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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제2장. AI 도입의 성패를 가르는 10:20:70 법칙과 업무 혁신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잡기까지, 수백 개의 도시 국가가 같은 바다에서 경쟁했다. 군선을 가진 나라는 많았다. 갑옷을 만드는 기술도 비슷비슷했다. 그런데 결국 지중해를 손에 넣은 것은 로마 하나였다. 배와 갑옷의 차이가 아니었다. 그것들을 쓰는 사람과 조직의 차이였다.
지금 AI 세계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전 세계 기업의 90%가 이미 AI를 도입했다. 회의실에서 "우리도 AI 씁니다"라고 말 못 하는 회사가 거의 없는 셈이다. 그런데 AI를 써서 실제로 돈을 벌거나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 데 성공한 회사는 겨우 9%다. 열 곳 중 아홉 곳이 경기장에 뛰어들었는데, 결승선을 통과한 건 열 곳 중 한 곳도 안 된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대부분의 회사가 같은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비싼 AI를 사면 된다"는 착각. 시장에서 가장 좋다는 AI 프로그램을 거금을 들여 구매하면, 마치 마법처럼 회사가 변할 거라고 믿는 것이다. 이건 마치 세계에서 제일 비싼 F1 경주차를 샀다고 해서, 면허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프로 레이서가 될 거라고 기대하는 것과 같다. 차가 아무리 좋아도, 운전하는 사람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출발선에서 벽을 들이받는다.
보스턴 컨설팅 그룹(BCG)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경영 자문 회사가 있다. 이 회사가 수많은 기업의 AI 도입 사례를 분석하고 나서 하나의 법칙을 내놓았다. '10:20:70 법칙'이다.
AI 도입이 성공할 때, 그 성공의 10%는 AI 프로그램 자체의 성능에서 나온다.
20%는 컴퓨터, 서버, 데이터 저장소 같은 기술 장비에서 나온다.
나머지 70%는 사람과 일하는 방식의 변화에서 나온다.
10%와 20%를 합치면 30%다. 이 30%는 뭘까.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것들이다. 좋은 AI 모델? 구매할 수 있다. 빠른 컴퓨터? 주문하면 된다. 클라우드 서버? 카드 결제하면 당장 쓸 수 있다. 2026년 현재, 뛰어난 AI 모델은 오픈AI(OpenAI), 앤스로픽(Anthropic), 구글(Google) 등 여러 회사가 내놓고 있어서, 누구나 비슷한 수준의 AI를 쓸 수 있게 되었다. MIT 슬론 경영대학원의 연구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AI 모델은 빠르게 '누구나 쓸 수 있는 공공재'가 되어가고 있다고.
그렇다면 진짜 승부는 어디서 갈리느냐. 나머지 70%다. 사람들이 AI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일하는 순서를 어떻게 바꾸느냐, 조직 문화가 새로운 도구를 허용하느냐. 이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시간과 노력과 리더의 결단이 필요하다.
로마가 강했던 이유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된다. 로마의 검(글라디우스)은 특별히 뛰어난 무기가 아니었다. 짧고 투박했다. 켈트족의 긴 칼이 겉보기에는 더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로마 군단이 이겼다. 검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검을 쓰는 군단 편제, 훈련 체계, 지휘 구조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무기의 성능이 30%라면, 그것을 쓰는 조직과 사람이 70%였다.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 비율은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
마이크로소프트와 링크드인이 전 세계 직장인 2만 명 이상을 조사한 보고서가 있다. 그 결과가 흥미롭다. AI를 잘 쓰는 사람과 못 쓰는 사람의 차이에서, 개인의 능력이 영향을 미치는 비율은 32%에 그쳤다. 나머지 67%는 회사의 문화와 지원 체계가 결정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 혼자 AI를 열심히 배워도, 회사가 "그건 아직 쓰지 마" "보안 문제가 있어"라며 막아버리면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회사가 막든 말든, 직원들은 이미 AI를 쓰고 있다. 78%의 직장인이 회사의 허락 없이 개인적으로 챗GPT나 클로드 같은 AI 도구를 업무에 쓰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이걸 '섀도우 AI(Shadow AI)'라고 부른다. 그림자처럼 회사 모르게 쓴다는 뜻이다.
2026년 기준으로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98%의 기업에서 허가 없이 AI를 쓰는 직원이 발견되고 있다. 직원의 47%는 개인 계정으로 AI 도구에 접속해서 회사 일을 처리한다. 38%는 회사의 기밀 정보를 AI에 넣어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IBM의 2025년 보고서에 따르면, 이런 섀도우 AI 때문에 정보가 유출되면 한 건당 평균 67만 달러(약 9억 4천만 원)의 추가 비용이 든다.
직원들이 규칙을 어기려고 이러는 걸까. 아니다. 일을 빨리, 잘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다. 회사가 좋은 AI 도구를 제공하지 않으니, 직원이 알아서 찾아 쓰는 것이다. 실제로 한 의료 기관에서 공식 AI 도구를 제공했더니, 허가 없이 AI를 쓰는 비율이 89%나 줄어들었다는 결과가 있다. 막는 게 답이 아니라, 제대로 된 도구를 내주는 게 답이라는 뜻이다.
가장 안타까운 부류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AI를 아주 잘 쓰는데, 회사의 지원이 없어서 성장이 막힌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주말에 시간을 쪼개서 AI 사용법을 공부한다. 일을 열 배 빠르게 처리하는 방법을 알아낸다. 하지만 그걸 동료들과 나누지 않는다. 왜? 회사에서 알아주지도 않고, 오히려 "쓸데없는 짓 한다"며 눈총을 받을까 봐. 혁신을 시도했다가 욕먹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2천 년 전 로마에서도 있었다. 유능한 장군이 전장에서 새로운 전술을 시도하고 싶어도, 원로원이 "전통대로 하라"고 고집하면 꼼짝할 수 없었다.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로마 장군 파비우스 막시무스(Fabius Maximus)는 정면 대결을 피하고 지연 전술을 택했다. 원로원과 시민들은 그를 '꾸물이(Cunctator)'라고 비웃었다.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는 사람은 언제나 기존 체계의 저항에 부딪힌다.
AI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과 문화의 문제다.
AI를 도입할 때 기술 부서에만 맡겨놓고, 직원들의 마음은 신경 쓰지 않는 회사가 많다. 이러면 '문화 빚(Culture Debt)'이 쌓인다. 빚은 갚지 않으면 이자가 붙듯이, 문화 빚도 방치하면 점점 커진다.
56%의 기업이 AI를 도입하면서 직원들의 불안감이나 공정성 같은 문제를 무시했다. 그 결과, 60% 이상의 직원이 '변화 피로(Change Fatigue)'를 느끼고 있다. 새 도구가 나올 때마다, 새 시스템이 바뀔 때마다, 지쳐서 더 이상 따라가기 싫어지는 것이다.
이 문제의 열쇠가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이다. 어려운 말처럼 들리지만, 뜻은 간단하다. "실수해도 괜찮은 분위기." 새로운 AI 도구를 써보다가 잘못해도 혼나지 않고, 바보 취급당하지 않는 환경. "한번 해봤는데 안 됐어요"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직장.
이건 단순히 '직원 복지'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돈과 직결되는 문제다. 직원들이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팀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27% 더 많이 나오고, 결정을 내리는 속도가 35% 빨라지며,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이 50%나 줄어든다는 연구가 있다.
스페이스X(SpaceX)를 예로 들어보겠다. 일론 머스크(Elon Musk)의 이 우주 회사는 로켓이 폭발해도 "실패"라고 부르지 않는다. "빠른 비계획 해체(Rapid Unscheduled Disassembly)"라는 표현을 쓴다. 농담 같지만, 이 말에는 철학이 담겨 있다. 실패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다음번에 더 잘하기 위한 데이터다. 로켓이 터지면 "왜 터졌지?"를 분석하고, 그 교훈으로 다음 로켓을 더 낫게 만든다.
BCG의 에르네스토 파가노(Ernesto Pagano) 수석 파트너도 같은 말을 했다. "직원들이 AI를 자기를 대체하는 도구가 아니라, 자기를 돕는 도구로 이해하게 되면 비로소 받아들입니다." 강요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신뢰를 쌓아야 한다.
70%의 변화를 이끌려면 새로운 종류의 인재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회사에는 큰 골짜기가 하나 있었다. 한쪽에는 기술 부서가 있다. 컴퓨터와 AI를 다루는 사람들이다. 다른 한쪽에는 사업 부서가 있다. 고객을 만나고, 물건을 팔고, 돈을 버는 사람들이다. 이 두 부서는 같은 회사에서 일하면서도 서로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사업 부서가 "고객 만족도를 올리고 싶어"라고 말하면, 기술 부서는 "그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죠? 어떤 수치를 올리라는 건가요?"라고 되묻는다. 사업 부서는 기술의 말을 모르고, 기술 부서는 사업의 말을 모른다. 이 소통 실패 때문에 엉뚱한 AI가 만들어지고, 돈과 시간이 낭비된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AI 제품 매니저(AI PM)'다. 이 사람은 통역사다. 사업 부서의 모호한 바람("고객이 더 만족하게 해주세요")을 기술 부서가 알아들을 수 있는 구체적인 업무 지시("고객 문의 응답 시간을 현재 24시간에서 2시간으로 줄이는 AI 챗봇을 만드세요. 단, 오답률은 5% 이하로 유지하세요")로 번역해주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코딩을 직접 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두 가지를 동시에 이해해야 한다. 사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리고 AI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못하는지. 두 세계의 말을 모두 구사하는 '이중 언어 구사자'인 셈이다.
로마 제국이 그리스, 이집트, 갈리아 등 수십 개의 다른 문화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모두 구사하면서 각 지역의 사정을 이해하는 '통역 관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술과 사업 사이에도 이런 통역자가 필요하다. 2026년의 기업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인재가 바로 이 AI PM이다.
마지막으로, 70%의 변화를 끌어내는 가장 강력한 힘은 무엇일까.
마이크로소프트 보고서의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리더가 직접 AI를 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사장이 회의 시간에 직접 AI에게 질문하고, 결과를 함께 검토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직원들은 "아, 이건 진짜구나"라고 느낀다. 반대로 사장이 뒤에서 보고서만 받으면서 "AI 잘 도입해"라고만 말하면, 직원들은 "그냥 유행이구나, 흐지부지되겠지"라고 생각한다.
BCG의 파가노 파트너도 같은 관찰을 전했다. 200쪽짜리 계획서를 만들어놓고 컨설턴트가 떠나면 아무도 안 본다. 대신, 리더가 직접 AI를 쓰면서 팀원들과 함께 시행착오를 겪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그는 이런 리더를 '직접 뛰는 최고경영자(ICCEO, Individual Contributor CEO)'라고 불렀다.
결국, AI 도입의 진짜 승부처는 "어떤 AI를 샀느냐"가 아니다. "우리 회사의 사장과 직원이, AI와 함께 일하는 문화를 얼마나 빨리 만들어냈느냐"에 달려 있다.
미국에 70억 달러(약 10조 원) 규모의 대형 보험 회사가 있었다. 이 회사는 AI에 진심이었다. 무려 52개의 AI 시범 프로젝트를 돌렸다. AI 모델의 정확도도 목표치를 달성했다. 기술적으로는 성공이었다.
그런데 18개월이 지나고 보니, 회사의 일하는 방식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보험금 심사를 하는 직원은 여전히 예전 방식대로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AI는 한쪽 구석에서 가끔 참고하는 별도의 화면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52개 프로젝트에 들인 돈과 시간은 거의 허공에 뿌린 셈이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기술은 바꿨는데, 일하는 순서는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걸 전문가들은 '볼트온(Bolt-on)' 방식이라고 부른다. 볼트(Bolt)는 나사다. 기존의 낡은 기계에 새 부품을 나사로 억지로 붙여놓는 방식. 1980년대에 만든 낡은 자동차 차체에 2026년형 최신 엔진을 박아 넣는 것과 같다. 엔진이 아무리 좋아도, 차체가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면 달리다가 부서진다.
많은 회사가 이 실수를 저지른다. 30년 동안 써온 업무 절차는 그대로 두고, 그 위에 AI만 얹는다. 처음에는 조금 빨라지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정도의 개선은 경쟁사도 똑같이 할 수 있다. 진짜 승부는 일하는 순서 자체를 처음부터 다시 그리는 회사와, 낡은 순서에 새 도구만 끼워 넣는 회사 사이에서 갈린다.
BCG가 2026년 3월에 발표한 보고서는 이 점을 분명히 했다. AI 에이전트를 대규모로 쓰려면, 기존의 업무 과정 자체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고. 잘 설계된 에이전트 기반 업무 과정은 "내가 제대로 들었나?" "빠뜨린 게 없나?" 같은 확인 단계를 크게 줄여준다. 기존에 며칠 걸리던 검토가 몇 분 만에 끝나기도 한다.
물어야 할 질문이 바뀌어야 한다. "AI를 써서 기존 일을 어떻게 더 빨리 할까?"가 아니라, "AI가 있는 세상에서, 이 일을 처음부터 만든다면 어떻게 만들까?"
기존 방식에 AI를 억지로 끼워 넣으면 생기는 문제가 하나 더 있다. 결재 병목이다.
많은 회사에서 AI가 보고서를 만들면, 먼저 담당자가 확인한다. 그 다음 팀장이 확인한다. 그 다음 부장이 확인한다. AI가 아무리 빨리 결과를 내놓아도, 사람이 한 단계씩 승인하는 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으면 전체 속도는 사람 속도에 묶인다. 이름만 AI이지, 실제로는 예전의 수작업 과정을 그대로 반복하는 꼴이다.
그래서 진짜 변화는 승인 구조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매번 사람이 확인하는 '절차적 안전장치' 대신에, 시스템 설계 단계에서부터 안전장치를 심어놓는 '구조적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보겠다. AI가 회사의 고객 데이터에 접근할 때, "이 AI는 A등급 데이터까지만 볼 수 있고, B등급은 못 본다"는 규칙을 처음부터 시스템에 박아놓는 것이다. 매번 사람이 "이거 봐도 돼?" 하고 확인해줄 필요가 없다. 규칙이 이미 설계에 녹아 있으니까.
목표는 분명하다. 기존에 10단계였던 승인 과정을 AI로 10배 빠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10단계의 과정 자체를 4단계로 줄이는 것이다. 과정의 수를 줄이되, 안전은 구조로 보장하는 것.
로마의 도로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로마가 도로를 깔기 전에는, 물자를 나르는 마차가 마을마다 멈춰서 통행세를 내야 했다. 마을이 열 개면 열 번 멈춰야 했다. 로마는 이 구조를 바꿨다. 주요 도로에는 검문소를 없애고, 대신 도로의 폭과 규격을 표준화해서 어떤 마차든 막힘 없이 달릴 수 있게 했다. 검문소를 빠르게 통과시키는 게 아니라, 검문소 자체를 없앤 것이다. AI 시대의 업무 재설계도 같은 원리다.
업무를 다시 설계한다고 하면, 기술 이야기만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놀랍게도, 이 문제의 답은 80년 전 영국의 탄광에서 나왔다.
1940년대 영국. 탄광에 아주 좋은 새 채굴 기계가 도입되었다. 기계의 성능만 보면, 석탄 생산량이 크게 늘어야 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생산량이 오히려 떨어졌다. 기계가 나쁜 게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새 기계를 도입하면서 탄광 노동자들의 팀 구조가 바뀌었는데, 기존에 서로 도우며 일하던 끈끈한 팀워크가 깨져버린 것이다. 기술은 좋아졌는데,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망가지니까 전체 결과가 나빠졌다.
이 사건을 연구한 학자들이 내린 결론이 있다. "기술 시스템과 사람(사회) 시스템을 동시에 바꿔야 한다. 하나만 바꾸면 오히려 망한다." 이걸 '결합 최적화(Joint Optimization)'라고 부른다.
2026년의 AI 도입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AI라는 새 기술을 넣으면서,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 팀의 구조, 권한의 분배를 동시에 재설계해야 한다. AI만 넣고 나머지는 그대로 두면, 80년 전 영국 탄광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일을 다시 설계할 때, 네 가지 칸으로 나눠서 생각하면 도움이 된다.
첫 번째 칸은 '맡기기'다. 데이터를 입력하거나, 긴 문서를 요약하거나, 매일 같은 형식의 보고서를 만드는 일. 사람이 해도 되지만, AI가 훨씬 빠르고 실수도 적은 일이다. 이런 건 AI에게 통째로 넘긴다.
두 번째 칸은 '돕기'다. AI가 초안을 쓰고, 사람이 다듬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AI가 고객에게 보낼 이메일 초안을 만들면, 사람이 읽어보고 어색한 부분을 고친다. AI의 속도와 사람의 감각이 합쳐진다.
세 번째 칸은 '증폭'이다. AI가 사람의 능력을 몇 배로 키워주는 경우다. 예를 들어 의사가 환자의 검사 결과를 분석할 때, AI가 수천 건의 비슷한 사례를 순식간에 찾아서 보여준다. 의사의 경험에 AI의 데이터 처리 능력이 더해져서, 혼자서는 생각해내지 못했을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다.
네 번째 칸은 '사람만의 영역'이다. 고객의 슬픔에 공감하는 것, 윤리적으로 옳은지 판단하는 것, 최종 책임을 지는 것. 이런 일은 AI가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반드시 사람의 몫으로 남겨둬야 한다.
모든 업무를 이 네 칸에 하나씩 넣어보는 것. 이것이 업무 재설계의 첫걸음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회사에서 물건을 파는 영업 사원이 있다. 이 사람의 하루를 조사해보니, 실제로 고객을 만나서 대화하는 시간은 전체의 25%밖에 안 됐다. 나머지 75%는 뭘 했느냐. 고객관리 프로그램(CRM)에 데이터를 입력하고, 제안서 초안을 만들고, 회의 일정을 잡고, 보고서를 쓰는 데 시간을 쏟았다. 정작 돈을 벌어다 주는 일(고객 만남)에 쓰는 시간이 전체의 4분의 1밖에 안 된 것이다.
업무를 재설계하면 이렇게 바뀐다. CRM 데이터 입력? AI 에이전트가 회의 녹음을 자동으로 분석해서 입력한다. 제안서 초안? AI가 고객의 과거 거래 기록과 업종 정보를 분석해서 맞춤형 초안을 만들어놓는다. 회의 일정? AI가 양쪽 캘린더를 확인해서 가능한 시간을 잡아준다.
그러면 영업 사원이 고객을 만나는 시간이 두 배로 늘어난다. 그리고 이 사람의 역할도 바뀐다. 예전에는 데이터 입력까지 해야 하는 '잡일꾼'이었다면, 이제는 AI가 만든 전략을 검토하고 최종 결정을 내리는 '지휘자'가 된다.
이 모든 변화가 합쳐지면, 회사 자체의 모습이 달라진다.
지금까지의 회사는 '기계'와 비슷했다. 부서마다 벽이 높고, 위에서 아래로 명령이 내려오고, 정해진 절차대로만 움직였다. 톱니바퀴처럼 규칙적이지만, 톱니바퀴는 갑자기 방향을 바꿀 수 없다.
AI 에이전트가 사람과 섞여서 일하는 미래의 회사는 '살아있는 생물'에 가까워진다. 환경이 바뀌면 실시간으로 반응하고, 필요에 따라 형태를 바꾼다. 문어가 좁은 틈을 통과할 때 몸 모양을 자유자재로 바꾸듯이.
이런 회사가 되려면, 질문 하나를 바꿔야 한다.
"우리가 가진 업무를 AI로 어떻게 개선할까?"
이 질문을 버리고, 이렇게 물어야 한다.
"만약 처음부터 AI가 있는 상태에서 회사를 만들었다면, 이 일을 어떻게 설계했을까?"
예를 들어보겠다. 은행의 대출 심사가 원래 3일 동안 6번의 결재를 거쳐야 했다고 하자. 기존 방식에 AI를 끼워 넣으면, 3일이 2일로 줄어드는 정도다. 하지만 처음부터 다시 설계하면? AI가 서류를 분류하고, 위험 요소를 찾아내고, 판단 근거를 정리한 메모 초안까지 만들어놓는다. 사람은 그 메모를 읽고 최종 승인만 내린다. 3일이 4시간으로 줄어든다.
이 차이가 곧 경쟁력의 차이다. 한쪽은 기존 도로에 아스팔트를 다시 깐 것이고, 다른 한쪽은 도로 자체를 새로 설계한 것이다.
로마가 지중해 세계의 주인이 된 것은, 다른 나라보다 더 좋은 배를 만들어서가 아니었다. 도로를 새로 깔고, 법을 새로 만들고, 군대를 새로 편제하고, 통치 구조를 새로 설계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것을 개선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다. 2026년, AI 시대에 살아남을 기업도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