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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29장 오키나와 — 변함없는 짐
유리 천장을 넘어서
제6부 성찰 — 일본이란 무엇인가
29장 오키나와 — 변함없는 짐
김경진
1945년 4월 1일 새벽, 오키나와 서쪽 해안에서 파도가 붉게 물들었다. 미군 함선 1,500척이 수평선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날 아침 오전 8시 30분, 미 해병대와 육군 약 6만 명이 상륙을 시작했다. 작전 코드명 아이스버그(Iceberg, 빙산). 태평양 전쟁 최후의 대규모 상륙 작전이었다.
섬 전체가 전쟁터가 됐다. 82일간의 전투. 일본군은 지하 동굴에 진지를 구축하고 최후까지 저항했다. 미군 1만 2천여 명이 전사했다. 일본군 사상자는 10만 명이 넘었다. 그리고 오키나와 주민. 당시 인구 45만 명 중 약 12만 명, 전체의 4분의 1이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군인과 민간인을 합산하면 20만 명 이상이 이 섬에서 죽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군에 의해 스파이로 몰려 죽기도 했다. "집단 자결"이라는 이름 아래, 일본군의 강요나 압박으로 가족이 서로를 죽이는 비극도 있었다. 어머니가 아이의 목을 조르고, 형이 동생에게 독을 먹이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전쟁은 오키나와에게 일본 본토 방어의 희생양이라는 상처를 남겼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훗날 말했다. "우리는 군대에 의해 지켜진 것이 아니라, 군대에 의해 버려졌다."
6월 22일, 오키나와 수비 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牛島満) 중장이 자결하면서 조직적 저항이 끝났다. 그러나 오키나와 주민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섬은 미군 점령 하에 놓였다. 1945년 9월, 일본 본토가 항복 조인을 하고 점령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거쳤지만, 오키나와는 달랐다. 오키나와는 그냥 미국의 통치 아래 남았다.
오키나와는 1972년 5월 15일 일본에 반환됐다. 미군 점령이 끝나고 27년 만의 복귀였다. 그러나 복귀는 불완전했다. 미군 기지가 그대로 남았다.
숫자로 보면 이렇다. 오키나와는 일본 전체 면적의 0.6퍼센트에 불과한 섬이다. 그런데 일본에 있는 미군 전용 시설의 70.3퍼센트가 이 작은 섬에 집중되어 있다. 2020년 기준으로 오키나와의 미군 전용 시설 면적은 1만 8,483헥타르이며, 이는 오키나와현 전체 면적의 8.1퍼센트를 차지한다. 오키나와 본섬으로만 좁히면 그 비율은 약 15퍼센트까지 올라간다. 섬의 15퍼센트가 외국 군대의 기지다.
지도에서 오키나와를 보면 이해가 된다. 섬 북쪽 절반은 미군 훈련 구역이다. 섬 중부에는 거대한 가데나(嘉手納) 공군 기지가 있다. 아시아 최대의 미 공군 기지다. 그 주변을 민가들이 에워싸고 있다. 밤에는 훈련 비행기 소음이 잠을 방해한다. 아이들이 자다가 폭음에 깬다. 소음 피해 소송이 수십 년째 계속되고 있다.
후텐마(普天間) 해병대 항공 기지는 기노완(宜野湾)시 한가운데 있다. 학교와 병원이 기지를 둘러싸고 있다. 전투기가 민가 바로 위를 날아다닌다. 이 기지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군사 기지 중 하나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그 위험이 현실이 된 것은 2004년, 헬기가 인근 오키나와 국제대학 캠퍼스에 추락했을 때였다. 기적적으로 학생 사망자는 없었지만, 기지가 사람들의 일상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섬 전체에 각인시켰다.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는 30년이 넘은 갈등이다.
1995년, 오키나와에서 세 명의 미 해병대원이 12세 소녀를 성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분노한 오키나와 주민 8만 5천 명이 거리로 나왔다. 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반기지 시위였다. 일본 정부는 미국과 협상에 나섰고, 1996년 미일 양국은 후텐마 기지를 5~7년 내에 오키나와 내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로 합의했다.
그 "다른 곳"이 헤노코(辺野古)였다. 오키나와 북부 나고(名護)시 헤노코 해안을 매립해 새 기지를 짓는 계획이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반대했다. 후텐마를 옮기는 것이지, 없애는 것이 아니라는 것. 오키나와 부담은 그대로이고 위치만 바뀔 뿐이라는 것. 헤노코의 아름다운 산호초와 생태계가 파괴된다는 것. 반대 이유들은 쌓였다.
매립 공사는 2018년 시작됐다. 오키나와 현 지사(知事)는 공사를 막으려 했다. 법정 다툼이 이어졌다. 2024년 대법원이 국가의 손을 들어줬다. 공사는 계속됐다. 헤노코 앞바다가 붉은 토사로 채워졌다. 총 사업비 추정액은 약 9,300억 엔. 갑자기 연약 지반이 발견되면서 완공 시기는 2030년대 이후로 밀렸다.
오키나와 주민 투표가 2019년에 있었다. 헤노코 매립에 반대한다고 72퍼센트가 투표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 결과를 무시했다. 주민 투표의 결과에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이유였다. 이것이 오키나와 문제의 본질이다. 민주적 절차를 통해 의사를 표현했는데 무시당하는 것.
다카이치 사나에는 오키나와와 인연이 있다. 2006년 제1차 아베 내각에서 그녀는 내각부 특명 담당대신으로 입각했다. 오키나와 및 북방대책을 담당하는 자리였다. 오키나와 담당 대신으로서, 그녀는 오키나와를 방문했고, 미군 기지 문제를 다뤘다.
그때 그녀는 젊은 정치인이었다. 45세의 첫 각료. 오키나와의 현실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기지 주변을 에워싼 민가들, 전투기 소음, 주민들의 분노. 그 현실이 그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경험이 이후 그녀의 오키나와 정책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면, 그것도 하나의 답이다.
총리가 된 이후에도 이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2025년 소신표명 연설에서 그녀는 말했다. "오키나와현을 포함한 기지 부담 경감에 계속 임하겠습니다. 후텐마 비행장의 하루라도 빠른 전면 반환을 목표로 헤노코로의 이설 공사를 진행하겠습니다." 헤노코 이전 계속. 이것이 다카이치의 오키나와 정책이다. 오키나와 주민들이 원하는 것과 정부가 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 여전하다.
오키나와의 위치는 대만 유사 시나리오에서 핵심이 된다.
오키나와와 대만의 거리는 약 600킬로미터다. 중국 본토에서 오키나와까지는 약 800킬로미터다. 만약 중국이 대만을 무력 침공하는 시나리오가 발생한다면,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는 미군이 개입하는 전진 기지가 된다. 가데나 공군 기지에서 발진한 전투기가 대만 상공에 10분 이내에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이 미국과 일본이 오키나와 기지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유다.
그러나 그것은 오키나와 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뜻이다. 만약 중국과 미국이 충돌하면, 오키나와가 가장 먼저 공격 대상이 된다. 1945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번 오키나와가 전쟁의 최전선이 될 수 있다. 오키나와 주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이것이다.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지리적 위치 때문에 전쟁의 위험을 떠안아야 하는 것.
다카이치 정권의 방위비 증액, 헌법 개정 추진, 대만 유사 시 대응 강화 방침은 안보의 관점에서는 논리적이다. 그러나 오키나와의 관점에서는 그 논리가 오키나와를 더 큰 위험에 노출시킨다. 강해지는 일본의 군사력이 오키나와 주민들에게는 자신들을 방어해주는 힘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험에 끌어들이는 힘으로 느껴진다.
오키나와의 복잡한 감정을 단순화하면 이해를 잘못하는 것이다.
독립 운동이 있다. 오키나와는 1879년에야 일본에 편입됐다. 그 전에는 독립국 류큐 왕국(琉球王國)이었다. 류큐 왕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교역으로 번성한 독자적인 문명을 가진 나라였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인이기 이전에 류큐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진다. 독립을 원하는 사람들은 이 정체성에 기반해 말한다. 그러나 독립 지지율은 높지 않다. 현실의 경제와 안전보다 더 강한 정체성의 힘이 아직 쌓이지 않았다.
기지 경제라는 현실도 있다. 미군 기지가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 즉 기지 종사자들의 소비, 기지 건설과 유지를 위한 공사, 기지에 의존하는 일자리들. 오키나와 경제의 일부가 기지에 의존한다. 기지가 사라지면 그 경제적 공백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라는 현실적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오키나와 경제에서 기지의 비중은 예전보다 작아졌다. 관광업이 성장했고, 류큐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새로운 산업 가능성도 열리고 있다. 오키나와를 찾는 한국 관광객도 빠르게 늘고 있다. 그 아름다운 산호초 바다, 독특한 음식, 류큐의 음악. 그것들이 오키나와의 진짜 자산이다. 그러나 그 자산이 기지와 함께 있는 한, 온전히 꽃피기 어렵다.
일본 정부와 오키나와의 관계는 구조적 불평등이다. 인구로 보면 오키나와는 일본 전체 인구의 약 1퍼센트다. 의석수에서도 소수다. 자민당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국회에서, 오키나와 출신 야당 의원들의 목소리는 수적으로 약하다.
선거에서 오키나와 유권자들이 아무리 반기지 후보를 뽑아도, 국회 전체에서는 소수다. 주민 투표에서 기지 반대를 표현해도, 법적 구속력이 없다. 법원에서 다퉈도, 대법원이 국가의 손을 들어준다. 이 모든 경로가 막혔을 때, 남은 것은 시위뿐이다. 헤노코 매립 공사장 앞에서 매일 아침 노인들이 차도에 앉아 공사 차량을 막는다. 경찰이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 차량이 들어간다. 다음 날 아침 다시 노인들이 앉는다. 이것이 10년째 반복되고 있다. 그 노인들은 1945년의 전쟁을 기억한다. 그 기억이 그들을 매일 공사장 앞으로 데려온다.
오키나와는 일본의 민주주의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다수결의 원리로만 민주주의를 이해한다면, 오키나와는 그냥 지면 되는 것이다. 73퍼센트의 기지가 여기 있어도, 일본 전체 유권자의 다수가 원한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만이 아니다. 소수의 권리 보호, 지역 자치의 존중, 불균형한 부담에 대한 보상. 이런 것들이 민주주의의 다른 얼굴이다. 오키나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일본의 민주주의는 완성됐다고 말할 수 없다.
전쟁에서 가장 많이 희생됐고, 패전 이후에는 기지의 부담을 일방적으로 짊어진 곳. 그 짐이 70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다. 다카이치 사나에는 총리로서 오키나와에 다녔다. 연설에서 오키나와의 부담 경감을 약속했다. 그러나 헤노코 공사는 계속된다. 말과 현실 사이의 거리. 오키나와 주민들은 그 거리를 측정하며 살아간다.
오키나와의 파란 바다는 여전히 아름답다. 매립 공사가 진행 중인 헤노코 앞바다도, 조금 덜하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이 사라지기 전에, 무언가가 바뀌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오늘도 공사장 앞에 서 있다. 그 거리가 좁혀지는 날이 올지. 일본 정치가 정직하게 이 질문과 마주하는 날이 올지. 그것이 다카이치 시대에 달린 숙제 중 하나다.
참고 자료
- 재일미군기지의 70%가 오키나와에 집중 (nippon.com): https://www.nippon.com/ja/japan-data/h01329/ - 오키나와 미군 기지 (Wikipedia 일본어): https://ja.wikipedia.org/wiki/%E6%B2%96%E7%B8%84%E3%81%AE%E7%B1%B3%E8%BB%8D%E5%9F%BA%E5%9C%B0 - 오키나와 전투 (Wikipedia 한국어): 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D%82%A4%EB%82%98%EC%99%80_%EC%A0%84%ED%88%AC - 방위성 — 오키나와 기지부담 경감: https://www.mod.go.jp/j/approach/zaibeigun/saco/ - 오키나와현 공식 — 헤노코 신기지 건설: https://www.pref.okinawa.jp/heiwakichi/futenma/1017409/1017415.html - 오키나와현 미군 전용 시설 면적 비율 자료: https://www.pref.okinawa.lg.jp/_res/projects/default_project/_page_/001/017/415/r2_p04_05.pd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