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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5장 지적재산권과 창작 생태계의 해체
AI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구조 변화와 대응
5장 지적재산권과 창작 생태계의 해체
김경진
1 "누구의 창작인가": 저작권의 법적, 철학적 미해결
2026년 3월 2일, 미국 연방대법원이 한 장의 그림을 둘러싼 8년간의 싸움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컴퓨터 과학자 스티븐 탈러가 자신의 인공지능 시스템 'DABUS'로 생성한 작품 "최근의 낙원 입구"에 대해 저작권 등록을 요청했고, 저작권청은 거부했고, 연방지방법원은 이를 지지했고, 항소법원도 같은 결론을 냈습니다. 대법원은 상고 자체를 기각했습니다. 인간 저작자 없이는 저작권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다시 한번 확인된 겁니다.
그런데 이 판결이 닫은 문보다 열어젖힌 문이 더 많습니다. 탈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창작 기여를 부인했기 때문에 진 것이지, 인공지능을 보조 도구로 쓴 사람의 권리까지 부정된 건 아닙니다. 프롬프트를 입력하고, 결과물을 골라내고, 수정하는 인간의 개입이 어디서부터 '창작'이 되는지는 여전히 안갯속입니다.
한편 법정 바깥에서는 돈으로 경계선을 긋는 작업이 진행됐습니다. 2025년 9월, Anthropic이 작가들과 15억 달러(약 2조 원) 규모의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약 50만 권의 책에 대해 권당 3,000달러를 지불하기로 한 이 합의는, 불법 도서 사이트에서 수백만 권을 내려받아 모델을 학습시킨 대가였습니다. 뒤이어 유니버설뮤직그룹과 워너뮤직그룹도 AI 음악 생성 업체 Udio와 합의하며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아티스트가 자신의 작품 사용 여부를 선택하는 옵트인(opt-in) 방식이 조건에 포함됐습니다.
2026년 현재 저작권 침해 소송은 70건을 넘겼습니다. 뉴욕타임스 대 OpenAI 소송은 제기된 지 3년째 계류 중이고, 디즈니와 NBCUniversal이 미드저니를 상대로 낸 소송도 진행 중입니다. 법원이 '변형적 사용(transformative use)'의 범위를 어디까지 인정할지에 따라 인공지능 기업의 사업 모델 전체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저작권법이 보호하려 했던 것은 인간의 정신적 노력이었는데, 그 노력의 결과물이 알고리즘의 연료로 쓰이는 현실 앞에서 법은 아직 말을 고르는 중입니다.
2 콘텐츠 제작 비용의 제로 수렴과 창작 보상 구조의 붕괴
숙련된 디자이너가 사흘 걸리던 작업을 이제 프롬프트 한 줄이 3분 만에 해치웁니다. 변호사 두 명이 일주일간 매달리던 계약서 검토를 인공지능이 20분 안에 끝냅니다. 콘텐츠 제작의 한계비용이 거의 영(0)을 향해 떨어지고 있습니다. 김서준 해시드 대표는 "다가오는 30개의 균열"에서 이 현상에 3년 내 실현 확률 90%를 매겼습니다. 네 개의 인공지능 모델이 독립적으로 평가한 수치의 평균이 그랬다는 건, 이 변화가 얼마나 확실하게 다가오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문제는 비용이 사라진 자리에 보상도 함께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과거에는 숙련된 인력이 수일간 매달려야 했던 작업이 전기료 수준의 비용으로 처리되면서, 개별 창작물이 경제적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구조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Polygon이라는 게임 웹사이트는 2025년 AI 기반 콘텐츠 회사 Valnet에 매각되면서 인간 스태프 대부분이 해고됐습니다. 성우들은 인공지능 음성 복제 기술에 맞서 파업을 벌였습니다.
이 상황에는 자본주의 자체를 갉아먹는 역설이 숨어 있습니다. 기업은 비용 절감을 위해 인공지능을 도입하지만, 해고된 노동자는 곧 줄어드는 소비자이기도 합니다. 공급은 무한대로 늘릴 수 있지만, 수요는 인간의 소득에 단단히 묶여 있습니다. 제작비가 0에 수렴하는 세계에서 창작자에게 돌아가는 보상은 노동의 질이 아니라 알고리즘 점유율에 따라 분배됩니다. 창작의 경제학이 근본부터 뒤집히고 있는 겁니다.
3 콘텐츠 과잉 공급: 만드는 비용은 0, 발견되는 비용은 무한대
1830년대 뉴욕에서 벤자민 데이가 신문을 1페니에 팔기 시작했을 때, 독자들은 자신이 고객인 줄 알았습니다. 진짜 상품은 독자들의 주의력(Attention)이었고, 그것은 광고주에게 팔려나갔습니다. 200년 뒤인 지금, 같은 구조가 스마트폰 알림 배지 위에서 작동합니다. 달라진 건 규모뿐입니다.
김서준 대표가 제주에서 열린 해시드 오프사이트에서 확인한 것은 가치 사슬의 역전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려웠고, 배포는 자본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정반대입니다. 만드는 것이 가장 쉬워졌고, 발견되는 것이 가장 어려워졌습니다. 생산 비용이 떨어질수록 선택의 비용은 치솟습니다. 선택의 비용이 높아질수록 평가 구조를 가진 사람이 유리해집니다. 그가 이 항목에 매긴 실현 확률 90%는 30개 균열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였습니다.
누구나 창작자가 될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누구도 발견되기 힘든 환경이 만들어졌습니다. 검색 결과와 추천 목록 상단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지출해야 하는 마케팅 비용은 끝없이 올라갑니다. 2026년 초 기준으로 콘텐츠 마케팅 분야에서는 전통적 검색엔진 최적화(SEO)를 넘어 '생성형 엔진 최적화(GEO)'라는 새로운 전장이 열렸습니다. ChatGPT나 Perplexity 같은 인공지능 검색 엔진이 어떤 브랜드를 언급하느냐가 발견의 새로운 통화가 된 겁니다. 창작물의 가치보다 클릭을 유도하는 능력이, 콘텐츠의 질보다 알고리즘과의 궁합이 생태계를 지배하는 실질적 화폐가 되었습니다.
도구의 해방이 구조의 종속으로 뒤집히는 경계에 우리는 이미 서 있습니다.
4 음악, 미술, 문학 생태계의 근본적 재편
스탠퍼드의 로버트 스턴버그 교수가 던진 경고는 짧고 서늘합니다. "쓰지 않으면 잃는다." 인공지능이 기초적인 문장 쓰기, 배경 채색, 화성학 실습 같은 지루하지만 필수적인 과정들을 대신하면서, 주니어 창작자가 실수하고 배우며 성장할 기회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도제식으로 선배의 지도를 받으며 거장으로 거듭나던 숙련의 통로가 끊기고 있는 겁니다. 미래의 거장이 태어날 토양이 말라가고 있습니다.
2024년 Screen Actors Guild 보고서는 배우들의 디지털 복제본이 이미 제작 현장에서 쓰이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Flawless AI는 배우 동의 하에 디지털 분신을 생성하는 A.R.T. 시스템을 개발했고, 영화사들은 이를 통해 립싱크를 조정하여 여러 언어로 더빙을 완성합니다. 기술은 이미 여기 있습니다. Polygon의 Valnet 매각은 게임 저널리즘에서 벌어진 일이고, 성우 파업은 음성 복제 기술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아티스트와 일러스트레이터들은 자신의 고객을 인공지능에게 빼앗기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창의성은 '재조합적'입니다. 기존 데이터를 새롭게 섞어 그럴듯한 결과물을 내놓지만, 아무도 요청하지 않은 방향으로 뛰어드는 종류의 혁신은 아직 보여주지 못합니다. 밀란 에르하르트가 지적했듯이 인공지능에게는 감정적 에너지와 예측 불가능성이 부족합니다. 인간은 개인적 경험이나 기존 전통에 대한 반발 때문에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하지만, 인공지능은 인간이 새로운 데이터를 입력하지 않는 한 스스로를 재창조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수공예 예술의 가치가 오히려 올라갈까요. WEF의 2024년 예술 보고서는 디지털 시대에 수공예가 인간 직관과 장인 정신의 가치를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짚었습니다. 대량 생산 시대에도 수제 가구가 프리미엄을 받았듯이, 인간의 손때가 묻은 창작물이 희소가치를 얻는 시대가 올 수 있습니다. 다만 그 혜택이 소수의 스타 창작자에게만 돌아가고, 나머지 대다수는 알고리즘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시나리오도 함께 다가오고 있습니다. 생태계는 거대 플랫폼과 기술 자본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고, 그 안에서 개별 창작자의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