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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에필로그: 항아리 속 호텔에서 보낸 밤
에필로그: 항아리 속 호텔에서 보낸 밤
카헤티의 어느 와이너리에서 나는 크베브리 모양의 방에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거대한 포도주 항아리, 그 형상을 본뜬 숙소였습니다. 둥근 천장이 포도주 빛깔로 물들어 있었고, 창문 너머로 끝없는 포도밭이 펼쳐졌습니다. 8,000년 전 이 땅의 누군가가 포도를 으깨어 항아리에 넣었을 때, 인류 최초의 와인이 태어났습니다. 나는 그 시간의 연장선 위에 누워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코카서스의 별이 쏟아졌습니다. 도시의 불빛이 없는 이곳에서 은하수는 실제로 강처럼 흘렀습니다. 와인 한 잔을 손에 들고 테라스에 앉았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불 어왔습니다. 낮에는 30도를 넘던 기온이 밤에는 15도까지 떨어집니다. 이 일교차가 포도에 당도를 선물합니다. 자연이 와인을 빚는 방식입니다.
조지아는 작은 나라입니다. 한반도의 3분의 1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좁은 땅에 12개의 기후대가 공존합니다. 흑해 연안 바투미에서는 아열대의 습기가 피부에 감기고, 카즈베기의 고산지대에서는 만년설이 빛납니다. 카헤티의 건조한 평원 에서는 포도가 익어가고, 스바네티의 깊은 골짜기에서는 안개가 마을을 감쌉니다.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 안에 사계절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이 풍요로움이 축복이자 저주였습니다.
기름진 땅, 온화한 기후, 동서를 잇는 길목. 모두가 탐내는 조건입니다. 페르시아가 왔고, 몽골이 왔고, 오스만이 왔고, 러시아가 왔습니다. 조지아인들은 싸웠습니다. 지고, 일어서 고, 다시 싸웠습니다. 수프라 연회에서 올리는 건배사 중에는 반드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기리는 순서가 있습니다. 잔을 비우는 손끝에 수천 년의 저항이 스며 있습니다.
트빌리시를 떠나는 날 아침, 유황 온천 지구를 마지막으로 걸었습니다.
아바노투바니의 돔형 목욕탕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황 냄새. 기원전부터 이 물에 몸을 담갔 다는 사람들. 러시아 시인 푸시킨도, 프랑스 소설가 뒤마도 이 온천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나는 뜨거운 물속에서 2주간의 여정을 되짚었습니다.
바투미의 야자수와 카지노 불빛. 군사도로의 아찔한 절벽과 구름 위의 교회. 시그나기 언덕에서 내려다본 알라자니 계곡의 포도밭. 고리의 스탈린 생가 앞에서 느낀 복잡한 감정. 트빌리시 구시가지 골목에서 들려오던 다성 합창의 잔향.
그리고 어디서나 만난 사람들.
"조지아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말하며 와인을 따라주던 와이너리 주인. "러시아는 싫지만 러시아어는 편하다"고 솔직하게 말하던 택시 기사. "유럽에 가고 싶다"며 시위 사진을 보여주던 대학생. 그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조지아인들은 손님을 신이 보낸 선물이라고 여깁니다.
'스투마리 기비스티아 아리스'(სტუმარი ღვთისგან არის). 손님은 신에게서 왔다. 이 말을 여행 내내 들었습니다. 낯선 이방인에게 집을 열고, 식탁을 차리고, 잔을 채워주는 사람들. 그 환대의 무게가 가슴에 남았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코카서스 산맥이 구름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만년설을 인 봉우리들, 그 사이로 난군사도로, 그리고 저 너머 어딘가에서 와인을 빚고 있을 사람들. 나는 다시 오겠다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어떤 여행지는 사진으로 남고, 어떤 여행지는 가슴에 남습니다.
조지아는 후자였습니다. 8,000년 와인의 향, 33개 알파벳의 곡선, 다성 음악의 화음, 수프라 연회의 건배사, 그리고 강대국 사이에서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 이 모든 것이 뒤섞여 하나의 감정이 되었습니다. 그리움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항아리 속에서 보낸 그 밤, 별을 올려다보며 생각했습니다.
와인은 시간을 담는 그릇입니다. 크베브리 안에서 포도는 천천히 발효하고, 세월이 지나 비로소 와인이 됩니다. 조지아라는 나라도 그렇습니다. 5,000년의 역사가 땅속에서 숙성되 어, 지금 이 순간에도 천천히 익어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다시 그 항아리 방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코카서스의 별 아래서, 한 잔의 와인과 함께
김경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