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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서재] 1장 유랑하는 소년
1장 유랑하는 소년
제1부 제국의 건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아니라, 패배를 딛고 일어선 자의 기록이다. 젠슨 황의 삶은 그 진실을 증명한다.
타이난의 햇살 아래에서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태어났을 때, 그 누구도 이 허약한 아이가 지중해 전체를 호령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젠슨 황의 탄생도 그러했습니다. 1963년 2월 17일,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에서 한 남자아이가 세상에 첫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중국식 이름으로 황런쉰(黃仁勳), 훗날 세계가 젠슨 황이라 부르게 될 이 아이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 황싱타이는 정유 공장에서 일하는 화학 엔지니어였습니다. 어머니 뤄차이슈는 초등학교에서 아이 들을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 두 사람은 대만의 전통 언어인 민난어를 모국어로 사용했고, 근면과 교육을 삶의 기둥으로 삼는 전형적인 대만 가정을 꾸리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족은 대만 남부의 고도(古都) 타이난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타이난은 오래된 도시였습니다. 붉은 벽돌로 지은 사원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고, 향냄새가 골목마다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노점상들의 외침과 자전거 행렬이 거리를 채웠고, 사람들의 삶은 소박하면서도 활기찼습니다. 어린 젠슨에게 타이난은 따뜻한 햇살과 가족의 사랑으로 가득한 세상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이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젠슨이 다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가족은 대만을 떠나야 했습니다. 목적지는 태국의 수도 방콕이었습니다. 정유 공장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어린 젠슨과 그의 형은 낯선 열대의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방콕에서의 생활은 타이난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습하고 뜨거운 공기, 낯선 언어와 음식, 그리고 새로운 문화. 젠슨은 방콕의 루암루디 국제학교에 다니며 영어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갔습니다. 가족은 약 4 년 동안 방콕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이 작은 가족을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 후반, 베트남 전쟁의 그림자가 동남아시아 전역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전쟁의 포화는 점점 태국 국경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미국 공군의 폭격기들이 캄보디아와 라오스 상공을 날아다녔고, 태국 내부 에서도 정치적 불안과 군부 쿠데타가 이어졌습니다. 거리에는 군인들이 오갔고, 공기 중에는 불안이 감돌 았습니다.
젠슨의 아버지는 직감했습니다. 이곳은 아이들을 키울 곳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몇 해 전 미국으로 연수를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에어컨 제조 회사 캐리어(Carrier)의 뉴욕 공장에서 받은 직업 훈련 프로그램 이었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눈에 비친 미국은 가능성의 땅이었습니다. 넓은 대륙, 자유로운 공기, 그리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기회. 아버지는 그때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언젠가 내 아이들을 저곳으로 보내 겠다고.
어머니 역시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영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미국에서 살아남으려면 영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두꺼운 영어 사전을 펼쳤습니다. 매일 무작위로 열 개의 단어를 골라 아이들에게 읽게 하고, 외우게 하고, 뜻을 설명하게 했습니다.
어머니 자신도 그 단어들의 정확한 발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뜻이 무엇인지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 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포기하지 않도록 다독였습니다. 그것은 언어 교육이라기보다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젠슨은 훗날 이 시절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영어를 전혀 모르셨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 영어를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젠슨은 그 비결이 어머니의 집요함과 헌신이었다고 말합니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너는 할 수 있다", "시험을 잘 볼 것이다"라고 끊임없이 말해주었습니다. 그 말들은 근거 없는 격려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이의 마음속에 자신감이라는 씨앗을 심는 행위였습니다. 훗날 젠슨 황이 수많은 불가능에 도전하며 "이게 얼마나 어렵겠어?"라고 되뇌게 된 것은, 바로 이 시기 어머니로부터 받은 믿음 덕분이었습니다.
아홉 살, 태평양을 건너다
전쟁의 불길이 태국 국경 가까이 다가오자, 젠슨의 부모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이들만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족 모두가 함께 이주할 여건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돈도, 비자도, 정착할 기반도 부족했습니다.
부모는 뼈를 깎는 심정으로 결단했습니다. 두 아들을 먼저 미국으로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당시 젠슨은 아홉 살, 형은 열 살이었습니다. 영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린 두 형제가, 보호자도 없이 태평양을 건너야 했습니다.
1973년, 젠슨과 형은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구름과 바다를 바라보며, 소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두려웠을 것입니다. 막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심어준 희망의 씨앗이 가슴 한구석에서 작은 싹을 틔우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미국 워싱턴주 타코마에는 젠슨의 삼촌이 살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아이들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 친척에게 연락을 취했고, 아이들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삼촌과 숙모는 갓 이민 와서 자리를 잡아가던 중이었습니다. 형편이 넉넉지 않았고, 어린 조카 두 명을 돌볼 여력도 충분치 않았습니다.
삼촌은 조카들이 다닐 학교를 수소문했습니다. 외국인 학생을 받아줄 수 있는 기숙학교를 찾아야 했습니다. 부모님이 보내줄 수 있는 학비는 빠듯했습니다. 그들은 미국에 아이들을 보내기 위해 가진 것 거의 전부를 팔았습니다.
마침내 한 학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켄터키주의 오니다 침례 학교(Oneida Baptist Institute). 팜플렛에 실린 사진과 설명은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삼촌은 이곳이 명문 기숙학교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동부의 명문 사립 고등학교들과 비슷한 곳이리라 짐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오니다 침례 학교는 명문 기숙학교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미국 정규 교육 체계에서 이탈한 아이들, 문제를 일으킨 청소년들, 갈 곳 없는 소년들을 받아들여 교화하는 곳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소년원과 대안학교의 경계 어딘가에 있는 학교였습니다. 켄터키주 클레이 카운티(Clay County)에 자리 잡은 이 학교는, 당시 미국에서 손꼽히는 가난한 지역에 있었습니다.
젠슨이 도착했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험악한 분위기의 기숙사였습니다. 기숙사 방에는 문도 없었고, 잠금장치도 없었습니다. 서랍조차 갖춰지지 않은 방들이 즐비했습니다. 학생들 대부분이 담배를 피웠고, 주머니에는 칼을 하나씩 가지고 다녔습니다.
젠슨은 형과 함께 기숙사에 배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젠슨은 너무 어렸습니다. 학교의 정규 수업을 받기에는 나이가 모자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젠슨은 학교 본관이 아닌, 인근의 오니다 초등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작은 체구에 긴 머리, 억양이 강한 영어, 그리고 동양인 외모. 이 모든 것이 그를 눈에 띄게 만들었 고, 괴롭힘의 표적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켄터키의 기숙학교에서 배운 것들
오니다에서의 첫날 밤, 젠슨은 자신의 룸메이트를 만났습니다. 열일곱 살의 백인 청년이었습니다. 나이 차이가 여덟 살이나 났습니다. 그 형은 기숙사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온몸이 문신으로 뒤덮여 있었고, 칼에 베인 상처 자국들이 군데군데 흉터로 남아 있었습니다. 형은 자신의 셔츠를 걷어 올려 그 상처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아홉 살 소년의 눈에 비친 이 광경은 공포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로마 역사에서 갈리아의 야만족을 처음 마주한 로마 병사들이 느꼈을 두려움과 비슷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젠슨에게는 도망칠 곳이 없었습니다. 부모님은 태평양 건너편에 있었고, 국제전화 요금은 너무 비쌌습니다. 울며불며 데려가 달라고 할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오니다 침례 학교에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모든 학생은 매일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학교는 관리인을 고용하지 않았습니다. 청소와 시설 관리, 농장 일까지 모두 학생들의 몫이었습니다. 젠슨의 형에게는 인근 담배 농장에서 일하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어린 젠슨에게는 어떤 일이 배정되었을까요. 화장실 청소였습니다.
매일, 젠슨은 남자 기숙사의 화장실을 닦아야 했습니다. 백 명이 넘는 거친 소년들이 사용하는 변기를 문 지르고, 바닥을 쓸고, 악취 나는 오물을 치웠습니다. 아홉 살 소년에게 이것은 굴욕적인 경험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젠슨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냈습니다. 훗날 이 경험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나는 그 누구보다 많은 변기를 닦았을 것입니다.”
이 시절의 경험은 젠슨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겼습니다. 어떤 일도 자신보다 아래에 있지 않다는 것. 하찮아 보이는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 해내면 그것이 곧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라는 것. 훗날 그가 3조 달러 기업의 수장이 되었을 때에도, 그는 이 태도를 잃지 않았습니다. 직원들과 함께 카페테리아에서 식사하고, 화장실이 더러우면 직접 치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기숙사 생활은 생존 그 자체였습니다. 젠슨은 자주 괴롭힘을 당했고, 구타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인종차별적인 말을 내뱉었고, 작고 약한 동양인 소년을 손쉬운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2012년, 젠슨은 미국 공영 라디오 NPR과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아이들은 정말 거칠었습니다. 모두 주머니에 칼을 가지고 다녔고, 싸움이 나면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다쳤습니다.”
하지만 젠슨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상황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첫 주에는 다른 아이들 틈에 끼기 위해 담배를 피워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곧 아홉 살다운 경제적 판단을 내렸습니다. 담배 살 돈으로 매점에서 파는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금연 했습니다.
젠슨은 자신만의 생존 전략을 찾아냈습니다. 문신투성이 룸메이트와의 관계가 그 출발점이었습니다. 젠슨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덩치 크고 무시무시해 보이는 그 형이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열일곱 살의 문맹 청년. 젠슨은 그에게 제안했습니다.
"제가 글 읽는 법을 가르쳐 드릴게요.”
대신 젠슨이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보호였습니다. 형은 젠슨을 괴롭히는 아이들로부터 지켜주기로했습니다. 단순 거래가 아니었습니다. 서로가 가진 결핍을 채워주는 협력이었습니다. 젠슨은 매일 밤 형에게 알파벳을 가르쳤고, 책을 읽어주었습니다. 형은 그 대가로 젠슨에게 벤치프레스 하는 법을 알려주었 고, 기숙사에서 그를 보호해주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젠슨은 깨달았습니다. 겉모습이 거친 사람이라도 그 내면에는 배우고 싶어 하는 열망이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다가가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면,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과도 친구가될 수 있다는 것을. 이것은 훗날 그가 기업을 경영하며 다양한 사람들과 협력하는 데 중요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오니다에서 젠슨이 발견한 또 하나의 보물은 운동이었습니다. 탁구를 배웠고, 수영팀에 합류했습니다. 작은 체구였지만, 탁구대 앞에서는 신체적 열세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탁구는 힘이 센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 아니었습니다. 빠르게 판단하고, 정확하게 움직이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습니다.
젠슨은 탁구에 몰입했습니다.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공의 회전을 계산하며, 승부의 흐름을 주도하는 법을 익혔습니다. 수영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매일 밤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를 반복하며 체력을 길렀습니다. 열네 살이 되었을 때, 젠슨은 미국의 유명 스포츠 잡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ports Illustrated)'에 실릴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부모님과의 소통은 테이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국제전화 요금이 너무 비쌌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은 저렴한 카세트 녹음기를 사서 아이들에게 보내주었습니다. 젠슨과 형은 한 달 동안 있었던 일들을 테이프
에 녹음해서 방콕으로 우편으로 보냈습니다. 부모님은 그 테이프 위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덮어 녹음해서 다시 켄터키로 보냈습니다. 같은 테이프가 태평양을 오가며 가족의 유대를 이어주었습니다.
어느 날, 젠슨은 학교에서 근처 식당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맥도날드였습니다. 아홉 살 소년의 눈에 비친 맥도날드는 경이로운 세계였습니다. 번쩍이는 조명, 상자에 담겨 나오는 음식, 그리고 맛있는 햄버 거. 젠슨은 부모님에게 보내는 테이프에 이렇게 녹음했습니다.
"엄마, 아빠, 오늘 정말 놀라운 식당에 갔어요. 온 곳이 환하게 빛났어요. 마치 미래 같았어요. 음식이 상자에 담겨서 나왔고, 햄버거가 정말 맛있었어요.”
훗날 젠슨은 이 일화를 떠올리며 웃었습니다. 당시의 그에게 맥도날드는 단순한 패스트푸드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풍요로움과 가능성을 상징하는 '미래의 맛'이었습니다.
오니다에서의 2년은 젠슨 황이라는 인간의 뼈대를 형성한 시간이었습니다. 2002년, 젠슨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켄터키에서의 생활을 다른 어떤 시절보다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그 기억들은 고통스러운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그를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바닥을 치는 경험은 사람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 바닥을 박차고 튀어 오릅니다. 젠슨은 화장실 바닥에서부터 일어선 사람이었습니다.
2년 후, 부모님이 마침내 미국으로 이주해 왔습니다. 오리건주 비버튼에 자리를 잡은 가족은 형제를 켄터 키에서 데려왔습니다. 가족이 다시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젠슨과 형은 오니다를 떠나 오리건주 알로하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오리건에서의 생활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민자 가정의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신문 광고를 뒤져가며 일자리를 구했고, 어머니는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했습니다. 임대한 가구가 부서졌을 때 어머니가 지었던 망연자실한 표정을, 젠슨은 오랫동안 잊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가족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젠슨은 학업에 매진했고, 두 학년을 월반하여 열여섯 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탁구에서도 전국 랭킹에 오를 만큼 실력을 키웠습니다. 수학과 과학, 컴퓨터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재능을 갈고닦았습니다.
켄터키의 거친 겨울바람과 기숙사의 차가운 공기는 아홉 살 소년을 단단하게 제련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유랑하는 소년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작은 전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세상은 불공평하고 거칠지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버티며 실력을 갈고닦는 자에게는 반드시 기회가 온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훗날 젠슨 황은 스탠퍼드 대학의 학생들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충분한 고통과 시련을 겪기를 바랍니다. 위대함은 재능에서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고통을 견디는 데서 옵니다.”
그 말은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켄터키의 화장실에서 변기를 닦던 소년, 문신투성이 형에게 글을 가르치던 소년, 맥도날드 햄버거에 감동하던 소년. 그 모든 경험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젠슨 황을 만들었습니다.
2019년, 젠슨 황은 자신이 다녔던 오니다 침례 학교에 200만 달러를 기부했습니다. 그 돈으로 '젠슨 황홀'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지어졌습니다. 여학생들을 위한 기숙사이자 교실로 사용되는 시설이었습니다. 한때 변기를 닦던 소년이, 이제는 다른 아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후원자가 된 것입니다.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도 젊은 시절 수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권력 투쟁, 암살 위협, 건강 문제 까지. 그러나 모든 역경을 딛고 일어나 지중해 세계를 평화롭게 다스리는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젠슨 황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이난에서 방콕으로, 방콕에서 켄터키로, 켄터키에서 오리건으로. 유랑하던 소년은 매번 새로운 환경에 던져졌지만, 그때마다 적응하고, 배우고, 강해졌습니다.
유랑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그 유랑이 가르쳐준 교훈들은 이제 막 시작될 거대한 여정의 나침반이 되었습니다. 소년은 알았습니다. 세상 어디에 던져져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살아남는 것을 넘어, 자신만의 왕국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을.
타이난에서 켄터키까지, 소년이 건너온 것은 태평양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였습니다.













