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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3장 카헤티: 8,000년 와인의 성지
3장 카헤티: 8,000년 와인의 성지
조지아의 동쪽 끝, 코카서스 산맥이 하얀 이빨처럼 하늘과 맞닿은 곳에 카헤티(Kakheti)가 있습니다. 트빌리시에서 동쪽으로 차를 몰아 한 시간 반쯤 달리면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도로 양옆으로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 그 사이사이로 흙빛 담장을 두른 농가들, 멀리 눈 덮인 산봉우리가 아침 안개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알라자니 계곡(Alazani Valley)의 비옥한 대지는 수천 년간 포도를 품어왔고, 그 포도는 인류 최초의 와인이 되었습니다.
기원전 6,000년경, 신석기 시대의 조지아인들은 이미 포도를 발효시켜 와인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2017년 고고학자들이 트빌리시 남쪽 가다크릴리 고라(Gadachrili Gora) 유적지에서 발굴한 토기 조각에서 포도 잔류물이 검출되면서, 조지아는 공식적으로 '와인의 요람(Cradle of Wine)'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8,000년.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조지아인들은 전쟁과 침략, 제국의 흥망 속에서도 포도나무를 심고 와인을 빚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카헤티는 조지아 전체 와인 생산량의 75%를 담당합니다. 2024년 기준 조지아는 9,500만 리터의 와인을 수출하여 2억 7,610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는데, 그 대부분이 이 지역에서 생산된 것입니다. 관광 산업과 와인 산업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카헤티는 조지아 경제의 심장부로 부상했습니다. 텔라비(Telavi)와 시그나기(Sighnaghi), 크바렐리(Kvareli) 같은 작은 도시 들에는 고급 부티크 호텔들이 들어서고 있고, 2025년부터 2028년 사이 전국에 20여 개의 고급 숙박시설이 추가로 문을 열 예정입니다.
그러나 카헤티의 진정한 매력은 숫자가 아니라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있습니다. 포도밭 사이로 난 좁은 흙길을 따라가면 작은 농가가 나오고, 그 농가의 마당 한켠 에는 어김없이 '마라니(Marani)'라고 불리는 와인 저장고가 있습니다. 집주인은 낯선 여행 자에게도 와인 한 잔을 건네며 "가우마르조스(Gaumarjos, 승리를 위하여)"를 외칩니다. 조지아에서는 손님이 신이 보낸 선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가. 크베브리 양조법과 엠버 와인의 비밀
카헤티 여행에서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크베브리(Qvevri)'입니다. 크베브리는 달걀 모양의 거대한 점토 항아리로, 조지아인들은 이 항아리를 땅속에 묻어 와인을 발효시킵니 다. 2013년 유네스코가 이 양조법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했을 때, 조지아 사람들은 축제를 벌였습니다. 그들에게 크베브리는 단순한 양조 도구가 아니라 조상의 지혜이자 민족의 정체성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텔라비에서 북쪽으로 30분쯤 차를 달리면 작은 마을 이미르헤바(Imirheva)에 닿습니다. 이곳에서 20년 넘게 크베브리 와인을 만들어온 기오르기(Giorgi)라는 이름의 농부를 만났습
니다. 60대 초반의 그는 구릿빛으로 그을린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가 마라니 문을 열자 서늘한 공기와 함께 발효 중인 와인의 달콤 쌉싸름한 향이 코끝을 스쳤습니다.
"이게 크베브리야. 우리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쓰던 거지."
바닥에는 동그란 돌 뚜껑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를 들어 올리자 땅속 깊이 묻힌 거대한 항아리의 입구가 드러났습니다. 기오르기는 긴 국자로 항아리 속을 휘저어 탁한 액체를 떠 올렸습니다. 아직 숙성이 덜 된 와인이었지만 이미 호박빛이 감돌았습니다.
크베브리 양조법의 핵심은 '자연'과 '시간'입니다. 포도를 수확하면 먼저 '사츠나헬리(Satsnakheli)'라고 불리는 나무 압착기에서 포도를 으깹니다. 서양식 양조법에서는 포도즙만 사용하지만, 조지아 전통 방식은 다릅니다. 포도 껍질, 씨앗, 심지어 줄기까지 모두 크베 브리에 함께 넣습니다. 조지아인들은 이것을 '차차(Chacha)' 또는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와인이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야 건강하게 익는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항아리에 포도를 넣고 나면 자연 발효가 시작됩니다. 인위적인 효모나 화학 첨가물은 일 절 사용하지 않습니다. 발효 초기에는 하루 4~5회 내용물을 저어주지만, 2~3주가 지나면
크베브리를 점토와 돌뚜껑으로 밀봉합니다. 그 상태로 5~6개월, 길게는 1년 이상 숙성시킵니다. 땅속에 묻힌 크베브리는 연중 13~15도의 서늘한 온도를 유지하기 때문에 별도의 냉각 장치가 필요 없습니다. 어머니의 자궁처럼 항아리가 와인을 품어주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 화이트 포도 품종으로 만든 와인은 우리가 아는 투명한 노란색이 아닙니 다. 포도 껍질과 오랫동안 접촉하면서 색소와 타닌이 우러나와 짙은 호박색 또는 주황색을 띠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엠버 와인(Amber Wine)' 또는 '오렌지 와인'입니다.
기오르기가 잔에 따라준 엠버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습니다. 첫 인상은 낯설었습니다. 화이트 와인의 상쾌함을 기대했는데, 입안에서는 묵직한 타닌감이 혀를 감쌌습니다. 말린 살구와 호두, 은은한 꿀 향이 뒤따랐고, 목을 넘길 때 약간의 떫은맛이 남았습니다. 마치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의 경계를 넘나드는 듯한 맛이었습니다.
"처음엔 다들 놀라. 하지만 우리 음식이랑 먹어봐. 그때 진짜 맛을 알게 될 거야."
기오르기의 아내가 갓 구운 '쇼티(Shoti)' 빵과 호두로 속을 채운 가지 요리, 양고기 꼬치인 ' 므츠바디(Mtsvadi)'를 내왔습니다. 기름진 음식과 엠버 와인을 번갈아 먹으니 신기하게도 입안이 개운해졌습니다. 화이트 와인의 산미와 레드 와인의 타닌이 기름기를 잡아주는 것 입니다. 조지아 음식과 엠버 와인은 수천 년에 걸쳐 서로를 위해 진화해온 환상의 파트너였습니다.
카헤티의 대표적인 포도 품종 두 가지를 기억해 두면 좋습니다. 화이트 품종으로는 '르카치 텔리(Rkatsiteli)'와 '키시(Kisi)'가 있고, 레드 품종으로는 '사페라비(Saperavi)'가 대표적입니다. 르카치텔리를 크베브리 방식으로 발효시키면 호박색 엠버 와인이 되고, 유럽식으로 껍질을 제거하고 발효시키면 일반적인 화이트 와인이 됩니다. 같은 포도로 전혀 다른 두 가지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조지아 와인의 매력입니다.
사페라비로 만든 레드 와인은 색이 매우 짙어 잔에 따르면 거의 검붉은 색에 가깝습니다. 타닌이 풍부하고 베리 향이 강하며, 드라이한 맛부터 세미 스위트까지 다양한 스타일이 있습니다. 스탈린이 가장 좋아했다고 알려진 '킨즈마라울리(Kindzmarauli)'가 바로 사페라비로 만든 세미 스위트 레드 와인입니다.
크베브리 양조법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기적에 가깝습니다. 소비에트 시절 당국은 대량 생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전통 양조법을 억압했습니다. 많은 크베브 리가 파괴되거나 방치되었고, 노하우를 가진 장인들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일부 가정에서는 몰래 크베브리를 지켜왔고, 소련 붕괴 후 젊은 세대가 전통을 되살리기 시작했습니다. 유네스코 등재 이후 크베브리 와인은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고, 이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일부 양조장에서도 점토 항아리 발효를 실험하고 있습니다.
기오르기와 헤어지면서 그가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크베브리는 살아 있어. 숨을 쉬지. 플라스틱이나 스테인리스 탱크는 그렇지 않아. 그래서 우리 와인은 살아 있는 맛이 나는 거야."
조지아인들에게 와인은 단순한 술이 아닙니다. 신과 조국, 가족과 우정을 기리는 신성한 매개체입니다. 크베브리 속에서 6개월을 보낸 와인을 이듬해 봄에 열어볼 때, 조지아인들은 새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듯 기뻐합니다. 수도사들은 "아이가 태어날 때 와인을 담그고, 그 아이가 결혼할 때 함께 마시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말합니다. 시간을 견딘 것만이 진정한 가치를 갖는다는 믿음이 크베브리 양조법의 철학입니다.
호텔 크베브리(Hotel Qvevrebi) 소개
조지아 와인의 심장부 카헤티 지역, 텔라비 외곽 샬라우리(Shalauri) 마을 언덕 위에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호텔이 있습니다. 2023년 9월 5일 문을 연 호텔 크베브리는 조지아 가족이 운영하는 부티크 호텔입니다. 2018년 샬라우리 마을의 아름다운 언덕을 발견하면서 오랜 꿈을 현실로 만들었고, 은행 융자와 정부 지원을 받아 2019년 말 착공했습니다. 코로나19 팬데 믹으로 1년 넘게 공사가 중단되는 시련을 겪었지만, 가족 모두가 심혈을 기울여 5년 만에 완공했습니다.
객실은 본관 17개 객실과 20개의 크베브리 모양 독채 코티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코티 지는 르카치텔리, 사페라비, 키시 등 조지아 토착 포도 품종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습니다. 크
베브리 모양 객실은 옆으로 누운 항아리 형태이며, 둥근 입구 부분에 유리창이 설치되어 가족 포도밭과 저 멀리 코카서스 산맥의 실루엣이 펼쳐집니다.
각 독채에는 킹사이즈 침대, 전용 욕실, 미니 주방, 작은 테라스가 갖춰져 있습니다. 야외 수 영장, 사우나, 온수 욕조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으며, 당구대, 탁구대, 보드게임 등 엔터테인 먼트 시설도 갖추고 있습니다. 본관 레스토랑 '암포라(Amphora)'에서는 조지아 전통 요리와 유럽 요리를 코카서스 산맥 전망과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와인 시음, 요리 교실은 물론 수확철에는 전통 목재 압착기 '사츠나켈리(Satsnakheli)'로 직접 포도를 밟는 체험도 가능합니다. 예약 사이트 평점 9.6점을 기록하는 이 호텔은 카헤티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자리 잡았습니다.
트빌리시에서 호텔 크베브리 찾아가기
트빌리시에서 텔라비행 마슈루트카는 삼고리(Samgori) 지하철역 인근 나브틀루기(Navtlughi) 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합니다. 평일·주말 구분 없이 오전 9시, 11시, 오후 1시, 3시, 5 시, 6시에 운행되며, 여름철에는 오전 7시 편이 추가되기도 합니다. 요금은 1인당 15라리(약
7,500원)이며, 소요 시간은 2시간~2시간 30분입니다. 출발 30분 전 도착하여 좌석을 확보하는 것이 좋습니다.
택시 또는 개인 차량
트빌리시에서 텔라비까지 약 95km이며, 바지아니-곰보리-텔라비 고속도로(Sh38)를 이용하면 약 2시간 30분 소요됩니다. 곰보리 고개는 구불구불한 산악도로이므로 겨울철에는 구르 자아니 경유 우회로(160km)를 권장합니다. 택시 요금은 편도 약 100~140라리(5~7만원) 수준입니다.
호텔까지 마지막 구간
텔라비 시내에서 호텔 크베브리까지는 차로 약 10분 거리입니다. 텔라비 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이용하면 10~15라리면 충분합니다. 호텔에 사전 연락하면 픽업 서비스 안내를 받을 수 있습니다.
나. 시그나기, 24시간 결혼이 가능한 사랑의 도시
카헤티 지역의 남쪽, 해발 800미터 언덕 위에 시그나기(Sighnaghi)가 있습니다. 트빌리시에서 차로 두 시간,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갑자기 동화 속 마을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붉은 기와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파스텔 톤의 벽을 가진 집들 사이로 좁은 돌길이 미로처럼 이어집니다. 마을 어디에서든 발코니에 서면 알라자니 계곡이 발아래로 펼쳐지고, 맑은 날에는 멀리 코카서스 산맥의 만년설이 하얗게 빛납니다.
시그나기는 '사랑의 도시(City of Love)'라는 낭만적인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작은 마을이 그런 이름을 얻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24시간 운영되는 결혼 등기소입니다. 2007년 시그나기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문을 연 이 등기소에서는 국적에 상관없이 여권만 있으면 언제든 혼인 신고를 할 수 있었습니다. 예약도 필요 없고, 복잡한 서류도 없었습니다. 세계에서 이런 곳은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웨딩 채플과 조지아의 시그나기, 두 곳뿐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시그나기 중심부의 좁은 골목을 걷다 보면 작은 광장이 나옵니다. 광장 한쪽에는 의자 위에 서서 꽃다발을 든 소녀 동상이 있고, 그 맞은편에 아담한 건물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 웨딩 하우스(Wedding House)'입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2층에 결혼 등록 사무실이 있습니다. 신랑 신부는 여권과 필요한 경우 이혼 증명서만 가지고 오면 됩니다. 두 명의 증인이 필요한데, 마땅한 사람이 없으면 거리에서 지나가는 현지인이나 여행자에게 부탁해도됩니다. 등록 비용은 평일 90라리(약 4만 원), 주말에는 150라리(약 6만 5천 원) 정도입니다. 30분이면 법적 효력이 있는 결혼 증명서를 손에 쥘 수 있습니다.
다만 최근 정보에 따르면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운영 시간이 조정되어 현재는 평일 오전 9 시부터 오후 6시까지만 운영되고, 월요일과 화요일은 휴무입니다. 과거처럼 새벽 3시에 와인에 취해 즉흥적으로 결혼하는 것은 어렵게 되었지만, 시그나기의 낭만은 여전합니다. 결혼을 계획하는 커플이라면 최소 한 시간 전에 전화로 예약하는 것이 좋습니다.
시그나기가 사랑의 도시가 된 데는 또 다른 전설이 있습니다. 조지아 국민 화가로 추앙받는 니코 피로스마니(Niko Pirosmani, 1862~1918)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입니다. 가난한 독학 화가였던 피로스마니는 트빌리시의 한 술집에서 프랑스에서 온 여배우 마르가리타를 보고 첫눈에 반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마르가리타가 묵고 있던 호텔 앞을 수만 송이 장미로 뒤덮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장미는 백만 송이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러시아 가수 알라 푸가초바의 노래 '백만 송이 장미(A Million Roses)'로 만들어져 전 세계에 알려졌고, 한국에서도 심수봉이 '백만 송이 장미'를 불러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피로스마니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마르가리타는 곧 조지아를 떠났고, 피로스마니는 평생 가난 속에서 그림을 그
리다 외롭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순애보는 시그나기를 영원한 사랑의 상징으로 만들었습니다.
시그나기 박물관에 가면 피로스마니의 원작 그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서양 미술 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그의 작품은 소박하면서도 강렬합니다. 조지아의 일상 풍경, 연회를 즐기는 사람들, 포도밭과 동물들이 투박한 붓질로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그가 즐겨 그렸다는 물고기와 수탉 그림은 조지아 기념품 가게 어디서나 만날 수 있습니다.
시그나기의 또 다른 볼거리는 마을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성벽입니다. 18세기 에레클레 2 세(King Erekle II) 통치 시절에 축조된 이 성벽은 총 길이가 4~5킬로미터에 달하며 23개에서 28개의 망루가 세워져 있습니다. '조지아의 작은 만리장성'이라 불리는 이 성벽 위를 걸으면 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성벽 산책은 약 2~3시간이 소요되며, 중간중간 망루에 올라 사진을 찍기에 좋습니다.
해 질 녘 성벽 위에서 바라보는 알라자니 계곡은 황홀합니다.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이 붉은 노을에 물들고, 저 멀리 코카서스 산맥이 보랏빛으로 물듭니다. 밤이 되면 마을 전체에 조명이 들어와 중세 동화 속 풍경이 펼쳐집니다. 카보도니 부티크 호텔(Kabadoni Boutique Hotel)이나 벨뷰 부티크 호텔(BelleVue Boutique Hotel) 같은 숙소에서 하룻밤 묵으며 이 야경을 감상하는 것도 좋습니다.
시그나기의 좁은 골목에는 와이너리 카페와 레스토랑, 작은 갤러리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 피전츠 티어스(Pheasant's Tears)'라는 와이너리 겸 레스토랑은 현지인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높습니다. 미국 출신의 예술가가 조지아에 정착해 전통 방식으로 와인을 만들고 있으며, 현지 농가에서 직접 재배한 식재료로 만든 요리와 크베브리 와인의 페어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시그나기를 방문하기 좋은 시기는 봄(4~6월)과 가을(9~10월)입니다. 봄에는 포도밭에 새싹이 돋아나고 야생화가 만발합니다. 가을에는 포도 수확철로 마을 전체가 와인 축제 분위기에 휩싸입니다. 한여름(7~8월)은 더위가 극심하므로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겨울에는 눈 덮인 코카서스 산맥의 풍경이 장관이지만, 일부 시설이 문을 닫기도 합니다.
시그나기에서 보낸 하루가 저물 무렵, 웨딩 하우스 앞에서 젊은 커플 한 쌍이 사진을 찍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부는 흰 드레스 대신 캐주얼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신랑은 청바지에 셔츠 차림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복잡한 절차 없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어 좋다고 웃었습니다.
"여기서 결혼하면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대요."
신부가 말했습니다. 조지아 사람들은 시그나기에서 맺어진 부부는 평생 변치 않는 사랑을 한다고 믿습니다. 물론 전설일 뿐이지만, 이 작은 마을이 주는 낭만이 그 믿음을 더욱 달콤하게 만들어줍니다. 사랑의 도시, 시그나기. 포도밭 위로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며 한 잔의 와인을 기울이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다. 알라베르디 수도원과 성녀 니노의 발자취
카헤티는 와인의 땅이면서 동시에 깊은 신앙의 땅입니다. 조지아인들에게 와인과 기독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4세기에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녀 니노(St. Nino) 가 포도나무 가지로 만든 십자가를 들고 왔다는 전설이 그 연결고리입니다. 카헤티 지역에는 그녀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으며, 천 년 넘게 와인을 빚어온 수도원들이 여전히 운영되고 있습니다.
텔라비에서 북쪽으로 20킬로미터, 알라자니 계곡의 평원 한가운데에 알라베르디 수도원(Alaverdi Monastery)이 우뚝 서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코카서스 산맥을 배경으로 웅장한 성당이 마치 거인처럼 솟아 있습니다. 6세기에 아시리아에서 온 수도사 요셉 알라베르델 리(Joseph Alaverdeli)가 이곳에 작은 교회를 세운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현재의 웅장한 대성당은 11세기 초, 카헤티의 왕 크비리케 3세(Kvirike III)가 지은 것입니다.
높이 55미터가 넘는 알라베르디 대성당은 2004년 트빌리시에 삼위일체 대성당(Sameba Cathedral)이 완공되기 전까지 조지아에서 가장 높은 종교 건축물이었습니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천년의 세월을 견딘 프레스코화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촛불 연기에 그을린 돌기 둥들이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제단을 장식한 조각 중에는 커다란 포도송이가 새겨진 것들이 있습니다.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징합니다.
알라베르디 수도원이 독특한 것은 천 년 넘게 와인을 빚어왔다는 점입니다. 성당 경내에는 11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크베브리들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수도원의 마라니(와인 저장고)에서는 지금도 수도사들이 전통 방식 그대로 와인을 생산합니다. 소비 에트 시절 한때 와인 생산이 중단되었지만, 2006년 고대 크베브리들이 발굴되면서 양조가 재개되었습니다.
수도원 와인 저장고를 안내해준 수도사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와인을 신에게 바치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크베브리를 밀봉할 때 기도하고, 이듬해 봄에 열 때도 기도합니다. 6개월 동안 땅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모릅니 다. 신만이 아십니다."
알라베르디 수도원의 와인 병에는 "Since 1011"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1011년, 최초로 이곳에서 와인이 만들어진 해입니다. 수도사들은 아이가 태어났을 때 와인을 담그고그 아이가 결혼할 때 함께 마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합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익어가는 것만이 진정한 가치를 갖는다는 믿음입니다.
수도원 경내에는 80여 종의 조지아 토착 포도 품종이 자라는 포도원이 있습니다. 성당 앞광장에서 마츠오니(요거트)에 꿀과 호두를 얹은 디저트를 맛보거나, 수도원에서 생산한 와인을 시음할 수 있는 작은 시음장도 있습니다. 매년 9월 말에는 '알라베르도바(Alaverdoba)' 라는 종교 축제가 열리는데, 이때는 카헤티 전역은 물론 먼 산악 지방에서도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종교 의식과 함께 와인 축제가 펼쳐지고, 전통 음악과 춤이 밤새 이어집니다.
시그나기에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보드베 수도원(Bodbe Monastery)이 있습니다. 조지아인들에게 가장 신성시되는 성지 중 하나입니다. 이곳은 4세기에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녀 니노가 생을 마감하고 묻힌 곳입니다.
성녀 니노는 로마령 카파도키아(현재 터키 지역) 출신의 여성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꿈에서 성모 마리아로부터 포도나무 가지로 만든 십자가를 받았습니다. 그 십자가를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묶어 고정한 뒤, 코카서스를 넘어 조지아로 왔습니다. 이 '포도나무 십자가(Grapevine Cross)'는 조지아 정교회의 상징이 되었으며, 현재 트빌리시의 시오니 대성 당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니노는 기도의 힘으로 이베리아 왕국(동부 조지아)의 왕비 나나를 병에서 치유했습니다. 이 기적에 감동한 미리안 왕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고, 조지아는 337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기독교를 공식 종교로 받아들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아르메니아가 301년으로 첫 번
째) 니노는 조지아의 '영적 어머니'로 추앙받으며, 그녀의 축일인 1월 14일과 6월 1일은 국경일에 준하는 기념일입니다.
보드베 수도원은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우거진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성녀 니노의 무덤이 있는 성당 안은 늘 순례객들로 붐빕니다. 사람들은 무덤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수도원은 현재 수녀원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잘 가꾸어진 정원과 발코니에서는 알라자니 계곡의 탁 트인 풍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수도원 아래쪽으로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성녀 니노의 샘'이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니노가 기도하던 자리에서 샘물이 솟아났다고 합니다. 많은 순례객이 이 샘물에 치유의 힘이 있다고 믿으며, 실제로 물에 몸을 담그는 세례를 받기도 합니다. 샘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데는 약 30~40분이 소요됩니다. 체력이 부담된다면 샘은 건너뛰고 수도원 정원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습니다.
조지아를 여행하다 보면 와인과 기독교가 얼마나 깊이 얽혀 있는지 느끼게 됩니다. 성녀 니노가 포도나무 십자가를 들고 왔다는 것은 단순한 전설이 아닙니다. 조지아인들에게 포도나무는 생명이고 축복이며, 와인은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성스러운 매개체입니다. 수프
라(전통 연회)에서 타마다(건배 제의자)가 올리는 첫 번째 건배사는 언제나 신에게 바치는 감사입니다. 카헤티의 수도원들을 순례하며 이 땅의 영적 깊이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라. 추천 와이너리 투어와 시음 가이드
카헤티에는 200개가 넘는 와이너리가 있습니다. 트빌리시에서 출발하는 당일 투어 상품도 많고, 렌터카를 빌려 직접 돌아다니는 것도 가능합니다. 대규모 상업 와이너리부터 소박한 가정집 와이너리까지 다양한 선택지가 있으니, 취향에 맞게 일정을 짜면 됩니다. 시음 비용은 와이너리에 따라 30~50라리(약 1만 5천~2만 5천 원) 정도입니다.
1. 하레바 와이너리(Khareba Winery) - 산속의 비밀 터널
크바렐리(Kvareli)에 위치한 하레바 와이너리는 '와인 터널'로 유명합니다. 구소련 시절 군사 목적으로 파놓은 거대한 터널을 와인 저장고로 개조한 것입니다. 총 길이 7.7킬로미터에 달하는 이 터널은 연중 12~14도의 서늘한 온도를 유지합니다. 터널 안을 걷다 보면 양쪽 벽면에 끝없이 와인 병들이 쌓여 있어 장관을 이룹니다.
터널 투어 후에는 터널 안에 마련된 시음장에서 와인을 맛볼 수 있습니다. 대중적인 맛부터 고급 크베브리 와인까지 다양한 라인업을 갖추고 있어 와인 초보자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습니다. 와이너리에서는 '츄르첼라(Churchkhela)'라고 불리는 전통 간식 만들기 체험 이나 빵 굽기 프로그램도 운영합니다. 츄르첼라는 호두를 실에 꿰어 포도즙을 입힌 것으 로, '조지아 스니커즈'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달콤하고 고소합니다.
2. 킨즈마라울리 코퍼레이션(Kindzmarauli Corporation) - 스탈린이 사랑한 와인
크바렐리 시내에 위치한 대형 와이너리입니다. 16세기에 지어진 왕실 와인 저장고 유적 위에 세워졌습니다. 스탈린이 가장 좋아했다고 알려진 세미 스위트 레드 와인 '킨즈마라울리(Kindzmarauli)'의 본산입니다. 사페라비 포도로 만드는 이 와인은 달콤하면서도 깊은 풍미를 지녀 와인 초보자들도 쉽게 즐길 수 있습니다.
현대적인 생산 시설과 전통적인 크베브리 저장고를 모두 갖추고 있어 두 가지 방식을 비교하며 견학할 수 있습니다. 투어 비용이 저렴하고 시내에 위치해 접근성이 좋아 가성비가 뛰어납니다. 와인을 마시지 못하는 일행이 있다면 이곳에서 만드는 포도 주스도 훌륭합니다.
3. 슈미 와이너리(Shumi Winery) - 살아있는 와인 박물관
츠난달리(Tsinandali) 마을에 위치한 슈미 와이너리는 수백 종의 포도 품종이 자라는 정원이 인상적입니다. 조지아 토착 품종은 물론 세계 각국의 포도나무가 심어져 있어 '살아있는 와인 도서관'이라 불립니다. 전설 속의 동물 '그리핀(Grif n)'을 상징으로 사용하며, 와인 라벨에도 그리핀이 그려져 있습니다.
와이너리 내부에는 고대 와인 양조 도구들을 전시한 박물관이 있습니다. 박물관 투어 후테라스에서 포도밭을 바라보며 와인을 시음할 수 있습니다. 조지아 와인의 역사를 체계적
fi 으로 배우고 싶다면 이곳을 추천합니다. 영어 안내가 잘 되어 있어 외국인 여행자도 편하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4. 츠난달리 에스테이트(Tsinandali Estate) - 귀족의 우아함
19세기 귀족이자 시인이었던 알렉산더 차브차바제(Alexander Chavchavadze)의 저택입니다. 그는 조지아에 유럽식 와인 제조법을 처음 도입한 인물로, 조지아 와인을 최초로 병에 담아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넓은 영국식 정원을 거닐다 보면 19세기 귀족의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저택 내부는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고, 지하에는 유서 깊은 와인 보관소가 있습니다. 이곳 에서 생산하는 '츠난달리(Tsinandali)' 화이트 와인은 르카치텔리와 므츠바네(Mtsvane) 두품종을 블렌딩한 것으로, 조지아 화이트 와인 중 가장 유명합니다.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에서 와인을 즐기고 싶다면 이곳이 정답입니다.
5. 가족 와이너리(Family Marani) - 진정한 조지아의 환대
카헤티의 진정한 매력은 이름 없는 작은 마을의 가정집 와이너리에서 발견됩니다. 시그나 기나 텔라비의 관광 안내소에서 가족 와이너리 투어를 예약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으로 '잔다라쉬빌리 게스트하우스(Zandarashvili Guesthouse)'나 '초나스 마라니(Chona's Marani)' 같은 곳이 있습니다.
가족 와이너리를 방문하면 집주인이 직접 빚은 크베브리 와인을 항아리에서 바로 떠서 시음할 수 있습니다. 화이트, 레드, 엠버 와인과 함께 '차차(Chacha)'라고 불리는 포도 증류주도 내옵니다. 차차는 도수가 40~60도로 매우 높으니 조심해서 마셔야 합니다. 와인과 함께갓 구운 쇼티 빵, 치즈, 꼬치구이, 하차푸리 등 푸짐한 음식이 나옵니다.
가장 특별한 경험은 '수프라(Supra)'라 불리는 조지아 전통 연회입니다. 집주인이 '타마다(Tamada, 건배 제의자)'가 되어 건배사를 이끕니다. 첫 번째 건배는 신에게, 두 번째는 가족 에게, 세 번째는 조국에게 바칩니다. 그 뒤로 평화, 우정, 사랑, 고인에 대한 추모 등 다양한 주제의 건배가 이어집니다. 타마다가 건배사를 마치면 참석자들은 잔을 비우는 것이 예의입니다. 단, 잔을 비우는 것이 부담스러우면 입술만 적시는 것도 괜찮습니다.
시음 가이드 및 팁
사페라비(Saperavi): 조지아 대표 레드 와인 품종입니다. 색이 매우 짙고 타닌이 풍부합니다. 드라이한 것부터 세미 스위트까지 다양합니다. 고기 요리와 잘 어울립니다.
르카치텔리(Rkatsiteli): 가장 대중적인 화이트/엠버 와인 품종입니다. 유럽식으로 만들면 상쾌한 화이트 와인, 크베브리 방식으로 만들면 묵직한 엠버 와인이 됩니다.
키시(Kisi): 르카치텔리보다 향이 풍부한 화이트 품종입니다. 엠버 와인으로 만들면 꽃향기와 복숭아 향이 매력적입니다.
킨즈마라울리(Kindzmarauli): 사페라비로 만든 세미 스위트 레드 와인입니다. 와인 초보자도 부담 없이 마실 수 있습니다.
츠난달리(Tsinandali): 르카치텔리와 므츠바네를 블렌딩한 드라이 화이트 와인입니다. 생선 요리와 잘 어울립니다.
차차(Chacha): 와인을 만들고 남은 포도 찌꺼기로 증류한 브랜디입니다. 도수가 40~60도로 높으니 주의하세요.
와인을 마실 때 조지아에서는 "가우마르조스(Gaumarjos)"라고 외칩니다. '승리를 위하여' 라는 뜻입니다. 타마다가 건배사를 하기 전에 먼저 마시지 않는 것이 예의입니다. 조지아 인들에게 와인은 단순한 술이 아니라 신과 가족, 친구를 연결하는 신성한 매개체임을 기억 한다면 더욱 풍성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카헤티 와이너리 투어의 최적기는 4월부터 10월입니다. 그중에서도 9~10월 포도 수확철에는 '르트벨리(Rtveli)'라고 불리는 수확 축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직접 포도를 밟아 즙을 내는 전통 체험도 가능합니다. 봄(4~6월)에는 관광객이 적어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습니다. 투어 시 운전은 삼가야 하므로, 당일 투어 상품을 이용하거나 기사를 고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트빌리시에서 출발하는 당일 투어는 50~100달러 선이며, GetYourGuide나 Klook 같은 플랫폼에서 예약할 수 있습니다.
카헤티의 붉은 흙냄새와 깊은 와인 향기 속에서 8,000년의 시간을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 다. 크베브리 속에서 잠들었다 깨어난 호박빛 와인 한 잔, 성벽 위에서 바라보는 알라자니 계곡의 노을, 수도원의 경건한 침묵 속에서 울리는 종소리.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카헤티 만의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조지아인들은 말합니다. "와인은 땅이 만들고, 시간이 완성하 고, 사람이 나눈다." 카헤티에서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