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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3장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 신앙으로 무장한 아르메니아
3장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 신앙으로 무장한 아르메니아
1. 성 그레고리오와 티리다테스 3세- 기독교 국교화의 두 주역
아르메니아가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301년의 이야기는 단순한 종교적 사건이 아닙니다. 나라의 정체성을 완전히 바꾼 역사적 대전환이었고, 개인의 복수심과 용서, 그리고 신앙의 힘이 만들어낸 드라마였습니다.
이야기는 25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르메니아의 왕 코스로브 2세(Khosrov II)는 페르시아 사산 왕조의 샤푸르 1세와 동맹을 맺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이해관계는 복잡했고, 아르메니아 귀족 가문 출신의 아나크(Anak)라는 인물이 페르시아의 사주를 받아 코스로브 왕을 습격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아르메니아 왕실은 거의 전멸했고, 반란을 을으켰던 아나크의 가족들도 왕실의 반격으로 처형당했습니다.
아나크의 어린 아들 하나가 살아남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그레고리우스(Գրիգոր Լուսավորիչ, Grigor Lusavorich)였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기독교인 유모의 손에 이끌려 로마 제국령인 카파도키아(Cappadocia) 지역으로 피신했습니다. 그곳에서 기독교 신앙 안에서 자랐고, 영성과 학식을 갖춘 청년으로 성장했습니다.
코스로브 왕의 어린 아들 티리다테스(Տրդատ, Trdat)도 로마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원수가문인 두 사람은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 운명적으로 다시 만나게 됩니다.
280년대 초, 로마의 도움을 받아 티리다테스는 아르메니아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가 바로 티리다테스 3세입니다. 그는 강력한 군사력과 정치력을 갖춘 왕이었고, 로마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티리다테스의 신하가 되어 궁정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 왔습니다. 티리다테스가 그레고리우스에게 이교 신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했을 때,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밝히며 거부했습니다. 나아가 그의 아버지가 아나크였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왕의 아버지를 죽인 암살자의 아들.
티리다테스 왕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그는 그레고리우스를 크호르 비랍(Խոր Վիրապ, Khor Virap)이라는 깊은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크호르 비랍'은 아르메니아어로 '깊은 구덩이'라는 뜻입니다. 이 구덩이는 아르타샤트(Artashat) 왕궁 지하에 있었으며, 깊이가 약 6미터에 달하는 어둡고 습한 감옥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레고리우스는 13년 동안 갇혀 지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몇 주도 버티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여인이 몰래 구덩이에 빵 한 조각을 던져주었고, 그레고리우스는 기도와 명상으로 버텨냈습니다. 13년의 시간은 그를 더욱 깊은 영성의 세계로 이끌었고,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정신적 평화를 유지하는 성인의 경지에 이르게 했습니다.
한편 티리다테스 왕은 점점 더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변해갔습니다. 왕은 리프시메(Rhipsime)라는 아름다운 기독교 처녀를 아내로 삼으려 했습니다. 리프시메는 로마에서 박해를 피해 온 수녀였는데, 그녀와 동료 수녀들은 왕의 혼인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분노한 티리다테스는 리프시메와 그녀의 동료 수녀들, 그리고 그들의 스승인 가야네(Gayane)를 잔혹하게 처형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무자비한 행위 이후 티리다테스는 심각한 정신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일부 기록은 그가 멧돼지처럼 행동하며 들판을 헤매었다고도 전합니다.
왕의 누이 코사로비두흐트(Khosrovidukht)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천사가 나타나 "그레고리우스만이 왕을 치유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신하들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13년 동안 그 끔찍한 구덩이에 갇혀 있었으니, 당연히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금했던 동굴문을 열어보니, 놀랍게도 그레고리우스는 살아 있었습니다. 비록 수척하고 약해졌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궁전으로 끌려 왔습니다. 그는 미쳐 날뛰는 왕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왕의 아버지를 죽인 정적의 아들이었지만, 복수심이 아니라 용서와 치유의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티리다테스는 정신을 되찾았고,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이 사건은 티리다테스 왕의 생각과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자신을 13년 동안 구덩이에 가두었던 사람이, 어떤 원한도 품지 않고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왕은 그레고리우스에게 무릎을 꿇었고, 신앙에 대해 가르쳐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왕에게 기독교의 교리를 가르쳤고, 사랑과 용서, 그리고 구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301년, 티리다테스 3세는 공식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그는 아르메니아 전역에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는 역사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이것은 세계 역사상 최초로 한 국가가 공식적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 순간이었습니다.
(301년, 티리다테스 3세,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것이 313년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이고, 국교로 삼은 것이 380년 테살로니카 칙령(Edict of Thessalonica)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르메니아는 로마보다 10년 이상 앞서 이러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티리다테스의 개종은 단순히 개인적인 신앙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국가 정책의 근본적인 전환이었습니다. 왕은 전국의 이교 신전들을 파괴하거나 교회로 개조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바가르샤파트(Vagharshapat)에 있던 아나히트(Anahit) 여신의 신전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자리에 기독교 교회당이 세워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후에 에치미아진(Էջմիածին, Etchmiadzin) 대성당이 되는 건물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아르메니아의 첫 번째 대주교(Catholicos)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카이사리아(Caesarea)로 가서 정식으로 주교 서품을 받았고, 돌아와서 아르메니아 전역에 교회를 세우고 사제들을 양성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의 열정과 헌신은 대단했습니다. 그는 직접 산과 계곡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하루에 수천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레고리우스의 사역 방식은 실용적이고 전략적이었습니다. 이교 신전이 있던 자리에 교회를 세웠고, 이교의 축제일을 기독교 축일로 바꾸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쉽게 전환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동시에 그는 기독교 교리를 아르메니아 문화와 조화시키려 노력했습니다. 그는 아르메니아 사람들의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면서도, 그것들을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그레고리우스의 가족들도 아르메니아 교회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두 아들 브르타네스(Vrtanes)와 아리스타케스(Aristakes)는 모두 대주교가 되었고, 그의 후손들은 수세기 동안 아르메니아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르메니아 교회는 처음부터 세습적 성격을 띠게 되었는데, 이것은 동방 기독교의 독특한 전통 중 하나입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어둠을 밝히는 성인(Lusavorich, Illuminator)'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이 칭호는 단순히 그가 아르메니아에 기독교의 빛을 가져왔다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어둠 속에서 13년을 보낸 후에도 영적인 빛을 잃지 않았고, 오히려 그 빛으로 전체 국가를 비추었다는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의 삶 자체가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복수에서 용서로 나아가는 기독교 메시지의 완벽한 구현이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328년경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말년을 다라레크(Daranarak) 산의 동굴에서 은둔자로 보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죽음 이후, 그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가장 중요한 성인이 되었고, 그의 축일인 9월 30일은 아르메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축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티리다테스 3세도 330년경에 사망했습니다. 재위 기간 동안 아르메니아를 강력한 기독교 국가로 만들었고, 페르시아와 로마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의 무덤은 아그트사마르(Aghtsamar) 섬에 있다고 전해지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성 그레고리오와 티리다테스 3세의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서, 아르메니아 사람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근본적인 신화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용서의 힘, 신앙의 승리, 그리고 개인의 헌신이 어떻게 국가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크호르 비랍의 깊은 구덩이는 오늘날 아르메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순례지 중 하나가 되었고, 그곳에서 멀리 보이는 아라라트 산(Արարատ, Ararat)의 눈 덮인 봉우리는 아르메니아 민족의 영원한 희망과 신앙을 상징합니다.
2. 에치미아진 대성당 - 건축과 신앙의 성지
에치미아진(Էջմիածին, Etchmiadzin) 대성당은 단순히 오래된 건물이 아닙니다. 아르메니아 기독교 신앙의 살아있는 심장이자, 아르메니아 민족 정체성의 상징입니다. 이름 자체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에치미아진'은 아르메니아어로 '독생자가 내려온 곳'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환상 중에 이곳에 내려와 성당을 세울 장소를 지시했다는 전설에서 유래했습니다.
301년 티리다테스 3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직후, 성 그레고리오는 새로운 신앙의 중심이 될 성당을 건립할 장소를 찾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던 어느 날 밤, 그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황금빛 빛줄기가 땅을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내려와 황금 망치를 들고 땅을 세 번 내리쳤습니다. 그리스도는 "이곳에 내 집을 지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깨어난 그레고리우스는 즉시 그 장소로 갔고, 거기서 성당 건립을 시작했습니다.
이 장소는 바가르샤파트(Վաղարշապատ, Vagharshapat)라는 도시에 있었습니다. 바가르샤파트는 2세기에 아르메니아의 왕 바가르쉬(Vagharsh) 1세가 건설한 고대 도시였고, 당시에는 아르메니아의 수도였습니다. 이 도시는 아라라트 평원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곳에서는 아라라트 산이 장엄하게 보였는데, 이것은 아르메니아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아라라트 산은 노아의 방주가 머물렀던 성경의 산이었고,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노아의 후손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에치미아진 성당은 303년에서 304년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건물은 나무로 만든 바실리카(basilica) 형태였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바실리카는 초기 기독교 건축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긴 직사각형 본당과 반원형의 압시스(apse)를 갖춘 구조입니다. 이것은 로마의 공공 건물 양식에서 차용한 것이었습니다.
현재 보는 에치미아진 대성당의 기본 구조는 483년에서 484년 사이에 재건된 것입니다. 당시 대주교였던 바한 1세(Vahan I Mamikonian)가 주도한 이 재건 작업은 아르메니아 건축 역사에서 혁명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나무 건물을 석조 건물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건축 양식 자체를 완전히 새롭게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에치미아진 대성당은 중앙집중형 평면(centralized plan)을 채택했습니다. 이것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본당 위에 돔을 얹는 방식입니다. 네 개의 커다란 기둥이 중앙의 돔을 받치고, 그 주위에 네 개의 압시스가 십자가 모양으로 배치되었습니다. 이러한 구조를 '쿠폴라(cupola) 위의 사각형 본당'이라고 부르며, 이것은 아르메니아 교회 건축의 독특한 특징이 되었습니다.
이 건축 양식은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정사각형은 땅을 상징하고, 원형의 돔은 하늘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건물 자체가 땅과 하늘의 만남, 즉 신과 인간의 만남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모양의 평면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하며, 네 개의 압시스는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복음을 의미합니다. 중앙의 돔 아래 공간은 우주의 중심을 나타내며, 그곳이 바로 하느님이 현존하는 거룩한 장소임을 보여줍니다.
건축 기술 면에서도 에치미아진 대성당은 놀라운 성취였습니다. 당시 아르메니아 건축가들은 지역에서 나는 화산암인 화산암(tuff)를 주요 건축 재료로 사용했습니다. 화산암는 가공하기 쉽고 단열 효과가 뛰어나며, 독특한 분홍빛과 주황빛을 띠고 있어서 아름다운 외관을 만들어냅니다. 석재들은 정교하게 다듬어져서 서로 완벽하게 맞물리도록 조립되었고, 이러한 기술은 수세기가 지나도 건물이 견고하게 유지될 수 있게 했습니다.
돔의 건설은 어려운 도전이었습니다. 아르메니아 건축가들은 펜던티브(pendentive)라는 기술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정사각형 위에 원형 돔을 얹기 위해 모서리에 삼각형 모양의 구조물을 만드는 기술입니다. 이 기술을 통해 무게를 효과적으로 분산시킬 수 있었고, 동시에 내부 공간에 높이와 개방감을 부여할 수 있었습니다.
에치미아진 대성당은 건립 이후 여러 차례 개보수와 확장을 거쳤습니다. 618년, 대주교 코민타스 1세(Komitas I)는 대성당에 부속 건물들을 추가했습니다. 7세기에는 외벽이 강화되었고, 내부 장식이 더욱 풍부해졌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변화는 1654년에서 1658년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당시 대주교 필리포스(Philippos)의 지시로 대규모 재건축이 이루어졌고, 이때 현재와 같은 모습의 종탑과 외부 구조가 완성되었습니다.
17세기 재건축에서는 세 층으로 된 종탑이 추가되었습니다. 이 종탑은 전형적인 아르메니아 양식을 따르면서도, 당시 유행하던 바로크적 요소들을 부분적으로 수용했습니다. 종탑의 각 층은 아치형 창문으로 장식되어 있고, 꼭대기에는 원뿔형 첨탑이 얹혀 있습니다. 이 종탑에는 여러 개의 종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종은 수 킬로미터 밖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웅장한 소리를 냅니다.
대성당의 내부는 프레스코화(fresco)와 조각으로 풍부하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돔의 내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판토크라토르(Pantocrator, 전능자) 이미지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비잔틴 전통을 따른 것으로, 그리스도가 한 손으로는 축복을 내리고 다른 손으로는 성경을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벽면에는 성인들의 초상과 성경의 장면들이 그려져 있으며, 압시스에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제단(altar) 부분은 특별히 신성한 공간으로 여겨집니다. 전통적으로 이곳은 사제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고, 일반 신자들과는 이코노스타시스(iconostasis)라고 불리는 벽으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교회의 이코노스타시스는 동방정교회의 것보다 훨씬 낮고 개방적이어서, 신자들이 제단에서 일어나는 의식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에치미아진 대성당에는 성스러운 유물(relic)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성창(Holy Lance)'의 파편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로마 병사가 그의 옆구리를 찌른 창의 일부입니다. 이 성유물은 6세기에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것으로 전해지며, 대성당의 보물관에 특별히 제작된 은제 케이스에 담겨 보관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성유물은 '노아의 방주 조각'입니다. 아르메니아 전통에 따르면, 이것은 아라라트 산 정상에서 가져온 노아의 방주 파편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이것이 방주의 일부인지는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지만, 아르메니아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노아의 후손이라는 믿음을 확인시켜주는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대성당의 보물관에는 또한 수많은 고대 사본들, 귀중한 성체 용기들, 대주교들의 지팡이와 왕관, 정교하게 장식된 복음서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 중 일부는 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아르메니아 예술과 공예의 최고 수준을 보여줍니다.
에치미아진 대성당의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최고 수장인 카톨리코스(Catholicos)의 공식 거처이자, 교회의 행정 중심지입니다. 모든 중요한 교회 회의는 이곳에서 열리고, 새로운 사제들의 서품식도 이곳에서 거행됩니다. 매년 수만 명의 순례자들이 전 세계에서 이곳을 찾아와 기도하고 미사에 참여합니다.
매년 9월 둘째 일요일에는 '에치미아진 축일'이 열립니다. 이날 대성당과 그 주변은 수천 명의 신자들로 가득 차며, 화려한 의식과 음악, 춤이 어우러진 축제가 벌어집니다. 카톨리코스가 직접 집전하는 성찬례는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이며, 수백 명의 사제들과 수천 명의 신자들이 함께 성체를 나눕니다.
주변에는 여러 중요한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학교, 박물관, 도서관, 그리고 카톨리코스의 거처 등이 하나의 복합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지역 전체가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UNESCO World Heritage Site)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유네스코는 "에치미아진 대성당과 그 주변 유적들은 아르메니아 교회 건축의 발전을 보여주는 독특한 증거이며, 기독교 건축과 예술의 진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습니다.
에치미아진 대성당은 아르메니아의 역사와 운명을 함께해왔습니다. 페르시아의 침략, 아랍의 지배, 몽골의 약탈,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소비에트 시대의 종교 탄압 등 수많은 시련 속에서도 이 대성당은 살아남았습니다. 때로는 손상되고 약탈당했지만, 항상 재건되고 복원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르메니아 민족의 불굴의 의지와 신앙의 힘을 상징합니다.
1991년 아르메니아가 소비에트 연방에서 독립했을 때, 에치미아진 대성당은 다시 한 번 민족적 정체성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독립 국가의 수립을 축하하는 특별 미사가 이곳에서 거행되었고, 카톨리코스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선포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에치미아진 대성당은 아르메니아 사람들에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영원한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예레반에서 에치미아진 대성당까지는 서쪽으로 약 20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30분에서 1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에치미아진(Etchmiadzin, Էջմիածին)은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총본산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아르메니아 기독교의 심장부입니다.
(공항을 중심에 두고, 수도 예레반 시내와 반대쪽에 위치한 에치미아진 대성당)
저렴한 방법은 미니버스 마르슈루트카(marshrutka, մարշրուտկա)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예레반 중심부의 키리코프 버스 정류장(Kilikia Bus Station, Կիլիկիա)에서 출발하는데, Republic Square에서 북서쪽으로 도보 15분 거리에 있는 Mashtots Avenue와 Sayat-Nova Avenue 교차로 근처입니다.
202번이나 203번 마르슈루트카를 타면 되며, 버스 앞 유리창에 "Էջմիածին"이라고 표시된 것을 확인하면 됩니다. 요금은 300-400드람(dram, դրամ, 약 1,000원) 정도로 매우 저렴하며, 탑승 후 운전사나 요금 징수원에게 지불하면 됩니다. 잔돈을 준비해 가는 것이 좋습니다.
첫차는 오전 7시경, 막차는 오후 8시경이며 15-20분 간격으로 운행됩니다. 약 30-40분이 소요되고, 에치미아진 시내 중심부에서 하차하면 됩니다. 운전사에게 "Մայր Տաճար"(마이르 타차르, 대성당)라고 말하면 알려줍니다.
하차 후 대성당까지는 도보로 5-10분 거리입니다. 다만 좌석이 없으면 서서 가야 할 수도 있고, 짐이 많으면 불편할 수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합니다. 현지인들과 함께 타는 진정한 로컬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편리한 방법은 택시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Yandex Taxi나 GG Taxi 같은 앱을 다운로드하면 편리합니다. Yandex Taxi가 가장 인기 있고, GG Taxi는 아르메니아 로컬 앱입니다. 편도 요금은 약 2,500-3,500드람(dram, դրամ, 약 8,000-11,000원)이며, 왕복 대기 포함 시에는 약 5,000-6,000드람(dram, դրամ, 약 16,000-19,000원)입니다. 거리에서 일반 택시를 잡을 수도 있지만, 이 경우 출발 전에 가격을 합의하는게 좋습니다. 요금은 협상을 통해 약 3,000-5,000드람(dram, դրամ, 약 10,000-16,000원) 정도이며, 미터기 사용을 요구하거나 가격을 사전에 합의해야 합니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바가지 요금을 주의해야 합니다.
일일 투어에 참여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일반적으로 에치미아진 대성당, 성 흐립시메 교회(St. Hripsime, Սուրբ Հռիփսիմե), 성 가야네 교회(St. Gayane, Սուրբ Գայանե), 즈바르트노츠 대성당 유적(Zvartnots, Զվարթնոց)을 포함하며 가이드의 설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소요시간은 4-5시간 정도이고, 가격은 1인당 25-40달러(약 33,000-53,000원)입니다. 호텔 프런트에서 예약하거나, GetYourGuide, Viator 같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또는 예레반 시내 여행사를 통해 예약할 수 있습니다. 공화국 광장 주변에 위한 현장 모집인들에게서 곧바로 해도 무방합니다..
배낭 여행자라면 미니버스(300-400드람, 약 1,000원)를, 시간이 중요하다면 택시(2,500-3,500드람, 약 8,000-11,000원)을, 여러 곳을 효율적으로 함께 방문하고 싶다면 일일 투어(25-40달러, 약 33,000-53,000원)를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입장료 무료이며, 매일 오전 7시부터 오후 8시까지 개방되지만 예배 시간에는 관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외부에서는 사진 촬영이 자유롭지만, 내부에서는 예배 중에 자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에치미아진에서 추가로 방문할 만한 곳으로는 성 흐립시메 교회가 있습니다. 도보 10분 거리에 있으며 7세기에 건축된 매우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성 가야네 교회는 도보 15분 거리에 있으며 630년에 건축되었습니다. 대성당 옆에 있는 에치미아진 박물관에서는 성물과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입장료는 1,000드람(dram, դրամ, 약 3,300원)입니다. 에치미아진과 예레반 사이에 있는 즈바르트노츠 대성당 유적은 7세기 원형 성당 유적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반나절 오전 코스로 방문한다면, 오전 8시에 예레반을 출발하여 8시 30분에 에치미아진 대성당에 도착합니다. 8시 30분부터 10시까지 대성당을 관람하고, 10시부터 10시 30분까지 성 흐립시메 교회를, 10시 30분부터 11시까지 성 가야네 교회를 방문합니다. 귀환길에 11시부터 11시 30분까지 즈바르트노츠 대성당을 방문하면 정오에 예레반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오후 코스라면 오후 2시에 예레반을 출발하여 2시 30분부터 4시까지 대성당과 박물관을 관람하고, 4시부터 4시 30분까지 주변 교회를, 4시 30분부터 5시까지 즈바르트노츠 대성당을 방문하면 5시 30분에 예레반에 도착합니다.
최적의 방문 시간은 오전 9시부터 11시 사이로, 관광객이 적고 빛이 좋습니다. 일요일 오전에는 미사를 참관할 수 있지만 혼잡합니다. 아침에는 에치미아진과 즈바르트노츠를, 하루 일정으로는 에치미아진과 호르 비랍(Khor Virap, Խոր Վիրապ), 아르메니 와이너리를 함께 방문하면 좋습니다.
에치미아진은 아르메니아 기독교의 심장이자 1,700년 역사의 증인입니다. 301년 기독교 국교화 이후 지금까지 신앙의 중심지로 남아있는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아르메니아인들의 영혼이 깃든 성지입니다.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천천히 둘러보시길 권합니다.
3.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천년을 이어온 독자적 신학 전통
아르메니아 사도교회(Հայ Առաքելական Եկեղեցի, Armenian Apostolic Church)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 교회이자, 독특한 신학적 전통을 가진 동방 기독교의 한 갈래입니다. 교회 이름에 담긴 '사도'라는 단어는 교회의 기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직계 제자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아르메니아 전통에 따르면, 기독교는 두 명의 사도에 의해 아르메니아에 처음 전파되었습니다.
타대오(Thaddeus) 사도입니다. 그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으며, 성경에서는 '유다 타대오' 또는 '레베오라 하는 타대오'로 언급됩니다.
전설에 따르면, 타대오는 40년대 중반에 아르메니아에 왔으며, 당시 아르메니아 왕 산드루크(Sanatruk)의 딸 산두흐트(Sandukht) 공주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습니다. 그러나 왕은 이에 분노하여 타대오와 많은 기독교인들을 처형했다고 합니다. 타대오는 아르메니아의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고, 그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 타대오 수도원(Saint Thaddeus Monastery)은 오늘날까지 이란 북서부에 남아 있습니다.
두 번째 사도는 바르톨로메오(Bartholomew)입니다. 그 역시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으며, 50년대에 아르메니아를 방문했다고 전해집니다. 바르톨로메오는 주로 아르메니아 남부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도 결국 순교했는데, 전설에 따르면 그는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끔찍한 방식으로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초기 전도 활동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아르메니아에 널리 퍼지고 공식적인 종교로 자리 잡은 것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301년 성 그레고리오와 티리다테스 3세 때였습니다. 301년 이후,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빠르게 조직화되고 체계화되었습니다.
교회의 초기 조직은 계층적 구조를 따랐습니다.
맨 위에는 카톨리코스(Catholicos)가 있었습니다. 이 칭호는 그리스어 'katholikos'에서 왔으며, '보편적인' 또는 '전체의'라는 뜻입니다. 아르메니아어로는 '카톨리코스'(Կաթողիկոս)라고 하며, 이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최고 수장을 의미합니다. 성 그레고리오가 최초의 카톨리코스였고, 이 직책은 처음에는 그의 가문 내에서 세습되었습니다.
카톨리코스 아래에는 주교들(bishops)이 있었습니다. 각 주교는 특정 지역을 담당했으며, 그 지역의 교회들을 감독하고 사제들을 임명했습니다. 주교들 아래에는 사제들(priests)이 있었고, 그들은 각 교회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신자들을 돌보았습니다. 가장 아래에는 보조 성직자들인 부제(deacons)들이 있었습니다.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신학적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405년 메스롭 마슈토츠(Mesrop Mashtots)가 아르메니아 문자를 창제한 것입니다.
교회사에서 혁명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아르메니아에서는 그리스어나 시리아어로 예배를 드렸고, 성경도 외국어로 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문자의 창제로 성경과 전례서들이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될 수 있었고, 이것은 교회가 진정으로 민중의 것이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메스롭과 그의 제자들은 즉시 성경 번역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리스어와 시리아어 원본들을 참조하여 정확하고 아름다운 아르메니아어 번역본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번역은 너무나 훌륭해서 '아르메니아 성경의 여왕'이라고 불렸습니다. 5세기 아르메니아어 문학은 '황금시대'를 맞이했고, 수많은 신학 저작들과 역사서들이 저술되었습니다.
(아르메니아 문자로, 그리스어 성경을 번역해 필사본을 만들어 배포하다)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신학은 초기 기독교 공의회들의 결정을 따랐습니다. 교회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Council of Constantinople)의 결정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공의회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명확히 했습니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에서 아르메니아 교회는 중요한 갈림길에 섰습니다. 이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논쟁을 다루었습니다. 공의회는 그리스도가 완전한 신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며, 이 두 본성이 하나의 위격 안에서 혼합되지 않고, 변화되지 않고, 분리되지 않고, 구분되지 않게 결합되어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아르메니아 교회는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신학적 이유만은 아니었습니다. 451년은 아르메니아에게 매우 중요한 해였습니다. 그해 5월 26일, 아르메니아는 아바라이르(Avarayr) 전투에서 페르시아 사산 왕조와 싸웠습니다. 이 전투는 페르시아가 아르메니아에 조로아스터교를 강제하려 했던 것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전투에서 아르메니아는 패배했지만, 이 저항은 페르시아가 종교적 강압을 포기하게 만들었고, 아르메니아 기독교 신앙은 보존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르메니아 교회는 칼케돈 공의회에 참석할 수 없었고, 그 결정을 검토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아르메니아 교회는 칼케돈 공의회가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를 완전히 배격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르메니아 교회는 대신 키릴로스(Cyril)의 신학을 따랐습니다. 키릴로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였으며,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본성(mia physis)'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합성론 혹은 통합론 (Miaphysitism)'이라고 불립니다. 이것이 '단일 본성론(Monophysitism)'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단일 본성론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었다고 주장하는 극단적 입장이지만, 단성론은 두 본성이 완전히 보존되면서도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506년 드빈(Dvin) 공의회에서 아르메니아 교회는 공식적으로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했습니다. 이로 인해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비칼케돈파(Non-Chalcedonian)' 또는 '동방 정교회(Oriental Orthodox Church)'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같은 입장을 취한 교회들로는 콥트 정교회(Coptic Orthodox Church), 에티오피아 정교회(Ethiopian Orthodox Church), 시리아 정교회(Syriac Orthodox Church)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차이로 인해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 및 동방 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 즉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와 분리되었습니다.
20세기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신학적 대화가 재개되었고, 많은 학자들은 이 차이가 표현의 문제일 뿐 본질적인 신앙의 차이는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전례(liturgy)는 매우 독특하고 아름답습니다. 주된 전례는 '신성한 전례(Divine Liturgy)' 또는 '파타라그(Patarag)'라고 불립니다. 이 전례는 대부분 고전 아르메니아어인 '그라바르(Գրաբար, Grabar)'로 진행됩니다. 그라바르는 5세기 문어체 아르메니아어로, 오늘날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현대 아르메니아어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라틴어가 가톨릭 교회의 전례어였던 것처럼, 그라바르는 아르메니아 교회의 거룩한 언어로 여겨집니다.
전례는 상징적이고 의식적입니다. 사제들은 화려한 제의(祭衣)를 입고, 향을 피우며, 종과 심벌즈를 사용합니다. 성찬례(Eucharist)는 전례의 중심이며,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고 믿습니다. 아르메니아 교회는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가톨릭 교회의 관행과 같지만 동방 정교회(누룩을 넣은 빵 사용)와는 다릅니다.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성례전(sacraments)은 일곱 가지입니다. 세례(Baptism), 견진(Chrismation), 성찬(Eucharist), 고해(Confession), 혼배(Marriage), 서품(Ordination), 그리고 병자성사(Unction of the Sick)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성례전과 동일합니다.
세례는 보통 유아기에 행해지며, 물에 완전히 잠기는 침례 방식을 사용합니다. 흥미롭게도 아르메니아 교회에서는 세례와 견진이 같은 날 연속해서 거행됩니다. 견진에서는 성유(聖油)를 이마, 눈, 귀, 코, 입, 손, 가슴, 등에 바르며, 이것은 성령의 은총이 온 몸에 임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성인 공경을 매우 중시합니다. 가장 존경받는 성인은 당연히 성 그레고리오 조명자이며, 그 외에도 성 리프시메, 성 가야네, 성 메스롭 마슈토츠 등 수많은 아르메니아 성인들이 있습니다. 또한 보편 교회의 성인들, 성모 마리아를 깊이 공경합니다.
교회는 많은 축일과 금식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축일은 부활절(Զատիկ, Zatik)입니다. 아르메니아 교회의 성탄절은 독특합니다. 아르메니아 교회는 1월 6일에 성탄절과 주현절(Epiphany)을 함께 기념합니다. 이것은 '테아르나다르츠(Թեառնընդառաջ, Theophany)'라고 불리며, 그리스도의 탄생과 세례를 동시에 축하합니다. 이것은 고대 기독교의 관행을 보존한 것으로, 4세기 이전에는 모든 교회가 이렇게 했습니다.
금식은 아르메니아 영성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긴 금식 기간은 부활절 전 40일간의 '대재(大齋, Great Lent)'입니다. 이 기간 동안 신자들은 육류, 유제품, 계란을 피하고, 기도와 참회에 집중합니다. 또한 여름의 '사도 금식', 성모 승천 전 2주간의 금식, 그리고 성탄절 전 금식 등이 있습니다.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독신 성직제와 기혼 성직제를 모두 인정합니다. 일반 사제들은 결혼할 수 있으며, 대부분의 본당 사제들은 기혼자입니다. 그러나 주교는 반드시 독신이어야 하므로, 주교들은 수도원 출신이거나 결혼하지 않은 사제들 중에서 선출됩니다.
수도원 전통은 아르메니아 교회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4세기부터 수많은 수도원들이 세워졌고, 이들은 영성, 학문,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타테브(Tatev) 수도원, 하그파트(Haghpat) 수도원, 게하르드(Geghard) 수도원 등은 중세 시대에 중요한 대학이자 필사본 제작 센터였습니다.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음악 전통도 독특합니다. 전례 음악은 주로 무반주 합창으로 이루어지며, 고대의 선법(旋法)을 사용합니다. 가장 유명한 아르메니아 찬송가는 '샤라칸(Շարական, Sharakan)'입니다. 이것들은 5세기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깊은 영성과 시적 아름다움을 담고 있습니다.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1915년 아르메니아 대학살(Armenian Genocide) 동안 엄청난 고난을 겪었습니다. 약 1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학살되었고, 이 중 많은 이들이 기독교 신앙 때문에 순교했습니다. 수천 개의 교회와 수도원이 파괴되었고, 수많은 성직자들이 살해되었습니다.
소비에트연방 시대(1920-1991)에도 교회는 심각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교회들이 폐쇄되거나 다른 용도로 전환되었고, 종교 교육은 금지되었습니다. 교회는 지하에서 살아남았고, 1991년 아르메니아가 독립을 되찾았을 때 빠르게 부흥했습니다.
오늘날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전 세계에 900만 명의 신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약 300만 명이 아르메니아 공화국에 살고 있으며, 나머지는 디아스포라(diaspora)에 흩어져 있습니다. 러시아, 미국, 프랑스, 레바논, 시리아, 이란 등에 큰 아르메니아 공동체가 있습니다.
교회는 두 개의 카톨리코스 좌(座)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된 좌는 에치미아진에 있으며, '모든 아르메니아인의 카톨리코스(Catholicos of All Armenians)'라는 칭호를 가집니다. 두 번째 좌는 레바논의 안텔리아스(Antelias)에 있으며, '대 실리키아의 카톨리코스(Catholicos of the Great House of Cilicia)'라는 칭호를 가집니다. 이 외에도 예루살렘과 콘스탄티노플에 각각 총대주교(Patriarch) 좌가 있습니다.
현재 에치미아진의 카톨리코스는 카레킨 2세(Karekin II)이며, 그는 1999년에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세계 각국의 아르메니아 공동체를 방문하고, 다른 기독교 교회들과의 대화를 촉진하며, 아르메니아의 영적 유산을 보존하는 데 헌신하고 있습니다.
현 에치미아진 카톨리코스, 카레킨 2세(Karekin II)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오늘날에도 아르메니아인들의 정체성과 문화의 핵심입니다. 역사, 언어, 음악, 예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앙이 이 교회를 통해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17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사도교회는 끝없는 믿음과 회복력으로 살아남았고, 오늘날에도 전 세계 아르메니아인들의 영적 고향으로 남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