기기 외장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플라스틱 제품의 토대입니다. 그리고 그 에틸렌은 나프타를 고온에서 분해하는 '크래킹(Cracking)' 공정을 통해 만들어지는데, 이 공정 역시 막대한 에너지, 즉 또 다른 화석연료를 소모합니다. 석유가 사라진 세계에서 현재 형태의 플라스틱을 대체할 물질을 지금 기술로는 같은 규모로 생산할 수 없습니다.
강철과 시멘트의 현실은 더 냉혹합니다. 철광석에서 순수한 쇳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코크스(Coke, 제철용 유연탄을 가공한 탄소 덩어리)를 용광로에서 태워야 합니다. 이 공정에서 나오는 열은 섭씨 1,500도를 넘습니다. 전기로 이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 기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지금 기술과 비용 수준에서 전 세계 연간 19억 톤에 달하는 철강 생산량 전부를 전기로 대체하는 것은 현실적 선택지가 아닙니다. 시멘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석회석을 분해해 산화칼슘을 만드는 시멘트 소성로(Kiln)는 섭씨 1,450도까지 올라가야 하며, 이 열을 내는 주요 연료는 석탄과 석유 코크스입니다. 시멘트 제조는 원료 자체가 열분해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방출하기 때문에, 연료를 전기로 바꾼다 해도 탄소 배출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네 가지 이외에도 석유가 없으면 만들어지지 않는 것들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풍력 발전기 블레이드는 에폭시 수지와 폴리에스터 수지, 즉 나프타에서 뽑아낸 에틸렌을 기반으로 한 석유화학 제품으로 만들어집니다. 태양광 패널의 핵심 봉지재(封止材)로 쓰이는 EVA 필름, 즉 에틸렌-비닐아세테이트는 역시 석유화학 공정의 산물입니다. 전기차 타이어의 합성고무는 석유에서 나오고, 그 타이어가 달리는 도로를 포장하는 아스팔트는 원유 정제의 찌꺼기인 역청(Bitumen)을 주원료로 합니다. 병원의 일회용 주사기, 링거 튜브, 수술 장갑이 플라스틱이고, 그 플라스틱의 분자는 원유에서 왔습니다. 스마트폰과 반도체 칩을 만드는 클린룸 안에서도, 세정제와 특수 화학물질 다수가 석유화학 공정의 생산물입니다.
IEEE 스펙트럼에 기고한 글에서 스밀 교수는 5메가와트짜리 풍력 터빈 하나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계산한 적이 있습니다. 기초 콘크리트에 쓰이는 강철 150톤, 나셀과 허브에 쓰이는 강철 250톤, 타워에 쓰이는 강철 500톤. 이 강철을 만들기 위해서는 코크스를 사용하는 용광로가 필요합니다. 60미터가 넘는 블레이드 3개를 만드는 데 필요한 복합재료에는 원유 환산 약 170기가줄(GJ/톤)의 에너지가 녹아 있습니다. 2030년까지 전 세계에 충분한 풍력 발전 설비를 구축하려면 원유 9,000만 톤 상당의 에너지가 그 설비 제작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스밀이 풍력 터빈을 두고 "화석연료의 구현체(Pure Embodiment of Fossil Fuels)"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2026년 봄,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몇 주째 이어지면서 나프타 부족 현상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한국의 석유화학 단지에서는 에틸렌 크래커(Cracker, 나프타를 고온에서 분해하는 장치)의 원료 수급에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대한민국 석유화학 기업들이 국내 수요를 충당하기 어렵게 되자 정부는 비축 나프타 방출을 긴급 검토해야 했습니다.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헬륨(Helium)도 공급 차질을 빚었습니다. 헬륨은 천연가스 채굴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로, 카타르는 세계 3위의 헬륨 수출국입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헬륨 공급처를 미국산으로 대체하려 했지만, 미국산 헬륨 물량은 이미 전 세계 반도체 공장의 수요를 감당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사실이 가리키는 결론은 하나입니다. 석유는 우리가 태워 없애는 연료(Fuel)이기 이전에, 현대 문명을 구성하는 물질(Material)입니다. 연료로서의 석유는 전기로 대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암모니아, 플라스틱, 강철, 시멘트, 아스팔트, 합성고무, 윤활유의 원료로서의 석유는 현재 기술 수준에서 동일한 규모로 대체할 물질이 없습니다. 탈탄소를 향한 에너지 전환이 아무리 빨리 진행된다 해도, 이 물질적 의존을 끊어내지 못하는 한 석유 공급망의 교란은 언제든 문명의 동맥을 직격합니다. 재생에너지의 시대라고 선언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 선언이 현실이 되기까지 우리는 여전히 21마일의 수로 하나에 삶의 상당 부분을 기대고 있습니다.
32.3 에너지 전환의 속도와 현실의 간극
2026년 3월, 브뤼셀의 유럽의회 복도에서 두 종류의 문서가 동시에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기후정책 담당 집행위원이 준비한 '그린딜(Green Deal) 이행 점검 보고서'였고, 다른 하나는 에너지장관들이 긴급 소집한 비공개 회의의 내부 메모였습니다. 전자는 2030년 재생에너지 목표를 향한 순조로운 진전을 보고했습니다. 후자에는 한 줄이 굵게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현재 상황이 4주 이상 지속될 경우, 독일과 이탈리아 일부 산업 지역의 천연가스 공급은 6월 이전에 위기 단계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에너지 전환의 속도와 현실의 간극은 이처럼 문서 한 장 차이에 존재합니다. 선언의 속도와 물리적 현실의 속도 사이에 끼인 공간, 그 공간이 위기 때마다 나타납니다.
이 간극이 왜 생기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전력망(Grid) 인프라의 현실입니다. IEA의 분석에 따르면,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2030년까지 현재의 두 배가 넘는 송배전 인프라가 깔려야 합니다. 전선을 깔고 변전소를 짓고 계통을 안정화하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이 작업의 실제 속도는 태양광과 풍력 발전 설비 설치 속도를 도무지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완공되고도 송전망 부재로 가동을 못 하고 대기 중인 재생에너지 설비가 1,650기가와트(GW)에 달한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독일의 전체 발전 설비 용량의 5배를 넘는 규모입니다. 발전기는 있는데 선이 없는 것입니다.
유럽에서 새 고압 송전선로 하나를 건설하는 데 평균 10년에서 15년이 걸립니다. 환경 영향 평가, 주민 동의, 행정 허가, 법적 이의 제기, 착공, 완공. 이 사슬은 자금을 충분히 투입한다고 빨라지지 않습니다. 지역 주민들은 고압 송전탑이 집 앞을 지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님비(NIMBY, Not in My Back Yard) 현상이고, 이 현상은 선진 민주주의 국가일수록 강하게 나타납니다. 재생에너지를 지지하는 여론이 높은 나라에서도,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지역 주민의 목소리는 거셉니다. 가장 강한 재생에너지 지지자도 고압 송전탑이 자기 집 뒤뜰을 지나는 것은 반대합니다.
전력망 확충보다 더 근본적인 간극은 에너지 저장 기술에 있습니다. 태양광과 풍력의 간헐성을 극복하려면 대규모 에너지 저장이 필수입니다. 배터리 저장 시스템(Battery Storage System)의 비용이 빠르게 내려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국가 전체의 전력 수요를 며칠치 저장하는 규모의 배터리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은 2026년 현재 기술과 비용으로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독일이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50% 이상으로 올렸지만 여전히 바람이 잦아드는 겨울철 '둔켈플라우테(Dunkelflaute, 독일어로 어두운 무풍 상태)'가 찾아오면 석탄과 가스 발전소를 가동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에너지 전환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간극은 지정학적 종속의 대상 교체입니다. 화석연료 시대의 에너지 안보 위협은 중동의 산유국과 러시아였습니다. 재생에너지 시대의 에너지 안보 위협은 핵심 광물(Critical Minerals)의 공급망입니다. 전기차 배터리에 들어가는 리튬(Lithium), 코발트(Cobalt), 흑연(Graphite)의 정제 공정, 풍력 발전기와 전기차 모터에 반드시 들어가는 영구자석의 원료인 희토류(Rare Earth Elements)의 채굴과 가공은 현재 중국이 전 세계 공급의 60%에서 90%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탈탄소 가속이 곧 중국 의존도 심화로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페르시아만의 석유에서 벗어나기 위해 추진한 에너지 전환이, 또 다른 단일 공급처에 대한 지정학적 의존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2026년의 위기는 이 간극의 현실적 의미를 증명하는 검증 무대가 되었습니다.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아프리카·남아시아·동남아시아·중남미 개발도상국들)의 반응을 보면 더욱 선명합니다. 이들 나라에서 에너지 정책의 최우선 과제는 탄소 감축이 아니라 에너지 빈곤 탈출입니다. 아직 전기를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는 인구가 수억 명에 이르는 상황에서, 선진국이 설정한 탄소중립 일정표를 자국에도 그대로 적용하라는 요구는 현실을 무시한 요구입니다. 개발도상국 입장에서 가장 빠르고 저렴하게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는 수단은 여전히 석탄이나 천연가스입니다. 재생에너지 인프라를 구축하려면 자본 조달 비용이 선진국의 두 배에 달하고, 인허가와 기술 인력 확보도 훨씬 어렵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중국과 인도는 2026년에도 신규 석탄 화력 발전소 건설을 계속했습니다. 기후 목표의 언어와 에너지 현실의 물리학 사이에서 이들이 선택한 것은 전기가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1970년대 오일쇼크, 2022년 러시아발 에너지 위기, 그리고 2026년 호르무즈 위기는 모두 같은 교훈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특정 에너지원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외부 충격 앞에서 경제 전반을 취약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훈이 요구하는 처방은 재생에너지를 빠르게 늘리는 것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현대 경제를 지탱하는 산업 공정의 탈탄소화, 에너지 저장 기술의 도약, 전력망의 대규모 확충, 핵심 광물 공급망의 다변화, 그리고 넷제로 전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필요한 기저 부하(Base Load) 전력의 확보. 이 모든 과제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합니다.
기후과학은 에너지 전환의 필요성을 옳게 지적합니다. 그러나 에너지 전환의 속도는 과학자의 보고서가 아니라 실제 변압기의 납품 기간과 송전탑 건설 인허가 기간, 그리고 용광로와 비료 공장을 전기화하는 데 필요한 녹색 수소의 생산 비용이 결정합니다. 정치인들이 선언한 날짜와, 물리적 인프라가 갖춰지는 날짜 사이에 존재하는 이 간극은 구호로 메울 수 없습니다.
2026년의 위기가 남긴 가장 쓴 교훈은 이것입니다. 재생에너지 전환을 서두르면서 동시에 화석연료 공급망에 대한 투자를 적대시한 결과, 세계는 구체제도 아니고 신체제도 아닌 가장 위태로운 전환기의 한가운데서 위기를 맞았습니다. 석탄과 원자력이라는 안정적인 기저 전력을 스스로 걷어낸 채, 태양광과 풍력과 가스라는 불안정한 삼각형 위에 경제를 올려놓고, 그 가스의 마지막 보루가 막힌 것입니다.
에너지 전환의 방향은 옳습니다. 속도와 경로는 현실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정해야 합니다. 그 범위를 외면한 채 이상만을 앞세운 대가를, 2026년의 세계는 배럴당 126달러와 텅 빈 마닐라 거리와 멈춰선 독일 공장의 모습으로 치렀습니다. 석유 시대의 마지막 경고는 석유를 없애라는 신호가 아니라, 석유를 없애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알라는 신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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