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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사람 권력, 관계, 그리고 남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

작성자
김 경진
작성일
2026-04-02 15:46
조회
76

정치와 사람

권력, 관계, 그리고 남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

김경진 지음

 


목 차

프롤로그

제1부 사람을 읽는 눈

1. 사람은 직함이 아니라 태도를 기억합니다

2. 정치판의 인간 지형도

3. 사람을 읽는 기술

제2부 사람을 모으다

4. 관계의 씨앗은 정치를 시작하기 10년 전에 뿌려집니다

5. 첫 번째 사람을 얻는 법

6. 이익이 아닌 가치로 결속해야 겨울을 버팁니다

제3부 마음을 얻다

7. 유권자는 정책을 읽지 않습니다, 사람을 읽습니다

8. 위기의 순간이 지지를 결정합니다

9. 연대와 연합의 기술

10. 캠프 안의 사람을 얻지 못하면 바깥 표도 흔들립니다

제4부 사람을 지키다

11. 당선은 관계의 완성이 아니라 시험의 시작입니다

12. 인사가 만사입니다

13. 쓴소리를 하는 사람을 곁에 두는 법

14. 조직을 만들고 유지하는 원칙

15. 대중과의 관계는 살아 있는 생물입니다

제5부 시련을 견디다

16. 배신과 이탈의 해부학

17. 정치적 겨울을 버티는 기술

18. 장외에서 내공을 쌓는 시간의 가치

제6부 대통령으로 가는 길

19. 적을 줄이고 품는 기술

20. 후계자를 키우는 것이 가장 어려운 정치입니다

21. 대통령의 언어, 대통령의 품격

22. 사람을 통해 시대를 바꾼 리더들이 남긴 것

에필로그



프롤로그

프롤로그: 직을 그만둔 다음 날 아침, 전화기를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직을 그만둔 다음 날 아침, 전화기를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꼭 정치인이 아니어도 됩니다. 회사에서 임원직을 내려놓은 사람, 학교에서 보직을 마친 사람, 군대에서 별을 떼고 나온 사람, 동네 이장을 그만둔 사람. 크기는 다르지만 경험의 질감은 닮아 있습니다. 어제까지 자기를 찾아오던 사람들이 오늘은 다른 사람을 찾아갑니다. 그 이동은 조용하고, 빠르고, 철저합니다.

권력이라는 단어를 꺼내면 사람들은 으레 대통령궁이나 국회의사당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권력의 원리는 반상회에서도 작동하고, 아파트 입주자 대표 회의에서도 작동합니다. 누군가가 결정권을 쥐고 있을 때 그 사람 주위로 사람이 모이고, 결정권이 사라지면 사람도 흩어집니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한 단면입니다. 도덕적으로 비난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그 본성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합니다. 응시하지 않으면 대비할 수 없고, 대비하지 않으면 상처를 입습니다.

정치판에서 이 원리는 증폭됩니다.

국회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공천을 받지 못한 3선 의원이 있었습니다. 금요일 오후까지 점심 약속이 밀려 있던 분이었습니다. 월요일이 되자 점심을 함께 하겠다는 사람이 사라졌습니다. 그분은 의원회관 구내식당에 혼자 앉아 밥을 먹었습니다. 옆자리에는 막 초선 배지를 단 젊은 의원이 앉았는데, 서로 누군지도 모른 채 나란히 숟가락을 들었습니다. 권력의 이동은 그렇게, 점심 식탁 하나의 풍경으로 드러납니다.

당 대표 선거에서 진 후보의 캠프에서 일하던 청년들이 이력서를 들고 승리한 쪽의 문을 두드리는 장면도 보았습니다. 그 청년들을 탓할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도 생활이 있고 꿈이 있습니다. 떠나는 것이 비정한 게 아니라, 떠남이 당연한 구조 속에서 그래도 남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겁니다.

남는 사람. 이 책은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권력이 사라진 뒤에도 전화를 거는 사람. 직함이 바뀌어도 같은 태도로 대하는 사람. 곤경에 처했을 때 먼저 찾아오는 사람. 그런 사람이 당신의 전화기에 몇 명이나 있습니까. 세 명입니까, 다섯 명입니까. 그 숫자가 정치인의 진짜 자산입니다. 선거 때 동원할 수 있는 조직의 규모가 아니라, 밤열두 시에 전화해도 받아주는 사람의 숫자가 그 정치인의 실력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바뀝니다. 그 사람은 왜 남았습니까.

은혜를 입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오랜 우정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남는 사람은 하나의 공통된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내가 아무것도 아닐 때 나를 사람으로 대했다." 이 한 문장입니다.

국회 복도에서 청소하는 분에게 인사를 건네는 의원이 있고, 보좌관에게조차 반말을 하는 의원이 있습니다. 지역구 행사에서 주민의 이름을 기억하는 의원이 있고, 명함만 건네고 돌아서는 의원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위기에 처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극적으로 갈립니다. 사람들은 정치인의 공약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정책 백서의 내용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가 엘리베이터에서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악수할 때 눈을 맞추었는지, 이름을 불러주었는지를 기억합니다.

사람은 직함이 아니라 태도를 기억합니다.

이 책은 정치인이 사람을 얻는 방법에 대해 씁니다. 그러나 '방법'이라는 단어가 줄 수 있는 오해를 경계해야 합니다. 사람을 얻는 일은 기술이 아닙니다. 기법을 익혀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태도이고, 습관이고, 때로는 본성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왜 필요합니까. 태도가 전부라면, 착한 사람이 되라는 말 한마디로 끝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라는 공간에는 고유한 중력이 작용합니다. 권력이라는 중력장 안에서는 착한 태도만으로 부족합니다. 언제 다가가고 언제 물러서야 하는지, 누구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누구를 기다려야 하는지, 배신을 어떻게 소화하고 이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이 판단들은 경험에서 나옵니다. 동서고금의 정치 지도자들이 사람을 얻고 잃은 사례 속에 그 경험이 축적되어 있습니다.

링컨은 자기를 조롱하던 정적들을 내각에 앉혔습니다. 만델라는 자기를 27년간 가두었던 간수를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했습니다. 메르켈은 열여섯 해 동안 독일을 이끌면서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습니다. 세종은 스물한 차례나 탄핵당한 재상을 끝까지 곁에 두었습니다. 이 지도자들의 행동에는 공통된 원리가 있습니다. 그 원리를 추출하고, 오늘 한국 정치의 현실에 비추어 보는 것이 이 책이 하려는 일입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례들이 오늘 한국 정치의 특정 상황과 겹쳐 보이는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의도된 것이 아니라, 정치의 구조가 시대를 초월하여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제명당한 지도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누군가를 떠올린다면, 그 연결은 독자의 것입니다. 배신을 견딘 지도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현실 정치의 한 장면을 겹쳐본다면, 그 해석도 독자의 몫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국회에서 네 해를 보냈습니다. 그 공간에서 사람을 얻는 일의 어려움과, 사람을 잃는 순간의 서늘함을 겪었습니다. 지금은 법률가로 돌아와 그 경험을 돌아보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 책은 현직 정치인의 전투 일지가 아니라, 전장을 떠나 언덕에 앉은 사람이 내려다보며 쓴 지형도에 가깝습니다. 충분히 가까이 있었으므로 풍경의 결을 알고, 충분히 물러나 있으므로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권력은 사람에게서 옵니다. 선거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한 표 한 표가 모여 권력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권력은 사람에게로 돌아갑니다. 정치인이 내리는 결정은 결국 누군가의 삶에 닿습니다. 예산안 하나가 어느 동네 도서관의 운명을 바꾸고, 법안 하나가 누군가의 밤잠을 빼앗기도 합니다. 사람에게서 받은 것을 사람에게 돌려주는 순환. 그 순환이 건강할 때 정치는 작동합니다. 순환이 끊어지면 정치는 밀실의 거래가 됩니다.

이 책을 읽는 분이 정치를 꿈꾸는 분이라면, 한 가지를 먼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당신의 전화기에 저장된 이름들 가운데, 당신이 모든 직함을 잃은 뒤에도 전화를 받아줄 사람이 몇 명입니까. 그 숫자가 셋 이하라면, 아직 정치를 시작할 때가 아닙니다. 그 숫자를 먼저 늘려야 합니다. 그것이 이 책의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첫 번째 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제1부 사람을 읽는 눈

권력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들



1. 사람은 직함이 아니라 태도를 기억합니다

2005년 11월, 베를린. 독일 연방의회 본회의장에서 총리 취임 선서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단상에 선 여성은 키가 그리 크지 않았고, 목소리도 높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제스처도 없었습니다. 앙겔라 메르켈. 동독 브란덴부르크에서 목사의 딸로 자란 물리학자. 독일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 그날 유럽 언론의 논평은 대체로 미지근했습니다. 전임자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개혁 추진력에 비하면 메르켈은 너무 조용해 보인다는 평이 많았습니다. 한 기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녀에게 카리스마가 있는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는가? 아직 모른다."

그로부터 16년 뒤, 메르켈이 자발적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나던 날, 독일 국민의 75%가 그녀를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퇴임 당시 그녀를 가리키는 별명은 '무티(Mutti)', 독일어로 '엄마'였습니다. 16년 동안 네 번의 총선에서 연속 승리한 이 사람에게 붙은 이름이 '강철의 지도자'가 아니라 '엄마'였다는 사실은 정치적 리더십에 관한 통념을 뒤집습니다.

메르켈은 연설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연설로 사람을 휘어잡는 종류의 정치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문장은 길고 복잡했고, 때로는 결론이 어디로 가는지 청중이 먼저 졸기도 했습니다. 독일에서는 한때 '메르켈하다(Merkeln)'라는 동사가 유행했습니다.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고 우유부단하게 버티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조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단어가 세월을 견디면서 의미가 바뀌었습니다. '메르켈하다'는 나중에 '신중하게 때를 기다리다'라는 뜻으로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이 변화에 핵심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치인의 연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정책을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태도입니다. 그 사람이 자신을 대했던 방식, 위기 앞에서 보여준 표정, 권력 앞에서 취한 자세. 이것들이 쌓여서 하나의 인상이 됩니다. 메르켈의 경우, 그 인상은 '겸손과 품위'라는 두 단어로 수렴했습니다. 케이티 마튼이 쓴 전기에 따르면, 메르켈 자신이 묘비명으로 선택한 단어가 바로 이 두 개였습니다.

심리학에는 '따뜻함-유능함 모델(Warmth-Competence Model)'이라는 틀이 있습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수전 피스크(Susan Fiske) 교수팀이 정리한 이 모델에 따르면, 사람들은 처음 만나는 상대를 두 가지 축으로 평가합니다. 첫 번째 축은 '이 사람이 나에게 따뜻한가, 차가운가'입니다. 두 번째 축은 '이 사람이 유능한가, 무능한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순서가 있습니다. 따뜻함이 먼저입니다. 유능함은 그 다음입니다. 사람들은 상대의 능력을 평가하기 전에, 상대가 자신에게 적인지 아군인지를 먼저 판단합니다. 이 판단은 3초 안에 이루어집니다.

첫인상 3초. 이 숫자는 알렉산더 토도로프(Alexander Todorov)의 연구에서 나온 것입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이 심리학자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낯선 얼굴 사진을 0.1초 동안만 보여주고 신뢰도를 평가하게 했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0.1초 만에 형성된 인상이, 시간 제한 없이 충분히 관찰한 뒤의 인상과 거의 일치했습니다. 인간의 뇌는 상대의 신뢰도를 순간적으로 판단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치인의 세계에서는 첫인상보다 훨씬 어려운 게 있습니다. 30년 동안 관계를 유지하는 기술입니다. 3초 만에 호감을 사는 것은 타고난 외모와 미소로 가능합니다. 하지만 30년 동안 사람들이 떠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은 태도의 일관성으로만 가능합니다. 메르켈은 16년 동안 같은 아파트에서 살았습니다. 연방 정부가 제공하는 관저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퇴근 후에는 동네 슈퍼마켓에서 직접 카트를 끌고 장을 봤습니다. 이 행동이 계산된 것인지 자연스러운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16년 동안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엘리트 출신 정치인이 빠지기 쉬운 함정 하나를 짚어야 합니다. 유능함이 따뜻함을 가리는 순간, 사람들은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피스크 교수의 모델에서 '유능하지만 차가운' 영역에 놓이는 집단은 존경과 동시에 질투와 적대의 대상이 됩니다. 전문가 집단, 엘리트, 고위 관료가 여기에 속합니다. 이들은 능력을 인정받지만 좋아하지는 않는 사람들입니다.

검찰 출신으로 정치에 입문한 사람이 이 함정에 빠지기 가장 쉽습니다. 저도 검사 13년을 했기에 이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습니다. 검사의 눈은 조서를 읽는 눈입니다. 진술의 모순을 찾고, 증거를 교차 대조하고, 논리의 허점을 집어내는 훈련을 수천 시간 받은 눈입니다. 이 눈은 수사에서는 무기가 됩니다. 그러나 정치판에서 이 눈을 그대로 쓰면, 사람들은 심문당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저 사람은 나를 분석하고 있다"는 감각이 상대에게 전달되는 순간, 관계의 온도는 급격히 내려갑니다.

검사 시절, 저는 피의자의 진술에서 거짓을 찾아내는 데 집중했습니다. 조서의 행간에서 감추어진 사실을 읽어내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국회에 들어와 보니,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보면 아무도 제 곁에 오지 않았습니다. 정치판에서 사람을 읽는 눈은 조서를 읽는 눈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조서를 읽는 눈은 "이 사람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가"를 봅니다. 정치판에서 사람을 읽는 눈은 "이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봅니다. 전자는 의심에서 출발합니다. 후자는 관심에서 출발합니다. 이 차이를 깨닫는 데 저는 국회의원 임기의 절반 이상을 썼습니다.

메르켈이 오래간 이유는 결국 여기에 있습니다. 그녀는 권력자의 냄새를 풍기지 않았습니다. EU 정상회의에서 밤새 협상을 이끌 때도, 그리스 재정위기로 유럽이 흔들릴 때도, 그녀의 태도는 동네 슈퍼마켓에서 카트를 미는 사람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과학자답게 문제를 쪼개고, 감정을 배제하고, 해법을 찾는 데 집중했습니다. 푸틴과의 협상에서 메르켈이 했다고 전해지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과학자입니다. 문제들을 가장 작은 부분으로 쪼개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과정에 자존심이 끼어들 여지는 없습니다."

자존심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말. 정치인이 이 말을 할 수 있으려면, 자존심보다 결과물을 앞세우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어야 합니다. 화려한 연설가는 무대를 떠나면 잊힙니다. 하지만 위기의 밤에 전화를 받아주고, 상대의 체면을 살려주고, 약속한 것을 이행하는 사람은 오래 기억됩니다.

2015년, 시리아 내전으로 100만 명이 넘는 난민이 유럽으로 밀려왔을 때, 메르켈은 국경을 열었습니다. 지지율이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프랑스가 3만 명을 받아들이는 동안 독일은 117만 명을 수용했습니다. 유럽 곳곳에서 극우 정당이 약진하고, 독일 안에서도 반발이 거셌습니다. 지지율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결정이 만들어낸 것이 있습니다. 국제 사회에서 독일의 도덕적 권위가 올라갔고, 메르켈에 대한 신뢰는 깊어졌습니다. 뉴욕타임스는 그녀를 서방 세계에서 신뢰할 수 있는 마지막 정치 지도자라고 평했습니다.

직함은 임기가 끝나면 사라집니다. 총리, 대표, 의원. 이 호칭은 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태도는 임기가 없습니다. 한 사람이 보여준 태도의 총량이 결국 그 사람의 정치적 자산이 됩니다. 메르켈은 퇴임 후에도 '메르켈 보유국'이라는 표현이 독일에서 유통될 만큼 존경을 받았습니다. 동시에, 러시아 에너지 의존과 탈원전 결정에 대한 비판도 거셉니다. 2026년 유럽의회에서 공로 훈장을 수여하려 했을 때 야유가 터져 나오기도 했습니다. 완벽한 리더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16년 동안 단 한 건의 부패 스캔들 없이 퇴장한 정치인이 얼마나 드문지를 생각하면, 태도가 만들어낸 자산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검찰 출신이거나, 법조계 출신이거나, 어떤 전문 영역에서 칼날 같은 분석력을 무기로 살아온 사람이라면, 정치판에 들어서는 순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유능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아니면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이상적인 답은 물론 둘 다입니다. 그러나 둘 중 하나를 먼저 보여줘야 한다면, 따뜻함이 먼저입니다. 유능함은 일을 맡기면 증명됩니다. 따뜻함은 일을 맡기기 전에 보여줘야 합니다.

당신의 직함을 기억하는 사람은 명함을 받은 사람뿐입니다. 당신의 태도를 기억하는 사람은 당신과 함께 있었던 모든 사람입니다.


2. 정치판의 인간 지형도

1866년 7월, 쾨니히그레츠 전투가 끝난 직후의 프로이센 야전 사령부.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했습니다. 빌헬름 1세는 승리의 기세를 몰아 빈까지 진격하자고 했습니다. 수도를 점령하고, 오스트리아에 굴욕적인 강화 조건을 강요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장군들도 왕의 의견에 동조했습니다. 승리한 군대가 멈출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반대했습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프로이센의 재상이었던 그는 왕에게 오스트리아에 관대한 조건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영토 할양도 요구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배상금도 최소한으로 하자고 했습니다. 빌헬름 1세는 격분했습니다. 비스마르크와 왕 사이에 격렬한 언쟁이 벌어졌고, 비스마르크는 사임하겠다고까지 했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비스마르크는 이 과정에서 눈물까지 보였다고 합니다.

결국 비스마르크의 뜻이 관철되었습니다. 1866년 8월 프라하 조약은 패전국 오스트리아에게 놀라울 만큼 관대한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왜 비스마르크는 이기고도 양보했을까. 그의 계산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적은 내일의 동맹이 될 수 있다. 오스트리아에게 굴욕을 주면, 오스트리아는 반드시 복수를 꾀할 것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체면을 살려주면, 나중에 프랑스와 맞설 때 오스트리아를 우호적인 중립국으로 묶어둘 수 있다. 비스마르크의 계산은 정확했습니다. 4년 뒤 프로이센이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을 때, 오스트리아는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독일 통일의 마지막 걸림돌이 제거된 것입니다.

비스마르크의 이 일화에서 정치판의 인간관계에 관한 근본적인 원리 하나가 드러납니다. 정치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각자 원하는 것이 다르고, 그 차이를 읽지 못하면 관계는 깨집니다. 비스마르크가 빌헬름 1세를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오스트리아라는 '적'이 사실은 '미래의 동맹 후보'라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정치판에 있는 사람을 네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지지자, 동지, 참모, 후원자. 이 네 부류는 정치인에게 원하는 것이 각각 다릅니다.

지지자는 감동을 원합니다. 집회장에 나와 함성을 지르고, SNS에 응원 댓글을 달고, 투표소에서 한 표를 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정치인의 정책 세부 사항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이 사람이 나와 같은 편이다"라는 감각, "이 사람이 내 분노를 대변하고 있다"라는 감정적 연결입니다. 지지자에게 엑셀 파일을 보여주면 안 됩니다. 이야기를 들려줘야 합니다.

동지는 비전을 원합니다. 동지는 지지자와 다릅니다. 동지는 당장의 감동이 아니라, 이 정치인과 함께 가면 어떤 세상이 올 것인가를 묻습니다. 비전이 명확하면 동지는 자기 이익을 양보합니다. 비전이 흔들리면 동지는 떠납니다. 동지는 자기 삶의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이기에, 투자의 방향이 올바른지를 끊임없이 확인하려 합니다.

참모는 신뢰를 원합니다. 참모에게 감동이나 비전은 부차적입니다. 참모가 원하는 것은 "내 의견이 채택될 것인가", "내가 한 말이 무시되지 않을 것인가", "위기가 왔을 때 나를 방패막이로 내세우지 않을 것인가"입니다. 참모의 충성은 신뢰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신뢰가 깨지는 순간, 가장 유능한 참모가 가장 위험한 적이 됩니다.

후원자는 승산을 원합니다. 후원자는 자금을 대고, 인맥을 연결하고, 무대 뒤에서 판을 깔아주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냉정합니다. 감동에 움직이지 않고, 비전에 감화되지도 않습니다. 이들이 보는 것은 확률입니다. "이 사람이 이길 수 있는가?" 승산이 보이면 투자하고, 승산이 사라지면 빠집니다. 후원자를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후원자가 동지인 것처럼 착각하면 큰 화를 당합니다.

이 네 부류를 구별하는 일이 왜 중요한가. 같은 말을 해도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반응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지자에게 "우리는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라고 말하면 환호가 돌아옵니다. 후원자에게 같은 말을 하면 "근거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 돌아옵니다. 참모에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마세요"라고 말하면, 참모는 자신이 배제되고 있다고 느낍니다. 동지에게 "일단 선거부터 이기고 생각합시다"라고 말하면, 동지는 비전이 사라졌다고 판단합니다.

네 부류 바깥에 한 가지 구별이 더 있습니다. 권력을 사랑하는 사람과, 정치인 자체를 아끼는 사람의 구별입니다. 이 구별에 정치 생명이 달려 있습니다. 권력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 곁에 옵니다. 그리고 권력이 사라지면 떠납니다. 정치인 자체를 아끼는 사람은 당신이 권력을 잃었을 때 남습니다. 이 두 부류를 구별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당신에게 나쁜 소식이 생겼을 때, 누가 먼저 전화를 걸어오는지 보면 됩니다. 좋은 소식에 전화를 거는 사람은 많습니다. 나쁜 소식에 전화를 거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 드문 사람이 당신의 진짜 사람입니다.

비스마르크가 오스트리아를 관대하게 다룬 것은 적과 경쟁자도 사람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를 영원한 적으로 고정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맹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었습니다. 이것이 비스마르크 외교의 핵심이었습니다. 영원한 친구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 국가의 이익과 목표에 따라 유연하게 관계를 재편한다. 이 원리는 국가 간 외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인 개인의 인간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경선에서 나를 반대한 47%의 당원을 적으로 고정하면, 본선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당 안에서 나를 비판한 동료 의원을 원수로 대하면, 원내 운영이 불가능합니다. 당대표 선거에서 62%의 득표로 압승했더라도, 나머지 38%를 잃어버리면 당 운영은 반쪽짜리가 됩니다. 비스마르크가 빈으로 진격하지 않은 것처럼, 승리한 뒤에도 멈출 줄 아는 것이 진짜 힘입니다.

사람이 떠나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지는 사건이 아닙니다. 소외가 쌓입니다. 내 의견이 무시되었다는 경험이 쌓입니다. 공정하지 않다는 감각이 쌓입니다. 이 세 가지가 임계점을 넘는 순간, 사람은 떠납니다. 그리고 떠나는 순간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습니다. 소외를 느끼기 시작한 사람은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대신, 회의에 늦게 옵니다. 전화를 잘 받지 않습니다. 보고서의 분량이 줄어듭니다. 이 신호를 읽지 못하면, 어느 날 사무실이 텅 빈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비스마르크는 결국 1890년 빌헬름 2세와의 갈등으로 해임되었습니다. 28년간 재상으로 재임하면서 그가 쌓은 것은 위대한 업적이었지만, 동시에 쌓인 것이 있었습니다. 그의 강성한 행보에 치를 떨던 관료들과 대중의 불만이었습니다. 적에게는 관대했지만 내부의 사람들에게는 독단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비스마르크의 사례는 대외적 관계 관리와 대내적 관계 관리가 별개의 기술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깥의 적을 잘 다루는 것과, 안의 사람을 잘 다루는 것은 다른 역량입니다. 비스마르크는 전자에서 천재였지만, 후자에서는 실패했습니다.

정치인이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겁니다. 바깥의 적보다 안의 사람이 먼저입니다. 안의 사람이 떠나면, 바깥의 적을 상대할 힘 자체가 사라집니다.


3. 사람을 읽는 기술

서기 210년, 허창. 승상부에서 한 통의 포고문이 나왔습니다. 조조가 내린 구현령(求賢令)이었습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지금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니, 현인을 급히 구해야 할 때입니다. 만약 반드시 청렴한 선비만 등용할 수 있다면, 제나라 환공은 어떻게 관중을 써서 세상을 제패했겠습니까."

이 포고문 하나에 조조의 사람 보는 눈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4백 년간 이어진 한나라의 인재 등용 기준은 덕행(德行)이었습니다. 효도하고, 청렴하고, 예의 바른 사람을 향거리선(鄕擧里選)이라는 제도를 통해 추천받아 관직에 앉히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제도는 태평한 시절에는 작동했습니다. 그러나 천하가 갈라지고 군웅이 할거하는 난세에, 효자와 청렴한 선비만으로는 전쟁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조조는 이 오래된 질서를 뒤집었습니다. 건안 8년(203년)의 경신령에서 이미 "태평성세에는 덕성을 보지만, 난세에는 재능이 우선한다(治平尙德行, 有事賞功能)"라고 선언한 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7년 뒤 구현령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출신을 묻지 않겠다. 과거의 흠결을 따지지 않겠다. 오직 재능만 보겠다. 유재시거(唯才是擧), 이 네 글자가 조조 용인술의 핵심이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를 이해하려면, 당시의 맥락을 알아야 합니다. 후한 말기, 관직에 오르려면 좋은 가문 출신이어야 했습니다. 지방의 유력자가 추천해야 했습니다. 추천을 받으려면 효행이나 청렴함에 대한 평판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 시스템은 결국 명문 귀족들의 닫힌 회로가 되었습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야 추천을 받고, 추천을 받아야 관직에 오르고, 관직에 올라야 다시 다른 사람을 추천할 수 있었습니다. 능력이 있어도 가문이 없으면 올라갈 길이 없었습니다.

조조 자신이 바로 그 시스템의 주변부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환관의 양자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는, 명문 귀족들 사이에서 늘 출신의 열등감을 안고 살았습니다. 원소는 4대에 걸쳐 삼공을 배출한 명문가 출신이었습니다. 조조는 그런 배경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문 대신 능력을 보는 시스템을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개인적 필요와 시대적 요구가 겹쳤습니다.

구현령은 선언이었습니다. 실제 인사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추천 방식으로 인재를 등용했고, 조조 밑에서 활약한 인물들 중에도 명문 출신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언의 효과는 컸습니다. "이 사람 밑에서는 출신과 무관하게 능력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메시지가 천하에 퍼졌고, 적벽대전에서 참패한 뒤에도 인재들이 조조에게 몰려왔습니다. 패배가 조조의 권위를 무너뜨리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인재 등용 원칙이 이미 일종의 브랜드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조의 사례에서 정치 리더가 사람을 읽을 때 봐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고, 행동보다 반복되는 패턴을 봐야 합니다. 조조는 사람의 됨됨이를 먼저 보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먼저 봤습니다. 그리고 한 번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결과를 내는 사람을 중용했습니다. 일회성의 공적보다 패턴이 중요합니다. 한 번 큰 공을 세운 사람과, 꾸준히 작은 성과를 쌓아온 사람이 있다면, 후자가 더 믿을 만합니다. 큰 공은 운이 작용할 수 있지만, 꾸준한 성과는 실력의 증거입니다.

사람을 읽을 때 유형을 구별하는 눈이 필요합니다. 정치인 주변의 사람들은 대략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뉩니다. 충성형, 실무형, 야심형, 가치형. 이 네 유형은 겉으로는 구별이 어렵습니다. 모두 열심히 일하고, 모두 충성을 맹세합니다. 차이는 압력이 가해졌을 때 드러납니다.

충성형은 리더 개인에게 충성합니다. 리더가 옳든 그르든, 이기든 지든, 충성형은 떠나지 않습니다. 이들은 위기의 순간에 가장 먼저 전화를 받는 사람입니다. 장점은 명확합니다. 불확실한 시기에 심리적 안정을 줍니다. 단점도 있습니다. 리더의 판단이 틀렸을 때 바로잡아 주지 못합니다. 충성형만으로 팀을 구성하면, 예스맨의 방에 갇히게 됩니다.

실무형은 일에 충성합니다. 리더 개인이 아니라, 맡겨진 과업에 자존심을 겁니다. 실무형은 감정보다 결과를 중시합니다. 이들은 보고서가 정확하고, 마감을 지키며, 문제를 진단할 때 감정을 섞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무형은 리더가 바뀌어도 크게 동요하지 않습니다. 리더 개인에 대한 충성보다 시스템에 대한 충성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실무형을 곁에 두되, 이들이 떠나지 않게 하려면 일의 의미를 계속 부여해야 합니다.

야심형은 자기 미래에 충성합니다. 리더를 따르는 이유가 리더에 대한 존경이 아니라, 리더를 따르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미래에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야심형은 유능합니다. 에너지가 넘칩니다. 성과를 잘 냅니다. 그러나 더 나은 기회가 오면 떠납니다. 야심형을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동기입니다. 다만, 야심형을 동지로 착각하면 큰 실수를 합니다. 야심형에게는 명확한 역할과 성장의 경로를 제시하되, 핵심 의사결정의 내부 고리에는 두지 않는 것이 안전합니다.

가치형은 대의에 충성합니다. 리더 개인이 아니라, 리더가 추구하는 가치와 방향에 공감하여 합류한 사람입니다. 가치형은 리더가 올바른 방향으로 갈 때 가장 헌신적입니다. 그러나 리더가 가치에서 벗어나면 가장 먼저 이의를 제기합니다. 가치형은 쓴소리를 하는 사람입니다. 불편합니다. 때로는 회의 분위기를 깨뜨립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없는 조직은 방향을 잃습니다.

이 네 유형을 구별하지 못하면 인사에서 실패합니다. 충성형을 참모직에 앉히면 조직이 경직됩니다. 야심형을 비서실장에 앉히면 정보가 새어 나갑니다. 실무형을 대변인에 앉히면 메시지에 감정이 실리지 않습니다. 가치형을 선거운동 총괄에 앉히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마찰이 생깁니다. 적재적소. 이 말은 상투적이지만, 적재적소가 실패하는 이유는 '적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적소'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리에 어떤 유형의 사람이 필요한지를 판단하는 능력이 인사의 핵심입니다.

위기 상황에서 사람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평소에는 구별이 어렵던 네 유형이 위기가 왔을 때 선명하게 갈라집니다. 2024년 12월 3일 밤의 일을 생각해 봅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누가 전화를 받았습니까. 누가 먼저 국회로 달려왔습니까. 누가 상황을 관망했습니까. 누가 전화기를 꺼놓았습니까.

그날 밤의 전화 목록이 한 정치인의 진짜 인간 지형도입니다. 평소에 충성을 맹세하던 사람 중 연락이 닿지 않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평소에는 거리를 두던 사람 중 먼저 전화를 건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차이가 중요합니다. 위기는 관계의 엑스레이입니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골격이 위기의 순간에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조조의 구현령이 가르치는 것은 출신이 아니라 능력을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능력만으로도 부족합니다. 능력 위에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평시에도 그렇고 위기에도 그런 사람. 승리할 때도 그렇고 패배할 때도 그런 사람. 그 일관성을 보려면 한 번의 인상이 아니라 반복되는 패턴을 봐야 합니다. 한 번의 훌륭한 행동은 연기일 수 있습니다. 열 번의 같은 행동은 성품입니다.

검사 시절, 저는 피의자의 진술을 반복 청취하면서 진술의 패턴을 분석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같은 질문을 다른 시점에 던졌을 때, 답변의 핵심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진실일 확률이 높습니다. 세부 사항은 달라져도 뼈대가 같으면 믿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보는 것도 같습니다. 한 사람의 말이 상황에 따라 어떻게 바뀌는지를 장기간 관찰하면, 그 사람의 뼈대가 보입니다. 뼈대가 단단한 사람이 곁에 있어야 합니다.

정치인에게 사람을 읽는 기술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입니다. 잘못 읽으면 배신당합니다. 제대로 읽으면, 위기의 밤에 전화를 받아줄 사람을 미리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화려한 이력서를 가진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조조의 구현령이 말하듯, 갈옷을 입고 위수 가에서 낚시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 사람을 알아보려면, 평소에 눈을 훈련해 두어야 합니다.

위기의 밤에 허둥대며 전화번호를 뒤지는 것은 이미 늦은 것입니다.


제2부 사람을 모으다

관계의 기반을 만드는 기술



4. 관계의 씨앗은 정치를 시작하기 10년 전에 뿌려집니다

가 링컨의 변호사 시절 — 재판정 밖에서 마을 사람들의 불만을 들어주던 오후

1840년대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서 출발하는 순회 재판 행렬이 있었습니다. 열네 개 카운티를 돌아다니며 법정을 여는 제8사법순회구. 봄과 가을에 각각 열 주씩, 한 해의 절반을 먼지 날리는 초원의 비포장도로 위에서 보내는 변호사들의 대열 속에 키가 유난히 크고 마른 사내가 끼어 있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었습니다.

다른 변호사들은 주말이면 스프링필드로 돌아갔습니다. 가족이 있고, 안락한 침대가 있고, 빨래한 셔츠가 기다리는 집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링컨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1849년 이후 열네 개 카운티 전체를 빠짐없이 순회한 변호사는 주 검사를 제외하면 그 혼자였습니다. 주말이면 그는 작은 마을의 선술집이나 잡화점 앞에 머물렀습니다. 나무 의자에 기다란 다리를 뻗고 앉아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울타리 경계선을 두고 벌어진 이웃 간의 다툼, 빗물에 떠내려간 돼지를 누가 책임져야 하느냐는 하소연, 우체국장이 편지를 엉뚱한 사람에게 전달한 사연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링컨은 그 하소연들에 수임료를 매기지 않았습니다. 법률 자문이라 부르기도 어려운, 그저 옆에 앉아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따금 싱거운 이야기 하나를 꺼내어 잔뜩 찡그린 상인의 얼굴을 풀어놓곤 했습니다. 데이비드 데이비스 판사는 훗날 이렇게 회고합니다. 링컨은 순회 재판 여정 위에 있을 때 가장 행복했다고. 집에서도, 의회에서도, 어디에서도 그만큼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고.

이 시간들이 쌓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법정에서의 링컨보다 법정 밖에서의 링컨을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치밀한 법리를 구사하는지보다, 무더운 오후에 땀을 닦지도 않고 한 농부의 불만을 끝까지 들어준 그 태도를 기억했습니다. 1846년 그의 이름이 연방 하원의원 후보로 올랐을 때, 유권자들은 관세 정책이나 연방 은행에 관한 그의 견해를 정밀하게 분석해서 투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시시콜콜한 삶의 무게를 기꺼이 나누어 짊어지던 그 인내심 깊은 눈동자를 떠올리며 이름 옆에 표시를 했습니다.

정치라는 거대한 나무는 선거판이 열리고 현수막이 걸리는 요란한 시점에 하루아침에 자라나지 않습니다. 뿌리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먼지투성이 오후에, 보잘것없어 보이는 대화의 시간 속에서 땅 깊이 내려갑니다. 유권자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저울은 후보자가 카메라 앞에서 허리를 굽히기 훨씬 전에 이미 기울어져 있습니다. 표를 달라고 호소하기 십 년 전에 묵묵히 내어준 시간만이 진정한 정치적 자본으로 축적됩니다.

그 자본의 성격을 좀 더 들여다봐야 합니다. 링컨이 순회 재판을 돌며 쌓은 것은 인맥이 아니었습니다. 인맥이라는 단어는 명함을 주고받고 전화번호를 저장하는 행위를 떠올리게 합니다. 링컨이 축적한 것은 그보다 훨씬 오래가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된 하나의 감각, 즉 "이 사람은 내 편이다"라는 직관적 확신이었습니다. 이 확신은 논리로 심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반복된 경험, 한결같은 태도의 축적으로만 형성됩니다. 열 번을 만나도 열한 번째에 같은 자세로 앉아 듣는 사람. 그런 사람 앞에서 사람들은 방어를 내려놓습니다.

현대 정치에서 유세 기간은 몇 달에 불과합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겠다는 계산은 대부분 실패합니다. 마음이 열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선거 직전에 시장 골목을 걸으며 손을 잡는 행위가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행위가 진정으로 빛을 발하려면, 선거가 없는 평범한 화요일 오후에도 같은 골목을 걸었던 기억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링컨은 선거를 위해 마을에 머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삶 자체를 택했고, 정치는 그 삶의 자연스러운 연장선 위에서 일어났습니다.

나 유비의 삼고초려가 가능했던 전제 조건 — 이미 축적된 평판이라는 자산

삼고초려라는 네 글자를 듣는 순간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거의 자동으로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날, 쉰 가까운 나이의 군벌이 초가집 앞에 무릎을 꿇고 스물일곱 청년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장면. 이 극적인 이미지에 모든 조명이 집중되다 보니, 정작 이 만남을 가능하게 한 전제 조건은 그림자 속에 묻혀 버립니다.

서기 207년, 융중의 산자락에 은둔하던 제갈량의 귀에는 이미 천하의 소문이 흘러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 물정에 어두운 은자가 아니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 네트워크를 통해 중원의 형세를 손바닥 보듯 파악하고 있었고, 누가 어디서 어떤 세력을 이끌고 있는지 꿰뚫고 있었습니다. 조조에게는 압도적인 군사력이 있었고, 손권에게는 비옥한 강남의 영토와 아버지 대부터 축적된 기반이 있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유비는 이 두 사람에 비해 모든 면에서 열세였습니다. 근거지도 없이 이 제후 저 제후의 밑을 전전하며 떠도는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제갈량은 유비를 택했습니다.

그 선택의 근거는 눈보라를 뚫고 세 번 찾아온 발걸음 그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제갈량이 본 것은 유비가 수십 년에 걸쳐 중원 곳곳에 남긴 궤적이었습니다. 서주의 도겸이 영토를 양보하겠다고 했을 때 유비가 보여준 태도, 조조에게 쫓기며 패주하는 와중에도 따르는 백성을 버리지 않았던 선택, 수차례 배신당하면서도 부하들에게 칼을 겨누지 않았던 인내. 이 모든 기록이 소문의 형태로 융중의 깊은 산속까지 전해져 있었습니다.

제갈량은 초가집 문을 열기 전에 이미 유비라는 인간을 오랫동안 검증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세 번의 방문은 그 축적된 자산의 진정성을 최종 확인하는 절차에 가까웠습니다. 만약 유비에게 수십 년간 쌓아온 평판이 없었다면, 눈보라 속에 열 번을 찾아와도 제갈량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을 겁니다. 아무런 궤적 없이 어느 날 갑자기 겸손한 자세를 연출한다고 해서 훌륭한 인재가 모여들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현대의 정치인이 끌어내야 할 교훈은 분명합니다. 인재를 모으는 힘은 스카우트 제안서의 조건에서 오지 않습니다. 리더가 살아온 시간 전체가 뿜어내는 향기에서 옵니다. 그 향기는 조작할 수 없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어떤 선택을 했는지, 이익 앞에서 어떤 것을 포기했는지, 약자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가 한 올 한 올 엮여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치를 시작하기 전에 누구와 밥을 먹었는지, 누구의 곤란한 상황에 달려갔는지, 어떤 유혹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는지. 그것이 훗날 정치적 진용의 질을 결정합니다. 유비가 융중의 문을 두드릴 자격을 얻기까지 걸린 시간은 삼고초려의 사흘이 아니라, 그 이전의 이십 년이었습니다.

다 검찰 시절 쌓은 원칙 수사의 경력이 정치적 자산이 되기까지의 시간

서초동의 밤은 깊었습니다. 형광등이 환하게 켜진 사무실에서 수사 기록을 넘기고 있으면,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때로 위압적이었고 때로 은근했습니다. 적당히 선에서 마무리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전화를 끊는 일은 뼈를 깎는 일이었습니다. 전화를 끊는 것은 누군가의 분노를 사는 일이고, 분노는 인사 발령이라는 형태로 돌아왔습니다. 좌천, 한직, 지방 발령. 원칙을 지킨다는 것의 대가는 낭만적인 영웅담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마주치는 동료들의 미묘한 시선, 점심시간에 혼자 남는 식탁의 적막함. 그것이 원칙의 실제 비용이었습니다.

십 년, 이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런 선택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지층을 형성합니다. 당장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융통성 없는 사람이라는 평가,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수군거림이 뒤를 따라다닙니다. 그 사이에 요령 좋게 선을 넘나든 사람들은 승진하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넓은 사무실로 옮겨 갑니다.

그런데 시간이 더 흐르면 풍경이 바뀝니다.

세상이 요동치고 권력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대중이 공정에 목말라하는 시기가 반드시 옵니다. 그때 사람들의 시선은 화려한 경력을 쌓은 사람이 아니라, 묵묵히 모멸의 시간을 견뎌낸 사람의 궤적을 향합니다. 한직을 전전하던 이력이 갑자기 다르게 읽히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은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어떤 정책 공약보다 강력한 메시지가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검찰 시절 원칙 수사의 경력이 하루아침에 정치적 자산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지하수와 같습니다. 비가 내려 땅에 스며든 물은 바위틈을 지나고 모래층을 거치며 아주 천천히 아래로 흘러갑니다.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가뭄이 들어 지표의 물이 모두 말라붙었을 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지하수가 마을 전체를 살립니다. 원칙이라는 지하수는 모이는 데 오래 걸리지만, 한번 모이면 쉽게 마르지 않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원칙을 지킨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부러지지 않고 버텨냈다는 사실입니다. 원칙 때문에 한직으로 밀려난 사람이 거기서 주저앉아 세상을 원망하기만 했다면, 그 경력은 자산이 아니라 상처로만 남습니다. 원칙의 대가를 치르면서도 자기 자리에서 맡은 일을 해내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다음 기회를 준비한 사람만이 그 지층 위에 다시 서는 날을 맞이합니다.

정치는 가벼운 선언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과거의 삶 전체를 담보로 내어놓고 대중의 동의를 구하는 계약입니다. 조사실의 외로운 책상에서 지켜낸 원칙 하나의 무게가, 훗날 광장의 수만 군중 앞에 설 자격을 만들어 냅니다. 그 무게는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고, 하루아침에 만들어낼 수도 없습니다. 오직 시간만이 그것을 빚어냅니다.

라 지역사회, 직업 공동체, 동문 — 자연스러운 인맥의 세 갈래와 그 각각의 온도

한 사람이 살아오며 맺는 관계는 나무뿌리처럼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갑니다. 크게 세 갈래입니다. 지역사회, 직업 공동체, 동문. 이 셋은 형성되는 방식도 다르고, 유지되는 온도도 다르고, 위기 상황에서 작동하는 양상도 서로 다릅니다.

지역사회의 인맥은 흙냄새가 납니다. 출근길에 마주치는 세탁소 아주머니, 주말 아침 배드민턴 동호회에서 함께 땀을 흘리는 이웃, 아이들 학교 학부모 모임에서 고개 끄덕이며 인사하는 얼굴들. 이들은 정치적 이념이나 직업적 업적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분리수거장에서 쓰레기봉투를 내려놓는 태도,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인사하는 목소리의 톤, 동네 식당에서 종업원에게 건네는 말투. 그런 일상의 파편들로 그 사람의 바닥을 봅니다. 이 뿌리의 온도는 미지근합니다. 뜨겁게 환호하지도, 차갑게 돌아서지도 않습니다. 대신 비바람이 몰아칠 때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는 바위 같은 성질을 지닙니다. 선거에서 이기든 지든, 배지를 달든 떼든, 내일 아침에도 같은 골목에서 마주칠 사람들입니다.

직업 공동체의 인맥은 차갑고 날카롭습니다. 같은 법정에서 변론을 겨루었던 변호사들, 같은 부서에서 밤을 새우며 보고서를 쓰던 동료 검사들, 정책 토론회에서 날 선 질문을 주고받던 관료들. 이들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업무의 정확성, 위기 상황에서의 판단력, 약속을 이행하는 일관성. 이런 것들을 잣대로 삼아 사람을 저울질합니다. 직업 공동체 안에서의 평판은 외부에서 확인하기 어렵지만, 그 무게는 상상 이상으로 큽니다. 내부에서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 밖에서 아무리 화려한 포장을 해도, 동종 업계의 서늘한 평가 한 줄이 그 포장지를 찢어버립니다. "그 사람, 실무는 별로였어." 이 짧은 문장이 퍼지는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고, 지워지는 속도는 생각보다 느립니다.

동문의 인맥은 뜨겁습니다. 난로 같은 온기가 있습니다. 십대 시절, 혹은 이십대 초반의 아직 세상에 때 묻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입니다. 시험 전날 밤 도서관에서 라면을 나눠 먹던 기억, 축제 때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던 밤의 감각이 남아 있습니다. 이 관계에는 이해관계라는 필터가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해관계가 끼어들기 전에 형성된 유대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관계보다 조건 없는 응원이 가능합니다. 세상이 등을 돌릴 때, 전화 한 통 하면 달려와 술잔을 부딪혀주는 사람이 이 부류에서 나옵니다.

세 갈래의 뿌리는 각각의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역사회는 안정적이지만 깊이가 얕을 수 있습니다. 직업 공동체는 정확하지만 냉혹합니다. 동문은 따뜻하지만 맹목적일 수 있습니다. 훌륭한 정치인은 이 세 뿌리의 온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동문의 무조건적인 응원에만 기대면 객관성을 잃고, 직업 공동체의 차가운 평가에만 의존하면 인간적 온기를 잃고, 지역사회의 미지근한 관계에만 머물면 깊이를 잃습니다.

정치를 시작하기 전에 이 세 갈래의 뿌리가 얼마나 고르게 뻗어 있는지 점검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어느 한 갈래가 유독 빈약하다면, 거기에 시간을 쏟아야 합니다. 뿌리가 한쪽으로만 기울어진 나무는 강한 바람에 쓰러집니다. 세 방향으로 균형 있게 뻗어 내린 뿌리만이 어떤 폭풍 속에서도 줄기를 지탱해 줍니다.

이것이 정치를 시작하기 10년 전에 해야 할 일의 전부입니다. 거창한 계획이 아닙니다. 출근길에 인사하고, 동료의 어려운 일에 손을 내밀고, 오래된 친구의 안부를 묻는 일. 이 사소한 행위들이 켜켜이 쌓여 훗날 정치라는 험난한 산을 오를 때 발을 디딜 반석이 됩니다.


5. 첫 번째 사람을 얻는 법

가 케네디에게 소렌슨이, 김대중에게 한화갑이 있었습니다

1953년 1월, 매사추세츠주에서 갓 상원의원에 당선된 존 F. 케네디의 워싱턴 사무실에 스물다섯 살의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네브래스카주 링컨 출신의 테드 소렌슨이었습니다. 네브래스카 대학교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한 이 젊은 변호사는 워싱턴에서 커피 한 잔 마셔본 적도 없고, 수표 한 장 써본 적도 없는 청년이었습니다. 보스턴 명문가 출신으로 도회적이고 세련된 케네디와는 모든 면에서 달랐습니다. 케네디는 가톨릭이었고, 소렌슨은 유니테리언교도였습니다. 케네디는 하버드를 나왔고, 소렌슨은 중서부의 공립대학을 나왔습니다. 케네디는 타고난 사교가였고, 소렌슨은 스스로 인정하듯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는 데 서툴렀습니다.

두 사람이 좁은 상원 사무실에서 마주 앉았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그 뒤의 역사가 증명합니다. 소렌슨은 입법 보좌관으로 시작했지만, 곧 케네디의 지적 분신이 되었습니다. 케네디의 머릿속에 흩어져 있는 거친 사유의 파편들을 주워 모아 하나의 철학으로 엮어내는 일, 그것이 소렌슨의 역할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미국 50개 주를 함께 돌아다니며 유권자들을 만났고, 이 긴 여정 속에서 서로의 생각을 완벽하게 읽게 되었습니다. 소렌슨은 훗날 이렇게 말합니다. 기자들이 자신이 케네디의 마음속에 들어가 문장을 완성한다고 쓸 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고.

1961년 1월 20일의 취임 연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흐루쇼프에게 보낸 서신, 1963년 6월 베를린과 아메리칸 대학교에서의 연설. 케네디 시대를 정의하는 말들의 상당수에 소렌슨의 손길이 닿아 있었습니다. 케네디가 암살당했을 때 소렌슨은 "내 인생에서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긴 경험"이라고 썼습니다. 그것은 상사를 잃은 슬픔을 넘어, 자기 자신의 절반을 잃은 것에 가까운 상실이었습니다.

태평양 건너 한국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군사정권의 감시 아래 가택연금과 망명을 오가던 김대중의 곁에는 한화갑이 있었습니다. 칠흑 같은 정치적 겨울 동안 그는 주군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고, 흩어진 조직의 실핏줄을 이어 붙이는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습니다. 권력도 보상도 눈앞에 없는 시절,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절에 곁을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참모 1호를 두는 것은 일손을 돕는 직원을 채용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결함과 두려움을 가감 없이 내보일 수 있는 한 사람을 찾는 일입니다. 리더가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모습 뒤에는 반드시 보여주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판단이 흔들리는 새벽, 자존심이 꺾이는 순간, 분노를 삼켜야 하는 회의. 이런 장면을 목격하고도 등을 돌리지 않는 사람, 그러면서도 필요하면 정면으로 반대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존재가 참모 1호입니다.

첫 번째 참모가 누구냐는 그 정치인이 어떤 정치를 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승리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을 곁에 두면 그 정치인의 정치도 그렇게 흘러갑니다. 원칙을 지키되 소통에 능한 사람을 첫 번째로 세우면, 뒤이어 모여드는 사람들도 그 결에 맞추어 정렬됩니다. 첫 번째 깃발이 어디에 꽂히느냐에 따라 전체 진형의 모양이 결정됩니다.

나 나의 결핍을 채워줄 이질적인 동료를 영입하는 용기

권력을 쥐거나 새로운 진용을 짤 때, 리더는 본능적으로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찾습니다. 설명이 길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통하는 사람, 같은 학교를 나오고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 농담의 코드가 맞고 분노의 대상이 겹치는 사람. 이런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편안합니다. 회의가 빨리 끝나고, 이견이 적고, 의사결정이 매끄럽습니다.

편안함은 독약입니다.

자기와 닮은 사람들로만 채운 조직은 거울 방에 갇힌 것과 같습니다. 어디를 봐도 자기 얼굴만 보입니다. 맞은편에 절벽이 있는지, 뒤에서 물이 차오르는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위기가 닥쳤을 때 이 조직은 한 방향으로만 생각하고 한 방향으로만 움직입니다. 사각지대를 볼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평생 법전과 판례의 세계에서 살아온 사람의 곁에는 시장 바닥의 거친 민심을 감각적으로 읽어내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신중하고 과묵한 리더에게는 장애물 앞에서 주저하지 않고 밀고 나가는 돌격대장이 필요합니다. 꼼꼼한 분석가의 옆에는 큰 그림을 그리는 몽상가가 앉아야 합니다. 이질적인 동료는 리더에게 불편함을 줍니다. 회의가 길어지고, 충돌이 잦아지고, 에너지가 소모됩니다. 바로 그 불편함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립니다.

케네디와 소렌슨의 관계가 그랬습니다. 부유한 보스턴 가문의 감각과 네브래스카 평원의 진보적 정의감은 본질적으로 이질적이었습니다. 이 두 감각이 부딪치고 섞이면서 케네디의 언어는 보수에게도 진보에게도 닿는 폭넓은 울림을 얻었습니다. 소렌슨이 케네디의 복사본이었다면, 역사에 남을 그 연설들은 탄생하지 못했을 겁니다.

나의 결핍을 인정하는 것이 첫걸음입니다. 리더들은 흔히 자신의 강점은 잘 알지만 결핍은 보지 못합니다. 혹은 보면서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 분야까지 다 알 필요는 없다"는 자기 합리화가 뒤따릅니다. 결핍을 인정하지 않는 리더 곁에는 결국 약점을 가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약점을 더 깊이 파묻어주는 사람만 모이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못하는지, 어떤 감각이 부족한지를 냉정하게 직시하고, 바로 그 부분을 채워줄 사람을 찾아 나서는 일. 그것이 조직을 만드는 첫 번째 용기입니다.

이질적인 동료와의 동행은 매 순간 갈등의 연속입니다. 의견이 다르고, 속도가 다르고, 우선순위가 다릅니다. "차라리 혼자 하는 게 빠르겠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듭니다. 그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이질적인 동료를 밀어내는 순간, 리더는 다시 거울 방으로 돌아갑니다. 한 사람의 그릇은 유한합니다. 그 그릇을 깨고 나와 더 넓은 공간을 품으려면, 나와 다른 결의 사람이 일으키는 마찰을 기꺼이 감내해야 합니다.

다 비상대책위원장을 수락하던 그 저녁 — 첫 번째 합류자가 누구였는가가 이후의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12월의 바람이 매서운 저녁이었습니다. 침몰하는 배의 조타실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수락한 순간, 머릿속에는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수십 년간 익숙했던 세계를 떠나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진흙탕으로 걸어 들어가는 결정이었습니다. 구조대장의 역할을 맡았으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함께 물에 뛰어들 사람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전화를 누구에게 걸 것인가. 이 선택은 단순히 실무를 도울 사람을 구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해 보내는 최초의 신호입니다. 배가 어느 방향으로 향할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항해할 것인지를 세상에 알리는 메시지입니다.

기성 정치의 문법에 익숙한 안정적인 인물을 첫 번째로 세우면, 당장의 혼란은 수습할 수 있습니다. 내부의 저항을 최소화하고 기존 질서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변화를 꾀할 수 있습니다. 대신 바깥의 기대는 식어버립니다. "결국 달라지는 건 없구나"라는 탄식이 흘러나옵니다. 반대로, 기존 체제와 거리를 둬온 새로운 인물을 세우면 내부의 반발은 거셉니다. 당장 옆자리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그러나 바깥에서는 "진짜 바뀌려고 하는구나"라는 기대가 피어오릅니다.

어떤 선택이든 대가가 따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대가를 알고서 선택하느냐, 모르고서 선택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첫 번째 참모가 정해지는 순간,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지형도가 자연스럽게 그려집니다. 원칙주의자를 첫 번째로 세우면 비슷한 결의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현실주의자를 세우면 현실주의자들이 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조직의 DNA를 결정하는 시원 세포와 같습니다. 그 세포의 성질이 전체 조직으로 복제되어 나갑니다.

비상대책위원장이라는 자리는 평시의 당대표와 다릅니다. 위기 상황에서 불을 끄러 온 소방대장입니다. 소방대장이 첫 번째로 부르는 대원이 화학 전문가인지, 구조 전문가인지, 폭발물 처리반인지에 따라 작전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그날 저녁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첫 번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이었느냐. 그것이 이후 벌어진 모든 일의 물줄기를 정했습니다.

라 초기 팀에서 충성심과 역량 사이의 균형을 잡는 법

초기 팀을 꾸릴 때 리더는 깊은 골짜기에 서게 됩니다. 한쪽 절벽에는 '역량'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다른 쪽 절벽에는 '충성심'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떨어집니다.

역량에 치우쳐 사람을 모으면 조직은 용병 집단이 됩니다. 이들은 일의 완성도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보고서의 수치는 정확하고, 대안의 논리는 탄탄하고, 실행 속도는 빠릅니다. 그런데 전황이 불리해지는 순간 이들은 냉정하게 손익을 계산합니다. 이 배에 남아 있는 것이 유리한가, 아니면 건너편 배로 갈아타는 것이 유리한가. 계산 결과가 불리하다고 나오면 미련 없이 떠납니다. 그들에게는 조직에 대한 감정적 유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충성심에만 기대어 사람을 뽑으면 조직은 맹신자들의 모임이 됩니다. 이들은 리더를 위해 기꺼이 총알받이가 됩니다. 어떤 비난이 쏟아져도 방패를 들고 서고, 리더의 말이 곧 법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리더의 판단에 제동을 걸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리더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어도 "대표님 말씀이 맞습니다"만 반복합니다. 복잡한 문제를 풀어낼 기술적 역량이 부족한 경우가 많아, 위기가 닥치면 정신력은 넘치지만 해법은 없는 상태에 빠집니다.

균형을 잡는 일은 이론으로는 쉬워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극도로 어렵습니다. 평화로운 시절에는 두 가치를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역량 있는 사람도 평시에는 충성스러워 보이고, 충성스러운 사람도 평시에는 역량이 있어 보입니다. 구별은 작은 위기가 찾아왔을 때 가능해집니다.

외부에서 거센 비판이 쏟아질 때 어떤 참모는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대응 방안을 세 가지 준비해 옵니다.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데이터를 들이대며 최선의 경로를 제시합니다. 역량입니다. 같은 상황에서 어떤 참모는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 리더의 전화를 기다리며, 불리한 기사가 나올 때마다 반박 자료를 만들어 놓고, 다음 날 아침 가장 먼저 출근해서 리더가 기분 나쁠 일을 미리 차단해 놓습니다. 충성심입니다.

이 두 가치를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발견하기는 드뭅니다. 그래서 리더는 두 종류의 사람을 조합해야 합니다. 역량 있는 사람에게는 비전과 철학을 끊임없이 심어주어 정서적 유대를 만들어가고, 충성스러운 사람에게는 현장의 경험과 역할을 부여하여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역량과 충성심이 하나의 그릇 안에서 섞일 때, 그 사람은 비로소 리더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됩니다.

초기 팀의 구성은 한 번의 결정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함께 달리면서 끊임없이 조정하는 과정입니다. 어떤 사람은 역량은 뛰어나지만 조직의 방향과 맞지 않아 떠나보내야 할 때가 있고, 어떤 사람은 충성심은 깊지만 맡은 역할에 한계를 보여 자리를 옮겨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 조정을 미루면 조직은 서서히 기울어집니다. 리더의 가장 고된 일은 비전을 선언하거나 연설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의 역량과 충성심의 밸런스를 매일매일 미세하게 조정하는 것. 그 지루하고 반복적인 작업이 초기 팀의 생존을 결정합니다.


6. 이익이 아닌 가치로 결속해야 겨울을 버팁니다

가 이익으로 모인 자는 이익이 사라지면 떠납니다

당선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캠프 사무실의 복도는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이력서를 든 전문가, 조직을 통째로 가져오겠다는 중간 관리자, 후원금을 약속하는 사업가, 친분을 내세우며 자리를 요구하는 지인. 바깥에서 보면 거대한 지지의 물결처럼 보입니다. 리더는 이 풍경에 취합니다. 내 이름 석 자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든다는 사실이 기분 좋습니다.

여기서 멈춰 서서 한 가지를 물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왜 여기에 왔는가.

답은 불편할 수 있습니다. 상당수는 리더가 품고 있는 시대적 비전에 감응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쫓는 것은 리더가 쥐게 될 권력의 그림자입니다. 장관직, 공기관장 자리, 정부 사업의 수주, 정치적 지분. 이런 것들이 그들의 진짜 목적지입니다. 리더라는 인간은 그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교통수단에 가깝습니다.

이익을 매개로 맺어진 결속은 그 이익이 희미해지는 순간 해체됩니다. 선거에서 패배한 다음 날 아침, 낙선자의 사무실이 어떻게 변하는지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어제까지 가장 열정적이었던 사람부터 자리를 뜹니다. 새로운 권력의 중심을 향해 방향을 틀기 위해 서두르는 겁니다. 자리가 남아 있는 사람은 짐을 싸는 사람뿐입니다. 전화기는 고장을 의심할 만큼 조용해집니다.

이것은 배신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이익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이익이 사라진 자리를 떠나는 것은 계약의 종료에 가깝습니다. 충격을 받는 것은 리더 자신의 착각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서 왔다고, 내 비전에 동의해서 왔다고 믿었던 착각.

그래서 리더는 환호의 소음이 가장 클 때 눈을 감고 물어야 합니다. 지금 내 앞에서 미소 짓고 있는 이 사람은, 내가 아무것도 줄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여기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자신 있게 "예"라고 답할 수 있는 얼굴이 몇이나 되는지 헤아려 봐야 합니다. 그 숫자가 진짜 자산입니다. 나머지는 빌린 것입니다. 빌린 것은 돌려줘야 하고, 돌려줄 수 없으면 떨어져 나갑니다.

나 만델라와 ANC 청년동맹 — 투옥 전에 이미 완성된 평생의 동지 관계

1944년, 요하네스버그. 위트워터즈랜드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던 스물여섯 살의 넬슨 만델라는 월터 시술루, 올리버 탐보와 함께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청년동맹을 창설했습니다. 그들이 모인 곳은 화려한 회의장이 아니었습니다. 요하네스버그의 좁은 뒷골목, 허름한 방 한 칸에서 밤늦게까지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테이블 위에 펼쳐진 것은 나눠 가질 이권이 아니라, 금지된 책과 위험한 문서들이었습니다.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인 인권 운동에 뛰어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48년 집권한 국민당은 아파르트헤이트를 법제화하기 시작했습니다. 1949년에는 다른 인종 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이, 1950년에는 인종별 거주지를 분리하는 법이, 1953년에는 공공장소를 인종별로 나누는 법이 줄줄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시대에 반인종차별 운동에 참여한다는 것은 기득권을 내려놓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와 생명을 걸어야 하는 선택이었습니다. 경찰의 감시, 체포, 구타가 일상이었습니다.

만델라와 그의 동지들을 하나의 심장으로 묶어낸 것은 흑인도 동등한 존엄을 누려야 한다는 가치였습니다. 이 가치에는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가치를 붙들고 있으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었습니다. 1952년 만델라는 올리버 탐보와 함께 남아공 최초의 흑인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습니다. 법률 활동 자체가 저항의 한 형태였습니다. 1962년 체포되어 1964년 종신형을 선고받을 때까지, 그리고 로벤섬에서 27년을 보내는 동안에도 이 동지들의 연대는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만델라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올리버 탐보는 망명지에서 석방 운동을 벌였습니다. 국내에 남은 동지들은 지하에서 조직을 유지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20년, 30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보상을 기대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보상은커녕 형무소 독방이나 총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자신들이 품고 있는 가치가 옳다는 확신이었습니다.

이익으로 모인 조직은 지도자가 감옥에 가는 순간 산산조각이 납니다. 지도자에게 베팅한 자원이 회수 불가능해졌다는 판단이 서는 순간, 사람들은 출구를 찾아 뿔뿔이 흩어집니다. 가치로 결속된 조직은 다릅니다. 지도자의 물리적 부재가 오히려 결속을 강화합니다. "우리가 이 길을 걷는 이유가 아직 살아 있다"는 공유된 확신이 지도자 개인의 존재보다 강한 구심력을 발휘합니다.

만델라가 1990년 석방되어 자유의 첫 걸음을 내디뎠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반세기 전 요하네스버그의 좁은 방에서 함께 불을 지폈던 동지들이었습니다. 세월이 그들의 얼굴에 주름을 새기고 머리카락을 하얗게 바꾸었지만, 가슴속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습니다. 평생의 동지는 화려한 무대 위에서 얻어지지 않습니다. 가장 어둡고 가장 절망적인 시간을 함께 걸어갈 때, 그 참혹한 겨울의 한가운데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다 당원 62%의 지지로 당대표에 오른 기억은 자산입니다, 그러나 그 62%가 모두 동지는 아닙니다

전당대회의 열기가 절정에 달한 체육관. 전광판에 뜨는 숫자가 올라갈 때마다 함성이 커집니다. 62%라는 숫자가 확정되는 순간 천장이 무너질 듯한 박수가 쏟아집니다. 절반을 훨씬 넘는 압도적인 지지입니다. 오랜 기간 이어진 패배주의를 걷어내고 새 길을 열라는 당원들의 열망이 폭발한 결과였습니다.

이 숫자는 거대한 자산입니다. 당내 기반의 확고함을 증명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축제의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 차분하게 책상 앞에 앉아 그 숫자를 해부해야 합니다.

62%는 하나의 덩어리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최소한 네 가지 결의 사람들이 섞여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나의 비전에 온전히 동의하는 지지자들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겠다고 했을 때 그 목적지의 의미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들. 이들은 진짜 자산입니다. 비율은 62% 전체 중 절반도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상대 후보가 싫어서 소거법으로 나를 택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표는 나를 향한 지지라기보다 다른 후보에 대한 거부입니다. 상대 후보가 바뀌거나 정세가 달라지면 이들의 마음도 쉽게 움직입니다.

세 번째는 대세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여론조사에서 앞서고 있으니, 승리할 것 같으니 편승하는 무리입니다. 이들은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가장 먼저 방향을 전환합니다.

네 번째는 정치적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일찌감치 승자 편에 줄을 선 기회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당선 이후 자신의 투자에 대한 보상을 철저히 요구할 것입니다.

거대한 지지율은 바다의 안개와 같습니다. 멀리서 보면 바다 전체를 뒤덮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순식간에 걷힙니다. 62%라는 숫자에 취해서 이 사람들 모두를 영원한 내 편으로 착각하는 순간, 리더는 위험한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해야 할 일은 명확합니다. 거대한 숫자의 안개 속에서 진짜 동지를 식별해 내는 작업입니다. 누가 내 비전을 공유하는지, 누가 조건부로 지지하는지, 누가 기회를 엿보고 있는지. 이 구별을 하지 못하면, 위기가 닥쳤을 때 62%가 20%로, 10%로, 5%로 급격히 줄어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평시에 62%를 쥐고 있다는 착각보다, 위기 때에도 변하지 않을 15%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훨씬 값집니다.

라 가치로 묶인 세 사람이 이익으로 묶인 삼백 명보다 강합니다

정치판의 관성은 머릿수를 셈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몇 명의 의원을 대동하고 나타났느냐, 식사 자리에 얼마나 많은 유지를 불러 모았느냐, 전당대회에서 몇 퍼센트를 얻었느냐. 숫자가 곧 힘이라는 관념이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숫자가 힘인 것은 맞습니다. 평화로운 시절에는. 잔잔한 바다에서 삼백 명은 위풍당당한 함대를 이룹니다. 노 젓는 소리가 우렁차고,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보는 사람마다 그 위세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바다가 거칠어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파도가 높아지기 시작하면, 삼백 명의 용병은 계산을 시작합니다. 이 배에 남아 있는 것이 유리한가, 구명보트를 찾는 것이 유리한가. 계산 결과가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줄줄이 배를 떠납니다. 서로를 밀치고 구명조끼를 빼앗는 광경이 벌어집니다. 리더는 텅 빈 갑판 위에 혼자 남습니다.

가치로 묶인 세 사람은 다릅니다. 이 세 사람은 배에서 떨어질 전리품을 보고 탑승한 것이 아닙니다. 배가 닿아야 할 목적지의 의미를 믿고 스스로 올라탄 사람들입니다. 돛이 찢어지고 물이 들이찰 때, 이들은 도망치는 대신 키를 붙잡습니다. 리더의 옆에 서서 파도를 정면으로 맞이합니다.

역사는 이 차이를 반복적으로 보여줍니다. 만델라가 로벤섬에 27년 동안 갇혀 있을 때, 바깥에서 불씨를 지켜낸 것은 수천 명의 지지자가 아니라 소수의 핵심 동지들이었습니다. 유비가 수십 번의 패배를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관우와 장비라는 두 사람이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케네디가 정치적 위기를 넘길 때마다 소렌슨이라는 한 사람의 지적 능력에 의존했습니다.

세 사람의 힘이 삼백 명을 이기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측 가능성입니다. 가치로 묶인 소수는 어떤 상황에서든 같은 방향을 바라봅니다. 리더는 뒤를 돌아볼 필요 없이 앞만 보고 달릴 수 있습니다. 등 뒤가 안전하다는 확신. 이 확신이 리더에게 가장 귀중한 자원인 '집중력'을 선물합니다. 이익으로 묶인 삼백 명의 뒤에서 리더는 끊임없이 뒤를 돌아봐야 합니다. 누가 이탈하는지, 누가 불만을 품고 있는지, 누가 상대편과 접선하고 있는지 감시해야 합니다. 에너지의 절반이 내부 관리에 소모됩니다.

물론, 세 사람만으로 선거에서 이길 수는 없습니다. 최종적으로는 폭넓은 지지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조직의 핵심이 무엇으로 구성되어야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핵심이 가치로 묶인 소수로 단단하게 짜여 있으면, 그 위에 이익과 기대로 모여드는 다수를 얹을 수 있습니다. 핵심이 부실하면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여도 모래 위의 성입니다.

혹독한 겨울은 반드시 옵니다. 정치에서 겨울이 오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당선 뒤에도 위기가 찾아오고, 임기 중에도 배신이 발생하고, 퇴임 후에도 고독이 엄습합니다. 그 겨울을 버텨낼 수 있는 것은 이익의 그물이 아니라 가치의 뿌리입니다. 바람이 매서울수록 뿌리 깊은 나무만이 서 있습니다.

리더에게 묻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지금 당신 곁에 있는 사람들 중, 당신이 모든 것을 잃었을 때에도 전화를 받아줄 사람이 몇 명입니까. 그 숫자가 세 명이면 충분합니다. 그 세 명이 당신의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그 세 명이 만들어낸 자기장 위에 자연스럽게 모여들 것입니다. 먼저 할 일은 그 세 명을 찾는 것, 혹은 그 세 명에게 찾아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제3부 마음을 얻다

유권자의 심장에 도달하는 기술



7. 유권자는 정책을 읽지 않습니다, 사람을 읽습니다

선거 유세가 한창인 겨울 아침, 지하철역 출구에서 한 후보가 출근하는 시민들에게 명함을 건넵니다. 명함 뒷면에는 졸업한 대학의 이름, 거쳐 온 공직 이력, 빽빽하게 적힌 공약이 활자로 박혀 있습니다. 시민들은 명함을 받아 주머니에 쑤셔 넣거나 몇 걸음 가지 않아 버립니다. 같은 시각, 다른 선거구의 후보는 새벽부터 포장마차 문을 여는 상인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쥡니다. 이력서를 펼치는 대신, 과거 어느 날 치명적인 실패를 겪고 바닥까지 떨어졌던 자신의 이야기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줍니다. 상인은 그 후보의 눈동자에서 자기가 겪었던 삶의 고단함과 닮은 무언가를 발견합니다.

유권자는 이력서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섭니다. 상처 입은 인간의 진실한 이야기 앞에서는 걸음을 멈춥니다. 스펙의 나열은 머리를 향하지만, 한 인간이 시련을 딛고 일어선 서사는 심장을 향해 꽂힙니다. 선거에서 이기는 후보와 지는 후보의 차이는 정책의 우수함이 아니라, 유권자의 심장에 도달하는 서사를 가졌느냐 없느냐에서 갈립니다.

1933년 3월 12일 밤, 미국의 라디오 방송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대공황의 짙은 그늘이 미국 전역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1929년 월스트리트 대폭락 이후 약 5천 개의 은행이 문을 닫았고, 예금자들은 남은 돈마저 매트리스 밑으로 숨겼습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한 3월 4일, 전국 대부분의 은행은 이미 영업을 중단한 상태였습니다. 취임 이틀 만에 그는 전국 은행 휴업(Bank Holiday)을 선포했고, 의회는 닷새 만에 긴급은행법(Emergency Banking Act)을 통과시켰습니다. 제도와 법률은 갖추어졌지만 핵심적인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국민이 다시 은행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루스벨트는 백악관 외교접견실의 벽난로 곁에 앉았습니다. 경제학자들이 작성한 백서를 펼치지 않았습니다. 대신 라디오 마이크를 향해 이렇게 입을 열었습니다. "미국 국민 여러분에게 은행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려 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수백만 가정의 라디오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습니다. 거실 소파에 앉은 이웃집 아저씨가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은행의 위기를 통화승수나 지급준비율 같은 거시경제학의 용어로 포장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은행에 돈을 맡기면, 은행은 그 돈을 금고에 넣어두는 것이 아니라 농장과 공장에 빌려주어 경제를 돌린다고 설명했습니다. 은행에 한꺼번에 몰려가 돈을 찾으면 멀쩡한 은행도 버틸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덧붙였습니다. 다시 문을 연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것이 매트리스 밑에 두는 것보다 안전하다고.

이 첫 번째 노변담화(Fireside Chat)가 끝난 다음 날 아침,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매트리스 밑에서 돈을 꺼내 든 시민들이 은행 앞에 줄을 섰습니다. 돈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라 다시 맡기러 온 것이었습니다. 루스벨트의 참모 레이먼드 몰리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자본주의가 8일 만에 구원받았다고.

정밀한 정책 보고서가 이루지 못한 일을 13분짜리 라디오 대화가 해냈습니다. 루스벨트가 보여준 것은 정책의 완결성이 아니라 소통의 체온이었습니다. 국민에게 어려운 것을 쉬운 말로 풀어주고, 두려운 현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되 함께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건네는 방식. 정치 소통의 본질은 여기에 있습니다. 유권자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자신의 고통을 정확히 짚어주는 지도자에게 운명을 위탁합니다.

현대 정치는 종종 소셜 미디어의 숫자에 취해 길을 잃습니다.

화면 속에서 수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리고 수천 개의 '좋아요'를 받는 정치인은 자신이 엄청난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현실의 선거판은 스마트폰 액정 바깥에 존재합니다. 대구의 서문시장이나 부산의 구포시장 골목을 걸어 들어가 보아야 합니다. 생선 비린내가 배어 있는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고 내미는 상인의 손을 맞잡을 때 전해지는 투박한 온도와 악력. 이것은 디지털 세상의 클릭 만 번과 비교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닙니다.

현장의 악수는 눈빛이 교차하고 호흡이 섞이는 물리적인 맹세입니다. 그 찰나의 순간 유권자는 정치인의 손바닥 두께와 눈가의 주름, 고개를 숙이는 각도에서 그 사람의 밑바닥을 읽어냅니다. 온라인의 화려한 이미지는 조작될 수 있습니다. 차가운 새벽 시장 한복판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치인의 체취는 속일 수 없습니다.

검찰 시절 인천지검과 군산지검, 전주지검의 새벽을 맞이하며 조서를 넘기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근무할 때마다 검찰청 바깥의 골목을 걸었습니다. 피의자의 조서에 담기지 않는 삶의 결이 골목 안에 있었습니다. 새벽 어시장에서 일하는 상인의 투박한 손, 공단 앞 식당에서 국밥 한 그릇에 하루를 시작하는 노동자들의 굽은 등. 검사 신분증을 보여줄 일 없는 일상의 공간에서 마주한 사람들의 얼굴이 훗날 여의도의 회의실 벽면보다 깊은 정치적 자산이 되었습니다. 화려한 선거 유세장의 조명 아래가 아니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평범한 일상의 골목에서 묵묵히 걸어온 발자국이 유권자의 마음속 저울을 먼저 기울입니다.

엘리트 정치인들이 흔히 범하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자신들의 언어가 대중에게 그대로 전달될 것이라는 오만입니다.

여의도의 회의실이나 관료들의 책상 위에서 통용되는 언어는 차갑고 건조합니다. '거시경제 건전성', '재정 누수 방지', '소득 주도' 같은 단어들은 서민들의 밥상머리에서는 죽은 언어에 불과합니다. 이 단어들을 들으면 유권자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돌립니다. 내 삶과 관계없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루스벨트가 노변담화에서 보여준 기술의 정수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연방준비제도의 복잡한 작동 원리를 설명하면서 "여러분이 은행에 맡긴 돈은 금고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한 문장으로 시작했습니다. 은행의 기능을 이웃에게 설명하듯 풀어낸 것입니다. 국가의 재정 정책을 이야기할 때 수십 조 원의 예산 규모를 읊는 대신, 당장 내일 아침 장바구니에 담아야 할 대파 한 단의 가격과 전세 대출 이자율의 압박으로 환원하여 설명해야 합니다.

유권자는 자신의 고단한 일상을 정치인의 입을 통해 정확한 모국어로 돌려받을 때 비로소 그 정치인이 자신을 대변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정책의 우수함을 증명하려 애쓰기보다, 그 정책이 당신의 팍팍한 삶을 어떻게 어루만질 것인지 보여주는 번역의 과정이야말로 선거에서 사람을 모으는 핵심 기술입니다.

검찰에서 정치판으로 옮겨 앉았을 때, 이 번역 능력의 부재가 뼈아팠습니다. 법전의 조문을 해석하고 논리적 완결성을 갖춘 기소장을 쓰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역구 주민이 "우리 아이 학교 통학 버스가 없어져서 큰일"이라고 호소할 때, 관련 법령과 예산 규정을 줄줄이 읊어주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엄마가 원한 것은 법률적 해석이 아니라, 내 아이의 고충을 알아주는 눈빛 하나였습니다. 엘리트의 언어를 서민의 언어로 번역하는 훈련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시장 골목을 걷고, 민원인의 거친 말투 속에 숨어 있는 간절함을 읽어내고, 그것을 자기 입으로 다시 말해보는 지루한 반복이 필요합니다.

정치인이 정책을 설계할 때와 그것을 유권자에게 전달할 때는 완전히 다른 근육을 써야 합니다. 설계할 때는 법률가의 정밀함이 필요하고, 전달할 때는 이야기꾼의 따뜻함이 필요합니다.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래서 이 훈련은 끝이 없습니다.

유권자가 투표소에 들어서는 순간 떠올리는 것은 후보의 공약집이 아닙니다. 어느 추운 아침 시장 입구에서 자기 손을 잡아주던 그 사람의 눈빛, 자기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던 그 사람의 인내심, 어려운 말 대신 자기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바꿔 전해주던 그 사람의 정성입니다. 유권자는 정책을 읽지 않습니다. 사람을 읽습니다.


8. 위기의 순간이 지지를 결정합니다

1940년 5월, 런던의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기갑 사단이 프랑스 전선을 유린하며 영해협을 향해 밀고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벨기에가 항복했고, 33만 명의 영국군과 연합군 병사들이 됭케르크 해변에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내각의 유력자들은 무솔리니를 중재자로 내세워 히틀러와 타협해야 한다고 윈스턴 처칠을 압박했습니다. 핼리팩스 외무장관은 굴욕적이라도 평화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수학적으로 따지면 합리적인 판단이었습니다. 독일의 군사력은 영국의 그것을 압도하고 있었고, 미국의 참전은 기약이 없었습니다.

처칠은 타협의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5월 13일 하원 의사당 연단에 오른 그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포장하거나 근거 없는 낙관론을 펼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국민들 앞에 가혹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펼쳐 놓았습니다. 자신이 바칠 수 있는 것은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뿐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했습니다. 승리를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지옥 같은 고통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패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절망 속에서, 거짓된 희망 대신 진실한 각오를 건넨 것입니다.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국민들은 공포에 질리는 대신 처칠의 솔직함에 깊이 안도했습니다. 지도자가 자신들을 속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거대한 위안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닥칠 고통이 엄청나더라도, 그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진 지도자가 있다는 사실이 국민을 일어서게 만들었습니다.

처칠이 보여준 것은 수사학의 기교가 아니었습니다. 위기 앞에서 진실을 은폐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태도였습니다. 정치가가 절망적 상황을 가감 없이 밝힐 때, 대중은 그 솔직함에 기꺼이 자신의 운명을 의탁합니다. 거짓된 낙관이 아니라 정직한 비관이 신뢰를 낳는 역설. 위기의 리더십에서 첫째로 배워야 할 교훈입니다.

시대와 공간을 건너뛰어 2022년 2월 25일의 키이우를 비춰봅니다.

러시아의 거대한 전차 군단이 수도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포성이 밤하늘을 찢어놓았고, 키이우 시내 곳곳에서 폭발음이 울렸습니다. 서방 국가의 정보기관들은 우크라이나 정부의 몰락을 72시간 안의 일로 예측했습니다. 미국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안전한 해외 망명을 위한 수송편을 제안했습니다.

젤렌스키는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반코바 거리의 벙커 안에 있었습니다. 지하 복도에서 수백 명의 참모들이 밤을 새우며 전황을 모니터링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측으로부터 긴급 탈출 제안이 들어온 순간, 젤렌스키는 단 한마디로 답했습니다. 싸움은 여기에 있다, 내게 필요한 것은 탈출 수단이 아니라 탄약이다.

이 짧은 한마디가 세상을 뒤집었습니다.

젤렌스키는 어두운 키이우 거리로 걸어 나왔습니다. 국방색 티셔츠 차림으로 스마트폰 카메라를 켜고, 흔들리는 화면 속에서 자신이 여기 있다고, 무기를 내려놓지 않겠다고, 이 땅을 지키겠다고 말했습니다. 전날까지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이라며 가벼이 여겼던 국제사회는 이 영상 하나에 입을 다물었습니다. 무너져가던 우크라이나 국민의 항전 의지가 단숨에 불타올랐고, 관망하던 서방의 여론이 완전히 뒤집어졌습니다.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 도망치지 않겠다는 결단. 이것은 수천 시간의 화려한 연설보다 묵직하게 사람들의 심장을 관통합니다. 젤렌스키의 그 짧은 영상은 수십 편의 정책 브리핑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해냈습니다. 한 나라의 국민에게 싸울 이유를 주었고, 전 세계에 우크라이나를 도와야 할 명분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의 현대 정치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위기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국가의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극단적인 비상사태를 상상해 보십시오. 무도한 계엄령이 선포된 칠흑 같은 밤입니다. 총칼의 위협이 의사당을 포위하고, 정치적 계산기를 두드릴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 찰나의 순간입니다. 어떤 이는 몸을 사리며 상황이 유리하게 흘러갈 때까지 숨죽여 기다립니다. 반면 어떤 정치인은 계엄 저지를 위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차가운 아스팔트 위로, 굳게 닫힌 의사당의 담벼락 위로 자신의 몸을 던집니다.

계산 없는 직관적인 행동. 그것은 그 정치인의 뼛속 깊이 각인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증명합니다. 생명과 정치적 생명이 동시에 위협받는 그 찰나의 물리적 행동은 유권자의 뇌리에 영구적인 문신처럼 새겨집니다. 훗날 어떠한 정치적 공세가 몰아쳐도 무너뜨릴 수 없는 거대한 자산으로 남습니다. 계엄 저지를 1초도 고민하지 않았다는 한마디. 이 말의 무게는 정책 공약 백 페이지보다 무겁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정치인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평소 그가 입으로 말해온 가치와 신념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회의실에서 민주주의를 웅변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총구가 겨누어진 한밤중에 자기 몸을 던지는 일은 아무나 하지 못합니다. 유권자는 그 차이를 압니다.

이러한 역사적 장면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은 역설적입니다.

지도자는 절망적인 상황을 억지로 희망으로 둔갑시키려 해서는 안 됩니다. 처칠은 피와 땀과 눈물밖에 드릴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젤렌스키는 수도가 함락될 수 있다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둘 다 벼랑 끝에 몰린 현실의 참혹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고통의 한가운데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유권자들은 완벽하게 승리하는 지도자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뼈아픈 실패와 패배의 공포 앞에서도 떨리는 다리를 붙잡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불완전한 인간의 고군분투에 감응합니다. 위기의 크기는 곧 그 위기를 정면 돌파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신뢰의 크기와 비례합니다.

거짓된 위로는 거품처럼 사라집니다. 피비린내 나는 현실 위에서 다져진 연대는 바위처럼 정치인의 기반을 지탱합니다. 위기는 정치인에게 재앙이 아니라 기회입니다. 다만 그 기회는 오직 정면 돌파한 자에게만 열립니다. 그리고 그 돌파의 순간은 계산이 아니라 본능에서 나와야 합니다. 계산된 용기는 대중의 눈에 금방 들킵니다. 본능에서 터져 나온 용기만이 역사에 남습니다.


9. 연대와 연합의 기술

1995년 6월 24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엘리스 파크 럭비 경기장은 6만 3천 명의 관중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럭비 월드컵 결승전. 개최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스프링복스가 뉴질랜드 올 블랙스와 맞붙는 경기였습니다. 관중의 절대다수는 백인이었습니다. 이 경기장에서 럭비는 백인들의 종교였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흑백차별정책) 시대 내내 스프링복스는 백인 지배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이름이었고, 흑인들에게는 억압의 표징이었습니다. 아프리카민족회의(ANC) 내에서는 스프링복스의 상징인 영양(springbok) 엠블럼을 아예 폐기하자는 논의가 활발했습니다. 로벤 섬 감옥에 갇혀 있던 시절, 만델라 자신도 럭비 경기에서 상대편을 응원했다고 훗날 인정한 바 있습니다.

경기 시작 5분 전,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선수들의 라커룸 문을 두드렸습니다. 문이 열리자 선수들이 본 것은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만델라가 초록색 스프링복스 유니폼을 입고 서 있었습니다. 등에는 주장 프랑수아 피나르의 등번호 6번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비닐 쇼핑백에서 꺼낸 복제 유니폼이었습니다.

피나르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27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럭비에 반대했던 분이, 스프링복스 유니폼을 심장 위에 얹고 나타나셨다고. 선수들은 벽이라도 뚫고 나갈 기세였다고.

만델라가 경기장 잔디밭 위로 걸어 나오자, 압도적 다수가 백인이었던 관중이 일제히 일어나 "넬슨! 넬슨!"을 연호했습니다. 경기는 연장전까지 갔고, 조엘 스트란스키의 드롭골로 남아프리카가 15대 12로 승리했습니다. 만델라가 피나르에게 웹 엘리스컵을 건네는 순간, 두 사람 모두 같은 번호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이 전 세계에 보낸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27년을 가둬놓은 체제의 상징을 스스로의 가슴에 얹는 행위. 그것은 적의 상징을 입고 적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간 것입니다. 만델라는 흑인 강성 지지층으로부터 배신자라는 비난을 들을 위험을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ANC 내부에서는 거센 반발이 있었습니다. 어스테 부인인 위니 만델라를 비롯한 비판자들은 만델라가 백인을 달래는 데만 치중한다고 공격했습니다.

만델라는 그 모든 내부의 불길을 맞으면서도 포용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가 읽은 것은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후 백인들이 품고 있던 거대한 공포, 흑인 정권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국가 재건의 핵심 장애물임을 꿰뚫어 본 것입니다. 적의 공포를 해소하는 것이 적을 무너뜨리는 것보다 강력한 정치적 승리라는 통찰이 있었습니다.

럭비 경기장의 그 한 장면은 피로 얼룩진 복수의 사슬을 끊고, 진정한 통합의 국가를 탄생시킨 정치적 걸작이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1860년은 이 연합의 기술을 미국 정치사에서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링컨의 앞에는 자신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던 세 명의 거물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윌리엄 슈어드는 뉴욕주 상원의원 출신의 노련한 정치인으로, 자신이 공화당의 당연한 대통령 후보라 믿었습니다. 살먼 체이스는 오하이오의 야심 넘치는 주지사로, 자기야말로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에드워드 베이츠는 미주리의 보수적인 법률가로, 일리노이 시골 변호사 따위에게 밀렸다는 사실을 수치로 여겼습니다. 세 사람 모두 링컨의 학벌, 경험, 품격이 자신들에 못 미친다고 공공연히 말했습니다.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이 세 사람을 모조리 자신의 내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슈어드를 국무장관에, 체이스를 재무장관에, 베이츠를 법무장관에 앉혔습니다. 자신을 조롱하던 정적들을 핵심 요직에 배치한 것입니다. 개인적인 자존심은 완전히 내려놓았습니다. 남북전쟁이라는 전대미문의 국가 분열 사태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웃던 그들의 뛰어난 지성과 정치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냉철하게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링컨의 이 내각은 훗날 도리스 컨스 굿윈의 역사서에서 '라이벌 팀(Team of Rivals)'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나를 찌르던 칼날을 거두어 나의 방패로 만들어버린 배포. 연합 정치의 정수가 여기에 있습니다.

선거라는 잔혹한 전쟁터에서 나를 열렬히 지지하는 51%의 유권자만으로는 결코 안정적인 통치를 이끌어갈 수 없습니다.

문제는 나머지에 있습니다. 나를 혐오하고 반대하는 당원 47%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가. 당대표 선거에서 62%의 지지를 받아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하더라도, 남은 38%는 나를 찍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 안에는 정책적 견해가 달라서 반대한 사람도 있고, 당내 계파 역학 때문에 다른 후보를 지지한 사람도 있으며, 출신이나 경력에 대한 본능적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권력을 쥐게 된 순간, 많은 정치인은 자신을 반대했던 세력을 숙청하거나 배제하려는 강렬한 유혹에 빠집니다. 반대파를 적으로 규정하고 공격하면 핵심 지지층의 결속을 다질 수 있고, 일시적인 카타르시스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편안한 길이지만 치명적인 독약입니다. 적을 만들 때마다 자신의 정치적 영토는 좁아집니다.

지도자의 길은 그 반대 방향을 향해야 합니다. 나를 반대하는 47%를 절멸시켜야 할 적이 아니라, 끝끝내 설득하고 품어 안아야 할 거대한 퍼즐의 한 조각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나를 향해 침을 뱉는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그들의 불만을 경청하는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국가라는 거대한 배의 방향타를 안정적으로 쥘 수 없습니다.

만델라는 자신을 27년 동안 가둔 체제의 상징인 스프링복스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링컨은 자신을 시골뜨기라고 조롱한 정적들에게 핵심 요직을 내어주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기편의 분노를 감수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외연을 넓히기 위해 자기편의 단기적 쾌감을 포기했습니다. 이것이 연합 정치의 핵심입니다.

외연을 확장하려는 지도자는 숙명적으로 혹독한 고독을 견뎌내야 합니다.

중도파와 반대파를 포용하기 위해 타협의 제스처를 취하는 순간, 제일 먼저 날 선 비수를 꽂는 이들은 자신의 강성 지지층입니다. 어제의 열렬한 동지들이 오늘 광장에 모여 변절자,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으며 분노를 쏟아냅니다. 강성 지지층의 분노에는 나름의 정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열정과 헌신이 반대파에 대한 타협으로 보상받는 현실을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그 맹렬한 분노의 불길 속에서 화상을 입으면서도 포용의 발걸음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소수의 광신적 지지에 기대어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편안합니다. 그것은 결국 정당과 국가를 서서히 말라 죽이는 길입니다.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을 맨몸으로 맞으면서도 묵묵히 경계를 허물고 지지의 지평을 넓혀가는 것. 그 찢어지는 듯한 내면의 고독을 씹어 삼키는 능력이야말로 최고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궁극의 자질입니다.

만델라의 엘리스 파크, 링컨의 라이벌 내각. 이 두 장면의 공통점은 지도자가 자기 자신의 감정과 자존심을 먼저 내려놓았다는 것입니다. 적의 상징을 입는 일도, 정적에게 권력을 나누어주는 일도, 자기 안의 무언가를 죽이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혼자 이기는 선거는 없습니다. 반대편을 품지 않고서는, 자기편의 분노를 견디지 않고서는, 어떤 정치인도 천하를 얻을 수 없습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47%를 바라볼 때, 당신의 첫 번째 감정은 분노입니까, 호기심입니까. 그 답이 당신의 정치적 천장을 결정합니다.


10. 캠프 안의 사람을 얻지 못하면 바깥 표도 흔들립니다

2008년 1월, 미국 아이오와주의 낡고 차가운 선거 사무실.

버락 오바마 캠프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자원봉사자들이 빼곡했습니다. 대학생, 은퇴한 교사, 주부, 트럭 운전사, 실직한 공장 노동자까지. 힐러리 클린턴의 기성 정치 조직에 비하면 아마추어 집단에 가까웠습니다. 오바마 캠프가 다른 선거 조직과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은, 이 자원봉사자들을 전단지 배포기나 데이터 입력 장치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캠프는 자원봉사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구체적인 권한과 책임을 부여했습니다. 동네 단위의 캡틴으로 임명하고, 이웃집 문을 두드려 직접 설득하고 조직하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누군가의 지시를 받아서 움직이는 부품이 아니라, 스스로 역사를 만들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무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캠프의 교육 매뉴얼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이웃과 나누는 대화 하나하나가 이 나라를 바꾸는 힘이 됩니다.

오바마의 풀뿌리 조직이 뿜어낸 이 폭발적인 열정은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예상을 깨는 승리를 가져왔고, 그 기세는 전국으로 퍼져 결국 기득권의 벽을 허물었습니다. 핵심은 사람에게 일거리가 아닌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전단지를 돌리라는 지시와, 당신이 이 동네의 변화를 이끄는 사람이라는 임명은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완전히 다른 에너지를 만들어냅니다.

캠프 안에서 봉사하는 한 명의 사람에게 깊은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캠페인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사람을 소모품으로 쓰는 캠프에서는 선거가 끝나는 순간 모두가 흩어집니다. 사람에게 의미를 부여한 캠프에서는 선거가 끝난 뒤에도 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다음 싸움을 준비합니다.

반대로 내부의 신뢰가 붕괴된 캠프는 선거일이 다가오기도 전에 스스로 무너져 내립니다.

아침 회의에서 고성이 오가고, 참모들 사이의 암투와 알력 다툼이 일상화된 선거 캠프를 상상해 보십시오. 후보의 최측근들은 외부의 적과 싸우기보다 내부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에너지를 낭비합니다. 이 독기 어린 갈등은 필연적으로 언론을 통해 밖으로 새어 나갑니다. 기자들은 당 내부의 계파 갈등과 이전투구 기사를 아침마다 내보냅니다.

유권자들은 그 기사를 읽으며 환멸을 느낍니다. 내부의 사람조차 하나로 묶어내지 못하고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정치 집단이, 어떻게 수천만 국민의 삶을 화합으로 이끌 수 있겠습니까. 과거 총선에서 뼈아픈 참패를 겪었던 사례들을 복기해 보면, 패배의 직접적인 원인은 공약의 부재가 아니라 캠프 내부에서 곪아 터진 분열과 불신이었습니다. 내부의 독기가 외부의 긍정적인 메시지를 완전히 집어삼켜 버린 구조적 실패였습니다.

검찰에서 일할 때도 이 원리는 동일하게 작동했습니다. 수사팀 내부에 불협화음이 있으면 수사의 방향이 흔들렸고, 그 흔들림은 피의자와 변호인에게 즉시 감지되었습니다. 법정에서 검사 측의 자신감이 무너지는 순간은 증거가 약할 때가 아니라, 팀 내부의 신뢰가 깨졌을 때였습니다. 밖의 전투에서 이기려면 안의 결속이 먼저입니다.

선거가 막바지를 향해 치달을수록 후보자의 육체와 정신은 한계점까지 내몰립니다.

쏟아지는 일정과 피말리는 여론조사의 압박 속에서 후보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멀리 있는 미지의 유권자들을 향합니다. 아직 마음을 정하지 않은 중간층, 상대 후보 지지자 중 이탈 가능한 표, 새로 유입될 수 있는 젊은 유권자. 눈은 항상 바깥을 향합니다.

승리를 거머쥐는 정치인은 그 숨 막히는 막판의 혼돈 속에서도 곁을 지키는 사람들의 피로를 섬세하게 어루만질 줄 압니다. 밤을 새워 연설문을 다듬은 보좌관의 굽은 등, 찬 바람을 맞으며 유세 차량을 지킨 수행비서의 갈라진 손등을 먼저 발견합니다. "고생했어"라는 두 마디가 아니라, 새벽에 따뜻한 국물 한 그릇을 직접 건네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마지막 순간에 캠프 실무자들의 눈빛에 불을 붙이는 것은 거창한 정치적 이념이 아닙니다. 자신의 노고를 알아주는 리더의 따뜻한 시선 하나입니다. 내부의 사람들이 후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불태우고자 하는 결속력이 정점에 달할 때, 그 에너지는 보이지 않는 파동이 되어 바깥의 유권자들에게까지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캠프 안의 열정은 밖으로 번집니다. 캠프 안의 냉소도 밖으로 번집니다.

중요한 정치적 국면에서 열리는 기자회견장의 풍경은 수많은 무언의 메시지를 발신합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회견장,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단상 위에 리더가 섰을 때, 그 곁을 지키는 이들이 누구인가를 유심히 관찰해 보십시오. 핵심 참모 7명이 굳건한 표정으로 뒤에 배석해 있다면, 겉으로 보기에는 세력을 과시하는 든든한 방패막이처럼 보입니다.

이 장면은 뼈아픈 한계를 동시에 노출합니다. 리더가 자신과 완벽하게 코드가 맞는 극소수의 충성스러운 인사들로만 겹겹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다면, 이는 바깥세상을 향한 확장이 아니라 내부로의 웅크림을 의미합니다. 카메라에 잡히는 7명의 얼굴이 모두 같은 색깔, 같은 결의 사람들이라면, 유권자는 이렇게 읽습니다. 저 사람은 자기 편만 챙기는 사람이구나.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리더십은 자신과 철학이 다르고 때로는 날 선 비판을 가했던 인사들까지 회견장 단상 위로 함께 끌어올려 나란히 설 수 있을 때 그 진가가 발휘됩니다. 배석한 7명의 의원이 모두 같은 계파라면 그것은 세력 과시이지 연합의 증거가 아닙니다. 7명 중 3명이 과거에 나를 비판했던 사람들이라면, 그때 비로소 유권자는 이렇게 읽습니다. 저 사람은 다른 목소리도 품어내는 사람이구나.

내 편만을 대동하여 안전한 성벽 안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이질적인 사람들과의 불편한 동거를 감수하면서 더 넓은 평원으로 나아갈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기자회견장 단상 위의 구성에서 드러납니다.

오바마의 아이오와 사무실에서는 자원봉사자 한 명 한 명이 자기가 역사를 만들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만델라의 엘리스 파크에서는 적의 유니폼을 입은 대통령이 6만 3천 명의 마음을 뒤집었습니다. 링컨의 백악관에서는 자신을 조롱하던 정적들이 내각의 중심에 앉아 남북전쟁을 함께 치렀습니다. 이 세 장면의 공통분모는 명확합니다. 캠프 안의 사람을 얻어야 바깥의 천하를 얻습니다.

캠프 안의 미세한 균형 감각이 결국 천하의 민심을 얻는 성패를 좌우합니다. 안이 무너지면 밖은 저절로 무너집니다. 안이 하나가 되면 밖의 벽은 스스로 허물어집니다.


제4부 사람을 지키다

권력 이후의 관계를 시험하다



11. 당선은 관계의 완성이 아니라 시험의 시작입니다

선거 다음 날 아침의 공기는 전날과 전혀 다른 밀도를 지닙니다. 꽃가루가 흩뿌려진 선거 사무소 바닥을 밟으며 당선자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방 안을 채우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미세하게 달라집니다. 어제까지 어깨를 겯고 찬 바람을 맞으며 전단지를 돌리던 동지들이 이제 당선자와 자신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본능적으로 계산합니다. 누구는 한 걸음 다가서고, 누구는 짐짓 뒷짐을 지며 물러섭니다. 축하 화환의 향기가 가시기도 전에 회의실 안쪽에서는 나직한 속삭임이 시작됩니다. 누가 어느 자리에 갈 것인가, 누가 누구보다 더 큰 공을 세웠는가, 그 공에 합당한 보상은 무엇인가. 권력을 쥐는 그 짧은 찰나, 피를 나누었던 동지들은 한정된 자원과 자리를 두고 다투는 잠재적 경쟁자로 돌변합니다. 당선자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뜨거운 박수 소리 이면에서 날카롭게 부딪히는 욕망의 파열음을 들어야 합니다. 선거의 승리는 그동안 맺어온 관계의 아름다운 결속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바닥을 드러내는 가혹한 시험대의 첫 계단에 불과합니다.

검찰청을 나와 여의도로, 다시 정치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며 두 번의 선거를 치른 기억이 있습니다. 첫 번째 당선의 밤은 세상을 얻은 것 같았습니다. 사무실에 쌓인 축하 화환 사이로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 악수를 청하는 손길, 식사를 같이 하자는 초대장이 쏟아졌습니다. 두 번째 경험은 달랐습니다. 축하의 포장지를 뜯어보면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감사가 아니라 청구서였습니다. "형, 나 좀 봐줘." "의원님, 저 아시죠? 선거 때 천안에서 차량 지원했던 사람입니다." 당선이라는 사건은 관계를 완성하는 마침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동안 쌓아온 관계의 내구성을 극한까지 시험하는 스트레스 테스트의 첫 번째 하중입니다.

환호가 잦아들고 집무실의 무거운 문이 닫히면 곧바로 서늘한 실망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권력을 향한 여정에서 리더는 불가피하게 수많은 사람에게 크고 작은 희망을 대출받습니다. 캠프의 말단 자원봉사자부터 거액을 후원한 기업인, 목을 핏대 세워 지지 연설을 했던 지역 유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은 당선자의 권력 지분 일부가 자신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보상할 수 있는 자원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어제까지 세상을 함께 바꿀 것처럼 뜨겁게 포옹했던 리더가 당선 직후 차가운 관료주의의 언어로 거리를 두기 시작할 때, 지지자들의 마음속에는 배신감이 싹틉니다.

기대를 관리하지 못한 리더들의 목록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길게 늘어섭니다. 선거 기간에 사람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는 것은 쉽습니다. "걱정 마세요, 제가 꼭 챙기겠습니다." "형이 고생한 거 다 알고 있습니다." 이 달콤한 약속들은 당선 직후 독이 됩니다. 약속의 총량이 실현 가능한 자원의 총량을 넘어서는 순간, 누군가는 반드시 실망합니다. 실망한 사람은 조용히 떠나지 않습니다. 자신이 받은 상처를 다른 지지자들에게 전파하고, "그 사람은 당선되고 나서 완전히 달라졌다"는 가장 치명적인 낙인을 찍습니다.

현명한 리더는 선거 기간부터 기대의 천장을 솔직하게 설정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은 반드시 하겠지만, 제 능력 밖의 약속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 말은 선거 유세장에서는 인기 없는 말입니다. 하지만 당선 이후에 돌아오는 이자는 완전히 다릅니다. 정직한 말 한마디가 남긴 신뢰의 잔고는, 달콤한 거짓말이 남긴 실망의 부채보다 언제나 낫습니다.

권력의 정점은 본질적으로 고립된 섬입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이 고립된 권력이 만들어낸 비극의 전시장과 같습니다.

1960년 봄, 경무대를 둘러싼 것은 콘크리트 벽이 아니라 사람으로 쌓아 올린 장막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85세의 노구로 권좌에 앉아 있었고, 그를 에워싼 소수의 측근들은 바깥세상의 분노를 차단하는 방패 역할을 했습니다. 이기붕과 그를 둘러싼 자유당 핵심 인사들은 3·15 부정선거의 참상을 축소하거나 왜곡하여 보고했습니다. 마산에서 학생들이 피를 흘리고 있을 때, 경무대 안에서 이승만은 그것을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이라는 보고를 받고 있었습니다. 4월 19일, 서울 시내를 가득 메운 학생들의 함성과 총성이 경무대 담장 너머까지 울려 퍼졌을 때에야 비로소 현실이 그의 귀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4월 26일, 학생 대표 5명이 경무대에서 그를 만나 하야를 권고했을 때, 이승만은 "국민이 나가라고 하면 나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광장에서 피를 흘린 186명의 목숨은 그가 측근들의 장막 뒤에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대가였습니다.

19년 뒤, 1979년 10월의 서울은 다시 한번 권력의 고립이 만들어낸 비극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저녁은 궁정동 안가에서 펼쳐졌습니다. 부마항쟁으로 부산과 마산이 들끓고 있었고, 미국은 인권 외교의 압박을 거세게 가하고 있었습니다. 그 저녁 식탁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경호실장 차지철은 서로 다른 해법을 내놓았습니다. 김재규는 유화적 대응을, 차지철은 강경 진압을 주장했습니다. 박정희는 차지철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4·19 때는 곽영주가 임의로 발포해서 문제가 됐지만, 이번에는 내가 발포권자이니 문제될 것 없다." 이 말이 떨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김재규의 품속에서 권총이 불을 뿜었습니다. 18년간 철권으로 국가를 이끌었던 지도자는 자신이 곁에 두고 키운 심복의 총구 앞에서 쓰러졌습니다.

두 사건의 공통분모는 명확합니다. 권력자가 바깥세상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순간,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이승만은 측근들의 달콤한 보고에 취해 민심의 온도를 읽지 못했고, 박정희는 차지철이라는 단일 필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다가 그 필터 바깥에서 자라나는 분노를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밀실에 갇힌 권력은 바깥세상의 민심을 잃기 전에 내부의 모순으로 먼저 붕괴합니다.

측근 정치의 함정은 거울 방에 갇히는 것과 같습니다. 리더의 곁을 지키는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리더의 생각과 기호에 자신을 동기화합니다. 그들은 리더가 듣기 좋아하는 억양으로 말하고, 리더가 분노할 만한 정보는 서류철 맨 밑바닥으로 숨깁니다. 물리적인 거리가 좁아질수록 비판적 거리는 사라집니다. 리더는 매일 아침 자신과 똑같은 표정을 짓는 측근들의 얼굴을 보며 자신의 판단이 완벽하다는 환상에 빠져듭니다. 바깥세상에서 폭풍이 몰아쳐도 집무실 안의 공기는 평온합니다.

이 구조는 의식적으로 설계한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중력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측근들은 리더를 보호하려는 충성심에서, 혹은 리더의 기분을 거스르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진다는 생존 본능에서 정보를 걸러냅니다. 리더 역시 자신의 판단에 부합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확증 편향에 빠집니다. 이 두 가지 힘이 합쳐지면 거대한 정보의 진공 상태가 만들어집니다. 리더는 자기가 보고 싶은 세상만 보게 되고, 현실과의 괴리는 날마다 벌어집니다.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상대의 전체 윤곽을 볼 수 없습니다. 코앞에 들이댄 그림은 물감의 결만 보이고 전체 구도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측근에 둘러싸인 리더는 시대의 거대한 흐름과 대중의 고통을 시야에서 놓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곁에 선 사람들을 밀어내고 차가운 바람이 부는 창문을 직접 열어야 합니다. 경호원의 우산 바깥으로 빗줄기를 직접 맞아보아야 합니다. 시장 골목의 소음과 먼지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권력을 쥔 직후 리더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불편한 말을 할 수 있는 채널을 의도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편안한 측근들로만 회의실을 채우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고, 내 눈을 마주 보며 "이건 틀렸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곁에 두어야 합니다. 이 사람의 존재 자체가 측근 정치의 독성을 해독하는 유일한 백신입니다.

당선의 환호가 채 가시지 않은 어느 날 밤, 혼자 집무실에 앉아 전화기를 들여다봅니다. 어제까지 축하 메시지를 보내온 사람들의 이름 뒤에 숨겨진 각자의 욕망과 기대의 무게를 가늠해 봅니다. 이 무게를 감당하면서도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면, 환호는 금세 탄식으로, 동지는 금세 원수로 바뀝니다. 당선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그것도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가혹한 시험의 시작입니다.


12. 인사가 만사입니다

조선 경회루의 나무 기둥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흘러들던 어느 날, 세종의 책상 위에는 사헌부의 탄핵 상소가 또 한 장 올라와 있었습니다. 영의정 황희를 파면하라는 요구였습니다. 황희는 뇌물 수수 논란에 여러 차례 휘말렸고, 인사 청탁 의혹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헌부 관리들은 핏대를 세우며 재상의 도덕적 흠결을 낱낱이 고발했습니다. 세종은 그 상소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가 황희를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인정(人情)이 아니라 국정(國政)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대마도 정벌 이후 일본과의 외교를 재정비해야 했고, 북방의 여진족 방비와 농업 제도 개혁이 동시에 진행 중이었습니다. 이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상충하는 관료 집단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아내는 능력에서 황희를 대체할 인물은 조정에 없었습니다. 세종은 황희의 흠결을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그 흠결을 감수하고서라도 국가가 필요로 하는 핵심 역량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황희는 이후 24년간 영의정 자리를 지키며 세종의 치세를 떠받치는 대들보 역할을 했습니다.

세종의 인사 결단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관노비 출신이었던 장영실을 면천(免賤)시키고 정3품 대호군의 관직에 앉힌 일은 당대의 상식을 뒤집는 파격이었습니다. 출신 성분이 모든 것을 결정하던 신분제 사회에서, 하늘의 별을 읽고 물의 흐름을 계산하는 과학적 재능 하나만을 보고 그에게 관복을 입혔습니다.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양반 관료들은 노비 출신이 자신들과 나란히 조회에 서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습니다. 세종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장영실은 자격루, 앙부일구, 혼천의 등 조선의 과학 수준을 세계 최고 반열에 올려놓는 발명품들을 쏟아냈습니다. 사람의 흠집을 파내어 버리는 대신, 그가 가진 칼날을 국가의 심장부에 꽂아 넣은 용인술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었습니다.

기원전 206년, 초한쟁패의 혼란 속에서 유방이 항우를 꺾을 수 있었던 비밀은 그의 무력에 있지 않았습니다. 유방 자신이 이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었습니다. 천하를 통일한 뒤 열린 축하 연회에서 그는 신하들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어찌하여 천하를 얻었고, 항우는 어찌하여 천하를 잃었는가." 신하들이 서로 아첨하느라 횡설수설하자, 유방은 스스로 답했습니다. 장막 안에서 계략을 짜 천리 밖의 승리를 결정하는 일에서 나는 장량에게 미치지 못하고,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어루만지며 군량을 끊이지 않게 하는 일에서 나는 소하에게 미치지 못하고, 백만 대군을 이끌고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일에서 나는 한신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나는 이 세 사람을 쓸 줄 알았고, 항우는 한 사람의 범증마저 쓰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입니다.

유방의 이 고백에는 인사의 본질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리더가 모든 분야에서 가장 뛰어날 필요는 없습니다. 리더의 역할은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찾아내어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자리에 앉히고,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운동장을 깔아주는 것입니다. 유방은 한신에게 군사의 전권을 맡겼습니다. 한신이 천하를 호령하는 동안 유방은 뒤에서 참을 수 없는 불안을 견뎠습니다. 한신이 너무 강해지면 자신을 위협하리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방은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한신의 칼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신뢰하되 방임하지 않았고, 권한을 주되 견제의 끈을 팽팽하게 유지했습니다. 장수들이 승리에 취해 교만해질 무렵이면 불시에 막사를 찾아가 장군의 인장을 거두며 서늘한 경고를 남겼습니다.

이 균형 감각은 현대 정치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리더가 자신과 닮은 사람들로만 팀을 구성하면 조직은 한쪽으로 기울어진 배처럼 불안정해집니다. 법률가 출신 리더에게는 시장의 언어를 체득한 현장 정치인이 필요합니다. 과묵하고 신중한 성격의 리더에게는 거침없이 돌진하는 돌격대장이 짝을 이루어야 합니다. 자신의 결핍을 메워주는 이질적인 인재를 곁에 두는 것은 불편합니다. 매 순간 마찰이 생기고 의견 충돌이 반복됩니다. 바로 그 마찰음 속에서 혁신의 불꽃이 튀어 오릅니다.

정권이 출범하면 대통령실과 집권 여당 사이에서는 보이지 않는 참호전이 시작됩니다. 장관 자리 하나, 공공기관장 자리 하나를 두고 대통령실의 수석들과 당의 실세들은 각자의 명단이 적힌 수첩을 들고 격돌합니다. 이 줄다리기에서 리더가 명확한 원칙을 세우지 못하고 양측의 눈치만 보며 자리를 나누어주기 시작하면, 권력의 누수는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집니다.

인사는 메시지입니다. 누가 어느 자리에 가는가를 보면 그 정권이 무엇을 중시하고 누구를 두려워하는지 백일하에 드러납니다. 능력보다 충성을 앞세운 낙하산 인사가 반복되면, 국민은 정권이 국가의 미래보다 자기 사람 챙기기에 급급하다고 판단합니다. 반대로, 반대파에서도 적임자를 기용하는 파격 인사가 나오면, 대중은 그 리더의 그릇이 넓다고 느낍니다.

대통령실의 하명과 당의 지분 챙기기가 충돌하는 아수라장 속에서, 리더는 양쪽 모두가 승복할 수밖에 없는 객관적인 잣대를 단호하게 들이대야 합니다. "이 자리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누구인가." 이 질문 앞에서는 캠프의 공로도, 당의 계파도 뒷자리로 물러나야 합니다.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을 한 번이라도 지켜내면, 다음부터는 사람들이 스스로 줄을 맞춥니다. 원칙이 한 번이라도 무너지면, 이후의 모든 인사는 밀실 거래로 전락합니다.

인사권자가 맞닥뜨리는 치명적인 딜레마는 논공행상과 능력 배치 사이의 줄타기입니다. 선거 기간 동안 자신의 곁에서 피를 흘리며 싸워준 개국 공신들을 챙겨야 한다는 부채의식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본능입니다. 그런데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는 과거의 충성심만으로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공로에는 명예로 보답하고, 자리에는 능력으로 채워야 합니다. 이 원칙은 말하기는 쉽지만 실행하기는 뼈를 깎는 고통입니다. 선거 기간 내내 밤을 새우며 함께 뛰었던 동지에게 "형의 공로는 크지만, 이 자리는 전문성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상대의 얼굴에 스치는 서운함과 분노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 감정을 달래지 못하면 내부의 균열이 시작됩니다.

공로 보상과 능력 배치 사이의 경계를 흐리기 시작하면 조직 전체의 사기가 무너집니다. 묵묵히 헌신한 실무자보다 리더의 눈에 든 사람이 요직에 앉는 풍경이 반복되면, 구성원들은 일을 잘하는 것보다 리더의 기분을 맞추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라고 학습합니다. 이 순간 조직은 안에서부터 곪기 시작합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불만이 앙금처럼 가라앉고 있습니다.

유방은 건국 직후 논공행상의 순서를 두고 장수들이 거의 칼부림을 벌일 지경에 이르자, 소하에게 가장 먼저 가장 큰 봉토를 내렸습니다.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장수들은 분노했습니다. "소하는 칼 한 번 뽑지 않고 붓과 서류만 만졌는데 왜 우리보다 높은가." 유방은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사냥에서 토끼를 쫓아가 잡는 것은 개이지만, 그 개를 풀어놓는 것은 사냥꾼이다. 그대들은 개의 공이고 소하는 사냥꾼의 공이다." 이 비유는 거칠었지만, 후방에서 군량과 인력을 관리한 사람의 공이 전장에서 칼을 휘두른 사람의 공에 뒤지지 않는다는 기준을 명확히 세운 것이었습니다. 기준이 서자 불만이 잦아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결과의 크기에 불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기준의 불투명함에 분노합니다.

공정성이 의심받는 순간 모든 관계가 무너집니다. 이 문장은 인사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 조직이든 기업이든 동네 자원봉사 모임이든, 보상의 원칙이 투명하지 않으면 인간은 가차 없이 마음을 거둡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충분히 보상받지 못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기준 없이 다른 사람이 과도하게 보상받는 것은 참지 못합니다. 인사를 결정하는 리더는 매 순간 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 결정을 모든 구성원 앞에서 공개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그 질문에 자신 있게 "예"라고 답할 수 없다면, 그 인사는 재고되어야 합니다.

인사가 만사라는 옛말은 진부한 격언이 아닙니다. 리더가 내리는 인사 결정 하나하나가 그의 철학을 증명하고, 조직의 문화를 만들고, 사람들의 운명을 바꿉니다. 세종이 황희를 지키고 장영실을 발탁했을 때,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천문 관측 체계와 가장 과학적인 문자를 가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유방이 한신에게 칼을 맡기고 소하에게 후방을 위임했을 때, 한 제국의 400년이 열렸습니다. 인사는 리더십의 꽃이 아니라 뿌리입니다. 뿌리가 썩으면 아무리 화려한 꽃도 시듭니다.


13. 쓴소리를 하는 사람을 곁에 두는 법

서기 626년, 현무문의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장안의 궁궐에서 당태종 이세민은 새로운 조정을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형 건성과 아우 원길을 죽이고 아버지를 밀어낸 뒤 황좌에 오른 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할 길이었습니다. 신하들 대부분은 새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거나 아부를 늘어놓았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위징이었습니다.

위징은 원래 태종의 형 건성의 참모였습니다. 건성에게 이세민을 먼저 제거하라고 강력히 건의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태종이 그를 불러 물었습니다. "어째서 나의 형에게 나를 이간질하였소?" 위징은 허리를 굽히는 대신 태종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대답했습니다. "태자(건성)께서 제 말을 들으셨더라면 오늘의 화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보통의 군주였다면 그 자리에서 위징의 목을 쳤을 것입니다. 태종은 웃었습니다. 자신에게 아첨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사람의 가치를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입니다.

이후 17년간 위징은 200여 차례 이상 황제에게 직언을 올렸습니다. 황제가 화려한 궁궐을 짓겠다고 하면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입니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뒤집어버릴 수도 있습니다"라며 막았습니다. 황제가 사냥을 즐기며 정사를 소홀히 하면 "폐하의 활이 짐승을 쏘는 동안 천하의 민심은 폐하를 쏘고 있습니다"라며 따져 물었습니다. 태종은 때때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저 시골 촌놈을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황후 장손씨가 조용히 말렸다고 전해집니다. "충신이 있다는 것은 명군이 있다는 뜻입니다."

위징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태종은 조회를 파하고 통곡했습니다. "구리를 거울로 삼으면 의관을 바로잡을 수 있고,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흥망을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자신의 득실을 알 수 있다. 위징이 죽었으니 나는 거울 하나를 잃었다." 이 탄식은 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리더십의 교과서로 남아 있습니다. 정관의 치라 불리는 태종의 태평성대는 위징이라는 날카로운 거울이 만들어낸 정치적 예술이었습니다.

지도자의 집무실에 예스맨만 남는 것은 조직에 내리는 사형 선고와 같습니다. 리더가 회의 테이블에서 어떤 아이디어를 냈을 때, 참석한 모든 참모가 수첩에 적으며 훌륭한 통찰이라고 입을 모은다면 그 방의 공기는 이미 오염된 것입니다.

건강한 의사결정은 갈등과 반론의 마찰열 속에서 단련됩니다. 리더의 구상에 깃든 논리적 허점을 파고들고, 현장의 현실과 동떨어진 탁상공론을 무참히 깨부수는 반골 기질의 참모가 방 안에 반드시 한 명은 있어야 합니다. 그 한 명이 사라지면 조직은 절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브레이크 고장 난 자동차가 됩니다.

예스맨이 지배하는 조직의 증상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평소에는 매우 효율적으로 보입니다. 결정이 빠르고, 반대 의견이 없으니 회의 시간이 짧고, 조직원들 사이에 마찰이 없습니다. 병원 응급실의 심장 모니터에 직선이 나타나면 아무런 잡음이 없어 보이지만, 그것은 평온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건강한 심장은 끊임없이 불규칙한 파동을 만들어냅니다. 건강한 조직도 끊임없이 의견의 충돌과 긴장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이견을 불경스러움으로 취급하고 직언을 항명으로 받아들이는 리더는 결국 자신이 만든 침묵의 감옥 안에서 파멸을 맞이하게 됩니다. 검찰 조직에서도, 국회에서도, 기업에서도 이 원리는 동일하게 작동합니다. 수사 방향에 이의를 제기하는 후배 검사를 짓누르면 수사의 객관성이 무너지고, 법안의 허점을 지적하는 참모를 배제하면 입법의 품질이 떨어집니다.

참모에게 실패할 권리를 허락하는 것은 리더십의 중요한 척도입니다. 뛰어난 참모일수록 전례 없는 새로운 기획을 시도하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실수를 범합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먼저 걷는 사람은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패한 참모를 단칼에 베어버리는 리더의 밑에서는 아무도 모험하지 않습니다. 살아남은 참모들은 복지부동의 기술을 완성합니다. 상부의 지시만 기계적으로 수행하고, 자신의 의견은 입 안에 묻어둡니다. 책임이 따르는 창의적 제안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이런 조직은 위기가 닥쳤을 때 대응 능력이 제로입니다. 매뉴얼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 모두가 얼어붙어 리더의 입만 바라봅니다.

반면, 실패의 쓴잔을 마신 참모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두 번째 기회를 주는 리더는 조직 전체에 거대한 역동성을 불어넣습니다. "첫 번째 실패에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다음에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 두 마디의 질문이 참모를 무능한 낙오자에서 경험 많은 전사로 탈바꿈시킵니다. 참모들은 리더가 자신의 뒤를 받쳐준다는 굳건한 믿음 아래, 두려움 없이 정책을 시도합니다.

두 번째 기회를 주는 것과 무능을 용인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도전하다 실패한 것과 태만하여 실패한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전자에게는 학습의 기회를, 후자에게는 엄정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이 경계선을 명확히 긋는 것이 리더의 판단력입니다.

사람의 진가는 성공의 환호 속에서가 아니라 실패의 먼지 속에서 어떻게 다시 일어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리더는 그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는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넘어진 참모를 일으켜 세우는 데 쓴 시간은, 새로운 참모를 처음부터 교육하는 데 드는 시간보다 언제나 효율적입니다.

정치판에서 평생 전투원으로 살아온 이들은 필연적으로 '쌈닭'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됩니다. 적의 급소를 찌르고 진영의 선봉에 서서 돌격하는 역할은 대중의 말초적인 열광을 이끌어냅니다. 지지자들은 상대를 향해 거침없이 포문을 여는 리더에게 환호합니다. 그 환호에 취하면 그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전투에서 이길 수 있지만, 전쟁에서 이기려면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적을 무찌르는 것은 장수의 덕목이지만, 적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은 왕의 덕목입니다. 쌈닭 이미지는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그 바깥으로 외연을 넓히는 데는 장벽이 됩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열광하지만, 나를 모르거나 경계하는 사람들은 더욱 등을 돌립니다.

어느 늦은 밤을 상상해 봅니다. 목숨을 걸고 함께 싸워온 오래된 참모가 술잔을 비우며 입을 엽니다. "이제 그 뾰족한 칼을 거두고, 적들마저 품어 안는 내공을 쌓아야 합니다. 계속 쌈닭으로 남으면 여기까지가 끝입니다." 평생을 전장에서 뒹굴어온 사람의 턱에 힘이 들어갑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이 사람이 어떤 뜻에서 이런 말을 하는지 머리로는 압니다. 하지만 가슴이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나의 싸움이 틀렸다는 것인가. 나의 방식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인가.

여기서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그 말을 삼키고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과, 그 말을 뱉어내고 자존심을 지키는 사람. 전자는 더 큰 산에 오를 수 있고, 후자는 지금 서 있는 봉우리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쓴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자존심의 껍질을 한 겹씩 벗겨내는 훈련을 통해서만 길러집니다.

위징이 태종에게 거울이 되었듯, 쓴소리를 하는 참모는 리더에게 거울입니다. 거울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춥니다. 아름다운 모습도, 추한 모습도 왜곡 없이 보여줍니다. 거울을 깨부수면 추한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추함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질 뿐입니다. 쓴소리를 하는 사람을 곁에 두는 것은 불편합니다.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나쁘고, 때로는 모욕적이기까지 합니다. 그 불편함을 감수하는 리더만이 자신의 결함을 교정하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거울을 깨는 순간, 리더는 어둠 속에서 혼자 걷게 됩니다.


14. 조직을 만들고 유지하는 원칙

어느 정당의 지구당 사무실에 가보면 그 조직의 건강 상태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모이는 사무실에는 싸구려 커피 냄새와 담배 연기, 웃음소리가 섞여 있습니다. 벽에는 빛바랜 선거 포스터 옆에 새로 작성한 지역 민원 목록이 붙어 있고, 책상 위에는 펼쳐놓은 주민 명부 위로 누군가가 볼펜으로 빼곡히 메모를 남겼습니다. 사람이 떠나는 사무실에는 깔끔하게 정돈된 책상만 남아 있습니다. 먼지가 쌓인 전화기는 오래전에 울림을 멈추었고, 형광등 하나가 깜빡이는 천장 아래 빈 의자들만 줄지어 있습니다.

두 사무실의 차이는 이념의 숭고함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대의명분 이면에 자리 잡은 투명한 규칙과 예측 가능한 시스템입니다. 누군가는 혹독한 야근을 감내하며 밤을 새우는데, 리더의 눈에 든 다른 누군가는 가벼운 농담 몇 마디로 승진의 사다리를 오르는 풍경이 반복되는 조직은 내부에서부터 부패합니다. 구성원들은 더 이상 업무에 에너지를 쏟지 않고, 리더의 동선을 파악하고 기분을 맞추는 사내 정치에 몰두합니다. 성과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줄을 잘 서는 사람이 올라가는 구조에서, 성과를 내는 사람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갑니다.

반면, 사람이 모이는 조직에는 누가 보아도 납득할 수 있는 공정한 잣대가 있습니다. 흘린 땀의 무게를 정확히 저울질하고, 실패하더라도 정당한 과정을 거쳤다면 책임을 묻되 기회를 박탈하지 않는 단단한 신뢰의 그물이 쳐져 있습니다. 이런 조직에서는 사람들이 리더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서로의 등을 지켜주며 앞을 향해 걸어갑니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가 1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유럽의 맹주로 군림하며 조직을 이끈 방식은 양보의 기술이었습니다. 동독 출신의 물리학자라는 이방인의 꼬리표를 달고 냉혹한 남성 중심의 정치판에 뛰어든 그에게 화려한 카리스마는 없었습니다. 메르켈은 반대파를 윽박지르거나 선동적인 수사학으로 대중을 들끓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기다렸습니다. 야당이 거센 공격을 퍼부으면, 특유의 다이아몬드 모양 손을 모은 채 묵묵히 경청했습니다. 상대의 주장에 합리적인 부분이 있다면 기꺼이 자신의 정책을 수정하고 야당의 공을 인정했습니다. 언론과 대중은 이를 두고 우유부단하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깨달았습니다. 메르켈이 양보한 것은 스포트라이트와 명분이었고, 양보하지 않은 것은 정책이 실현되는 핸들의 주도권이었다는 사실을.

적을 굴복시켜 승리의 쾌감을 얻기보다, 적의 에너지를 흡수하여 국가라는 조직을 앞으로 굴러가게 만드는 것이 메르켈 방식의 핵심이었습니다. 2015년 시리아 난민 위기 당시 그는 "우리는 해낼 수 있습니다(Wir schaffen das)"라고 말하며 100만 명 이상의 난민을 수용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당내에서도 반발이 극심했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지나간 뒤 돌아보면, 그 결단은 독일을 유럽의 도덕적 리더로 우뚝 세우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메르켈의 인내심은 분열된 정치를 통합하는 강력한 접착제 역할을 했습니다. 16년이라는 세월 동안 당의 좌파와 우파를 모두 품고, 연립정부의 파트너들과 끊임없이 타협하며, 한 번도 당을 분열시키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타고난 성품의 결과가 아닙니다. 매 순간 자존심을 삼키고, 작은 승리를 양보하여 큰 승리를 가져가는 계산된 인내의 결과였습니다.

정치 조직의 운명은 때로는 외부의 불가항력적인 폭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찢겨나가기도 합니다.

당의 고질적인 병폐를 도려내고 미래 세대를 위해 뼈를 깎는 심정으로 조직 혁신안을 밤새워 성안했던 어느 날을 복기해 봅니다. 청년들의 목소리를 담고, 기득권의 특권을 내려놓고, 공천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는 그 치열한 문장들이 인쇄소로 넘어가기 직전이었습니다. 느닷없이 선포된 비상계엄은 모든 민주적 절차를 허공의 먼지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혁신의 꿈이 총칼 앞에 물거품이 된 그 새벽, 조직은 마비되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 절망적인 순간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무기력에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잿더미를 뒤져 다시 불씨를 찾거나. 역사적 상흔 속에서 정치인은 두 번째를 선택해야 합니다. 폭력에 의해 강제로 중단된 조직의 혁신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연되었을 뿐입니다. 씨앗이 불에 탔다면 새로운 씨앗을 구해야 합니다. 설계도가 찢겼다면 더 정교한 설계도를 다시 그려야 합니다.

폭압이 걷힌 후 다시 가동할 매뉴얼을 지금부터 준비하는 것이 진짜 조직 혁신입니다. 계엄으로 물거품이 된 혁신안의 한 줄 한 줄은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때 완성하지 못한 문장을 이제 다시 쓰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더 꼼꼼하게, 더 현실적으로,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담아서. 한 번 좌절된 경험은 다음 시도의 면역력을 높여줍니다. 어떤 반대가 올 것인지, 어떤 장애물이 놓일 것인지 이미 한 번 겪었기 때문입니다.

충성은 강요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조직을 위해 헌신하라고 요구하는 리더가 공정한 보상 체계를 갖추지 못한다면, 그 요구는 착취와 다르지 않습니다.

승리의 과실은 리더와 소수의 측근이 독식하면서, 실패의 책임은 현장에서 피 흘린 실무자들에게 전가하는 구조를 생각해 봅니다. 선거 운동 기간 내내 골목길을 누비며 신발 밑창이 닳도록 뛰어다닌 평당원들은 당선 이후 무엇을 얻었습니까. 축하 만찬에 초대받지도 못하고, 자신이 뛰었던 지역구에서 낙하산 인사가 요직을 꿰차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당연한 희생으로 치부되었고, 다음 선거가 다가오면 다시 호출됩니다. "이번에도 함께 뛰어줘야 합니다." 한 번은 참습니다. 두 번은 서운합니다. 세 번째에는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공정한 보상이란 반드시 돈이나 자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노고가 인정받고 있다는 확인, 조직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는 소속감, 리더가 자신을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존중한다는 느낌. 이런 비물질적 보상이 물질적 보상보다 강력한 경우가 많습니다. 선거가 끝난 뒤 리더가 직접 전화를 걸어 "그때 서문시장에서 비를 맞으며 뛰어준 거, 잊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30초의 통화가 백만 원짜리 감사패보다 강합니다.

투명하고 합리적인 보상의 사이클이 멈추는 순간, 조직은 피가 통하지 않는 괴사 상태에 빠집니다. 다음 전투를 위해 나팔을 불어도 아무도 모여들지 않는 텅 빈 광장을 마주하게 됩니다. 조직은 건물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이 연결된 그물입니다. 그물의 한 코가 끊어지면 그 옆의 코에 하중이 쏠리고, 하중이 쏠린 코가 또 끊어지면 그물 전체가 무너집니다. 리더의 일은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라 매일 그물의 코를 점검하고 끊어진 곳을 꿰매는 것입니다.

조직을 만드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열 배는 어렵습니다. 혁명은 열정으로 시작하지만, 그 열정을 일상의 인내로 바꾸지 못하면 조직은 자멸합니다. 메르켈이 16년을 버틴 비결은 매일매일 작은 타협과 작은 양보를 반복한 지루한 성실함에 있었습니다. 화려한 카리스마가 아니라 묵묵한 관리. 거대한 비전의 선포가 아니라 약속의 이행. 이것이 사람이 모이는 조직과 사람이 떠나는 조직을 가르는 경계선입니다.


15. 대중과의 관계는 살아 있는 생물입니다

2003년 어느 여름날, 한 정치인이 서울 시내의 재래시장을 걸었습니다. 경호원도 없이, 보좌관 한 명만 데리고 좁은 골목길을 걸었습니다. 생선 가게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앞치마에 비늘이 번들거리는 아주머니가 후보를 알아보았습니다. "아이고, 의원님 아니세요?" 후보는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물었습니다. "요즘 장사 어떠세요?" 아주머니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습니다. "비가 이렇게 오니까 손님이 뚝 끊겼어요. 시장 지붕 공사한다더니 아직도 안 하고." 후보는 수첩을 꺼내 적었습니다. 그리고 석 달 뒤 그 시장의 지붕 공사가 시작되었을 때, 아주머니는 자신의 말 한마디가 정말로 어딘가에 도착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이 장면은 드라마의 한 장면이 아닙니다. 정치의 본질이 압축된 순간입니다. 대중과의 관계는 여론 조사 그래프의 숫자로 환원될 수 없는, 살아 숨 쉬는 생물입니다. 숫자가 올라갈 때 방심하면 순식간에 떨어지고, 숫자가 떨어졌을 때 현장으로 내려가면 다시 살아납니다. 이 생물을 건강하게 키우는 양분은 거창한 정책 선언이 아니라, 시장 골목에서 잡은 손 하나, 수첩에 적은 메모 한 줄입니다.

정치인의 지지율은 대중이 리더에게 보내는 신뢰의 체온계입니다. 붉은색과 푸른색의 꺾은선 그래프가 곤두박질치는 날, 여의도의 사무실은 짙은 우울감에 휩싸입니다. 다급해진 참모들은 대중의 시선을 돌릴 자극적인 정책이나 상대 진영을 향한 거친 공격의 언어를 브리핑 룸에 올립니다.

지지율이 하락할 때 리더가 해야 할 일은 요란한 처방전을 남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발걸음을 멈추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응시하는 것입니다. 대중은 일시적인 정책 실패 때문에 등을 돌리지 않습니다. 그들이 분노하는 지점은 자신의 삶이 벼랑 끝에 몰려 있는데, 권력자가 책임을 회피하거나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낄 때입니다.

떨어지는 그래프의 기울기를 멈추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바닥으로 내려가서 대중의 차가운 분노를 맨몸으로 맞는 것입니다. 변명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제가 부족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용기. 이 짧은 문장 하나가 수십 억 원어치 홍보물보다 효과적입니다. 대중은 완벽한 리더를 원하지 않습니다. 실수했을 때 솔직하게 인정하는 리더를 원합니다.

검찰에서 일할 때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피의자가 진심으로 반성하는지 아닌지는 말의 내용이 아니라 눈동자의 떨림으로 판별됩니다. 대중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인이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때, 대중은 그 고개 숙임의 각도보다 눈빛의 진정성을 봅니다. 연출된 사과와 진심 어린 사과의 차이는 0.1초 만에 감지됩니다.

대중은 거창한 거시경제 지표나 외교적 성과보다 자신을 한 명의 존엄한 인간으로 대우해 주는 정치인의 세밀함에 감동합니다.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체육관에서 연설을 마친 후, 정치인이 단상에서 내려와 구석에 서 있던 한 시민에게 다가가는 장면을 상상해 봅니다. "삼 년 전에 시장 골목에서 말씀하셨던 그 민원, 지금은 해결이 되었습니까?" 이 한마디의 파괴력은 수만 장의 공보물을 넘어섭니다. 수많은 얼굴과 이름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작은 사연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리더를 만났을 때, 유권자는 지지자를 넘어 전도사가 됩니다. 가족에게, 이웃에게, 직장 동료에게 그 경험을 전합니다. "그 사람 진짜야. 내 이름을 기억하더라."

이것은 기억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름, 사연, 약속한 내용을 꼼꼼히 기록하고 주기적으로 점검하는 루틴을 만드는 것입니다. 작은 약속을 지키는 정치가 큰 신뢰를 만듭니다. 거창한 공약은 실현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시장 지붕 고쳐주겠다"는 작은 약속은 바로 눈앞에서 확인됩니다. 그 지붕이 정말로 고쳐졌을 때, 그 시장의 모든 상인은 그 정치인의 이름을 가슴에 새깁니다.

국회의원 시절, 지역구를 순회할 때마다 만나는 사람들의 이름과 사연을 수첩에 적었습니다. 어떤 분은 오래된 하수도 문제로 고생하고 있었고, 어떤 분은 아이의 통학로 안전에 대한 걱정을 토로했습니다. 수첩이 쌓여갈수록 그것은 지역구의 민심 지도가 되었습니다. 하나의 민원이 해결될 때마다 그 사람은 단순한 유권자에서 정치적 동반자로 바뀌었습니다. 거대한 정치적 비전도 중요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구체적으로 닿는 작은 실천들이 모여야 비전에 살이 붙습니다.

디지털 시대의 정치인은 스크린 안과 밖의 자아가 완벽하게 일치해야 하는 가혹한 조건 위에 서 있습니다.

현장 유세에서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상인들의 거친 손을 맞잡고 따뜻한 미소를 짓던 후보가 있습니다. 그날 저녁 그가 자신의 SNS 계정에 접속합니다. 상대방을 향해 날 선 조롱과 비아냥이 섞인 글을 올립니다. 140자의 짧은 문장 안에 담긴 경멸과 조소는 아침 내내 시장 바닥에서 흘렸던 땀방울의 진정성을 순식간에 증발시켜 버립니다.

유권자들은 현장의 온기보다 활자의 차가운 독기를 더 오래, 더 깊이 기억합니다. 악수는 그 자리에 있던 열 명만 기억하지만, SNS의 한마디는 수만 명이 스크린샷으로 저장합니다. 현장에서 보여준 겸손과 온라인에서 드러낸 오만 사이의 간극을 유권자들은 위선이라 부릅니다. 타자를 두드리는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오는 메시지가 현장에서 악수를 나누는 손바닥의 온도와 다르다면, 대중은 그 정치인을 철저하게 연출된 배우로 낙인찍습니다.

소셜 미디어는 정치인에게 강력한 무기이면서 동시에 가장 위험한 함정입니다. 키보드 앞에 앉으면 상대방의 눈빛이 보이지 않습니다. 내 말이 상대에게 어떤 상처를 주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현장에서는 절대 하지 않을 막말이 화면 뒤에서는 쉽게 튀어나옵니다. 이 유혹을 이겨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글을 올리기 전에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 문장을 어머니 앞에서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는가. 이 문장을 내일 아침 조간신문 1면에서 읽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인가." 두 질문 중 하나라도 "아니오"라면, 그 글은 올리지 않아야 합니다.

권력자의 진짜 민낯은 대중의 카메라가 꺼진 일상의 공간에서 드러납니다.

수행비서가 차 문을 열어주는 타이밍이 조금 늦었다고 뒷좌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짜증 섞인 한숨이 있습니다. 비가 내리는 날 자신을 위해 우산을 받쳐 든 보좌관의 어깨가 젖어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의 양복 깃만 터는 무심한 손짓이 있습니다. 식당에서 음식이 늦게 나왔을 때 종업원에게 던지는 차가운 시선이 있습니다. 이 미세한 태도의 파편들은 반드시 바깥으로 새어 나갑니다.

권력자의 일상은 메시지보다 먼저 읽힙니다. 수행원은 다른 수행원에게, 운전기사는 가족에게, 식당 종업원은 단골손님에게 그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그 사람 카메라 앞에서는 겸손한 척하는데, 밖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더라." 이 소문은 어떤 언론 보도보다 빠르게, 어떤 여론 조사보다 정확하게 정치인의 진짜 품성을 전파합니다.

검찰 시절, 한 선배 검사의 말이 오래 남아 있습니다. "사람의 인격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서초동의 조사실에서도, 여의도의 회의실에서도, 이 말은 예외 없이 맞았습니다. 수사 대상자를 인격적으로 대하는 검사와 모멸감을 주는 검사. 보좌관을 동료로 대하는 의원과 하인처럼 부리는 의원. 둘 사이의 차이는 나중에 그 사람 주변에 누가 남느냐로 증명됩니다.

대중은 정치인이 마이크 앞에서 외치는 정의와 평등의 가치를 듣기 전에, 그가 자신보다 약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날카로운 본능으로 읽어냅니다. 연설문의 아름다운 수사는 잊혀지지만, 비서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작은 습관은 기억됩니다. 권력의 꼭대기에 앉아 굽어보는 시선이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들의 체온을 먼저 살피는 일상의 실천이 대중의 마음을 얻습니다.

대중과의 관계는 한 번 맺으면 끝나는 계약이 아닙니다. 매일 물을 주고 햇빛을 쬐어야 하는 식물과 같습니다. 하루만 게을러져도 이파리가 시들고, 며칠을 방치하면 뿌리부터 마릅니다. 시장 골목의 손을 잡은 그 온기를 일요일 아침의 SNS 글에서도, 월요일 아침의 비서 호출에서도, 수요일 밤의 혼자 마시는 술자리에서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대중이라는 살아 있는 생물을 기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제5부 시련을 견디다

배신과 겨울, 그리고 재기



16. 배신과 이탈의 해부학

가 배신은 갑자기 오지 않습니다 — 소외, 오해, 불공정이 쌓이는 과정

2019년 늦가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7층 복도에서 한 4선 의원의 보좌관이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섰습니다. 그의 손에는 야간 회의 자료가 들려 있었고, 의원실 문 앞에는 불이 꺼져 있었습니다. 보좌관은 의원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읽지 않음. 두 시간 뒤 다시 보냈습니다. 읽지 않음. 그는 복도 끝 자판기 앞에서 캔커피를 하나 뽑아 마시고 조용히 돌아갔습니다. 석 달 뒤, 그 보좌관은 경쟁 후보의 선거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정치판에서 배신이라는 단어는 매일같이 소비됩니다. 신문 1면에, 기자회견장 마이크 앞에, 술자리의 분노 섞인 목소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그 단어가 뱉어질 때 대개의 맥락은 이렇습니다. 믿었던 사람이 갑자기 등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핵심은 '갑자기'에 있습니다. 리더는 배신을 돌발 사건으로 인식합니다. 어제까지 고개를 숙이던 사람이 오늘 아침 칼을 뽑았으니 당연히 충격이고, 당연히 분노입니다.

하지만 검찰에서 수사기록을 읽던 시절에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범죄에는 반드시 전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횡령이 발각되기 전에 장부의 숫자가 먼저 어긋나고, 살인이 벌어지기 전에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감정이 먼저 꼬입니다. 사람이 떠나는 과정도 다르지 않습니다. 배신은 번개가 아닙니다. 장마입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빗물이 스며들고 지반이 약해진 끝에 어느 순간 산사태가 나는 것입니다.

조직 내에서 이탈의 씨앗이 뿌려지는 첫 번째 토양은 소외감입니다. 핵심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자리에서 빠졌다는 느낌, 중요한 정보가 나에게만 늦게 도착한다는 감각. 이것은 사실 여부보다 감정의 문제입니다. 실제로 배제되었건, 착각이건 상관이 없습니다. 소외감은 한 번 싹트면 모든 상황을 자기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해석하게 만드는 필터가 됩니다. 회의에 초대받지 못한 것은 무시당하는 증거가 되고, 리더가 바빠서 전화를 못 받은 것은 의도적인 냉대의 신호가 됩니다.

두 번째 토양은 오해입니다. 정치 조직에서 오해는 구조적으로 발생합니다. 리더의 말 한마디가 여러 사람을 거치며 변형되고, 원래의 맥락이 사라진 채 결론만 남습니다. "그 사안은 좀 더 검토해 보자"가 세 사람의 입을 거치면 "그 사안은 폐기하라고 하셨다"로 바뀝니다. 해당 사안을 밤새워 준비한 사람은 분노합니다. 리더를 직접 찾아가 확인하면 풀릴 오해이지만, 소외감이 먼저 자리 잡은 사람은 확인하러 가지 않습니다. 확인하러 갔다가 진짜로 무시당하는 상황을 마주하는 것이 더 두렵기 때문입니다. 오해는 침묵 속에서 괴물로 자랍니다.

세 번째 토양은 불공정입니다. 이것이 가장 치명적입니다. 밤을 새워 보고서를 썼는데 다른 사람이 공을 가져가는 경험, 묵묵히 현장을 뛰었는데 입만 번지르르한 사람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광경. 이런 장면을 한 번 목격하면 실망하고, 두 번 목격하면 분노하고, 세 번 목격하면 떠날 채비를 합니다. 사람은 육체적으로 힘든 것은 꽤 오래 버팝니다. 군인이 행군을 견디고, 수험생이 밤샘 공부를 견디는 이유는 고통 끝에 보상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가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감각, 게임의 규칙이 공정하지 않다는 판단이 서는 순간 사람은 배를 내립니다.

세 개의 토양이 겹쳐 쌓이면 이탈은 시간문제입니다. 리더가 바쁘다는 이유로, 혹은 '이 정도는 알아서 해결하겠지'라는 안이한 기대로 곁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 변화를 읽지 못할 때, 조직의 지반은 소리 없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배신의 순간은 드라마틱하지만, 배신에 이르는 과정은 지극히 일상적입니다. 매일 아침 스치는 인사말의 온도, 회의실에서 발언 기회를 배분하는 방식, 공적을 인정하는 자리에서 이름을 호명하는 순서. 그 사소한 것들이 쌓여 한 사람을 적으로 만들거나 평생의 동지로 만듭니다.

검사 시절 취조실에서 배운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범죄자는 대부분 자기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서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빈곤 때문에, 무시당해서, 부당하게 대우받아서. 그 서사가 객관적으로 타당한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당사자의 머릿속에서는 자신의 행동이 충분히 납득 가능한 것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떠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쓴 이탈의 서사 속에서 리더는 냉정하고 불공정한 인물이며, 자신은 충분히 참고 참다가 마침내 울며 겨자 먹기로 떠나는 피해자입니다. 리더의 시야에서는 배신이지만, 떠나는 사람의 시야에서는 탈출입니다. 두 시야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것이 관계 실패의 본질입니다.

나 카이사르의 3월 15일 — 원로원의 칼날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로마의 폼페이우스 극장 안에 마련된 원로원 회의장. 종신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의자에 앉자 원로원 의원 루키우스 틸리우스 킴베르가 청원서를 내밀었습니다. 추방된 동생을 돌려보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카이사르가 손짓으로 물리치자 킴베르는 토가를 잡아당겼습니다. 그것이 신호였습니다. 숨겨둔 단검을 뽑아 든 60여 명의 원로원 의원들이 달려들어 카이사르의 몸에 스물세 번의 자상을 남겼습니다. 피범벅이 된 그가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얼굴을 알아보았을 때 내뱉었다고 전해지는 말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탄식이 되었습니다.

이 장면만 떼어 보면 배신의 극치입니다. 은혜를 입은 부하가 은인의 가슴에 칼을 꽂은 것이니까요. 카이사르는 내전에서 폼페이우스 편에 섰던 브루투스를 사로잡은 뒤 처형하지 않고 용서했습니다. 법무관 자리에 앉혀 주었고, 자신의 모친 세르빌리아와 사적으로 가까웠던 인연까지 더해 각별하게 대우했습니다. 이 은혜에도 불구하고 칼을 들었으니 배은망덕의 전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 극장의 칼날은 그날 아침에 갑자기 벼려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칼을 가는 데는 수년이 걸렸습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하고 내전에서 승리한 뒤 로마로 돌아왔을 때, 그는 빈민에게 곡물을 배분하고 참전 용사에게 토지를 제공하는 개혁을 밀어붙였습니다. 원로원의 규모를 600명에서 900명으로 늘리고 자신의 사람들을 대거 충원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44년 2월, 종신 독재관에 올랐습니다. 공화정의 전통 위에 서 있던 원로원 의원들에게 이 과정 하나하나가 칼날을 한 뼘씩 갈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를 개인적으로 증오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공화정이라는 체제가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 브루투스의 조상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로마의 마지막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운 국부였습니다. 그 집안의 후손에게 종신 독재관의 등장은 조상이 세운 질서가 허물어지는 광경이었습니다. 카이사르의 빛나는 업적은 역설적으로 원로원의 공포를 키웠습니다. 그가 유능할수록, 개혁이 성공할수록, 카이사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권력의 무게가 커졌고, 그 무게에 짓눌린 이들의 칼에는 명분이 서 있었습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지적한 대목이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비극은 대개 권력자에게 중용되고 있던 사람이 어느 시기부터 소외되었다고 느낄 때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압도적인 성취에 취해 주변 사람들의 불안을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원로원 의원들의 침묵을 동의로 읽었습니다. 침묵은 동의가 아니었습니다. 기회를 엿보는 인내였습니다.

여기서 리더가 배워야 할 교훈은 분명합니다. 강한 리더일수록 자신의 빛에 가려진 사람들의 그늘을 살펴야 합니다.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될수록 그 주변의 공기는 희박해집니다. 숨을 쉬지 못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창문을 깨고 나갑니다. 창문을 깨는 방식이 3월 15일의 칼이 될 수도 있고, 조용히 발걸음을 돌리는 이탈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의 자존감을 지켜주지 못한 리더의 실패입니다.

카이사르의 비극에서 한 가지 더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암살 이후 브루투스가 로마 시민들 앞에서 연설한 장면입니다. 그는 외쳤습니다. "우리가 카이사르를 죽인 것은 그를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군중은 아무도 환호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야유하지 않았습니다. 침묵뿐이었습니다. 브루투스는 그 침묵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로마에서 달아났습니다. 배신자의 서사 속에서 자신은 영웅이었지만, 광장에 선 순간 현실은 그에게 냉담했습니다. 암살 이후 로마는 오히려 더 큰 혼란에 빠졌고, 결국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제국을 세우게 됩니다. 배신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고, 공화정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배신의 역학은 3월 15일 이후 2천 년이 지난 오늘날의 정치판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달라진 것은 칼의 재질뿐입니다. 금속 단검 대신 기자회견장의 마이크, 소셜 미디어의 폭로, 내부 문건의 유출이 칼이 됩니다. 찌르는 순간은 극적이지만, 칼을 가는 시간은 길고 조용합니다.

다 떠나는 사람을 악인으로 만들지 않는 태도가 미래의 연대를 열어둡니다

정치적 결별의 순간에 리더들이 가장 흔하게 저지르는 실수가 있습니다. 떠나는 사람에게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고, 지지자들 앞에서 그를 공개적으로 매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감정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으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남은 사람들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공동의 적을 지목하는 것은 인간 집단의 오래된 본능입니다. 문제는 이 본능이 정치적으로 매우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점입니다.

검찰에서 근무하던 시절, 사건을 처리할 때 지켜야 할 원칙 중 하나는 피의자에게도 방어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명백한 범죄라 하더라도 절차를 무시하면 증거가 오염되고 공판이 무너집니다. 정치에서도 비슷한 원리가 작동합니다. 떠나는 사람을 악마화하면 당장의 분노는 풀리지만, 정치적 영토는 줄어듭니다.

정치는 생물입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연합군이 되는 공간입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 여의도에서 십수 년을 보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결별의 순간에는 이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분노의 호르몬이 이성의 회로를 차단하기 때문입니다.

떠나는 사람에게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라고 말하며 문을 열어주는 태도는 약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품격입니다. 상대를 악마로 만들지 않을 때, 훗날 상황이 바뀌었을 때 다시 악수할 수 있는 명분이 남습니다. 정치에서 영원한 적은 없습니다. 영원한 것은 이익도 아니고 이념도 아닙니다. 영원한 것은 품위 있게 행동했다는 기억뿐입니다.

이 태도는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리더가 떠나는 사람을 잔인하게 매도하는 것을 본 참모들은 두 가지를 동시에 느낍니다. 하나는 "저런 꼴을 당하고 싶지 않으니 절대 떠나서는 안 된다"는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될 수 있다"는 불안입니다. 공포로 묶인 조직은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지만 안에서 곪습니다. 사람들은 리더의 눈치를 보느라 솔직한 의견을 내지 못하고, 리더는 거짓된 충성의 연극 속에서 점점 현실을 잃어갑니다.

반면, 떠나는 사람을 존중해 주는 리더 밑에서 참모들은 다른 것을 느낍니다. "이 리더는 사람을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설령 내가 실수하더라도 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다." 이 느낌이 진짜 충성의 뿌리입니다. 공포에서 나오는 복종과 신뢰에서 나오는 헌신은 겉으로 비슷해 보이지만, 위기의 순간에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역사는 관용이 복수보다 강력한 무기가 되는 장면을 여러 차례 보여주었습니다. 배신에 대처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증오가 아니라, 상대를 민망하게 만드는 품격입니다. 내가 당신을 악인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떠난 사람의 마음속에 빚으로 남습니다. 그 빚이 돌아오는 날은 예측할 수 없지만, 반드시 돌아옵니다. 정치에서 시간은 리더의 편이 아닙니다. 시간은 관용을 베풀었던 사람의 편입니다.

라 제명이라는 칼날 앞에서 — 재심을 포기하고 기자회견장에 선 그 선택의 의미

정치인에게 소속 정당으로부터의 제명은 직업적 사망 선고에 가깝습니다. 의원 배지를 빼앗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입니다. 배지는 임기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내려놓는 것이지만, 제명은 자신이 몸담았던 공동체로부터 강제로 추방당하는 것입니다. 집에서 쫓겨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건을 챙길 시간도 주어지지 않고, 문이 닫히고, 자물쇠가 바뀝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정치인은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릅니다. 첫 번째는 재심을 청구하며 시간을 버는 것입니다. 절차적 하자를 문제 삼고, 법적 구제 수단을 동원하며, 당내 지지 세력의 반발을 기다리는 소모전을 펼칩니다. 이 방법의 장점은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그 시간 동안 구차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제명된 사람이 재심을 청구하며 당 지도부를 향해 부당하다고 호소하는 모습은 대중의 눈에 처량합니다. 쫓겨난 사람이 문 앞에서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선택은 재심을 포기하고 스스로 문을 나서는 것입니다. 이것은 훨씬 더 어려운 길입니다. 억울함이 있더라도, 싸우면 이길 수 있더라도, 그 싸움 자체가 자신의 정치적 서사를 왜소하게 만든다고 판단할 때 이 길을 택합니다. 기자회견장에 서서,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카메라 앞에서 당당하게 걸어 나가는 순간. 그 짧은 장면이 정치인의 향후 10년을 결정합니다.

재심을 포기하고 기자회견장에 선다는 것은 당내 권력자들의 밀실 결정에 승복하지 않겠다는 선언인 동시에, 그 결정의 부당함을 법정이 아닌 광장에서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제도 안에서의 투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 바깥에 더 큰 심판관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행위입니다. 유권자라는 심판관이 내리는 판결은 당 윤리위원회의 결정보다 느리지만, 한번 내려지면 뒤집기 어렵습니다.

기자회견장에서의 태도가 결정적입니다. 분노에 휩싸여 당 지도부를 격렬하게 공격하면 동정표를 잃습니다. 대중은 분노하는 정치인을 보면 짐짓 동조하는 듯하다가 금방 지칩니다. 그들이 진짜 마음을 여는 순간은 정치인이 분노 대신 슬픔을, 공격 대신 소신을 보여줄 때입니다. 제명의 억울함을 토로하되 원망을 삼키고, 자신이 지켜온 가치를 담담하게 이야기하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기자회견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그날의 기자회견은 겨울의 시작인 동시에, 봄을 위한 첫 번째 씨앗을 심는 의식이 됩니다. 당적이 사라지는 순간 정치인에게 남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뿐입니다. 조직의 브랜드도, 당의 로고도, 원내 교섭단체의 힘도 사라집니다. 맨몸으로 서야 합니다. 맨몸으로 서는 것이 두려운 사람은 겨울을 버티지 못합니다. 맨몸이 곧 자신의 전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만이 겨울을 지나 다시 봄에 도달합니다.

제명이라는 칼날은 한 사람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아픈 순간이지만, 동시에 가장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누가 진짜 내 사람인지, 누가 당의 사람이었을 뿐인지. 전화기에 남은 이름의 목록이 그 대답입니다. 제명된 다음 날 아침, 전화기를 들여다보십시오. 거기에 남아 있는 이름이 당신의 진짜 자산입니다. 그 이름들과 함께 걷는 길이 당신의 다음 장입니다.


17. 정치적 겨울을 버티는 기술

가 처칠의 황야의 시대 — 전쟁 영웅이 권력에서 밀려난 뒤의 10년

1929년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이 패배했을 때, 윈스턴 처칠은 자신의 에핑 지역구 의석은 유지했지만 재무장관직을 잃었습니다. 그의 나이 쉰다섯. 정계에서 삼십 년 넘게 활동해 온 노련한 정치인에게 각료직 상실은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습니다. 보수당이 다시 집권한 1931년 총선에서도 처칠은 각료 명단에서 빠졌습니다. 당 지도부는 그를 의도적으로 배제했습니다. 인도 자치 문제를 놓고 당 주류와 정면충돌한 대가였습니다. 처칠은 하원에서 인도에 자치권을 주는 것에 반대 표결을 요구했지만, 43표 대 369표로 참패했습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1929년부터 1939년까지, 처칠은 정계의 변방에서 이른바 황야의 시대(Wilderness Years)를 보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정치 경력은 끝났다고 판단했습니다. 런던의 정치 살롱에서 그의 이름은 과거형으로 소비되었습니다. "처칠은 한때 대단했지" 하는 식이었습니다.

그 10년 동안 처칠이 한 일을 살펴보면, 버틴 것이 아니라 벼린 것이라는 표현이 정확합니다. 그는 켄트주 차트웰의 자택에 머물며 방대한 저술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1930년에는 자서전 《나의 초기 인생》을 출간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조상인 말버러 공작의 전기를 4권으로 집필했습니다. 글을 쓰는 것은 단순한 소일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처칠에게 집필은 자신의 사유를 정리하고 세계를 조망하는 훈련이었습니다.

글을 쓰면서 처칠은 경고의 목소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자, 처칠은 영국 정치인 중 거의 유일하게 독일의 재무장을 경고했습니다. 하원에서, 신문 기고문에서, 연설에서 반복적으로 같은 말을 했습니다. 독일이 군비를 확장하고 있다, 영국은 대비해야 한다, 유화 정책은 파국을 불러올 것이다.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네빌 체임벌린 총리는 뮌헨 협정을 통해 히틀러와 타협하며 "우리 시대의 평화"를 가져왔다고 선언했습니다. 처칠은 전쟁광이라는 딱지가 붙었습니다.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 있었기 때문에 처칠은 오히려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각료석에 앉아 있었다면 정부의 공식 입장에 구속되었을 것입니다. 야당도 아닌, 여당 내 소수파라는 어중간한 위치가 역설적으로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는 비밀정보 출처를 통해 독일의 군사력 증강에 관한 데이터를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부의 공식 발표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하원에서 입증했습니다.

1938년 뮌헨 위기 이후, 그리고 1939년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 전체를 점령한 뒤, 여론은 서서히 처칠의 편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옳았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왔습니다. 1939년 9월 전쟁이 터졌을 때, 체임벌린은 처칠을 해군장관에 임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맡았던 것과 같은 자리였습니다. 해군에 전문이 내려갔습니다. "윈스턴이 돌아왔다(Winston is back)."

10년간의 황야에서 처칠이 보여준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한가한 시간을 자기 훈련에 투자했습니다. 글을 쓰고, 벽돌을 쌓고(차트웰 정원의 담장을 직접 쌓았습니다), 그림을 그리며 정신과 육체를 관리했습니다. 둘째,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인기가 없어도, 조롱을 받아도, 옳다고 믿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셋째, 권력 밖에 있으면서도 전문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비공식 채널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의회 연설과 기고를 통해 지적 존재감을 유지했습니다.

겨울을 버티는 기술은 단순히 시간을 때우는 것이 아닙니다. 봄이 왔을 때 곧바로 달릴 수 있는 몸을 만들어 두는 것입니다. 처칠의 10년은 비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꽉 차 있었습니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1940년 5월의 처칠,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원에서 외쳤던 그 처칠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 덩샤오핑의 3기 3락 — 세 번 쓰러지고 세 번 일어선 회복탄력성의 원형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정치적 부활의 주인공은 덩샤오핑입니다. 그에게는 부도옹(不倒翁)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오뚝이라는 뜻입니다. 이 별명은 과장이 아닙니다.

첫 번째 추락은 1933년이었습니다. 중국공산당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마오쩌둥 노선을 지지했다가 소련파에 의해 밀려났습니다. 대장정 시절, 당내에서 소위 '덩, 마오, 셰, 구' 네 명의 죄인 중 하나로 지목되어 비판을 받았습니다. 1935년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의 노선이 인정받으면서 덩샤오핑도 복권되었습니다.

두 번째 추락은 1966년 문화대혁명 때였습니다. 이번에는 마오쩌둥 자신이 칼을 겨눴습니다. 덩샤오핑은 류사오치와 함께 "당내 제2호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로 찍혔습니다. 당 총서기직에서 해임되고, 장시성의 트랙터 수리 공장으로 보내져 노동자로 일했습니다. 류사오치는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덩샤오핑은 살아남았습니다. 그 사이 그의 큰아들 덩푸팡은 홍위병에게 쫓겨 베이징대학교 건물에서 추락하여 하반신이 마비되는 장애를 입었습니다.

이 시기 덩샤오핑이 보여준 태도가 있습니다. 그는 복수심에 불타지 않았습니다. 장시성에서 매일 규칙적으로 산책하며 건강을 관리했고, 머릿속으로 중국의 미래를 설계했습니다. 마오쩌둥이 자신을 류사오치와 구별해 취급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 차이를 활용할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1971년 린뱌오 사건이 터지고 마오쩌둥의 후계 구도가 붕괴되자,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1973년 부총리로 복권됩니다.

세 번째 추락은 1976년이었습니다. 저우언라이가 사망한 뒤 4인방이 다시 덩샤오핑을 공격했고, 그는 다시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10월 4인방이 체포되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1977년 7월, 덩샤오핑은 세 번째로 복권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일흔셋이었습니다.

세 번 쓰러지고 세 번 일어선 이 궤적에서 배울 것은 무엇입니까. 덩샤오핑의 회복탄력성은 두 가지 원천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입니다. 이념적 순수성에 매달리지 않고, 현실에서 작동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파악하는 태도였습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이 정신의 축약입니다. 다른 하나는 몸과 마음을 망가뜨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유배지에서도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크루아상을 좋아하고, 포커와 마작을 즐기는 일상의 소소한 습관을 놓지 않았습니다.

정치적 겨울을 견디는 기술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권력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직위도, 명예도, 지지자도 순식간에 증발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라진 뒤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두 가지입니다. 실력과 건강입니다. 실력이 남아 있으면 기회는 반드시 다시 옵니다. 건강이 남아 있으면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겨울 동안 지켜내지 못하면, 봄이 와도 달릴 수 없습니다.

덩샤오핑이 세 번째 복권 이후 이끈 개혁·개방 정책은 중국을 절대빈곤에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끌어올렸습니다. 1978년 중국의 1인당 소득은 156달러였습니다. 그가 죽은 뒤 한 세대가 지나 1만 달러를 넘었습니다. 트랙터 수리공장에서 기계를 손보던 노인이 10억 인구의 운명을 바꿔놓았습니다. 그 변화의 씨앗은 겨울에 뿌려졌습니다. 장시성의 먼지 날리는 공장 마당에서,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걸으며, 한 노인이 머릿속에 그려둔 설계도가 훗날 세계의 지형을 바꾼 것입니다.

다 김대중의 인동초 네트워크 — 40년간 사람을 잃지 않은 비결은 감옥에서도 편지를 쓴 것입니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긴 겨울을 보낸 정치인은 김대중입니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에게 석 자릿수 차이로 패배한 뒤, 그의 인생은 끝없는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1973년 도쿄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바다에 수장될 뻔했고, 1980년에는 내란음모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감형, 가택연금, 미국 망명, 귀국, 다시 가택연금. 그의 삶은 감옥과 광야를 오가는 순례자의 여정이었습니다.

이 혹독한 겨울을 견디게 한 힘은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한 가지만 꼽으라면 사람입니다. 김대중은 권력이 없을 때 사람을 잃지 않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능력의 비밀은 놀랍도록 소박한 것이었습니다. 편지였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김대중은 가족과 지인들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썼습니다. 엽서 한 장에 깨알 같은 글씨로 자신의 생각, 읽은 책의 감상, 세상에 대한 소감, 그리고 받는 이에 대한 안부를 빼곡히 채웠습니다. 이 편지들은 나중에 《옥중서신》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출간되었고, 그 자체로 한 시대를 증언하는 기록이 되었습니다. 편지의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편지를 쓰는 행위 자체였습니다. 감옥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사람과의 관계를 놓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나를 잊지 않았구나"라는 감정입니다. 이것은 사소해 보이지만 실은 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강력한 접착제입니다. 권력이 있을 때 사람을 모으는 것은 돈과 자리입니다. 장관 자리 하나를 던지면 사람들은 구름처럼 모여듭니다. 그런데 권력이 사라진 뒤에 사람을 지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자원을 요구합니다. 그 자원은 정성입니다. 돈이나 자리가 아니라, 상대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알려주는 작고 집요한 행위입니다.

김대중의 네트워크는 이 정성의 축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의 지지자들은 흔히 인동초(忍冬草)에 비유됩니다. 엄동설한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풀이라는 뜻입니다. 이 인동초 같은 지지자들이 40년 동안 김대중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이유는 카리스마 때문만이 아닙니다. 감옥에서, 가택연금 중에서, 망명지에서 꾸준히 날아온 편지와 안부가 그들의 마음속에 쌓여 흔들리지 않는 신뢰의 지층을 형성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겨울에 처한 리더에게 이 사례가 가르쳐 주는 것은 명확합니다. 권력을 잃은 순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복수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고, 전략적 구상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전화기를 열어서, 혹은 펜을 들어서,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들에게 연락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다고, 안부를 묻는다고, 당신을 잊지 않고 있다고. 이 평범한 말 한마디가 겨울의 한복판에서 사람을 잡아두는 닻입니다.

권력이 없을 때 보내는 안부는 권력이 있을 때 보내는 안부보다 열 배 무겁습니다. 힘이 있을 때의 친절은 반사적으로 의심을 받습니다. "저 사람이 나한테 잘해 주는 이유가 뭐지? 뭘 원하는 거지?" 하지만 힘이 없을 때의 친절에는 계산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줄 것이 없는 사람이 건네는 따뜻한 말은 순수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래서 겨울에 뿌린 관계의 씨앗은 봄에 뿌린 것보다 뿌리가 깊습니다.

김대중은 1997년 대선에서 마침내 승리하여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뒤 17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당선의 순간 그 옆에 서 있던 사람들 중 상당수는 감옥의 편지를 받았던 이들이었습니다. 40년 전 허름한 뒷골목에서 함께 토론하던 청년들이었고,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돈 봉투를 몰래 전해 주던 이름 없는 지지자들이었습니다. 권력의 계절이 바뀌어도 떠나지 않은 이 사람들이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의 가장 단단한 기반이었습니다.

라 제명된 뒤 서문시장을 걷는 것의 의미 — 겨울에 뿌린 씨앗이 봄에 싹을 틔웁니다

정당에서 제명되거나 선거에서 낙선한 직후, 정치인이 가장 먼저 가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고급 레스토랑에서 측근들과 대책 회의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법적 대응을 논의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먼저 가야 할 곳은 사람 냄새가 나는 시장통입니다.

대구 서문시장을 생각해 봅니다. 좁은 골목 사이로 과일 상자가 쌓여 있고, 생선 비린내와 족발 삶는 냄새가 뒤섞인 그 공간. 상인들은 새벽 4시에 일어나 물건을 내려놓고, 밤 10시에 장부를 정리합니다. 그들의 손은 거칠고, 목소리는 큽니다. 여의도의 매끄러운 복도와는 다른 세계입니다.

제명된 정치인이 서문시장을 걷는 것은 장보기를 하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러 가는 것이며, 바닥 민심의 온도를 직접 재러 가는 것이며, 다시 시작하겠다는 겸허한 고백을 몸으로 하러 가는 것입니다.

상인의 거친 손을 잡을 때 전해지는 감촉이 있습니다. 악수의 세기가 아니라 손바닥의 두께입니다. 수십 년간 무거운 물건을 나르고, 칼로 생선을 가르고, 뜨거운 국물 냄비를 들어 올린 그 손은 정치인의 부드러운 손과 섞이는 순간 무언가를 증언합니다. 삶의 무게가 다르다는 것을. 그 차이를 느끼는 것이 겨울을 보내는 정치인에게 필요한 첫 번째 교육입니다.

시장에서 듣는 말은 여의도에서 듣는 말과 다릅니다. 보좌관들은 리더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골라서 전합니다. 기자들은 기사가 되는 말을 뽑아갑니다. 시장의 상인들은 그런 필터가 없습니다. "의원님, 저번에 약속하신 거 아직도 안 되었어요." "정치인들은 다 그래요. 선거 때만 오지." 이런 말이 걸러지지 않고 날것으로 들려옵니다. 아픕니다. 아프지만 그 아픔이 약입니다.

카메라가 따라오는 것은 두 번째 문제입니다. 처음에는 카메라 없이 가야 합니다. 보도자료도 내지 않고, 수행원도 최소화하고, 그냥 혼자서 걸어가야 합니다. 시장 사람들은 정치인의 진심과 연출을 구별하는 데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카메라팀을 대동한 방문은 대번에 눈치챕니다. "또 찍으러 왔네." 카메라 없이 한 번, 두 번, 세 번 오는 사람에게야 비로소 마음을 엽니다. "이 사람은 진짜로 오는구나."

겨울에 시장을 걷는 정치인에게 일어나는 변화가 있습니다. 여의도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새벽에 비에 젖은 아스팔트 위를 걷는 환경미화원의 등, 출근 시간에 지하철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오르는 직장인의 다급한 발걸음, 장을 본 비닐봉지를 양손에 들고 무거운 걸음을 옮기는 노인의 뒷모습. 이런 장면들은 여의도의 회의실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배지를 달고 있을 때는 스쳐 지나갔던 풍경이 배지가 없어진 뒤에야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경험이 쌓이면 정치인의 언어가 바뀝니다. "거시경제 건전성"이라는 말 대신 "이번 달 전기료"라는 말이 입에서 먼저 나옵니다. "재정 정책의 방향성"이라는 말 대신 "우리 아이 학원비"라는 말이 튀어나옵니다. 이 변화는 연기로 만들 수 없습니다. 시장 바닥에서 직접 밟고 냄새 맡고 듣고 만져야만 일어나는 체화(體化)입니다.

겨울에 시장을 걸으며 뿌린 씨앗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당장의 지지율로 환산되지 않고,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지도 않습니다. 그 씨앗은 땅속에서 천천히 뿌리를 내립니다. 상인이 옆집 상인에게 전하는 말. "그 사람, 카메라 없이 왔더라. 손이 따뜻하던데." 이 한마디가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가는 속도는 느리지만, 한번 심어진 인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정치 광고 한 편의 수명은 3일입니다. 시장 골목에서 잡은 손의 기억은 3년을 갑니다.

봄이 오면, 다시 선거가 열리면, 시장의 상인들은 투표소에 갑니다. 그들은 후보자의 공약집을 꼼꼼히 읽지 않습니다. 그들이 기억하는 것은 추운 겨울에 아무런 힘도 없으면서 자기 가게 앞에 와서 국밥 한 그릇을 시켜 먹고, 장사가 잘되느냐고 물어봐 준 그 사람의 눈빛입니다. 겨울에 뿌린 씨앗은 이렇게 싹을 틔웁니다. 권력이 사라진 자리에서 남은 것이 사람뿐이었던 정치인만이, 다시 권력이 돌아왔을 때 사람의 이름으로 통치할 수 있습니다.


18. 장외에서 내공을 쌓는 시간의 가치

가 닉슨의 8년 — 1960년 낙선 후 1968년 당선까지, 그는 무엇을 했는가

1962년 11월,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패배한 리처드 닉슨이 기자들 앞에 섰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2년 전 대선 패배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위에 새로운 상처가 덧나 있었습니다. 1960년 존 F. 케네디에게 11만 표 차이로 대선에서 졌을 때만 해도, 다음 기회가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도전했습니다. 그런데 또 졌습니다. 이번에는 근소한 차이가 아니라 확연한 패배였습니다.

닉슨은 기자회견에서 이제 유명한 말을 내뱉었습니다. "여러분은 닉슨을 더 이상 차고 다닐 수 없을 것입니다." 언론과의 절교 선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기자들은 이것을 정치 인생의 사망 확인서로 받아들였습니다. <타임>지는 "닉슨의 마지막 기자회견"이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ABC 방송은 "리처드 닉슨의 정치적 부검"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의 정치 생명이 끝났다고 판단한 1962년 11월. 그로부터 정확히 6년 뒤인 1968년 11월, 닉슨은 미국 제37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 6년 사이에 닉슨은 무엇을 했습니까.

첫째, 그는 뉴욕으로 이사하여 로펌에 합류했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의 패배 이후 정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였지만, 법률 실무를 하면서 뉴욕의 금융계, 재계 인사들과 관계를 쌓았습니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플랫폼입니다. 닉슨은 이 플랫폼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워싱턴의 정치 서클이 그를 잊어가는 동안, 뉴욕의 경제 엘리트들과 새로운 인맥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닉슨은 공화당의 해결사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1964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배리 골드워터가 린든 존슨에게 참패를 당했을 때, 공화당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습니다. 닉슨은 이 시기에 전국을 돌며 공화당 후보들의 선거 운동을 도왔습니다. 상원의원 후보, 하원의원 후보, 주지사 후보들의 유세장에 나타나 연설해 주고, 자금을 모아주고, 경조사를 챙겼습니다. 이 과정에서 전국 곳곳에 닉슨에게 빚을 진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각 주 대의원들의 지지가 필요할 때, 이 빚은 표로 돌아왔습니다.

셋째, 그는 외교와 국제 정세를 깊이 공부했습니다. 부통령 시절과 대선 후보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정상들을 만나고 국제 관계에 대한 자신만의 시각을 정립했습니다. 1967년에는 《포린어페어스》에 "베트남 전쟁 이후의 아시아"라는 논문을 기고하여 아시아 정책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이 논문은 학계와 정책 전문가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았고, 닉슨이 단순한 정치 기술자가 아니라 세계를 설계할 수 있는 지적 역량을 가진 인물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1968년 닉슨이 다시 대선 후보로 등장했을 때, 그는 1960년의 닉슨이 아니었습니다. 언론은 그를 '뉴 닉슨(New Nixon)'이라 불렀습니다. 공격적이고 성급했던 예전의 이미지 대신, 노련하고 준비된 인물이라는 새로운 이미지가 자리 잡았습니다. 패배 이후 6년간의 시간이 그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닉슨의 사례에서 배울 점은 이것입니다. 정치적 낙선이나 제명 이후의 공백기를 어떻게 보내느냐가 두 번째 기회의 질을 결정합니다. 그 시간을 원한과 자기연민으로 채우면 다시 돌아와도 예전과 같은 수준에 머무릅니다. 그 시간을 자기 혁신에 투자하면, 돌아왔을 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닉슨의 6년은 도망의 시간이 아니라 축적의 시간이었습니다. 역습을 위한 준비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착실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닉슨의 이후 행적, 워터게이트라는 치명적인 과오가 있습니다. 대통령이 된 뒤 그는 집권 과정에서 쌓아온 의심과 피해의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멸했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교훈을 줍니다. 겨울의 시련이 자동적으로 더 나은 인간을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통은 사람을 정제하기도 하지만, 비틀어 놓기도 합니다. 겨울을 어떤 마음으로 보냈느냐가 봄에 도달한 뒤의 통치 방식을 결정합니다.

나 책을 쓰고, 세계를 돌고, 정책을 연구한 시간이 두 번째 기회의 자격이 됩니다

정치의 현장에서 한 발 물러나 있을 때가 역설적으로 공부하기에 가장 좋은 때입니다.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있을 때의 하루를 떠올려 봅니다. 아침 7시 당정 협의, 9시 상임위원회, 11시 언론 인터뷰, 오후 내내 지역구 민원, 저녁에는 당 회의, 밤에는 후원회 일정. 이 바퀴가 멈추지 않고 돌아갑니다. 깊이 있는 사고를 할 시간이 없습니다. 정책 브리핑 자료를 훑어볼 수는 있지만, 한 권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며 자신의 철학을 정리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배지가 없어지면 시간이 생깁니다.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갈림길입니다. 한 갈래는 과거에 매몰되는 것입니다. 왜 졌는지, 누가 배신했는지, 어디서 잘못되었는지를 곱씹으며 분노와 후회 사이를 오가는 것입니다. 이 길은 아무 데도 도달하지 않습니다. 과거를 아무리 분석해도 과거는 바뀌지 않습니다. 다른 갈래는 미래를 설계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왔을 때 무엇을 할 것인지, 나라의 과제는 무엇이고 그 과제를 풀기 위한 해법은 무엇인지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철학을 담은 책을 쓰는 과정은 겨울을 보내는 정치인에게 최고의 수행입니다. 책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원고지를 채우는 작업이 아닙니다. 흩어져 있던 생각의 파편들을 하나의 체계로 정리하고, 논리의 빈틈을 메우고, 자신이 진짜 믿는 것과 남의 말을 빌려 온 것을 구별해 내는 과정입니다. 한 권의 책을 완성하고 나면 저자의 머릿속은 집필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습니다. 말로는 막연하게 표현하던 것들이 활자로 정리되면서 단단해집니다. 토론장에서 누군가 반론을 제기했을 때, 책을 쓴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정밀하고 설득력 있는 대응을 할 수 있습니다.

세계를 돌아보는 것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해외 경험이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의원 외교라는 이름으로 방문하는 해외 출장은 대부분 일정이 빽빽하게 짜여 있어서 표면을 훑고 지나갈 뿐입니다. 장외에 있을 때는 자신의 속도로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독일의 산업 현장을 방문하여 4차 산업혁명의 현주소를 직접 확인하고, 싱가포르의 공공주택 정책을 공부하고, 에스토니아의 디지털 정부 시스템을 체험하는 것. 이런 경험은 국회 회의실에서 보고서를 읽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이를 줍니다.

정책 연구는 책과 여행을 연결하는 고리입니다. 책에서 이론적 토대를 세우고, 해외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모델을 확인한 뒤, 이것을 한국의 현실에 맞게 재설계하는 작업. 이 과정을 거친 정치인의 정책 제안은 이론의 냄새만 나는 학자의 그것과도, 현장 감각에만 의존하는 활동가의 그것과도 다릅니다. 양쪽의 장점을 결합한, 실행 가능하면서도 비전이 있는 정책이 나옵니다.

"다음에 기회가 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기회가 와도 재앙이 됩니다. 국민이 두 번째 기회를 주는 것은 동정심 때문이 아닙니다. "저 사람이 쉬는 동안 정말 많이 변했구나, 이제는 정말 제대로 일을 하겠구나"라는 확신이 들 때 비로소 문이 열립니다. 그 확신을 심어주는 것은 화려한 복귀 선언이 아니라, 겨울 동안 쌓아 올린 내공의 무게입니다.

검찰에서 변호사로, 변호사에서 국회의원으로 직업을 바꿀 때마다 느낀 것이 있습니다. 새로운 자리에서 인정받으려면 과거의 경력에 기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검사 출신이라는 타이틀은 처음 몇 달은 도움이 되지만, 이내 사라집니다. 새로운 분야에서 새로운 실력을 증명해야 합니다. 정치적 복귀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업적에 기대어 "예전에 내가 이런 일을 했었다"고 말하는 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 증거가 책이고, 정책이고, 겨울 동안 축적된 지적 자산입니다.

다 북콘서트와 대학 강연은 좋은 시작입니다, 그러나 깊이가 따라와야 합니다

장외에 있는 정치인이 대중과 소통하는 가장 흔한 창구는 북콘서트와 대학 강연입니다. 책을 내고, 전국을 돌며 독자들을 만나고, 대학생들 앞에서 강연하는 것. 이것은 세 가지 측면에서 유용합니다. 지지층을 결집하는 효과, 새로운 세대의 반응을 살피는 효과, 그리고 미디어에 자연스럽게 노출되는 효과. 배지 없이도 존재감을 유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입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북콘서트와 강연이 감성적인 위로와 화려한 입담만으로 채워지면 금방 밑천이 드러납니다. 첫 번째 북콘서트에서 지지자들은 감동합니다. "역시 우리 후보님!" 두 번째에서도 감동합니다. 세 번째부터 사람들은 물어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뭘 할 건데요?" 이 질문에 대해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답변을 내놓지 못하면, 북콘서트는 정치적 이벤트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됩니다. 팬미팅은 되지만 정치 행위는 되지 못합니다.

강연은 자신의 내공을 드러내는 장이어야 합니다. 현안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이 있어야 하고, 시대 정신에 대한 자기만의 해석이 있어야 하며, 구체적인 해법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대학 강연장에서 학생들이 던지는 질문은 걸러지지 않습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일자리 정책은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기후 위기에 대한 보수의 대안은 무엇입니까?" "연금 개혁을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이런 질문에 "좋은 질문이네요, 함께 고민해 봅시다"라는 식의 둥글둥글한 답변을 내놓으면 학생들은 실망합니다. 대학생들은 정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예리합니다. 그들은 진짜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답을 가장하고 있는 사람을 직감적으로 구별합니다.

검찰에서 수사할 때 배운 것이 있습니다. 조서의 질은 질문의 질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질문은 상대방이 사실을 진술하도록 이끌고, 나쁜 질문은 상대방이 변명의 여지를 만들도록 허용합니다. 강연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연자의 역량은 연설의 화려함이 아니라 질의응답의 깊이에서 증명됩니다. 준비된 원고를 멋지게 읽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질문 앞에서 순간적으로 자신의 철학과 지식을 동원하여 명쾌한 답을 내놓는 것은 내공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제가 《AI 패권전쟁》과 《AI 행정혁명》을 쓰면서 16개국의 AI 정책을 비교 분석하는 작업을 했을 때, 가장 많이 느낀 것은 기술을 아는 정치인이 한국에 너무 적다는 것이었습니다. EU의 AI 법(AI Act), 미국의 AI 행정명령, 중국의 생성형 AI 관리 잠정 조치 같은 글로벌 규제 동향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국회의원이 몇 명이나 됩니까. 이 분야를 장외에서 깊이 파고들어 자신만의 전문성으로 만들어 두면, 복귀했을 때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됩니다. 아무도 하지 않는 공부를 혼자서 하는 것이 겨울의 가장 생산적인 활용법입니다.

북콘서트의 무대에서 박수를 받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 박수가 정치적 자산이 되려면 무대 위의 콘텐츠가 두꺼워야 합니다. 쇼(Show)가 아니라 실체(Substance)로 승부해야 합니다. 감성적인 스토리텔링과 지적인 정책 역량이 결합되었을 때, 강연장에서의 시간은 비로소 정치적 내공으로 전환됩니다.

라 배지를 다는 것이 목표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목표인가 — 이 질문에 대한 답이 행보를 결정합니다

정치적 겨울에 처한 사람에게 던져야 할 가장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단순해 보이지만, 대답에 따라 모든 행동이 달라집니다.

목표가 "다시 배지를 다는 것"이라면, 행보는 짧고 좁습니다. 당장 공천권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줄을 서야 합니다. 지역구 민원을 빠짐없이 처리하며 존재감을 유지해야 합니다. 당 지도부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신중하게 처신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소신은 뒷전으로 밀립니다. 공천을 받기 위해 해야 할 말과 하고 싶은 말이 다를 때, 전자를 선택하게 됩니다. 배지를 목표로 삼는 순간, 정치인은 자유를 잃습니다.

목표가 "세상을 바꾸는 대통령이 되는 것"이라면, 행보는 길고 넓습니다. 당장의 공천보다 시대가 요구하는 비전을 제시하는 일이 우선합니다. 때로는 당 지도부와 충돌하더라도,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단기적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장기적으로 역사가 기억할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위험한 길입니다. 배지를 되찾지 못할 수도 있고, 대통령도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주어집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입니다.

겨울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정리하는 시간입니다. 배지가 없어졌을 때 비로소 진짜 자신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직함이라는 외투, 당이라는 울타리, 보좌관이라는 팔다리가 모두 사라진 뒤에 남은 맨몸의 자신. 그 맨몸이 가진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고, 어떤 비전을 품고 있으며, 그 비전을 실현할 역량은 얼마나 됩니까. 이 질문에 솔직하게 답하는 것이 겨울을 생산적으로 보내는 첫걸음입니다.

배지는 수단입니다.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국회의원 배지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은 맞습니다. 법안을 발의할 수 없고, 예산 심의에 참여할 수 없고, 국정감사에서 질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배지가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책을 쓸 수 있고, 정책을 연구할 수 있고,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세계를 공부할 수 있습니다. 배지가 없는 시간에 이런 일들을 차곡차곡 쌓아 두면, 배지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 배지의 무게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묵직해집니다.

대통령이라는 목표를 가진 사람과 배지라는 목표를 가진 사람은, 같은 위기 앞에서 전혀 다른 선택을 합니다. 당 대표가 부당한 요구를 했을 때, 배지를 목표로 하는 사람은 고개를 숙입니다. 대통령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거절합니다. 불의한 결정에 동조하라는 압력이 왔을 때, 배지를 목표로 하는 사람은 침묵합니다. 대통령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목소리를 냅니다. 어느 쪽이 단기적으로 유리한지는 분명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침묵하는 것이 당장은 편합니다. 하지만 대중은 정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기억합니다. 위기의 순간에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기억합니다. 그 기억이 쌓여 한 사람의 정치적 무게가 됩니다.

겨울을 지나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뀌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대통령을 꿈꾸었지만, 겨울의 혹독함에 지쳐 배지로 목표를 낮추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배지만 생각했지만, 겨울을 겪으며 더 큰 꿈을 품게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겨울은 자신의 진짜 그릇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됩니다. 배지를 목표로 삼으면, 배지를 얻는 순간 여정이 끝납니다. 다시 배지를 지키는 것이 새로운 목표가 되고, 그 목표가 또 다른 굴종을 요구하는 악순환이 시작됩니다. 대통령을 목표로 삼으면, 배지는 여정의 한 역(驛)일 뿐입니다. 역에 머무를 수도 있고, 지나칠 수도 있고,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차가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입니다. 목적지가 명확한 사람은 잠시 역에 내려 쉬어 가더라도 불안하지 않습니다. 다음 기차가 올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겨울의 끝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내일 봄이 올 수도 있고, 3년 뒤에 올 수도 있습니다.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겨울을 보내는 방식뿐입니다. 그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배지인가, 대통령인가. 수단인가, 목적인가. 이 대답이 정해지면 나머지는 따라옵니다.


제6부 대통령으로 가는 길

사람을 남기는 리더의 조건



19. 적을 줄이고 품는 기술

서기 200년 겨울, 허난성 관도의 벌판에 불길이 솟아올랐습니다. 원소의 군량 창고가 불타는 연기가 하늘을 뒤덮자, 십만 대군의 사기는 한꺼번에 꺼져 내렸습니다. 조조의 병력은 원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식량은 바닥을 드러냈고, 허도로 철수하겠다는 편지를 모사 순욱에게 보낼 정도로 궁지에 몰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소의 참모 허유가 투항해 왔습니다. 조조는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뛰어나가 그를 맞았습니다. 허유의 귀띔으로 오소의 병참기지를 기습한 조조는 전세를 단숨에 뒤집었습니다. 장합과 고람까지 항복해 오면서 원소의 군대는 와해되었습니다.

승리의 잔해 속에서 조조의 부하들이 원소 진영의 물자를 뒤지던 중, 묵직한 궤짝 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 열어보니 편지 꾸러미였습니다. 조조 진영에 있던 장수와 관리들이 원소에게 은밀히 보낸 내통 서신이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전세가 불리하던 시절, 원소가 이길 것이라 판단한 자들이 미리 줄을 댄 흔적이었습니다. 내통자의 이름을 확인하면 누가 자신을 배반했는지 낱낱이 알 수 있었습니다. 좌우의 신하들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름을 하나하나 대조해서 처단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배신자를 색출해 본보기를 보여야 군심이 바로 선다는 논리였습니다. 전장에서 피를 흘리며 싸운 충성파들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조조는 편지 꾸러미를 바라보았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한 통도 열어보지 않은 채 불 속에 던져 넣으라고 명했습니다. 이유를 묻는 부하들에게 조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자신도 승패를 확신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다른 이들이야 어떠했겠는가." 불길이 편지를 삼키는 동안 그 자리에 있던 수백 명은 숨을 죽였습니다. 편지를 보냈던 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재로 변하는 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 목숨이 타들어가는 소리 대신 종이가 타들어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안도로 바뀌는 그 순간, 조조라는 인간에 대한 감사가 뼛속까지 새겨졌을 것입니다.

이 장면이 천팔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자되는 이유는 조조의 관대함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는 감정이 아니라 구조를 읽었습니다. 내통자를 색출해 처단하면 당장의 복수심은 충족됩니다. 충성파들의 환호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직 전체에 공포가 퍼집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충성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복종하게 됩니다. 두려움에 기반한 복종은 다음 위기가 왔을 때 더 은밀하고 교활한 배신으로 돌아옵니다. 이번에는 편지 같은 증거를 남기지 않을 것이고, 발각될 경우를 대비해 미리 퇴로를 확보해 둘 것입니다. 공포 정치는 배신을 더 정교하게 만들 뿐 근절하지 못합니다.

조조는 편지를 태움으로써 조직 전체에 선언한 것입니다. 과거는 묻겠다, 지금부터 함께 가자. 배신의 기록을 소각한 순간, 내통자들은 조조에게 생명의 빚을 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생명의 빚은 충성의 빚으로 전환됩니다. 공포로 얻은 복종보다 감사로 얻은 헌신이 오래갑니다. 실제로 관도대전 이후 조조의 조직은 눈에 띄게 결속력이 강해졌습니다. 편지 소각이라는 한 번의 행위가 조직 전체의 충성 수준을 끌어올린 것입니다. 이후 조조가 중원을 장악하고 북방을 통일해 나가는 과정에서, 원소 진영 출신의 인재들이 대거 합류했습니다. 편지를 태운 이야기가 천하에 퍼졌기 때문입니다. 조조에게 가면 과거를 묻지 않는다, 능력만 보여주면 된다는 신호가 온 세상에 전달되었습니다. 인재를 끌어들이는 데 있어서 높은 봉급이나 화려한 직함보다 더 강력한 것은 "이 사람 밑에서는 안전하다"는 신뢰였습니다.

원소와 조조의 차이가 여기서 극명하게 갈렸습니다. 원소는 직언하는 참모 전풍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전풍은 남하 원정을 반대하며 지구전을 주장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관도대전에서 패한 뒤, 주변에서는 전풍이 복권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의 예측이 맞았으니 중용할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전풍 본인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습니다. 원소가 승리했다면 자신을 용서했겠지만, 패배한 이상 자신의 존재 자체가 원소의 판단 착오를 증명하는 증거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전풍의 예감대로 원소는 그를 처형했습니다. 자기보다 옳았던 사람을 견디지 못한 것입니다. 원소의 막료들은 이 장면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이후 원소 진영에서 주군에게 직언하는 사람은 사라졌고, 곽도와 심배처럼 원소의 귀에 달콤한 말만 넣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았습니다. 조직은 안에서부터 썩어갔고, 원소가 죽은 뒤 아들들 사이의 후계 다툼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1994년 5월 10일, 프리토리아의 유니언 빌딩에 전 세계 4천여 명의 하객이 모였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첫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의 취임식이었습니다. 27년의 감옥살이를 끝내고 세상에 나온 지 겨우 4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전 세계 10억 명이 텔레비전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 취임 연설에서 만델라는 정의와 평화와 인간 존엄의 승리를 이야기했습니다. 이날의 감동은 연설문 자체보다 하객 명단에 있었습니다.

만델라는 로벤 섬 교도소에서 자신을 감시했던 백인 간수 세 명을 취임 축하 행사에 초대했습니다. 이 사실을 취임 오찬 연설에서 직접 밝혔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크리스토 브랜드라는 이름의 교도관이었습니다. 브랜드는 만델라가 폴스무어 교도소와 빅터 버스터 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시절 그의 요리를 담당했고, 세월이 흐르면서 둘 사이에는 인종의 벽을 넘는 우정이 싹텄습니다.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브랜드에게 전화를 걸자, 브랜드가 "안녕하세요, 만델라 씨"라고 인사했습니다. 만델라는 "그 '미스터'가 갑자기 어디서 나온 거야? 늘 그랬듯이 넬슨이라고 부르게"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교도관 시절의 호칭을 유지한 것입니다. 브랜드는 취임식 참석 후 만델라 사무실의 행정 담당관으로 일했고, 이후 로벤 섬이 박물관으로 변환된 뒤에는 관광 안내원이 되어 자신과 만델라의 이야기를 방문객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제임스 그레고리라는 교도관도 초청 명단에 있었습니다. 그레고리는 로벤 섬에서 만델라의 편지를 검열하는 임무를 맡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수십 년간 만델라의 사적인 서신을 들여다보며 감시했던 바로 그 사람을 만델라는 대통령 취임식에 불러 함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만델라는 자서전 「자유를 향한 긴 여정」에서 그레고리를 "전형적인 교도관과는 달리 예의 바르고 사려 깊은 대조를 이루는 사람이었다"고 썼습니다. 만델라가 1990년 석방되던 날, 그레고리와 따뜻하게 포옹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감시자와 피감시자 사이에 형성된 이 기묘한 인간적 유대는 만델라라는 인물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만델라는 자신을 기소했던 검찰관 퍼시 유타와도 관계를 복원했습니다. 1963년 리보니아 반역 재판에서 유타는 만델라에게 사형을 구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1995년, 만델라는 유타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고, 유태인인 유타를 위해 코셔 식단을 준비했습니다. 유타는 자신의 직무를 수행했을 뿐이라고 만델라는 말했습니다. 자신에게 사형을 구형한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 이 장면이 담고 있는 무게를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취임 오찬에서 만델라는 원고 없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역사를 만든 두 가지 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는 1910년 이래 이 나라를 지배해온 무력과 강압의 힘이었고, 다른 하나는 연민과 사랑, 조국에 대한 충성의 힘이었습니다. 흑인 수감자들과 백인 간수들 사이에 쌓인 강한 우정을 언급하며, 인간이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증언했습니다. 자신을 가두었던 정부의 수장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우리를 힘들게 했던 사람이지만, 그가 겪은 개인적 변화와 용기, 비전, 정직함, 성실함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개혁을 이끌어냈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잊었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국민통합정부에서 함께 일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겪어왔는지,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델라의 용서가 감상적인 관용에 머물렀다면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내전의 불길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백인 극우파는 무장 저항을 선언한 상태였고, 줄루족의 잉카타자유당은 ANC와 유혈 충돌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이 폭발 직전의 상황에서 만델라가 보여준 포용은 정밀하게 계산된 정치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적을 굴복시키는 대신 적의 체면을 살려주고, 적에게도 새 나라에서 자리가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극단적 저항의 동기를 제거했습니다. 진실과화해위원회를 만들어 과거의 잔혹 행위를 기록하되 보복이 아닌 치유의 방식으로 접근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1995년 럭비 월드컵 결승전에서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의 상징이던 스프링복스 유니폼을 직접 입고 경기장에 나타나 백인 관중들의 환호를 받았습니다. 적의 깃발을 자기 몸에 걸침으로써 적을 아군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 장면 하나가 수십 페이지의 정책 문서보다 강력하게 화해의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조조의 편지 소각과 만델라의 간수 초대 사이에는 천팔백 년의 시간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두 장면이 전하는 메시지는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승리한 뒤에 적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그 승리의 수명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패자를 짓밟으면 당장은 통쾌합니다. 내 편을 배신한 자들이 벌을 받는 장면은 충성파들의 환호를 끌어냅니다. 그러나 짓밟힌 자들은 어둠 속에서 칼을 갈게 됩니다. 복수의 불씨는 완전히 꺼지지 않습니다. 반면, 패자에게 서 있을 자리를 내어주면 당장은 아군의 불만을 삽니다. "왜 배신자를 용서하느냐"는 항의가 빗발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적이 줄고 아군이 늘어납니다. 용서받은 자들 가운데 일부는 진심으로 전향하고, 나머지도 최소한 적극적인 적이 되지는 않습니다. 정치의 산술에서 적 하나를 줄이는 것은 아군 하나를 늘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냅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적이었던 사람이 아군이 되면 그가 데리고 있던 사람들까지 함께 넘어오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한 진영의 수장이 아니라 온 국민의 지도자입니다.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자신을 반대했던 사람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과 다시 한 테이블에 앉아야 할 날이 반드시 옵니다. 당대표 제명이라는 칼날을 맞은 경험이 있다면, 그 칼을 휘두른 사람들과 다시 일해야 할 상황을 상상해 보아야 합니다. 제명안에 찬성표를 던진 윤리위원들, 제명을 주도한 당내 반대파, 그 과정에서 침묵으로 방관한 중립파. 이 사람들과 언젠가 같은 정당에서 같은 대선 후보를 지지하며 일해야 합니다. 그때 분노에 찬 얼굴로 마주할 것인가, 아니면 담담한 눈빛으로 악수를 건넬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대통령의 그릇과 진영 지도자의 그릇을 가릅니다.

용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심의 용서이고, 다른 하나는 더 큰 목표를 위해 감정을 접는 이성의 용서입니다. 정치에서는 두 번째 종류의 용서가 더 자주 요구됩니다. 마음속까지 용서하지 못하더라도, 함께 일할 수 있는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 정치인의 기술입니다. 조조가 편지를 태울 때 내통자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서 태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 행위가 만들어낸 결과는 진심의 용서와 같은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행위가 감정을 앞서간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인지 부조화의 해소라고 부릅니다. 용서의 행동을 먼저 하면, 뇌가 행동과 감정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감정 쪽을 조정합니다. 용서의 제스처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실제로 감정이 누그러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다만 용서에도 한계선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는 리더는 관대한 리더가 아니라 원칙 없는 리더입니다. 원칙을 훼손한 행위,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 행위, 국민의 생명을 위협한 행위에 대해서는 용서가 아닌 책임 추궁이 와야 합니다. 만델라는 간수를 취임식에 초대했지만, 아파르트헤이트의 구조적 범죄에 대해서는 진실과화해위원회를 통해 낱낱이 기록하고 공개했습니다. 개인에 대한 보복은 자제하되, 잘못된 체제에 대한 심판은 정확하게 수행한 것입니다. 용서와 망각은 다릅니다. 기억하되 보복하지 않는 것, 기록하되 증오에 갇히지 않는 것. 이 경계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대통령의 자리에 한 걸음 더 가까이 서 있습니다.

당내 정치적 반대자를 용서하는 것과, 헌정 질서를 파괴한 행위를 용서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경선에서 나를 비방한 사람, 당내 투표에서 반대편에 선 사람, 제명에 동의한 사람은 정치적 반대자입니다. 이들과는 화해할 수 있고, 화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12·3 비상계엄처럼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한 행위에 대해서는 용서가 아니라 엄정한 법적 판단이 와야 합니다. 이 구별을 명확히 하는 것이 원칙 있는 용서입니다.

검찰 출신으로 정치에 입문한 사람이라면, 조서 속에서 범죄자의 거짓을 추궁하던 그 서늘한 눈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눈은 한쪽으로는 자산이고 다른 한쪽으로는 족쇄입니다. 범죄를 추궁하는 눈으로 정치적 반대자를 바라보면 모든 사람이 잠재적 피고인으로 보입니다. 누구나 약점이 있고, 누구나 흠결이 있으니, 검사의 시선으로 들여다보면 결함 없는 동료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눈을 품어 안는 눈으로 바꾸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검사의 눈으로 적의 약점을 파악하되, 정치인의 눈으로 그 약점을 공격하지 않고 서랍에 넣어두는 것. 언젠가 그 약점을 아는 것 자체가 상대와의 관계에서 보이지 않는 힘이 됩니다. 칼을 뽑지 않아도 칼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순간이 있습니다. 칼을 뽑는 순간 칼은 한 번밖에 쓸 수 없지만, 칼집에 넣어둔 칼은 무한히 쓸 수 있습니다.

적을 줄이는 확실한 방법은 적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적이 적이기를 그만두게 만드는 것입니다. 조조는 편지를 태워서, 만델라는 간수를 초대해서, 각각의 방식으로 같은 일을 해냈습니다. 방법은 달랐지만 원리는 같았습니다. 승리한 뒤에 패자에게 퇴로를 열어주는 것. 복수의 달콤함보다 미래의 안정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대통령의 그릇을 만드는 수련입니다.


20. 후계자를 키우는 것이 가장 어려운 정치입니다

기원전 23년,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퍼졌습니다. 원로원은 술렁였고, 군단의 지휘관들은 눈치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4년 전, 공화정 말기의 내전을 종식시키고 "제1시민"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의 1인 통치를 시작한 이 남자가 쓰러지면 로마는 다시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로 빨려들 것이 분명했습니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벌어진 내전의 참화가 채 20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누가 뒤를 잇느냐에 따라 제국의 운명이 갈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적자가 없었습니다. 딸 율리아 하나뿐이었습니다. 로마의 전통에서 권력은 세습되는 것이 아니라 원로원의 동의로 부여되는 것이었기에, 후계 문제는 더욱 복잡했습니다. 공식적으로 후계자를 지명할 수 없었으므로, 결혼과 입양과 관직 부여를 통해 간접적으로 후계 구도를 설계해야 했습니다. 이 설계 작업은 아우구스투스의 생애 전체를 관통하는 더없이 지난한 과업이 되었습니다. 제국을 건설하는 것보다 제국을 물려줄 사람을 준비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는 사실을 아우구스투스는 40년에 걸쳐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처음 눈여겨본 후계자는 누이 옥타비아의 아들 마르켈루스였습니다. 자신의 혈통에 제일 가까운 청년이었습니다. 기원전 25년, 열네 살 된 딸 율리아를 스물셋의 마르켈루스에게 시집보냈습니다. 왕조의 미래를 설계하는 첫 번째 돌을 놓은 것입니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스에서 마르켈루스를 로마의 미래를 짊어질 영웅으로 묘사했을 정도로 기대가 컸습니다. 그런데 마르켈루스가 같은 해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물셋의 나이였습니다. 제국의 후계 계획은 출발선에서부터 무너졌습니다. 첫 번째 좌절이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다시 설계를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자신과 오래도록 함께한 벗이자 최고의 장군인 마르쿠스 아그리파에게 딸 율리아를 시집보냈습니다. 기원전 21년의 일입니다. 율리아는 열여덟이었고 아그리파는 마흔둘이었습니다. 나이 차이가 컸지만,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제국의 안정이 딸의 감정보다 우선이었습니다. 이 결합은 결실이 풍성했습니다. 아들 셋과 딸 둘이 태어났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큰 두 아들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를 기원전 17년에 직접 양자로 입양하여 어린 시절부터 제왕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로마 시민들 앞에서 이 두 소년을 데리고 다니며 미래의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심었습니다. 아그리파는 사실상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기원전 18년에는 호민관 권한을 부여받았고, 군단 지휘권과 속주 통치권을 아우구스투스와 나누어 가졌습니다. 당시 발행된 동전에는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가 나란히 새겨져 있었습니다. 아그리파가 건재한 한 후계 구도는 안정적이었습니다. 두 소년이 성인이 될 때까지 아그리파가 다리 역할을 해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12년, 아그리파가 원정 중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번째 좌절입니다. 아우구스투스는 30년 가까이 함께한 전우를 잃었습니다. 전장에서든 정치의 장에서든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오른팔이 사라진 것입니다.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당장 제국을 이끌 성인 남성이 필요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가 전남편에게서 데려온 두 아들,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이 두 의붓아들은 이미 뛰어난 장군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게르마니아 원정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 로마 군단의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아와 티베리우스의 결혼을 기원전 11년에 성사시켰습니다. 티베리우스에게는 사랑하는 아내 빕사니아가 있었습니다. 빕사니아는 아그리파의 딸이었고, 티베리우스와의 사이에서 아들까지 낳은 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국의 필요 앞에서 개인의 감정은 뒷전이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티베리우스는 빕사니아와 이혼하고 율리아와 재혼했습니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혼 후 티베리우스가 우연히 빕사니아를 길에서 마주쳤을 때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고 합니다. 이후 빕사니아가 티베리우스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도록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티베리우스는 평생 이 강제 이혼의 상처를 안고 살았습니다. 후계 설계의 이면에는 이런 개인의 희생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드루수스가 기원전 9년 게르마니아 원정 중 낙마 사고로 인한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 번째 좌절입니다. 드루수스는 유쾌하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원로원과 시민 모두에게 인기가 높았습니다. 형 티베리우스가 과묵하고 냉정한 것과 대조적이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또 한 명의 유력한 후보를 잃었습니다.

기원전 6년, 예기치 못한 네 번째 타격이 왔습니다. 티베리우스가 돌연 정치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하고 로도스 섬으로 은퇴해 버린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에서 공개적으로 티베리우스의 이탈을 비난했을 정도로 이례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리비아가 중재를 시도했지만 티베리우스는 단식까지 하며 은퇴 의사를 관철시켰습니다. 표면적 이유는 피로였습니다. 그러나 이면에는 깊은 좌절감이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를 후계자로 밀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며 제국의 국경을 지키는데, 돌아오면 아직 관직 경험도 없는 어린 소년들 뒤에 서야 하는 처지가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율리아와의 불행한 결혼도 한몫했습니다. 율리아의 공공연한 불륜은 로마 사교계의 화젯거리였고, 티베리우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수치였습니다.

비극은 거듭되었습니다. 서기 2년,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마실리아(현재의 마르세유)에서 갑자기 병사했습니다. 서기 4년,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아르메니아 원정 중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17년에 양자로 입양한 이후 20년 가까이 공들인 후계 구도가 완전히 무너진 순간이었습니다. 다섯 번째 좌절입니다. 마르켈루스, 아그리파, 드루수스, 루키우스, 가이우스. 다섯 명의 후계 후보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거나 이탈했습니다. 선택지가 남지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도스에서 8년째 은둔 생활을 하던 티베리우스를 불러들였습니다. 서기 4년,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고 제국의 후계자로 공식 지명했습니다. 동시에 조건을 걸었습니다. 조카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입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게르마니쿠스는 드루수스의 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손녀 아그리피나와 결혼한 인물로, 젊고 인기 있는 장군이었습니다. 티베리우스에게는 친아들 드루수스(동명이인)가 있었지만, 게르마니쿠스를 후계 서열 1위로 세워야 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을 3세대까지 이어가려는 최후의 보험이었습니다. 티베리우스는 이 조건을 받아들였습니다. 거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서기 14년 8월, 아우구스투스가 일흔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국을 건설한 지 41년 만이었습니다. 티베리우스는 55세의 노련한 정치인이자 검증된 군인이었습니다. 원로원은 별다른 소란 없이 티베리우스를 새 황제로 승인했습니다. 군단은 동요하지 않았고, 속주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이 평온한 권력 이양이야말로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더없이 위대한 유산이었습니다. 카이사르 암살 뒤 로마가 겪었던 13년간의 내전, 안토니우스와의 최후의 대결, 아크티움 해전의 피비린내를 생각하면, 권력의 평화로운 이전은 기적에 가까운 성취였습니다. 로마 제국은 이후 수백 년간 존속했고,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원수정(프린키파투스) 체제는 3세기의 위기가 올 때까지 유지되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후계 설계에서 배울 것은 그 화려한 성공이 아닙니다. 처참한 좌절을 겪으면서도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마르켈루스가 죽었을 때 멈추지 않았고, 아그리파가 죽었을 때 무너지지 않았고, 티베리우스가 이탈했을 때 포기하지 않았고, 가이우스와 루키우스가 연달아 세상을 떠났을 때도 다시 설계도를 펼쳤습니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후보를 물색하고, 결혼을 주선하고, 양자를 입양하고, 권한을 나누어주고, 실패하면 다시 처음부터 짜는 작업을 반복했습니다. 학자들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 구도를 "후보자의 풀(pool of candidates)"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한 명의 후계자에 올인하는 대신, 여러 명의 후보를 동시에 키우면서 상황 변화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한 것입니다. 한 명이 쓰러지면 다음 사람이 올라오는 구조를 만들어둔 것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제국이 혼란에 빠지지 않은 비결이었습니다.

현대 정치에서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후계자를 키우지 못한 리더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회의실에서 자신보다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부하를 보면 본능적으로 불편해집니다.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잠재적 경쟁자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이 본능을 제어하지 못하면 주변에는 자기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만 남게 됩니다. 편안하지만 무기력한 조직이 만들어집니다. 원소가 바른말 하는 전풍을 죽이고 아첨하는 곽도를 중용한 것과 같은 패턴입니다. 아우구스투스도 이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습니다. 자신의 혈통에 집착한 나머지 능력이 검증된 티베리우스보다 어린 손자들을 우선시했고, 그 결과 티베리우스의 이탈이라는 뼈아픈 대가를 치렀습니다.

한국 정치사에서 후계 구도가 성공적으로 작동한 사례를 찾기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고, 다음 세대를 키우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동안에는 후계자 이야기가 곧 자신의 퇴장 이야기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후계 논의를 꺼내는 측근을 경원하고, 자신 이후를 준비하는 사람을 잠재적 반역자로 의심합니다. 혹은 후계자를 키우더라도 자신의 복제판을 만들려는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자기와 같은 경력, 같은 성향,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을 후계자로 세우는 것은 익숙하고 편안한 선택입니다. 그러나 스승의 복제판은 스승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후계자는 스승과 다른 강점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스승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이질적인 역량을 가진 사람을 발견하고, 그에게 무대를 내어주는 것이 진짜 후계 설계입니다. 아우구스투스가 군인 아그리파, 외교관 티베리우스, 인기 장군 게르마니쿠스라는 각기 다른 유형의 후보를 검토한 것은 한 가지 틀에 맞추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에게 첫째로 요구되는 역량은 자기 자신이 뛰어난 것이 아닙니다. 뛰어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드는 구심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심력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키워줄 때 발생합니다. 검찰 출신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당대표까지 오른 경력은 인상적입니다. 법률적 분석력, 조직 장악력, 위기 대응 능력은 이미 검증되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자리에 이르려면, 함께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독자적인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인물을 골라 키워내야 합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능력입니다.

친한계 의원이 일곱 명이라고 합시다. 이 일곱 명이 기자회견장에 배석하여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일곱 명 각자가 자기 지역구에서, 자기 정책 분야에서, 자기 이름으로 존재감을 가지는 정치인이 되어야 합니다.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전문성을 인정받는 의원, 지역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는 의원, 당내에서 정책 토론을 주도하는 의원, 언론과의 소통에 능한 의원. 이런 개별적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무대를 만들어주고, 실수할 공간을 허용하면서, 결정적 위기 때만 뒤에서 받쳐주는 것이 리더의 몫입니다. 리더의 그늘 아래서만 빛나는 사람은 위성이지 별이 아닙니다. 위성은 모성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집니다. 별은 스스로 빛납니다. 일곱 개의 별을 만들어내는 것이 대통령 후보로서 더없이 설득력 있는 역량 증명입니다.

멘토와 멘티 사이에는 건강한 긴장이 존재해야 합니다.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에게 호민관 권한과 군단 지휘권을 나누어주면서도, 게르마니쿠스라는 견제 장치를 심어두었습니다. 신뢰하되 맹목적으로 맡기지 않고, 견제하되 질식시키지 않는 간격을 유지한 것입니다. 이 간격이 무너지면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멘토가 멘티를 자기 분신으로 만들려 하면 멘티는 질식합니다. 독자적인 판단을 할 공간이 없어지고, 스승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꼭두각시가 됩니다. 반대로 멘토가 멘티를 완전히 방임하면 멘티는 표류합니다. 방향을 잃고 시행착오만 반복하다 성장의 기회를 놓칩니다. 적절한 거리에서 지켜보면서, 결정적인 순간에만 개입하고, 회복 가능한 실패는 허용하되 회복 불가능한 실패는 막아주는 것. 그것이 후계자를 키우는 기술의 핵심입니다.

대권 도전은 개인의 야망입니다. 후계자 양성은 진영의 미래입니다. 야망만 있고 미래가 없는 정치인에게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걸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이끄는 진영에 속하면 나도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리더에게 사람이 모입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선언보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성장하는 모습이 더 강력한 대권 메시지입니다.

후계자를 키우는 일에는 역설이 있습니다. 키워낸 사람이 언젠가 자신을 넘어설 수 있다는 불안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심은 나무가 자신보다 크게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무가 자라지 못하면 그늘도 없고, 열매도 없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에게 권한을 이양했을 때, 티베리우스가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제국을 운영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완벽한 복제가 아니라 안정적인 계승이 목표였기 때문에 그 차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40년을 투자해 다섯 번의 좌절을 겪으면서도 후계 설계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자기 한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제국의 존속을 위해서였습니다. 대권을 향해 달리는 정치인이 곁에 있는 일곱 명의 의원을 각자의 분야에서 빛나는 정치인으로 키워내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다면, 그 자체가 대통령의 자질을 증명하는 이보다 강력한 행동은 없습니다. 제국보다 사람을 먼저 키워야 한다는 것. 그것이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교훈입니다.


21. 대통령의 언어, 대통령의 품격

1444년 2월 20일, 경복궁 편전에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여섯 명의 학사를 이끌고 상소문을 올린 날이었습니다. 세종이 전해 12월에 창제한 훈민정음 28자를 반포하고, 이를 활용해 중국 운서를 번역하려는 계획에 제동을 건 것입니다. 최만리는 집현전에서 20년 넘게 근무한 실질적 수장이었습니다. 해동공자 최충의 12대손으로 청백리에 이름이 올라 있었고, 14차에 걸쳐 상소를 올렸을 만큼 소신이 강한 학자였습니다. 그런 최만리가 나섰다는 것은 반대의 무게가 가벼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상소문의 요지는 여섯 가지였습니다. 조선은 건국 이래 중화의 제도를 따라왔는데 독자적 문자를 만드는 것은 사대의 예에 어긋난다는 것이 첫째였습니다. 설총의 이두가 이미 있는데 새 문자가 왜 필요하냐는 것이 둘째였습니다. 억울한 옥사는 문자 문제가 아니라 관리의 공정성 문제라는 것이 셋째였습니다. 논의도 없이 갑작스럽게 시행하려 한다는 것, 세자가 다른 공부를 해야 하는데 이 일에 너무 매달리고 있다는 것까지 조목조목 반박의 논리를 세워 올렸습니다.

세종은 이 상소를 읽고 최만리 등을 불러 직접 대면했습니다. 세종실록에 그날의 대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세종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희들이 설총의 이두는 옳다 하면서 임금이 하는 일은 그르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이두를 만든 본래 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느냐. 그렇다면 지금의 언문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어서 "네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라고 반문했습니다. 늘그막에 시간이 남아서 한 일이 아니라 자신 외에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한 것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논쟁이 격해지자 세종은 하교했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죄 주려 한 것이 아니고, 상소문 안에 한두 가지 말을 물으려 하였던 것인데, 너희들이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바꾸어 대답하니, 너희들의 죄는 벗기 어렵다." 이 말과 함께 일곱 명을 의금부에 하옥시켰습니다. 그러나 이튿날 석방을 명했습니다. 정창손만 파직시키고 김문에 대해서만 추가 국문을 지시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풀어주었습니다. 최만리는 석방 후 사직하고 낙향하여 이듬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일화에서 주목할 것은 세종의 분노가 향한 방향입니다. 세종은 반대 의견 자체에 분노한 것이 아니라, 논쟁 과정에서 말을 바꾸며 성의 없이 대응한 태도에 분노했습니다. "너희들의 시종하는 신하로서 뻔히 나의 뜻을 알면서"라는 표현은, 훈민정음 창제가 비밀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진행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알면서도 반대한 것까지는 용납할 수 있었지만, 불러서 물었을 때 앞뒤가 다른 말을 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종은 일관성 없는 태도에 분노했지, 반대 그 자체에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세종실록에 최만리의 상소문이 전문 그대로 실려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반대 의견조차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상소문과 이에 대한 세종의 반박이 함께 기록됨으로써, 후대 사람들은 훈민정음 창제의 동기와 배경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세종이 반대파를 탄압하고 기록을 삭제했다면, 훈민정음 창제의 역사적 맥락은 사라졌을 것입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군주가 아랫사람들의 반대 의견을 듣고, 그 의견을 역사에 남기고, 반박한 뒤에도 상대를 파멸시키지 않는 것. 이것이 대통령의 언어 이전에 대통령의 태도입니다.

세종의 해례본은 상소 이후 정확히 2년 5개월 뒤에 완성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해례본이 최만리의 반대 상소에 대한 학술적 답변서였다고 평가합니다. 감정적 보복 대신 논리적 답변으로 응수한 것입니다. 해례본은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를 음운학적,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저작으로, 반대파의 논거를 하나하나 해체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해례본이 반포된 이후에는 단 한 건의 반대 상소도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칼로 반대를 누른 것이 아니라 설득으로 반대를 잠재운 것입니다. 분노의 순간에 상대를 파멸시키는 대신, 2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학문적 완결성으로 답한 것. 이것이 세종이 보여준 리더의 언어입니다.

세종의 사례에서 한 가지 더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세종은 논쟁 과정에서 자신의 동기를 솔직하게 밝혔습니다. "내 늘그막에 날을 보내기 어려워서 서적으로 벗을 삼을 뿐인데, 어찌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여 하는 것이겠느냐." 이 말은 최만리가 세종을 기이한 기예에 빠진 군주로 묘사한 것에 대한 반박이었습니다. 늙어가는 군주가 어학의 즐거움에 빠져 있다는 인간적 솔직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권력자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 자신의 동기를 숨기지 않는 것. 이것은 대중에게 의외의 효과를 냅니다. 완벽한 리더보다 솔직한 리더에게 사람들은 마음을 엽니다.

대양 건너 미국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이 보여준 언어의 기술은 세종과 다른 결에서 빛납니다. 링컨은 분노를 다스리는 독특한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격한 감정이 치밀어 오를 때, 그는 "뜨거운 편지(hot letter)"라고 부르는 것을 썼습니다. 울분과 비난을 종이 위에 모조리 쏟아부었습니다. 남북전쟁의 와중에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장군들, 뒤에서 험담을 하는 정적들, 자신의 외모와 능력을 조롱하는 신문 기사들에 대한 분노가 펜 끝에서 불꽃처럼 튀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서랍에 넣어두고 감정이 식을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 다시 꺼내 읽어보았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편지 봉투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보내지 않음. 서명하지 않음(Never sent. Never signed)."

역사학자 도리스 컨스 굿윈에 따르면, 링컨의 뜨거운 편지 가운데 널리 알려진 것은 1863년 7월 게티즈버그 전투 직후에 쓴 것이었습니다. 북군의 미드 장군이 남군의 리 장군을 추격하지 않고 놓아주었습니다. 리 장군의 군대는 포토맥 강을 건너 도주했습니다. 링컨은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결정적 기회가 날아갔다고 판단했고, 깊은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그는 미드에게 날카로운 편지를 썼습니다. 칼 샌드버그의 링컨 전기에 따르면, 링컨은 "격한 표현이 담긴 편지를 쓴 뒤 난로에 던져 넣는 것이 때때로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미드에게 보내려던 그 편지도 부치지 않았습니다. 게티즈버그의 위대한 승리 직후에 승리를 이끈 장군을 질책하면 군의 사기가 무너질 것이라는 판단이었습니다. 링컨 사후 그의 서류 더미에서 이 편지가 발견되었습니다. 봉투에는 "미드 장군에게. 보내지 않음, 서명하지 않음"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링컨의 뜨거운 편지 습관은 감정 조절을 넘어서는 리더십의 원칙이었습니다. 그는 분노를 느꼈을 때 그 감정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억누르거나 없는 척하지 않았습니다. 종이 위에 감정을 온전히 풀어놓음으로써 감정의 실체를 직면했습니다. UCLA에서 수행된 뇌 영상 연구에 따르면,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행위 자체가 뇌의 편도체 활성화를 낮추어 감정의 강도를 줄여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링컨은 160년 전에 이미 이 원리를 체득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분노를 글로 쓰는 행위는 분노를 자신의 바깥에 놓는 행위입니다. 바깥에 놓인 분노는 관찰의 대상이 됩니다. 관찰할 수 있으면 통제할 수 있습니다.

링컨에게는 적의 논리를 먼저 인정하는 습관도 있었습니다. 1858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스티븐 더글러스와 벌인 유명한 연속 토론회에서, 링컨은 상대의 주장 중에서 일리가 있는 부분을 먼저 짚어주었습니다. 상대를 바보로 만들어서 이기는 토론은 청중의 박수를 받을 수 있지만, 상대를 영원한 적으로 만듭니다. 상대의 논리 안에서 합리적인 부분을 인정해준 뒤에 반박하면, 패배한 상대도 모욕감 없이 물러설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된 뒤에는 자신을 조롱하고 무시했던 정적들을 내각에 발탁하여 이른바 "라이벌 내각(Team of Rivals)"을 구성했습니다. 국무장관으로 발탁된 윌리엄 수어드는 공화당 대선 경선에서 링컨에게 패한 뒤 그를 "일리노이의 시골뜨기"라고 비웃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링컨은 그런 수어드를 핵심 참모로 품었고, 수어드는 훗날 링컨에게 깊이 감복하여 충실한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링컨이 암살당했을 때 수어드는 병상에서 통곡했다고 합니다. 자신을 비웃었던 사람이 자신을 위해 우는 장면. 이것은 링컨의 언어가 만들어낸 관계의 결실이었습니다.

링컨의 언어에서 배울 것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입니다. 상대를 이기려는 말이 아니라 상대를 이해하려는 말, 자신의 정당함을 증명하려는 말이 아니라 함께 나아갈 길을 찾으려는 말. 정치 토론회에서 상대 후보의 약점을 신랄하게 공격하면 지지자들은 환호합니다. 그러나 토론이 끝난 뒤 상대 후보의 지지자들은 영원한 적이 됩니다. 반대로, 상대 후보의 장점을 인정한 뒤 자신의 대안이 더 나은 이유를 차분히 설명하면 당장의 박수는 줄어도, 상대 진영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는 사람이 생깁니다. 한 번의 토론에서 이기는 것보다, 한 명의 적을 줄이는 것이 선거에서는 더 큰 자산입니다.

법률가의 언어와 정치가의 언어는 뿌리가 같되 열매가 다릅니다. 법률가의 언어는 정밀합니다. 한 글자의 차이로 판결이 뒤바뀌는 세계에서 훈련된 언어입니다. 조문의 빈틈을 파고드는 날카로움, 논리적 허점을 용서 없이 찌르는 예리함이 법률가 언어의 미덕입니다. 검사 시절 13년간 수사 기록을 작성하고 공소장을 쓰던 그 정밀한 언어 감각은 소중한 자산입니다. 복잡한 사안을 정확하게 정리하고, 모호한 표현을 배제하며, 논리의 사슬을 빈틈없이 엮는 능력은 어디에서나 빛을 발합니다.

그러나 정치의 언어는 정밀함만으로 부족합니다. 정치의 언어에는 온기가 있어야 합니다. 법정에서는 논리로 판사를 설득하지만, 광장에서는 이야기로 시민을 움직여야 합니다. 데이터와 법조문으로 설득되는 사람은 소수이고, 자기 삶의 고통이 인정받았다는 느낌으로 마음을 여는 사람이 다수입니다. 법률가의 메스로 문제를 정확히 절개하되, 정치가의 따뜻한 손으로 상처를 감싸주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이 균형을 찾는 훈련은 의식적으로 해야 합니다. 법률가의 습관이 20년 넘게 몸에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의식하지 않으면 사람 앞에서도 조서를 읽듯 말하게 됩니다. 서문시장에서 만난 어머니의 하소연에 법률적 해석으로 대응하면, 어머니는 이해받지 못했다는 느낌을 안고 돌아섭니다.

보수가 재건이 필요할 정도로 부끄러운 수준이라는 진단은 정확합니다. 12·3 비상계엄이라는 전대미문의 사태를 겪고, 대통령이 탄핵되는 상황까지 온 정당이 반성하지 않으면 국민으로부터 영원히 외면받을 것입니다. 이 진단의 정확성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문제는 진단 이후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지적하는 것은 검사의 일이고, 어떻게 고칠 것인지 제시하는 것은 정치인의 일입니다. 진단에서 멈추면 비평가입니다. 처방까지 가야 지도자입니다. 보수의 재건을 위해 어떤 사람들을 모으고, 어떤 정책을 만들고, 어떤 조직을 세울 것인지 구체적인 청사진이 진단 뒤에 와야 합니다. 진단의 언어는 날카로워야 하지만, 처방의 언어는 따뜻해야 합니다. 보수를 재건하자고 말할 때, 보수의 가치를 믿어온 수백만 당원과 지지자들이 "나도 함께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아야 합니다. 부끄러움을 지적하는 것에서 끝나면, 지지자들은 자신이 부끄러운 존재로 규정당했다고 느끼게 됩니다. 세종이 최만리의 상소를 반박하면서도 최만리를 파멸시키지 않은 것처럼, 진단과 처방 사이에는 상대를 품어 안는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대통령의 언어는 날카롭되 따뜻해야 하고, 정확하되 여유가 있어야 하고, 단호하되 겸손해야 합니다. 이 모순적 요구를 하나의 문장 안에 녹여내는 것이 대통령의 품격입니다.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 의견을 들으면서도 훈민정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반대에 대해서는 2년 5개월에 걸친 학술적 답변서인 해례본으로 응수했습니다. 링컨은 적의 논리를 인정하면서도 노예 해방의 원칙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분노의 편지를 쓰되 보내지 않아 장군을 잃지 않았습니다. 원칙은 지키되 표현은 부드럽게, 확신은 갖되 독선은 버리는 것. 그 간격 안에 대통령의 언어가 살아 숨 쉽니다.

말은 한번 뱉으면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링컨이 편지를 서랍에 넣어둔 것처럼, SNS에 올리려는 글을 임시 저장함에 넣어두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하루가 지난 뒤에 다시 읽어보면 열에 아홉은 올리지 않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 이릅니다. 한마디의 신랄한 발언이 가져다주는 순간의 통쾌함보다, 천 마디의 신중한 침묵이 쌓아올리는 신뢰의 무게가 훨씬 큽니다. 여의도와 서초동의 회의실에서, 텔레비전 토론회의 카메라 앞에서, 새벽 4시에 손에 쥔 스마트폰 화면 앞에서, 말하기 전에 링컨의 서랍을 떠올리는 습관이 대통령의 품격을 만드는 일상의 훈련입니다.

정치인의 품격은 말하는 순간이 아니라 말하지 않는 순간에 드러납니다.


22. 사람을 통해 시대를 바꾼 리더들이 남긴 것

1783년 12월 23일, 미국 메릴랜드주 애나폴리스의 주 의사당에서 짧은 의식이 열렸습니다.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륙군 사령관 조지 워싱턴이 연합의회에 군통수권을 반납하는 자리였습니다. 의회 의원들과 방청객들 앞에서 워싱턴은 짧은 연설을 읽었습니다. 전쟁을 함께 치른 장교들에 대한 감사, 나라의 미래에 대한 기원, 그리고 의회의 권위에 대한 존중을 담은 말이었습니다. 연설문을 읽는 동안 워싱턴의 손이 떨렸다고 목격자들은 기록했습니다. 군복 차림의 사령관이 임명장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순간, 의사당 안의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워싱턴 자신도 울었다고 합니다. 8년간 전장에서 부하들과 생사를 함께한 사람이 그 무게를 내려놓는 순간의 떨림이었습니다.

이 장면이 역사적인 이유는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았느냐에 있습니다. 8년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령관이 그 군사력을 이용해 왕좌에 오르지 않은 것입니다. 당시 세계 어느 곳에서든, 전쟁 영웅이 군대를 손에 쥔 채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습니다. 로마의 카이사르가 그랬고, 영국의 크롬웰이 그랬고, 이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그렇게 했습니다. 워싱턴도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군대는 그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했습니다. 독립전쟁 막바지인 1783년 3월, 뉴버그에 주둔한 장교들이 의회를 상대로 봉급 미지급에 항의하며 군사 쿠데타를 모의했습니다. 워싱턴이 장교들 앞에 나타나 연설로 그들을 설득하여 진정시켰습니다. 안경을 꺼내 쓰면서 "이 나라를 위해 봉사하다 보니 머리만 센 것이 아니라 눈까지 어두워졌습니다"라고 말하자 강경파 장교들이 울음을 터뜨렸다고 전해집니다. 그 정도로 워싱턴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왕이 되고 싶었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워싱턴은 버지니아의 마운트 버논 농장으로 돌아갔습니다. 밭을 갈고 포도원을 가꾸는 농부의 삶으로 복귀한 것입니다. 대서양 건너편의 영국 국왕 조지 3세는 이 소식을 듣고 "그가 정말로 군대를 해산하고 농장으로 돌아간다면, 그는 이 시대에서 더없이 위대한 사람일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군주가 권력을 자발적으로 반납하는 장면에 감탄한 것입니다. 당대의 절대 군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워싱턴의 선택은, 정치사에서 거의 유일무이한 자발적 권력 이양이었습니다.

워싱턴의 자발적 귀향이 만들어낸 결과는 그가 왕좌에 올랐더라면 얻었을 어떤 것보다 거대했습니다. 미국이라는 신생 공화국에 민간 통치의 전통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군인이 권력을 쥐는 것이 아니라, 선출된 민간인이 권력을 행사하고 군인은 복종한다는 원칙이 워싱턴 한 사람의 선택으로 확립되었습니다. 이후 미국의 역사에서 어떤 장군도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남미나 아프리카, 아시아의 수많은 나라에서 군사 쿠데타가 반복되고, 전쟁 영웅이 독재자로 변모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과 날카롭게 대비됩니다. 대한민국 역시 이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6년 뒤인 1789년, 워싱턴은 초대 대통령으로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를 받아 선출되었습니다. 권력을 움켜쥐지 않았기 때문에 더 큰 권력이 돌아온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칼을 내려놓은 사람에게 국민이 기꺼이 나라를 맡긴 것입니다. 두 번의 임기를 마친 뒤 세 번째 임기를 할 수 있었지만 거부했습니다. 다시 마운트 버논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전례는 미국 대통령의 임기 제한 전통으로 이어져, 150년 뒤인 1951년 수정헌법 제22조로 공식 법제화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선택이 한 나라의 헌법이 된 것입니다.

권력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에게 사람이 모이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 사람 곁에 있으면 자신이 도구로 소비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움켜쥐는 리더의 주변에서는 모든 사람이 권력 유지의 부품이 됩니다. 부품의 수명은 유용성이 사라지는 순간 끝납니다. 리더가 자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 부하를 방패로 쓰고, 이용 가치가 사라지면 버리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은 자기 차례가 올까 두려워하며 일합니다. 두려움 속에서 일하는 사람은 시키는 것만 합니다. 자발적 헌신은 사라지고, 눈치만 남습니다. 반면 권력을 내려놓을 줄 아는 리더의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리더의 도구가 아니라 함께 일하는 동료가 됩니다. 동료 관계는 유용성과 무관하게 지속됩니다. 리더가 물러난 뒤에도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것이 리더십의 진짜 증거입니다.

공을 나누는 방식이 리더의 그릇을 보여줍니다. "내가 해냈다"고 말하는 리더 아래서는 구성원들이 자신의 기여를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밤을 새워 보고서를 쓰고, 주말에 지역구를 돌고, 비난의 화살을 온몸으로 막아냈는데, 성과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장에서는 리더 혼자 카메라 앞에 섭니다. 한 번은 참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가 되면 서운함이 쌓이고, 네 번째가 되면 마음이 떠납니다. 앞 장에서 다루었듯이, 사람이 떠나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소외와 불공정이 켜켜이 쌓인 결과입니다.

"우리가 해냈다"고 말하는 리더 아래서는 구성원들이 승리의 주인공이라고 느낍니다. 자기가 주인공인 이야기에서 누가 이탈하겠습니까. 워싱턴이 애나폴리스 연설에서 함께 싸운 장교들에 대한 감사를 먼저 말한 것은 이 원리를 체득한 사람의 행동이었습니다. 승리의 공을 부하들에게 돌린 것입니다. 독립전쟁 8년 동안 워싱턴은 수많은 패배를 겪었습니다. 뉴욕에서 밀려났고, 뉴저지에서 쫓겼고, 밸리 포지의 혹독한 겨울에는 병사들이 맨발로 눈밭을 걸었습니다. 패배할 때마다 워싱턴은 책임을 자기 어깨에 짊어졌습니다. 부하 장군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대신, 의회에 지원을 요청하고 자신의 작전을 수정했습니다. 패배의 책임은 자기가 지고, 승리의 공은 부하에게 돌리는 것. 말로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승리의 순간에 카메라 앞에 서고 싶은 유혹은 본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 유혹을 이겨내고 뒤로 물러서서 동료들을 앞으로 내세우는 데에는 의지력이 필요합니다.

공을 나누는 것에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자신이 쌓아올린 성취의 일부를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돌린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감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언론의 주목을 받아야 하고, 유권자에게 자신의 성과를 알려야 하는 정치인에게 이것은 고통스러운 선택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공을 나눌수록 사람들의 충성심은 깊어지고, 깊어진 충성심은 다음 선거에서 더 큰 승리로 돌아옵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결국 더 많이 받는 길이라는 산술은 정치에서도 유효합니다.

진짜 공을 나누는 것은 카메라가 꺼진 뒤에 일어납니다. 기자회견장의 수사보다 중요한 것은 인사에서, 예산 배분에서, 정책 결정 과정에서 누구의 의견을 반영하고 누구의 공로를 기록하느냐 하는 일상의 실천입니다. 입으로 "우리가 해냈다"고 말하면서 인사권은 독점하는 리더를 사람들은 금세 간파합니다.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감지하는 데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예민합니다. 회의 석상에서 누군가의 아이디어를 채택할 때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의 이름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것, 성과 보고서에 실무자의 기여를 구체적으로 기재하는 것, 인사 발령에서 묵묵히 일한 사람을 빠뜨리지 않는 것. 이런 소소한 행위의 축적이 조직의 충성심을 만듭니다.

리더 한 사람의 관계 방식이 한 나라의 정치 문화를 만듭니다. 워싱턴이 권력을 자발적으로 반납한 전례가 미국의 민주주의 전통을 형성한 것처럼, 리더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그 조직의 문화를 결정합니다. 부하를 도구로 쓰고 버리는 리더 아래서는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서로를 도구로 쓰려는 문화가 퍼집니다. 약한 사람을 밟고 올라서는 것이 출세의 법칙이라고 학습합니다. 부하를 동료로 존중하고 공을 나누는 리더 아래서는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협력과 나눔의 문화가 자생합니다. 동료의 성공이 나의 위협이 아니라 진영 전체의 자산이라고 인식하게 됩니다. 정당 대표 한 사람의 관계 방식이 당 전체의 문화를 바꿀 수 있고, 대통령 한 사람의 관계 방식이 정부 전체의 문화를, 나아가 국가 전체의 정치 문화를 바꿀 수 있습니다.

한국 정치에서 "사람을 남기는 리더"가 드물었던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5년 단임 대통령제 아래서 권력의 시간이 짧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짧은 시간 안에 성과를 내야 하니 사람을 키울 여유가 없었습니다. 임기가 끝나면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는 급격한 권력 축소를 경험했고, 곁에 있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 패턴이 반복되면서 한국 정치에는 "권력은 한철이니 있을 때 써야 한다"는 단기적 사고가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단기적 사고가 사람을 도구로 만들고, 정치를 천박하게 만든 원인입니다. 긴 호흡으로 사람을 키우고, 권력이 사라진 뒤에도 유지되는 관계를 쌓는 것. 그것이 이 악순환을 끊는 출발점입니다.

대한민국 보수 정치는 지금 뼈를 깎는 자기 반성의 시간 앞에 서 있습니다. 비상계엄이라는 헌정 질서의 파괴가 보수의 이름으로 벌어졌고, 그 책임은 보수 진영 전체에 무겁게 내려앉았습니다. 이 무게를 벗어나는 길은 새로운 정책이나 새로운 이미지가 아닙니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보수의 재건은 사람의 재건에서 시작됩니다.

당원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지역구 주민의 이름을 기억하고, 지난번에 아프다고 했던 어머니의 안부를 묻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거창한 비전 선언보다, 마주 앉은 한 사람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듣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재건의 첫 걸음입니다. 거대한 담론은 사람의 마음을 열지 못합니다. 구체적인 관심이 마음을 엽니다. 이름을 불러주는 것, 지난 대화를 기억해주는 것, 약속한 것을 지키는 것. 이 작은 것들이 쌓여서 신뢰가 됩니다. 워싱턴이 뉴버그에서 안경을 꺼내 쓰며 보여준 한 순간의 솔직함이 쿠데타를 막았듯이, 리더의 진심어린 작은 행동 하나가 조직 전체의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공을 나누는 리더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일상의 훈련이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 자기 진영의 누군가가 잘한 일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국회 본회의에서 동료 의원의 질의가 훌륭했다면 복도에서 "오늘 질의 잘 들었습니다"라고 한마디 건네는 것. 보좌관이 밤을 새워 준비한 자료가 효과를 발휘했다면 그 자리에서 이름을 언급하며 감사를 표하는 것. 이런 습관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수년간 쌓이면, 그 사람 주변에는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의 두꺼운 층이 형성됩니다. 이 층이 바로 대통령의 자리까지 밀어올리는 동력입니다.

당대표, 제명이라는 이력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이 곁에 있었고, 어떤 사람들이 남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력서에 적힌 직함의 목록이 아니라, 전화기가 울리지 않는 밤에도 찾아와주는 사람의 숫자가 정치인의 진짜 자산입니다. 프롤로그에서 던졌던 질문이 여기서 다시 돌아옵니다. 당신의 전화기에는 누가 남았습니까. 그 사람은 왜 남았습니까.

조조는 적의 편지를 태워 적을 아군으로 만들었습니다. 만델라는 간수를 취임식에 초대해 원수를 친구로 만들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40년을 투자해 후계자를 키우다 실패하고 또 실패했지만 끝내 제국의 평화로운 이전을 완성했습니다. 세종은 반대하는 신하들의 상소를 기록으로 남기면서도 훈민정음을 완성했습니다. 링컨은 분노의 편지를 쓰되 보내지 않아 장군을 잃지 않았습니다. 워싱턴은 권력을 내려놓아 더 큰 권력을 얻었습니다.

이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실은 하나입니다. 사람을 얻는 것이 권력을 얻는 것보다 어렵고, 사람을 지키는 것이 권력을 지키는 것보다 귀하며, 사람을 남기는 것이 권력을 남기는 것보다 오래간다는 것입니다. 권력은 유한합니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고, 당대표의 임기는 2년입니다. 그 시간이 지나면 권력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갑니다. 그러나 사람은 남습니다. 함께 일한 기억, 함께 위기를 넘긴 유대, 함께 승리를 나눈 감격은 임기가 끝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다음 도전의 자양분이 됩니다.

대한민국에는 사람을 도구로 쓰고 버리는 정치가 오래 계속되었습니다. 사람을 얻고, 사람을 지키고, 사람을 남기는 정치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 시작점에 서 있는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를 지켜보는 눈이 있습니다.


에필로그

에필로그: "아이 윌 비 백" — 돌아오겠다는 말의 무게

1962년 11월, 리처드 닉슨은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패배한 뒤 기자회견장에 섰습니다. 얼굴에는 이틀째 수염이 자라 있었고,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습니다. 그는 기자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닉슨을 차고 다닐 수 없을 겁니다. 이것이 마지막 기자회견이니까요." 방송을 지켜본 정치 평론가들은 닉슨의 정치 생명이 끝났다고 썼습니다. ABC 방송은 그날 밤 '리처드 닉슨의 정치적 사망 기사(The Political Obituary of Richard Nixon)'라는 제목의 특별 프로그램을 편성했습니다.

여섯 해 뒤인 1968년 11월, 닉슨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 여섯 해 동안 닉슨은 무엇을 했습니까. 뉴욕으로 이사하여 로펌에서 일하면서 외교 전문지에 기고했습니다. 세계 곳곳을 돌며 각국 지도자들을 만났습니다. 공화당의 중간선거를 도우며 전국의 후보들에게 선거 자금을 보냈고, 그 후보들의 지역구에 직접 가서 연설했습니다. 1966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하원 47석을 되찾았을 때, 그 승리에 기여한 후보 상당수가 닉슨에게 빚을 졌습니다. 닉슨은 정치적 사망 선고를 받은 뒤 여섯 해 동안 사람을 한 명씩 쌓아 올린 것입니다.

돌아오겠다는 말은 쉽습니다.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렵습니다.

닉슨만이 아닙니다. 이 책에서 다룬 정치 지도자들의 궤적에는 하나의 공통된 패턴이 있습니다. 권력을 잃은 뒤 다시 일어선 사람들은, 떨어져 있는 동안 한 가지 일을 했습니다. 사람을 만났습니다. 덩샤오핑은 세 번째로 숙청당한 뒤에도 지방 간부들과의 서신을 끊지 않았습니다. 김대중은 감옥과 망명지에서 편지를 쓰고 또 썼습니다. 처칠은 황야의 시대에 글을 쓰면서 동시에 반(反)유화정책 소수파 의원들과 모임을 이어갔습니다. 이들이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복수심이나 야망 때문이 아닙니다.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관계의 실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구별이 필요합니다. 관계의 실을 놓지 않는다는 것과 복귀를 위해 사람을 관리한다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상대가 느낍니다. 후자도 상대가 느낍니다. 차이는 목적의 유무에 있습니다. 편지를 쓸 때, 그 편지가 언젠가 표로 돌아올 것을 계산하며 쓰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가 궁금해서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받는 쪽은 그 차이를 압니다. 글씨의 온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스물두 개의 장에 걸쳐 정치인이 사람을 얻고 잃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링컨의 내각, 만델라의 취임식, 메르켈의 침묵, 세종의 인사, 조조의 불태운 편지들. 시대도 다르고 대륙도 다르지만, 이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문장이 있습니다.

권력은 사람에게서 오고, 사람에게로 돌아갑니다.

이 문장은 양방향으로 읽어야 합니다. 사람에게서 온다는 것은, 권력의 원천이 제도나 직함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신뢰라는 뜻입니다. 사람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권력을 쥔 자가 내리는 결정이 결국 누군가의 일상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이 순환을 이해하는 정치인은 권력을 도구로 봅니다. 순환을 잊은 정치인은 권력을 소유물로 착각합니다. 도구는 쓰고 나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소유물은 빼앗기면 분노합니다.

조지 워싱턴이 두 번의 임기를 마치고 마운트버넌 농장으로 돌아간 1797년 3월,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최고 권력자가 자발적으로 물러난 전례는 없었습니다. 왕들은 죽을 때까지 왕좌에 앉았고, 혁명가들은 새로운 왕이 되었습니다. 워싱턴은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그가 떠나는 날, 당시 미국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존 애덤스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취임식장에서 사람들의 눈물은 새 대통령이 아니라 떠나는 사람을 향해 있었다고.

권력을 내려놓은 사람에게 사람들이 더 깊은 존경을 보내는 이유가 있습니다. 떠날 줄 아는 사람은, 돌아올 자격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리에 집착하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충성하지 않습니다. 자리 없이도 같은 사람인 누군가에게,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모입니다.

"아이 윌 비 백(I will be back)."

이 문장은 영화 속 대사로 익숙하지만, 정치의 세계에서 이 말을 입 밖에 꺼낸 사람은 그 무게를 감당해야 합니다. 돌아오겠다는 말은 약속입니다. 약속에는 두 가지 조건이 붙습니다. 하나는 돌아올 때 무엇을 가지고 올 것인가입니다. 여섯 해 전과 똑같은 사람이 돌아온다면 돌아올 이유가 없습니다. 닉슨은 외교 전문가로 변모하여 돌아왔고,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이라는 설계도를 품고 돌아왔습니다. 김대중은 아시아 민주주의의 설계자로 돌아왔습니다. 빈손으로 돌아온 정치인에게 사람들은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떠나 있는 동안 어떤 사람으로 살았는가입니다. 이것은 가지고 돌아올 정책이나 비전보다 사람들이 먼저 살피는 것입니다. 겨울 동안 시장 골목을 걸었는가, 도서관에 앉아 공부했는가, 자기를 밀어낸 사람들을 원망했는가 용서했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만 증명됩니다. 사람들은 기자회견의 문장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겨울 동안의 발자국을 기억합니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독자에게 한 가지만 남겨 두겠습니다.

정치인이 사람을 얻는 방법은 결국 하나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직함이 있을 때도, 없을 때도, 같은 태도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술이 아니라 체질입니다. 체질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방법'이라고 썼지만, 실은 방법이라 부르기 어려운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방법을 넘어선 태도, 태도를 넘어선 존재 방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돌아오겠다는 말의 무게는, 그 말을 한 사람이 겨울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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