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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13장 강대국 사이의 줄타기
13장 강대국 사이의 줄타기
조지아의 지도를 펼쳐보면 이 작은 나라가 짊어진 지정학적 운명의 무게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북쪽으로는 코카서스 산맥 너머 러시아가 버티고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튀르키예와 이란이 역사적 영향권을 주장합니다. 서쪽 흑해를 건너면 유럽이 있고, 동쪽 카스피해 너머로는 중앙아시아와 중국이 기다립니다. 조지아는 이 거대한 체스판의 한복판에 놓인 말(駒)입니다.
370만 인구에 남한의 3분의 2 크기밖에 되지 않는 이 나라가 국제 뉴스의 단골 소재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조지아의 외교는 단순한 정책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매일매 일 국가의 존속을 건 줄타기입니다.
가. 러시아의 그림자와 에너지 파이프라인
(1) 지워지지 않는 전쟁의 상흔
2008년 8월, 러시아군이 조지아를 침공했습니다. 5일간의 짧지만 잔혹한 전쟁이었습니다. 러시아 탱크는 수도 트빌리시에서 불과 40킬로미터 떨어진 고리(Gori)까지 진격했습니다. 고리는 스탈린의 출생지이기도 합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러시아는 압하지야(Abkhazia)와 남오세티야(South Ossetia)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군대를 주둔시켰습니다. 조지아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영토의 20%를 사실상 잃었습니다. 러시아와 니카라과, 베네수엘라, 시리아 등 소수 국가만이 이 두 지역의 독립을 인정합니다. 나머지 국제사회는 러시아의 불법 점령으로 간주합니다.
'크리핑 보더(Creeping Border)'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어오는 국경이라는 뜻입니다. 러시아 군인들과 남오세티야 경비대가 밤사이에 철조망을 조금씩 조지아 쪽으로 옮긴다는 이야 기입니다. 과수원이 어느 날 점령지 안으로 들어갑니다. 조상의 묘지에 갈 수 없게 됩니다. 괴담이 아닙니다. EU 감시단(EUMM)이 문서로 기록한 현실입니다.
2015년에는 바쿠-수프사(Baku-Supsa) 송유관의 일부 구간이 점령지로 편입되었다는 보고도 있었습니다. 에너지 인프라마저 이 '기어오는 국경'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2) 에너지 통로로서의 전략적 가치
러시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이 땅에서 조지아가 국제사회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 지리에 있습니다. 조지아는 러시아를 우회하여 카스피해의 에너지를 유럽으로 운송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바쿠-트빌리시-제이한(BTC) 송유관이 대표적입니다.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시작해 조지아의 트빌리시를 거쳐 튀르키예 지중해 연안의 제이한까지 1,768킬로미터를 달립니다. 하루 약 100만 배럴의 원유를 실어 나릅니다. 러시아 영토를 한 치도 밟지 않습니다. 미국과 유럽이 냉전 종식 후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공들여 건설한 전략 자산입니다.
가스관도 있습니다. 남코카서스 파이프라인(SCP, South Caucasus Pipeline)은 아제르바이잔샤 데니즈(Shah Deniz) 가스전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를 조지아를 거쳐 튀르키예로 보냅니다. 이 가스는 다시 TANAP(Trans-Anatolian Pipeline)와 TAP(Trans-Adriatic Pipeline)를 통해 유럽까지 이어집니다. 소위 '남부 가스 회랑(Southern Gas Corridor)'의 핵심 구간입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자료에 따르면, 조지아의 가스관 시스템은 러시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튀르키예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조지아 자체는 원유나 천연가스가 거의 생산되지 않는 에너지 빈국입니다. 그러나 '통과국(transit country)'으로서의 가치는 막대합니다. 통과료 수입은 물론, 일정량의 가스를 할인된 가격에 확보할 수 있는 권리도 얻습니다.
(3) 에너지 무기화의 그림자
러시아는 오랫동안 에너지를 외교적 무기로 활용해왔습니다. 2006년 1월, 러시아 가즈프 롬(Gazprom)이 조지아에 공급하던 가스 가격을 급격히 인상하고 공급을 중단한 사건이 대
표적입니다. 한겨울이었습니다. 조지아 전역이 얼어붙었습니다. 미하일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 대통령의 친서방 노선에 대한 보복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이 경험은 조지아로 하여금 에너지원 다변화에 박차를 가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제르바이 잔산 가스 도입을 늘렸습니다. BTE(바쿠-트빌리시-에르주룸) 가스관 건설을 서둘렀습니다. 그 결과 조지아의 아제르바이잔 가스 의존도는 크게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탈러시아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외국정책연구소(FPRI)의 2025년 3월 보고서에 따르면, 조지아는 러시아로부터 액화석유가스(LPG)를 상당량 수입하고 있습니다. 휘발유와 디젤 등 정유제품의 러시아 의존도도 2021년 이후 다시 높아지는 추세입니다. 2024년에 조지아가 러시아로부터 수입한 천연가스 규모는 1억 4,570만 달러에 달했습니다.
제임스타운 재단(Jamestown Foundation)의 2025년 3월 분석에 따르면, 조지아는 2025년에 러시아로부터 2024년 대비 두 배에 달하는 천연가스를 수입할 계획입니다. 아제르바이잔이 조지아의 가스 수요를 완전히 충족시킬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는 집 권 '조지아의 꿈(Georgian Dream)' 정부의 러시아 관계 개선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됩니다.
(4) 중간 회랑과 녹색 에너지의 미래
우크라이나 전쟁은 조지아의 전략적 가치를 다시 한번 부각시켰습니다. 러시아를 통과하는 북부 회랑(Northern Corridor)의 위험성이 드러나자,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를 거쳐 조지아와 튀르키예를 통해 유럽으로 이어지는 '중간 회랑(Middle Corridor)'이 대안으로 떠올 랐습니다.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는 이 회랑의 핵심 국가들입니다. 아시아철도연맹(Asian Rail Alliance) 자료에 따르면, 2024년 중간 회랑의 화물 운송량은 전년 대비 60% 이상 증가했습니다. 아직 전체 중국-유럽 컨테이너 물동량의 7.8%에 불과하지만, 성장세는 가파릅니 다.
2022년 12월,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루마니아, 헝가리 4개국은 흑해 해저 전력 케이블 건설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카스피해 연안의 풍력 및 태양광 발전으로 생산된 전기를 유럽으로 송전하는 '녹색 에너지 회랑(Green Energy Corridor)' 프로젝트입니다. EU가 러시아산 화석 연료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추진하는 사업입니다.
이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조지아는 단순한 원유·가스 통과국을 넘어 유럽의 재생 에너지 안보를 지탱하는 허브로 도약하게 됩니다.
(5) 모순 속의 균형
조지아의 에너지 정치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러시아를 우회하는 파이프라인으로 서방의 안보 이익에 기여하면서, 동시에 러시아로부터 가스와 석유제품을 수입합니다. 러시아에 영토를 점령당한 채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있으면서, 러시아 관광객 190만 명(2024 년 기준)을 맞이합니다. 러시아는 조지아의 두 번째로 큰 무역 상대국입니다.
윌슨센터(Wilson Center)의 2025년 분석에 따르면, 2025년 상반기 조지아-러시아 양국 무역 액은 약 13억 달러로 전년 대비 7%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조지아로 들어오는 송금액은 2024년에 65%나 급감하여 5억 4,000만 달러에 그쳤습니다.
더 우려스러운 정황도 있습니다. 윌슨센터 보고서는 조지아가 러시아의 국제 제재 우회 창구로 활용되고 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석유 자원이 전무한 조지아에서 2023-24년 사이에 스페인으로 9만 9,000톤의 '조지아산 석유'가 수출되었다는 통계가 그 근거입니다. 2024 년에는 조지아로 수출된 요트의 양이 기록적인 수준에 달했는데, 평균 소득이 높지 않은 나라치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입니다.
러시아의 그림자는 군사적 점령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에너지, 무역, 금융, 정보전의 형태로 조지아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에너지 안보라는 서방의 필요와 경제적 생존이라는 조지아의 현실 사이에서, 이 작은 나라는 위태로운 균형을 잡고 있습니다.
나. 미국 USAID 지원 중단의 의미
(1) 30년 파트너십의 균열
1991년 소련 해체 직후부터 미국은 조지아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였습니다. 미국 국제개발 처(USAID)는 1992년부터 조지아에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30여 년간 약 60억 달러가 이 작은 나라에 투입되었습니다. 민주주의 제도 구축, 경찰 개혁, 사법 시스템 현대화, 농업 기술 이전, 중소기업 육성, 교육, 보건 등 거의 모든 분야에 USAID의 손길이 닿았습니다.
트빌리시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는 길에는 '조지 W. 부시 거리(George W. Bush Street)'가 있습니다. 2005년 부시 대통령의 조지아 방문을 기념하여 명명되었습니다. 그 정도로 조지아와 미국의 관계는 각별했습니다.
2024년, 이 관계에 심각한 균열이 생겼습니다.
(2) 외국 대리인법과 서방의 반발
2024년 5월, 조지아 의회는 '외국 영향력 투명성에 관한 법률(Law on Transparency of Foreign In uence)'을 통과시켰습니다. 해외에서 자금의 20% 이상을 지원받는 비정부기구(NGO)나 언론 매체를 '외국 영향력을 추구하는 조직'으로 등록하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입니다. 등록을 거부하면 벌금 25,000라리(약 9,300달러)가 부과됩니다.
비판자들은 이 법을 '러시아 법(Russian Law)'이라고 부릅니다. 러시아가 2012년부터 시민 사회와 독립 언론을 탄압하기 위해 사용해온 '외국 대리인법'과 거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살로메 주라비슈빌리(Salome Zourabichvili)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으나, 의회가 이를 뒤집었습니다.
트빌리시 중심가 루스타벨리 대로에서는 수만 명이 모인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습니다. EU 깃발과 조지아 국기가 나란히 휘날렸습니다. 경찰은 최루 가스와 물대포로 대응했습니다.
미국은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2024년 7월, 미 국무부는 조지아 정부에 대한 9,500만 달러 규모의 원조를 동결한다고 발표했습니다. USAID 대변인은 "정부에 직접 혜택이 돌아가는 지원을 중단하되, 조지아 국민을 직접 돕는 프로그램은 유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학생, 농민, 시민사회, 독립 언론에 대한 지원은 계속된다는 의미입니다.
(3) 트럼프 행정부의 USAID 축소와 충격파
fl 2025년 1월,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취임 첫날 행정명령을 통해 모든 해외 원조에 대한 90일 동결을 선언한 것입니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에 부합하는지 검토하겠다는 명분이었습니다.
2월, 국무장관 마르코 루비오(Marco Rubio)는 USAID의 6,000개 이상 해외 원조 프로그램을 검토한 결과 500개만 유지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83%가 삭감된 셈입니다. USAID 인력은 8,000명 이상에서 300명 미만으로 급감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소셜 미디어에 "문 닫아(CLOSE IT DOWN)"라고 적었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USAID를 "범죄 조직"이라고 불 렀습니다.
조지아에 대한 영향은 즉각적이었습니다. 글로벌 보이시스(Global Voices)의 2025년 2월 보도에 따르면, 조지아의 NGO와 국제 원조 활동이 "중단 상태(grinding to a halt)"에 빠졌습니다. 헌법재판소의 연례 하계 학교 프로그램, 루가르 공중보건연구소(Lugar Lab)의 연구 프로젝트 등이 중단되었습니다. 루가르 연구소는 러시아가 오랫동안 '생물무기 개발 시설'이 라는 음모론을 퍼뜨려온 미국 지원 연구소입니다.
(4) 집권당의 환영과 반서방 수사
흥미롭게도 집권 '조지아의 꿈' 정부는 미국의 USAID 축소를 환영했습니다. 이라클리 코바 히제(Irakli Kobakhidze) 총리는 이를 "미국 딥 스테이트(deep state)의 패배"라고 표현했습니다.
제임스타운 재단의 2025년 2월 분석에 따르면, 코바히제 총리 자신이 2000-2001년 USAID 의 공교육 프로젝트 지역 코디네이터로 근무한 이력이 있습니다. 조지아 의회 공식 웹사이 트에는 "이 웹사이트는 USAID의 지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라는 문구와 USAID 로고가 찍혀 있습니다. 이 아이러니는 조지아 정치의 급격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조지아의 꿈' 정부는 서방을 향해 점점 더 적대적인 수사를 구사하고 있습니다. 정부 인사 들은 미국과 EU가 조지아를 러시아와의 전쟁에 끌어들여 '제2의 전선(Second Front)'을 열려 한다고 주장합니다. 비지나 이바니슈빌리(Bidzina Ivanishvili) 당 창립자는 2024년 4월, 러시아의 조지아 침공과 우크라이나 침공이 모두 서방의 '글로벌 전쟁 세력(Global War Party)'이 조작한 것이라고 발언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크렘린의 대외 선전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합니다. FPRI 보고서는 이를 두고 "크렘린에 정렬된 서사가 조지아 집권층 내부에 내면화되었다"고 분석합니다.
(5) 시민사회의 생존 위기
USAID 지원 중단의 가장 직접적인 타격은 시민사회에 집중됩니다.
조지아 시민사회 단체의 상당수는 해외 자금에 크게 의존합니다. 국내 자선 기부 문화가 아직 발달하지 않은 탓입니다. USAID, EU, 각국 대사관, 민주주의국가재단(NED) 등이 주요 재원이었습니다. 선거 감시 단체인 '공정선거와 민주주의를 위한 국제협회(ISFED)', 탐사 저널리즘 매체들, 인권 감시 조직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2024년 외국 대리인법 통과 후, 400개 이상의 조지아 NGO와 언론사가 등록을 거부하는 '시민 불복종'을 선언했습니다. "러시아 법은 우리나라에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공개 서한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저항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자유유럽방송(RFE/RL)의 2024년 8월 보도에 따르면, 벌금을 누가 부담할 것인지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습니다. 서방 기부자들은 "벌금을 대납하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한 서방 외교관은 "우리는 법치를 존중한다. 벌금을 내는 것은 그 법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이 라고 말했습니다. USAID와 EU 모두 보조금 협정에 벌금 대납 조항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2025년 4월, 조지아 의회는 더욱 강화된 새로운 '외국 대리인 등록법(Foreign Agents Registration Act)'을 통과시켰습니다. 등록 거부 시 형사 처벌까지 가능해졌습니다. 국제인 권감시기구(Human Rights Watch)는 이 법이 활동가와 단체에게 "외국 대리인이라는 낙인을 받아들이거나, 감옥에 가거나, 망명을 떠나거나, 활동을 완전히 중단하거나"라는 "거짓 선택지"를 강요한다고 비판했습니다.
(6) 지정학적 함의: 신뢰의 상실
USAID 지원 중단의 의미는 단순한 자금 문제를 넘어섭니다.
첫째, 조지아가 더 이상 서방의 '신뢰할 수 있는 민주주의 파트너'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외교적 경고입니다. EU는 이미 3,000만 유로 규모의 국방 지원을 동결했습니다. 미국과 EU 양측이 조지아 정부 고위 인사들에 대한 비자 제재와 자산 동결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둘째, 조지아 내 친서방 세력의 동력이 약화됩니다. 유로바로미터(Eurobarometer) 조사에 따르면, 조지아 국민의 EU에 대한 신뢰도는 2024년 봄 66%에서 2025년 봄 49%로 하락했습니다. 1년 사이에 17%포인트가 떨어진 것입니다. "서방은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정서가 퍼지고 있습니다.
셋째, 러시아와 중국에게 빈 공간을 채울 기회가 생깁니다. '저스트 시큐리티(Just Security)' 의 2025년 2월 분석은 "이전 행정부들,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최전선에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이들을 지원하는 것이 미국의 가치이자 이익이라는 점을 이해했다"고 지적합니다. "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시대에 이탈하여 자유의 친구들이 어둠 속으로 빠지게 내버려 두는 것은 최악의 타이밍"이라는 비판입니다.
트빌리시의 힙한 카페에서 자유분방한 공기를 마시는 여행자는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공기 뒤에는 언제 닫힐지 모르는 서구로 향한 문에 대한 청년들의 깊은 절망감이 배어 있습니다.
다. NATO 가입의 꿈과 지정학적 한계
(1) 헌법에 새겨진 열망
조지아 헌법 제78조는 국가기관이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로의 "완전한 통합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헌법에 특정 국제기구 가입을 의무로 규정한 사례는 드뭅니다. 그만큼 NATO와 EU 가입은 조지아 국민에게 국가의 생존과 정체성이 걸린 문제입니다.
여론 조사는 일관됩니다. 조지아 국민의 80% 이상이 EU 가입을 지지합니다. NATO에 대한 지지도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국가 안보를 보장받고, 서구 민주주의 진영의 일원이 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트빌리시를 걷다 보면 조지아 국기 옆에 나란히 걸린 EU 깃발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관공 서마다, 카페마다, 심지어 택시에도 EU 깃발 스티커가 붙어 있습니다. 조지아는 아직 EU 회원국이 아닙니다. NATO 회원국도 아닙니다. 그러나 깃발은 이미 펄럭입니다.
(2) 부쿠레슈티의 약속과 그 한계
2008년 4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NATO 정상회의는 역사적인 선언을 남겼습니다.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는 NATO의 회원국이 될 것(will become members of NATO)"이라는 내용입니다. NATO 역사상 처음으로, 가입 행동 계획(MAP)을 시작하기도 전에 장래 회원 자격을 약속한 사례였습니다.
당시 NATO 사무총장 야프 더 호프 스헤퍼(Jaap de Hoop Scheffer)는 "이 나라들이 NATO 회원국이 될 것이라는 점에 오해의 여지가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미국의 전략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는 이를 "우크라이나, 조지아, 그리고 그들의 북미·유럽 지지자들에게 전략적 승리"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약속'과 '실현'은 다른 문제였습니다. 부쿠레슈티 선언은 MAP 부여를 유보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의 반대 때문이었습니다. 러시아를 자극할 것을 우려한 것입니다.
4개월 후인 2008년 8월, 러시아는 조지아를 침공했습니다. 이 전쟁은 "NATO 가입 시도는곧 전쟁"이라는 러시아의 명확한 '레드라인(red line)'을 전 세계에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3) 영토 분쟁이라는 구조적 장벽
조지아의 NATO 가입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은 미해결 영토 분쟁입니다.
NATO 헌장 제5조는 집단방위 조항입니다. 회원국 중 하나가 공격받으면 모든 회원국이 이를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대응한다는 내용입니다. 조지아가 가입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있는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 지역은 어떻게 되는 것일 까요?
이론적으로, 조지아 가입 시 NATO는 러시아군에게 철수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가 거부하면 제5조가 발동되어 NATO와 러시아 사이에 전면전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이 시나리오는 기존 회원국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습니다.
NATO 가입은 만장일치로 결정됩니다. 32개 회원국 중 단 하나라도 반대하면 성사되지 않습니다. 영토 분쟁을 안고 있는 국가를 받아들여 제3차 세계대전의 위험을 감수할 회원국은 없습니다.
(4) 집권당의 이중적 태도
최근 '조지아의 꿈' 정부의 행보는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헌법에 명시된 NATO 통합 의무를 말로는 존중하면서, 실제로는 서방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행동을 취하고 있습니다.
2024년 7월, 코바히제 총리는 "현재 NATO에는 확장의 과제가 없다"고 발언했습니다. 조지아 정부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방이 조지아를 '제2의 전선'으로 삼으려 한다는 음모론을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평화의 수호자'로, 서방과 야당을 '전쟁 세력'으로 프레 이밍합니다.
제임스타운 재단의 2025년 6월 분석에 따르면, '조지아의 꿈' 정부는 2025년 7월 1일부로'NATO와 EU를 위한 정보센터'를 폐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센터는 2005년 친서방 정부가 설립한 것으로, NATO와 EU의 가치를 홍보하고 가입에 대한 국민 인식을 높이기 위한 기관이었습니다.
NATO 주재 조지아 연락사무소는 이에 대해 2008년 부쿠레슈티 정상회의의 조지아 회원국 결정에 대한 약속을 재확인하는 짧은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5) 정상회의에서의 배제
조지아 정부와 NATO의 관계 악화는 수치로 확인됩니다.
2023년 7월 빌뉴스(Vilnius) NATO 정상회의에 이라클리 가리바슈빌리(Irakli Garibashvili) 당시 총리는 초청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NATO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발언을 한 직후였습니다.
2024년 7월 워싱턴 NATO 정상회의에도 코바히제 총리는 초청받지 못했습니다. NATO 창설 75주년 기념 정상회의였습니다. '지오폴리틱스(GEOPolitics)' 분석에 따르면, 2024년 워싱턴 정상회의 선언문에서 조지아는 단 한 문장으로만 언급되었습니다. 2008년 부쿠레슈티 결정에 대한 어떤 언급도, 새로운 협력 이니셔티브도 없었습니다. 이는 2008년 이후 모든 정상회의 선언문 중 전례 없는 침묵이었습니다.
2025년 5월, NATO 의회 총회(NATO Parliamentary Assembly) 데이턴 회의에서 조지아 의회 대표단의 투표권이 박탈되었습니다. 조지아 의회주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2025년 6월, '조지아의 꿈'은 코바히제 총리가 헤이그에서 열리는 NATO 정상회의에 초청 받지 못했음을 확인했습니다.
(6) 핀란드·스웨덴과의 대비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핀란드와 스웨덴은 NATO 가입을 결정했습니다. 오랜 중립국이었던 두 나라입니다. 핀란드는 2023년 4월, 스웨덴은 2024년 3월 정식 회원 국이 되었습니다. 유례없이 빠른 가입 절차였습니다.
조지아인들은 복잡한 심경으로 이를 지켜보았습니다. '부러움'과 '박탈감'이 섞인 감정이었습니다. 조지아는 핀란드나 스웨덴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NATO 가입을 추진해왔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비회원국 중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했습니다. 가장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군사 시스템을 NATO 표준에 맞춰 개혁했습니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할 만큼 했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습니다. 서방의 '이중 잣대'에 대한 불만입니다. 이 불만은 정부에 의해 NATO 회의론으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지오폴리틱스'의 2024년 분
석은 우크라이나의 경우 MAP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NATO가 결정한 반면, 조지아에게는 여전히 MAP가 "통합 과정의 필수적 부분"이라고 요구하는 현실을 지적합니다. 이미 동일한 내용의 연례 국가 프로그램(ANP)을 15차례나 이행했음에도 말입니다.
NATO 가입의 꿈은 점점 현실 정치의 뒤편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그 빈자리를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이름의 실리 외교가 채우고 있습니다.
라. 튀르키예·중국·이란, 새로운 변수들
(1) 다변화의 필요성
서구와의 관계가 삐걱거리는 사이, 조지아는 전통적인 '서방 바라기'에서 벗어나 주변 강대 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다변화 전략'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튀르키예, 중국, 이란이 그 핵심 대상입니다.
카네기국제평화재단(Carnegie Endowment)의 2024년 8월 분석은 조지아가 "서방과의 관계 악화 속에서 장기적인 유라시아 전환(Eurasian pivot)에 착수했다"고 진단합니다. "러시아 와의 관계 안정화 가능성까지 포함하는" 변화입니다.
(2) 튀르키예: 경제적 생명줄
튀르키예는 조지아의 경제적 생명줄입니다. 조지아의 최대 무역 상대국 중 하나이며, 서남쪽 국경을 맞대고 있는 NATO 회원국입니다.
아자라(Ajara) 자치공화국의 수도 바투미(Batumi)는 사실상 튀르키예 경제권입니다. 스카 이라인을 채우는 고층 호텔과 카지노 상당수가 튀르키예 자본으로 지어졌습니다. 튀르키예 국경에서 불과 30분 거리인 바투미는 주말이면 도박이 금지된 튀르키예에서 넘어온 관광객으로 붐빕니다.
에너지와 물류 측면에서도 튀르키예는 핵심입니다. BTC 송유관과 남코카서스 가스관의 종착지가 튀르키예입니다. 바쿠-트빌리시-카르스(BTK) 철도는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튀르키예를 연결하여 중국에서 유럽까지 화물을 운송합니다. 조지아는 이 '중간 회랑'의 핵심 구간입니다.
튀르키예-조지아-아제르바이잔 3국 협력은 러시아를 견제하는 지역 안보 축으로도 기능합니다. 2025년, 미하일 카벨라슈빌리(Mikheil Kavelashvili) 조지아 대통령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ğan) 튀르키예 대통령과 회담하여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재확인했습니다.
조지아에게 튀르키예는 NATO 회원국이면서도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 '모델'이기도 합니다. 튀르키예는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제재에 전면 동참하지 않으면서도 NATO 회원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서방 사이의 중재자를 자처하기도 합니다. 2024년에는 BRICS 가입을 신청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3) 중국: '일대일로'의 핵심 거점
가장 주목해야 할 변수는 중국입니다. 중국에게 조지아는 '일대일로(Belt and Road Initiative)'의 핵심 거점입니다. 카스피해와 흑해를 잇는 '중간 회랑'의 병목 구간에 조지아가 위치하기 때문입니다.
2023년, 조지아와 중국은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수립했습니다. 조지아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재확인하고 대만 및 신장·티베트 문제에서 베이징의 입장을 지지했습니다. 중국은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으며 조지아의 영토적 통합을 지지한다고 밝혔습니다.
2024년 5월, 조지아 정부는 아나클리아(Anaklia) 심해항 개발 사업자로 중국 컨소시엄을 선정했습니다. 중국통신건설(CCCC, China Communications Construction Company)이 주도하고 싱가포르의 친포트(Qingdao Port International), 중국도로교량공사(CRBC) 등이 참여하는 컨소시엄입니다. 1단계 투자 규모만 6억 달러입니다.
아나클리아 심해항은 조지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프라 프로젝트입니다. 흑해 연안에 위치한 이 항구는 중간 회랑의 핵심 물류 거점이 될 전망입니다. 조지아 정부는 51%의 지분을 보유하여 경영권을 유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미국은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CCCC는 미국 상무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는 기업입니다. 남중국해에서 군사 목적의 인공섬 건설에 관여했다는 이유입니다. 중국도로교량공사(CRBC)는 세계은행으로부터 필리핀 사업에서의 부정행위로 제재를 받은 전력이 있습니다.
미 의회는 2025년 5월 '메고바리법(MEGOBARI Act)'을 통과시켰습니다. '조지아의 책임성, 회복력, 독립성 구축을 위한 동원 및 강화 법'의 약자이며, '메고바리'는 조지아어로 '친구'를 뜻합니다. 이 법은 유로-아틀란틱 통합을 저해하는 조지아 정부 인사에 대한 제재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합니다. 아나클리아 항구의 중국 개발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4) 중국 자본의 확산
중국의 조지아 진출은 아나클리아 항구에 그치지 않습니다.
중국도로교량공사는 2018년부터 조지아에서 활동하며 동서 고속도로의 우비사-쇼라파니(Ubisa-Shorapani) 구간 건설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조지아 최대 규모의 크베셰티-코비(Kvesheti-Kobi) 터널 공사도 중국 기업이 수행합니다. 이 터널은 러시아 국경으로 이어지는 조지아 군사 도로의 핵심 구간입니다.
FPRI의 2024년 12월 분석에 따르면, 중국은 조지아의 인프라와 전략적 프로젝트에 집중 투자하며 "이 나라의 경제적 발자국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업들은 중국의 "유라 시아 전역에서 연결성과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더 넓은 목표에 부합"합니다.
중국은 이제 조지아의 주요 무역 상대국입니다. 수입 3위, 수출 4위를 차지합니다. 조지아의 서방 관계가 소원해지는 틈을 타 중국과의 경제적 밀착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중국 투자의 성격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습니다. 서방 자금은 대체로 거버넌스, 투명성, 규범 준수를 요구합니다. 중국 자금은 프로젝트 성과와 담보 구조에 초점을 맞춥니다. 어느 쪽이 '좋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조지아의 제도적 체질에 미치는 영향은 다릅니 다.
(5) 이란: 제재 속의 기회
이란은 조지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 시절부터 조지아를 지배했던 역사적 인연이 있습니다. 최근 양국 관계에 변화의 조짐이 보입니다.
카네기 재단 분석에 따르면, 코바히제 총리는 2024년 5월 이란 대통령 에브라힘 라이시(Ebrahim Raisi)의 헬리콥터 사고 사망 이후 두 차례나 테헤란을 방문했습니다. "전통적으로 볼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따뜻한 관계의 길을 닦을 가능성"이 있는 행보입니다.
이란에게 조지아는 유럽으로 나가는 통로입니다. 서방의 제재로 막힌 서쪽 길을 흑해와 코카서스를 통해 우회할 수 있습니다. '남북 수송로(North-South Corridor)'의 일환으로 페르시 아만에서 조지아 흑해 항구까지 연결하는 물류망 구상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러시아, 이란, 튀르키예,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가 참여하는 '3+3 플랫폼'이 있습니다. 러시아와 이란이 주도하는 이 협의체에서 조지아의 역할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란과의 관계 강화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미국의 강력한 대이란 제재 때문입니다. 이란과 거래하는 기업이나 금융기관은 미국 시장에서 배제될 수 있습니다. 조지아가 이란과의 경제 협력을 넓히면 서방의 제재 우회 창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FPRI의 2024년 12월 분석은 러시아, 이란, 중국이 "에너지, 금융, 기술에서 미국 주도 제재 체제를 회피하기 위해 협력하는 수정주의 축(revisionist axis)"을 형성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조지아가 이 축에 편입될 경우, 미국과의 관계는 회복 불가능한 지점에 이를 수 있습니다.
(6) 다극화 시대의 생존법
결국 조지아는 "러시아냐 서방이냐"라는 이분법을 넘어선 다차원 방정식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러시아라는 실존적 위협, 멀어지는 NATO와 미국의 우산, 에너지 통로로서의 전략적 가치, 그 틈을 파고드는 튀르키예의 경제적 실용주의, 중국의 거대 자본과 인프라 야망, 이란의 지정학적 이해관계. 이 모든 변수가 동시에 작용합니다.
'내셔널 인터레스트(National Interest)'의 2025년 12월 분석은 현재의 지형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아르메니아는 오랫동안 러시아의 위성국으로 여겨졌으나 이제 크렘린에 저항하며 서방과 군사 훈련에 참여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EU 및 미국과 무역·에너지 관계를 심화하려는 실용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행위자로 인식된다. 이 시점에서 조지아만이 남코카 서스에서 유일한 반서방 행위자이며, 수정주의 국가들의 영향력에 동조적이다."
이 분석이 과장인지, 정확한 진단인지는 앞으로의 전개가 말해줄 것입니다.
조지아 정부는 이러한 강대국들 사이에서 국익을 극대화하고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략'인지 '임기응변'인지도 시간이 답할 것입니다. 임기응변은 대개 강대국이 가장 좋아하는 상대입니다.
여행자가 카헤티의 와인 잔을 기울이며 느끼는 그 미묘한 긴장감은, 바로 이러한 강대국들의 각축전이 빚어낸 역사의 향기일지도 모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