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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6장 20세기의 비극과 재탄생
6장 20세기의 비극과 재탄생
1. 1915년 아르메니아 대학살 - 잊을 수 없는 제노사이드
1915년은 아르메니아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해로 기록됩니다. 오스만 제국 정부는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학살을 시작했습니다. 20세기 최초의 대량 학살로 여겨지며, 아르메니아인들은 이를 "메츠 예게른"(대재앙)이라고 부릅니다. 150만 명에 달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살해되거나 강제 추방 과정에서 사망했고,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아나톨리아의 아르메니아 공동체가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대학살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상황을 살펴봐야 합니다. 1914년 여름 전쟁이 발발하자 오스만 제국은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지도자들, 특히 엔베르 파샤, 탈라트 파샤, 제말 파샤로 구성된 청년 투르크당의 삼두정치는 제국을 구하기 위해 팽창주의적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들은 범투르크주의라는 이념을 내세웠는데, 중앙아시아에서 아나톨리아에 이르는 모든 투르크계 민족을 하나로 통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1914년 겨울 엔베르 파샤는 캅카스 전선에서 러시아에 대한 공세를 감행했습니다. 사리카미시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는 참패했고, 9만 명이 넘는 병사들이 전사하거나 동사했습니다. 엔베르 파샤는 이 패배의 책임을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돌렸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 군대에 협력했으며, 오스만 제국을 배신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 일부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 군대의 의용군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대다수의 오스만 아르메니아인들은 제국에 충성스러운 신민이었습니다.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오스만 군대에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1915년 4월 24일, 콘스탄티노플에서 약 250명의 아르메니아 지식인, 작가, 의사, 변호사, 정치인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이들은 수도의 아르메니아 공동체를 이끌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이후 살해되었습니다. 오늘날 아르메니아인들은 4월 24일을 대학살 추모일로 기념합니다. 이 체포는 전국적인 학살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오스만 정부는 일련의 법령과 명령을 발표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전쟁의 필요성"과 "안보상의 이유"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아르메니아인들을 제거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5월 27일 탈라트 파샤는 "임시 추방법"을 공포했습니다. 이 법은 정부가 "반역 행위나 스파이 활동"을 이유로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킬 수 있다고 규정했습니다. 아르메니아인 전체를 대상으로 한 추방령이었습니다.
동부 아나톨리아의 아르메니아 마을들에서 먼저 추방이 시작되었습니다. 오스만 헌병대와 특수 조직(테슈킬라티 마흐수사)이라 불리는 준군사 조직이 마을을 포위했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단 며칠, 때로는 몇 시간의 여유만 주어진 채 짐을 싸야 했습니다. 재산은 대부분 버려두거나 헐값에 팔아야 했습니다. 집, 땅, 가게, 가축 모두를 잃었습니다.
남성들은 여성과 어린이들과 분리되었습니다. 젊은 남성들은 대부분 마을 밖으로 끌려가 즉시 처형되었습니다. 총살당하거나, 칼로 찔려 죽거나, 절벽에서 떨어뜨려졌습니다. 일부는 집단으로 묶여서 강물에 던져졌습니다. 오스만 정부는 먼저 아르메니아 남성들을 제거함으로써 저항의 가능성을 없애고, 여성과 어린이들을 무력하게 만들고자 했습니다.
여성, 어린이, 노인들은 강제 행군에 내몰렸습니다. 그들은 시리아 사막의 데이르에조르를 향해 걷도록 명령받았습니다.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죽음의 행군이었습니다. 식량도, 물도, 의료 지원도 없었습니다. 무더운 여름 날씨 속에서 사람들은 탈진하고 굶주렸습니다. 많은 이들이 행군 중에 쓰러져 죽었습니다. 쓰러진 사람들은 버려지거나 즉시 살해되었습니다.
호송 중인 아르메니아인들은 쿠르드족과 터키인 마적들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헌병들은 이러한 습격을 막지 않았고, 때로는 오히려 장려했습니다. 여성들과 소녀들은 납치되어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강제로 무슬림 가정에 팔려가거나 하렘으로 끌려갔습니다. 어린 소녀들은 터키인이나 쿠르드인 가정에 입양되어 이슬람으로 개종당했습니다. 단순히 육체적 살해뿐만 아니라 문화적, 정신적 말살이기도 했습니다.
유프라테스 강과 그 지류들은 시신으로 가득 찼습니다. 수천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강물에 던져졌습니다. 일부는 산 채로 던져졌고, 일부는 먼저 살해된 후 버려졌습니다. 강물은 붉게 물들었고, 하류 도시들의 주민들은 물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역사가들은 이러한 증언들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데이르에조르 지역에 도착한 소수의 생존자들은 사막의 집단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이곳도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었습니다. 수용소에는 식량도, 물도, 쉼터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막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1916년에는 살아남은 아르메니아인들마저 조직적으로 학살되었습니다. 제말 파샤는 데이르에조르의 모든 아르메니아인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학살에는 여러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총살, 칼에 의한 살해, 익사, 화형, 독살, 굶주림에 의한 죽음 등이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아르메니아인들이 교회나 헛간에 갇힌 채 불태워졌습니다. 어린이들은 바위에 내동댕이쳐지거나 산 채로 매장되었습니다. 임신한 여성들의 배를 가르는 잔혹한 행위도 보고되었습니다. 한 민족을 말살하려는 계획적인 대량 학살이었습니다. ( 아르메니아 학살기념관(Armenian Genocide Memorial Complex)은 예레반 시내 남서쪽의 치체르나카베르드(Tsitsernakaberd, Ծիծեռնակաբերդ) 언덕에 위치해 있습니다. 주소는 8 Tsitsernakaberd Highway, Yerevan 0028, Armenia입니다. _
오스만 제국에 있던 외국인들이 이 참상을 목격하고 기록했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외교관들, 미국 선교사들, 기자들이 보고서와 편지, 일기를 남겼습니다. 독일 대사 한스 폰 방겐하임과 그의 후임 파울 폰 볼프-메테르니히는 베를린에 여러 차례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미국 대사 헨리 모겐소는 회고록에서 이 학살을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그는 탈라트 파샤와의 대화를 기록하면서, 오스만 정부가 의도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썼습니다.
미국 선교사들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운영하는 학교와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고, 대학살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선교사들은 가능한 한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을 구하려 노력했습니다. 고아원을 만들어 어린이들을 숨겼고, 의료 지원을 제공했으며, 이 참상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그들의 증언은 나중에 대학살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요하네스 렙시우스라는 독일 목사는 오스만 제국을 방문한 후 아르메니아인들의 고통을 기록한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는 독일 정부에 오스만 제국에 압력을 가해 학살을 중단시키라고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은 전쟁 동맹국인 오스만 제국을 지지했고, 효과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국제 사회의 개입은 제한적이었습니다.
오스만 제국 내에서도 학살에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부 터키인 관료와 주지사들은 추방 명령을 거부하거나 늦추려 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행위가 도덕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해임되거나 처벌받았습니다. 일부 쿠르드족과 터키인들은 개인적으로 아르메니아인 이웃들을 숨겨주거나 도와주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인간성을 지켰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1918년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고 청년 투르크당 지도자들이 도망쳤습니다. 새로운 오스만 정부는 전범 재판을 열었습니다. 191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군사 재판이 열렸고, 일부 관료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탈라트 파샤, 엔베르 파샤, 제말 파샤는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해외로 도망친 상태였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스스로 정의를 실현하려 했습니다. "네메시스 작전"이라 불리는 비밀 계획이 실행되었습니다. 아르메니아 혁명 연맹(다슈낙당)의 일원들이 대학살의 주범들을 찾아 암살했습니다. 1921년 솔로몬 테흘리리안이 베를린에서 탈라트 파샤를 사살했습니다. 독일 법정에서 열린 재판에서 테흘리리안은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국제적인 정의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1923년 로잔 조약으로 터키 공화국이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으면서 전범 처벌 문제는 사실상 무산되었습니다. 터키의 새 지도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청년 투르크당과 거리를 두었지만, 대학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터키 공화국은 이후 일관되게 대학살을 부인하는 정책을 유지했습니다.
생존자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졌습니다.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로 피난했고, 일부는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중동 지역으로 갔습니다.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의 위임통치령에 아르메니아 난민들을 받아들였습니다. 베이루트와 알레포에 큰 아르메니아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또한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로 갔고, 일부는 프랑스, 미국, 아르헨티나로 이주했습니다.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는 대학살의 기억을 보존하고 세계에 알리는 데 헌신했습니다. 생존자들의 증언이 수집되고 기록되었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4월 24일을 추모일로 정하고, 매년 희생자들을 기렸습니다. 그들은 터키 정부가 대학살을 인정하고, 국제 사회가 이를 인정하기 위해 싸웠습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와 진실의 문제였습니다.
20세기 후반부터 여러 나라와 국제 기구들이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루과이가 1965년 최초로 대학살을 인정했고, 이후 많은 나라들이 뒤따랐습니다. 유럽 의회, 프랑스, 독일, 러시아, 캐나다,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폴란드 등이 대학살을 인정했습니다. 미국은 2019년 상하원에서, 2021년에는 바이든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대학살을 인정했습니다.
터키는 여전히 이를 대량 학살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터키 정부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죽음이 전쟁의 혼란 속에서 벌어진 비극이며, 양측 모두 희생자가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터키는 "대량 학살"이라는 용어 사용에 강력히 반대하며, 이를 인정하는 나라들에 외교적 압력을 가합니다. 이러한 부인 정책은 아르메니아인들에게 계속되는 고통입니다.
예레반의 치체르나카베르드에는 대학살 추모 기념관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에는 영원의 불꽃이 타오르고,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벽이 있습니다. 박물관에는 생존자들의 증언, 사진, 문서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매년 4월 24일이 되면 수십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희생자들을 추모합니다. 세계 각지의 아르메니아 공동체들도 이날 추모 행사를 엽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20세기 대량 학살의 선례가 되었습니다. 라파엘 렘킨이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 학살)"라는 용어를 만들 때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염두에 두었다고 합니다. 홀로코스트와 르완다 대학살 등 이후의 비극들과 비교 연구되며, 인류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역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에게 1915년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도 살아있는 기억이며, 정의를 향한 계속되는 투쟁입니다.
예레반 중심부 공화국 광장(Republic Square, Հանրապетության հրապարակ)에서 학살기념관까지는 약 4킬로미터 거리로, 택시를 이용하면 10분 정도면 도착합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지하철 사세룬(Sasuntsi Davit, Սասունցի Դավիթ) 역에서 내려 27번이나 68번 버스를 타고 'Tsitsernakaberd'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됩니다. 걸어 가기를 원한다면 공화국 광장에서 마슈토츠 거리(Mashtots Avenue, Մաշտոցի պողոտա)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 후, 하라즈단 협곡(Hrazdan Gorge, Հրազդան կիրճ)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 되는데, 약 40분 정도 소요됩니다. 언덕이 가파르므로 택시 이용을 권장합니다.
기념관은 연중무휴로 운영되며,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개관합니다(여름철에는 오후 6시까지 연장). 방문 시 경건한 마음가짐과 적절한 복장을 갖추는 것이 좋으며, 4월 24일 학살 추모일에는 수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방문하여 매우 혼잡합니다.
2. 소비에트 시대 - 이념 속 생존과 정체성 투쟁
1920년 12월 아르메니아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편입되었습니다. 1918년 독립을 선언했던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은 2년 반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이 된 아르메니아는 이후 70년 동안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 시기는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억압과 고난의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근대화와 발전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종교와 문화를 지키려는 아르메니아인들의 노력은 소비에트 체제의 무신론 정책과 끊임없이 충돌했습니다.
아르메니아가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된 배경을 이해하려면 1918년부터 1920년까지의 혼란한 상황을 살펴봐야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붕괴로 캅카스 지역은 극도의 혼란에 빠졌습니다. 1918년 5월 독립을 선언한 아르메니아 공화국은 처음부터 엄청난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난민들이 계속 러시아 영토로 몰려왔고, 식량과 물자가 턱없이 부족했으며, 주변국들과 영토 분쟁을 겪었습니다.
1920년 9월 터키군이 동쪽으로 진격하여 아르메니아를 침공했습니다. 약하고 고립된 아르메니아는 터키의 공격을 막아낼 힘이 없었습니다. 카르스가 함락되고, 터키군은 예레반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아르메니아 정부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레닌의 볼셰비키 정부는 이를 캅카스 지역을 장악할 기회로 보았습니다. 붉은 군대가 아르메니아로 진격했고, 터키군의 진격은 멈췄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아르메니아는 독립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1920년 12월 2일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었습니다. 다슈낙당이 이끌던 정부는 무너졌고,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1922년 아르메니아는 조지아, 아제르바이잔과 함께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원이 되었고, 1936년부터는 소비에트 연방의 구성 공화국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제 아르메니아의 운명은 모스크바에서 결정되었습니다.
소비에트 체제는 종교에 적대적이었습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보았고, 공산주의 사회에서 종교는 사라져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는 단순한 종교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교회는 1700년 동안 아르메니아 민족 정체성의 핵심이었습니다. 외세의 지배 아래에서도 교회는 아르메니아 문화와 언어를 보존하는 중심이었습니다.
1920년대 초반에는 비교적 온건한 정책이 실시되었습니다. 레닌의 신경제정책(NEP) 시기에 종교에 대한 탄압이 덜했습니다. 에치미아진의 가톨리코스 게보르크 5세는 소비에트 정권과 협력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아르메니아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권과 타협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1920년대 중반까지 교회는 제한적이나마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1928년 스탈린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급진적인 정책을 펼치면서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스탈린은 종교를 근절하기 위한 공격적인 무신론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1930년대는 아르메니아 교회에 가장 어두운 시기였습니다. 수백 개의 교회와 수도원이 폐쇄되거나 파괴되었습니다. 교회 건물들은 창고, 공장, 박물관, 심지어 축사로 전용되었습니다. 귀중한 성물과 필사본들이 압수되거나 파괴되었습니다.
성직자들은 탄압의 주요 대상이었습니다. 수천 명의 사제들이 체포되어 시베리아의 강제 노동 수용소(굴라그)로 보내졌습니다. 많은 이들이 고문을 받고 처형되었습니다. 1930년 가톨리코스 게보르크 5세가 사망한 후, 소비에트 당국은 새로운 가톨리코스 선출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에치미아진은 10년 넘게 가톨리코스 없이 지내야 했습니다. 이는 아르메니아 교회의 구조를 무너뜨리려는 의도였습니다.
종교 교육은 금지되었습니다. 신학교들이 폐쇄되었고, 새로운 사제를 양성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종교를 가르치는 것은 범죄로 간주되었습니다. 세례, 결혼식, 장례식 같은 종교 의식을 치르는 것도 어려워졌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종교 의식이 금지되지 않았지만, 이를 행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낙인찍히고 직장을 잃거나 박해를 받았습니다.
무신론 선전이 대대적으로 펼쳐졌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종교가 미신이며, 과학과 공산주의가 진리라고 배웠습니다. 공산당원은 공개적으로 종교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종교를 믿는다는 것이 알려지면 당에서 제명되고,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지식인, 예술가, 교사들은 특히 조심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비밀리에 신앙을 지켰습니다. 집에서 몰래 기도하고, 성상을 숨겨두고, 명절을 조용히 지켰습니다.
1930년대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에 아르메니아도 엄청난 고통을 겪었습니다. 공산당 간부들, 지식인들, 예술가들이 "인민의 적"으로 몰려 체포되고 처형되었습니다. 수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습니다. 아르메니아의 오래된 문화와 전통도 "부르주아적"이거나 "민족주의적"이라는 이유로 공격받았습니다. 역사책들이 다시 쓰였고, 일부 역사적 사건들은 언급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특히 1915년 대학살을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상황을 변화시켰습니다.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스탈린은 국민들을 단결시키기 위해 정책을 조정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를 포함한 전통 종교들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었습니다.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민족 정체성과 전통 문화가 어느 정도 허용되었습니다. 1943년 드디어 새로운 가톨리코스 선출이 허용되었습니다. 게보르크 6세가 에치미아진의 가톨리코스로 선출되었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약 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붉은 군대에서 복무했고, 그중 10만 명 이상이 전사했습니다. 이반 바그라미안 원수, 아마자스프 바바자니안 원수 같은 뛰어난 군사 지도자들이 나왔습니다. 전쟁 영웅들 중에는 아르메니아인이 많았고, 이는 아르메니아인들의 명예를 높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아르메니아 교회와 문화에 대한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습니다.
전후 시기에 대규모 본국 송환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스탈린은 해외에 흩어진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를 소비에트 아르메니아로 돌아오게 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인구를 늘리고, 아르메니아를 강화하며, 동시에 해외 아르메니아인들을 소비에트 영향권 아래 두려는 의도였습니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약 1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중동, 유럽, 미국에서 소비에트 아르메니아로 이주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환멸이었습니다. 약속된 좋은 집과 일자리는 없었고, 물질적 조건은 열악했습니다. 더 나쁜 것은 이들이 "외국에서 온 사람들"로 의심받고 감시받았다는 점입니다. 일부는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많은 본국 송환자들은 돌아온 것을 후회했지만, 다시 떠날 수 없었습니다. 철의 장막이 그들을 가두었습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시초프가 권력을 잡으면서 "해빙" 시기가 왔습니다. 정치적 탄압이 완화되고, 문화적 자유가 조금 늘어났습니다. 굴라그에 수감되었던 많은 사람들이 석방되었습니다. 종교에 대한 태도도 약간 부드러워졌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습니다. 여전히 종교는 공식적으로 권장되지 않았고, 무신론 교육이 계속되었습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아르메니아는 소비에트 연방 내에서 비교적 발전한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산업화가 진행되고, 교육 수준이 높아졌으며,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습니다. 예레반은 현대적인 도시로 변모했습니다. 화학 산업, 기계 제조, 전자 산업이 발전했습니다. 코냑 생산은 아르메니아의 자랑이 되었습니다. 아라랏트 브랜드의 코냑은 소련 전역에서 유명했습니다.
교육과 과학도 발전했습니다. 문맹률이 거의 사라졌고, 대학교육을 받는 인구가 크게 늘었습니다. 예레반 국립대학교는 캅카스 지역의 주요 학술 기관이 되었습니다. 아르메니아 과학아카데미는 물리학, 수학, 화학, 천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뷰라칸 천문대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연구 기관이었습니다.
아르메니아 문화와 예술도 제한적이나마 번영했습니다. 소비에트 체제는 예술을 통제했지만, 동시에 지원도 했습니다. 국립 극장, 오페라 극장, 박물관들이 운영되었습니다. 아람 하차투리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발레 음악 《가야네》에 나오는 "칼의 춤"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곡입니다.
영화 산업도 발전했습니다.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감독의 《석류의 색》(1969)은 아르메니아 문화와 역사를 아름답게 표현한 걸작으로 평가받습니다. 비록 소비에트 검열과 충돌하여 파라자노프가 투옥되기도 했지만, 그의 작품은 아르메니아 예술의 독특함을 세계에 보여주었습니다. 아르메니아 영화는 모스크바 영화제와 국제 영화제에서 여러 차례 상을 받았습니다.
모든 예술과 문화는 검열 아래 있었습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공식 예술 노선을 따라야 했고, 체제를 비판하거나 민족주의적인 내용은 금지되었습니다. 1915년 대학살은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없는 주제였습니다. 1965년 대학살 50주년을 맞아 예레반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을 때, 소비에트 당국은 놀랐습니다. 수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거리로 나와 대학살을 기억하고, 정의를 요구했습니다. 소비에트 시대에 드문 자발적인 대중 시위였습니다.
이 시위 이후 소비에트 당국은 양보했습니다. 예레반에 대학살 추모 기념관인 치체르나카베르드 건설을 허용했습니다. 1967년 기념관이 완공되었고, 영원의 불꽃이 점화되었습니다.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에서 아르메니아 민족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매년 4월 24일이 되면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희생자들을 추모했습니다.
종교는 여전히 억압받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에치미아진은 계속 기능했고, 가톨리코스는 아르메니아 교회의 상징적 지도자로 남았습니다. 일부 교회들은 개방되어 있었고, 특히 명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았습니다. 노인들은 공개적으로 교회에 다닐 수 있었지만, 젊은이들은 조심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집에서는 많은 가정이 전통을 지켰습니다. 부활절과 크리스마스를 조용히 기념하고, 어린이들에게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 브레즈네프 시대의 정체기에 소련 경제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아르메니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부패가 만연했고, 물자 부족이 일상화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공식 경제보다 암시장과 개인적 연줄에 의존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르메니아인들의 민족 의식은 점점 강해졌습니다. 특히 디아스포라와의 접촉이 늘어나면서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습니다.
1985년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되면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언론의 자유가 확대되고, 정치적 논의가 가능해졌습니다. 오랫동안 금기시되던 주제들을 이제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학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고,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가 표면화되었습니다.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주민의 대다수가 아르메니아인이었지만 행정적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 속한 자치주였습니다. 1988년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아르메니아로의 편입을 요구하면서 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예레반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수십만 명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이는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도전이었고, 곧 독립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1988년 12월 대지진이 아르메니아를 강타했습니다. 스피타크, 레니나칸(현재의 귬리), 키로바칸(현재의 바나조르) 등이 파괴되었습니다. 약 2만 5천 명이 사망하고, 50만 명 이상이 집을 잃었습니다. 재난은 소비에트 체제의 무능함을 드러냈습니다. 구호 활동이 비효율적이었고, 건물들이 부실하게 지어져 쉽게 무너졌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동시에 전 세계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가 힘을 합쳐 돕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9년부터 1991년 사이 소련이 무너지면서 아르메니아는 독립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아르메니아 민족 운동이 강력한 정치 세력이 되었고, 공산당의 지배가 약화되었습니다. 70년간의 소비에트 지배는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소비에트 시대는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억압과 고난의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신앙과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끈기가 결국 독립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3. 1991년 독립 - 자유를 되찾은 아르메니아의 새로운 출발
1991년 9월 21일 아르메니아는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아르메니아 공화국이 탄생했습니다. 6세기 만에 아르메니아인들이 다시 완전한 독립 국가를 가지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독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국가는 경제 붕괴, 에너지 위기, 전쟁 등 엄청난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독립으로 가는 길은 1988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이 소련 전역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촉발했습니다. 아르메니아에서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가 정치적 각성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8년 2월 카라바흐의 지방 소비에트가 아르메니아로의 편입을 결의했습니다. 예레반에서는 수십만 명이 거리로 나와 이를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극장 광장은 매일 대규모 집회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아르메니아 민족 운동(HHSh)이 시위들을 주도했습니다. 레본 테르-페트로시안, 바즈겐 마누키안, 라피 호바니시안 같은 지식인들과 운동가들이 지도자로 부상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카라바흐 문제에 초점을 맞췄지만, 점차 민주화와 궁극적으로는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비에트 당국은 억압하려 했지만, 대중의 지지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1988년 12월의 대지진은 아이러니하게도 독립 운동을 강화시켰습니다. 소비에트 정부의 무능한 대응은 사람들에게 모스크바에 대한 환멸을 심어주었습니다. 디아스포라를 포함한 아르메니아인들의 자발적인 구호 활동은 민족적 단결을 강화시켰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1989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었습니다. 양측에서 폭력 사태가 벌어졌고, 수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습니다. 아제르바이잔에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이 아르메니아로 피난했고, 아르메니아에 살던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아제르바이잔으로 갔습니다. 사실상 인구 교환이었습니다. 1990년 1월 바쿠에서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포그롬(집단 학살)이 벌어졌고, 소비에트 군대가 개입했지만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1990년 5월 아르메니아 최고 소비에트(의회)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아르메니아 민족 운동이 다수 의석을 차지했고, 레본 테르-페트로시안이 최고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사실상 아르메니아의 대통령 역할이었습니다. 공산당의 일당 독재가 끝나고, 다당제 민주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르메니아는 소련 내에서 가장 빠르게 민주화가 진행되는 공화국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990년 8월 아르메니아 최고 소비에트는 독립 선언문을 채택했습니다. 즉각적인 독립은 아니었지만, 아르메니아가 주권 국가임을 선언하고 소련 법률보다 아르메니아 법률이 우선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점진적인 독립을 향한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아르메니아는 자체 군대 창설, 경제 정책 결정, 외교 관계 수립을 시작했습니다.
1991년 소련 전체가 급속히 붕괴하고 있었습니다. 발트 3국이 독립을 선언했고, 러시아의 보리스 예리친이 개혁파로 부상했습니다. 8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쿠데타가 시도되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 쿠데타의 실패는 소련의 종말을 앞당겼습니다. 아르메니아를 포함한 여러 공화국들이 독립을 가속화했습니다.
1991년 9월 21일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습니다. "아르메니아가 소비에트 연방에서 독립한 민주 공화국이 되는 것에 동의하십니까?"라는 질문에 투표자의 99.5%가 찬성했습니다. 투표율은 95%였습니다. 이보다 명확한 민의 표현은 없었습니다. 같은 날 대통령 선거도 실시되어 레본 테르-페트로시안이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9월 23일 아르메니아 최고 소비에트는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12월 25일 소비에트 연방이 공식 해체되면서 아르메니아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아르메니아는 유엔에 가입했고, 세계 각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습니다. 미국, 프랑스, 러시아를 포함한 많은 나라들이 아르메니아를 국가로 승인했습니다. 전 세계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는 새로운 조국의 탄생을 축하했습니다.
독립의 초기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아르메니아는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소련의 계획 경제 체계가 무너지면서 생산이 급감했습니다. 소련 시절 아르메니아 경제는 다른 공화국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 연결이 끊어지면서 원자재와 부품 공급이 중단되었습니다. 많은 공장들이 문을 닫았고, 실업률이 치솟았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에너지 위기였습니다. 아르메니아는 에너지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했습니다. 1988년 대지진 이후 메츠아모르 원자력 발전소가 안전상의 이유로 폐쇄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습니다. 아제르바이잔과의 전쟁으로 아제르바이잔을 통과하는 가스 파이프라인이 차단되었습니다. 터키는 카라바흐 전쟁을 이유로 아르메니아와의 국경을 봉쇄했습니다. 아르메니아는 말 그대로 고립된 섬이 되었습니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아르메니아는 "암흑의 겨울"을 겪었습니다. 전기는 하루에 겨우 몇 시간만 들어왔습니다. 난방이 없어 사람들은 혹독한 추위에 떨었습니다. 나무를 베어 난방 연료로 사용했고, 예레반의 공원들이 벌거숭이가 되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아 사람들은 고층 아파트의 계단을 걸어 올라야 했습니다. 물 공급도 불규칙했습니다. 겨울에는 영하의 날씨에 난방 없이 지내야 했습니다.
식량도 부족했습니다. 빵을 사기 위해 긴 줄을 서야 했고, 많은 기본 식품들이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인플레이션이 치솟아 저축이 순식간에 가치를 잃었습니다. 중산층이 붕괴했고, 많은 사람들이 빈곤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은 놀라운 회복력을 보였습니다. 가족과 공동체가 서로 돕고, 디아스포라에서 보내온 송금이 많은 가정을 지탱했습니다. 국제 구호 단체들도 도움을 제공했습니다.
동시에 아르메니아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졌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들과 아제르바이잔 정부 사이의 전쟁이었지만, 실제로는 아르메니아가 깊이 개입했습니다. 수천 명의 아르메니아 청년들이 자원하여 카라바흐로 가서 싸웠습니다. 수만 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아제르바이잔이 우세했습니다. 아제르바이잔은 인구도 많고 자원도 풍부했습니다. 아르메니아군은 점차 전세를 역전시켰습니다. 1992년 슈시를 탈환하고, 1993년에는 카라바흐와 아르메니아 본토를 연결하는 라친 회랑을 확보했습니다. 1994년 5월 러시아의 중재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아르메니아는 카라바흐와 그 주변 아제르바이잔 영토 7개 지역을 장악했습니다. 약 1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과 60만 명 이상의 아제르바이잔인이 난민이 되었습니다.
이 전쟁의 승리는 아르메니아인들에게 큰 자부심을 주었지만, 엄청난 대가를 치렀습니다. 전쟁 비용으로 경제가 더욱 피폐해졌고, 아제르바이잔 및 터키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고립이 심화되었습니다. 카라바흐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얼어붙은 분쟁"으로 남았고, 이는 아르메니아의 안보와 발전에 계속해서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1995년 아르메니아는 새 헌법을 채택했습니다. 대통령제 공화국 체제를 확립하고, 삼권 분립을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한이 집중되었습니다. 테르-페트로시안 대통령은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통치했고, 반대파를 억압했습니다. 언론의 자유가 제한되고, 선거의 공정성에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1996년 대통령 선거는 부정 시비로 얼룩졌고,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유혈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점차 안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1995년 메츠아모르 원자력 발전소가 재가동되면서 에너지 위기가 완화되었습니다. 시장 경제로의 전환이 진행되었고, 민영화가 추진되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의 지원을 받아 경제 개혁을 실시했습니다. 인플레이션이 통제되고, 새로운 통화 드람이 도입되어 안정되었습니다.
디아스포라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진 아르메니아인들이 조국을 지원했습니다. 미국, 프랑스, 러시아, 중동의 아르메니아 공동체들이 자금을 보내고, 투자를 하고, 전문 지식을 제공했습니다. 커크 케르코리안 같은 아르메니아계 미국인 사업가들이 수백만 달러를 기부했습니다. "하야스탄" 전 아르메니아 기금 같은 조직들이 설립되어 학교, 도로, 병원 건설을 지원했습니다.
1998년 테르-페트로시안은 카라바흐 문제에서 타협안을 제시했다가 강경파의 반발을 받아 사임했습니다. 로베르트 코차리안이 새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코차리안은 카라바흐 출신으로 강경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그의 집권 기간(1998-2008) 동안 아르메니아는 경제 성장을 경험했지만, 동시에 권위주의가 강화되고 부패가 만연했습니다.
1999년 10월 의회 테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무장한 괴한들이 의회에 난입하여 총리 바즈겐 사르키시안을 포함한 8명을 살해했습니다. 아르메니아 정치에 큰 충격을 주었고, 권력 구조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배후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지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2000년대 아르메니아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연평균 10%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건설 붐이 일어나고, 예레반은 대대적인 재개발을 겪었습니다. 소비에트 시대의 낡은 건물들이 철거되고, 현대적인 건물들이 들어섰습니다. 카페, 레스토랑, 쇼핑몰이 늘어났습니다. IT 산업이 발전하여 아르메니아는 "캅카스의 실리콘 밸리"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경제 성장의 혜택은 고르게 분배되지 않았습니다. 부패한 과두 재벌들이 경제를 장악했고, 빈부 격차가 커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가난했고,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떠났습니다. 러시아, 미국, 유럽으로의 노동 이민이 계속되었습니다. 인구가 감소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독립 당시 350만 명이었던 인구가 300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의 발전이 더뎠습니다. 선거는 정기적으로 실시되었지만, 공정성에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야당은 탄압받았고, 언론의 자유는 제한되었습니다. 시민 사회는 활발했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제한적이었습니다. 국제 기구들은 아르메니아의 민주주의 수준을 "부분적으로 자유로운" 국가로 평가했습니다.
2008년 대통령 선거는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세르지 사르키시안이 당선되었지만, 야당은 부정 선거라고 주장했습니다.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여 10명이 사망했습니다. 사르키시안은 2008년부터 2018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했습니다. 그의 집권 기간 동안 경제는 계속 성장했지만, 부패와 불평등도 심화되었습니다. 2015년 헌법 개정으로 의회 중심제로 전환했고, 사르키시안은 2018년 총리가 될 계획이었습니다.
2018년 "벨벳 혁명"이라 불리는 평화적 시민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니콜 파시니안이 이끄는 대중 시위로 사르키시안이 사임했습니다. 파시니안은 총리가 되어 부패 척결과 민주주의 강화를 약속했습니다. 아르메니아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처음으로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권력 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파시니안 정부는 개혁을 추진했지만, 2020년 제2차 카라바흐 전쟁이라는 큰 시련에 직면했습니다. 아제르바이잔이 터키의 지원을 받아 공격을 시작했고, 44일 전쟁 끝에 아르메니아는 패배했습니다. 카라바흐의 상당 부분과 주변 7개 지역을 아제르바이잔에 반환해야 했습니다. 큰 충격과 좌절을 안겨주었습니다. 독립 이후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신들의 국가를 지키고 발전시켜 왔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계속되고 있고, 젊은 세대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 아르메니아는 고대의 유산과 현대의 도전 사이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