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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6장 57년 묵은 빗장을 열다
한동훈이 대한민국에 남긴 그간의 흔적
6장 57년 묵은 빗장을 열다
국가배상법 개정과 홍정기 일병의 어머니
김경진
57년 묵은 빗장을 열다 — 국가배상법 개정과 한동훈의 약속
1 어머니의 8년
2016년 3월, 육군에 입대한 지 7개월 된 홍정기 일병의 몸에 멍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구토와 두통이 이어졌습니다. 연대 의무중대에서 혈소판 감소를 확인했지만 응급상황이 아니라고 돌려보냈습니다. 같은 날 민간병원에서는 백혈병 가능성이 크니 정밀검사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부대 대대장은 보고를 받고도 상급병원으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증상이 악화되어 사단 의무대 응급실로 실려갔으나 담당 군의관은 활력징후가 정상이라는 판단으로 응급후송을 하지 않았고, 국군춘천병원 외진도 병상이 없다는 이유로 불발되었습니다.
홍정기 일병은 발병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합병증에 걸려, 병명도 제대로 모른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무 살이었습니다.
어머니 박미숙 씨는 군 당국에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벽이었습니다. 이중배상금지. 군인이 직무 중 죽거나 다쳐도 다른 법령에 따라 보상금을 받으면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원칙입니다. 이미 사망보상금을 받았으니, 국가의 잘못을 따지는 배상 소송은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20년을 키워 나라에 보낸 아들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국가의 과실이 명백했습니다. 그런데 법이, 국가가 스스로에게 책임을 묻지 못하게 막고 있었습니다.
2 1967년의 빗장
이 벽은 1967년에 세워졌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군인들이 소송을 통해 배상금을 받게 되자, 재정 부담을 우려한 박정희 정부가 국가배상법을 개정해 순직·공상 군인에게는 보상만 주고 배상 청구를 막았습니다.
1971년 대법원은 이 조항이 위헌이라고 결정했습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1972년 유신헌법을 만들면서 이중배상금지 규정을 아예 헌법에 집어넣었습니다. 대법원이 위헌이라 했으니 법률 수준에서는 뒤집힐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헌법에 못을 박은 것입니다.
이후 반세기. 군인과 경찰은 목숨을 걸고 복무하되, 국가의 잘못으로 죽어도 유족은 정해진 보상금만 받아야 했습니다. 슬픔에 대한 위자료, 국가 과실에 대한 책임 추궁, 그런 것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못살던 시절 재정을 아끼려고 세운 빗장이, 나라가 부유해진 뒤에도 반세기 넘게 군인 유족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3 법무부 장관 한동훈 — "이제는 바뀔 때가 됐습니다"
2023년, 홍정기 일병 유족의 소송은 1심에서 패소했습니다. 국가의 과실은 인정되었지만, 이중배상금지 조항 때문에 배상은 불가능하다는 판결이었습니다. 재판부는 우회적으로 화해권고를 내렸습니다. 국가가 유족에게 2500만 원의 위로금을 지급하고 사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부 소송대리를 맡은 법무부는 현행법상 화해권고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수용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한동훈은 이중배상금지의 문제점에 공감한다며 국가배상법 개정 추진을 약속하고, 정부 입법안을 발의했습니다.
"이제는 바뀔 필요가 있고 그럴 때가 됐다고 판단했습니다. 차제에 국가배상법을 개정해서 유족에게 독자적 위자료를 청구하는 길을 열겠습니다."
법무부 장관은 정부 소송의 대리인입니다.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국가의 편에 서는 것이 직무입니다. 그런데 한동훈은 자기 부처의 소송 상대편인 유족의 손을 들어준 셈이었습니다. 법을 지키되 법이 잘못되었으면 법을 바꾸겠다는 것. 원칙을 지키면서도 원칙 너머의 사람을 보는 것. 그것이 한동훈의 방식이었습니다.
2023년 12월 15일, 홍정기 일병의 어머니 박미숙 씨가 정부과천청사에서 한동훈 장관을 만났습니다. 1시간이 넘는 면담이었습니다.
한동훈은 "어머니께서 고생 많으셨다. 이 법은 어머니가 바꾸시는 것이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국회에서도 이견이 없을 것이라 본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군 사망 사건 유가족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뒤에는 사건 진행 과정을 질문하고 메모했습니다.
"이 법은 어머니가 바꾸시는 것이다." 장관이 유족에게 한 이 말에는, 법을 바꾸는 주체가 정부도 국회도 아닌 피해자 자신이라는 인식이 담겨 있습니다. 정치인이 흔히 하는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와는 결이 다른 말이었습니다.
2023년 10월 24일, 전사·순직 군경 유족이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국가배상법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습니다. 그러나 21대 국회 임기 만료로 법안은 폐기되었습니다.
4 당대표 한동훈 — 약속을 지키다
장관직을 떠난 뒤에도, 당대표가 된 뒤에도 한동훈은 이 약속을 놓지 않았습니다.
2024년 11월 26일, 한동훈은 국회에서 다시 한번 홍정기 일병의 어머니 박미숙 씨를 만났습니다. 장관이 아니라 당대표의 자격이었습니다. 직함은 바뀌었지만 마주 앉은 사람은 같은 어머니였습니다.
한동훈은 "나라가 누구를 배출했느냐는 것 못지않게 누구를 기억하느냐에 따라 품격이 정해진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우리나라가 정말 못살 땐 제대로 예우하고 보상할 만한 여력이 없어 헌법까지 개정해 군인 순직자들에 보상길을 막았고, 그 헌법이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헌법을 개정하지 않더라도 유족의 위자료 청구권은 국가배상법을 개정하면 인정할 수 있다. 너무나 명분이 커 하루빨리 법 개정을 완수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나라의 품격은 누구를 배출했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기억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한 문장에 한동훈이 이 법안에 매달린 이유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의 유족에게 "이미 보상을 받았으니 더 이상의 책임은 없다"고 말하는 나라. 그 나라의 품격을 한동훈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5 2024년 12월 10일 — 57년 만의 변화
2024년 12월 10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가배상법 개정안이 재석 286인 중 찬성 284인, 반대 2인으로 통과되었습니다. 사실상 만장일치였습니다.
개정안의 핵심은 전사·순직한 군인과 경찰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1967년 이래 57년간 유족의 앞을 가로막던 빗장이 열린 것입니다.
같은 날, 군인의 처우를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법안 묶음이 함께 통과되었습니다. 순직 군인과 공무원의 유족 연금 지급 기준을 사후 특진 계급에 맞춰 산정하도록 하는 군인재해보상법과 공무원재해보상법, 공무원연금법 개정안도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군인이 적법한 직무수행 중 고의나 중과실 없이 타인에게 피해를 입힌 경우 형사책임을 감경 또는 면제할 수 있도록 하는 군인의 지위 및 복무에 관한 기본법 개정안, 전사자 유족의 재심사 기한을 120일로 명시한 군인사법 개정안, 용도 폐지된 군사시설 부지를 군인 복지 목적으로 우선 매각할 수 있도록 한 군인복지기본법 개정안도 가결되었습니다.
국가배상법 개정 하나가 아니라, 군인의 삶과 죽음을 둘러싼 제도 전반이 한꺼번에 손질된 것입니다.
6 장관의 약속, 당대표의 이행
이 법안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출발점에 한동훈이 있습니다. 법무부 장관으로서 이중배상금지의 부당함을 인정하고 개정안을 발의한 것이 2023년이었습니다. 21대 국회에서 폐기되자 당대표가 되어 22대 국회에서 다시 밀어붙였습니다. 홍정기 일병의 어머니를 장관 시절 한 번, 당대표 시절 한 번, 두 번 만나 같은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홍정기 일병의 어머니 박미숙 씨는 아들의 죽음 이후 여야 주요 인사들을 만나며 법 개정을 호소하고 다녔습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을 안고 국회를 돌아다니는 어머니. 그 어머니의 호소에 응답하여 법을 바꾼 정치인. 한동훈은 그 어머니에게 "이 법은 어머니가 바꾸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바꾸려는 그 법이 실제로 바뀔 수 있도록, 장관의 자리에서도 당대표의 자리에서도 같은 방향으로 걸었습니다.
나라를 지키다 죽은 군인의 유족이 "내 자식이 개값만도 못하냐"고 울부짖어야 하는 나라. 그 나라의 법을 바꾸는 것은 거대한 정치적 업적이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당연히 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이 57년간 방치되어 있었다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었습니다. 한동훈은 그 방치된 '당연함'을 실행에 옮긴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강강약약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강한 자의 불법에 엄정한 것만이 아니라, 약한 자의 울음에 응답하는 것. 한동훈에게 강강약약은 수사 철학인 동시에 삶의 태도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