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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제5장. 힌두트바 실현: 모디 2기 (2019–2024)
짜이왈라에서 총리까지
제5장. 힌두트바 실현: 모디 2기 (2019–2024)
김경진
5.1 힌두 의제 완성: 370조 폐지, CAA, 람 사원
2019년 8월 5일, 뉴델리의 습기가 의사당 건물 벽을 타고 흘렀습니다. 연방 상원(라자 사바) 연단에 아미트 샤(Amit Shah) 내무장관이 올랐습니다. 그의 손에는 서류 한 묶음이 들려 있었습니다. 같은 시각,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카슈미르(Kashmir) 계곡에서는 이미 3만 5천 명의 추가 병력이 배치를 마쳤고, 전화선과 인터넷이 차단되었으며, 전직 주총리를 포함한 정치 지도자들이 가택 연금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아미트 샤가 입을 열었습니다. "정부는 헌법 370조를 폐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의사당이 함성과 야유로 동시에 들끓었습니다. 70년 동안 인도 정치의 성역이었던 조항이, 단 몇 시간 만에 해체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왜 370조였을까요. 이 조항을 이해하려면, 1947년 영국 식민지에서 벗어난 인도의 건국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당시 카슈미르를 다스리던 힌두교도 왕(마하라자) 하리 싱은 무슬림이 인구 다수인 자기 영토를 인도에 편입할지, 파키스탄에 편입할지 결정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파키스탄 측 무장 세력이 카슈미르를 침공하자, 하리 싱은 인도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며 편입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그 대가가 바로 헌법 370조, 카슈미르에 대한 광범위한 자치권 보장이었습니다.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거의 모든 영역에서 카슈미르는 자체 헌법, 자체 깃발, 자체 법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한국으로 비유하면, 하나의 나라 안에 제주도가 별도의 헌법과 별도의 국기를 가지고, 나머지 한국 법률이 적용되지 않는 상황을 떠올리면 됩니다.
힌두 민족주의자들에게 이 조항은 참을 수 없는 모순이었습니다. 인도라는 나라 안에, 무슬림이 다수인 지역만 특별 대우를 받는 셈이니까요. 모디가 몸담았던 RSS(민족의용단)와 그 정치적 분신인 BJP(인도국민당)는 수십 년간 370조 폐지를 당의 핵심 공약으로 내세워 왔습니다(제1장 1.3 참조). 그러나 역대 어느 정권도 이 뇌관을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카슈미르 문제는 핵무장 국가 파키스탄과 직결되어 있었고, 잘못 건드리면 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디는 달랐습니다. 2019년 총선에서 2014년보다 더 큰 승리를 거둔 그는, 이 압도적 의석수를 무기로 삼았습니다. BJP는 303석을 차지하며 단독 과반을 달성했고, 모디는 이를 "힌두트바(Hindutva, 힌두 민족주의) 의제를 실행하라는 국민적 위임장"으로 해석했습니다. 취임 후 불과 3개월, 그는 군사 작전을 방불케 하는 정밀함으로 370조를 제거했습니다. 대통령령을 통해 370조의 법적 기반을 허물고, 의회에서 재편법을 통과시켜 잠무-카슈미르라는 하나의 주를 '잠무-카슈미르'와 '라다크'라는 두 개의 연방 직할지(Union Territory)로 쪼갰습니다. 주(州)에서 직할지로의 격하. 이는 자치에서 중앙 직접 통치로의 전환이었습니다.
모디와 아미트 샤는 이를 "한 국가, 한 헌법, 한 깃발"의 실현이라고 선포했습니다. 힌두 지지층에게 이 소식은 축제였습니다. 잠무 지역 힌두교도들은 거리로 나와 환호했고, 인도 전역의 BJP 지지자들은 불꽃놀이를 터뜨렸습니다. 그러나 카슈미르 계곡의 풍경은 정반대였습니다. 5개월간 인터넷이 차단되었고, 수백 명의 정치 활동가가 구금되었으며, 통행금지 속에 800만 주민의 일상이 멈추었습니다. 2023년 12월, 인도 대법원은 370조 폐지가 "헌법에 부합하는 조치"라고 최종 판결했습니다. 사법적으로도 모디의 손이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카슈미르 주민들의 눈에 이 판결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영원히 지워진 확인서에 가까웠습니다.
370조 폐지의 충격이 채 가라앉기도 전인 2019년 12월, 모디 정부는 또 하나의 뇌관을 터뜨렸습니다. 시민권 개정법(Citizenship Amendment Act, CAA)입니다. 이 법의 표면은 인도주의적입니다.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아프가니스탄에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 인도로 온 난민들에게 시민권을 주겠다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결정적인 조건이 하나 붙었습니다. 힌두교, 시크교, 불교, 기독교, 자인교, 파르시교 신자만 해당되고, 무슬림은 빠진다는 것. 인도 헌법 역사상 처음으로 '종교'가 시민권 부여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비판론자들은 즉각 반발했습니다. 이 법이 국가 시민 등록부(NRC)와 결합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시민권 증빙 서류가 없는 가난한 무슬림은 '불법 체류자'로 분류되지만, 같은 처지의 힌두교도는 CAA를 통해 구제받을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무슬림만 국적을 잃고 구금 센터로 보내질 수 있다는 공포가 확산되었습니다. 델리 남부의 샤힌 바그(Shaheen Bagh)에서 무슬림 여성들이 도로를 점거하며 시위를 시작했고, "우리는 서류를 보여주지 않겠다(Kagaz Nahi Dikhayenge)"는 구호가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2020년 2월에는 뉴델리 북동부에서 힌두-무슬림 간 유혈 충돌이 벌어져 53명이 사망했습니다. 사망자 대다수는 무슬림이었습니다(2002년 구자라트 폭동과의 유사성에 대해서는 제3장 3.2 참조).
CAA는 제정 후 4년 넘게 시행 규칙이 공고되지 않은 채 사문화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다 2024년 3월 11일, 총선을 불과 몇 주 앞둔 시점에 모디 정부가 시행 규칙을 전격 공고했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힌두 민족주의 지지층에게 보내는 신호탄이었습니다. 그러나 2025년 현재까지 CAA에 따라 실제로 시민권을 부여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법은 존재하지만 작동하지 않는 상태. CAA는 법률이라기보다 상징 정치의 도구로 기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습니다. 아요디아(Ayodhya)의 람 사원(Ram Mandir) 건설입니다. 이 이야기는 19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해 12월, 힌두 극우 세력 수만 명이 아요디아의 바브리 모스크(Babri Masjid)를 맨손으로 부쉈습니다. 16세기 무굴 제국 시대에 세워진 이 이슬람 사원 자리가, 힌두교의 신 라마(Ram)의 탄생지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사원 파괴 후 벌어진 종교 폭동으로 2천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이 사건은 현대 인도 역사에서 가장 깊은 상처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27년 뒤인 2019년 11월, 인도 대법원은 이 분쟁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분쟁 부지에 힌두 사원이 있었다는 고고학적 증거를 인정하며, 그 땅을 힌두교 측에 넘겨주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모스크를 파괴한 행위 자체는 불법으로 규정했지만, 결과적으로 힌두 민족주의 세력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습니다.
2020년 8월 5일, 370조 폐지 정확히 1주년이 되는 날, 모디 총리는 아요디아를 방문해 람 사원 착공식(부미 푸잔, Bhoomi Pujan)을 주재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인도를 강타하고 있던 시기였지만, 모디는 은벽돌을 직접 놓고 힌두 사제들과 함께 의식을 치렀습니다. 사원의 설계를 맡은 건축가는 찬드라칸트 솜푸라(Chandrakant Sompura)였습니다. 구자라트 출신의 이 노건축가는 3대에 걸쳐 힌두 사원을 설계해 온 가문 출신으로, 높이 161피트(약 49미터)의 나가라(Nagara) 양식 사원을 구상했습니다. 분홍빛 라자스탄 사암으로 지어진 이 거대한 건축물은 철근을 쓰지 않는 전통 공법을 고집했습니다. 1천 년을 견딜 사원을 짓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2024년 1월 22일, 총선을 몇 달 앞두고 거행된 축성식(프라나 프라티슈타, Pran Pratishtha)에서 모디는 사실상 힌두교의 대제사장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증인으로 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가 선 자리는 제단이 아니라 권력의 정점이었습니다. 모디는 이 사원이 "수세기에 걸친 노예 심리로부터의 해방"이며, "인도 문명의 부활을 알리는 상징"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무굴 제국의 유산을 지우고, 인도의 정체성을 힌두교 중심으로 재편하는 역사 전쟁의 승전보였습니다. 개장 첫날 50만 명이 몰렸고, 2024년 한 해 동안 아요디아를 찾은 방문객은 1억 3,550만 명에 달했습니다.
370조 폐지, CAA 제정, 람 사원 건설. 이 세 가지를 따로 떼어놓으면 각각 헌법 문제, 이민 정책, 종교 시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로 묶으면 그림이 달라집니다. 인도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세속 국가'에서 '힌두 국가'로 바꾸는 일관된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뿌리는 RSS 창립 이래 이어져 온 힌두트바 이데올로기에 닿아 있습니다(제1장 1.2 참조). 지지자들에게 모디는 약속을 지킨 결단력의 지도자였습니다. 반대자들에게 그는 헌법이 보장한 다원주의를 허무는 분열의 장본인이었습니다.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조치를 통해 모디는 RSS가 창립 이래 꿈꿔 온 핵심 의제를 모두 현실로 만들었고, '힌두 흐리다이 삼라트(Hindu Hriday Samrat)', 힌두 마음의 황제라는 칭호를 더 이상 비유가 아닌 사실로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거대한 정치적 지각변동은 인도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에게도 양날의 검이었습니다. 주(州)마다 제각각이었던 법 체계가 중앙으로 통합되면서 비즈니스 환경이 간소해진 측면이 있었지만, 종교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정은 공급망 리스크로 작용했습니다. 삼성전자의 노이다 공장, 현대차의 첸나이 공장에게 인도의 '사회적 통합'이란, 정치 분석 보고서 속 문장이 아니라 공장 정문 앞 시위대의 규모와 직결되는 현실의 문제였습니다.
5.2 코로나19 대응: 봉쇄, 백신 마이트리, 경제부양
2020년 3월 24일 밤 8시,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텔레비전 화면에 나타났습니다. 평소의 화려한 제스처는 없었습니다. 굳은 표정, 낮은 목소리. "오늘 밤 12시부터 21일간 인도 전역을 완전히 봉쇄합니다." 예고 시간은 4시간이었습니다. 13억 8천만 인구에게 주어진 준비 시간이, 단 4시간이었습니다. 기차가 멈췄습니다. 버스가 멈췄습니다. 공장 문이 닫혔습니다. 그리고 인도의 도로 위에서, 현대사에서 비극적인 장면 하나가 시작되었습니다.
인도에는 약 1억 명의 이주 노동자가 있습니다. 시골 마을을 떠나 대도시의 건설 현장과 공장에서 일하며, 고향 가족에게 돈을 보내는 사람들입니다. 한국의 1970~80년대 서울로 올라온 시골 청년들을 떠올리면 됩니다. 다만 규모가 다릅니다. 1억 명입니다. 봉쇄령이 떨어지자, 이들은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돈도 없고, 교통편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걸었습니다. 수백 킬로미터를, 뙤약볕 아래, 아기를 안고, 짐을 이고, 걸었습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4,330만 명의 이주 노동자가 1차 봉쇄 기간에 고향으로 돌아갔고, 이 가운데 약 3,500만 명이 걷거나 비정상적인 교통수단을 이용했습니다. 공식 집계만으로 198명이 이동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굶주림과 탈진으로 쓰러진 이들까지 합하면 실제 숫자는 훨씬 많았을 것입니다. 이 장면은 인도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고, 모디 정부의 '준비 없는 충격 요법'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모디의 봉쇄 결정에는 그 나름의 논리가 있었습니다. 인도의 의료 인프라는 14억 인구를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인구 1,000명당 병상 수가 0.5개에 불과했고, 시골 지역의 의료 시설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바이러스가 인도 전역에 퍼지기 전에 시간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큰 규모의 봉쇄를 단행한 것입니다. 모디는 이를 고대 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전쟁에 비유하며,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21일만 견뎌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는 국민들에게 냄비를 두드리고 촛불을 켜라고 요청했고, 수백만 명이 발코니로 나와 그의 요청에 응답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대중의 심리를 결집시키는 능력, 이것은 모디가 가진 강력한 정치적 재능이었습니다.
그러나 봉쇄가 벌어준 시간을 제대로 활용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2021년 봄에 도착했습니다. 델타 변이 바이러스가 인도를 덮쳤습니다. 하루 확진자가 40만 명을 넘어섰고, 병상은 바닥났으며, 산소가 사라졌습니다. 인도 전역에서 산소통을 구하려는 사람들의 절박한 메시지가 소셜미디어를 가득 채웠습니다. 의료용 산소의 일일 수요는 4월 12일 3,842톤에서 5월 초 11,000톤으로 세 배 가까이 폭증했지만, 산소를 운반할 극저온 탱크로리는 전국에 1,200대뿐이었습니다. 마하라슈트라주 나시크의 한 병원에서는 산소 탱크 누출로 22명이 한꺼번에 사망했습니다. 델리에서는 소형 산소통이 원래 가격의 25배인 2만 5천 루피에 암시장에서 거래되었습니다. 화장터는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았고, 갠지스강 위로 시신이 떠올랐습니다.
인도 정부의 공식 코로나19 사망자 수는 약 48만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세계보건기구(WHO)가 2022년 발표한 초과 사망(excess mortality) 추정치는 이를 압도했습니다. WHO는 2020~2021년 인도의 코로나19 관련 초과 사망자가 약 470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공식 통계와 열 배 가까운 차이. 이 숫자는 인도 정부가 격렬히 반박했지만, 화장터와 묘지의 데이터, 지방 행정 기관의 사망 신고 기록이 WHO의 추정을 뒷받침했습니다.
비판의 화살은 모디에게 향했습니다. 2021년 1월,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그는 "인도는 많은 생명을 구한 나라 중 하나"라고 자축했습니다. 그 직후 서벵골 주 선거를 위한 대규모 정치 집회가 열렸고, 힌두교 최대 축제인 쿰브 멜라(Kumbh Mela)에 수백만 명이 갠지스강에 모여 목욕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쿰브 멜라가 열린 우타라칸드주에서는 그 기간 코로나19 전파율이 1,800% 급증했다는 보고가 나왔습니다. 모디 정부가 방역보다 선거와 종교 행사를 우선시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위기 속에서도 모디가 꺼내 든 카드가 있었습니다. '백신 마이트리(Vaccine Maitri, 백신 우정)'입니다. 인도는 '세계의 약국(Pharmacy of the World)'이라 불릴 만큼 거대한 제약 제조 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세계 최대 백신 제조사인 인도혈청연구소(SII)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코비실드(Covishield)'라는 이름으로 대량 생산했고, 바라트 바이오텍이 자체 개발한 '코백신(Covaxin)'도 승인되었습니다. 모디는 이 제조 능력을 외교 무기로 바꿨습니다. 자국민 접종이 아직 시작 단계인 상황에서, 부탄, 네팔, 방글라데시 등 이웃 나라들과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개발도상국 90여 개국에 2억 3천만 회분 이상의 백신을 무상 제공하거나 수출했습니다.
이것은 순수한 인도주의가 아니었습니다. 중국이 자국산 시노백 백신으로 개발도상국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을 때, 인도가 그 대항마로 나선 것입니다. 백신 병마다 모디의 이름이 새겨졌고, 수혜국 정상들은 모디에게 감사의 서한을 보냈습니다. 모디는 이를 인도 고대 철학인 '바수다이바 쿠툼바캄(Vasudhaiva Kutumbakam, 온 세상은 한 가족)'의 실천이라고 포장했습니다. 서구 국가들이 자국 우선주의에 빠져 있을 때, 인도가 글로벌 리더의 책임을 보여줬다는 서사였습니다. 비록 2차 대유행 때 국내 백신 부족으로 수출을 중단하는 곡절을 겪었지만, 백신 마이트리는 인도의 소프트 파워를 크게 끌어올린 외교적 성과였습니다.
국내에서는 디지털 인프라가 위기 대응의 핵심 도구로 작동했습니다. 모디 1기 때 구축한 아다르(Aadhaar) 신분증 시스템과 연동된 디지털 백신 접종 플랫폼 '코윈(CoWIN)'을 통해, 인도는 세계에서 빠른 속도로 10억 회 접종을 달성했습니다(디지털 인디아와 UPI 결제 시스템의 구축 과정에 대해서는 제4장 4.3 참조). 14억 인구의 백신 접종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관리하는 이 시스템은, 모디 정부가 추진해 온 '디지털 인디아'의 실전 성적표가 되었습니다.
경제적 타격을 돌파하기 위해 모디가 내건 슬로건은 '아트마니르바르 바라트(Atmanirbhar Bharat, 자립 인도)'였습니다. 2020년 5월, 그는 GDP의 약 10%에 해당하는 20조 루피(약 2,660억 달러) 규모의 경제부양 패키지를 발표했습니다.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우리가 직접 만들자"는 이 구호는, 한국의 1970년대 '수출입국' 정신과 닮아 있었습니다.
정부는 이 패키지를 통해 현금 살포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8억 명이 넘는 빈곤층에게 무상 곡물을 제공하는 식량 안보 프로그램(PMGKAY)으로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하면서, 동시에 구조개혁의 칼을 빼 들었습니다. PMGKAY는 코로나19 긴급 대응으로 시작되었지만, 정치적 인기에 힘입어 계속 연장되었습니다. 2024년 말, 모디 정부는 이 프로그램을 2028년 12월까지 연장한다고 발표했습니다. 8억 명에게 매달 5킬로그램의 쌀이나 밀을 무상 제공하는 이 프로그램의 연간 비용은 약 2조 루피(약 240억 달러). 세계 최대 규모의 식량 복지 정책이 사실상 영구화된 것입니다. 생산 연계 인센티브(PLI) 제도를 도입해 반도체, 전자, 제약 등 핵심 산업의 국내 생산을 장려했고, 중소기업(MSME)에 담보 없는 대출을 확대했습니다. 코로나19로 드러난 글로벌 공급망의 취약성은, 모디에게 "중국을 떠나 인도로 오라"는 메시지를 전 세계 기업들에게 보낼 명분을 제공했습니다.
이 시기 한국 경제에도 즉각적인 충격이 전해졌습니다. 삼성전자의 노이다 공장과 현대차의 첸나이 공장이 봉쇄로 멈춰 섰고, 글로벌 매출에 타격이 갔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코로나19는 한국 기업들에게 인도의 전략적 가치를 재확인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중국 의존도를 낮추려는 한국 기업들에게 인도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고, 모디 정부는 PLI 제도라는 당근을 흔들며 이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인도는 주요 경제국 중 빠른 V자 반등에 성공했습니다. 2022년 영국을 제치고 세계 5위 경제 대국으로 올라섰고, 2025년에는 일본을 넘어 세계 4위 경제 대국에 등극했습니다. 인구 14억의 내수 시장과 젊은 노동력, 디지털 인프라가 만들어낸 성장 동력이 코로나 이후 본격적으로 가동된 결과였습니다.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위기는, 모디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가져다주었습니다. 수백만 명의 고통이라는 지울 수 없는 그림자, 그리고 '포스트 차이나' 제조 강국으로의 도약이라는 역설적 기회.
모디 2기의 코로나19 대응은 그의 통치 방식의 축소판이었습니다. 과감한 결단과 미흡한 준비,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전략적 민첩성과 취약한 사람들이 먼저 쓰러지는 구조적 잔혹함이 공존했습니다. 그는 백신을 나르고 경제를 부양하며 권력을 다졌지만, 갠지스강 위에 떠오른 시신들은 그 권력이 지켜주지 못한 사람들의 목록이었습니다.
5.3 내부 저항: 농민 시위, 언론 자유 논란
2021년 11월 19일 아침,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TV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이날은 시크교 창시자 구루 나낙(Guru Nanak)의 탄생일, 인도 북부 최대 명절 구루푸라브(Gurpurab)였습니다. 평소의 단호한 어조는 간데없었습니다. 모디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습니다. "진심으로 이 법을 만들었지만, 일부 농민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취임 이후 한 번도 물러선 적 없던 사람이, 처음으로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를 무릎 꿇린 것은 야당도, 국제사회의 압력도 아니었습니다. 트랙터를 몰고 수도로 올라온 농민들이었습니다.
세 개의 법, 하나의 분노
사건은 1년 2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020년 9월, 모디 정부는 코로나19 팬데믹의 혼란 속에서 농업 관련 3개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습니다. 법안의 골자는 농산물 유통 시장을 민간에 개방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부의 논리는 명쾌했습니다. 기존의 정부 관리 도매시장, 즉 만디(Mandi) 체제를 넘어 농민이 기업과 직접 거래할 수 있게 하면 중간 수수료가 줄고 소득이 늘어날 것이라는 계산이었습니다. "메이크 인 인디아가 제조업을 바꿨듯, 농업도 시장의 힘으로 현대화하겠다"는 모디노믹스의 연장선이었습니다.
그러나 펀자브(Punjab)와 하리아나(Haryana)의 농민들에게 이 법안은 '생존에 대한 사형선고'로 읽혔습니다. 핵심 쟁점은 최소지원가격(MSP, Minimum Support Price)이었습니다. MSP는 1960년대 녹색혁명 이후 인도 농업 정책의 뼈대를 이루는 제도로, 연방정부가 밀·쌀 등 주요 농산물에 대해 최소 구매가격을 보장하는 장치입니다. 한국으로 치면 쌀 수매 제도에 해당합니다. 정부 관리 만디가 약화되면, MSP 체계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농민들은 직감했습니다. 가격 결정권이 아다니(Adani)나 릴라이언스(Reliance) 같은 거대 농식품 기업으로 넘어가면, 자신들은 그들의 하청 노동자로 전락할 것이라고.
법안 통과 과정도 분노를 키웠습니다. 상원에서 야당이 표결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고, 구두 투표로 날치기에 가깝게 처리되었습니다. 헌법상 농업은 주(州)의 관할 사항인데, 연방정부가 주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것입니다. 이는 법안의 내용만큼이나, 모디식 일방통행 국정 운영 자체에 대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델리 찰로: "나, 델리로 간다"
2020년 11월, 펀자브와 하리아나에서 수만 명의 농민이 트랙터를 몰고 뉴델리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델리 찰로(Dilli Chalo)', 힌디어로 "델리로 간다"라는 뜻입니다. 경찰은 최루탄과 물대포를 쏘며 진입을 막았지만, 농민들의 행렬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델리 진입이 차단되자, 그들은 싱후(Singhu), 티크리(Tikri), 가지푸르(Ghazipur) 등 수도 외곽의 주요 경계 지점을 점거하고 장기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평범한 시위가 아니었습니다. 농민들은 식량, 침구, 발전기, 세탁기까지 갖추고 일종의 자치 공동체를 건설했습니다. 시크교 전통의 공동 주방 랑가르(Langar)에서는 하루 세 끼가 무료로 제공되었고, 자원봉사 의사들이 진료소를 운영했습니다. 200개가 넘는 농민 단체가 '통합 농민 전선(Samyukta Kisan Morcha)'을 결성하며 카스트, 종교, 지역을 넘어선 연대를 만들어냈습니다. 인류 역사상 큰 규모의 시위 중 하나로 기록될 현장이었습니다.
정부는 강경하게 맞섰습니다. 시위 현장 주변에 쇠못을 박고 콘크리트 바리케이드를 세웠으며, 인터넷을 차단했습니다. 여당 인사들과 친정부 미디어는 시위대를 '칼리스탄(Khalistan, 시크교 분리주의) 테러리스트'나 '반국가 세력'으로 매도했습니다. 2021년 1월 26일, 인도의 공화국 기념일에 농민들의 트랙터 행진이 일부 폭력 사태로 번지고 시위대 일부가 붉은 요새(Red Fort)에 진입하자, 정부는 이를 빌미 삼아 탄압의 강도를 한층 높였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12월의 영하 추위, 6월의 50도 폭염, 코로나19의 위협 속에서 1년 넘게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농민 단체 집계 기준 700명 이상이 추위, 질병, 사고, 자살 등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정부는 이 숫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유가족에 대한 보상도 거부했습니다.
왜 모디는 물러섰는가
그렇다면 1년 넘게 버티던 모디는 왜 갑자기 사과하고 법안을 철회했을까요. 답은 인도 정치의 작동 방식에 있었습니다. 2022년 초, 인도의 '민심 풍향계'로 불리는 우타르프라데시(Uttar Pradesh)주와 펀자브주의 선거가 코앞이었습니다. 농민 시위의 불길이 BJP의 핵심 지지 기반인 우타르프라데시 서부의 자트(Jat) 농민들에게까지 번지고 있었습니다. 이 표심을 잃으면 모디 3기(Modi 3.0)로 가는 길이 끊길 수 있었습니다.
권력은 결국 투표함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모디는 뼈저리게 확인했습니다. 2021년 12월, 의회가 공식적으로 3개 법안을 폐기했고, 농민들은 농성을 해제했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요구한 MSP의 법적 보장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2024년 2월, 농민들은 다시 거리로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경찰이 드론으로 최루탄을 투하했습니다. 법안은 사라졌지만, 갈등의 뿌리는 여전히 땅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2024년 11월, 농민 지도자 자그짓 싱 달레왈(Jagjit Singh Dallewal)이 MSP의 법적 보장을 요구하며 단식 투쟁에 들어갔습니다. 달레왈의 단식은 52일간 이어졌고, 73세 노인의 생명이 위태로워지면서 전국적 관심이 쏠렸습니다. 대법원이 직접 개입하여 단식 중단을 권고하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모디 정부가 농민 법안을 철회한 지 3년이 지났지만, 농민들의 근본적 요구는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습니다.
재갈 물린 펜: 언론 자유의 추락
농민 시위가 도로 위의 저항이었다면, 모디 2기의 또 다른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언론의 입을 막는 일이었습니다.
국경없는기자회(RSF)가 발표하는 세계 언론 자유 지수에서 인도의 순위는 모디 집권 이후 꾸준히 추락했습니다. 2014년 140위였던 순위는 2023년 161위까지 떨어졌고, 2024년에도 159위에 머물렀습니다. 180개국 중 하위권, '심각한(very serious)' 등급입니다. RSF는 인도의 언론 환경을 "비공식적 비상사태(unofficial state of emergency)"라고 표현했습니다.
언론 통제는 여러 층위에서 동시에 작동했습니다. 첫째, 미디어 소유 구조의 재편입니다. 모디 총리와 가까운 재벌들이 주요 언론사를 사들이면서 비판적 목소리가 사라져 갔습니다. 무케시 암바니(Mukesh Ambani)의 릴라이언스 그룹은 70개 이상의 미디어를 소유하며 8억 명의 인도인에게 도달하는 거대 미디어 제국을 구축했습니다. 2022년 말, 가우탐 아다니(Gautam Adani) 그룹이 인도의 대표적 비판 언론이던 NDTV를 인수한 사건은 결정적이었습니다. RSF는 이를 "주류 언론의 다원성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라고 평가했습니다. 인도 시민들은 이런 친정부 미디어를 '고디 미디어(Godi Media)'라고 불렀습니다. '고디'는 힌디어로 '무릎'이라는 뜻인데, '모디(Modi)'와 발음이 비슷합니다. 권력의 무릎 위에 앉은 애완견 언론이라는 조롱이었습니다.
한국 독자에게 이 상황은 낯설지 않을 수 있습니다. 1970~80년대 한국에서도 정부가 언론사를 통폐합하고, 보도 지침을 내려보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인도에서는 국가가 직접 언론을 소유하는 대신, 친정부 재벌이 시장 논리를 빌려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비판적 언론인에 대한 사법적 탄압입니다. 모디 정부는 식민지 시대의 유산인 선동죄와 대테러법인 불법활동방지법(UAPA)을 언론 통제의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케랄라 출신 기자 시디크 카판(Siddique Kappan)은 우타르프라데시주의 집단 성폭행 사건을 취재하러 가다가 체포되어, 테러 공모 혐의로 2년 넘게 수감되었습니다. 팩트체크 매체 '알트 뉴스(Alt News)'의 공동 설립자 모하메드 주베이르(Mohammed Zubair)는 과거 트윗을 문제 삼아 구속되었습니다. 뉴스 포털 '뉴스클릭(NewsClick)'은 중국 자금을 받았다는 혐의로 UAPA 수사를 받았고, 창립자가 구속되었습니다. 취재 자체가 범죄가 되는 나라에서, 기자들은 자기 검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셋째, 외신에 대한 보복입니다. 2023년 1월, 영국 BBC가 2002년 구자라트 폭동 당시 모디의 역할을 다룬 다큐멘터리 "인도: 모디 문제(India: The Modi Question)"를 방영했습니다. 인도 정부는 즉시 유튜브와 트위터에서 해당 영상 링크를 차단하는 긴급 조치를 발동했습니다. 대학 캠퍼스에서 이 다큐를 상영하려던 학생들은 구금되었습니다. 며칠 뒤, 세무 당국이 델리와 뭄바이의 BBC 사무소를 급습하여 강도 높은 조사를 벌였습니다. 비판적 보도에 대한 명백한 보복이었습니다(모디의 안보 민족주의 기조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제4장 4.5 참조).
인도는 인터넷 차단에서도 세계 기록을 세웠습니다. 디지털 권리 단체 '액세스 나우(Access Now)'의 집계에 따르면, 2016년 이후 인도에서 시행된 인터넷 차단 횟수는 700회를 넘었습니다. 카슈미르에서의 장기 차단, 농민 시위 현장에서의 차단, 시험 부정행위 방지를 명목으로 한 차단까지. 5년 연속 세계에서 인터넷 차단을 가장 많이 시행한 나라라는 기록이었습니다. 프리덤하우스(Freedom House)는 인도를 '자유 국가'에서 '부분적 자유 국가'로 강등했습니다.
농민들은 바리케이드를 뚫었습니다. 그들의 트랙터는 입법부의 독주를 멈춰 세웠고, 선거라는 민주적 장치가 권력을 견제할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기, 그 승리를 전할 마이크는 하나둘 꺼지고 있었습니다. 14억 인구의 목소리는 커졌지만, 그 목소리를 전달할 통로는 좁아지고 있었습니다. 모디 2기의 인도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5.4 아다니 사태: 정경유착 의혹
2023년 1월 24일, 뉴욕의 한 사무실에서 보고서 하나가 인터넷에 올라왔습니다. 미국의 공매도 전문 투자사 힌덴버그 리서치(Hindenburg Research)가 작성한 것이었습니다. 제목은 이랬습니다. "아다니 그룹: 세계 3위 부호는 어떻게 기업 역사상 최대의 사기를 저질렀는가." 106페이지에 담긴 폭로는 이후 열흘 만에 1,500억 달러, 한국 돈으로 약 200조 원의 시가총액을 증발시켰습니다. 인도 증시 전체가 휘청였고, 보고서의 충격파는 대양을 건너 뉴델리의 정치판까지 뒤흔들었습니다.
이 사건이 기업 스캔들을 넘어서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다니 그룹의 운명은 모디 총리의 권력과 정확하게 겹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짜이 파는 소년과 다이아몬드 중개상
가우탐 아다니(Gautam Adani)는 대학을 중퇴하고 뭄바이에서 다이아몬드 중개상으로 시작한 인물입니다. 모디와 마찬가지로 구자라트 출신이고, 자수성가했으며, 겸손한 출발점을 자랑스러워합니다. 두 사람의 궤적이 교차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반, 모디가 구자라트 주총리로 재임하던 시절입니다.
모디가 '바이브런트 구자라트(Vibrant Gujarat)' 투자 유치 행사를 열 때, 아다니는 가장 앞줄에서 돈을 대고 사업을 실행하는 파트너였습니다. 모디는 토지를 할당하고 환경 규제를 완화했으며, 아다니는 항만과 발전소를 지었습니다. 제3장에서 살펴본 '구자라트 모델'의 이면에는 이 두 사람의 공생 관계가 있었습니다(제3장 3.3 참조).
2014년 5월, 모디가 총리로 당선되어 뉴델리로 향할 때 그가 탄 비행기의 동체에는 '아다니(ADANI)'라는 글자가 선명했습니다. 총리 당선자가 특정 기업의 전용기를 타고 수도에 입성하는 장면은 인도 정치사에서 전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비판론자들은 이를 두 사람의 관계를 압축하는 한 장의 사진으로 기억합니다.
인프라 제국의 탄생
모디 집권 이후, 아다니 그룹의 팽창 속도는 경이로웠습니다. 항만, 공항, 전력, 석탄, 방산, 친환경 에너지, 그리고 미디어까지. 정부가 공항 민영화를 추진하자, 공항 운영 경험이 전무한 아다니 그룹이 뭄바이를 포함한 6개 주요 공항의 운영권을 독식했습니다. 환경 규제가 완화된 곳에서는 석탄 광산이 승인되었고, 이스라엘 하이파 항구를 인수하며 해외로도 뻗어 나갔습니다. 가우탐 아다니의 자산은 급증하여 한때 세계 부호 순위 3위에 올랐습니다.
비판론자들은 이를 '2A 경제'라고 불렀습니다. A는 아다니(Adani)와 암바니(Ambani)입니다. 모디 정부의 핵심 경제 정책이 이 두 재벌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비판이었습니다. 야당 지도자 라훌 간디(Rahul Gandhi)는 의회에서 모디와 아다니가 함께 찍힌 사진을 들어 보이며 물었습니다. "총리가 된 뒤 아다니의 자산이 어떻게 이렇게 늘었습니까?" 모디는 끝내 아다니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한국 독자에게 이 구도는 익숙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국가가 자원을 특정 기업에 몰아주어 고속 성장을 이끈다는 점에서 한국의 재벌 모델과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의 재벌 성장은 치열한 수출 경쟁을 통해 검증되었지만, 아다니의 성장은 주로 정부 인프라 사업의 독점적 수주에 기반했다는 점입니다. 시장이 아닌 정치적 연줄이 성장 엔진이었다는 의혹, 그것이 아다니 사태의 핵심입니다(제3장 3.3의 정실 자본주의 논의 참조).
힌덴버그의 폭탄
2023년 1월 24일에 공개된 힌덴버그 보고서는 2년간의 추적 조사 결과물이었습니다. 보고서의 핵심은 세 가지로 압축됩니다.
첫째, 아다니 일가가 모리셔스, 아랍에미리트, 카리브해 등 조세 회피처에 수십 개의 페이퍼 컴퍼니(유령 회사)를 설립하고, 이 회사들을 통해 아다니 계열사 주식을 대량 매입하여 주가를 인위적으로 부양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둘째, 부풀려진 주가를 담보로 막대한 대출을 받아 사업을 확장하는 위험한 레버리지 구조를 갖고 있다는 분석이었습니다. 셋째, 인도 증권거래위원회(SEBI)가 대주주 지분율을 75%로 제한하는 규정을 역외 법인을 이용해 우회했다는 의혹이었습니다. 힌덴버그는 아다니 그룹의 주요 상장사가 "85% 이상 과대평가되어 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시장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파괴적이었습니다. 보고서 발표 후 열흘 만에 아다니 그룹의 시가총액은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한 매체의 표현에 따르면, 증발한 금액은 코스타리카 전체 GDP의 두 배에 달했습니다. 아다니 엔터프라이즈가 야심 차게 추진하던 25억 달러 규모의 유상증자는 전격 취소되었고, 가우탐 아다니는 세계 부호 순위 3위에서 단숨에 20위권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씨티그룹은 아다니 채권의 담보 가치를 0으로 책정했고, S&P는 아다니 엔터프라이즈를 다우존스 지속가능성 지수에서 제외했습니다.
"인도에 대한 공격"
아다니 그룹은 413페이지 분량의 반박문을 내놓았습니다. 힌덴버그의 주장을 "맨해튼의 매도프(사기범)"가 쓴 "계산된 거짓말"이라고 일축하면서, 보고서의 진짜 목적은 "특정 회사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인도의 독립성과 성장 스토리에 대한 계산된 공격"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기업 비리 의혹을 국가에 대한 공격으로 치환하는 전략이었습니다.
모디 정부와 BJP도 같은 논리에 올라탔습니다.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야당의 합동조사위원회(JPC) 구성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의회에서는 야당 의원의 마이크가 꺼지고 발언 기록이 속기록에서 삭제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라훌 간디는 아다니 관련 발언을 이유로 명예훼손 유죄 판결을 받아 한때 의원직을 상실하기까지 했습니다.
한편 인도 대법원은 SEBI에 조사를 명령했지만, SEBI의 대응은 미온적이었습니다. 2024년 1월, 대법원은 별도의 특별수사팀(SIT) 구성이 불필요하다며 SEBI의 조사를 신뢰한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2024년 8월, 힌덴버그가 후속 보고서를 통해 SEBI 위원장 자신이 아다니 그룹과 이해충돌 관계에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규제 기관의 독립성 자체가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감시자를 감시할 사람이 없는 구조, 그것이 인도 금융 시장이 마주한 근본적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2024년 11월, 아다니 사태는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미국 법무부(DOJ)가 가우탐 아다니와 그의 조카 사가르 아다니(Sagar Adani)를 뇌물 및 사기 혐의로 기소한 것입니다. 기소장의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아다니 측이 인도 태양광 에너지 계약을 따내기 위해 인도 정부 관리들에게 2억 6,500만 달러(약 3,500억 원) 규모의 뇌물을 제공했다는 것이 핵심 혐의였습니다. 뉴욕 남부지방법원의 기소장에 따르면, 이 뇌물은 인도 여러 주의 전력 구매 계약을 유리하게 체결하기 위한 대가였습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도 별도로 민사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아다니 그룹은 즉각 모든 혐의를 부인했습니다. 가우탐 아다니는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해 결백을 증명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미국 사법 체계 안에서 제기된 이 기소는, 힌덴버그 보고서와는 차원이 다른 무게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공매도 투자사의 보고서는 시장의 판단에 맡길 수 있었지만, 연방 대배심의 기소는 형사 재판으로 이어지는 길이었습니다. 케냐는 아다니 그룹과의 공항 건설 계약을 취소했고, 여러 국제 금융기관이 아다니와의 거래를 재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인도 야당은 즉시 모디 총리에게 해명을 요구했습니다. "총리와 가장 가까운 사업가가 미국에서 뇌물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총리는 왜 침묵하는가." 그러나 모디와 BJP는 이번에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성장 모델의 그림자
아다니 사태가 남긴 질문은 기업 한 곳의 비리 여부를 넘어섭니다. 이것은 모디노믹스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모디의 경제 전략은 '내셔널 챔피언(National Champion)' 모델입니다. 소수의 거대 기업을 국가가 육성하여 인프라를 건설하고 성장을 견인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한국의 발전 경험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이 반도체, 자동차, 조선 등 글로벌 경쟁을 통해 재벌의 역량을 검증받았다면, 아다니의 사업은 대부분 국내 인프라 독점에 기반하고 있었습니다. 경쟁이 아닌 정치적 연줄이 성공의 열쇠인 구조에서는 효율성보다 충성이, 혁신보다 인맥이 보상받습니다.
야당은 이를 '크로니 캐피털리즘(Crony Capitalism, 정실 자본주의)'이라고 불렀습니다. '자립 인도(Atmanirbhar Bharat)'라는 슬로건 아래 추진된 국가 주도 성장이 실제로는 소수 측근 재벌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여기에 모디 정부가 도입한 '선거 채권(Electoral Bonds)' 제도가 불투명한 기업 기부금을 집권당으로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었다는 비판까지 더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아다니 그룹은 살아남았습니다. 글로벌 투자사 GQG 파트너스가 19억 달러를 투자하며 신뢰를 회복시켰고, 주가는 서서히 반등했습니다. 2024년 6월 무렵, 아다니 그룹의 시가총액은 힌덴버그 보고서 이전 수준을 대부분 회복했습니다. 가우탐 아다니도 다시 세계 부호 상위권에 복귀했습니다. 그러나 그해 11월의 미국 기소로 주가는 다시 급락했고, 아다니 그룹은 또 한 번 생존의 기로에 섰습니다.
권력은 때때로 화려한 공항 터미널과 거대한 항만 크레인 뒤에 자신을 숨깁니다. 로버트 카로가 뉴욕의 도로와 다리 뒤에서 로버트 모지스의 권력을 추적했듯, 아다니 사태는 인도의 고속도로와 발전소 뒤에 숨은 권력의 작동 방식을 들여다보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힌덴버그의 보고서에서 시작된 의혹은, 미국 법무부의 기소장으로 옮겨 붙었습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 숫자를 감시하고, 누가 감시자를 감시하는가라는 질문은, 모디 3기를 맞이한 인도가 풀어야 할 무거운 숙제로 남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