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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5장 강대국 틈바구니의 생존드라마
5장 강대국 틈바구니의 생존드라마
1. 오스만과 페르시아 - 제국들의 각축장이 된 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 땅은 강대국들의 각축장이었습니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사파비 왕조) 사이에서 아르메니아는 끊임없이 분할되고 재분할되는 운명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 시기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두 거대한 이슬람 제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14세기 후반부터 급속히 팽창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나톨리아 반도를 장악한 오스만 제국은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아르메니아 고원 지대로 진출했습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은 이제 명실상부한 대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은 동쪽의 페르시아를 견제하고 무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아르메니아 지역을 반드시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페르시아에서는 1501년 사파비 왕조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강력한 국가가 탄생했습니다. 사파비 왕조는 시아파 이슬람을 국교로 정하고 페르시아의 전통을 부흥시키면서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사파비 왕조의 샤(왕)들도 서쪽으로 영토를 넓히면서 자연스럽게 아르메니아 지역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아르메니아는 비옥한 농토와 중요한 무역로가 지나가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입니다.
1514년 찰디란 전투는 아르메니아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 1세와 사파비 왕조의 샤 이스마일 1세가 이란 북서부의 찰디란 평원에서 격돌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당시 유럽에서 도입한 화포와 머스킷 총으로 무장한 예니체리 부대를 앞세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아르메니아 서부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고, 동부 지역은 페르시아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두 제국은 계속해서 아르메니아를 두고 전쟁을 벌였습니다. 1555년 아마시아 조약으로 잠시 평화가 찾아왔지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 조약으로 아르메니아는 공식적으로 둘로 나뉘었습니다. 서부 아르메니아는 오스만 제국이, 동부 아르메니아는 페르시아가 차지했습니다. 예레반과 그 주변 지역은 페르시아 영토가 되었고, 에르주룸과 반 호수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17세기 초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603년부터 1618년까지 이어진 오스만-사파비 전쟁은 아르메니아 땅을 초토화시켰습니다.
페르시아의 샤 압바스 1세는 오스만 군대가 침입할 때마다 아르메니아인들을 강제로 페르시아 내륙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1604년부터 1605년 사이에만 약 3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강제 이주를 당했습니다. 이들은 이스파한 근처의 새로운 도시 뉴줄파로 옮겨졌습니다.
이러한 강제 이주 정책은 전략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샤 압바스 1세는 오스만 군대가 아르메니아를 점령하더라도 식량과 인력을 확보하지 못하도록 초토화 작전을 펼쳤습니다.
동시에 아르메니아인들의 상업적 재능과 기술을 페르시아 경제 발전에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뉴줄파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실제로 페르시아의 국제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인도, 러시아, 유럽과의 무역을 주도하면서 비단과 향신료, 귀금속을 거래했습니다.
1639년 카스르 시린 조약(주합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 사이의 국경이 다시 확정되었습니다. 이 조약으로 정해진 국경선은 제1차 세계대전까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아르메니아는 완전히 두 개로 나뉘었습니다. 서부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신민으로, 동부 아르메니아인들은 페르시아의 신민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오스만 제국 치하의 아르메니아인들은 밀레트 제도 아래에서 살았습니다. 밀레트는 종교 공동체를 의미하는 말로, 오스만 제국은 기독교인과 유대인 같은 비무슬림 집단을 종교별로 나누어 자치를 허용했습니다.
아르메니아 밀레트는 콘스탄티노플의 아르메니아 총대주교가 이끌었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지즈야라는 세금을 내야 했고, 군 복무는 할 수 없었으며, 무슬림보다 낮은 법적 지위를 가졌습니다. 종교의 자유는 인정받았고, 자신들의 학교와 교회를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는 큰 아르메니아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들은 상업, 금융, 수공업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아르메니아 상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국제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즈미르와 알레포 같은 무역 도시에서 아르메니아 상인들은 유럽 상인들과 오스만 제국을 연결하는 중개자 역할을 했습니다. 일부 아르메니아인들은 술탄 궁정에서 은행가나 재무 고문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서부 아르메니아의 농촌 지역에 사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삶은 훨씬 힘들었습니다. 이들은 쿠르드족과 터키족 지주들의 착취를 받았고, 법적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동부 아나톨리아의 산악 지대에서는 쿠르드족 부족장들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아르메니아 농민들은 과중한 세금과 불법적인 징수에 시달렸고, 때로는 폭력과 약탈의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오스만 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부족했습니다.
페르시아 치하의 동부 아르메니아인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파비 왕조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종교를 인정했지만, 그들을 2등 시민으로 취급했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지즈야를 납부해야 했고, 공직에 진출하는 데 제한이 있었습니다. 상업 분야에서는 상당한 자유를 누렸습니다. 뉴줄파의 아르메니아 상인들은 번영했습니다. 그들은 샤로부터 무역 독점권을 얻어 인도와 유럽을 연결하는 무역망을 구축했습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페르시아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1722년 아프간족의 침입으로 사파비 왕조가 무너지고, 여러 세력이 페르시아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동부 아르메니아는 더욱 피폐해졌습니다. 아프간족, 오스만 군대, 페르시아의 여러 군벌들이 아르메니아 땅을 약탈했습니다.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전쟁과 기근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1736년 나디르 샤가 페르시아를 다시 통일하고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그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영토를 확장했지만, 폭정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나디르 샤 치하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은 무거운 세금과 강제 징집에 시달렸습니다. 1747년 나디르 샤가 암살당한 후 페르시아는 다시 혼란에 빠졌고, 이는 러시아가 남하 정책을 펼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 아르메니아인들은 생존을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일부는 지배 세력에 협력하면서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고, 일부는 산악 지대로 피신하여 반자치적인 공동체를 유지했습니다. 아르메니아 교회는 민족 정체성을 지키는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수도원들은 아르메니아 문화와 학문의 보루가 되었고, 필사본을 보존하며 교육을 담당했습니다.
오스만과 페르시아 사이에서 분할된 아르메니아는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두 이슬람 제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들의 정체성과 문화를 지켜냈습니다. 상업 네트워크는 전 세계로 뻗어나갔고,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네트워크와 정체성은 훗날 민족운동이 일어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2. 러시아 제국 - 새로운 지배자와 근대화의 이중주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쳐 러시아 제국의 남하는 아르메니아 역사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러시아는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의 캅카스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페르시아 및 오스만 제국과 충돌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르메니아는 다시 한번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되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도 열렸습니다.
러시아의 캅카스 진출은 표트르 대제 시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표트르 대제는 1722년 페르시아 원정을 감행하여 카스피해 서안을 점령했습니다. 비록 그의 후계자들이 이 지역을 다시 반환했지만, 러시아의 남하 정책은 계속되었습니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에 러시아는 조지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조지아의 기독교 왕국들은 이슬람 세력의 압박을 받고 있었고, 러시아의 보호를 갈망했습니다.
1801년 러시아는 동부 조지아를 병합했습니다. 러시아가 캅카스 남부로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신호탄이었습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캅카스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러시아는 이 지역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캅카스를 장악하면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를 견제할 수 있었고, 중앙아시아와 인도로 가는 길도 열렸습니다.
1804년 러시아와 페르시아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전쟁은 9년간 계속되었고, 1813년 골레스탄 조약으로 끝났습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현재 아제르바이잔의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동부 아르메니아는 아직 페르시아 영토로 남아 있었습니다. 예레반과 나히체반을 포함한 지역이 여전히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를 해방자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는 기독교 국가였고, 오스만 제국이나 페르시아의 이슬람 지배보다 러시아의 통치가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부 아르메니아 지도자들은 러시아 군대에 협력했고, 러시아의 캅카스 정복을 도왔습니다. 에치미아진의 아르메니아 교회 지도자들도 러시아를 지지했습니다. 그들은 러시아의 보호 아래에서 종교적 자유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1826년 러시아와 페르시아 사이에 다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페르시아의 파트 알리 샤는 골레스탄 조약으로 잃은 영토를 되찾고자 했습니다. 러시아 군대는 페르시아군을 압도했습니다. 러시아 장군 이반 파스케비치가 이끄는 군대는 신속하게 진격하여 예레반과 타브리즈를 점령했습니다. 1828년 투르크만차이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고, 이 조약은 아르메니아 역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투르크만차이 조약으로 예레반 칸국과 나히체반 칸국을 포함한 동부 아르메니아가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었습니다. 아라스강이 러시아와 페르시아의 국경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아르메니아는 세 개의 제국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서부 아르메니아는 오스만 제국에, 동부 아르메니아는 러시아 제국에, 그리고 일부 남부 지역은 여전히 페르시아에 속했습니다.
러시아는 동부 아르메니아를 아르메니아 주로 편성했습니다. 예레반이 중심 도시가 되었고, 러시아 행정 체계가 도입되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이 지역의 아르메니아인 인구를 늘리기 위해 적극적인 정책을 펼쳤습니다. 투르크만차이 조약에는 페르시아 영토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로 이주할 수 있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828년부터 1830년 사이에 약 5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페르시아에서 러시아 영토로 이주했습니다.
오스만 제국 영토에서도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로 이주했습니다. 1828-1829년 러시아-오스만 전쟁 이후 아드리아노플 조약으로 러시아는 흑해 동부 해안을 차지했고, 이 지역에도 아르메니아인들이 정착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아르메니아인들을 믿을 만한 주민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이었고, 상업과 행정 분야에서 능력이 뛰어났으며, 러시아의 캅카스 지배에 협력적이었습니다.
러시아 치하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은 상당한 자유를 누렸습니다.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는 러시아 정교회 다음으로 인정받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에치미아진의 가톨리코스는 러시아 제국 내 모든 아르메니아인의 영적 지도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신들의 학교를 운영할 수 있었고, 아르메니아어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출판의 자유도 상대적으로 보장되었고, 아르메니아어 신문과 책들이 출간되었습니다.
19세기 중반 러시아 영토의 아르메니아인들 사이에서 문화적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이 시기를 아르메니아 문예부흥기라고 부릅니다. 작가, 시인, 학자들이 아르메니아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고 새로운 작품들을 창작했습니다. 하치투르 아보비안은 근대 아르메니아 문학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그는 고전 아르메니아어가 아닌 현대 구어체 아르메니아어로 소설을 썼습니다. 그의 작품 《아르메니아의 상처》는 페르시아와 러시아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이었습니다.
미카엘 날반디안, 라파엘 파투니안, 페트로스 두리안 같은 작가들도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그들은 아르메니아의 역사와 전통을 재조명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작품들을 썼습니다. 이들의 작품은 단순히 문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도 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르메니아인들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근대화를 촉구했습니다.
트빌리시는 캅카스 지역 아르메니아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 도시에는 큰 아르메니아 공동체가 있었고, 아르메니아어 학교, 극장, 출판사들이 번창했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트빌리시의 경제와 문화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많은 아르메니아 상인들과 기업가들이 석유, 광업, 무역 분야에서 부를 축적했습니다.
19세기 후반 바쿠의 석유 산업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이 산업에 투자했습니다. 만타쇼프 가문, 구카소프 가문, 리아노조프 가문 같은 아르메니아 석유 재벌들이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그 일부를 아르메니아 문화와 교육 진흥에 사용했습니다. 이들의 기부로 학교, 도서관, 극장들이 세워졌습니다.
러시아 제국의 근대화는 캅카스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철도가 건설되고, 전신이 깔렸으며, 근대적 행정 체계가 도입되었습니다. 1883년 바투미-바쿠 철도가 개통되면서 예레반도 철도망에 연결되었습니다. 이는 경제 발전과 교류 증대를 가져왔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이러한 근대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러시아의 지배가 항상 긍정적이었던 것만은 아닙니다. 19세기 후반 러시아는 러시아화 정책을 강화했습니다.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 시대에 러시아 정부는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제한하고 러시아어와 러시아 정교회를 강요했습니다. 1885년 러시아 정부는 아르메니아 교회 학교들을 폐쇄하거나 국가 통제 아래 두었습니다. 아르메니아어 교육이 제한되었고, 러시아어가 필수 교육 언어가 되었습니다.
1903년에는 더욱 심각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러시아 정부가 아르메니아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는 칙령을 발표한 것입니다. 이는 아르메니아인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아르메니아 교회는 단순히 종교 기관이 아니라 민족 정체성의 상징이었고, 학교와 자선 사업을 운영하는 사회적 기관이었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일부는 무장 저항도 불사했습니다.
아르메니아 혁명 운동도 등장했습니다.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이 젊은 아르메니아 지식인들 사이에 퍼졌습니다. 1887년 흐리스토포르 미카엘리안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 연구 모임이 조직되었습니다. 이들은 러시아의 혁명 운동에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 제국 전체의 혁명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고, 일부는 사회혁명당이나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했습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은 캅카스 지역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도 혁명에 참여했고, 정치적 자유와 민족적 권리를 요구했습니다. 동시에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타타르)인 사이의 민족 갈등도 격화되었습니다. 1905-1906년 바쿠와 다른 캅카스 도시들에서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 사이에 유혈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이 갈등에는 경제적 경쟁, 종교적 차이, 러시아 당국의 분열 정책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20세기 초 러시아 영토의 아르메니아인들은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러시아 제국의 근대화와 경제 발전의 혜택을 누렸습니다.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교육받고 부유해졌으며, 도시 중산층을 형성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의 억압적인 정책과 민족 차별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이들은 더 많은 자유와 권리를 원했고, 궁극적으로는 민족 자결권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 제국의 지배는 아르메니아에 근대성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새로운 갈등과 문제도 만들어냈습니다. 이 시기의 경험은 아르메니아인들에게 근대 국가와 시민 사회에 대한 이해를 심어주었고, 이는 훗날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3. 민족운동의 태동 - 자유를 향한 독립의 꿈
19세기는 전 세계적으로 민족주의가 고조된 시기였습니다. 유럽에서는 그리스, 이탈리아, 독일 등이 민족 국가를 건설했고, 발칸 반도의 여러 민족들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은 아르메니아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스만 제국 치하의 서부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신들의 권리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19세기 중반까지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대체로 충성스러운 신민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들은 "믿을 수 있는 밀레트"라고 불렸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아르메니아 중산층과 상류층은 오스만 제국의 개혁에 협력했고, 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습니다.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제국의 행정부, 외교부, 재무부에서 일했습니다. 아르메니아인 건축가, 의사, 은행가, 기업가들이 콘스탄티노플의 경제와 문화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839년 술탄 압둘메지드 1세는 탄지마트(재편성) 개혁을 선언했습니다. 이 개혁은 모든 오스만 제국 신민에게 법 앞의 평등을 약속했습니다.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차별을 철폐하고, 종교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권리를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1856년에는 더 포괄적인 개혁 칙령이 발표되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아르메니아인들도 군 복무를 할 수 있고, 공직에 진출할 수 있으며, 법정에서 무슬림과 동등한 증언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동부 아나톨리아의 아르메니아 농촌 지역에서는 이러한 개혁이 거의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쿠르드족 부족장들과 터키인 관료들은 여전히 아르메니아인들을 착취했습니다. 토지 분쟁, 세금 징수, 법 집행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은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쿠르드족의 약탈과 폭력이 계속되었지만, 오스만 정부는 이를 제대로 막지 못했거나 막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1860년대부터 아르메니아인들 사이에서 자각과 조직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아르메니아 지식인들은 국민의회를 조직하여 공동체의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이들은 교육 개혁을 추진하고, 근대적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아르메니아어 신문과 잡지들이 창간되었고, 문학과 예술이 발전했습니다. 이 시기의 지식인들은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를 일깨우고, 교육과 근대화를 통해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점차 일부 아르메니아인들은 단순한 개혁과 계몽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스만 제국 정부가 약속한 개혁을 실행하지 않고, 아르메니아인들의 고통이 계속되자, 더 적극적인 방법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퍼졌습니다. 1870년대에 들어서면서 아르메니아 민족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878년 러시아-오스만 전쟁이 끝난 후 체결된 산스테파노 조약과 베를린 조약은 아르메니아인들에게 희망과 실망을 동시에 안겨주었습니다. 산스테파노 조약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개혁을 러시아가 감독한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베를린 조약에서 이 조항은 약화되었고, 유럽 열강의 공동 감독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는 실질적인 힘이 없는 공허한 약속이었습니다.
국제 사회의 무관심과 오스만 제국의 탄압에 실망한 일부 아르메니아인들은 무장 투쟁을 선택했습니다. 1880년대와 1890년대에 여러 아르메니아 혁명 조직들이 결성되었습니다. 1887년 제네바에서 아르메니아 혁명 연맹(후에 아르메니아 혁명 연합 또는 다슈낙당)이 창설되었습니다. 이 조직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결합한 이념을 가지고 있었고, 무장 투쟁을 통해 아르메니아인들의 권리를 쟁취하고자 했습니다.
1890년에는 흐리스토포르 미카엘리안이 창설한 흐차크당(종소리당)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에 영향을 받았고, 오스만 제국 내에서 혁명을 일으켜 아르메니아 자치를 쟁취하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동부 아나톨리아에 무기를 밀수하고, 아르메니아 농민들을 조직하며, 때로는 오스만 관료들에 대한 테러를 감행했습니다.
1890년대 중반 동부 아나톨리아에서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1894년부터 1896년 사이에 약 10만에서 3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살해되었습니다. 이 학살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술탄 압둘하미드 2세는 아르메니아 혁명 운동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탄압을 승인했습니다. 쿠르드족 비정규 기병대인 하미디예 부대가 조직되어 아르메니아 마을들을 습격했습니다.
유럽의 열강들은 이 학살을 비난했지만, 실질적인 개입은 하지 않았습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각자의 이해관계 때문에 오스만 제국에 강력한 압력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국제 사회의 무관심은 아르메니아인들에게 깊은 배신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시기의 학살은 20세기 초에 벌어질 더 큰 비극의 전조였습니다.
1908년 청년 투르크당 혁명으로 오스만 제국에 잠시 희망이 찾아왔습니다. 청년 투르크당은 술탄의 전제 정치를 끝내고 입헌 군주제를 수립했습니다. 이들은 오스만주의를 내세우며 제국의 모든 민족이 평등하게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이 이 혁명을 환영했고, 청년 투르크당과 협력했습니다. 다슈낙당도 청년 투르크당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09년 아다나에서 다시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약 2만에서 3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살해되었습니다. 청년 투르크당 정부는 이 학살을 제대로 막지 못했습니다. 나아가 청년 투르크당은 점차 터키 민족주의로 기울어졌습니다. 오스만주의는 포기되고, 터키화 정책이 추진되었습니다. 비터키인들, 아르메니아인들과 그리스인들은 점점 더 의심과 적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912-1913년 발칸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청년 투르크당의 강경파는 제국을 구하기 위해서는 터키 민족주의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엔베르 파샤, 탈라트 파샤, 제말 파샤로 구성된 삼두정치가 시작되었고, 이들은 터키화 정책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한편 러시아 영토의 아르메니아인들도 정치적으로 각성했습니다. 다슈낙당은 러시아 캅카스에서도 활동했고,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결합한 노선을 추구했습니다. 흐차크당과는 달리 다슈낙당은 점차 온건한 노선을 취하며 합법적 정치 활동에도 참여했습니다. 1905년 러시아 혁명 당시 다슈낙당은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두마(러시아 의회) 선거에도 후보를 냈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아르메니아인들은 다시 한번 운명의 기로에 섰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독일과 동맹을 맺고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은 적국이 되었고, 아르메니아인들은 그 사이에 끼였습니다. 오스만 정부는 아르메니아인들을 잠재적인 반역자로 의심했습니다. 러시아 군대에 아르메니아인 의용군이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의심을 더욱 증폭시켰습니다.
1915년 봄, 오스만 정부는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대규모 추방과 학살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20세기 최초의 대량 학살이었고, 아르메니아 민족에게는 엄청난 비극이었습니다. 약 1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살해되거나 추방 과정에서 사망했습니다.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서부 아르메니아의 아르메니아인 공동체가 사실상 소멸했습니다.
살아남은 아르메니아인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졌습니다. 일부는 러시아 캅카스로 피난했고, 일부는 중동의 프랑스와 영국 위임통치령으로 갔으며, 일부는 유럽과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이들은 대량 학살의 비극을 세계에 알리고, 정의를 요구했습니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국제 사회의 반응은 미미했습니다. 러시아 영토의 동부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이 무너지고 캅카스 지역에 권력의 공백이 생겼습니다. 1918년 5월 28일, 아르메니아인들은 마침내 독립 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의 탄생이었습니다. 비록 작고 가난하고 전쟁의 상처로 가득했지만, 이는 6세기 만에 처음으로 생긴 아르메니아 독립 국가였습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아르메니아 민족운동은 계몽과 조직화에서 시작하여 무장 투쟁을 거쳐 마침내 독립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과정은 엄청난 희생과 고통으로 점철되었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독립에 대한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