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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제3장. 구자라트의 황제 (2001–2014)
짜이왈라에서 총리까지
제3장. 구자라트의 황제 (2001–2014)
김경진
3.1 2002년 구자라트 폭동: 고드라 사건, 국제 고립, 법원 무혐의
2002년 2월 27일 오전 7시 43분, 구자라트주 고드라(Godhra) 역에서 사바르마티 익스프레스(Sabarmati Express)가 멈춰 섰습니다. 열차 안에는 힌두교 성지 아요디아(Ayodhya)에서 종교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순례자들이 가득했습니다. 플랫폼에서 무슬림 주민들과 승객들 사이에 시비가 붙었고, 누군가 비상 브레이크를 당겼습니다. 열차가 완전히 정차한 직후, S-6 객차에서 불길이 솟았습니다. 문은 잠겨 있었고, 창문에는 쇠창살이 박혀 있었습니다. 객차는 거대한 화장터가 되었습니다.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59명의 힌두교도가 산 채로 불에 타 숨졌습니다.
이 불길 한 줌이 인도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끔찍한 종교 폭력의 도화선이 될 줄은, 그날 아침 고드라 역에 있던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취임한 지 불과 4개월 남짓이었던 나렌드라 모디 주총리는 즉각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이 화재를 "사전에 계획된 테러 행위"라고 규정했습니다. 화재 원인을 둘러싼 논쟁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구자라트 주정부가 설치한 나나바티-메타 위원회(Nanavati-Mehta Commission)는 2008년 보고서에서 약 1,000~2,000명 규모의 무슬림 군중이 사전에 계획한 방화라고 결론지었습니다. 반면 중앙정부 철도부가 꾸린 바네르지 위원회(Banerjee Commission)는 객차 내부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화재라는 전혀 다른 결론을 내놓았습니다. 두 위원회의 엇갈린 결론은 각각 다른 정치 진영의 논리를 강화하는 무기로 소비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사건이 법정의 사실판정을 기다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진실이 규명되기 전에 '서사'가 먼저 폭발했습니다.
고드라 사건 다음 날인 2월 28일, 강경 힌두 우파 단체인 세계힌두의회(VHP)가 구자라트 전역에 파업(Bandh)을 선포했습니다. BJP도 이를 지지했습니다. 거리는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분노한 힌두 군중이 무슬림 거주지를 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유권자 명부를 들고 무슬림의 집과 상점을 찾아내 방화하고, 약탈하고, 살해했습니다.
나로다 파티야(Naroda Patiya)에서는 약 5,000명의 폭도가 무슬림 거주지를 포위하여 97명을 학살했습니다. 굴버그 소사이어티(Gulbarg Society)에서는 전 국회의원 에산 자프리(Ehsan Jafri)가 경찰과 주총리실에 필사적으로 전화를 걸어 구조를 요청했으나, 도움은 오지 않았습니다. 자프리를 포함한 69명이 살해당했습니다.
공식 통계로 사망자 1,044명(무슬림 790명, 힌두교도 254명), 실종자 223명, 부상자 2,500명. 비공식 추산은 사망자 2,000명을 넘습니다. 20만 명이 넘는 난민이 발생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하나의 도(道) 전체가 3일간 불바다에 휩싸인 것과 같은 규모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가 권력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경찰이 폭도들을 제지하지 않거나, 오히려 무슬림 주민에게 "우리는 당신들을 구할 명령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는 증언이 쏟아졌습니다. 현장 경찰관과 관료들이 참석한 긴급 회의에서 모디 주총리가 "힌두교도들이 분노를 표출하도록 놔두라"고 지시했다는 주장이 산지브 바트(Sanjiv Bhatt) 경찰 간부의 진술서를 통해 제기되었습니다. 모디는 이를 단호히 부인했습니다. 이후 특별조사팀(SIT)은 바트가 그 회의에 참석했다는 증거 자체를 찾지 못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바트는 2019년 별도의 사건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모디가 폭동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인용했다는 "모든 작용에는 반작용이 있다"는 뉴턴의 법칙 비유는, 그가 폭력을 정당화했다는 비판의 결정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당시 같은 당 소속이었던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Atal Bihari Vajpayee) 총리조차 구자라트를 방문하여 모디 옆에 앉은 채 "통치자는 백성을 차별 없이 돌봐야 합니다. 라즈 다르마(Raj Dharma, 통치자의 의무)를 다하십시오"라고 공개적으로 일침을 놓을 정도였습니다. BJP 내부에서 모디 경질론이 나왔지만, RSS의 지원과 당내 기반의 부재로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국제사회의 반응은 냉혹했습니다. 2005년 3월 18일, 미국 국무부는 국제종교자유법(International Religious Freedom Act)에 근거하여 모디의 비자 발급을 거부했습니다. 종교적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한 외국 공무원이라는 이유였습니다. 선출직 정부 수반이 이 조항으로 비자를 거부당한 사례는 모디가 유일했습니다. 영국은 2002년부터 모디와의 외교적 접촉을 중단했고, 유럽연합(EU) 의회는 2006년 구자라트 폭동에 대한 결의안을 채택했습니다. 세계 무대에서 모디는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 환영받지 못하는 인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국제정치의 냉정한 논리는 도덕적 원칙을 오래 붙들어두지 못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도의 전략적 중요성과 경제적 무게가 커지자, 서방의 태도는 실용적으로 변했습니다. 2014년 모디가 총리 후보로 급부상하자, 미국은 이미 그와의 관계를 복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영국도 2012년 외교 접촉을 재개했습니다. '도덕적 제재'가 '지정학적 이해관계' 앞에서 무력해지는 장면이었습니다.
인도 국내에서는 더 치열한 법적 투쟁이 이어졌습니다. 굴버그 학살 생존자이자 에산 자프리의 미망인인 자키아 자프리(Zakia Jafri)와 인권운동가 티스타 세탈바드(Teesta Setalvad)는 모디를 포함한 고위 관료 63명을 공모 혐의로 고발했습니다. 2008년 인도 대법원은 구자라트 경찰의 수사를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전직 중앙수사국(CBI) 국장 라가반(R.K. Raghavan)이 이끄는 독립적인 특별조사팀(SIT)을 꾸렸습니다.
SIT는 수년간 방대한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2010년에는 현직 주총리인 모디를 직접 소환하여 9시간 넘게 100개 이상의 질문으로 심문했습니다. 조사의 핵심 쟁점은 모디가 2002년 2월 27일 긴급 회의에서 경찰에 "불개입"을 지시했는지 여부였습니다. 2012년 2월, SIT는 최종 보고서를 법원에 제출했습니다. 결론은 "모디 주총리를 기소할 만한 증거가 없다(No prosecutable evidence)"는 것이었습니다.
2013년 아메다바드 치안판사 법원은 SIT의 무혐의(Clean Chit) 결론을 받아들였습니다. 자키아 자프리의 항소는 2017년 구자라트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었습니다. 그리고 2022년 6월 24일, 인도 대법원은 자프리의 최종 청원을 기각하며 20년에 걸친 법적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대법원은 SIT의 수사가 공정했다고 판단하면서, 고발 측의 "거대 음모론"은 근거가 없으며, 오히려 고발 배후 세력이 "논란을 계속 부추기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졌다고까지 질타했습니다. 대법원 판결 직후, 세탈바드는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국가 권력이 인권운동가를 보복 체포한 것"이라는 비판과 "법원 판결에 따른 정당한 수사"라는 반론이 첨예하게 맞섰습니다.
법원이 모디의 형사적 공모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문장은, 사실관계로는 분명히 성립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적·도덕적 논쟁의 종결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와 국제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는 폭동 이후에도 국가 기관의 공모와 방임 정황, 증인 보호 실패, 수사 범위의 한계를 계속 지적했습니다.
개별 학살 사건에서는 유죄 판결도 나왔습니다. 나로다 파티야 사건에서 전직 구자라트 장관 마야 코드나니(Maya Kodnani)는 28년형을, 바지랑 달(Bajrang Dal)의 바부 바지랑기(Babu Bajrangi)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굴버그 소사이어티 사건에서는 24명이 유죄 판결을 받아 11명이 무기징역에 처해졌습니다. 빌키스 바노(Bilkis Bano) 사건은 더 복잡한 궤적을 그렸습니다. 임신 중이던 바노를 집단 성폭행하고 그녀의 가족 7명을 살해한 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11명의 수감자가 2022년 8월 구자라트 주정부에 의해 사면·석방되었습니다. 이들은 석방 직후 화환을 목에 건 채 영웅처럼 환대받았습니다. 대법원은 2024년 1월 이 사면을 위헌으로 판결하고 재수감을 명령했지만, 이 사건은 "법적 무혐의와 정치적 책임은 별개"라는 비판의 상징으로 남았습니다.
"일부 가해자는 처벌받았지만, 국가 시스템 차원의 책임 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비판 측의 일관된 평가입니다.
2002년 구자라트 폭동은 나렌드라 모디에게 이중의 유산을 남겼습니다. 반대 진영에게 그는 영원히 '학살의 방조자'였습니다. 그러나 힌두 우파 진영에게 그는 "힌두교를 지킨 강인한 지도자", 즉 '힌두 흐리다이 삼라트(Hindu Hriday Samrat, 힌두 마음의 황제)'로 추앙받았습니다.
모디는 이 위기를 파국으로 맞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외부의 비판을 "구자라트의 자존심에 대한 공격"으로 치환하며 2002년 12월 주 의회 선거에서 182석 중 127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법적 무혐의는 2014년 총선 출마의 최소 조건을 충족시켜주었습니다. 그러나 모디가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법적 면죄부가 아니라, 2002년의 화염을 덮을 만큼 거대한 새로운 서사였습니다. 폭동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 그는 그 누구보다 맹렬하게 '개발'에 매달렸습니다. 바로 다음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3.2 구자라트 모델: 바이브런트 구자라트, 죠티그람, 타타 나노
2003년 9월, 아메다바드(Ahmedabad). 나브라트리(Navratri) 축제 기간에 맞춰 열린 낯선 행사에 인도 전역의 기업인들이 하나둘 모여들었습니다. 행사장 정면에는 '바이브런트 구자라트(Vibrant Gujarat)'라는 이름이 걸려 있었습니다. 불과 1년 전, 폭동으로 1,000명 넘는 사람이 죽은 주(州)에서 투자 유치 행사를 여는 것은 무모해 보였습니다. 서방 세계가 등을 돌리고, 투자자들이 이탈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연단에 선 모디 주총리의 표정에는 당혹감이 없었습니다. 그는 마치 기업 CEO처럼 투자자들에게 말했습니다. "구자라트에서는 레드 테이프(Red Tape, 관료주의적 규제) 대신 레드 카펫을 깔아드리겠습니다."
이 한 문장이 훗날 '구자라트 모델(Gujarat Model)'이라 불리게 될 거대한 정치-경제 브랜드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정치적 생존과 개발의 등식
모디에게 경제 개발은 순수한 행정적 소명이기 이전에 정치적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2002년 폭동 이후 그에게는 두 가지 꼬리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힌두 강경파'와 '학살의 방조자'. 이 두 꼬리표만으로는 구자라트 밖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제3의 정체성이 필요했습니다. '비카스 푸루시(Vikas Purush)', 개발의 남자. 피 묻은 셔츠를 벗고 개발이라는 깨끗한 슈트로 갈아입는 작업이 시작된 것입니다.
바이브런트 구자라트는 그 변신의 핵심 무대였습니다. 2003년 첫 행사에서 76건의 양해각서(MOU), 투자 약속 140억 달러. 2005년에는 226건, 200억 달러. 2007년에는 675건, 1,520억 달러. 2011년에는 8,380건, 4,620억 달러. 숫자는 해를 거듭할수록 천문학적으로 불어났습니다. 라탄 타타(Ratan Tata), 무케시 암바니(Mukesh Ambani), 쿠마르망갈람 비를라(Kumarmangalam Birla) 등 인도 재계의 내로라하는 거물들이 무대에 올라 구자라트를 칭송했습니다. 2007년 서밋에서 라탄 타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자라트에 있지 않다면, 당신은 바보입니다(It is stupid if you are not in Gujarat)."
모디는 이 행사를 투자 설명회를 넘어 '인도판 다보스 포럼'으로 격상시켰습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등 국제 거물들이 연사로 참여했고, 모디가 총리가 된 뒤에도 바이브런트 구자라트는 격년으로 이어져 2024년 제10회까지 개최되었습니다.
물론 MOU의 숫자가 곧 실제 투자를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블룸버그는 2003년부터 2011년까지 체결된 약 40조 루피 규모의 투자 약속 중 실제 집행된 비율이 8%에 불과하다는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MOU는 법적 구속력이 약합니다. 서명은 쉽고, 이행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나 모디에게 중요했던 것은 숫자 그 자체가 아니라, 숫자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였습니다. "구자라트는 투자하기 좋은 곳"이라는 인식이 퍼지면, 그 인식이 실제 자본을 끌어오고, 자본이 다시 인식을 강화하는 순환이 만들어집니다. 바이브런트 구자라트는 그 순환의 시동 장치였습니다.
기업이 가장 싫어하는 세 가지를 제거하다
구자라트 모델의 본질은 '기업을 좋아한다'는 감정적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기업이 가장 싫어하는 세 가지를 체계적으로 제거한 것이었습니다. 첫째는 시간입니다. 인허가에 수개월씩 걸리는 지연. 둘째는 불확실성입니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정책. 셋째는 접촉 비용입니다. 수십 명의 관료를 만나며 치러야 하는 보이지 않는 대가.
모디는 투자촉진청(iNDEXTb)을 강화해 '단일 창구(Single Window)'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기업이 시청·구청·도청·환경부·국토부를 따로 찾아다니는 대신, 한 곳에서 모든 인허가를 해결할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관료들에게는 "규제자가 아니라 촉진자(Facilitator)가 되라"고 명령했고, 기업 민원 처리 속도를 인사 고과에 반영했습니다. 앉아서 결재를 기다리는 대신, 먼저 찾아가서 무엇이 필요한지 묻는 행정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빛의 마을: 죠티그람 요자나
행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모디는 기업이 공장을 짓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것, 전기(電氣)부터 손을 댔습니다.
2003년 9월, 모디는 죠티그람 요자나(Jyotigram Yojana, '빛의 마을' 계획)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인도 농촌의 전력 사정은 비참했습니다. 하루 8~14시간만 들어오는 전기, 그것도 전압이 불안정하여 펌프가 수시로 고장 나는 상황이었습니다. 농업용 전력과 가정용 전력이 같은 배전선을 쓰다 보니, 농민들이 전기를 과다 사용하면 마을 전체가 암흑에 빠졌습니다. 농업용 전기는 보조금을 받아 사실상 무료였기 때문에, 농민들이 지하수를 무한정 퍼 올리고, 그 과정에서 전력 낭비와 도전(盜電)이 만연했습니다. 전력 회사의 재정은 악화되었고, 안정적 공급은 불가능했습니다.
모디의 해법은 대담했습니다. 농업용 전력선과 비농업용 전력선을 물리적으로 분리하는 것이었습니다. 160만 개의 전봇대를 새로 세우고, 15,500개의 변압기를 설치하고, 75,000킬로미터의 전선을 새로 깔았습니다. 총 비용 1,290크로르 루피(약 2,500억 원). 인도에서는 관료적 지연 때문에 이런 규모의 프로젝트가 10년이 넘게 걸리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모디는 1,000일, 약 2년 반 만에 완료했습니다. 2006년까지 구자라트의 18,000개 마을과 9,700개 촌락이 이 시스템에 연결되었습니다. 농민에게는 하루 8시간 안정적인 고압 전력이, 마을 가정과 소규모 상점에는 24시간 끊기지 않는 전기가 공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전기가 24시간 들어온다. 인도의 다른 주에서 여전히 꿈과 같은 이야기였던 것을 구자라트는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전력이 안정되자 공장이 들어섰고, 공장이 들어서자 도로가 닦였습니다. 도이체방크(Deutsche Bank) 연구에 따르면 구자라트의 송배전 손실률은 2004년 35%에서 2014년 19%로 떨어졌고, 이는 인도 전국 평균 26%를 크게 밑도는 수치였습니다. 구자라트는 전력 잉여 주(州)가 되었고, 전력 회사들은 흑자로 돌아섰습니다. 한국이 1970년대 농어촌 전화(電化) 사업으로 산업화의 기초를 다진 것처럼, 죠티그람은 구자라트 산업화의 뼈대였습니다.
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건조한 기후 탓에 만성적 물 부족에 시달리던 구자라트에서 모디는 나르마다 강(Narmada River)의 사르다르 사로바르 댐(Sardar Sarovar Dam) 높이를 단계적으로 올리는 공사를 밀어붙였습니다. 2006년 121.92미터, 2017년 138.68미터로 최종 완공되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콘크리트 중력댐이 되었습니다. 환경 단체와 인접 주의 반발이 거셌습니다. 메다 파트카르(Medha Patkar)가 이끄는 나르마다 바차오 안돌란(Narmada Bachao Andolan, 나르마다 강 살리기 운동)은 수십 년간 댐 건설에 맞서 싸웠고, 약 24만 명의 주민이 수몰 지역에서 이주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모디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이 댐에서 확보된 물은 거대한 운하 네트워크를 타고 카치(Kutch)와 사우라슈트라(Saurashtra) 같은 건조 지대까지 흘러갔습니다. 동시에 NGO와 협력하여 11만 개 이상의 소형 체크댐(Check Dam)을 건설하고, 점적 관개(Drip Irrigation) 시스템을 보급했습니다. 고갈되던 지하수 수위가 회복되기 시작했고, 구자라트는 인도 최대의 면화 생산지로 올라섰습니다.
항만과 도로에서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인도에서 가장 긴 해안선(약 1,600킬로미터)을 가진 구자라트의 지리적 이점을 살려, 민관협력(PPP) 방식으로 문드라(Mundra), 피파바브(Pipavav) 같은 세계적 수준의 민간 항만을 개발했습니다. 문드라 항은 아다니 그룹이 운영하며 인도 최대의 민간 항만으로 성장했고, 연간 화물 처리량이 1억 5,000만 톤을 넘어섰습니다. 이 항만들은 고속도로와 철도망으로 연결되어 물류 비용을 낮췄습니다. 구자라트의 도로는 "인도에서 가장 매끄러운 도로"라는 평가를 받았고, 인도 전체 수출의 약 20%가 이 주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96시간의 결단: 타타 나노 유치
2008년 10월 3일, 인도 최대 그룹 타타(Tata)의 라탄 타타 회장이 콜카타에서 기자들 앞에 섰습니다. 얼굴이 어두웠습니다. "우리를 환영하지 않는 곳에서 공장을 운영할 수는 없습니다." 세계 최저가 자동차 '나노(Nano)'를 만들기 위해 서벵골주 싱구르(Singur)에 세우던 공장을 포기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토지 수용을 반대하는 농민들의 시위가 격해졌고, 야당 지도자 마마타 바네르지(Mamata Banerjee)가 정치적으로 불을 지폈습니다. 안드라프라데시, 카르나타카, 마하라슈트라 등 여러 주가 일제히 구애에 나섰습니다.
모디는 라탄 타타에게 단 한 단어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수스와가탐(Suswagatam)." 환영합니다.
모디는 2010년 사난드(Sanand) 공장 준공식에서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1루피짜리 문자 메시지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십시오." 이후 벌어진 일은 인도 행정의 상식을 뒤엎었습니다. 통상적으로 인도에서 대규모 공장의 토지 확보, 인허가, 기반 시설 조성에는 수년이 걸립니다. 모디는 96시간 만에 모든 행정 절차를 완료했습니다. 아메다바드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사난드의 토지를 파격적인 조건 — 1제곱미터당 1루피의 상징적 가격 — 으로 제공하고, 초저금리 대출과 세제 혜택을 약속했습니다. 10월 7일, 타타 모터스는 나노 공장의 구자라트 이전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14개월 만에 새 공장이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서벵골에서 28개월 걸린 건설 기간의 절반이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삼성의 반도체 공장이 수도권 규제에 막혀 좌초되었을 때, 특정 도(道)의 지사가 사흘 만에 모든 인허가를 끝내고 공장을 유치한 것과 비슷한 충격이었습니다. 다른 주에서 정치적 갈등으로 좌초된 프로젝트를 구자라트가 96시간 만에 가져간 이 장면은, "모디 밑에서는 일이 된다"는 이미지를 인도 전역에 각인시켰습니다. 타타의 뒤를 이어 포드(Ford), 마루티 스즈키(Maruti Suzuki) 등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이 줄지어 구자라트에 공장을 세웠고, 사난드 일대는 '인도의 디트로이트'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노 자체는 시장에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세계 최저가 자동차'라는 콘셉트는 "가난한 사람의 차"라는 낙인으로 작용했고, 생산은 축소되다 2018년 마지막 나노가 공장을 떠났습니다. 타타가 싱구르에서 입은 손실에 대해 서벵골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934크로르 루피의 배상 청구 소송은 2023년에야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자라트 모델에서 나노의 흥망은 부차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대기업이 쫓겨나는 주와 환영하는 주"라는 대비가 만들어낸 상징이었습니다.
숫자의 빛과 그림자
결과는 인상적이었습니다. 2001년부터 2012년까지 구자라트의 GDP는 실질 기준으로 연평균 약 10%의 성장률을 기록했고, 명목 기준으로는 연복리 약 15%에 달했습니다. '연평균 13% 성장'이라는 구호는 명목 기준의 특정 시기 수치를 상징적으로 압축한 것이며, 실질 성장률은 약 10% 내외로 평가됩니다. 어떤 기준으로 보든 구자라트가 인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를 가진 주 중 하나였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도로가 닦이고, 항만이 건설되고, 산업단지가 조성되었습니다. 구자라트는 기업하기 좋은 주(Ease of Doing Business) 평가에서 인도 내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눈부신 숫자 뒤에는 쉽게 보이지 않는 균열이 있었습니다.
대기업 중심의 성장 전략은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 비판을 낳았습니다. 가우탐 아다니(Gautam Adani), 무케시 암바니 등 구자라트 출신 재벌들이 모디 정부의 전폭적 지원 아래 급성장했고, 토지와 자원이 특정 기업에 헐값으로 돌아갔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아다니 그룹은 모디 재임기에 문드라 항만, 발전소, 부동산 등에서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었고, 모디가 총리가 된 뒤에도 이 관계는 인도 정치의 뜨거운 쟁점으로 남게 됩니다.
경제 지표는 화려했지만, 인간 개발 지표(HDI)에서 구자라트는 경제 규모에 걸맞은 개선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2001년 인도 전체에서 6위였던 구자라트의 HDI 순위는 2007~2008년에 11위로 떨어졌습니다. 영양실조율, 여성 문맹률, 영아 사망률에서 구자라트는 인도 평균 수준에 머물거나 그 아래였습니다. 인도중앙은행(RBI) 보고서에 따르면 2005~2010년 구자라트의 사회 부문 예산 비중은 5.1%로, 거의 모든 주보다 낮았습니다. 성장은 있었으나 고용은 빈약했고, 파이는 커졌으나 분배는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런던정경대(LSE)의 연구진은 모디 재임기에 구자라트의 성장률이 '가속'했는지에 대해 "1990년대와 비교하여 2000년대에 차별적인 가속의 증거가 없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구자라트는 모디 이전에도 인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주 중 하나였고, 강한 상업 전통과 기업가 문화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박정희 시대 고속 성장이 분배 논쟁을 낳았던 것처럼, 구자라트 모델도 "누구를 위한 성장인가"라는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모디 자신은 한국의 발전 모델을 자주 참조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제7장에서 자세히 다룹니다). 국가가 자원을 특정 산업과 지역에 집중 투입하여 단기간에 외형적 성장을 이룬 뒤, 그 성장의 과실이 고르게 분배되지 못해 사회적 갈등이 깊어지는 패턴. 그가 참조한 한국 모델의 빛과 그림자를, 구자라트는 시차를 두고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정치적으로 구자라트 모델은 대성공이었습니다. 모디는 2002년, 2007년, 2012년 주 의회 선거에서 연거푸 승리하며 13년간 구자라트를 통치했습니다. 부패와 정책 마비에 지친 인도의 중산층과 청년층에게, 구자라트에서 솟아오르는 굴뚝과 24시간 불 켜진 마을의 풍경은 강력한 유혹이었습니다. "구자라트에서 한 일을 인도 전체에서 하겠다"는 모디의 약속은 2014년 총선의 핵심 공약이 되었습니다.
2012년, 미국 타임(TIME)지는 표지에 모디를 올리며 제목을 붙였습니다. "모디는 비즈니스를 의미한다(Modi Means Business)." 국제사회에서 비자조차 받지 못하던 인물이 글로벌 미디어의 표지 모델이 되기까지, 그 사이를 메운 것은 바이브런트 구자라트의 무대 위 조명과, 사난드 공장에서 굴러나온 나노의 바퀴와, 18,000개 마을에 24시간 켜진 전구였습니다.
3.3 힌두 마음의 황제: 힌두 민족주의와 개발의 결합
2002년 12월, 구자라트 주 의회 선거 유세장. 나렌드라 모디가 연단에 오르자 수만 명의 군중이 하나의 구호를 외쳤습니다.
"힌두 흐리다이 삼라트! 힌두 흐리다이 삼라트!"
힌두 마음의 황제. 이 칭호는 원래 마하라슈트라주의 극우 정치인 발 타케레이(Bal Thackeray)의 것이었습니다. 타케레이는 뭄바이를 거점으로 시브 세나(Shiv Sena) 당을 창설한 인물로, 선거 유세에서 무슬림에게 퇴장을 요구할 정도로 노골적인 힌두 민족주의자였습니다. "나는 힌두의 표만 있으면 된다"고 공언했던 사람입니다. 그 칭호가 이제 모디에게로 넘어왔습니다.
불과 열 달 전, 1,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폭동의 그림자가 걷히지도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국제사회는 모디를 학살의 방조자로 낙인찍었고, 미국은 비자 발급을 거부했으며, 유럽 각국도 그를 외면했습니다. 정치적 생명이 끝났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선거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BJP는 182석 중 127석을 쓸어 담으며 압승했습니다. 모디는 부활했을 뿐 아니라, 이전보다 강해져서 돌아왔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상처를 자존심으로 바꾸는 기술
모디가 선택한 전략은 사과도, 변명도, 회피도 아니었습니다. 정면 돌파였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비난을 '구자라트 전체에 대한 모욕'으로 치환했습니다.
"외부 세력이 구자라트의 자존심(Asmita)을 짓밟으려 합니다." 그는 유세장마다 이 문장을 반복했습니다. 중앙 정부(당시 국민회의당 집권), 국제 언론, 인권 단체의 비판은 모두 "구자라트의 발전을 시기하는 반(反)구자라트 세력"의 공작으로 재해석되었습니다. 폭동의 도덕적 책임을 묻는 질문은, 6,000만 구자라트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질문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프레이밍은 무서울 정도로 효과적이었습니다. 비판이 거세질수록 구자라트인들은 더 강하게 모디에게 결집했습니다. 야당인 국민회의(Congress)가 모디를 공격하면 할수록, 유권자들은 그 공격을 자신들의 성공에 대한 질투로 받아들였습니다. 크리스토프 자프르로(Christophe Jaffrelot) 파리정치대학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모디는 자기 자신과 구자라트 주를 일체화(Personification)시킴으로써, "모디를 반대하는 것은 곧 구자라트를 반대하는 것"이라는 등식을 만들어냈습니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찾을 수 있습니다. 외부의 비판을 '우리'에 대한 공격으로 전환하고, 지도자와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내부 결속을 강화하는 정치 기술. 차이가 있다면, 모디는 그 결속의 핵심에 '종교'라는 가장 원초적이고 강력한 에너지를 배치했다는 점입니다.
황제와 CEO, 두 개의 역할
모디는 종교적 열정에만 기대지 않았습니다. '힌두 마음의 황제'라는 칭호만으로는 장기 집권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전국 무대로 나가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비카스 푸루시(Vikas Purush, 개발의 남자)'라는 두 번째 정체성입니다. 모디는 힌두 민족주의라는 뼈대 위에 경제 성장이라는 살을 붙였습니다. 두 가지가 결합하는 방식은 정교했습니다.
선거 유세장에서 그는 힌두교의 가치와 문명적 자부심을 열정적으로 호소했습니다. 지지자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관료들에게는 철저한 성과주의를 요구했고, 기업인들에게는 친기업 정책과 인프라 혁신을 약속했습니다. "사원(Temple)도 중요하지만 화장실(Toilet)도 중요합니다." 그가 즐겨 사용한 이 화법은, 종교적 보수층과 실용적 중산층을 동시에 포섭하는 장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두 종류의 지지자에게 동시에 다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힌두 보수층에게 모디는 힌두교를 지키는 수호자였습니다. 도시의 중산층과 기업인에게 모디는 유능한 CEO형 주총리였습니다. 한 사람의 정치인이 두 개의 얼굴을 가진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역할을 하나의 서사로 통합한 것입니다. "힌두교도가 잘사는 것이 곧 구자라트의 발전이며, 인도의 발전이다." 이 등식이 완성되는 순간, 종교와 경제는 서로의 약점을 서로의 장점으로 가리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네오 중산층이라는 새로운 군대
이 결합이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구자라트의 급격한 도시화가 있었습니다. 경제 성장 과정에서 빈곤을 벗어나 소비 대열에 합류했거나, 합류하기를 열망하는 새로운 계층이 형성되었습니다. 모디는 이들을 '네오 중산층(Neo-Middle Class)'이라 불렀습니다. 전통적 카스트 구분보다 경제적 상승 욕구가 강하고, 동시에 힌두 문화에 대한 소속감을 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디는 이들에게 고속도로와 스마트 도시와 태양광 발전소를 약속했습니다. 동시에 거대한 힌두 사원 건립과 전통 문화 부흥을 내세웠습니다. 발전소는 물질적 풍요의 상징이었고, 사원은 영적 승리의 상징이었습니다. 두 가지가 결합하자 네오 중산층에게 모디는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과 문화적 정체성을 동시에 대변하는 유일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2002년부터 2014년까지 모디가 구자라트에서 3연임에 성공한 힘은 바로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BJP의 182석 중 127석(2002년), 122석(2007년), 115석(2012년) 의석은 이 결합이 얼마나 안정적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의석은 조금씩 줄었지만, 다른 주에서 한 번 이기기도 어려운 선거를 세 번 연속 이긴 것입니다.
가우라브 야트라에서 사도바나까지
모디는 이 권력의 서사를 전파하는 데에도 혁신적이었습니다. 2002년 선거 직전, 그는 '가우라브 야트라(Gaurav Yatra, 긍지의 행진)'를 조직했습니다. 구자라트 전역을 순회하며 "구자라트의 자부심"을 외치는 대규모 행진이었습니다. 이 행진에서 그는 '미안 무샤라프(Miyan Musharraf)'라는 표현을 사용해 무슬림과 파키스탄, 그리고 야당을 동일시하는 화법을 구사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카스트에 따라 분열되어 있던 힌두 표심이 '힌두'라는 하나의 정체성 아래 뭉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모디의 언어는 변화했습니다. 노골적인 종교 수사는 줄어들고, '개발'과 '구자라트의 자부심'이 전면에 배치되었습니다. 자프르로 교수는 이 과정을 '일상화된 힌두뜨바(Banal Hindutva)'라고 분석했습니다. 힌두 민족주의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너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공기처럼 느껴지게 된 것입니다.
2012년에는 '사도바나 야트라(Sadbhavana Yatra, 화합의 행진)'라는 단식 농성을 벌이며 무슬림과의 화해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일부 무슬림 지도자들을 초청하고, 포용의 이미지를 연출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분석가들은 이를 진정한 화해라기보다 전국 무대를 겨냥한 이미지 변신으로 해석했습니다. 실제로 구자라트의 무슬림 거주 지역(아메다바드의 주하푸라 같은 곳)은 경제적 번영에서 체계적으로 소외되어 있었고, BJP 후보 명단에 무슬림 이름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사찰위원회(Sachar Committee) 보고서(2006년)에 따르면 구자라트 무슬림의 빈곤률은 주 평균보다 높았고, 공공 부문 고용에서의 대표성도 현저히 낮았습니다.
같은 해 모디는 또 하나의 혁신을 선보였습니다. 3D 홀로그램 기술을 활용해 동시에 수십 곳의 유세장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입니다. 마치 신처럼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이미지는 '하이테크 지도자'라는 브랜드를 만들었고, 전통적 언론의 필터를 거치지 않고 대중에게 직접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이 기술은 2014년 총선에서 전국 규모로 확대됩니다(제4장 4.1 참조).
결합의 강력함, 그리고 그 대가
'힌두뜨바 + 개발' 결합이 강력한 이유는 명확합니다. 정체성 정치는 핵심 지지층을 강하게 결속시킵니다. 개발 담론은 중도층과 기업인에게 "이 사람을 지지해도 된다"는 정당화의 근거를 제공합니다. 둘을 섞으면 동원과 확장을 동시에 할 수 있습니다. 정치 공학의 관점에서 이보다 효율적인 조합은 드뭅니다.
한국의 역사에서 비교 대상을 찾자면, '민족중흥'이라는 이데올로기 아래 국가 정체성과 경제 개발을 하나로 묶었던 시기가 떠오릅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 한국이 결합한 것은 민족주의와 산업화였고, 모디가 결합한 것은 종교적 정체성과 신자유주의적 경제 개발이었다는 점입니다. 종교는 민족보다 깊은 곳을 건드립니다.
그러나 이 조합은 공짜가 아니었습니다. 다수파인 힌두교도를 강하게 통합할수록, 소수파인 무슬림은 더 깊이 소외되었습니다. 구자라트의 경제적 번영은 힌두교도 중산층에게는 체감되었지만, 폭동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무슬림들에게 그 번영은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습니다. 교과서는 힌두 중심주의로 재편되었고, 사회적 분리는 고착화되었습니다. 아메다바드에서는 힌두 거주지와 무슬림 거주지를 나누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점점 뚜렷해졌습니다. 부동산 시장에서 무슬림에게 힌두 구역의 집을 팔지 않는 관행이 공공연해졌고, '디스터번스 에리어 법(Disturbed Areas Act)'이라는 구자라트 주법은 이를 사실상 제도화했습니다.
"경제만 잘 돌아간다면 약간의 갈등은 어쩔 수 없다." 이 인식이 구자라트 중산층 사이에 확산되었을 때, 민주주의의 근간인 다원주의는 조용히 잠식되고 있었습니다.
좁은 무대에서 넓은 무대로
2014년, 모디는 구자라트라는 무대를 넘어 뉴델리로 향했습니다. 한 손에는 '성장'이라는 성과표가, 다른 한 손에는 '힌두의 자부심'이라는 깃발이 들려 있었습니다.
구자라트에서 완성된 이 결합의 공식은 2014년 총선 슬로건 "모든 사람과 함께, 모든 사람의 발전을(Sabka Saath, Sabka Vikas)"로 세련되게 포장되었습니다. 부패와 무능에 지친 인도 유권자들에게 모디는 "내가 구자라트에서 한 일을 인도 전체에서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구자라트가 실험실이었다면, 인도 전체가 이제 본무대가 될 터였습니다.
'힌두 마음의 황제'라는 칭호는 모디에게 양날의 검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를 인도에서 가장 강력한 팬덤을 가진 정치인으로 만들었지만, 세속 민주주의의 원칙을 위협하는 징후로도 읽혔습니다.
권력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모디가 구자라트에서 보여준 것은 경제 성장이 아니라, 종교와 자본과 대중의 열망을 하나의 서사로 엮어내는 새로운 권력의 문법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