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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14장 파이프라인으로는 바다를 대신할 수 없다
2026년 미국 이란 전쟁과 전 세계의 에너지 위기
14장 파이프라인으로는 바다를 대신할 수 없다
김경진
제14장 파이프라인으로는 바다를 대신할 수 없다
2026년 3월 11일, 사우디아라비아 얀부 항구. 홍해 수평선 위로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Very Large Crude Carrier)의 검은 선체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습니다. 한 척, 두 척이 아니었습니다. 해운 분석업체 보르텍사(Vortexa)의 위성 데이터에는 얀부 인근 해역에 정박 중인 VLCC가 스무 척이 넘게 찍혔습니다. 2025년 한 해 동안 얀부에서 하루 평균 76만 배럴의 원유가 선적되었습니다. 3월 셋째 주, 그 숫자가 하루 410만 배럴을 넘어섰습니다. 다섯 배가 넘는 물량이었습니다. 세계 석유 시장이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 이후 사활을 걸고 매달린 곳, 아라비아반도 서쪽 끝에 위치한 이 항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호르무즈가 닫히자 세계는 플랜 B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시선은 중동의 사막을 가로지르는 강철 파이프라인들로 모였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이라크. 이 세 나라가 보유한 우회 파이프라인이 바다의 공백을 메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월스트리트의 트레이딩 데스크를 돌았습니다. 파이프라인의 명목 용량을 합산하고, 그래프를 그리고, 시나리오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산술과 현실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었습니다. 파이프라인은 숨구멍이 될 수 있었지만, 바다를 대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14.1 사우디 동서 파이프라인
1981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페르시아만의 유조선들을 불태우고 있을 때 사우디아라비아는 한 가지 결정을 내렸습니다. 호르무즈 해협에 목줄을 잡힌 수출 구조를 바꾸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동부 해안의 아브카이크(Abqaiq) 석유 처리 시설에서 출발해 아라비아반도를 1,200킬로미터 가로지른 뒤 홍해 연안의 얀부(Yanbu) 항구에 도달하는 파이프라인. 이름은 동서 파이프라인(East-West Pipeline), 별칭은 페트로라인(Petroline)이었습니다. 56인치 직경의 본관과 48인치 직경의 보조관, 두 줄기의 강철 혈관이 사막 아래를 관통했습니다.
45년을 기다린 플랜 B가 마침내 작동할 때가 왔습니다.
2026년 3월 10일, 사우디 아람코의 아민 나세르(Amin Nasser) 최고경영자는 4분기 실적 발표 컨퍼런스콜에서 말했습니다. "동서 파이프라인의 완전 가동(full capacity)이 며칠 안에 이루어집니다." 다음 날인 3월 11일, 보조관으로 천연가스액(NGL)을 보내던 48인치 라인이 원유 수송용으로 전환되었습니다. 파이프라인 전체 용량이 하루 700만 배럴에 도달했습니다. 평시에 이 관을 통해 흐르던 원유는 하루 약 200만 배럴이었습니다. 3배 이상을 끌어올린 것입니다.
나세르 CEO는 같은 통화에서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700만 배럴 가운데 약 200만 배럴은 사우디 서부 해안의 정유소 두 곳으로 가야 합니다. 얀부에는 사우디 아람코와 엑손모빌의 합작 정유소인 삼레프(SAMREF)가 하루 40만 배럴을, 아람코와 중국 시노펙의 합작 정유소인 야스레프(YASREF)가 하루 43만 배럴을 처리합니다. 국내 정유 물량을 빼면 수출에 쓸 수 있는 분량은 하루 약 500만 배럴이었습니다.
그런데 500만 배럴이 파이프라인 끝에 도착한다고 해서 500만 배럴이 바다로 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두 번째 병목이 나타났습니다. 얀부 항구의 선적 능력이었습니다.
얀부 항은 홍해 최대 항구이고, 34개 선석(berth)과 10개 터미널을 갖추고 있습니다. 명목상 연간 2억 1천만 톤의 화물을 처리할 수 있는 규모입니다. 그러나 원유 선적에 쓸 수 있는 터미널은 얀부 북부(Yanbu North)와 얀부 남부(Yanbu South) 두 곳뿐이었습니다. 이 두 터미널의 합산 적재 능력은 하루 약 450만 배럴. 에너지 컨설팅 업체 보르텍사는 전시 상황에서의 실효 적재 능력을 하루 약 300만에서 400만 배럴로 추산했습니다. 유럽 비즈니스 매거진(European Business Magazine)은 이 격차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파이프라인은 배달할 수 있다. 항구가 발송하지 못한다. 그 사이의 간극은 공학적 결함이 아니라 선석과 저장 탱크와 유조선 스케줄의 물리학이다."
실제 숫자가 이를 증명했습니다. 3월 셋째 주, 얀부에서 적재된 원유는 하루 410만 배럴이었습니다. 그 다음 주에도 비슷한 수준에서 정체했습니다. 460만 배럴까지 올라간 날도 있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최대치였습니다. 파이프라인이 700만 배럴을 밀어내고 있어도 항구를 통과하는 실제 물량은 400만에서 460만 배럴 사이에 갇혔습니다. 파이프라인의 용량과 항구의 처리 능력 사이에 하루 200만 배럴 이상의 간극이 존재했고, 그 간극은 공학으로 메울 수 없었습니다. 선석을 늘리려면 수년이 걸립니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문제가 있었습니다. 얀부에서 기름을 실은 유조선이 아시아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홍해 남단의 바브 엘 만데브 해협(Bab el-Mandeb Strait)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아랍어로 "눈물의 문"이라는 뜻을 가진 이 해협은 예멘과 아프리카의 뿔(Horn of Africa) 사이에 위치합니다. 폭 26킬로미터. 그리고 이곳의 예멘 쪽 해안은 이란의 지원을 받는 후티(Houthis) 무장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2023년 말부터 2025년 초까지 후티 반군은 이스라엘의 가자 전쟁에 항의하며 홍해를 지나는 상선들을 대함 미사일과 드론으로 공격했습니다. 전 세계 컨테이너선의 약 90%가 홍해를 피해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으로 우회하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 불과 1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이제 그 후티 반군이 이란과의 연대를 선언하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3월 27일, 로이터 통신은 후티 고위 지도자의 발언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선택지에 대해 군사적으로 완전히 준비되어 있다. 적절한 시기가 언제인지는 지도부가 결정할 것이다." 같은 날, 영국 해상무역운영센터(UKMTO)는 홍해와 바브 엘 만데브 해역의 위협 수준을 "상당함(substantial)"으로 상향 조정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호르무즈의 앞문을 피해 파이프라인으로 원유를 돌렸습니다. 그러나 파이프라인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해협, 또 다른 위협이었습니다. 앞문을 잠근 이란은 대리인을 통해 뒷문 앞에도 서 있었습니다.
에너지 애스펙츠(Energy Aspects)의 공동 창업자 리처드 브론즈(Richard Bronze)는 CNN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후티가 선박을 위협하기 시작하면, 최소한 아시아까지의 항해 시간이 수 주 추가됩니다. 그것은 아시아의 원유 공급 부족을 더 깊게 만들 것입니다."
3월의 마지막 주말인 28일, 후티 반군은 이스라엘 남부를 향해 탄도미사일 두 발을 발사했습니다. 이란 전쟁이 시작된 2월 28일 이후 후티의 첫 대규모 공격이었습니다. 그 전날, 후티 정부의 무함마드 만수르(Mohammed Mansour) 부(副)정보장관은 CNN에 말했습니다. "바브 엘 만데브 해협을 폐쇄하는 것은 실현 가능한 선택지이며, 그 결과는 미국과 이스라엘 침략자들이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45년을 기다린 플랜 B는 작동했습니다. 파이프라인은 700만 배럴을 밀어냈고, 얀부 항은 사상 최대의 선적량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공은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항구의 물리적 병목이 파이프라인의 용량을 삼켰고, 홍해 남단의 군사적 위협이 우회로의 안전을 잠식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호르무즈의 위험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그 위험의 주소를 바꿔놓은 것뿐이었습니다.
14.2 UAE 아부다비 파이프라인
아랍에미리트는 사우디아라비아보다 30년 늦게, 그러나 같은 계산으로 움직였습니다.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 수출이 전면 중단된다. 대안이 필요하다.
2006년 설계를 시작하고, 2008년 착공에 들어갔습니다. 시공은 중국석유공정건설공사(CPECC)가 맡았습니다. 비용은 당초 예상인 33억 달러를 10억 달러 이상 초과한 42억 달러(약 5조 7천억 원)로 불어났습니다. 2012년 6월, 아부다비 내륙의 합샨(Habshan) 유전에서 오만만(Gulf of Oman) 연안의 푸자이라(Fujairah) 항구까지 380킬로미터를 잇는 48인치 파이프라인이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름은 아부다비 원유 파이프라인(ADCOP, Abu Dhabi Crude Oil Pipeline). 호르무즈 해협을 완전히 건너뛰는 경로였습니다.
명목 용량은 하루 150만 배럴. 최적화 조건에서 최대 180만 배럴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습니다. 평시에는 하루 약 110만 배럴의 아부다비산 원유가 이 관을 통해 푸자이라로 흘러갔습니다. UAE 원유 수출의 약 60%에 해당하는 양이었습니다. 나머지 40%는 여전히 호르무즈를 통했습니다. 처음부터 이 파이프라인은 위기 시의 부분 우회용으로 설계된 것이지, 해협의 완전한 대체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위기가 닥치자 아부다비 국영석유회사(ADNOC)는 가동률을 높였습니다. 무역 정보 업체 클플러(Kpler)의 나빈 다스(Naveen Das) 선임 석유 분석가는 CNBC에 말했습니다. "ADCOP 파이프라인은 현재 가동률 71% 수준으로 운영 중이며, 하루 약 44만 배럴의 여유 용량이 남아 있습니다. ADNOC은 필요하면 일시적으로 하루 180만 배럴까지 올릴 수 있습니다." 3월 한 달간 푸자이라를 통한 원유 수출은 하루 평균 162만 배럴을 기록했습니다. 2월의 117만 배럴에서 38% 증가한 수치였습니다.
그러나 파이프라인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번에도 위협이었습니다. 사우디의 경우처럼 바다 위의 위협이 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지는 위협이었습니다.
3월 3일, 푸자이라 석유 산업단지(Fujairah Oil Industry Zone)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UAE 방공 시스템이 요격한 드론의 잔해가 저장 탱크 위로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JSW 인프라스트럭처가 운영하는 약 300만 배럴 용량의 저장 탱크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보팍(Vopak), VTTI, MENA, GPS 등 주요 저장 시설 운영사들은 안전을 이유로 작업을 일시 중단했습니다. 벙커링(선박 급유) 작업은 바지선에 남아 있는 재고분으로만 제한적으로 계속되었습니다.
3월 6일, 세계 최대 해운사 머스크(Maersk)는 푸자이라 항구에서의 모든 작업을 추가 공지가 있을 때까지 중단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3월 14일, 토요일. 또 다시 드론이 왔습니다. 이번에는 푸자이라 석유 산업단지에 직접 명중했습니다. AFP 통신 기자가 촬영한 사진에는 시설에서 치솟는 검은 연기가 선명했습니다. 푸자이라 미디어 사무소는 "민방위 팀이 즉각 대응하여 화재 진화에 나서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원유 및 연료 적재 작업이 전면 중단되었습니다. 블룸버그는 이날 저녁 얀부와 마찬가지로 푸자이라의 원유 선적 포인트에 유조선이 한 척도 없다는 추적 데이터를 보도했습니다.
3월 16일 월요일, 세 번째 드론 타격이 보고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석유화학 시설 인근이었습니다. 같은 날, 푸자이라 남동쪽 23해리(약 43킬로미터) 해상에 정박 중이던 유조선에도 투사체가 떨어졌습니다. 선체에 경미한 구조적 손상이 발생했습니다.
이란은 왜 호르무즈 바깥에 있는 푸자이라를 쳤을까요.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이란의 외무장관 아바스 아라그치(Abbas Araghchi)가 3월 15일 국영 이르나(IRNA) 통신에 밝힌 내용이 실마리를 줍니다. "미국이 하르그 섬(Kharg Island)을 공격하는 데 사용한 무기는 UAE에서 발사되었다. 두바이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3월 13일, 미국은 이란 최대의 원유 수출항인 하르그 섬의 군사 시설 90곳 이상을 타격했습니다. 그 공격의 발진 기지가 UAE였다는 것이 이란의 주장이었습니다.
이란 혁명수비대(IRGC)는 한 발 더 나아갔습니다. "UAE의 푸자이라, 제벨 알리(Jebel Ali), 칼리파(Khalifa) 항구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이 시설들의 주변 주민과 노동자들은 즉시 대피해야 한다"는 경고를 이란 국영 미디어를 통해 발표했습니다. 항구가 합법적인 군사 목표물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파이프라인은 바다의 병목을 우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사일과 드론의 사정거리를 우회할 수는 없습니다. 푸자이라는 이란 본토에서 불과 250킬로미터 거리에 있었습니다. 이란의 장거리 자폭 드론과 탄도미사일은 그 거리를 쉽게 넘습니다. 엔지니어링 뉴스 레코드(Engineering News-Record)가 정리한 한 문장이 상황을 압축합니다. "호르무즈 우회 인프라는 짧은 교란에 대비해 설계되었다.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ADNOC의 루와이스(Ruwais) 정유소도 타격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3월 10일, 세계 최대 규모의 정유소 가운데 하나인 이 시설이 드론 피격으로 발생한 화재 때문에 가동을 중단했습니다. 루와이스는 페르시아만 해안에 위치해 있어 ADCOP 파이프라인의 우회 경로와는 별개이지만, UAE 전체의 정유 능력이 줄어든다는 것은 원유를 수출할 수 있어도 정제 제품을 만들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에너지 컨설팅 업체 글로벌 리스크 매니지먼트(Global Risk Management)의 수석 분석가 아르네 로만 라스무센(Arne Lohmann Rasmussen)은 미들 이스트 아이(Middle East Eye)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원유 위기가 아닙니다. 디젤과 항공유의 위기입니다. 정제 제품(distillate)의 위기입니다."
ADCOP 파이프라인은 설계 목적에 충실하게 작동했습니다. 원유를 호르무즈 바깥으로 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파이프라인의 설계 전제를 무너뜨렸습니다. 이 파이프라인이 건설되던 2008년, 이란의 드론 기술은 초보적 수준이었습니다. 2026년의 이란은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가 목표물을 타격하는 자폭 드론과 정밀 탄도미사일을 대량 보유한 나라였습니다. 40년 전의 위험 평가 위에 세워진 인프라가, 40년 뒤의 전쟁 기술 앞에 서 있었습니다.
14.3 이라크-튀르키예 파이프라인
이라크의 상황은 사우디아라비아나 UAE와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사우디와 UAE에게 파이프라인은 우회로였습니다. 기존 수출의 일부를 다른 경로로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라크에게 파이프라인은 유일한 탈출구였습니다.
전쟁 이전, 이라크는 하루 약 420만에서 45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했습니다. 이 가운데 330만 배럴 이상이 남부 바스라(Basra) 지역의 항구를 통해 페르시아만으로 나갔습니다.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자 이 경로가 전면 차단되었습니다. 3월 초, 이란의 드론과 미사일이 이라크 남부의 유조선과 항만 시설을 타격하면서 바스라 터미널의 작업이 완전히 멈췄습니다.
수출이 멈추면 생산도 멈춰야 합니다. 저장 탱크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원유를 뽑아 올려도 실어 보낼 곳이 없으면, 탱크가 가득 차는 순간 유정(油井)의 밸브를 잠가야 합니다. 석유부 장관 하이얀 압둘 가니(Hayan Abdul Ghani)는 이라크의 원유 생산이 하루 140만에서 150만 배럴까지 떨어졌다고 발표했습니다. 전쟁 전 생산량의 3분의 1 수준이었습니다. 수출은 사실상 제로에 가까웠습니다.
이라크 정부 예산의 약 90%가 석유 수출 수입에 의존합니다. 수출이 제로라는 것은 국가 재정이 제로에 근접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세계의 이목이 쏠린 것이 이라크-튀르키예 파이프라인(ITP, Iraq-Turkey Pipeline)이었습니다. 이라크 북부의 키르쿠크(Kirkuk) 유전에서 출발해 970킬로미터를 달려 튀르키예 지중해 연안의 제이한(Ceyhan) 항구에 도달하는 이 송유관은, 이라크가 호르무즈를 거치지 않고 원유를 수출할 수 있는 유일한 육상 경로였습니다.
파이프라인은 46인치와 40인치 두 개의 관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설계 용량은 합산 하루 160만 배럴이었습니다. 이 파이프라인이 정상 가동되었다면 이라크 남부 수출의 절반 가까이를 지중해로 돌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유럽 시장의 숨통을 틔울 수 있는 규모였습니다.
그러나 이 파이프라인은 비어 있었습니다.
이유를 이해하려면 2023년 3월로 돌아가야 합니다. 국제상업회의소(ICC) 중재법원이 튀르키예 정부에 약 15억 달러의 배상금을 물리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바그다드 중앙정부의 승인 없이 쿠르드 자치정부(KRG)가 독자적으로 원유를 수출한 것을 튀르키예가 허용한 데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이었습니다. 튀르키예는 판결에 반발하며 파이프라인의 밸브를 잠갔습니다. 쿠르드 지역의 원유 생산은 약 72% 급감했습니다.
그 뒤 2년 반 동안 바그다드와 에르빌(Erbil, KRG 수도)은 수출 재개를 놓고 줄다리기를 벌였습니다. 2025년 9월, 미국의 중재로 임시 합의가 이루어져 하루 18만에서 19만 배럴 수준의 수출이 재개되었습니다. 파이프라인 본래 용량의 12%에 불과한 양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왔습니다.
바그다드는 에르빌에 요청했습니다. 키르쿠크 유전에서 생산한 원유를 쿠르드 지역의 파이프라인을 통해 제이한으로 보내겠다. 하루 최소 10만 배럴, 가능하면 25만 배럴. KRG 지역 유전의 생산분까지 합치면 하루 45만 배럴이 가능하다. 세계 경제가 원유를 갈구하는 상황에서 합리적인 제안처럼 들렸습니다.
에르빌은 거절했습니다.
조건이 있었습니다. 바그다드가 2026년 1월부터 쿠르드 지역에 부과한 달러 거래 제한을 풀어야 합니다. 이 조치로 쿠르드 상인들은 수입품 결제에 필요한 외화를 확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에르빌은 이를 "질식시키는 경제 봉쇄"라고 불렀습니다. 관세 제도 개편, 쿠르드 은행의 공식 환율 접근권 보장, 시아파 민병대의 쿠르드 석유 시설 공격 중단도 요구 목록에 포함되었습니다.
바그다드는 이 연계를 거부했습니다. 원유 수출과 관세 문제는 별개의 사안이라는 것이 바그다드의 입장이었습니다. 석유부는 공식 성명에서 KRG의 태도를 "이라크가 직면한 중대한 상황을 이용하려는 무책임한 행위"라고 규정했습니다. 헌법 제110조, 111조, 112조를 인용하며 석유와 가스가 모든 이라크인의 공동 자산이라는 점을 환기시켰습니다.
에르빌의 쿠르드 지도자 마수드 바르자니(Masoud Barzani)는 양측에 만남을 촉구했습니다. "분열을 깊게 하려는 기회주의자들을 막아야 합니다."
3월 16일, 석유부 장관 압둘 가니는 대안을 공개했습니다. KRG 영역을 우회하는 경로, 즉 모술(Mosul)을 경유하는 옛 파이프라인 구간을 복구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약 100킬로미터의 수압 시험만 남아 있으며, 일주일 안에 완료될 수 있다." 이 구간이 열리면 하루 20만에서 25만 배럴의 키르쿠크 원유를 바그다드가 독자적으로 제이한까지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구간은 2014년 이후 이슬라믹 스테이트(ISIS)와 쿠르드노동자당(PKK) 등 무장 단체들의 반복된 폭탄 테러로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었습니다. 수리에는 수개월, 어쩌면 수년이 걸릴 수 있었습니다. 미들 이스트 인스티튜트(Middle East Institute)의 예레반 사이드(Yerevan Saeed) 연구원은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바그다드가 내일 당장 복구 작업에 착수한다 해도, 그 일정만으로 국가 비상 상황의 한가운데에서는 비현실적입니다."
다른 문제도 있었습니다. 튀르키예와의 파이프라인 협정 자체가 2026년 7월 27일에 만료될 예정이었습니다. 튀르키예의 알파르슬란 바이락타르(Alparslan Bayraktar) 에너지장관은 아나돌루 통신에 "위기 이후 새로운 에너지 구조(architecture)가 열릴 것이며, 그 안에서 우리에게 어떤 기회가 있을지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더 유리한 조건의 새 협정을 끌어내려는 앙카라의 계산이 엿보였습니다.
3월 18일, 마침내 돌파구가 열렸습니다. KRG의 마스루르 바르자니(Masrour Barzani) 총리가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나라가 직면한 비상 상황과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책임을 고려하여, 쿠르드 지역 파이프라인을 통한 원유 흐름을 최대한 빨리 허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라크 국영 북부석유회사(North Oil Company)는 하루 25만 배럴의 키르쿠크 원유가 제이한을 향해 흐르기 시작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브렌트유가 배럴당 101.99달러로 1.38% 하락했고, 서부텍사스중질유(WTI)는 94.39달러로 1.89% 떨어졌습니다. 시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나 그 한숨은 짧았습니다. 25만 배럴. 전쟁 전 바스라에서 나가던 하루 330만 배럴의 7.6%에 불과한 양이었습니다. 미들 이스트 이코노믹 서베이(MEES)의 걸프 지역 분석가 예사르 알 말레키(Yesar Al Maleki)는 더 내셔널(The National)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조치들이 제한적인 수출 역량을 회복시킬 수는 있겠지만, 바스라 수출의 손실을 보상할 수는 없습니다. 남부의 대량 원유를 다른 경로로 돌릴 수 있는 현실적 인프라는 지금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라크의 파이프라인 이야기에는 비극적인 구조가 숨어 있었습니다. 관(管)이 없어서 기름을 보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관은 있었습니다. 160만 배럴 용량의 파이프라인이 키르쿠크에서 제이한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 관을 막고 있는 것은 물리적 손상만이 아니었습니다. 바그다드와 에르빌 사이의 수십 년 묵은 분쟁, 수입 배분의 앙금, 달러 거래 제한, 헌법 해석의 충돌, 국제 중재 판정의 여파, 그리고 튀르키예의 전략적 계산. 이 모든 것이 파이프라인 안에 보이지 않는 밸브를 만들어 놓고 있었습니다.
석유 국가가 석유를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 미들 이스트 인스티튜트의 예레반 사이드는 이 상황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습니다. "이것은 주권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비입니다. 그리고 그 마비는 이라크의 경쟁국들만이 감당할 여유가 있는 선물입니다."
14.4 합산 900만 vs 2,000만
숫자를 모아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동서 파이프라인. 설계 용량 하루 700만 배럴. 국내 정유소 공급분 200만 배럴을 빼면 수출 가능 분량 500만 배럴. 그러나 얀부 항구의 실효 적재 능력은 400만에서 460만 배럴 사이. 파이프라인이 밀어내는 양과 바다로 나가는 양 사이에 간극이 있습니다.
UAE의 ADCOP 파이프라인. 명목 용량 하루 150만 배럴, 최대 180만 배럴. 3월 한 달 평균 실제 수출량 162만 배럴. 그러나 푸자이라 항구가 반복적인 드론 타격으로 간헐적으로 작업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이라크-튀르키예 파이프라인. 설계 용량 하루 160만 배럴. 3월 18일 재개 이후 실제 유량 25만 배럴.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월에 발표한 호르무즈 해협 팩트시트에서 이 파이프라인들의 현실을 정리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UAE만이 호르무즈를 우회하여 원유를 수출할 수 있는 가동 중인 파이프라인을 보유하고 있으며, 추가로 사용 가능한 용량은 추정 350만에서 550만 배럴/일(b/d)입니다."
평시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물량은 하루 약 2,000만 배럴입니다. 유엔 자료 기준, 2024년 이 해협을 통과한 원유와 컨덴세이트(응축수)는 하루 1,400만 배럴, 정제 석유 제품이 600만 배럴이었습니다.
IEA의 추정대로 실효 우회 용량이 하루 350만에서 550만 배럴이라면, 시장에 남는 공급 부족은 하루 1,450만에서 1,650만 배럴입니다. 이것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전체 일일 생산량(약 1,000만에서 1,200만 배럴)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세계 어디에서도 이 격차를 메울 산유국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산술에는 숨겨진 차원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파이프라인을 통해 보낼 수 있는 것은 원유(crude oil)입니다. 끈적한 검은 기름. 정유 공장에서 가공해야 비로소 디젤, 항공유(제트유), 나프타, LPG가 됩니다. 호르무즈를 통과하던 하루 2,000만 배럴 가운데 약 600만 배럴은 이미 정제를 마친 석유 제품이었습니다. 유럽이 수입하는 디젤의 약 30%, 항공유의 약 절반이 중동에서 왔습니다. 파이프라인으로는 이 정제 제품을 대량으로 보낼 수 없습니다. 원유용 파이프라인은 원유만 보냅니다.
더 치명적인 것은 액화천연가스(LNG)였습니다. 카타르는 세계 최대의 LNG 수출국 가운데 하나입니다. 전 세계 LNG 교역의 약 4분의 1이 호르무즈를 통과합니다. LNG는 영하 162도로 냉각해야 액체 상태를 유지하는 물질입니다. 이것을 파이프라인에 넣을 수는 없습니다. Q-맥스(Q-Max)라 불리는 특수 운반선에 실어야만 이동이 가능합니다. 그 선박들은 오직 페르시아만의 바닷길을 통해서만 나갈 수 있었습니다. 카타르에게 우회 파이프라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쿠웨이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두 나라는 호르무즈가 닫히면 수출이 전면 중단됩니다. 골드만삭스는 카타르와 쿠웨이트의 석유 생산이 25% 이상 감소할 수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트랜스버설 컨설팅(Transversal Consulting)의 설립자이자 《사우디 주식회사(Saudi Inc.)》의 저자 엘렌 왈드(Ellen Wald)는 미들 이스트 아이에 이런 구조적 딜레마를 지적했습니다. "동서 파이프라인으로 사우디의 원유 수출을 최대화하려면, 그 파이프라인이 천연가스액과 석유 제품을 운반하던 기능을 포기해야 합니다." 원유를 살리면 가스가 죽고, 가스를 살리면 원유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하나의 파이프라인에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맡길 수는 없습니다.
엔지니어링 뉴스 레코드는 이 상황의 본질을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파이프라인 시스템은 원유를 중심으로 설계되었지, 호르무즈를 통과하는 탄화수소의 전체 스펙트럼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정제 제품, 즉 디젤, 항공유, 나프타, 액화석유가스(LPG)는 별도의 인프라나 해상 운송을 필요로 하며, 우회 파이프라인은 이를 제공하지 않는다."
결국 이것은 산술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산술은 잔인했습니다.
호르무즈를 통과하던 물량: 하루 2,000만 배럴. 파이프라인 우회로의 실효 공급 능력: 하루 350만에서 550만 배럴. 시장에 남는 절대적 공급 부족: 최소 하루 1,450만 배럴.
이 숫자를 달러로 환산하면 그 무게가 체감됩니다. 배럴당 100달러 기준으로, 하루 1,450만 배럴의 공급 부족은 하루 14억 5천만 달러(약 2조 원)어치의 에너지가 세계 시장에서 사라지는 것을 뜻합니다. 한 달이면 435억 달러(약 59조 원)입니다.
사우디와 UAE의 파이프라인은 위대한 공학적 성취였습니다. 40년 전에 만든 보험이 40년 뒤에 작동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아람코 CEO 나세르의 말처럼, 사우디는 "고객들의 요구 사항 대부분을 아시아, 지중해, 북서유럽의 저장 시설을 활용하여 충족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같은 통화에서 한 가지를 덧붙였습니다. "분쟁이 장기화되지 않는다면(provided this does not persist in the long term)."
그 조건부 문장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파이프라인은 시간을 벌어주는 장치이지, 바다를 대체하는 장치가 아니었습니다. 단기간의 숨구멍이지, 장기적인 해법이 아니었습니다.
강철 관은 사막을 관통할 수 있습니다. 산을 뚫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 2,000만 배럴의 원유와 600만 배럴의 정제 제품과 세계 LNG 교역의 4분의 1을 동시에 싣고 나르는 바다의 수송 능력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21마일 폭의 수로가 막히면 1,200킬로미터의 파이프라인으로도 그 공백을 메울 수 없다는 것. 이것이 2026년 3월, 세계가 배운 산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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