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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3장 냉전, 석유, 중동의 화약고
2026년 미국 이란 전쟁과 전 세계의 에너지 위기
3장 냉전, 석유, 중동의 화약고
김경진
제3장 냉전, 석유, 중동의 화약고
3.1 페트로달러 체제의 확립
1971년 8월 15일 일요일 저녁,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그는 미국 달러와 금의 교환을 일방적으로 중단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26년간 유지되어 온 브레턴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 달러를 금에 고정하고 각국 통화를 달러에 고정한 국제통화 질서)가 이 한 번의 발표로 무너졌습니다. 금 1온스를 35달러에 바꿔주겠다는 약속이 사라졌습니다. 달러는 하룻밤 사이에 아무것도 뒷받침하지 않는 종이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명확했습니다. 달러의 가치를 보증하던 금이라는 닻이 없어진 상황에서, 전 세계가 왜 달러를 계속 보유해야 하는지 설명할 근거가 사라진 것입니다. 1973년 2월, 주요국 통화들은 달러에 대한 고정환율을 포기하고 자유롭게 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달러의 가치는 눈에 보이게 떨어졌습니다.
이 위기를 해결한 사람은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국무장관이었습니다. 키신저는 금 대신 달러를 뒷받침할 새로운 상품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석유였습니다.
1974년 6월 8일, 키신저와 사우디아라비아의 파흐드 이븐 압둘아지즈(Fahd ibn Abdulaziz) 왕세자가 워싱턴 블레어 하우스에서 6쪽짜리 합의문에 서명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미국-사우디 경제협력 공동위원회(Joint Commission on Economic Cooperation)' 설립 합의였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행정 체계를 현대화하고, 인프라를 건설하고, 기술을 이전하겠다는 내용이 문서에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합의의 진정한 핵심은 문서에 명시되지 않은 양해에 있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자국의 석유를 미국 달러로만 가격을 매기고 결제합니다. 석유 수출로 벌어들인 막대한 달러를 미국 국채에 재투자합니다. 그 대가로 미국은 사우디 왕가의 안보를 군사적으로 보장하고, 최신 무기를 판매합니다.
이것이 세간에서 '페트로달러(Petrodollar) 체제'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입니다. 이 합의가 공식적인 조약이었는지, 비공식적인 양해였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습니다. 2016년 블룸버그 통신이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정보공개를 청구해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1974년 말에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 원조와 장비를 약속하는 대가로 사우디가 석유 수입의 상당 부분을 미국 국채에 투자하겠다는 비밀 합의가 존재했습니다.
형태가 어떠했든, 결과는 분명했습니다. 1975년에 이르러 석유수출국기구(OPEC, Organization of the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전체 회원국이 석유를 달러로 거래하고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상품의 가격이 달러로 매겨지자, 지구상의 모든 국가는 석유를 수입하기 위해 달러를 확보해야 했습니다. 공장을 돌리려면 석유가 필요하고, 석유를 사려면 달러가 필요합니다. 이 간명한 구조가 미국 달러에 대한 영구적인 글로벌 수요를 만들었습니다.
키신저가 '페트로달러 리사이클링(Petrodollar Recycling)'이라고 이름 붙인 순환 구조도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산유국들은 석유를 팔아 달러를 벌고, 그 달러를 미국 국채에 투자합니다. 미국 정부는 세계 각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이 자금 덕분에 다른 나라라면 감당할 수 없었을 규모의 재정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낮은 금리로 자금을 빌릴 수 있었습니다. 석유를 사기 위해 전 세계가 달러를 보유하고, 달러를 벌어들인 산유국이 다시 미국에 투자하는 자기 강화 순환이 완성된 것입니다.
이 체제는 미국에 전례 없는 금융 패권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이 중동에 영구적으로 관여해야 하는 구조적 속박이 되었습니다. 달러로 석유를 결제하는 산유국 정권들을 지켜야 했고, 페르시아만에서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석유 수송로의 안전을 미 해군이 항시 보장해야 했습니다.
1980년 1월 23일, 지미 카터 대통령이 연두교서(State of the Union Address)에서 이 구조적 속박을 공식 독트린으로 격상시켰습니다. 카터는 의회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페르시아만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려는 어떠한 외부 세력의 시도도 미합중국의 핵심 이익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될 것이며, 그러한 공격은 군사력을 포함한 모든 수단으로 격퇴될 것입니다."
이 한 문장이 이른바 '카터 독트린(Carter Doctrine)'입니다. 국가안보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가 트루먼 독트린의 문구를 본떠 작성한 이 선언은, 페르시아만을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 작전 구역으로 편입시켰습니다. 카터는 이 독트린을 뒷받침하기 위해 신속배치합동기동부대(Rapid Deployment Joint Task Force)를 창설했고, 이 부대는 나중에 미국 중부사령부(CENTCOM, United States Central Command)로 확대 개편됩니다. 오늘날 미국이 바레인, 카타르,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에 군사 기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 독트린의 직접적인 유산입니다.
금에서 석유로. 이 전환은 달러의 패권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미국을 중동이라는 화약고의 영원한 경비원으로 묶어 놓았습니다.
3.2 1973년 아랍 석유 금수
1973년 10월 6일은 유대교에서 가장 엄숙한 날인 '욤 키푸르(Yom Kippur, 속죄일)'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이 중단되고, 상점이 문을 닫고, 대중교통이 멈춥니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바로 이날을 택했습니다. 이집트군은 수에즈 운하를 건너 시나이반도를 향해 밀고 들어왔고, 시리아군은 골란고원을 공격했습니다.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한 기습이었습니다.
초기 전황은 아랍 측에 유리했습니다. 이집트군은 수에즈 운하의 바-레프(Bar Lev) 방어선을 돌파했고, 시리아 탱크 부대가 골란고원 깊숙이 진격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궁지에 몰렸습니다. 닉슨 대통령은 의회에 22억 달러 규모의 이스라엘 긴급 군사 원조를 요청했고, 미국의 대규모 무기 공수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살 국왕은 닉슨에게 경고한 바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원하면 석유 공급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닉슨은 그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1973년 10월 17일,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 Organization of Arab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가 카드를 꺼냈습니다. 유가를 배럴당 3.01달러에서 5.12달러로 인상했습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국가들에 대한 석유 수출을 전면 중단했습니다. 매월 5%씩 생산을 감축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미국, 네덜란드, 포르투갈, 남아프리카공화국, 로디지아가 금수 대상이었습니다.
전쟁은 20일 만에 끝났습니다. 미국의 군사 원조를 받은 이스라엘이 전세를 역전시키고, 유엔 안보리의 정전 결의가 통과되었습니다. 그러나 석유 금수는 5개월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실제로 시장에서 사라진 석유는 전 세계 공급량의 7% 정도였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에 수출하던 양은 하루 약 64만 배럴로, 미국 일일 소비량 1,700만 배럴의 4%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비교적 작은 차질이 일으킨 파장은 산술적 비율을 훨씬 넘어섰습니다.
금수가 다른 힘들과 상호작용하면서 결과가 증폭된 것입니다. 공포가 사재기를 낳았고, 사재기가 부족을 키웠습니다. 12월에 이란 국영석유회사가 경매를 열었을 때, 배럴당 17달러에 입찰이 들어왔습니다. 1973년 말 OPEC은 빈 회의에서 유가를 배럴당 11.65달러로 결정했습니다. 금수 시작 전 3달러이던 유가가 넉 달 만에 네 배로 뛰었습니다. 1974년 3월 파이살 국왕이 금수를 해제했을 때, 가격은 그 수준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300%의 영구적 가격 인상이 고착된 것입니다.
미국의 주유소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이 생겼습니다. 코네티컷의 한 주유소에 "기름 부족! 고객 1인당 10갤런 제한"이라는 팻말이 내걸렸습니다. 당시 미국 자동차들은 공회전 상태에서 시간당 2~3리터의 휘발유를 소모했는데, 기름을 넣기 위해 줄을 서면서 소모되는 양이 하루 약 15만 배럴에 달했다는 추정도 있었습니다. 기름을 넣으려고 기름을 태우는 상황이었습니다. 닉슨 행정부는 휘발유 배급과 번호판 홀짝제를 시행했고, 고속도로 제한속도를 시속 55마일(약 88km)로 낮추었습니다. 네온사인을 끄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경제적 충격은 미국 사회를 깊숙이 뒤흔들었습니다. 1973년 미국 경제는 5.7% 성장했는데, 이듬해에는 0.5% 역성장을 기록했습니다. 실업률은 1973년 10월 4.6%에서 1975년 5월 9%까지 치솟았습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72년 3.4%에서 1974년 12.3%로 뛰었습니다. 물가가 오르는데 경기는 가라앉는, 경제학 교과서에서 최악의 조합이라고 부르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경기침체 속 물가상승)이 미국을 덮쳤습니다.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는 기준금리를 1972년 5.75%에서 1974년 12%까지 올렸지만 인플레이션을 잡지 못했습니다. 결국 폴 볼커(Paul Volcker) 의장이 1980~1981년에 금리를 20%까지 올려서 또 한 번의 심각한 경기 침체를 감수하고 나서야 인플레이션이 꺾이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이 시기를 '영광의 30년(Trente Glorieuses)'의 끝으로 기억합니다. 1945년부터 1973년까지 이어진 전후 번영이 석유 금수를 기점으로 끝났습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1973년 말에 유명한 헤드라인을 뽑았습니다. "미래는 지연될 예정입니다(The Future will be subject to Delay)."
일본은 더 심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석유의 거의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던 일본의 실업률은 1960년부터 1978년까지 평균 1.0%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1980년에 13.5%까지 올랐다는 추정이 있습니다. 미국과 프랑스는 15%, 영국은 23%까지 실업률이 치솟았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이 수치들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기준에 따라 논란이 있지만, 충격의 규모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오일쇼크의 여파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제조업 비용이 급등하면서 산업화 전략이 흔들렸고, 인종차별 정권에 대한 흑인 사회의 불만이 폭발하여 1976년 소웨토 봉기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포르투갈에서는 인플레이션이 독재 정권의 경제적 기반을 허물어, 1974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서방 선진국들은 이 경험에서 교훈을 뽑았습니다. 1974년, 국제에너지기구(IEA, International Energy Agency)가 창설되었습니다. 석유 위기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한 협의체였습니다. IEA 회원국들은 순수입량 90일분 이상의 석유를 비축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미국은 1975년 에너지정책보존법(Energy Policy and Conservation Act)을 통과시켜 전략비축유(SPR, Strategic Petroleum Reserve) 제도를 도입했고, 텍사스와 루이지애나의 거대한 소금 동굴에 원유를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산유국 카르텔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는 움직임도 시작되었습니다. 알래스카 북부의 프루도만(Prudhoe Bay) 유전, 북해 유전, 멕시코만 심해 유전의 개발이 가속되었습니다. 금수 이후 15년 동안 OPEC 바깥 지역의 석유 생산량이 하루 1,400만 배럴이나 증가했습니다. 디트로이트의 대형 자동차 공장들은 기름 먹는 하마 같은 대형차 대신 소형차 생산으로 전환했고, 미국 시장에서 일본 자동차의 점유율은 1976년 9%에서 1980년 21%로 뛰었습니다.
1973년의 금수는 총알 한 발 쓰지 않고 세계 경제를 무릎 꿇린 사건이었습니다. 자원의 흐름을 끊는 것만으로 최강대국의 경제를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에너지 무기화의 첫 번째 실험이었습니다.
3.3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걸프전까지
1978년 가을, 이란의 유전 지대에서 파업이 시작되었습니다. 37,000명의 석유 노동자가 작업을 중단했습니다. 이란의 원유 생산량은 하루 약 580만 배럴에서 150만 배럴로 곤두박질쳤습니다. 당시 세계 석유 생산의 7%에 해당하는 하루 480만 배럴이 시장에서 사라졌습니다.
1979년 1월 16일, 이란의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Mohammad Reza Pahlavi) 국왕이 이란을 떠났습니다. 2월,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가 이슬람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미국의 중동 전략을 떠받치던 두 기둥 가운데 하나가 무너진 것입니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을 '쌍둥이 기둥(Twin Pillar)'으로 삼아 페르시아만의 안정을 유지해 왔는데, 그 한쪽이 하룻밤 사이에 적대 세력으로 돌변했습니다.
실제 공급 차질은 4~5% 수준이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생산을 늘려 일부를 메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가는 1979년 중반 배럴당 13달러에서 1980년 중반 34달러로 두 배 이상 뛰었습니다. 현물 시장에서는 배럴당 50달러에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공급 부족 자체보다 공포가 가격을 끌어올렸습니다. 정유사들과 트레이더들은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을 우려해 원유를 사재기했고, 사재기가 부족을 키우고, 부족이 공포를 키우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1차 오일쇼크에 이은 2차 오일쇼크였습니다.
그리고 1980년 9월 22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전면 침공했습니다. 8년간의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미국의 위치는 복잡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중립이었지만, 이란 혁명으로 중동의 세력 균형이 무너진 상황에서 미국은 이라크 편을 들었습니다. 사담 후세인에게 외교적 지원, 군사 정보, 첨단 기술을 제공했습니다. 이란의 혁명이 중동 전역으로 퍼지는 것을 막겠다는 계산이었습니다. 동시에 이란-콘트라 스캔들에서 드러났듯이, 미국은 이란에도 비밀리에 무기 부품을 팔고 있었습니다. 두 나라가 서로 싸우며 힘을 소진하게 만드는 것이 미국의 실질적 이해에 부합했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글로벌 에너지 시장에 직접적인 위협이 된 것은 1984년부터 본격화된 '유조선 전쟁(Tanker War)' 때문이었습니다. 전체 전쟁 기간 동안 이라크는 283회, 이란은 168회 상선을 공격했습니다.
전개 과정은 이랬습니다. 이라크는 이란의 돈줄을 끊기 위해 이란의 주요 석유 수출항인 카르그 섬(Kharg Island)과 그 주변의 유조선들을 프랑스제 전투기로 공격했습니다. 이란은 보복으로 이라크를 지원하는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조선을 타격했습니다. 1985년에는 이라크 미사일이 6만 톤급 유조선 넵투니아(Neptunia)를 격침시켰습니다. 해상 보험료가 치솟고, 유조선 선주들이 페르시아만 운항을 기피하기 시작했습니다.
1986년 12월, 쿠웨이트 정부가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자국 유조선을 이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소련도 비슷한 요청을 받았고, 쿠웨이트와 소련의 접촉이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가 워싱턴에 전해졌습니다. 레이건 행정부는 소련이 페르시아만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은 기발한 해법을 내놓았습니다. 쿠웨이트의 유조선 11척에 미국 국기를 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깃발 교체(Reflagging)'라고 불리는 이 조치 덕분에, 쿠웨이트 유조선들은 법적으로 미국 선박이 되었고, 미 해군의 호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1987년 7월 24일, '어니스트 윌 작전(Operation Earnest Will)'이 시작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해군 호위 작전이었습니다. 구축함, 프리깃함, 순양함, 해안경비대 함정으로 구성된 편대가 쿠웨이트 유조선을 호위하며 페르시아만을 오갔습니다. 이 작전에 동시에 투입된 미 해군 함정은 30척에 달했습니다.
첫 번째 호위 임무부터 사고가 터졌습니다. 1987년 7월 24일, 미국 깃발을 단 쿠웨이트 유조선 브리지턴(Bridgeton, 원래 이름 알 레카)이 이란 혁명수비대(IRGC)가 전날 밤에 깔아놓은 기뢰에 걸렸습니다. 선체에 구멍이 뚫렸지만 침몰하지는 않았습니다. 미국은 기뢰전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습니다. 소해정(Minesweeper, 기뢰를 제거하는 함정)을 미리 배치하지 않은 것이 치명적 실수였습니다.
그보다 두 달 앞선 1987년 5월 17일에는 이라크 전투기가 페르시아만을 순찰하던 미 해군 프리깃함 USS 스타크(Stark)에 엑소세(Exocet) 대함 미사일 두 발을 발사했습니다. 37명의 미국 수병이 사망했습니다. 이라크는 이란 유조선으로 오인했다며 사과했지만, 전쟁터의 안개 속에서 실수 한 번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1988년 4월 14일, 미 해군 프리깃함 USS 새뮤얼 B. 로버츠(Samuel B. Roberts)가 이란 기뢰에 의해 선체가 관통되고 용골(Keel, 선박의 척추에 해당하는 구조물)이 부러지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함정은 가까스로 침몰을 면했습니다. 회수된 기뢰의 일련번호가 이전에 이란 바지선에서 압수한 기뢰와 일치한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4일 후인 4월 18일, 미국은 '프레잉 맨티스 작전(Operation Praying Mantis)'을 개시했습니다. 미 해병대와 해군이 이란의 해상 석유 플랫폼 두 곳을 파괴하고, 이란 프리깃함 한 척을 격침시키고, 고속정 세 척 이상을 침몰시켰습니다. 이란 해군은 이날 하루 만에 전력의 상당 부분을 잃었습니다.
그해 7월 3일, USS 빈센스(Vincennes) 순양함이 이란 민항기 655편을 전투기로 오인하고 격추했습니다. 290명의 민간인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이 비극은 역설적으로 전쟁 종식을 앞당겼습니다. 이미 육지에서 이라크에 밀리고 바다에서 미국에 패한 이란 지도부는 1988년 7월 유엔 안보리 결의 598호를 수용하고 정전에 합의했습니다.
유조선 전쟁이 남긴 유산이 하나 있습니다. 호르무즈 해협의 극단적 취약성을 깨달은 사우디아라비아가 페르시아만을 거치지 않는 대체 수송로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동쪽 페르시아만 연안에서 서쪽 홍해의 얀부(Yanbu) 항구까지 1,200킬로미터에 달하는 동서 파이프라인(Petroline)이 그것입니다. 해협이 막히면 석유를 빼낼 길이 없다는 두려움이 이 거대한 인프라를 낳았습니다. 이 파이프라인이 2026년 호르무즈 봉쇄 사태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지는 제14장에서 다루겠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난 지 2년 만인 1990년 8월 2일, 사담 후세인이 다시 움직였습니다. 이번에는 쿠웨이트를 침공한 것입니다. 이라크군은 수 시간 만에 쿠웨이트를 점령했습니다.
침공의 배경에는 석유가 있었습니다. 8년간의 이란 전쟁으로 빚더미에 올라앉은 이라크는 쿠웨이트에 140억 달러의 전쟁 채무를 탕감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거부당했습니다. 후세인은 쿠웨이트가 루마일라(Rumaila) 유전에서 이라크 측 석유를 빼돌리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쿠웨이트가 OPEC 생산 쿼터를 초과해 하루 190만 배럴을 생산하면서 유가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불만도 있었습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장악하면 세계 석유 매장량의 상당 부분이 한 독재자의 손에 넘어가고,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위협받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카터 독트린이 작동할 순간이었습니다.
1990년 8월 이라크의 침공과 함께 유가가 움직였습니다. 배럴당 17달러이던 유가가 10월까지 36달러로 두 배 이상 뛰었습니다. 조지 H.W. 부시 대통령은 28개국의 다국적군을 결성했습니다. 미군 50만 명 이상이 사우디아라비아에 배치되었습니다.
1991년 1월 16일, 연합군의 공습이 시작되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공습 개시 당일 밤, 전략비축유의 긴급 방출을 승인했습니다. 미국 역사상 전쟁을 이유로 SPR을 방출한 첫 번째 사례였습니다. 3,375만 배럴 방출이 계획되었고, 세계 석유 공급이 안정될 것이라는 신호가 시장에 전달되었습니다. 효과는 즉각적이었습니다. 전쟁 첫날 유가가 오히려 급락한 것입니다. 실제로 최종 방출 규모는 1,730만 배럴로 축소되었습니다. 시장이 안정되었기 때문입니다.
2월 23일 시작된 지상전은 100시간 만에 끝났습니다. 이라크군 8만 명이 항복했고, 3만 명이 전사했습니다. 그러나 후퇴하는 이라크군이 벌인 일은 전쟁의 결과보다 오래 기억되었습니다.
이라크군은 쿠웨이트의 유정에 폭약을 설치하고 불을 질렀습니다. 605개에서 732개 사이의 유정이 파괴되었습니다(추정치는 출처마다 다릅니다). 쿠웨이트 전체 유정의 약 85%에 해당하는 수입니다. 하루에 500만~600만 배럴의 원유와 7,000만~1억 세제곱미터의 천연가스가 불에 타서 사라졌습니다.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주변 지역의 기온이 정상보다 약 5.5도(화씨 10도) 낮아졌습니다. 그을음과 산성비 구름은 쿠웨이트에서 800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퍼졌고, 터키, 불가리아, 파키스탄에서도 검출되었습니다.
소방관들이 도착했을 때, 유정 주변에는 이라크군이 매설한 지뢰가 가득했습니다. 군의 지뢰 제거 작업이 끝나야 화재 진압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유정의 불이 꺼진 것은 4월, 마지막 유정이 봉쇄된 것은 11월 6일이었습니다. 8개월 넘게 불이 탄 것입니다. 쿠웨이트 석유회사의 화학 엔지니어 사라 악바르(Sara Akbar)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해방 축제에 참가하지 못했다고. 자신의 산업 전체가 불타고 있었으니까요.
이라크군은 불만 지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1991년 1월 23일, 시아일랜드 해상 석유터미널의 밸브를 열어 페르시아만에 300만 배럴의 원유를 쏟았습니다. 1989년 엑슨 발데즈 사고 유출량의 12배에 달하는 양이었습니다. 연합군 전투기가 급유 시설을 폭격해서 유출을 중단시키기까지 나흘이 걸렸습니다.
걸프전은 석유가 전쟁의 원인이자 무기이자 목표물이 되는 전체 순환을 한 전쟁 안에서 보여주었습니다. 석유 수입에 대한 분쟁이 침공의 원인이 되었고, 석유 수송로를 보호하기 위해 다국적군이 투입되었고, 패배한 군대는 후퇴하면서 석유 인프라를 파괴했습니다. 전략비축유가 처음으로 실전에서 방출되었고, 유가가 전쟁의 흐름에 따라 급등하고 급락했습니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 1980년대의 유조선 전쟁, 1991년 걸프전. 이 연쇄적인 위기들은 하나의 사실을 반복해서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페르시아만의 석유를 안전하게 통제하고 수송할 수 있는 능력이 곧 글로벌 패권의 핵심 조건이라는 것. 미국은 달러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산유국들의 안보를 보장해야 했고, 그 보장을 이행하기 위해 중동의 전쟁 속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2026년, 그 길의 끝에서 또 한 번의 위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호르무즈 해협이 닫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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