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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7장 득표 1위, 무소속 초선의 등장
유리 천장을 넘어서
제2부 등장 — 당선과 방랑
7장 득표 1위, 무소속 초선의 등장
김경진
1993년 7월 18일. 일본 전역에서 제40회 중의원 총선거가 치러졌습니다. 그 선거는 전후 일본 정치사의 획기적 전환점이 됩니다. 38년간 정권을 유지해온 자민당이 과반수를 잃었고, 8개 정당이 연립해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내각이 탄생했습니다. 55년 체제(55年体制)의 붕괴. 일본 정치의 지각이 흔들린 해였습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나라현 전현구(奈良県全県区) 개표 결과가 나왔습니다. 다카이치 사나에, 무소속. 득표 1위. 당선.
어떻게 이 결과가 가능했는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1993년 선거 직전의 일본이 어떤 상태였는지를 봐야 합니다.
그해 6월, 자민당 정권이 쥐고 있던 정치 개혁 법안이 국회에서 부결됐습니다. 그 직후 내각 불신임안이 제출됐고, 미야자와 기이치(宮沢喜一) 총리는 중의원을 해산했습니다. 불신임안에 찬성한 것은 야당만이 아니었습니다. 자민당 소속이면서 불신임에 가담한 의원이 39명이었습니다.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와 하타 쓰토무(羽田孜)가 이끄는 그룹이었습니다. 그들은 곧 자민당을 탈당해 신생당(新生党)을 만들었습니다. 다케무라 마사요시(武村正義)를 중심으로 한 그룹은 신당 사키가케(新党さきがけ)를 창당했습니다.
정치 지형이 유례없이 복잡해졌습니다. 기성 자민당과 사회당이 양 기둥을 이루었던 "55년 체제"가 안에서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선거는 그 혼돈 속에서 치러졌습니다. 자민당은 여전히 최다 의석을 얻었지만 과반수에 못 미쳤습니다. 223석. 연립 정권을 피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리고 연립의 상대는 자민당이 아닌 다른 정당들이었습니다.
나라현 전현구는 당시 중선거구 제도 아래 정수 5명을 뽑는 선거구였습니다. 자민당, 사회당, 공명당, 그리고 새로 생긴 신생당과 사키가케의 후보들이 뒤섞여 경쟁했습니다. 그 안에서 조직도, 자금도, 당의 후광도 없는 32살의 무소속 여성이 가장 많은 표를 얻었습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 답의 첫 번째는 얼굴 알리기였습니다. TV 출연이 만들어준 얼굴. 아침 프로그램 캐스터, 시사 해설자. 나라현 유권자들에게 '다카이치 사나에'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았습니다. 동경의 대상은 아니어도, 화면에서 봐온 얼굴이었습니다. 선거 운동에서 처음 만나는 후보와 이미 알고 있는 얼굴 사이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발품이었습니다. 선거 전부터 지역구를 돌았습니다. 마을 행사, 지역 모임, 상점가. 악수하고, 인사하고, 이름을 기억했습니다. 아버지가 편지에 적은 조언, "악수와 목례를 잊지 마라"를 문자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기성 조직을 갖춘 후보들이 조직에 기대는 동안, 그녀는 발로 뛰었습니다.
세 번째는 1993년이라는 특수한 시대 조건이었습니다. 기성 정당들이 일제히 흔들리는 상황에서, 기성 정당의 후보가 아닌 신선한 얼굴이 오히려 유리할 수 있었습니다. 유권자들은 정치 쇄신을 원했고, 무소속 신인 여성은 그 심리에 부합했습니다. "변화를 원한다면 조직과 무관한 사람에게 표를 주어라." 그 심리가 개표 결과에 나타났습니다.
개표가 끝났을 때, 다카이치는 나라현 전현구에서 최다 득표를 기록했습니다. 자민당 현직 의원들, 사회당 후보들, 신당 후보들을 모두 제치고. 32살의 무소속 신인이 5명 정수 안에서 1등으로 들어왔습니다.
당선의 실감이 오는 데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릅니다. 개표 결과가 확인되던 그 밤, 선거 사무소에 모인 사람들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지는 짐작만 할 수 있습니다. 조직도 자금도 없이, 손으로 만든 선거 운동이 결실을 맺은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쁨 뒤에 바로 현실이 기다렸습니다.
당선 직후부터 정치적 선택의 압력이 밀려왔습니다. 신당 사키가케였습니다. 사키가케는 선거 전에 다카이치에게 공인 신청을 타진했습니다. 다카이치는 공인을 신청했지만, 사키가케 측이 거부했습니다. 이유는 공개된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다카이치가 사키가케의 노선에 완전히 부합하지 않는다는 판단이었거나, 다른 정치적 계산이 있었을 것입니다.
공인을 거부당하고 나서도 출마는 강행했습니다. 그리고 이겼습니다. 당선 후 사키가케는 다시 다카이치에게 접근했습니다. 이번에는 합류를 권유했습니다. 당선한 의원을 흡수하는 것이 창당 초기 신당으로서 의석 수를 늘리는 데 도움이 됐기 때문입니다.
다카이치는 사키가케의 합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후에 그녀가 한 발언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키가케 측이 합류 조건으로 수상 지명 투표에서 특정 후보에게 투표할 것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연립 여당이 내세우는 호소카와 모리히로에게 투표하라는 압력이었습니다.
다카이치는 그 조건을 거부했습니다.
1993년 8월, 국회에서 수상 지명 투표가 실시됐습니다. 다카이치는 자민당 총재 코노 요헤이(河野洋平)에게 표를 던졌습니다. 자민당 야당의 총재에게 표를 던진 무소속 초선 의원.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어차피 자민당이 집권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왜 자민당 총재에게 투표했는가.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해석됩니다. 하나는 이념적 친화성이었습니다. 다카이치는 보수적 가치관을 가졌습니다. 사키가케가 추진한 정치 개혁 방향보다는 자민당의 보수적 노선에 더 가까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독립성의 표현이었습니다. 사키가케의 조건부 지원을 거부한 이상,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대로 투표하는 것이 일관된 행동이었습니다. 집단의 압력에 굴하지 않겠다는 원칙.
결과적으로 호소카와가 총리가 됐습니다. 자민당이 야당이 됐습니다. 다카이치가 던진 코노 요헤이 표는 결과를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투표 행위는 다카이치가 어떤 정치인인지를 보여주는 첫 번째 공개적 신호였습니다. 외부 압력보다 자신의 판단을 앞세우는 사람.
초선 의원의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자민당도 아니고, 사회당도 아니고, 연립 여당의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은 무소속 의원이었습니다. 국회 안에서 위원회 배정도 제한적이었고, 정보를 공유받는 네트워크에서도 바깥에 있었습니다.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혼자 공부하고, 혼자 자료를 모으고, 혼자 판단해야 했습니다.
국회 의원이 되었다는 것의 실질적 의미를 처음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의원이 하는 일은 선거 운동과 전혀 다릅니다. 법안을 검토하고, 예산안을 파악하고, 위원회에서 관료들을 상대로 질의를 합니다. 관료 조직의 작동 방식을 이해해야 합니다. 선배 의원들에게서 의정 활동의 요령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다카이치에게는 파벌이 없었고, 선배 의원이 없었고, 정당의 지원도 없었습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 선택의 기로가 다가왔습니다. 무소속으로 계속 갈 것인가, 어느 정당에 합류할 것인가. 1990년대 중반 일본 정치는 정당들이 분열하고 합쳐지기를 반복하는 시기였습니다. 신생당, 공명당, 민사당이 합쳐 신진당(新進党)이 됐습니다. 다카이치는 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름의 경로를 걸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1994년, 자유당(自由党) 창당에 참여했고, 이어 1994년 말 신진당(新進党) 창당에 가담했습니다. 처음의 무소속 신념보다 정치적 생존이 우선됐습니다. 단독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적었습니다. 그러나 신진당 안에서도 그녀는 독자적인 색깔을 유지했습니다.
1993년의 당선이 가진 역사적 의미를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선 사실 자체보다, 그 방식이 중요합니다. 세습도 없이, 후원회도 없이, 정당의 공천도 없이 최다 득표로 당선됐다는 것. 일본 정치에서 이런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대부분의 신인 의원은 정당의 공천을 받아 조직 선거로 당선됩니다. 또는 부모나 친척이 의원이어서 지역 기반을 물려받습니다. 다카이치는 두 가지 모두 없었습니다.
그 출발점이 이후 그녀의 정치 스타일을 규정했습니다. 독립적 판단. 집단의 논리에 쉽게 굴하지 않는 태도. 때로는 고집스럽게 보이는 원칙의 고수. 이 모든 것의 뿌리가 1993년 나라현 개표소에 있었습니다.
1993년 7월 18일은 일본 현대 정치의 분기점으로 역사에 기록됐습니다. 55년 체제가 끝난 날. 38년의 자민당 지배가 막을 내린 날. 그리고 그날, 조직도 정당도 없는 32살의 여성이 나라현에서 1등으로 국회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누가 그 이름을 기억했겠습니까. 오자와 이치로의 이름이 지면을 채웠습니다. 55년 체제 붕괴가 화제였습니다. 다카이치 사나에는 수십 명의 초선 의원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득표 1위라는 기록은, 이후 수십 년간 그녀가 정치적 역경을 헤쳐나갈 때마다 꺼내드는 자존심의 근거가 됩니다.
세습 의원들이 당연하게 가져오는 지반과 간판과 가방돈을, 그녀는 처음부터 갖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오래 걸렸고, 그래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을 혼자 이겼다는 기억이 바닥에 깔려 있는 한, 어떤 역경도 첫 번째 선거의 무게보다 무겁지 않았습니다.
1993년 당선 이후 수십 년이 지나, 같은 해 초선으로 당선된 동기들의 이름을 돌아보면 그 선거의 역사적 의미가 더 선명해집니다. 1993년 선거 초선 의원들 중에서 이후 일본 총리가 된 사람이 여러 명 나왔습니다. 노다 요시히코, 간 나오토, 아베 신조, 기시다 후미오, 그리고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현대 정치의 주요 인물들이 같은 해, 같은 선거에서 국회에 들어왔습니다. 그 선거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이유입니다.
당선 당시 다카이치의 나이는 32세였습니다.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는 것은 그로부터 32년이 더 걸렸습니다. 그 32년의 이야기가 이 책의 나머지를 채웁니다. 낙선의 수렁, 자객 후보로의 귀환, 입각, 총무대신, 자민당 정조회장, 세 번의 총재 선거 도전. 그 긴 경로의 시작이 1993년 7월 18일 나라현 개표장에서 나온 숫자였습니다. 다카이치 사나에, 득표 1위.
조직 없이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 사실이 이후의 다카이치를 만들었습니다. 정당의 논리보다 자신의 판단을 앞세우는 성향. 세습과 인맥 정치에 대한 본능적 거리감. 유권자에게 직접 말을 거는 방식에 대한 집착. 그 모든 것이 1993년 7월 나라현 전현구 선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