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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제1장. 바드나가르의 소년 (1950–1970)
짜이왈라에서 총리까지
제1장. 바드나가르의 소년 (1950–1970)
김경진
1.1 플랫폼 위의 소년
구자라트주 바드나가르(Vadnagar)역. 새벽 5시에 눈을 뜬 소년이 양은 냄비에 물을 올립니다. 짜이 잎을 넣고, 우유를 붓고, 설탕을 녹입니다. 기차가 도착하면 2~3분이 전부입니다. 그 사이에 가능한 한 많이 팔아야 합니다. 한 잔에 10파이사. 하루에 잘 팔면 2루피. 소년의 이름은 나렌드라 다모다르다스 모디(Narendra Damodardas Modi). 훗날 14억 인구의 지도자가 될 사람의 하루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1950년 9월 17일. 인도가 공화국 헌법을 시행한 지 불과 8개월, 분단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시점에 소년은 태어났습니다. 바드나가르는 2,000년 넘는 역사를 품은 고대 도시였습니다. 한때 불교 학문의 중심지로 번성했고, 7세기 중국 승려 현장(玄奘)이 이곳을 방문하여 "아난다푸라(Anandapura)"라는 이름으로 기록을 남긴 곳이기도 합니다. 힌두 사원들이 곳곳에 자리했지만, 20세기 중반 이 마을에 남은 것은 영광의 잔해뿐이었습니다. 좁은 골목에 낡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주민 대부분은 하루하루를 겨우 넘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디가 태어난 집은 약 40피트 길이에 12피트 폭, 한국식으로 환산하면 약 4평 남짓한 흙벽 단칸방이었습니다. 창문이 없어 낮에도 어두웠고,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요리를 하면 연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고, 장마철에는 지붕에서 비가 새어 바닥이 질퍽해졌습니다. 이 좁은 공간에서 부모와 여섯 남매가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잠을 청했습니다. 가난은 이 가정의 배경 음악이 아니라 전부였습니다.
인도에서 가난은 흔합니다. 수억 명이 비슷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비슷한 어려움 속에서 자랍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소년만 달랐을까요? 무엇이 그를 기차역 플랫폼에서 뉴델리의 총리관저까지 밀어 올렸을까요?
그 답의 첫 번째 실마리는 카스트에 있습니다. 모디의 가문은 '모드-간치(Modh-Ghanchi)'라는 카스트에 속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식물성 기름을 짜서 파는 직업 카스트였으며, 인도 정부 분류로는 '기타 후진 계급(OBC, Other Backward Class)'입니다. 불가촉천민(Dalit)은 아니었지만, 상층 카스트가 장악한 정치·행정·교육의 세계에서는 사실상 보이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한국 독자들에게 이 의미를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1970년대 한국에서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시골 가난뱅이 아이도 공부를 잘하면 서울대에 가고 판검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인도의 OBC 출신이 총리가 된 것도 비슷한 서사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의 '개천'은 노력으로 뚫을 수 있는 벽이었지만, 인도의 카스트는 태어나는 순간 몸에 새겨지는 낙인에 가까웠습니다. 상층 카스트 출신의 네루(Nehru)와 간디(Gandhi) 가문이 독립 이후 수십 년간 인도 정치를 지배했습니다. 그 견고한 벽을 뚫고 올라왔다는 점이, 훗날 모디가 대중 연설에서 "나는 여러분과 같은 곳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할 때 수억 명이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아버지 다모다르다스 물찬드 모디(Damodardas Mulchand Modi, 1915?~1989)는 원래 기름을 짜는 가업을 이어받았으나, 그것만으로는 여섯 아이를 먹여 살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드나가르 기차역 플랫폼 한쪽에 나무 판자와 양철 지붕으로 얼기설기 엮은 노점을 펼치고 짜이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1887년에 개통된 메사나-바드나가르 철도 노선은 하루 몇 대의 기차만 정차하는 시골 노선이었지만, 그 몇 분 동안 몰려드는 승객들이 유일한 수입원이었습니다.
어린 나렌드라는 여섯 살 무렵부터 아버지를 도왔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짜이를 끓이고, 뜨거운 주전자를 들고 객차 창문으로 달려가 "짜이! 가람 짜이!(따뜻한 차!)"를 외쳤습니다. 기차가 정차하는 2~3분은 전쟁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동전을 받고 찻잔을 건네고, 거스름돈을 돌려주고, 다음 창문으로 뛰는 것을 기차가 떠날 때까지 반복해야 했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다시 역으로 달려갔고, 나중에는 형과 함께 버스 터미널 근처에서 별도의 노점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권력을 추적하는 관점에서 이 기차역은 노동의 현장만은 아니었습니다. 기차는 인도의 모든 계층이 뒤섞이는 용광로입니다. 소년 모디는 짜이 쟁반을 들고 수많은 이방인을 만났습니다. 땀 냄새 나는 농부, 뭄바이로 가축을 운송하는 상인, 빳빳한 정장의 관료, 군복을 입은 병사. 그는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본능적으로 체득했습니다. 구자라트어가 모국어였던 소년은 우타르프라데시와 비하르에서 온 상인들에게 차를 팔며 힌디어를 자연스럽게 익혔습니다. 이 '플랫폼 언어 학습'이 없었다면, 훗날 그가 힌디어로 인도 전역을 사로잡는 연설을 할 수 있었을까요?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했을 때, 열다섯 살 소년은 전선으로 향하는 군인들에게 무료로 짜이를 대접했습니다. 아홉 살 때는 타피(Tapi) 강 홍수로 이재민이 발생하자, 친구들과 음식 가판대를 열어 수익금을 기부했습니다. 이 일화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모디의 '짜이왈라(Chaiwala, 차 파는 사람)' 서사가 정치적으로 부각된 것은 2014년 총선을 앞두고였기 때문입니다. 국민회의당(Congress)의 마니 샨카르 아이야르(Mani Shankar Aiyar)가 "그는 짜이나 팔면 된다"고 조롱하자, BJP 선거 캠프는 이를 뒤집어 '차이 페 차르차(Chai Pe Charcha, 차 한 잔의 대화)'라는 캠페인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서민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정치적 무기로 재가공된 것입니다. 짜이왈라 서사가 사실인지 과장인지를 단정하기보다는, 그 서사가 인도 정치에서 작동하는 방식 자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머니 히라벤 모디(Hiraben Modi, 1923~2022)는 글을 읽지 못했지만 강인한 사람이었습니다. 남의 집 빨래와 설거지를 하며 가계를 보탰고, 그러면서도 이웃의 굶주린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모디는 훗날 인터뷰에서 어머니의 거칠어진 손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2022년 12월 30일, 히라벤이 100세에 가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이미 총리 3선을 바라보는 아들은 어머니의 발에 이마를 대고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그 모습은 인도 전역에 생중계되었습니다. 기차역의 소년에게 이 어머니는 가난이라는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꺼지지 않는 등불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모디는 성적이 두드러지는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에서 남달랐습니다. 웅변과 연극. 그는 무대 위에서 왕이나 전사 같은 영웅적 캐릭터를 맡는 것을 고집했고, 주연이 아니면 참여하지 않겠다고 버텼다고 합니다. 현실에서는 기차역에서 찻잔을 씻는 소년이었지만, 무대 위에서만큼은 제국을 호령하는 지도자였습니다. 방과 후에는 마을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그가 가장 오래 손에 든 책은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의 전기였습니다. "일어나라, 깨어나라,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멈추지 말라." 이 구절은 흙바닥 위에서 등유 램프 빛에 의지해 책을 읽던 소년의 가슴속에 하나의 명령어처럼 새겨졌습니다. (비베카난다가 모디의 세계관에 미친 영향은 1.4절에서 자세히 다룹니다.)
가난 속에서도 모디는 자존심을 지키는 방식이 독특했습니다. 다리미가 없었기에 놋쇠 컵에 숯을 넣어 교복을 다렸고, 친구가 버리고 간 분필 조각을 모아 캔버스화를 하얗게 칠했습니다. 이런 세부적 행위들은 사소해 보이지만, 가난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훗날 그가 매 공식 석상에서 완벽하게 다려진 옷과 정돈된 수염으로 나타나는 이미지 정치의 원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덟 살, 운명의 문이 열렸습니다. 소년은 마을의 민족의용단(RSS, Rashtriya Swayamsevak Sangh) 지부 모임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RSS는 쉽게 말해 힌두교판 향우회 같은 조직입니다. 다만 회원이 수백만 명이고, 매일 아침 체조를 하며, 인도는 힌두교 국가여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향우회입니다. 카키색 반바지를 입고 대나무 봉을 휘두르며 구호를 외치는 소년들 사이에서, 나렌드라는 처음으로 '조직'이라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카스트에 관계없이 모두가 동등한 동지라는 RSS의 원칙은, 하층 카스트 출신 소년에게 사회적 차별 없이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최초의 공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평생의 멘토 락슈만라오 이남다르(Lakshmanrao Inamdar)를 만납니다. (이남다르와의 관계는 1.3절에서 상세히 서술합니다.)
기차역의 짜이 연기와 RSS 지부의 체조 구령. 이 두 가지가 소년 모디의 세계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는 생존을 가르쳤고, 다른 하나는 신념을 심었습니다. 가난은 그에게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대중의 언어를 체득하는 학교였습니다.
1.2 떠난 신랑
1968년 어느 날, 바드나가르의 한 집에서 소박한 결혼식이 치러졌습니다. 신랑은 열여덟 살 나렌드라 모디, 신부는 열일곱 살 자쇼다벤 치만랄 모디(Jashodaben Chimanlal Modi). 간치 카스트의 관습대로 두 사람은 이미 어릴 때 부모들끼리 약혼을 맺어놓은 사이였습니다. 결혼식은 짧았고, 화려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신랑의 마음이 거기 있지 않았습니다. 이 결혼식은 한 청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거부'의 출발점이 됩니다.
왜 모디는 결혼을 거부했을까요? 겉으로는 RSS 전임 활동가(Pracharak, 프라차락)가 되기 위한 조건 때문이었습니다. 프라차락은 독신을 유지해야 했고, 가정에 대한 일체의 세속적 유대를 끊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열여덟 살 소년이 조직의 규율만으로 아내를 버리고 집을 떠날 수 있었을까요? 이 결정의 이면에는 더 깊은 무언가가 있었을 것입니다. 기차역에서 찻잔을 씻으며 보낸 유년, 카스트의 벽 너머를 갈망했던 독서의 시간, 비베카난다가 심어놓은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멈추지 말라"는 명령. 결혼이라는 사적 유대는 그 모든 것을 향한 도약에서 닻줄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자쇼다벤은 관습에 따라 시댁에 머물렀지만, 모디는 그녀와 부부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결혼은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자쇼다벤은 훗날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그는 나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원하는 곳으로 떠돌 것이다. 당신이 나를 따라다닐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시댁에 갈 때마다 그는 집에 없었습니다." 약 3년에 걸쳐 그녀가 남편과 함께한 시간은 총 석 달 남짓이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스스로 학업을 이어갔고, 1972년 중등교육 자격을 취득한 뒤 교사가 되었습니다. 구자라트 바나스칸타(Banaskantha) 지구의 시골 학교에서 89명의 아이들을 가르치며 조용히 생을 보냈습니다. 2014년, 남편이 총리가 된 후에도 그녀의 삶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경호원 없이 오토릭샤를 타고 다녔고, 선거 때는 줄을 서서 투표했습니다. 2025년 현재, 그녀는 구자라트 운자(Unjha)에서 오빠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월 연금은 1만 4천 루피, 한국 돈으로 약 22만 원입니다.
이 결혼 이야기에서 우리는 빛과 그림자를 함께 봐야 합니다. 모디의 지지자들은 이것을 '위대한 포기'로 해석합니다. 개인의 행복을 버리고 국가에 헌신한 수행자의 결단이라는 서사입니다. 모디 자신도 "나에게는 가족이 없다. 14억 인도 국민이 나의 가족이다"라고 여러 차례 말해왔습니다. 반면 비판자들은 전혀 다르게 봅니다. 열일곱 살 소녀가 아무런 합의 없이 버림받았고, 남편은 수십 년간 그 결혼의 존재조차 부정했다는 사실은, '헌신'이라는 포장 아래 가려진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모디가 결혼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2014년 총선 후보 등록 서류를 제출하면서였습니다. 46년간 침묵했습니다.
판단은 독자의 몫입니다. 다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이 결혼의 존재를 숨기지 않았다면 모디는 RSS 프라차락이 될 수 없었고, 프라차락이 되지 못했다면 BJP에 배치되지 못했을 것이며, BJP에 없었다면 구자라트 주총리도, 인도 총리도 존재하지 않았으리라는 점입니다. 권력의 궤적을 추적하면, 이 '비밀 결혼'은 모디 정치 경력의 구조적 전제 조건이었습니다.
결혼식 직후 모디는 집을 나섰습니다. 1967년이라는 설도 있고 1968년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정확한 시점은 본인조차 분명히 밝히지 않았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가 작은 가방 하나에 옷 몇 벌과 책 한 권만을 챙겨 바드나가르를 떠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약 2년 동안 인도 북부와 북동부를 가로지르는 방랑의 길에 올랐습니다.
이 2년은 모디의 인생에서 가장 신비로운 시기입니다. '잃어버린 시간(The Lost Years)'이라 불리는 이 기간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있는 것은 모디 자신의 회고와 몇몇 전기 작가들의 간접 증언뿐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대한 서술은 불가피하게 '모디의 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먼저 밝혀둡니다.
그가 첫 번째로 향한 곳은 콜카타(Kolkata) 근교의 벨루르 마트(Belur Math)였습니다. 비베카난다가 세운 라마크리슈나 선교회(Ramakrishna Mission)의 본산입니다. 모디는 이곳에서 승려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스와미 마다바난다지 마하라즈(Swami Madhabanandaji Maharaj)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대학 교육을 마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거절당한 청년은 콜카타를 떠나 서벵골을 지나고, 아삼(Assam)의 구와하티(Guwahati)와 실리구리(Siliguri)까지 동북부 인도를 떠돌았습니다. 그 후 다시 방향을 바꿔 히말라야 산록의 알모라(Almora)에 있는 아드바이타 아슈람(Advaita Ashrama)을 찾아갔습니다. 역시 같은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구자라트의 라지코트(Rajkot) 라마크리슈나 미션 지부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 번의 거절. 이 연속된 거절이 모디의 인생 항로를 결정했습니다. 만약 벨루르 마트가 그를 받아들였다면, 오늘의 모디는 갠지스 강변에서 기도를 올리는 무명의 승려였을 것입니다. 거절은 때로 운명이 방향을 바꾸는 방식입니다. 한국의 정치사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박정희가 사범학교 교사로 머물렀다면 쿠데타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김대중이 사업가로 성공했다면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지도자의 궤적에서 '좌절된 꿈'은 다른 방향으로의 거대한 도약을 준비하는 용수철이 됩니다.
승려가 되지 못한 청년은 히말라야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리시케시(Rishikesh), 케다르나트(Kedarnath) 등 힌두교의 성지를 순례하며 사두(Sadhu, 고행자)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영하의 추위 속에서 얇은 옷 하나로 버텼고, 동굴에서 명상을 하고, 탁발로 끼니를 해결했습니다. 그가 훗날 회고한 바에 따르면, "새벽에 일어나 차가운 강물에 목욕하고, 해가 뜰 때까지 명상했다.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했다. 산과 눈과 높은 봉우리 속의 세계가 나를 형성했다"고 합니다.
이 방랑이 모디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는 직접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결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그는 이 시기에 인도의 광활함과 참혹한 빈곤을 동시에 목격했습니다. 콜카타의 빈민가에서 병든 아이를 안고 구걸하는 어머니를 보았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산속의 명상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깨달음이 그때 찾아왔습니다. 둘째, 극한의 고행은 그의 신체와 정신을 단련했습니다. 하루 4~5시간만 자는 습관, 새벽 요가와 명상, 물질에 대한 극도의 절제는 이 시기에 굳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셋째, 라지코트에서 만난 스와미 아트마스타난다(Swami Atmasthananda)가 건넨 한마디는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너의 길은 사원 안에 있지 않고, 사회 속에 있다." 사원이 소년을 거부했기에, 소년은 세상 전체를 사원으로 삼기로 결심했습니다.
1969년 말 혹은 1970년 초, 모디는 구자라트로 돌아왔습니다. 고향 바드나가르에 잠시 들렀으나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향한 곳은 구자라트의 중심 도시 아마다바드(Ahmedabad)였습니다. 그곳에서 삼촌이 운영하는 구자라트 주 도로교통공사(GSRTC) 구내식당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RSS 본부인 헤드게와르 바반(Hedgewar Bhavan)의 문을 다시 두드렸습니다.
히말라야의 추위가 그의 몸을 단련했고, 세 번의 거절이 그의 방향을 틀었고, 비베카난다의 가르침이 그의 사명을 규정했습니다. 결혼이라는 사적 유대를 끊은 자리에 조직이라는 공적 헌신이 들어앉았습니다. 소년은 플랫폼을 떠났고, 청년은 히말라야를 넘었습니다. 이제 조직의 설계자가 될 차례였습니다.
그리고 운자의 작은 마을에서 홀로 늙어가는 자쇼다벤은, 이 서사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무거운 그림자로 남아 있습니다.
1.3 카키 반바지를 입은 아이들
1958년, 구자라트주 바드나가르의 먼지 날리는 공터. 해 질 무렵이면 카키색 반바지를 입은 소년들이 하나둘 모여들었습니다. 대열을 맞춰 서고, 구령에 맞춰 움직이고, 사프란색 깃발 아래서 기도문을 암송했습니다. 여덟 살 나렌드라 모디가 그 대열의 끝자락에 끼어들었을 때, 그것이 자신의 인생 전체를 결정짓는 순간이 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모디가 발을 들인 곳은 '민족의용단(Rashtriya Swayamsevak Sangh, 이하 RSS)'의 지역 지부 모임인 '샤카(Shakha)'였습니다. RSS를 한국 독자에게 한마디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힌두교판 거대 향우회이자, 보이스카우트와 예비군 훈련이 결합된 형태의 조직입니다. 다만 회원이 수백만 명이고, 매일 아침 전국 각지에서 모여 체조를 하며, 인도라는 국가가 힌두교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조직입니다.
RSS의 뿌리를 잠시 짚어봐야 합니다. 1925년 나그푸르(Nagpur)에서 케샤브 발리람 헤지와르(Keshav Baliram Hedgewar)가 창설했습니다. 의사 출신이었던 헤지와르는 힌두 사회가 카스트로 분열되고 외세에 짓밟히는 현실에 분개했습니다. 그가 세운 조직의 핵심 원칙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힌두 사회의 통합. 둘째, 규율 잡힌 풀뿌리 조직. 셋째, 개인이 아닌 조직 중심의 운영. 지도자 한 명이 쓰러져도 조직은 계속 돌아가는 구조를 만든 것입니다. 이 원칙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2025년 현재 RSS는 약 600만 명의 활동 회원을 보유한 세계 최대의 자원봉사 조직으로, 인도 전역 5만 7천여 개 샤카에서 매일 아침 모임을 진행합니다.
바드나가르에는 1944년부터 RSS 활동이 시작되었으나, 1948년 마하트마 간디 암살 사건 이후 정부의 금지 조치로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간디를 암살한 나투람 고드세(Nathuram Godse)가 전직 RSS 회원이었기 때문입니다. RSS는 공식적으로 암살과의 관련성을 부인했고, 이후 조사에서도 조직 차원의 연루는 입증되지 않았습니다. 금지는 1949년 해제되었지만, 조직은 서서히 재건되고 있었습니다. 소년 모디가 샤카에 합류한 것은 바로 이 재건기였습니다.
형 소마바이(Sombhai)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나렌드라는 항상 뭔가 다른 것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집과 학교에서 하는 일상 이상의 무언가를요. RSS 샤카가 바로 그것을 제공했습니다."
어린 모디에게 샤카는 놀이터 그 이상이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가난한 동네의 소년이 처음으로 태권도장에 발을 들인 것과 비슷한 경험이었을 겁니다. 다만 이 도장에서는 몸만 단련하는 게 아니라 정신도 단련했습니다. 매일 저녁 한 시간 동안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엄격한 순서를 따랐습니다. '수리야 나마스카르(Surya Namaskar, 태양 경배 요가)'로 몸을 풀고, '라티(Lathi)'라고 불리는 대나무 봉술을 연마하고, 카바디(Kabaddi)와 코코(Kho-Kho) 같은 팀 스포츠로 체력을 다졌습니다. 땀이 마르면 일렬로 서서 사프란색 깃발(Bhagwa Dhwaj)을 게양하고, "나마스테 사다 바트살레 마트리부메(Namaste Sada Vatsale Matrubhume, 영원히 사랑하는 조국이여, 당신께 경배합니다)"라는 기도문을 함께 암송했습니다.
이 기도문은 어린 모디의 입에서 매일같이 흘러나오며 그의 언어와 사고 체계를 빚어나갔습니다. 학교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위대한 힌두 문명'의 서사, 외세에 짓밟힌 조국의 아픔, 그리고 그것을 되찾아야 한다는 사명감. 가난한 찻집 아들이라는 현실은 샤카 안에서 지워졌습니다. 그곳에서는 누가 상위 카스트인지, 누구네 집이 부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조직에 대한 충성심과 규율만이 평가의 기준이었습니다. 이것이 하층 카스트(OBC) 출신 소년에게 처음으로 자존감을 심어준 해방구가 된 이유입니다.
운명의 스승, 바킬 사헤브
모디의 인생에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락슈만라오 이남다르(Lakshmanrao Inamdar). 변호사 자격이 있어 '바킬 사헤브(Vakil Saheb, 변호사 선생님)'라는 존칭으로 불렸던 이 사람은 구자라트 지역 RSS의 '프란트 프라차라크(Prant Pracharak)', 즉 지역 전임 활동가를 총괄하는 거물급 간부였습니다.
이남다르는 1920년 카르나타카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법학을 공부했지만 변호사 개업 대신 RSS에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구자라트를 순회하며 RSS 조직을 확장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바드나가르를 방문했을 때 유난히 눈빛이 살아있는 한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훈련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때, 이 소년은 남아서 훈련장 바닥을 쓸고 깃발을 정리했습니다. 이남다르는 이 소년을 '발 스와얌세박(Bal Swayamsevak, 소년 단원)'으로 정식 입단시켰고, 이후 평생의 멘토가 되었습니다.
이남다르와 모디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RSS의 독특한 멘토링 시스템을 알아야 합니다. RSS에서는 재능 있는 젊은이를 발견하면 '마나스 푸트라(Manas Putra)', 즉 '영적 아들'로 삼아 집중 육성합니다. 이남다르에게 모디는 바로 그런 존재였습니다. 모디의 친아버지 다모다르다스가 기차역에서 생계를 꾸리는 현실의 아버지였다면, 이남다르는 국가관과 역사관, 그리고 인생의 태도를 가르친 이념의 아버지였습니다.
이남다르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인도는 가난한가?", "힌두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그는 책을 추천해주고, 토론을 유도하며 사고의 지평을 넓혀주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을 얻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조직원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의 말을 경청하며, 감정적 유대를 형성하는 기술. 훗날 모디가 보여준 탁월한 대중 장악력과 선거 전략의 원형은 이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모디는 훗날 스승을 기리며 『조티푼지(Jyotipunj, 빛의 무리)』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이남다르를 "내 인생의 궤적을 빚어낸 조각가"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남다르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기차역에서 짜이를 팔던 소년은 기차역에서 짜이를 파는 어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봉사와 헌신: 조직의 부품이 되다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으로 자라면서 모디의 RSS 활동은 점점 깊어졌습니다. 그는 소년 단원들의 리더 격인 '무키아 시크샤크(Mukhya Shikshak, 수석 교관)'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수십 명의 또래와 후배들을 통솔하고, 출석을 관리하며, 훈련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책임을 지는 자리였습니다. 열서너 살 소년이 조직을 관리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던 셈입니다.
기차역에서 차를 파는 고단한 일상 속에서도 모디는 샤카 활동을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기차역으로 달려가 아버지를 돕고, 샤카 시간이 되면 카키색 반바지로 갈아입고 훈련장으로 뛰어갔습니다. 밤에는 다시 이남다르나 선배 활동가들의 심부름을 하며 늦은 시간까지 조직의 분위기를 익혔습니다. RSS가 강조하는 '세바(Seva, 봉사)'의 정신이 소년의 뼛속까지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가족 대신 조직을 택하다
10대 후반, RSS는 모디에게 취미 활동이 아닌 '업(業)'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멘토 이남다르는 "개인의 작은 가족을 버리고, 사회라는 큰 가족을 위해 살라"고 독려했습니다. 모디가 열여덟 살에 조혼을 거부하고 집을 떠나 히말라야로 향한 것(1.2절 참조), 그리고 2년의 방랑을 마치고 1970년경 돌아왔을 때, 그가 귀착한 곳은 부모의 집이 아니라 아마다바드(Ahmedabad)의 RSS 본부인 '헤드게와르 바반(Hedgewar Bhavan)'이었습니다.
헤드게와르 바반에서의 생활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새벽 5시에 기상하여 선배 활동가들을 위해 차를 끓이고, 넓은 사무실과 방들을 홀로 청소하고, 멘토 이남다르의 옷을 손빨래하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12~15명의 활동가가 기거하는 공간에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았지만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낮추고 조직에 헌신하는 '세바'의 실천이었습니다.
1971년, 방글라데시 해방 전쟁에 참전을 촉구하는 자나 상(Jana Sangh)의 시위에 참가한 것이 모디의 첫 번째 공식적인 정치 활동으로 기록됩니다. 같은 해 그는 RSS의 전임 활동가인 '프라차라크(Pracharak)'가 되기로 서약했습니다. 프라차라크는 결혼과 가정을 포기하고 오로지 조직과 국가를 위해 살겠다는 맹세입니다. 한국으로 치면 출가 수도승의 서원과 비슷합니다. 다만 산속이 아니라 세속의 한복판에서 금욕적으로 투쟁하는 것이 다릅니다.
8세 때 처음 들어선 샤카의 흙바닥에서부터 스무 살 청년이 서약한 프라차라크의 길까지. RSS는 나렌드라 모디라는 인물을 빚어낸 용광로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힌두 민족주의라는 사상적 토대를 다졌을 뿐 아니라, 규율과 금욕, 조직에 대한 충성, 그리고 사람을 움직이는 법을 배웠습니다. 가난한 찻집 소년은 강철 같은 규율과 조직력을 갖춘 힌두 민족주의 전사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1.4 신들의 언어로 세상을 읽다
2019년 5월, 인도 총선이 끝난 직후. 히말라야 해발 3,583미터, 케다르나트(Kedarnath) 사원 인근의 캄캄한 동굴 속으로 한 남자가 들어갔습니다. 사프란색 숄을 두르고 맨발이었습니다. 인도의 총리 나렌드라 모디. 그는 이 동굴에서 밤새 홀로 명상을 했습니다. 카메라가 그의 명상 장면을 포착했고, 사진은 순식간에 인도 전역에 퍼졌습니다. 한국 독자들에게는 정치적 퍼포먼스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도인들에게 그 사진은 '국가를 위해 자신을 비운 수행자'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모디의 이 장면을 이해하려면, 바드나가르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사원의 종소리로 시작되는 하루
나렌드라 모디가 나고 자란 바드나가르는 고대부터 시바(Shiva) 신을 모시는 '하트케슈와르 마하데브(Hatkeshwar Mahadev)' 사원이 마을의 중심이었습니다. 아침이면 사원의 종소리와 만트라(Mantra, 주문)를 외는 소리가 자명종처럼 마을을 깨웠습니다. 어린 모디에게 이 소리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모디의 집안은 가난했지만 신앙심만큼은 깊었습니다. 어머니 히라벤은 글을 읽지 못했지만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마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다모다르다스도 매일 저녁 가족들에게 종교 서적을 읽어주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희미한 등불 아래서 어머니가 구전으로 들려주는 인도 대서사시 《라마야나(Ramayana)》와 《마하바라타(Mahabharata)》의 이야기. 신들과 영웅들의 전쟁, 의무와 희생, 선과 악의 대결. 이 이야기들은 소년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도덕적 나침반이 되었습니다.
모디는 매일 아침 학교에 가기 전 집 근처의 사원을 찾아 기도를 드리고 경내를 청소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사원의 웅장한 조각상들, 향 냄새, 순례객들의 행렬은 어린 그에게 신성함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주었습니다. 시바 신의 파괴와 창조의 힘, 그리고 금욕적인 수행자의 모습에 매료된 소년. 훗날 모디가 보여주는 강한 결단력과 때로는 냉혹하리만치 차가운 평정심은 시바 신을 숭배하는 구자라트의 정서와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한국에서 어린 시절 절에 다니거나 교회에 다녔던 경험이 성인이 된 후에도 삶의 태도를 좌우하는 것처럼, 바드나가르의 종교적 환경은 모디의 뼈대를 형성했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한국에서 종교는 대개 개인의 영역에 머무는 반면, 인도에서 힌두교는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것과 같은 생활 그 자체, 즉 '다르마(Dharma, 법/의무)'라는 점입니다.
스와미 비베카난다: 영혼의 스승
기복 신앙을 넘어 모디의 종교관을 철학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인물이 있습니다. 19세기 인도의 정신적 거인,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 1863~1902).
비베카난다는 콜카타의 부유한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스승 라마크리슈나(Ramakrishna)의 가르침을 받고 출가하여 수행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만국종교회의에서 "미국의 형제자매 여러분"이라는 유명한 연설로 서구 세계에 힌두 철학을 알린 인물입니다. 당시 서른 살의 무명 승려가 7천여 명의 청중 앞에서 기립박수를 받은 이 사건은, 식민지배 아래 억눌려 있던 인도인들의 자존심을 되살린 전환점이었습니다. 그가 전한 핵심 메시지는 이것이었습니다. 인도는 서구에 구걸하는 나라가 아니라, 수천 년 지혜를 품은 문명이다. 잠들어 있는 거인이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다.
"일어나라, 깨어나라, 목표를 이룰 때까지 멈추지 말라."
청소년기 모디는 바드나가르 도서관에서 비베카난다의 전집을 탐독하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문장은 모디의 좌우명이 되었습니다. 비베카난다의 사진을 항상 가슴에 품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2025년에도 모디는 인터뷰에서 "나는 어디를 가든 수천 년의 베다 전통과 스와미 비베카난다의 시대를 초월한 가르침을 가지고 간다"고 말했습니다.
비베카난다가 모디에게 건넨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실천적 베단타(Practical Vedanta)'였습니다. "가난한 이를 섬기는 것이 곧 신을 섬기는 것(Daridra Narayan Seva)"이라는 사상. 숲속에 숨어 혼자 해탈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봉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이라는 가르침. 이것이 훗날 모디가 정치를 종교적 수행과 동일시하는 이론적 토대가 됩니다. 그에게 '개발(Vikas)'은 경제 정책이 아니라 '다르마'의 실현이었습니다.
비베카난다의 영향은 모디의 히말라야 방랑(1.2절 참조)으로 직접 이어졌습니다. 비베카난다가 세운 라마크리슈나 미션에서 세 차례 거절당한 뒤에도 모디는 이 스승의 가르침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원 바깥에서 비베카난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금욕과 단식: 몸으로 실천하는 신앙
모디의 독실함은 관념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철저한 육체적 규율로 나타납니다. 어린 시절부터 엄격한 채식주의를 고수했고,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매일 새벽 4~5시에 기상하여 요가와 명상(Pranayama)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습관은 바드나가르 시절부터 형성된 것입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나브라트리(Navratri)' 단식입니다. 1년에 두 번, 9일간 이어지는 힌두교 축제 기간 동안 모디는 곡기를 끊고 오직 따뜻한 물만 마시며 지냅니다. 10대 시절 시작된 이 습관은 총리가 되어 격무에 시달리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4년 나브라트리 기간에 미국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의 일화는 유명합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주최한 국빈 만찬 자리에서 모디는 단식을 깨지 않고 물만 마셨습니다. 외교적 관례보다 종교적 신념이 우위에 있음을 보여준 장면입니다. 한국의 정치인이 국빈 만찬에서 종교적 이유로 식사를 거부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면, 그것이 인도 국민에게 어떤 인상을 줄 수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진짜다"라는 인상.
이 금욕과 단식은 모디에게 자신의 육체와 욕망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확인이자, 정신력을 극대화하는 수련이었습니다. "나에게는 가족도 없고 비축한 재산도 없다. 그러니 부패할 이유도 없다"는 그의 유명한 발언은 이 수행자적 세계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카르마 요가: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행위의 철학
모디의 행동 원칙을 이해하는 열쇠가 하나 있습니다.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의 핵심 사상인 '카르마 요가(Karma Yoga)'.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행위의 철학입니다.
《바가바드 기타》는 인도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일부로, 전쟁을 앞두고 크리슈나 신이 전사 아르주나에게 전하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700구절(슬로카)로 이루어진 이 경전은 힌두교의 《성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슈나 신은 말합니다.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너의 의무를 다하되, 그 결과는 신에게 맡겨라." 이 가르침은 모디에게 깊이 내면화되었습니다. 정치적 비난이 쏟아져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태도, 때로는 냉혹하고 과감한 결단을 내리는 리더십, 하루 4~5시간만 자면서도 쉬지 않고 일하는 초인적 에너지. 그는 이 모든 것을 '카르마 요가'의 실천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권력자가 아니라 '프라단 세박(Pradhan Sevak, 으뜸 봉사자)'이라 칭합니다. 이것이 수사(修辭)인지 진심인지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이 세계관을 일관되게 유지함으로써 인도 국민에게 '부패하지 않는 지도자', '사심 없는 수행자'라는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각인시켰다는 사실입니다.
빛과 그림자
이 빛나는 세계관의 이면에는 짙은 그림자가 존재합니다. 모디의 힌두 중심적 세계관은 필연적으로 '타자'에 대한 배제를 동반합니다.
그에게 인도는 지정학적 국가가 아니라 '바라트 마타(Bharat Mata, 어머니 인도)'라는 여신입니다. 인도의 역사는 힌두 문명의 영광이 외세(이슬람 침략, 영국 식민지배)에 훼손되었다가 되찾는 과정으로 재해석됩니다. 비나약 다모다르 사바르카르(Vinayak Damodar Savarkar, 1883~1966)가 정립한 '힌두트바(Hindutva)' 사상, 즉 힌두교를 종교가 아닌 생활 양식이자 문화적 국적으로 정의하는 이념이 그의 세계관을 완성했습니다. 사바르카르는 1923년 저서 《힌두트바: 힌두란 누구인가(Hindutva: Who Is a Hindu?)》에서 "인도를 조국이자 성지로 여기는 사람이 힌두"라고 규정했습니다. 이 정의에 따르면 무슬림과 기독교인은 성지가 메카와 예루살렘에 있으므로 완전한 인도인이 될 수 없다는 배타적 논리가 내포됩니다.
이 세계관 속에서 인도의 강은 물길이 아니라 여신(Ganga Ma)이고, 소(Cow)는 경제적 자산이 아니라 숭배의 대상입니다. 그는 이 땅 위의 모든 것을 신성한 힌두 문명의 일부로 봅니다. 이것이 힌두교도 다수에게는 강렬한 자부심과 소속감을 주지만, 무슬림 등 소수 종교인들에게는 소외와 불안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2억 명에 달하는 인도 무슬림 인구가 이 세계관 속에서 어떤 위치에 놓이는지는, 제3장과 제5장에서 구체적으로 추적합니다.
모디 자신은 이 모순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혹은 인식하면서도 힌두 문명의 복원이라는 더 큰 대의 앞에서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판단은 독자의 몫입니다. 다만 역사적 사실 하나만 기록해 둡니다. 소년 시절 모디에게는 압바스라는 무슬림 친구가 있었고, 함께 축제를 나누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 소년의 세계가 어느 시점에서 '우리'와 '그들'로 나뉘게 되었는지, 그것은 이 전기가 끝까지 추적해야 할 질문입니다.
고대와 현대의 기묘한 결합
모디의 세계관에서 눈길을 끄는 점은 과거 회귀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고대 인도의 지혜가 현대 과학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신성한 갠지스강에서 제를 올리는 모습을 생중계하면서도, 동시에 청년들에게 디지털 혁명과 반도체 굴기를 역설합니다. 국제 요가의 날을 제정하여 전 세계에 요가를 전파하면서도, 우주 탐사선 찬드라얀 3호를 달에 착륙시킵니다.
종교적 경건함과 세속적 권력, 고대의 지혜와 현대의 기술. 이 모순적인 것들이 묘하게 결합된 세계관. 이것이 모디가 14억 인구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바드나가르 사원의 종소리 속에서 자란 소년은, 요가와 명상으로 다져진 수행자의 얼굴로 세계 무대에 서고 있습니다. 그 얼굴 뒤에 무엇이 있는지, 이 전기는 계속 추적해 나갈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