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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프롤로그 AIS 신호가 사라진 밤
2026년 미국 이란 전쟁과 전 세계의 에너지 위기
프롤로그 AIS 신호가 사라진 밤
김경진
2026년 2월 28일 금요일, 오전 10시 35분(이란 표준시). 호르무즈 해협.
선박자동식별장치(AIS, Automatic Identification System)라는 것이 있습니다. 배 한 척 한 척이 자기 위치와 속도, 방향, 화물 정보를 VHF 무선 주파수로 쏴 보내는 장치입니다. 2초에서 10초 간격으로 신호를 보냅니다. 이 신호를 연안 기지국이 잡고, 위성이 잡고, 전 세계 해상교통 관제센터의 모니터 위에 작은 삼각형 아이콘으로 찍힙니다. 초록색은 화물선, 빨간색은 유조선, 파란색은 여객선. 호르무즈 해협 화면에는 보통 하루에 100척 넘는 배들이 개미처럼 줄지어 지나갑니다. 세계 해상 석유 운송의 5분의 1, 액화천연가스(LNG) 교역의 4분의 1이 이 21마일짜리 수로를 통과합니다. 배럴로 치면 하루 2,000만 배럴. 지구가 하루에 소비하는 석유의 20%입니다.
그날 아침, 삼각형들이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세 시간 전, 미국 동부시간으로 2월 28일 새벽 1시 15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에픽 퓨리 작전(Operation Epic Fury)의 최종 실행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란 현지 시간으로 토요일 아침 7시경, 미 중부사령부(CENTCOM) 소속 함정에서 발사된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이 이란 영공에 진입했습니다. 동시에 B-2 스텔스 폭격기와 B-52 전략폭격기가 이란 서부와 중부의 탄도미사일 기지를 타격했습니다. 이스라엘 공군은 약 200대의 전투기로 자체 작전명 '포효하는 사자(Operation Roaring Lion)'를 개시했습니다. 첫 12시간 동안 약 900곳의 목표물이 타격됐습니다.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는 자택 겸 집무실인 '지도부 관저(Leadership House)' 공습으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딸, 사위, 손자, 며느리도 함께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란 국방장관 아지즈 나시르자데, IRGC 사령관 모하마드 팍푸르도 이스라엘 공습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이란 정부는 40일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이슬람혁명수비대(IRGC)는 VHF 채널 16을 통해 해협 일대에 경고를 발령했습니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려는 모든 선박에 대해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런던. 같은 날 오후.
해상보험의 세계에서는 로이즈 합동전쟁위원회(Lloyd's Joint War Committee, JWC)라는 조직이 세계 바다의 위험 지도를 그립니다. JWC가 특정 해역을 '고위험 지역(Listed Area)'으로 지정하면, 그 해역을 통과하는 모든 선박은 기존 보험과 별도로 추가 전쟁위험보험료(Additional War Risk Premium)를 내야 합니다. 평시에 호르무즈 해협의 전쟁위험보험료는 선체 가치의 0.2% 수준이었습니다. 1억 5,000만 달러짜리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한 척이 해협을 한 번 통과하는 데 드는 보험료가 30만 달러 정도였다는 뜻입니다.
2월 28일 오후, 이 숫자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48시간 안에 보험료가 다섯 배로 뛰었습니다. 0.2%가 1%가 됐습니다. 같은 VLCC의 통과 비용이 150만 달러로 올랐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보험 자체가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3월 1일과 2일 사이, 국제P&I클럽(Protection & Indemnity Club) 그룹에 속한 12개 보험사 중 가드(Gard), 스쿨드(Skuld), 노스스탠다드(NorthStandard), 런던P&I클럽, 아메리칸클럽 등이 일제히 72시간 이내 전쟁위험보험 해지 통보를 발송했습니다. 전 세계 해상운송 톤수의 90%를 담보하는 이 보험사들이 페르시아만, 오만만, 이란 영해에 대한 전쟁위험 보장을 취소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보험이 취소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조건으로 재계약이 가능했습니다. 연간 2만 5,000달러이던 보험료가 주당 3만 달러로 바뀐 조건으로. 약 60배의 인상이었습니다. 로이즈마켓협회(LMA)는 나중에 "보험이 취소된 것이 아니라 안전 우려 때문에 선박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기술적으로는 맞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해운업계 입장에서 보면, 보험을 구할 수 없다는 것과 보험료가 60배로 올랐다는 것 사이에 실질적 차이는 없었습니다.
한 그리스 선주의 말이 당시 상황을 압축합니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보험은 지금 없습니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피격될 확률이 너무 높아요. 보험도 없이 그걸 하려면 미친 사람이어야 합니다."
물리적 봉쇄보다 경제적 봉쇄가 먼저 완성된 순간이었습니다.
다시 호르무즈 해협의 AIS 화면으로 돌아갑니다.
2월 27일, 공습 전날, 해협을 통과한 선박은 약 116척이었습니다. 2월 28일, 공습이 시작된 날, 72척으로 줄었습니다. 3월 1일, 보로사(Vortexa) 위성 추적 데이터에 따르면 초대형 유조선 통과는 4척이었습니다. 전날에는 22척이었습니다. 3월 4일, 해협 통과 선박은 5척. 3월 7일, 3척. 3월 8일, 2척. 3월 10일, 2척. 그리고 3월 14일, AIS로 확인된 선박 통과 건수가 양방향 모두 0이 됐습니다. 0척. 개전 이래 처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석유 수송로에서 눈에 보이는 상업 선박 이동이 완전히 멈춘 것입니다.
해협 자체가 텅 빈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만만에는 약 400척의 선박이 떠 있었습니다. 들어가지 못하고, 나오지 못하고, 그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해운사 머스크(Maersk), 하팍로이드(Hapag-Lloyd), CMA CGM, MSC 같은 세계 최대 컨테이너 선사들이 호르무즈 통과 운항을 중단했습니다. 약 140척의 컨테이너선, 46만~47만 TEU 분량의 화물이 걸프 해역에 묶여 있었습니다.
AIS 신호를 끄고 야간에 해협을 통과하려는 선박도 있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주아이마 터미널에서 약 100만 배럴의 원유를 싣고 출항한 한 유조선은 3월 4일경 AIS 신호를 껐습니다. 약 5일간 '암흑 항해(dark transit)'를 한 뒤 3월 9일 오전 7시(UTC)에 신호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위성 레이더(SAR) 영상은 해협 안에서 소수의 선박이 AIS 없이 움직이고 있음을 포착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상적인 해상 운송이 아니었습니다. 목숨을 건 도박이었습니다.
3월 7일, 몰타 국적 화학물질 운반선 프리마(PRIMA)호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다 이란 드론에 피격됐습니다. IRGC는 경고를 무시하고 해협에 진입한 선박을 타격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선원 3명이 실종됐습니다. 개전 이후 3주 동안 합동해양정보센터(JMIC)가 기록한 상업 선박 및 해상 인프라 공격은 23건이었습니다.
GPS 재밍(jamming)과 AIS 신호 교란도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3월 4일 하루에만 44개의 주입 신호 구역(injected signal zone)과 92개의 신호 거부 구역(denial area)이 탐지됐습니다. 1,650척 이상의 선박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후자이라와 오만만 인근에 수백 척의 선박이 디지털 지도상으로는 한 점에 모여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실제 위치와 화면에 표시되는 위치가 달랐습니다. 바다 위에 전자적 안개가 깔린 셈이었습니다.
이란만 바다를 봉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란은 보복에 나섰습니다.
3월 5일까지 이란은 500발 이상의 탄도미사일과 약 2,000기의 드론을 발사했습니다. 발사체의 약 40%는 이스라엘을 향했고, 약 60%는 바레인, 쿠웨이트,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UAE에 주둔한 미군 기지와 걸프 에너지 인프라를 겨냥했습니다. 두바이 제벨알리(Jebel Ali) 항구, 쿠웨이트 캠프 아리프잔, 카타르 알우데이드 공군기지, 바레인 미 해군 지원기지가 타격을 받았습니다. 바레인 마나마의 크라운플라자 호텔에 이란 발사체가 떨어져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카타르의 대규모 천연가스 터미널이 이란 미사일에 피격되면서 정유시설 두 곳이 가동을 멈췄습니다. 카타르에너지(QatarEnergy)는 모든 수출 계약에 대해 불가항력(Force Majeure)을 선언했습니다. 전 세계 LNG 공급의 상당 부분이 하룻밤 사이에 중단 위기에 놓였습니다. UAE 후자이라 항구에서도 드론 관련 화재로 원유 선적이 일시 중단됐습니다.
이라크 남부 유전 지대의 생산량은 하루 약 430만 배럴에서 130만 배럴로 70% 급감했습니다. 수출은 약 80만 배럴까지 떨어졌고, 저장 시설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UAE, 쿠웨이트도 석유를 실어 보낼 배가 없어 생산을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의 집계에 따르면, 3월 10일까지 걸프 산유국들의 석유 생산량은 하루 670만 배럴 이상 감소했고, 3월 12일에는 최소 1,000만 배럴이 사라졌습니다.
IEA 사무총장은 이 상황을 "역사상 가장 큰 글로벌 에너지 안보 위기"라고 규정했습니다.
유가가 움직였습니다.
2월 27일, 전쟁 전날 브렌트유 선물 가격은 배럴당 약 72달러였습니다. 첫 주가 끝나는 3월 6일 목요일까지 약 85달러로 올랐습니다. 18% 상승. 시장은 아직 관망하고 있었습니다. 금요일, 해협 봉쇄가 장기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퍼지면서 7달러 넘게 추가 상승했습니다. 이후 유가는 매주 계단을 올랐습니다. 120달러에 근접하는 순간도 있었고,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고 언급하면 10~15% 급락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시장은 트럼프의 말에 흔들렸습니다. 트레이더들은 이것을 '턱질(jawboning)'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금융시장의 선물 가격과 실제 원유가 거래되는 현물 가격 사이에는 점점 벌어지는 간극이 있었습니다. 중동산 원유의 현물 지표인 두바이유 가격은 2월 27일 대비 76% 올랐습니다. 브렌트 선물의 상승폭인 36%의 두 배가 넘었습니다. 종이 위의 가격과 실제로 배에 실려 항구에 도착하는 기름의 가격이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습니다.
3월 한 달 동안 브렌트유 선물은 약 63% 상승했습니다. 1988년 브렌트 계약이 시작된 이래 최대 월간 상승률이었습니다. 이전 기록은 1990년 9월 걸프전 당시의 46%였습니다. WTI(서부텍사스중질유)도 약 51% 올라 2020년 5월 이후 최대 월간 상승폭을 기록했습니다. WTI는 2022년 7월 이후 처음으로 배럴당 100달러를 넘겼습니다.
3월의 마지막 날, 브렌트유 5월물은 배럴당 118.35달러에 장을 마쳤습니다.
이 책은 그 숫자들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추적합니다.
21마일의 수로가 닫히면서 벌어진 일은 유가 상승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보험 시장의 마비는 해상 운송의 마비로, 해상 운송의 마비는 걸프 산유국의 생산 중단으로, 생산 중단은 저장 시설의 포화로, 저장 시설의 포화는 유전 폐쇄로 이어졌습니다. 석유가 멈추자 비료 원료인 나프타와 암모니아 공급이 막혔습니다. 카타르의 LNG가 멈추자 아시아의 발전소들이 연료 부족에 직면했습니다. 유가가 오르자 항공유가 두 배 넘게 뛰었고, 항공사들이 노선을 축소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닐라의 거리에서 교통체증이 사라졌습니다. 석유의 98%를 중동에서 수입하는 필리핀 정부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태국 정부는 에어컨 설정 온도를 27도 이상으로 올리라는 행정명령을 내렸습니다. 한국에서는 샤워 시간 단축 캠페인이 시작됐습니다. 일본에서는 1973년 석유파동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화장지 사재기 자제를 호소하는 정부 발표가 나왔습니다.
이란은 해협 통과를 완전히 차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국과 연결된 선박, 이란 국적 선박, 그리고 이란과 협상을 마친 일부 선박은 통과가 허용됐습니다. 통과료는 건당 수백만 달러. 결제 통화는 달러가 아니라 위안화였습니다. 미국의 동맹국은 배제되고, 중국은 허용되는 새로운 해상 경제 질서가 21마일의 수로 위에서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은 그날 밤 사라진 AIS 신호에서 시작해서, 그 신호가 사라진 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일들을 따라갑니다.
호르무즈 해협의 물리적 봉쇄가 어떻게 보험 시장의 경제적 봉쇄로 전환됐는지. 유가 급등이 어떻게 비료 위기로, 비료 위기가 어떻게 식량 위기로 번졌는지. 이란이 위안화로 통행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달러 패권에 어떤 균열이 생겼는지. 미국이 시작한 전쟁이 어떻게 미국의 금융 패권을 약화시키는 역설로 이어졌는지. 걸프에서 타오른 불이 우크라이나 드론 전쟁과 어떻게 맞물렸는지. 배럴당 118달러의 기름값이 미국 국내 정치를 어떻게 뒤흔들었는지.
그리고 마지막에는 한국이 있습니다. 에너지의 92%를 수입에 의존하고, 그 수입 경로의 상당 부분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나라. 이 위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있는지.
에너지의 흐름을 따라가면 전쟁의 원인이 보입니다. 전쟁의 결과를 따라가면 에너지 질서의 재편이 보입니다.
AIS 화면의 삼각형이 하나씩 사라지던 그 밤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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