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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36장 한국의 선택
2026년 미국 이란 전쟁과 전 세계의 에너지 위기
36장 한국의 선택
김경진
제36장 한국의 선택
36.1 해상로 의존 구조와 전력 수요
2026년 3월 8일, 이재명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에서 이 한 문장을 말했습니다. "호르무즈를 경유하지 않는 대체 공급선을 신속히 발굴하라." 담화는 30분이었지만, 이 문장은 30초 만에 전파를 탔습니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직접 '대체 공급선'을 말해야 하는 나라. 그것이 2026년 3월의 대한민국이었습니다.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된 지 9일째 되던 그날, 대한민국의 에너지 수급 상황을 숫자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수입 원유의 70.7%가 중동에서 왔습니다. 그 중동 원유의 90% 이상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했습니다. 액화천연가스(LNG, Liquefied Natural Gas)의 중동 수입 비중은 20.4%였습니다. 하루 석유 소비량은 290만 8,000배럴로 세계 8위 수준이었습니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는 93.7%. 이 숫자들은 30년 전의 수치와 거의 다르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은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을 만들었습니다. 그 기적의 엔진은 '가공 무역'이었습니다. 원자재를 사다가 정밀하게 가공해서 높은 값을 받고 파는 구조입니다.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실리콘을 사 왔습니다.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철광석을 녹였습니다. 석유화학 제품을 만들기 위해 나프타(Naphtha, 원유 정제 과정에서 얻는 탄화수소 혼합물)를 들여왔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단 하나의 변하지 않는 전제가 있었습니다. 원료가 끊임없이, 싸게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2026년 2월 28일, 이란 혁명수비대(IRGC, Islamic Revolutionary Guard Corps)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들을 향해 VHF 무선으로 통항 금지를 경고했습니다. 그 전제가 깨졌습니다.
해협이 막히기 전에도 징후는 있었습니다. 봉쇄 직후 로이터 통신은 최소 150척의 유조선이 해협 양쪽에서 대기 중이라고 전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선박 추적 플랫폼 마린트래픽(MarineTraffic) 데이터를 인용해 호르무즈 해협 선박 통행량이 70% 급감했다고 보도했습니다. 평소 하루 50척 안팎이던 유조선이 0에서 1척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가 분석한 호르무즈 해협 통과 원유의 목적지는 이랬습니다. 중국 38%, 인도 15%, 한국 12%, 일본 11%, 기타 아시아 14%. 봉쇄가 현실화된 순간, 아시아 전체가 숨을 멈췄습니다.
한국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어느 정도였을까. 정부 비축유 약 1억 배럴, 민간 비축까지 합산하면 약 208일분이었습니다. UAE로부터 긴급 확보한 2,400만 배럴도 추가로 있었습니다. 숫자만 놓고 보면 반년이 넘는 시간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스팀슨센터(Stimson Center)의 제임스 김 국장은 냉정하게 짚었습니다. 비축유가 있어도, 해협 접근이 장기 차단될 경우 전력 공급과 글로벌 공급망에서의 생산·수출 역량에 상당한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숫자에는 드러나지 않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반도체(Semiconductor)였습니다. 대한민국의 수출 효자이자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이 집약된 이 산업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중동에 목을 매고 있었습니다. 헬륨(Helium)이 그것입니다. 반도체 공정에서 웨이퍼(Wafer, 반도체 회로를 새기는 얇은 실리콘 판)가 열에 의해 변형되는 것을 막으려면 초저온 냉각이 필수입니다. 이 냉각재의 핵심이 헬륨이고, 한국은 전체 헬륨 수입의 상당 부분을 카타르(Qatar)의 라스 라판(Ras Laffan) 산업단지에서 LNG를 생산할 때 부산물로 얻는 헬륨에 의존해 왔습니다. 브롬(Bromine)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반도체 식각(Etching, 회로 패턴을 새기기 위해 불필요한 물질을 제거하는 공정) 공정에 쓰이는 이 원소는 이스라엘의 사해(Dead Sea)에서 주로 생산됩니다. 2026년 전쟁이 이스라엘과 카타르의 산업 인프라를 타격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생산 라인은 직접 폭격을 받지 않았음에도 원료 고갈이라는 조용한 위기와 마주했습니다.
비료도 있었습니다. 암모니아와 요소, 염화칼륨. 한국이 중동에서 수입하는 이 농업 원자재들이 끊기면, 이듬해 봄 들판에 뿌릴 비료가 사라집니다. 에너지 위기가 식량 위기로 번지는 경로입니다. 황(Sulfur)도 있었습니다. 황산(Sulfuric Acid) 생산의 원료인 황은 원유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데, 호르무즈 해협 통과 원유의 감소는 곧 황 공급 감소로 이어지고, 황산이 줄면 배터리 제조도, 비료 생산도 흔들립니다.
산업연구원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3개월 이상 지속될 경우 제조업 평균 생산비가 11.8% 상승할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중동 지역 수입 의존도가 70%를 넘는 산업 핵심 품목만 40개 이상이었습니다. OECD는 이 사태로 한국의 2026년 경제성장률이 기존 전망치 2.1%에서 1.7%로 0.4%포인트 하락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이 하락폭은 주요국 가운데 가장 컸습니다.
여기에 인공지능(AI) 산업이 부르는 전력 수요의 폭발이 겹쳤습니다. 챗GPT 한 번의 질문은 구글 검색보다 10배가량 많은 전력을 씁니다. AI 연산을 담당하는 데이터센터(Data Center)들은 하루 24시간 돌아가는 초대형 전력 소비 시설입니다. 삼성전자가 파운드리(Foundry, 반도체 위탁 생산)를 돌리는 공장 라인 하나의 전력 소비량은 중소 도시 하나와 맞먹습니다. 한국의 주력 산업 구조는 반도체, 철강, 석유화학, 자동차처럼 전기를 엄청나게 먹는 업종들로 짜여 있었습니다. 그 전기를 만들 LNG가 호르무즈에 갇혔습니다.
한국전력공사는 천문학적인 적자를 떠안았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한국전력의 영업 적자가 5배 이상 폭증했던 기억이 다시 불려나왔습니다. 발전소를 돌릴 LNG가 부족해지면서 산업용 전기요금이 치솟았고, 값싼 전기 위에 올려진 한국 제조업의 가격 경쟁력은 그 기반부터 흔들렸습니다.
2026년 3월의 한국은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라는 표현을 수십 년 동안 들어왔습니다. 그 표현이 얼마나 뼈아픈 현실인지를, 처음으로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한반도는 전력망 측면에서 섬과 다름없습니다. 러시아, 중국, 일본 어느 쪽과도 전력 계통이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구와 산업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고, 발전소는 동해안과 남해안에 몰려 있습니다. 그 먼 거리를 초고압 송전탑이 이어주는 구조입니다. 에너지를 외부에서 들여올 수도, 부족할 때 이웃 나라에서 빌려올 수도 없는 나라. 그것이 한국의 지리적 조건이 부과한 숙명이었습니다.
그 숙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외부에서 가져오는 '분자(Molecule)' 형태의 화석 연료 의존을 줄이고, 스스로 만드는 '전자(Electron)' 중심의 에너지 체계를 구축하는 것. 이것이 2026년의 위기가 한국에 내놓은 청구서였습니다. 청구서의 금액을 따지기 전에, 먼저 현재 한국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봐야 했습니다.
30년 동안 에너지 수입 의존도는 거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때도 같은 말이 나왔고, 또 다른 분쟁이 터지면 똑같은 말이 반복될 것이라는 지적이 국회 안팎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36.2 유사시 에너지 공급 문제
2026년 3월 2일, 한국해양진흥공사는 특별 리포트를 발표했습니다. "에너지 및 컨테이너 공급망의 물리적 단절 위기." 공문서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직접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그 리포트가 나온 날, 국내에서는 이미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오던 한국 국적 LNG선과 유조선들의 위치 정보가 지도 위에서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호르무즈 봉쇄가 한국에 들이미는 위협은 두 겹입니다. 하나는 원유와 가스가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나마 국내에 있는 에너지 인프라가 유사시에 얼마나 취약한지의 문제입니다. 2026년의 위기는 두 번째 문제를 세상 앞에 꺼내 놓았습니다.
울산 앞바다를 내려다보면 거대한 탱크 군락이 보입니다. SK이노베이션의 정유 공장, 에쓰오일의 아로마틱 단지, 현대오일뱅크의 정제 시설이 울산만을 따라 이어집니다. 비슷한 풍경이 전남 여수와 충남 대산에도 있습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정유 및 석유화학 콤플렉스들이 해안가에 집중되어 있는 구조입니다. 평상시 이 밀집 구조는 효율의 극치입니다. 유조선이 항구에 닿으면 파이프라인으로 바로 원료를 받아 가공하고, 완성된 제품을 또 배에 실어 내보낼 수 있습니다. 물류비가 줄고, 공정 간 연결이 쉽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문법으로 보면 이것은 완벽한 표적입니다.
2019년 9월 14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브카이크(Abqaiq) 정유 시설에 드론 공격이 한 차례 가해졌습니다. 결과는 글로벌 원유 공급량의 5%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서로의 정유 시설과 발전소를 저비용 드론으로 반복해서 타격했습니다. 2026년 에픽 퓨리 작전(Operation Epic Fury) 이후 이스라엘의 드론이 테헤란 인근 고압 송전탑을 파괴했을 때 이란 수도 일대는 대규모 정전에 빠졌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저비용 드론이 러시아의 키리시 정유소를 20기 이상이 동시에 타격했을 때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대기오염 경보가 발령됐습니다.
이 모든 사례가 말하는 바는 하나입니다. 현대전에서 가장 효율적인 공격 목표는 전방의 병사가 아니라 후방의 에너지 인프라입니다.
한국의 에너지 인프라가 드론 위협에 얼마나 노출되어 있는지는 2026년의 위기가 들이닥치기 전까지 공개적으로 깊이 논의된 적이 없었습니다. 사태가 터진 뒤에야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발의되었습니다. 원전방호강화법안이 그것입니다. 원자력 발전소를 포함한 에너지 핵심 시설에 대한 드론 방어 시스템과 방호 공백을 채우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필요한 법안이었지만, 타이밍은 이미 후행이었습니다.
정유 시설과 LNG 인수기지의 취약성은 그나마 눈에 보이는 문제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깊은 위협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전력망(Grid)이었습니다.
한국의 전력 계통은 중앙집중형 방사형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동해안의 원자력 발전소, 서해안의 대형 화력 발전소, 남해안의 복합 발전 단지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초고압 송전탑(765kV)을 타고 수도권으로 흘러들어 옵니다. 이 전기의 길목에 있는 핵심 변전소와 송전탑 몇 곳이 파괴되면, 발전소는 멀쩡해도 수도권 전체가 어둠에 잠깁니다. 765kV급 초대형 변압기는 주문 제작에 2년 이상이 걸립니다. 국내 제조 설비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한 번 파괴되면 복구까지 1년 이상이 걸릴 수 있습니다.
더 조용한 위협은 사이버 공간에서 옵니다. 한국의 에너지 인프라는 SCADA(원격감시제어, Supervisory Control and Data Acquisition) 시스템과 산업제어시스템(ICS, Industrial Control System)으로 운영됩니다. 이 시스템들은 인터넷에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완벽하게 격리된 것도 아닙니다. 2026년 이란 전쟁 기간 중 이란의 지원을 받는 해커 그룹들이 서방의 에너지 인프라를 상대로 무차별 사이버 공격을 시도한 사실이 여러 언론을 통해 보도됐습니다.
북한이라는 변수가 있는 한국에게 이 위협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정교하고 활발한 사이버 전력을 운용하는 나라 중 하나입니다. 한국수력원자력 해킹 시도, 금융기관 전산망 침투, 방산업체 기밀 탈취. 이미 수차례 실증된 능력입니다. 중동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미국의 군사력이 그쪽으로 집중되는 상황에서, 한국의 에너지 제어망이 이중으로 위험에 노출된다는 우려가 안보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왔습니다.
항만 역시 있었습니다. 한국의 에너지 수입 관문인 평택·인천항과 통영·광양의 LNG 인수기지가 일시에 기능을 잃으면, 비축유와 LNG가 창고에 있어도 꺼내 쓸 방법이 없습니다. 유조선이 입항하지 못하면 비축고는 그냥 시간 지연 장치에 불과합니다. 해상 운임이 이미 기존 대비 50~80%가 폭등했고, 전쟁 위험 보험(War Risk Insurance)은 사실상 인수 거부 상태였습니다. 우회 경로인 희망봉을 돌아오면 기존 25일이던 수송 기간이 35~60일로 늘어났습니다. 원유를 싣고 출발했어도 항구에 닿을 때쯤이면 이미 비축고가 더 빨리 비어가는 수학입니다.
한국해양진흥공사는 봉쇄 해제 후에도 정상화까지 봉쇄 기간의 2배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한 달 막히면 두 달 더 흔들린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모든 취약성의 근원은 한 가지 구조적 선택에서 비롯됩니다. 효율을 위해 집중했다는 것. 정유 시설을 해안가에 모았습니다. 발전소를 대도시에서 멀리 세웠습니다. 송전망을 방사형으로 단순하게 뽑았습니다. 평상시 이 선택들은 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위기 상황에서 집중은 취약성의 동의어가 됩니다.
해결의 방향은 분산입니다. 에너지를 생산하고 저장하고 분배하는 노드(Node, 연결망의 교점)를 여러 곳에 나누는 것입니다. 전국의 산업 단지에 소규모 천연가스 발전기와 에너지저장장치(ESS, Energy Storage System)를 갖춘 마이크로그리드(Microgrid, 독립적으로 운영 가능한 소규모 전력망)를 구축하면, 중앙 계통이 흔들려도 각 지역이 며칠은 자력으로 버틸 수 있습니다. 군사 기지와 병원, 주요 정부 청사는 비상 발전 설비와 독립 전원망을 갖춰야 합니다. 항만에 드론 방어 시스템을 배치하고, 사이버 방호를 위한 에너지 계통 망분리와 실시간 침해 탐지 체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비축유 계산에서 빠지는 항목들을 채워야 합니다. LNG 비축량은 52일분에 불과했습니다. 원유 208일분에 비하면 극명하게 짧습니다. LNG 저장 탱크 용량을 늘리는 것은 돈이 들지만, 해협이 막혔을 때의 손실에 비하면 작은 투자입니다.
2026년 3월, 산업통상자원부는 모든 시나리오의 비상계획을 수립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그 비상계획이 서류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되지 않으려면, 한국이 지금까지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뒤로 미뤄왔던 청구서를 직접 앞으로 꺼내야 합니다.
에너지를 지키지 못하는 나라는 군대도 경제도 지킬 수 없습니다. 이것은 2026년 이란 전쟁이 보내온 전보였습니다.
36.3 원전, 재생에너지, 가스의 균형
2026년 3월 31일,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은 신규 원전 건설 후보지 공모에 4개 지자체가 신청했다고 밝혔습니다. 울산 울주군과 경북 영덕군이 대형 원전을, 경북 경주시와 부산 기장군이 소형모듈원전(SMR, Small Modular Reactor)을 신청했습니다. 중동 전쟁이 한창인 그날, 한국의 네 개 지자체는 원자력 발전소를 유치하겠다며 경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10년 전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었습니다.
원자력 발전소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논쟁은 오랫동안 이념의 충돌이었습니다. 탈원전이냐 친원전이냐. 안전이냐 경제성이냐.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뒤집혔습니다. 한 정부가 노후 원전 수명 연장을 추진하면, 다음 정부가 탈원전 로드맵을 발표했습니다. 그 다음 정부가 다시 원전 생태계 복원을 선언하면, 에너지 산업계는 투자를 어느 쪽으로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습니다.
원전 확대 논의 배경에는 전력 수요 증가와 에너지 안보 문제가 있었습니다. AI 데이터센터, 반도체 산업, 전기차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빠르게 늘어나는 가운데 중동 정세 불안이 에너지 공급 리스크에 쐐기를 박으며 추진에 속도가 붙은 것입니다.
2026년 이란 전쟁은 그 이념 논쟁을 잠시 옆으로 밀어놓았습니다. 호르무즈가 막히자 사람들은 물었습니다. LNG가 안 들어오면 발전소는 어떻게 돌리는가. 원유가 안 들어오면 대체 전력을 어디서 구하는가. 그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있는 에너지원은 많지 않았습니다.
원자력이었습니다. 연료인 우라늄(Uranium)은 카자흐스탄, 캐나다, 호주 등에서 옵니다. 호르무즈 해협과 관계없는 경로입니다. 한 번 장전하면 수년간 연료 재공급 없이 전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기후나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고 24시간 안정적으로 가동됩니다. 탄소를 거의 배출하지 않아 RE100(Renewable Energy 100%, 재생에너지 100% 사용 기업 이니셔티브) 등 글로벌 환경 규제와도 충돌이 적습니다.
원자력은 앞으로도 견고한 저탄소 전력원으로서 안정적이고 경제적으로 30% 수준의 기저부하(Baseload, 수요 변동과 무관하게 항상 공급되어야 하는 최소 전력량)를 담당하여 그리드 보호, 에너지 안보, 산업경쟁력 및 에너지 복지에 기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의 원전 기술력은 세계 최상위권입니다. 아랍에미리트 바라카(Barakah) 원전을 짓는 과정에서 공기(工期)를 지키고 비용을 예산 내에서 통제하며 세계에 존재감을 알렸습니다. 한수원은 조만간 원전 30기를 보유한 거대 기업이 될 예정입니다. 이미 원전 전력 규모로는 세계 3위 수준입니다.
정부는 2038년까지 원자력 발전 비중을 35.2%로 확대하고 최소 1기의 SMR을 포함한 신규 원전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번에 추진되는 대형 원전 2기는 국내 33·34번째 원전이 됩니다. SMR은 2028년까지 설계 인가를 받고, 2030년까지 건설 허가를 확보해 2035년 가동을 목표로 합니다.
SMR이 주목받는 이유는 기존 대형 원전의 한계를 돌파하기 때문입니다. 300MWe(메가와트 전기, Megawatt electric) 이하의 소형 원자로로, 기존 대형 원전에 비해 건설 기간이 짧고 입지 제약이 적습니다. SMR의 가장 큰 강점은 모듈 단위로 운송 및 설치가 가능하여 건설 기간 단축과 비용 절감이 크다는 점입니다. 태양광이나 풍력의 발전량이 뚝 떨어지는 야간이나 흐린 날, 그 빈틈을 정확하게 채우는 역할이 가능합니다. 한반도처럼 국토가 좁고 인구 밀도가 높아 대규모 재생에너지 단지를 놓기 어려운 나라에서는 분산형 전원으로서 가치가 큽니다.
그러나 SMR 역시 만능이 아닙니다. 미국 뉴스케일파워(NuScale Power)의 첫 상용 프로젝트가 초기 예상보다 건설 단가가 2배 이상 치솟아 중단된 사례는 SMR의 경제성 확보가 쉽지 않음을 보여줬습니다. 규제 인허가 체계는 여전히 대형 원전 중심으로 짜여 있어 SMR에 맞게 조정하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사용후핵연료(Spent Nuclear Fuel) 처리 문제는 국민의 수용성을 계속 시험합니다. 국내에서 반드시 한 기를 먼저 지어야 수출도 가능한데, 그 첫 기를 어디에 짓느냐를 둘러싼 지역 간 갈등은 식지 않습니다.
원전 하나로는 부족합니다. 재생에너지가 함께 가야 합니다.
태양광과 해상 풍력은 한국이 보유한 유일한 '국산 에너지'입니다. 수입이 필요 없습니다. 분산 전원이기 때문에 송전망 집중에 따른 취약성도 줄여줍니다. 기후변화 대응과 글로벌 공급망에서의 생존을 위해 RE100 이행은 피할 수 없습니다. 반도체와 자동차를 수출하려면, 그 제품을 만드는 공장에 재생에너지를 써야 한다는 요구가 이미 고객사들로부터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지리적 조건은 재생에너지 확대에 불리합니다. 일조량이 독일보다 많지 않고, 풍량은 북해 연안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산지가 많고 해안선 인근에 군사 제한 구역이 많아 입지 확보도 쉽지 않습니다. 주민 수용성 문제로 태양광 단지는 지역사회와의 갈등을 빚습니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질수록 발전량 변동성이 커져 계통 안정성을 지키기 위한 추가 비용이 올라갑니다.
재생에너지의 간헐성(Intermittency, 날씨와 시간에 따라 발전량이 들쭉날쭉한 특성)을 메울 방법도 필요합니다. 에너지저장장치(ESS)와 수요반응(Demand Response, 전력 수요를 탄력적으로 조절하는 기술)이 그 답입니다. 초고압직류송전(HVDC, High Voltage Direct Current) 기술로 송전 손실을 줄이고, 스마트 그리드(Smart Grid,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지능형 전력망)를 구축해 전력망 전체의 효율을 높여야 합니다.
정부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보급 목표를 100GW로 설정하며 이를 위한 전력망 확충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강조했습니다. 목표는 야심찹니다. 그러나 목표와 실행 사이의 거리는 멀었습니다. 전력망 확충 속도가 재생에너지 증설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만들어진 전기가 계통에 연결되지 못하고 버려집니다. 실제로 이미 제주도에서는 태양광 발전 과잉으로 인한 출력 제한 사태가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천연가스(LNG)는 어디에 위치할까요. 원전이 안정적인 기저 전력을 담당하고 재생에너지가 낮 시간대의 피크 전력을 담당할 때, LNG 발전소는 그 사이의 빈틈을 빠르게 채우는 '피크 보조원(Peaker Plant)'으로 기능합니다. 재생에너지가 갑자기 줄거나 전력 수요가 예상보다 치솟을 때 수십 분 안에 가동할 수 있는 유연성은 LNG 발전의 고유한 장점입니다. 이것은 에너지 전환의 완성 이전까지 반드시 필요한 다리입니다.
다만 그 LNG를 어디서 가져오느냐가 바뀌어야 합니다. 2026년 3월 31일, 러시아산 나프타 선적 2만 7,000톤이 한국에 도착하여 대산 석유화학 단지로 보내졌습니다. 중동의 공급이 막히자 한국 기업들이 새로운 대안을 찾아 나서고 있다는 신호였습니다. 미국 텍사스의 LNG 수출 터미널, 호주 북서부 대륙붕,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와 모잠비크. 이 경로들은 호르무즈 해협을 거치지 않습니다. 카타르와 이란으로 들어가는 모든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아두는 구조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그 다변화에는 비용이 붙습니다. 먼 곳에서 오는 LNG는 가깝게서 오는 것보다 운임이 비쌉니다. 장기 계약을 맺으면 안정성이 높아지지만 유연성이 줄어듭니다. 해외 자원 개발(Upstream) 사업에 직접 지분 투자를 단행하면 비상시 자국으로 원료를 끌어올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지만, 초기 투자 규모가 큽니다. 한국석유공사(KNOC, Korea National Oil Corporation)와 한국가스공사(KOGAS, Korea Gas Corporation)의 역할이 여기서 중요해집니다. 국가가 직접 에너지 외교를 펼쳐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종전 여부와 무관하게 원유와 원자재의 도입선을 다변화하고 대체 루트를 확보하는 구조적 해법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원전, 재생에너지, 가스. 세 가지 에너지원의 균형은 정해진 정답이 없습니다. 어느 나라나 자국의 지리, 기술력, 경제 규모, 안보 환경에 맞게 비율을 맞춰 나가야 합니다. 한국의 조건은 분명합니다.
섬처럼 고립된 전력망. 수입 에너지 의존도 93.7%. AI와 반도체가 이끄는 폭발적인 전력 수요 증가. 좁은 국토와 재생에너지 입지의 제약. 그러면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건설·운영 기술과 배터리, 조선, 에너지 기기 제조 능력.
이 조건 안에서 한국의 에너지 믹스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까요. 원전이 30% 수준의 기저 전력을 안정적으로 담당하고, 재생에너지가 빠르게 비중을 늘려 변동성 속에서도 탄소 없는 전력 공급을 이어가고, LNG 가스발전이 그 사이를 유연하게 메우는 구조입니다. 여기에 핵심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연결하고 관리하는 스마트 그리드와 에너지저장 시스템에 지금보다 훨씬 많은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투자 없이는, 원전을 10기 더 짓고 태양광 패널을 백만 장 더 깔아도 계통이 버티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전제는 정치적 일관성입니다. 에너지 인프라는 정권 5년의 시간 단위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원전 한 기를 짓는 데 최소 10년이 걸립니다. 해상 풍력 단지를 만들려면 수년간의 환경 평가와 주민 설득 과정이 필요합니다. LNG 터미널을 하나 짓는 데도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립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에너지 정책의 방향이 뒤집히면, 한국의 에너지 안보는 영원히 그 자리를 맴돕니다.
호르무즈 해협이 막혔던 2026년 3월의 경험은 한 가지를 증명했습니다. 에너지 문제는 먹고사는 문제이기 전에 살고 죽는 문제라는 것을. 그리고 살고 죽는 문제는 이념 논쟁의 소재가 아니라는 것을.
한국의 수출 대기업들은 이미 SMR에 투자를 시작했습니다. 삼성물산은 미국 뉴스케일파워에 전략적 지분 투자를 단행했고, 두산에너빌리티는 SMR 핵심 기기 제작 역량을 갖춰 가고 있습니다. 정부는 2038년까지 원자력 발전 비중을 35.2%로 올리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100GW 보급이라는 목표도 공식화됐습니다. 대형 원전 신규 건설에 대한 국민 여론 조사에서 찬성이 70%를 넘었습니다.
숫자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남은 것은 속도와 실행이었습니다.
다변화라는 단어는 쉽습니다.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수십 년간 구축된 공급망, 계약 관계, 인프라를 바꾸는 일은 하나의 선언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2026년 3월의 대한민국은 그 어려운 일을 미룰 수 있는 여유를 잃었습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는 기회비용을 극적으로 드러냈습니다. 30년간 에너지 다변화를 미뤄온 비용이 단 한 달 만에 청구서로 날아들었습니다. OECD가 추산한 한국의 성장률 하락 0.4%포인트. 제조업 생산비 11.8% 상승. 원화 가치 폭락. 코스피 선물 5.25% 하락. 러시아산 나프타 도입이 '처음 있는 일'로 뉴스가 되는 나라. 이 숫자들은 30년의 제자리걸음이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이제 한국은 선택해야 합니다. 해협이 다시 열리면 예전으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이 충격을 기억하며 실제로 구조를 바꿀 것인지.
답은 질문 안에 있습니다. 해협은 다시 막힐 수 있습니다. 다음번에는 호르무즈가 아닌 말라카(Malacca) 해협일 수도 있고, 바브엘만데브(Bab el-Mandeb) 해협일 수도 있고, 남중국해일 수도 있습니다. 초크포인트(Chokepoint, 해상 수송로에서 지리적으로 좁아지는 병목 지점)는 세계 곳곳에 있고, 그것들을 둘러싼 지정학적 긴장은 가라앉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30년 후 다음 세대가 다시 같은 질문 앞에 서느냐 아니냐를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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