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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35장 에너지 안보의 재정의
2026년 미국 이란 전쟁과 전 세계의 에너지 위기
35장 에너지 안보의 재정의
김경진
제35장 에너지 안보의 재정의
35.1 98% 수입 의존의 필리핀에서 배우는 것
2026년 3월 25일, 마닐라 바클라란 성당 앞 광장은 조용했습니다. 수요일마다 수만 명이 몰려들어 형형색색의 꽃 노점상과 바비큐 냄새, 지프니의 경적 소리로 가득 찼던 그 광장이, 성주간(Holy Week)이 시작되는 수요일 오후에 묘한 침묵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지프니 운전사 루벤 산토스는 이날 새벽 다섯 시에 차고에서 엔진을 걸었다가 그냥 시동을 껐습니다. 리터당 150페소를 넘어선 디젤 가격으로 하루 종일 달려봤자 기름값을 건질 수 없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입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는 하루 600~700페소를 손에 쥐었습니다. 지금은 연료비를 빼고 나면 200페소도 남지 않습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Ferdinand Marcos Jr.) 필리핀 대통령이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State of National Energy Emergency)를 선포한 것은 이날, 3월 25일이었습니다. 마닐라에서 공항까지의 26킬로미터 구간이 평소 두 시간이 걸렸지만, 선포 당일 이 길은 45분이면 충분했습니다. 텅 빈 도로는 코로나 봉쇄 당시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마르코스 대통령이 서명한 행정명령 110호(Executive Order No. 110)는 "중동의 분쟁이 지속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국가 에너지 공급의 가용성과 안정성에 임박한 위험이 발생하고 있다"는 문구를 담고 있었습니다. 비상 기간은 일단 1년으로 설정되었습니다.
이것은 전쟁 당사국이 아닌 나라가, 자국 영토에서 한 발의 총성도 울리지 않은 채, 순전히 기름값이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한 사건이었습니다. 필리핀 역사에도, 세계 어느 나라의 기록에도 없던 일이었습니다.
필리핀은 석유의 98%를 중동에서 수입합니다. 전쟁이 시작되고 한 달 만에 국내 석유 비축량은 빠르게 줄어들었고, 인플레이션은 사상 최고치에 근접했습니다. 3월 20일 기준으로 필리핀 에너지부(DOE)는 국내 평균 연료 재고가 45일분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전쟁 발발 직전의 55~57일분에서 크게 줄어든 수치였습니다.
45일분이라는 숫자를 들으면 적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 숫자는 호르무즈가 다시 열린다는 전제 아래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해협이 계속 막혀 있는 상태에서 45일은 그냥 카운트다운입니다.
필리핀 에너지부 2024년 에너지 통계 소책자는 이미 1년 전에 호르무즈 봉쇄 시나리오가 필리핀에 미칠 충격을 수치로 정리해 두고 있었습니다. 원유 수입의 95% 이상이 페르시아만에서 온다는 사실, 사우디아라비아가 그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사실, 운송 부문이 필리핀 경제의 4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는 사실이 모두 거기에 있었습니다. 정책 입안자들에게 문서는 있었습니다. 숫자도 있었습니다. 없었던 것은 그 숫자를 당장 행동으로 옮기는 긴박감이었습니다.
경고는 공문서 창고 안에서 잠자고 있었고, 위기는 예고도 없이 달려왔습니다.
3월 24일 기준으로 디젤 가격은 리터당 130페소(약 2.64달러)를 넘어섰고, 휘발유는 100페소(2.03달러) 이상으로 치솟았습니다. 필리핀 정부는 중국, 인도, 러시아 등 비전통적 공급처를 상대로 긴급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페트론(Petron)은 미국의 30일 제재 유예 조치를 활용해 러시아산 원유 70만 배럴을 주문했습니다.
페소화는 달러당 60.30페소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달러가 비싸지자 원유를 살 때 지불해야 하는 페소 금액이 두 배로 뛰었습니다. 기름값이 올랐을 때 환율마저 무너지면, 그 충격은 단순 합산이 아니라 곱셈으로 작동합니다.
정부는 수도권 경전철(LRT, MRT)의 요금을 50% 할인했고, 대중교통 종사자 140만 명에게 1인당 5,000페소(약 83달러)의 긴급 보조금을 지급했습니다. 에너지부는 200만 배럴의 긴급 비축물량 확보를 목표로 세웠지만, 실현 여부는 불투명했습니다.
예산관리부는 말람파야(Malampaya) 가스전 기금에서 200억 페소(약 4,060억 원)를 긴급 방출하여 연료 확보에 투입하기로 했습니다. 소르소곤(Sorsogon) 주는 치솟는 기름값으로 인한 지역 경제 마비를 이유로 주 차원의 재난 상태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운송업 단체들은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며 전국 파업에 나섰습니다. 마르코스 대통령이 가격 인상 통제에 실패하고 있다고 정면으로 비판했습니다.
지프니 운전사 에밀리 루아도(Emily Ruado, 59세, 4명의 자녀를 둔 어머니)는 알 자지라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루에 10달러를 벌었는데, 지금은 기름값을 빼면 5달러도 안 남아요. 겨우 버티고 있는 수준이에요." 루아도처럼 하루 벌어 하루 먹는 필리핀 서민들에게, 에너지 위기는 통계 속의 숫자가 아닙니다. 매일 저녁 식탁에 오르는 반찬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필리핀의 운송 부문은 단순히 가장 많은 석유를 소비하는 섹터가 아닙니다. 하루 4,000만 명이 이용하고 200만 명 가까이 종사하는 이 부문은 필리핀 경제의 순환계 자체입니다. 지프니가 서면 물건이 돌지 않고, 물건이 돌지 않으면 시장이 죽습니다.
라오스는 주 3일 수업제를 도입했습니다. 베트남은 재택근무를 권장하고 일부 연료세를 4월 15일까지 한시적으로 면제했습니다. 태국 총리는 연료를 아끼고 사재기하지 말라고 국민에게 호소했습니다. 아세안 전체가 비상시 경제 체제로 전환하고 있었습니다.
필리핀은 동남아시아에서 태양광 자원이 가장 균일하게 분포된 나라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2026년 기준으로 태양광이 전체 발전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에 불과합니다. 운송 부문은 거의 전적으로 석유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필리핀이 가진 역설입니다. 매일 태양이 쏟아지는 군도에서, 사람들이 기름값에 짓눌려 아침밥을 굶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기술과 자원은 있었습니다. 행동으로 옮기는 긴박감이 없었습니다.
필리핀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정보 부족이 아닙니다. 정치적·제도적 도전의 문제입니다. 취약성을 공식 데이터에서 인식하는 것과 그 취약성을 충분한 긴박감으로 다루는 것 사이의 거리가, 위기 발생의 메커니즘이 잘 이해되고 지정학적 신호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데도 좁혀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에너지를 외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국가는 강대국들의 싸움에서 가장 먼저 피를 흘립니다. 전쟁의 직접 당사국이 아님에도, 호르무즈 해협과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섬나라 서민의 밥상이 먼저 흔들립니다. 이것이 에너지 종속의 본질이고, 필리핀이 세계를 향해 보낸 가장 선명한 경고입니다.
35.2 비축유 정책의 한계
2026년 3월 11일 파리. 국제에너지기구(IEA, International Energy Agency) 본부에서 파티 비롤(Fatih Birol) 사무총장이 기자회견장에 섰습니다. 그는 조용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했습니다.
"우리가 직면한 석유 시장의 도전은 전례가 없는 규모입니다. 그래서 IEA 32개 회원국이 전례 없는 규모의 긴급 공동 행동으로 대응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IEA 32개 회원국은 만장일치로 비상 비축유 4억 배럴(400 million barrels)을 시장에 방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것은 IEA가 창설된 1974년 이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공동 방출이었습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방출한 1억 8,200만 배럴의 두 배가 넘는 물량이었습니다.
발표 직후 브렌트유 가격은 119달러에서 잠시 90달러 초반대로 미끄러졌습니다. 언론은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각국 정부는 서방의 결속력이 시장을 안정시켰다고 자축했습니다.
그 안도감은 며칠을 버티지 못했습니다.
세계 석유 소비량은 하루 평균 1억 500만 배럴(105.17 mb/d)입니다. 4억 배럴은 글로벌 수요로 환산하면 고작 4일 치에 불과합니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던 하루 2,000만 배럴과 비교하면 20일 분량입니다. 에너지 전략가 나이프 알단데니(Naif Aldandeni)는 이 조치를 "큰 상처에 붙인 작은 반창고"라고 불렀습니다.
미국은 전체 방출량의 43%인 1억 7,200만 배럴을 120일에 걸쳐 방출하기로 했습니다. 이를 일 단위로 환산하면 하루 140만 배럴입니다. 호르무즈 봉쇄로 인한 손실분의 15% 수준에 불과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방출 승인 이후 실제로 기름이 시장에 도달하기까지는 13일이 걸립니다. 파이프라인과 해운망, 정유 시설을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전략비축유(SPR, Strategic Petroleum Reserve)는 2026년 2월 18일 기준으로 4억 1,540만 배럴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방출하기로 한 1억 7,200만 배럴은 현재 보유량의 41%에 해당합니다. IEA 전체 회원국의 비축유 1억 2,000만 배럴 중 4억 배럴을 방출하면 전체의 33%가 소진됩니다.
이 숫자들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전 세계가 50년간 비상용으로 쌓아온 비축유의 3분의 1을 한꺼번에 쏟아붓고도, 호르무즈 해협이 막혀 있는 한 시장은 3주 후 다시 공황에 빠집니다.
IEA의 공식 보고서는 솔직했습니다. "비축유의 공동 방출은 의미 있고 환영할 만한 완충재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분쟁이 빠르게 해결되지 않는 한, 이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석유와 가스 시장에 대한 최종적인 충격은 군사 공격의 강도와 호르무즈 해협 운항 중단의 지속 기간에 달려 있습니다."
시장은 이미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4억 배럴 방출 발표 직후에도 브렌트유는 100달러를 다시 돌파했습니다. 트레이더들은 4억 배럴이라는 숫자에 안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숫자가 20일짜리라는 것을 계산기 없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에너지 분야 컨설팅 회사 라이스타드(Rystad Energy)의 톰 라일스(Tom Liles) 연구 부사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쿠웨이트, UAE가 전쟁 이전에는 하루 1,400만 배럴을 수출했습니다. 사우디와 UAE의 우회 파이프라인을 통해 홍해와 오만만으로 하루 500만~600만 배럴을 뽑아낼 수 있습니다. 나머지 900만 배럴, 전 세계 공급량의 약 10%는 호르무즈가 열리지 않는 한 어디에도 갈 수 없습니다."
오일 전문가 나빌 알마르수미(Nabil al-Marsoumi)는 가격 급등의 성격을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호르무즈 봉쇄는 시장의 기초 여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배럴당 40달러의 지정학적 위험 프리미엄(Geopolitical Risk Premium)을 추가했습니다. 전략비축유 방출은 그 프리미엄을 일시적으로 억누르는 도구이지, 근본적인 시장 재균형을 가져오는 수단이 아닙니다."
물리적 한계는 또 있습니다.
비축유 방출은 LNG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전 세계 LNG 수출량의 20%가 시장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IEA의 방출은 원유 시장을 겨냥한 조치입니다. 전기 생산과 난방에 쓰이는 가스 부족은 별도의 위기로 진행 중입니다.
비축유는 구조적으로 단기 충격 흡수기입니다. 1973년 오일쇼크 이후 서방이 비축유 제도를 만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아랍 국가들이 수출 금지를 풀 때까지 버티기 위한 완충재였습니다. 몇 주, 길어야 몇 달의 공백을 메우는 다리였습니다.
그런데 2026년의 호르무즈 봉쇄는 다릅니다. 이란은 협상이 시작되어 군사적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해협을 열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그 협상이 언제 끝날지, 조건이 무엇인지는 불투명합니다. 다리는 놓였습니다. 다리 건너편의 땅이 언제 나타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전략비축유 분석 보고서는 이 딜레마를 냉정하게 정리했습니다. "4억 배럴의 방출은 분쟁 해결 속도에 대한 계산된 도박입니다. 전쟁이 60일을 넘기면 비축유는 빠르게 고갈되고, 대안적 공급 개발은 인프라 제약으로 인해 여전히 제한적입니다. 32개국이 계속 방출에 합의를 유지하는 동안 국내 정치 압력과 전략 비축 적절성에 대한 개별 우려가 충돌하기 시작합니다."
라피단 에너지 그룹(Rapidan Energy Group)의 밥 맥낼리(Bob McNally)는 시장의 분위기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트레이더들은 이제 계산을 마쳤습니다. IEA 방출은 기껏해야 호르무즈 운항 중단으로 인한 하루 1,500만 배럴의 원유와 정제유 공급 손실의 일부만 상쇄할 수 있습니다."
앤디 리포(Andy Lipow) 리포 오일 어소시에이츠(Lipow Oil Associates) 대표는 IEA 조치의 또 다른 의미를 지적했습니다. "IEA가 이 정도로 행동했다는 것은, 일부 시장 참여자들에게 분쟁이 수주 이상 지속될 수 있다는 신호로 읽히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응급 처방이 시장에 공포를 주입하는 역설이 벌어졌습니다.
비축유 정책이 만들어진 지 50년이 지났습니다. 그 50년 동안 세계는 비축유가 막아줄 것이라는 안도감 속에서 에너지 수입 의존 구조를 방치했습니다. 한국은 IEA 기준에 맞춰 비축유를 쌓았고, 일본도 그렇게 했고, 필리핀은 45일 치를 확보했다고 자위했습니다. 그 비축량은 이제 타이머처럼 소진되어 가고 있습니다. 4일 치의 전 세계 비축유로 한 달 위기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은, 어떤 경제학 교과서에도 굳이 적혀 있지 않은 상식입니다.
35.3 에너지 다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안보
한국의 이재명 대통령은 이란 전쟁 이전까지 세 가지 우선순위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경제 회복, 포용적 성장 의제 추진, 그리고 한국의 에너지 전환에 필요한 재정 확보입니다. 호르무즈 봉쇄는 이 세 가지 목표를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서 서로 충돌하는 경쟁 관계로 뒤바꿔놓았습니다.
에너지 가격이 오르면 가계의 실질 구매력이 무너집니다. 이를 막기 위해 보조금을 투입하면 사회 프로그램 재원이 고갈됩니다. 에너지 전환 투자를 늘리려면 당장의 위기 대응 예산이 줄어듭니다. 위기가 가져온 것은 선택지 자체의 소멸입니다.
한국은 에너지의 94%를 수입에 의존합니다. 원유의 70%는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으로 들어옵니다. LNG는 전체 에너지의 19%, 전력 생산의 25%를 담당합니다. 전쟁이 터지자 정부는 즉각 가스 가격 상한제를 도입했습니다. 30년 만에 처음입니다. 전략비축유 방출에 참여하고, 석탄 발전 한도를 풀고, 원전 가동률을 80%까지 올리기로 했습니다.
이 모든 조치는 단기 응급처치입니다. 진단은 이미 나와 있었고, 처방도 알고 있었습니다. 실행하지 않고 있었을 뿐입니다.
한국의 나프타(Naphtha, 플라스틱·합성섬유의 원료가 되는 석유화학 기초 원료) 수입 중 70% 이상이 중동에서 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는 러시아산이 26%를 차지했지만, 제재 동참 이후 빠르게 중동 의존도를 높였습니다. 이제 전쟁이 중동을 강타하자, 한국 기업들은 다시 러시아산 나프타 수입 재개를 정부에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나프타 가격은 한 달 사이 50% 급등하여 톤당 875달러 선에 달했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나프타 소비량의 3분의 2를 수입에 의존하며, 한국은 그 60%를 페르시아만에서 들여옵니다.
나프타 공급 충격은 IV 주사액 포장재부터 쓰레기봉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제약 포장 재고는 2~3개월 분량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항공유 주간 평균 가격은 배럴당 197달러로 한 달 만에 105% 뛰었습니다.
반도체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피치(Fitch)는 보고서에서 한국이 헬륨 부족에 가장 취약한 국가 중 하나라고 분석했습니다. 한국은 헬륨의 64.7%를 카타르(Qatar)에서 수입합니다. 대만도 카타르 의존도가 높습니다. 일본은 미국에서 절반, 카타르에서 28~33%를 들여오며 재고도 두 곳에 분산되어 있어 상대적으로 충격이 작습니다.
헬륨 외에도, 한국의 브롬(Bromine) 수입 97.5%는 이스라엘에서 옵니다. 브롬은 반도체 식각 공정에 필수적인 소재입니다. 황산(Sulfuric acid)과 알루미늄은 중동 외 지역에서 들여오지만, 정밀 계측 장비의 상당 부분은 이스라엘 생산에 의존합니다.
카네기 국제평화기금의 분석은 핵심을 짚었습니다. "이란 전쟁은 한국의 에너지 취약성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해졌는지를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AI 붐이 칩 가격을 사상 최고치로 끌어올렸고, 대형 테크 기업들은 이미 삼성과 SK하이닉스의 첨단 메모리 칩에 대한 다년간 계약을 체결해 두고 있었습니다. 호르무즈 봉쇄가 공급망을 흔들기 전부터 시장은 이미 빡빡했습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메모리 칩 생산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지정학적으로 불안정한 항로에 에너지를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일본과의 비교는 교훈적입니다. 1970년대 오일쇼크를 겪은 일본은 이후 에너지원을 공격적으로 다변화했습니다. 핵 발전 용량을 늘리고, 전략 비축유를 쌓았습니다. 그 결과, 지금 일본은 한국에 비해 호르무즈 충격을 견디는 능력이 훨씬 높습니다. 같은 조건의 충격이 달리 작용하는 것은 정치적 선택이 에너지 안보를 어떻게 다르게 형성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한국인들은 샤워 시간을 줄이고 낮에 스마트폰을 충전하라는 권고를 받았습니다. 일본은 화장지를 사재기할 필요가 없다고 국민을 안심시켰습니다. 에너지 위기가 소비 심리와 생활 방식에까지 파고들었습니다.
우드 맥킨지(Wood Mackenzie)는 전쟁이 지속될 경우 브렌트유가 배럴당 15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올해 평균 가격이 125달러를 기록한다면 세계 경제는 침체에 빠질 것이라는 경고도 함께 내놓았습니다.
카네기 보고서는 두 가지 긴급 과제를 제시했습니다. 첫 번째는 수입 화석 연료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국내에서 확보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에너지 자원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경기 반도체 클러스터에 3기가와트의 추가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경기도와 한국전력공사가 새 송전선 건설에 합의한 것처럼, 인프라와 전력망 확충을 제도적으로 연계하는 것입니다.
미국산 에너지를 중동 대신 태평양 항로로 들여오는 공급망 전환, 원전 가동률 확대, 대안 에너지 인프라 구축 같은 장기 조치들이 이제 비로소 국가 안보의 언어로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위기가 강제한 전환입니다.
에너지 다변화는 오랫동안 환경 운동의 언어로 이야기됐습니다. 탄소를 줄이고, 기후를 지키자는 목표 아래에서. 그 언어가 지금 바뀌고 있습니다. 에너지 다변화는 안보입니다. 지구 반대편의 전쟁 한 번에 반도체 공장이 멈추고, 지프니 운전사의 수입이 반 토막 나고, 주부들이 화장지를 사재기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으려면, 에너지는 한 줄기 항로에 묶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낙관론을 매일 쏟아냈습니다. 그러나 분석가들은 휴전이 성사되더라도 수개월, 어쩌면 수년간의 경제적 고통이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의 세계는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호르무즈 해협은 다시 열릴 것입니다. 그러나 98% 의존이라는 구조, 4일 치에 불과한 비축유, 단 하나의 가스전에서 헬륨의 3분의 2를 사 오는 공급망은, 다음 위기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고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역사는 이것을 반복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클라란 성당 앞 광장은 언젠가 다시 시끄러워질 것입니다. 루벤 산토스의 지프니도 다시 달릴 것입니다. 문제는 그다음 위기가 왔을 때 그가 또다시 차고에서 시동을 끄는 아침을 맞이하느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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